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이 열려 있었다. 2003년 4월 1일, 서동구 KBS 사장은 지명관 이사장을 찾아가 대화를 나눴다. 노무현 대통령이 방송을 맡아달라고 했다는 민감한 이야기였다. 문밖에서 기다리던 기자가 이 대화를 듣고 다음 날 신문 1면에 보도했다. 사장 인사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청와대의 설명과 어긋났다. 서 사장은 취임 8일 만에 사퇴를 발표했다. 노 대통령은 국회 국정연설에서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낯이 뜨겁다"고 말했다. 다만 압력을 행사하는 등 법적으로 부적절한 행위를 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KBS 사장은 취임도 퇴임도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서동구 후임인 정연주 전 사장은 이명박 정부에서 해임됐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고대영, 윤석열 정부에서는 김의철 전 사장이 쫓겨났다. 정연주 전 사장은 3년여 만에, 고대영 전 사장은 5년여 만에 해임 취소 확정판결을 받았다. 김의철 전 사장도 지난해 1심에서 승소했고, 이재명 정부와 KBS가 차례로 항소를 취하하면서 해임 취소가 확정됐다. 그러나 지나간 임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해임의 부당함을 인정받고도 사장실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사회 재편과 사장 교체가 이어졌다. 방송 독립을 지켜야 할 이사회는 사장 교체의 통로가 됐고, 그때마다 '방송 정상화'라는 명분이 내걸렸다. 진보 정권이든 보수 정권이든 다르지 않았다. 새 정권은 기존 KBS 보도가 편향됐다는 주장을 앞세웠다. 앞선 정권이 정상화했다던 방송을 다음 정권이 다시 정상화하겠다고 나서는 동안, 공영방송의 독립은 늘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정권마다 '정상'의 기준이 달라진다면 시청자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KBS 이사회는 20일 최종 면접을 거쳐 사장 후보 1명을 결정할 예정이다. 과거의 해임과 이번 선임 절차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이번에는 개정 방송법에 따라 후임자를 뽑는다. 그러나 현 사장이 후임자 임명 때까지만 직무를 수행하도록 한 부칙 역시 민주당 주도로 만들어졌다. 법에 따른 교체라는 설명만으로 정치적 독립성까지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법적 절차를 지키는 것과 정치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지난 17일 전국에서 모인 국민추천위원 205명은 후보 5명의 경영계획 발표와 질의응답을 평가해 최종 면접에 오를 3명을 선정했다. 공개된 영상에서는 정치적 중립과 독립성을 확보할 방안이 주요 쟁점으로 다뤄졌다. 후보들은 보도책임자 임명동의제, 퇴직자의 정치권 직행을 제한하는 냉각기 등을 제시했다. 진보와 보수 시청자 사이의 신뢰 격차를 지표로 관리하겠다는 구상도 눈길을 끌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약속의 개수가 아니라 실효성이다. 그 약속을 누가 사장이 되든,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작동하는 제도로 정착시키는 것이 관건이다.
독립성 논의는 KBS가 무엇을 위해 독립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 이어져야 한다. 볼거리와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시청자는 공영방송이라는 이름만으로 채널을 선택하지 않는다. 수많은 플랫폼 가운데 KBS가 왜 필요한지, 다른 곳에서는 얻기 어려운 어떤 가치를 제공하는지 묻는다. 사장실 주인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그 답을 대신할 수는 없다.
미디어 양극화가 심해질수록 공영방송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자기 생각을 확인해주는 뉴스만 소비하면 같은 사건을 보고도 서로 다른 현실에 살게 된다. 누군가는 진영을 넘어 함께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제공해야 한다. 상대 진영의 가장 거친 목소리만 부각하는 대신 그 안의 다양한 의견과 시민들이 공유하는 고민을 보여줘야 한다. 양쪽 주장을 기계적으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을 검증하고 쟁점을 설명해 갈라진 시민들이 대화할 여지를 넓혀야 한다.
국민이 부담하는 수신료 문제도 KBS의 존재 이유와 맞닿아 있다. 인상을 논의하려면 경영이 어렵다는 호소에 앞서 공적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재난 현장에서 생명을 지키는 정보, 지역 문제를 꾸준히 추적하는 취재, 어린이와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 시간과 비용이 드는 탐사보도로 시민이 낸 돈의 가치를 보여줘야 한다. 이런 공적 콘텐츠를 시청자가 즐겨 찾는 디지털 플랫폼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 KBS가 약해지면 우리 사회가 무엇을 잃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수신료 징수 방식은 정권에 따라 분리징수와 통합징수를 오갔다. 그러나 통합징수를 복원한다고 신뢰까지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안정적인 재원이 공적 책무를 수행할 토대라면, 그 돈을 효율적이고 투명하게 쓰는 것은 국민에 대한 의무다. 독립은 책임을 피할 권리가 아니라 국민에게 제대로 책임지기 위한 조건이다.
사람만 바꾸면 개혁이 완성된다는 믿음은 이미 여러 번 실패했다. 새 사장은 자신을 지지한 세력의 요구나 조직 내부의 이해관계보다 국민의 이익을 앞세워야 한다. 국민 역시 누가 사장이 되느냐를 넘어 어떤 방송을 약속했고 얼마나 지켰는지 따져야 한다. KBS 사장 교체의 흑역사를 끝내는 길은 또 한 번의 '정상화' 선언에 있지 않다. 정권이 바뀌어도 지켜지는 원칙, 그리고 시청자가 체감하는 방송의 변화에 있다.

![[시대대담] "대법관 제청, 이 대통령이 통크게 양보해야" | 헌정회장-서울대 명예교수 대담①](https://i.ytimg.com/vi/oA3-tCCDQF4/maxresdefault.jpg?width=1920&quality=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