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업들이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선진 경영문화 정착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주주이익과 경영투명성 제고를 위한 다양한 제도를 마련하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형식적인 장치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머니S>가 우리나라 경영선진화의 민낯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갈길 먼 ‘경영 선진화’] ②‘주주권 강화’ 상반된 표정
바야흐로 ‘주주총회 시즌’이 돌아왔다. 이달을 기점으로 국내 대부분의 상장기업이 주주총회를 연다. 예년과 다른 점은 최근 국민연금과 행동주의펀드의 주주권 행사와 사측의 경영권 방어가 충돌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지난 5일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상장사는 2094개다. 이 가운데 지난해 12월 결산한 법인 2060여개사가 이달 주총을 개최한다. 그동안 소극적인 주주권 행사로 ‘주총 거수기’라는 오명으로 불렸던 국민연금은 지난해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 의결권행사 지침)를 도입한 후 올해 주총에서 본격적인 주주권을 행사하겠다고 공언했다. 설상가상 엘리엇 등 행동주의펀드가 과거보다 적극적으로 주주총회에 참여할 의지를 드러내면서 어느 때보다 뜨거운 주총시즌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 국민연금. /사진=뉴스1 장수영 기자 |
◆힘 얻는 주주… 올해 최대 이슈
그간 주주총회는 대주주와 사측의 독무대였다. 거기에는 국민연금이 주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국민연금은 막대한 지분을 갖고도 관치시비 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에 나서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은 재벌 오너와 사내이사 재선임 등 기업경영에 민감한 사안에서는 기권하거나 중립 의사를 밝히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최근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코드를 본격적으로 가동한다는 뜻을 밝히면서 기업의 주요 주주로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스튜어드십코드는 저택의 집안일을 맡은 집사처럼 국민연금 같은 기관투자자도 최선을 다해 고객의 돈을 맡아 관리하고자 만든 규범이다.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해 주요주주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위탁받은 국민의 자금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가이드라인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재계 관계자들은 국민연금이 행동하는 주주로서 기업의 의사결정과정에 적극 참여해 배당확대와 투명경영을 요구할 것으로 예상한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6월 대한항공에 오너일가의 일탈행위에 대한 사실관계와 해결방안을 묻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개서한 발송으로 주주권을 행사한 최초 사례다.
국민연금과 함께 행동주의펀드도 주주권을 강화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인다. 엘리엇, KCGI 등으로 대표되는 행동주의펀드는 기업에 배당 확대 등을 연일 요구하며 공세를 펼친다. 특히 현대차그룹과 한진칼은 행동주의펀드의 공세를 받고 있다.
행동주의펀드 엘리엇은 올해 초 현대차그룹과 현대모비스에 대규모 배당, 사외이사 선임 등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서를 전달했다. 엘리엇은 현대차에 보통주 1주당 2만1976원의 배당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보통주와 우선주를 합친 배당금 총액은 6조원에 달한다. 이는 지난해 현대차그룹이 기록한 당기순이익 1조6450억원의 3배가 넘는 수치다.
엘리엇은 현대모비스에도 총 2조5001억원의 배당금을 제안하고 나섰다. 이는 보통주 한주당 2만6399원에 달하는 금액인데 현대모비스가 제안한 금액인 주당 4000원보다 6배 이상 높은 금액이다. 현대차그룹과 현대모비스는 엘리엇의 제안을 거부했고 엘리엇은 이달 초 현대차·현대모비스 주주에게 서한과 프레젠테이션을 보내며 의결권 확보에 나섰다.
한진칼의 2대 주주 KCGI는 배당확대보다 한진그룹 자체의 ▲지배구조 개선 ▲사업 포트폴리오 재편 ▲불필요한 자산 매각 ▲전문경영인 체제 도입 등 대국민 신뢰를 회복하고 장기적인 기업가치 부양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KCGI는 조양호 회장 일가가 저지른 행동이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주주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판단해 ‘범법자나 회사 평판을 실추시킨 자의 임원 취임 금지’ 항목을 제안했다.
주주의 권리 강화를 둘러싼 이슈는 주총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꾸준히 이어질 전망이다. 오진원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증시 전반에서 주주환원요구가 거세다”며 “올해 증시 최대 이슈로 주주참여 확대 및 주주환원 증대를 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그간 의견을 제대로 낼 수 없었던 소액주주들의 권리 신장을 위한 전자투표제를 의무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집중투표제, 중간배당, 감사위원 분리선임 등 주주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주주의 권리 강화가 회사의 수익성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정성엽 대신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최근 기관투자가들은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으로 의결권 행사를 강화하고 있고 소액주주들 역시 전자투표제를 적극 활용하는 등 회사 경영에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며 “요식성이 강한 주총이 개방되면 회사의 정보공시도 활발해지고 궁극엔 회사의 실적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성호 조선대 경영학부 교수도 주주권리 강화에 긍정적인 반응을 내놨다. 서 교수는 “주총의 본래 의미는 기업전략과 비전을 논하는 것”이라며 “증권의 차액과 투자에만 관심을 가졌던 주주들이 적극적으로 발언할 기회를 얻게 된다면 회사경영에 일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주주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 기업의 경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주장이다.
곽관훈 선문대학교 교수는 감사위원 분리선임과 집중투표제의 부작용을 지적했다. 곽 교수는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임이 동시에 도입될 경우 3% 이하 소액주주의 연합으로 원하는 사람만 선임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대비하기 위해 기업이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황인학 기업법연구소 수석위원은 “행동주의펀드를 막을 것이 아니라 방어수단을 강화해야 한다. 포이즌필, 신주 우선 배정 권한을 허용하는 등 미국식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며 “유럽에서 도입한 단기·장기 주주를 차별하는 방법도 고민해야 한다. 주식보유 기한에 따라 의결권 또는 배당을 더 준다든지 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84호(2019년 3월19~2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