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책장과 벽을 빼곡히 채운 악보, 그리고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이 어둠을 걷어내며 객석을 압도한다. 연극 <33개의 변주곡>은 그렇게 막을 연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19세기와 21세기를 넘나드는 스토리와 영상으로 극적인 긴장감과 상상력을 극대화시켜주는 연극이 가을의 정서를 유혹하고 있다.
루게릭병에 걸린 음악학자가 생의 마지막 열정을 다해 베토벤 말년의 창조적 삶과 그의 창작에 대한 집념을 되짚어가는 감동적인 여정을 그린 연극 <33개의 변주곡>이 국내 초연되며 가을 대학로를 중후함으로 채색했다.
음악학자 캐서린 브랜트는 청력을 잃어버린 베토벤의 육체적 고통과 그의 음악, 그리고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들의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며 관객들을 몰입시킨다. 여기에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이 더해지며 한치의 느슨함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공연 내내 배우들과 함께 무대를 지킨 베토벤의 '디아벨리 왈츠에 의한 33개의 변주곡' 테마 중 20개의 역동적이면서도 주옥같은 선율이 피아노 독주로 연주됐다. 마치 이야기가 있는 음악회인 듯.
연극 <33개의 변주곡>은 예술을 통해 삶의 열정과 아름다운 순간들을 이야기한다. 베토벤의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집념의 음악학자가 예술과 삶의 상관관계를 탐색한다. 예술과 일상, 과거와 현재, 구세대와 신세대 등 상반된 듯한 요소들을 뫼비우스 띠처럼 잇는다.
캐서린 브랜트는 루게릭병에 걸렸다. 하지만 그녀에게 병은 대수롭지 않다. 생의 마지막 열정을 짜내 베토벤 말년의 창조적 삶을 되짚는 것이 더 중요했다. 캐서린 브랜트는 생의 마지막 논문 주제로 베토벤의 '디아벨리 왈츠에 의한 33개의 변주곡'에 얽힌 미스터리를 택했다. 늙고 병든 베토벤이 악보 출판업자의 특별할 것 없는 왈츠를 왜 33개나 되는 특별한 변주곡으로 만들어내는지 혼신을 다해 연구한다. 평생 캐서린 브랜트와 소원하던 딸 클라라는 이런 그녀 곁을 지키며 엄마를 이해하게 된다.
연극은 베토벤이 평범한 왈츠의 변주곡을 33개나 만든 이유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 든다. 베토벤이 곡의 인상을 간단히 바꾸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곡마다 색깔을 달리해 성격 자체를 변형시키며 느꼈을 음악적 고뇌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진다. 극에서 살짝 언급하는 것처럼 곡 안에서 다양한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그러나 연극이 끝날 때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놓은 물음표다. 극장을 벗어나는 순간 일상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움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고 싶어하는 작은 음모가 얼핏 스친다.
연극 <33개의 변주곡>은 삶의 열정과 순간의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다. 문득 매몰 69일 만에 전원 구조된 칠레 광부 33명의 이야기가 겹쳐졌다. '33'이란 숫자 때문이었지만 그들 33명은 집단적으로 재단되는 광부이기 이전에 각자 개성을 지니고 있는 개개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각자의 다양성은 충돌과 더불어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요소가 됐을 것이다. 그 다양성이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69일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음은 분명했다.
<33개의 변주곡>에서도 그런 모습들이 엿보였다. 캐서린 브랜트는 딸 클라라, 클라라의 남자친구 마이크, 친구인 사서 거트루드 라덴버거에게 의지한다. 베토벤을 향한 그녀의 열정, 그리고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추적해가는 과정과 그 완성은 그들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베토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광기의 천재였다. 하지만 그의 곁에도 캐서린 브랜트 같은 조력자가 있었다. 비서 쉰들러와 악보출판업자 디아벨리가 바로 그들었다. 삶이나 예술은 함께여야 더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3월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유진 오닐극장에서 처음 막을 올린 연극 <33개의 변주곡>은 베네수엘라 출신 영화감독 겸 연출가인 모이시스 카프만 원작으로, 2009년 토니상 작품상과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특히 영화배우 제인 폰다가 캐서린 브랜트 역으로 46년 만에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 올라 화제가 된 작품이다.
캐서린 브랜트 역을 맡아 지적인 카리스마의 정수를 보여준 연극배우 윤소정의 연기는 역시 안정적이었다. 학자로서 오롯하게 일생을 살아가는 깊이있는 연기가 세월이 가도 변색되지 않는 그녀만의 색깔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또 베토벤 역을 맡아 격정적 연기를 펼친 박지일과 클라라 역의 서은경 등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극의 전체적 흐름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호연이었다. 여기에 연출가 김동현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이 더해져 공연 내내 아쉬운 장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개운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11월28일까지. 신시컴퍼니 02)577-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