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근 연세대 명예교수



■ 늙고 쇠하여 중도에 그치니

나는 연세대학교에서 21년 6개월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정년 퇴임 시한인 65세까지 4~5년 남았지만, 조기 은퇴를 결심했다. 대학은 참 멋진 곳이었다. 매 학기 캠퍼스를 찾아오는 참신한 학생들과 다양한 주제로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어디서도 누릴 수 없는 기쁨을 내게 주었다. 1982년에 입학했으니, 그때로 따지면 43년 동안 아름다운 신촌 캠퍼스를 오간 셈이다. 조용히 물러나고자 했으나, 동료·후배 교수들이 조촐한 환송식을 마련해 주었다. 부족한 것이 허다했던 선생이 분명하련만 막상 강단을 떠나려고 하니, 그동안 가르쳤던 제자들이 각처에서 자원방래하였다.



나는 그들에게 고별의 선물로,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쓴 시 한 수를 읽어주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물러나서(退) 계곡(溪)에 머물렀던' 퇴계 선생의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었다. 퇴계는 조정의 직책을 내려놓고 낙향한 후에, 제자들과 함께 안동과 봉화에 걸쳐있는 청량산에 자주 올랐다. 이 시는 퇴계가 청량산 산행을 마친 후, 함께 산에 올랐던 제자들에게 들려준 것이다.

사람들은 학문하는 것을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讀書人說遊山似·독서인설유산사)
이제 보니 산에 오르는 것이 학문하는 것과 같구나 (今見遊山似讀書·금견유산사독서)
최선을 다할 때는 본디 아래에서부터 시작해야 하고 (工力盡時元自下·공력진시원자하)
얕거나 깊게 얻은 것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淺深得處摠由渠·천심득처총유거)
앉아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며 오묘함을 알게 되었고 (坐看雲起因知妙·좌간운기인지묘)
걸어서 근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처음을 깨닫게 되었다 (行到源頭始覺初·행도원두시각초)
그대들에게 최고봉에 오를 것을 그렇게 권면하였건만 (絶頂高尋勉公等·절정고심면공등)
늙고 쇠하여 중도에 그치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老衰中輟愧深余·노쇠중철괴심여)

나는 제자들에게 이 시를 들려주며, 대학에 남아 학문의 최고봉에 이르기를 독려했다. "늙고 쇠하여" 먼저 하산하는 것에 용서도 구했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스스로 다짐했다. 이제부터 나는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다. 이제 산에서 내려갈 때다. 퇴직 절차를 위해 서류를 준비하다가 그동안 내가 60편의 학술 논문을 썼고, 40권의 책을 출간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모두 허겁지겁 산에 오르기 위해, 정상에 서기 위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쓴 글이었다.



다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이었다. 남들이 곤히 잠든 밤, 혼자 어둠을 밝히며 고군분투의 글을 썼으나, 세상은 여전히 짙은 어둠 속이다. 그야말로 암중모색이었고, '코끼리 등 만지기'였을 뿐이었다는 자괴심이 든다. 나는 이제 "늙고 쇠하여," 산에서 내려가야 할 때를 맞이했다. 후학들의 분발을 기대하면서도, 내가 했던 부질없는 노력을 그들이 반복할까 두렵기만 하다.

그동안 나는 '남의 것'에 관한 공부에 진력해 왔다. 크고 넓은 세상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사학위는 16세기 유럽-중국 교류사에 관한 것이었고, 그동안 쓴 책은 주로 르네상스와 그리스·로마 시대의 서양 고전, 16~17세기의 주요 인물(카라바조, 엘 그레코, 마키아벨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메디치 등) 역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동안 내가 했을 수백, 수천 번의 인문학 강의는 대부분 서양 고전에 관한 것이었다. 글로벌시대는 '내 것'과 '남의 것'이 혼재되어 있다고 강변하면서 그간 '남의 것'에 대한 나의 집착을 정당화해 왔다. 때에 따라 학문적 '노동의 분화(Division of labor)'라는 말도 되지 않는 변명을 읊조리며, 한쪽으로 치우쳤던 나의 지적인 불균형에 대해 애써 모른 척했다.

그러나 앞에 인용한 퇴계의 시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늙고 쇠하여 중도에 그치니" 내가 장차 묻히게 될 우리 땅으로 내 눈길과 관심이 점차 옮겨졌다. 요즘 화장이 대세라니, 내 몸이 묻힐 땅이 아니라, 내 뼛가루가 날리게 될 산하에 관한 관심일 것이다. 이제 연세대학교에서 맡겨진 소임을 서둘러 마친 나는 우리 땅, 우리 산하로 돌아가고자 한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혼조(昏朝)의 시대가 싫어 세상을 등지고 천하를 떠돌아다녔던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마음이, 지금의 내 심정이다. 아래는 그가 남긴 시, 「잠시 맑다가 비 오듯(乍晴乍雨)」이다.

