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


해외에선 휴머노이드 로봇이 춤을 추고 마라톤을 하며 격투까지 벌인다. 4족보행로봇은 이미 심야 공장 순찰과 설비 점검에 투입되고, 물류센터·공장에서는 자율이동로봇과 협동로봇이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사례만 보면 시장이 이미 열린 것처럼 보이지만 산업의 시계로 보면 이제 시작일 뿐이다. 기술을 시연하는 것과 생산현장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는 것은 다르다. 한 번의 실증을 실제 구매와 반복 공급으로 이어가는 것은 더 어렵다.

'피지컬AI'는 인공지능(AI)이 로봇 등 물리적 기기에 탑재돼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판단한 뒤 실제 행동까지 수행하는 기술이다. 이를 구현하려면 AI 반도체와 로봇 두뇌, 센서·인지, 구동부품, 완성 로봇 등 여러 기술이 결합돼야 한다. 개별 기술이 성능을 확보해도 현장에서 하나의 시스템으로 안정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면 도입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한 현장에서 검증한 기술을 다른 공정과 사업장에 적용할 수 있는지도 상용화의 변수다.

프랑스 IT서비스기업 캡제미니 산하 연구소가 올해 1~2월 16개국 기업 임원 1678명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8명이 피지컬AI를 탐색·실증·도입 중이라고 답했다. 실제 현장에 배치해 운영하거나 확산하는 단계라는 응답은 27%였다. 응답자 대다수는 시범 도입을 대규모로 넓히는 것을 중대한 과제로 꼽았다.

우리나라는 피지컬AI를 적용할 제조 현장과 로봇 인프라를 이미 갖췄다. 국제로봇연맹(IFR)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산업용 로봇 신규 설치량은 약 3만대로 세계 4위를 유지했다. 기존 산업용 로봇은 사전에 설정한 공정과 작업을 반복하는 방식이 중심이었지만 최근에는 AI를 결합해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상황 변화에 대응하는 방향으로 적용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시장을 확대하려면 현장에서의 신뢰성과 안전성, 경제성을 입증해야 한다. 한국AI·로봇산업협회는 산업용 로봇이 이미 상용화 기반을 갖춘 것과 달리 피지컬AI 로봇은 현장 적용을 시작하는 단계라고 진단했다. 휴머노이드와 협동로봇은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움직이고 작업하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안전하게 작동해야 한다.

수요기업은 기술 성능만 보지 않는다. 어느 산업과 공정에서 사용됐는지, 장애가 발생했을 때 얼마나 빨리 대응할 수 있는지는 물론 총소유비용(TCO)도 따진다. TCO는 제품 가격뿐 아니라 설치와 기존 설비 연동,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직원 교육, 운영과 유지보수에 드는 비용을 모두 합한 개념이다.

현장 적용 가능성을 확인하는 현장실증을 실제 구매로 연결하려면 수요기업이 망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살펴야 한다. 김동영 한국개발연구원(KDI) 전문연구원은 "구매자가 부담하는 실패 비용을 충분히 낮추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기술 검증에 성공해도 한 번의 오류가 생산 중단이나 대규모 불량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기업은 도입을 주저할 수 있다"고 했다.

민간의 첫 구매가 쉽지 않은 초기 시장에서는 정부와 공공기관이 첫 수요처 역할을 한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조달청은 지난 4월 '정부 첫 실증·구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5개 기관이 제안한 20개 과제에 31개 창업기업이 신청했고, 6월 말 10개 과제에 13개사가 선정됐다.

국가유산청은 덕수궁과 서오릉에서 순찰로봇의 주행·위험 감지 기능을, 경찰청은 한강에서 수상드론의 실종자 수색 기능을 시험했다. 해양경찰청도 충남 태안에서 로봇 4대를 활용한 해양방제 작업을 시연했다. 실증은 12월까지 진행된다. 이후 별도 심사를 거쳐 혁신제품으로 지정되면 수요기관이 필요한 수량을 수의계약으로 구매할 수 있고, 조달청은 시범구매 예산을 지원한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공공기관의 초기 수요가 기업의 운영 데이터와 레퍼런스 확보에 도움이 된다. 정부는 초기 시장을 열어주되 특정 기업의 생존을 보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동영 연구원은 "로봇은 교체주기가 길어 단기 재구매보다 실제 가동과 다른 사업장으로의 확대가 더 적절한 지표다. 첫 거래가 다음 거래의 비용을 낮추고 다른 고객의 불확실성까지 줄일 때 산업적으로 중요한 레퍼런스가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