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의 임산부 배려석이 비워진 모습./뉴스1


"누구라도 좀 양보해주지…."

지난 여름 퇴근길 만원 버스에서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말이다. 연두색 원피스를 입은 한 여성이 제법 불러온 배를 한 손으로 감싼 채 임산부 배려석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후텁지근한 버스 안에서 그는 연신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배려석에는 한 남성이 앉아 휴대폰 화면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비켜 달라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하고 흔들리는 손잡이에 의지해 쭈뼛쭈뼛 서 있는 모습이 내내 눈에 밟혔다. 누구든 한 번쯤 고개를 들어주길 바랐지만 승객들의 시선은 저마다 손안의 작은 사각형에 갇혀 있었다. 결국 임산부는 30여분을 꼬박 선 채 목적지에 이르러서야 내렸다. 서울 시내버스에 임산부 배려석이 생긴 것은 2009년이다. 17년이 흘렀지만 배려는 여전히 승객 개개인의 양심에만 의존하고 있다. 지하철 사정도 다르지 않다.

부산시는 2016년 도시철도에 처음 도입한 알림 장치 '핑크 라이트'를 최근 시내버스 노선으로 확대했다. 스마트폰 앱을 작동하면 배려석 장치에 불빛이 켜지고 자리 양보를 권하는 안내음이 나오는 일종의 '배려 벨'이다. 임산부가 직접 양보를 구하는 민망함을 겪지 않아도 되도록 시스템이 작은 징검다리를 놓아준 셈이다. 서울시가 예산 부담 등을 이유로 손을 놓고 있는 사이 만들어낸 차이다.

배려를 법이나 제도로 강제할 수는 없지만, 배려가 필요한 순간을 부드럽게 알려주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예산 우려가 크다면 부산처럼 산부인과 등 의료기관을 많이 지나는 노선부터 시범 운영해 보는 방법도 있다. 최근 오세훈 서울시장은 '잘사는 국민의 시대'를 미래 비전으로 제시했다. 민생을 살리겠다는 국가적 어젠다는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정치인에게 분명 필요하다. 그러나 시민들의 삶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구호만이 아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자리 하나 비켜 달라 말 못 하는 퇴근길의 곤혹스러움을 작은 기술로 덜어주는 세심한 행정이야말로 시민이 체감하는 시정의 본질이다. 거대 담론 위에 시민의 일상을 보듬는 디테일이 더해질 때 행정가 오세훈의 정치적 무게감도 한층 강해질 것이다. 휴대폰에서 잠시 고개를 들게 하는 일, 그 정도는 시장이 거들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