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노벨문학상은 캐나다 출신의 시인이자 고전학자인 앤 카슨(Anne Carson)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은 "고전 전통과 유희적인 대화를 나누며 현대 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 대담하고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선정 이유로 밝혔다. 카슨은 지난 40여년간 시와 산문, 학술 에세이와 번역, 시각 예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허물어 온 작가다.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인간보다 훨씬 더 매끄럽고 정교한 문장을 순식간에 조립해 내는 오늘날, 한림원이 '장르의 파괴자'인 앤 카슨을 호명한 것은 의미가 있다. 특히 그녀의 이름을 세계 문학사에 뚜렷하게 각인시킨 1998년작 『빨강의 자서전(Autobiography of Red)』은 거대언어모델(LLM)과 알고리즘의 시대를 숨 가쁘게 통과하고 있는 우리에게 '인간 고유성의 회복'이라는 묵직하고도 절실한 과제를 던진다.

이 작품은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시인 스테시코로스의 파편화된 서사시 『게리오네이스』에서 출발한다. 신화 속 게리온은 영웅 헤라클레스의 열 번째 과업을 빛내기 위한 도구로 소비되는 붉은 괴물이다. 그는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붉은 소 떼를 빼앗기고 헤라클레스의 몽둥이와 화살에 죽임을 당하는, 영웅 서사의 단역이자 희생양일 뿐이다. 그러나 카슨은 그 버려진 단역에게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 자서전을 쓸 권리를 온전히 돌려준다. 카슨의 펜 끝에서 새롭게 탄생한 게리온은 두꺼운 코트 속에 커다란 붉은 날개를 힘겹게 구겨 넣고 살아가는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이다. 그는 자신을 파괴할 첫사랑 헤라클레스 때문에 지독한 열병을 앓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내면의 고통과 상실감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내는 젊은 사진가로 우리 앞에 선다.
이 작품은 거트루드 스타인의 문장을 인용한 제사(題辭)로 문을 연다. "나는 말(言)들이 스스로 하고 싶어 하고 해야만 하는 걸 하는 것의 느낌을 좋아한다." 이 짧은 구절은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묘한 울림을 준다. AI의 언어는 확률과 통계, 그리고 예측 가능성 위에서만 작동한다. 반면 앤 카슨의 시적 언어는 관습과 규칙이라는 감옥을 부수고 나와 스스로 약동하는, 불온하고도 펄떡이는 야생성을 지닌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의미는 '결락(缺落)과 여백의 가치'다. AI 기술은 빈칸과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데이터가 비어 있으면 그럴듯한 환각이나 허구로라도 틈을 채워 넣고야 만다. 그러나 카슨은 수천 년의 시간을 거치며 유실되어 단 몇 줄의 단어만 남은 파피루스 조각의 빈자리를 억지로 봉합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게리온의 불안정한 호흡과 뼈아픈 상실의 여백을 시각적인 리듬으로 살려낸다.
두 번째 의미는 평균에 저항하는 '괴물성'과 약동하는 '육체적 감각'의 복원이다. 알고리즘은 언제나 데이터의 평균치와 효율적인 최적화를 지향한다. 신화라는 거대하고 폭력적인 체계 안에서 붉은 피부와 기이한 날개를 가진 게리온은 서둘러 제거되어야 할 비정상적인 노이즈 데이터였다. 하지만 카슨은 바로 그 기이한 타자성과 고립된 고통에 서사의 중심 자리를 기꺼이 내어 준다. 어린 게리온에게 세계는 0과 1의 디지털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얇고 연약한 피부 아래에서 마그마처럼 뜨겁게 들끓는 통증이며, 피와 불을 연상시키는 '빨강'이라는 강렬한 감각 그 자체다. 언제든 찢기고 상처 입을 수 있는 유한한 육체,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에로스적 열망, 그리고 그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는 마음이야말로 그 어떤 뛰어난 AI도 결코 시뮬레이션할 수 없는 인간 실존의 가장 뜨거운 심장부임을 작가는 온통 붉은빛으로 써내려 가고 있다.
작품의 결말부, 페루의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거대한 화산 분화구 위에서 게리온은 마침내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붉은 날개를 활짝 펼친다. 그리고 한때 가해자였던 헤라클레스와 그의 연인 곁에 나란히 서서 밤하늘을 밝히는 뜨거운 화산의 불꽃을 응시하며 "우린 불의 이웃이야"라고 생각한다. '불'은 일차적으로 게리온의 내면을 용암처럼 태우던 고통스러운 욕망과 상처를 뜻하지만, 동시에 세계의 거대한 격변을 상징하기도 한다. 게리온은 상처와 타자성의 상징인 자신의 날개를 스스로 잘라 내어 세상의 평균치에 맞추어 평범해지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그 위험하고도 뜨거운 불 곁에서 기꺼이 '불의 이웃'으로 살아남는 법을 처절하게 배운다.
AI라는 거대한 기술의 격변기를 마주한 현대 인류 역시 지금 맹렬하게 타오르는 거대한 기술의 불길 곁에 서 있다. 기계가 인간을 뛰어넘는 완벽한 효율과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러운 정답을 내놓을수록,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역설적이게도 우리 안의 불완전함과 상처를 직시하는 일이다. 규격화될 수 없는 각자의 기이한 '붉은 날개'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긍정하는 일이다. 모든 것이 수치로 계산되고 평균으로 수렴되는 이 차가운 시대에, 내 안에서 뜨겁게 들끓고 있는 나만의 고유한 '빨강'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저 거대한 기술의 불 곁에서 '불의 이웃'으로 살아남아,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자서전을 어떻게 써 내려갈 것인가. 2026년 노벨문학상이 호명한 위대한 작가의 붉은 문장들이, 매끄러운 화면 밖의 우리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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