잠시 맑다가 비 오고, 비 오다가 다시 맑아지니 (乍晴乍雨雨還晴·사청사우우환청)
하늘 이치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세상 인심이랴 (天道猶然況世情·천도유연황세정)
나를 칭찬하던 이는 곧 돌아서 나를 헐뜯고 (譽我便應還毁我·예아변응환훼아)
명예를 피한다는 것이 도리어 명예를 구한 꼴이 되었네 (逃名却自爲求名·도명각자위구명)
꽃이 피고 지는 것에 대해 봄은 아무 상관하지 않으며 (花開花謝春何管·화개화사춘하관)
구름이 왔다 갔다 해도, 산은 이를 다투지 않는다네 (雲去雲來山不爭·운거운래산부쟁)
세상 사람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마음에 새겨두시라 (寄語世人須記認·기어세인수기인)
기쁨은 잠시 취할 수 있으나, 평생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取歡無處得平生·취환무처득평생)

■ 물러난 조선 선비들의 선택, 별서(別墅)

퇴계의 경우처럼, 조선의 선비들은 물러나 숲으로 들어갔다. 세상을 등지고 숲(林)으로 물러났던 선비(士)들을 '사림(士林)'이라 하였다. 공자는 『논어』 술이(述而) 편에서 "세상이 알아주어 쓰임을 받으면 나아가고,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 숨는다(用之則行, 舍之則藏)"는 선비의 올바른 자세를 가르쳤다.

중국 역사에도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숲으로 물러간 선비들이 있었으니, 위진남북조 시대(220~589)를 살았던 죽림칠현이 대표적이다. 중국 역사에는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고 속세를 등진 '은사(隱士)'들이 끊임없이 등장했는데, 황제의 사명은 은둔하고 있던 이들을 세상으로 다시 불러내는 것이었다.

이들 중국 은사는 대개 노장사상에 심취한 선비들이었으나, 성리학적 전통에 굳게 섰던 조선 선비들의 숲으로 물러난 삶은 사뭇 결이 달랐다. 난세를 맞이한 중국의 선비들은 술에 취하고 바둑을 두면서, 스스로 세상살이의 시름을 잊고자 했지만, 조선의 선비들은 물러난 숲속에서도 서슬 퍼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도(道)에 대한 깊은 학문적 연구에 몰두했으며 통절한 관찰과 성찰로 시작(詩作)에 힘썼고, 실천적 삶의 강령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다.

그들에게 숲으로 물러난다는 것은 생애의 마지막 단계를 준비하는 임종의 터미널이 아니라 삶의 완성에 집중하는 수행의 과정이었다. 그들에게 생의 마지막 단계는 벽(壁)이 아니라 또 다른 문(門)이었다. 이들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자연 속에서 학문과 덕성을 닦으며, 후학을 양성하고 지역 사회에 이바지하는 삶을 추구했다.

안동으로 물러났던 퇴계는 바른 삶의 실천을 위한 이(理)와 기(氣)의 원리를 붙들고 씨름했으며, 평생 관직을 거부했던 남명 조식(曺植, 1501~1572)은 선비들에게 학문한답시고 궁상떨지 말고 빗자루를 들고 마당이라도 쓸라고 일갈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그의 호처럼 차밭을 가꾸며 실학의 이론과 실제를 논하였고, 고산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당시 양반의 행동으로는 드물게 직접 조경 공사를 지휘하고, 풍월을 즐기는 것에 머물지 않고 직접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 담양의 즐비했던 시선(詩仙)들은 별서를 옮겨 다니며 제영시(題詠詩)를 주고받았고, 허다한 불멸의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이제 학문의 산에서 내려온 나는 전국 각지를 떠돌며 조선의 별서를 유람코자 한다. 옛 건물의 정취를 보고자 함도 아니요, 옛 시를 읊조리며 세상을 등지려는 염세의 몸짓도 아니다. 내딛는 걸음마다 곧 수행의 자리이니(步步是道場), 우리 마음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독자들과 의기투합하여 삼천리 방방곡곡을 함께 떠돌 것이다.

서울(한양)에서 볼 때 낙동강 동쪽, 즉 지금의 경상북도 어간을 '경상좌도'로 불렀고, 서쪽, 즉 지금의 경상남도는 '경상우도'라 불렀는데, 여기에 전라도와 충청도를 합쳐 '삼남'이라 칭했다. 이 삼남 지방을 중심축으로 삼되, 전국적으로 흩어진 우리 마음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경기 지역의 별서까지 두루 돌아볼 계획이다.

경상좌도의 만휴정(안동), 초간정(예천), 서석지(영양), 경상우도의 무기연당(함안), 산해정(김해), 호남의 소쇄원(담양), 면앙정(담양), 환벽당(광주), 식영정(담양), 부용동 원림(완도), 명옥헌(담양), 백운동 원림(강진), 다산초당(강진), 충청도의 암서재(괴산)와 남간정사(대전) 그리고 경기 지역의 성북동 별서(서울)와 희원(용인)까지를 제1차 행선지로 삼는다. 우리 옛 선비들은 '천석고황(泉石膏肓)'이 깊었으니, 샘과 돌, 곧 산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고황(膏肓)에 든 병처럼 깊어 고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앞으로 조선 별서의 아름다움에 취해 고질병에 걸릴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미리 드린다. 그만큼 우리 자연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별서에 어린 우리 마음이 소중하단 뜻이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있는 초간정을 배경으로 별서기행의 주요 행선지를 지도에 정리했다. 초간정은 조선 중기 문신인 권문해가 49세에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해 심신을 수양하고자 조성한 별서 정원이다./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


김상근 연세대 명예교수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연세대 신과대학장, 연합신학대학원장을 역임했다. 그리스 로마 철학, 르네상스 연구의 권위자로 다양한 저서와 강연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의 설립과 운영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