한정훈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조만간 한국 기업들은 EU에 가전제품을 수출할 때에도 탄소배출에 따른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직 EU 내 관련 입법 절차가 완료된 것은 아니지만, 지난 9월 중순 유럽의회가 역내 수입품에 대한 탄소배출 규제를 한층 강화하는 입장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철강과 알루미늄을 주요 부품으로 하는 세탁기를 비롯한 일부 가전제품에도 탄소 가격이 붙게 된다.

EU가 수입품의 탄소배출에 가격을 부과하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2023년 수립되었다. EU는 이를 통해 엄격한 역내 탄소규제가 야기하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하나는 EU 내 탄소배출 감소와 달리 전 지구적 탄소감축은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역내 탄소규제가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는 '탄소누출'의 유인을 증가시키는 문제이다. 탄소집약도가 높은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비료, 전력, 수소 등 6개 분야의 제품을 규제 대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탄소국경조정제도였다. 해당 제도는 2026년부터 확정기간이 시작되어 EU 수입업자는 2026년 수입분부터 제품 생산과정의 탄소배출량을 신고하고 내년 9월까지 이에 상응하는 인증서(certificate)를 최초로 구입, 제출할 예정이다.



최근 EU 내 논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028년부터 규제 품목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기존의 6개 규제 분야의 제품을 재료로 사용한 후방제품(downstream products)이 그 대상이다. 유럽집행위원회가 작년 12월 세탁기를 포함한 180개 후방제품을 규제 대상에 추가할 것을 제안하였고, 유럽의회가 올해 457개 제품으로 확대한다는 심의를 마친 것이다. 최종 입법까지는 각료이사회와의 협의가 남아 있지만 하나의 정책적 방향은 분명하다. 탄소국경조정제도 도입 초기 예상되었던 일정보다 빠르고 광범위하게 규제 대상 산업과 제품의 확대하겠다는 시도이다.

이러한 EU의 변화가 한국에 상당한 경제적, 기술적 부담이 될 것은 자명하다. 탄소배출량에 따른 추가비용은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낮추며, 탄소배출량을 정확하게 측정하고 검증하는 시스템 구축과 배출량 감축을 위한 설비와 기술 투자 비용도 증가할 것이다. 특히 EU의 측정, 검증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상당한 투자를 하고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 더군다나 이러한 부담은 조만간 광범위한 후방제품 생산 영역으로 확산될 수 있다.

물론 한국 기업들이 EU 수출을 줄이고 새로운 시장 개척으로 대응할 수 있다. 그러나 안정적인 새로운 수출시장을 확보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또한, 세계 주요 시장에서 탄소 규제가 확대된다면 시장을 옮기는 것만으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탄소배출을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하고 효율적으로 감축하는지가 수출기업의 미래 국제경쟁력을 좌우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사회는 EU의 탄소 규제 강화에 비교적 신속하게 대응해 왔다. 철강업계를 중심으로 한 민간 부문의 노력과 중소 수출기업을 지원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보조를 맞췄다. 산업통상부, 기후에너지환경부, 중소벤처기업부, 관세청 등 정부 부처 역시 공동으로 13차례에 걸친 합동설명회를 개최하고, 실무 매뉴얼을 통해 배출량 산정과 검증, 인증서 구매 등에 대한 지침도 제공하였다.

그러나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신속한 대응이 곧 가장 효과적인 대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규제가 나올 때마다 뒤따라가며 적응하는 방식만으로는 갈수록 강화되는 국제 탄소 규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 후방제품으로의 규제 확대 논의가 이를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한국이 철강과 알루미늄 등 직접 규제 대상 산업의 대응에 집중했다면, 후방제품으로의 규제 확대는 한국 사회에 광범위한 공급망 재조정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부여할 것이다. 규제가 만들어진 뒤 대응책을 마련하는 수세적 대응만으로는 한국 제조업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기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탄소국경 시대에 한-EU 관계는 과거와 달라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질문이 'EU의 규제에 한국 정부와 기업이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였다면, 이제는 '탄소중립 시대를 앞두고 한국과 EU는 어떤 산업 질서를 함께 만들어 갈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탄소배출의 측정과 검증, 저탄소 기술개발과 국제표준화 등에서 한국이 EU의 규칙에 사후적으로 적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규칙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체적 전략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EU에 수출하는 세탁기에 탄소가격이 붙는다는 것은 단순히 가전제품의 수출비용이 조금 더 늘어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제품의 가격과 품질은 물론 탄소배출량이 국제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신호다. 개별적인 EU 규제에 대한 대응을 넘어 탄소국경 시대를 내다보는 한-EU 관계에 대한 장기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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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훈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서울대 EU센터의 센터장을 맡고 있으며, 국가미래전략원의 민주주의클러스터 연구팀을 이끌고 있다. 미국 뉴욕주의 로체스터 대학에서 유럽의회정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비교정치적 시각에서 한국의 선거와 의회정치를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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