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업계에선 디자인 도용과 유행이 한끗 차이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 노스페이스, 디스커버리, 밀레, 파타고니아, 컬럼비아, 아이더. /사진제공=각 사


#. 뽀글이 원단, 아이보리 색상, 가슴 앞면에 새겨진 주머니…. 요즘 거리에선 이런 디자인의 플리스(양털질감) 재킷을 쉽게 볼 수 있다. 백화점에선 캐주얼·스포츠·아웃도어를 가리지 않고 한 브랜드 건너 하나꼴로 이런 상품을 팔고 있다. 그야말로 대유행인 셈. 하지만 어느 브랜드에서 이 디자인을 가장 먼저 내놨는지는 알 수 없다. 유행이란 흐름 안에 섞여 서로의 디자인을 베낄 뿐이다.

패션업계에서는 원조와 복사품의 기묘한 동거가 오래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신규 디자인이 나왔다 하면 일주일 만에 시장에 똑같은 디자인이 깔린다. 하지만 패션업계에서 디자인 도용은 ‘유행’이란 명목으로 쉽게 넘어간다. 특정 브랜드를 따라 하는 브랜드가 많아지면 이는 도용이 아니라 유행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유행이고 어디까지가 도용인 걸까.

동대문부터 대기업까지… 카피 판친다


패션업계 디자인 도용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수법은 더욱 교묘해졌다. 과거엔 주로 명품 브랜드를 있는 그대로 모방한 ‘짝퉁’(위조) 제품이 대다수였다면 최근엔 타사 디자인을 교묘하게 베껴 자사 고유의 디자인인 것처럼 내세우는 ‘카피’ 상품이 판친다. 타사 디자인의 상표를 떼지 않고 자사 상표를 붙여 ‘택(Tag)갈이’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패션업계 디자인 도용의 중심엔 동대문 도매시장이 자리한다. ‘K-패션’의 주역인 동시에 ‘카피 천국’이라 불리는 곳. 시장 문화가 개선됐다고 하지만 여전히 현장에선 ‘샤넬st(스타일)’ ‘구찌 맛’ 등 명품 브랜드 이름을 앞세워 카피 상품을 판매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명품 브랜드뿐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가 인기를 끌자 이들 디자인을 베낀 제품이 동대문 시장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동대문에서 옷을 사입해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과 SNS마켓은 이를 부추긴다. 디자인 도용 검증 없이 무분별하게 카피 상품을 떼다 판매하기 때문.

한 디자이너 브랜드 대표는 “베끼기가 패션업계의 트렌드가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소비자도 카피 제품인 걸 알면서 구매한다”며 “패션업계의 비슷한 스타일 찍어내기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SNS에 카피품이 판매되고 있는 모습(왼쪽)과 네이버 카페에서 카피품을 공동구매하는 모습. /사진=화면 캡처


굴지의 대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SPA(제조유통일괄형)브랜드 ‘에잇세컨즈’는 2012년 국내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의 양말 디자인을 도용했다가 공식 사과했다. 당시 회사 측은 “SPA 상품 기획 특성상 수많은 상품을 최대한 빨리 기획해 생산하고 나서 고객에게 제공해야 한다”며 “사업 초기에 유사 디자인 검증 프로세스를 놓친 것으로 파악됐다”고 해명했다.

패션그룹 형지의 ‘크로커다일 레이디’도 2013년 인디 브랜드의 디자인을 도용했다가 대표가 공개 사과에 나섰다. 이랜드가 운영하는 슈즈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폴더’도 2015년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의 니트 머플러를 베꼈다는 의혹에 휩싸인 바 있다.

하지만 이처럼 디자인 도용 사례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사례는 지극히 소수다. 법적 분쟁까지 이어진 건 LF(당시 LG패션)가 2013년 영국 명품 버버리 고유의 체크무늬를 셔츠에 사용했다가 소송을 당해 3000만원을 지급한 경우가 유일하다. 버버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기업이 디자인을 침해한 경우 이를 밝혀내거나 대응하기 어렵다는 게 업계 얘기다.

골병드는 K-패션, 골로 가는 영세업체


디자인 도용을 막기 위한 디자인등록출원은 해마다 늘고 있다. 하지만 실효성 논란은 여전하다. /그래픽=김은옥 기자

디자인 도용은 디자인보호법이나 상표법 등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하지만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당 법의 보호를 받으려면 디자인등록출원이나 상표등록출원을 해야 하는데 로고나 글씨가 아닌 디자인 자체를 지적재산권(상표권·디자인권·저작권)으로 인정받기 어려워서다. 매 시즌마다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는 업종 특성상 매번 권리 등록을 하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유일한 법적 구제 수단은 부정경쟁행위방지법이다. 타인의 상표나 상호 등을 부정하게 사용하는 행위나 타인의 영업비밀을 침해하는 행위를 막는 법으로 이를 어길 시 3년 이하 징역형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하지만 법정 싸움으로 가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소송 결과가 나오기까지 최소 1년이 걸리는데 계절에 따라 유행이 바뀌는 업종 특성상 3개월만 지나도 디자인의 가치가 하락해 유효기간이 끝나기 때문이다.

한국패션디자이너협회 소속 이재경 변호사는 “디자인 도용 피해를 입은 디자이너는 법적인 조치를 취할 만한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없어 지켜보기만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조금 더 신경 써봐야 도용업체에 연락해서 판매 금지 요청을 하거나 내용증명을 보내고 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머니S'가 확인한 디자이너 브랜드 피해 사례. 왼쪽이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클럿스튜디오'의 제품, 오른쪽이 이를 도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SPA 브랜드 'LAP'제품이다. /사진=각사

신진 디자이너나 중소·영세업체의 경우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피해 보상이나 지원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적극적인 권리 행사를 하기가 어렵다. 법적 절차가 까다롭다는 점을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이 변호사는 “소송을 하더라도 시간·비용 문제로 재판 중간에 합의를 하게 된다”며 “이를 아는 도용업체가 ‘소송을 제기하려면 해 봐라’는 식으로 배짱을 부린다”고 전했다.

과거 중견 패션기업의 디자인 도용 사례를 고발했던 한 업체 대표도 “표절과 관련된 법적 분쟁만으로도 스타트업이 대기업을 상대하기는 버겁다”며 “3심까지 이르는 시간과 소송 비용만으로도 작은 기업은 사업을 이어나가기 힘든 상황에 직면한다”고 호소했다.

이처럼 디자인 도용은 국내 패션 산업의 경쟁력을 위협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이미 업계 전반엔 관행이란 인식이 깊게 뿌리 깊게 박혀 있다. 분기별로 바뀌는 유행을 따라가려면 어쩔 수 없다거나 도용이 아닌 영감·패러디·오마주라는 식의 핑계도 늘어놓는다.

패션업계 한 관계자는 “트렌드라고 하면 따라가고 카피하다 유행이 되는 게 현실”이라면서도 “패션업계에 지적재산권 개념이 자리 잡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