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 단톡방은 경조사나 알리면 족하다. 그게 선(善)이자 선(線)이다. 그래도 가끔 그 선이 깨진다. 짜증은 나지만 이해는 한다. 환갑을 바라보는 중닭들이 속을 터놓을 데가 달리 어디 있겠는가.

얼마 전에는 뜬금없이 리센느가 등장했다. 모교 축제에 온다며 같이 가자는 놈이 있었다. 다른 놈은 요즘 성공한 선배들은 유명 가수까지 불러 후원한다고 했다. 예전엔 밥과 술이면 충분히 좋은 선배였는데, 스케일이 비교불가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다 오래전 축제들이 떠올랐다. 그 시절의 나는, 우리는 가짜들이었다. 가짜 조용필, 가짜 레드 제플린, 가짜 빌리지 피플이었다. 팔을 들어 Y를, M을, C와 A를 만들었다. 중요한 일은 다 잊었는데 그 별것 아닌 자세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는 진짜를 부를 생각을 못 했다. 원본은 저 멀리, 바다 건너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한 번 보고, 먼저 배운 누군가의 춤을 따라 했다. 뜻은 몰라도 후렴은 목청껏 따라 불렀다.

흉내는 가난한 시대의 번역이었다. 라이선스의 경계는 희미했고, 음반 가게의 해적판과 AFKN이 세계와 우리를 이어주었다. 가진 것은 적었지만, 모자란 만큼 몸과 상상력이 끼어들 틈이 컸다.

자크 아탈리는 『소음』에서 음악을 다음 시대의 질서를 먼저 들려주는 소리로 읽는다. 그렇다면 그 시절의 가짜 무대도 그저 흉내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세계의 원본이 밀려오기 전에 우리는 그 리듬을 몸으로 먼저 들었던 것이다. 다만 먼저 온 그 소리가, 이렇게 늦게야 값을 부른다.
무엇을 듣고 얼마를 치르는가. 거기에 그 시대의 살림살이가 드러난다.



요즘의 대학축제는 다르다. 예전의 우리는 거의 공짜로 세계를 흉내 냈지만, 지금의 학생들은 수천만 원을 주고 원본을 직접 부른다. 그때는 원본을 가질 수 없어 우리가 원본이 되어야 했는데 말이다.
좋아진 것일까. 비싸진 것일까.

누군가는 등록금으로 연예인 잔치를 하느냐고 비판한다. 누군가는 학생들도 그 정도 즐길 권리가 있다고 반박한다. 양쪽 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돈에는 늘 다른 가능성이 붙어 있다. 그래서 모든 지출은 조금씩 유죄다.

그러나 숫자는 어떤 밤이 사람에게 남기는 이상한 잔고까지 계산하지는 못한다. 장부에는 적자가 찍혀도 기억에는 흑자가 남을 수 있다. 사람은 노래 앞에서 조금 바보가 된다. 어쩌면 그러려고 큰돈을 내는지도 모른다. 잠깐이나마 덜 계산적인 사람이 되려고.

공연이 끝나면 조명이 꺼지고 무대는 철거된다. 가수는 다음 무대로 떠나고, 사람들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남는 것은 몇 초다. 손을 들던 순간. 옆 사람의 어깨. 후렴을 놓치고 터진 웃음. 그리고 어쩌면 네 글자.
Y. M. C. A.

나는 아직도 그 네 글자의 가격표를 모른다.
다만 그때 치른 값보다 오래 남은 것이 있다는 건 안다.

김영태 아케이드 프로젝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