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제11차 석유최고가격을 기존 수준으로 동결하면서 민생 안정과 시장 기능 회복 사이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중동 전쟁 재격화로 국제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웃도는 가운데 기름값 상승을 억제해야 하지만 제도 장기화에 따른 정유업계 손실과 정부 재정 부담도 커가고 있어서다.
정부는 지난 17일부터 4주간 적용되는 제11차 석유최고가격을 직전 회차와 같은 수준으로 유지했다. 정유사가 공급하는 석유제품의 가격 상한은 ℓ당 휘발유 1784원, 경유 1773원, 등유 1380원이다. 지난 3월13일 제도 시행 이후 국제유가와 국내외 석유제품 시장 상황을 반영해 가격을 조정해 왔지만, 8차부터 4개월 연속 동결 기조가 이어지고 있다.
가격 통제를 유지하는 이유는 민생 부담이다. 중동 지역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면서 브렌트유와 두바이유가 배럴당 100달러대를 기록하는 상황에서 유가 상승분이 국내에 반영되면 운송비와 생산비를 거쳐 생활물가를 밀어 올릴 수 있다. 석유최고가격제는 정유사의 공급가격에 상한을 설정해 이 같은 충격을 완화하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실제 물가 안정 효과도 확인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석유최고가격제 시행으로 올해 물가상승률이 약 0.6%포인트 낮아지는 효과를 냈다.
문제는 가격을 억누르는 비용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제 유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국내 공급가격을 제한하면 정유사의 손실이 커질 수밖에 없다. 업계에서는 제도 시행 이후 상반기에만 누적 손실이 5조원을 웃돈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며, 최근까지 손실 규모가 7조~8조원 수준에 이르렀다는 관측도 나온다. 원유 도입 비용뿐 아니라 중동 리스크에 따른 해상운임 상승까지 겹치면서 정유업계의 수익성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정부의 재정 부담도 만만치 않다. 정유사 손실을 보전하려면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정부는 올해 추가경정예산에 관련 예비비 4조2000억원을 편성했고, 내년도 예산안에는 올해 4분기 손실 보전을 위한 1조4497억원을 반영했다. 이를 합산하면 5조6497억원에 이른다. 국제유가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제도가 추가 연장될 경우 재정 소요가 더 늘어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가격 통제가 장기화하면 시장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가격이 원가와 수급 상황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면 소비자의 절약 유인이 약해지고, 공급자의 투자와 공급 확대 동기도 떨어질 수 있다. 가격을 낮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재정으로 메우는 구조가 고착화하면 정책의 지속 가능성도 흔들릴 수 있다.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도 제도의 한계를 지적했다. 그는 최근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 종합국감에서 "오래 지속될수록 가격 구조에 왜곡이 생기고, 소비 억제는 안되고 장기적으로 재정에 문제가 생긴다. 장기적인 제도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정부는 당장 제도를 종료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형일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중동 전쟁이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최고가격제를 즉시 중단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제도를 갑자기 종료하면 그동안 억눌렸던 가격 상승 압력이 소비자에게 한꺼번에 전가될 수 있다는 점도 정부로서는 부담이다.
업계 관계자는 "국제유가와 전쟁 상황에 따라 가격 상한을 탄력적으로 조정하되 재정 여건과 정유업계의 공급 유인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며 "취약계층에 대한 직접 지원 등 대안을 병행해 가격 통제 의존도를 낮추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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