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도 빠졌다.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대통령 직속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처음 제안한 이후 27년째다. 오래전부터 법조계를 중심으로 도입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번번이 후순위로 밀렸다. '조건부 석방' 제도 얘기다.
지난 4일 국무회의 의결을 마친 형사소송법(형소법) 개정 과정에서도 '조건부 석방' 도입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여야 공방이 검찰 권한 축소에 집중되면서 이번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검찰 보완수사권 폐지와 공소 기각 요건 추가로 수사부터 재판까지 사법 절차 전체가 장기화할 우려가 큰 상황에서 정작 피의자 인권과 피해자 보호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인신구속 제도 논의는 뒷전으로 밀린 것이다.
구속 또는 기각 아닌 제3의 선택지 필요
조건부 석방은 법원이 피의자나 피고인에게 ▲보증금 공탁 ▲위치추적 전자장치 착용 ▲주거지 제한 등 여러 조건을 걸어 구속영장을 발부와 동시에 석방하는 제도다. 피의자가 구속된 뒤 신청하는 구속적부심, 보석 제도보다 인신 구금 기간이 매우 짧다. 법조계에선 구속영장이 남발되는 상황에서 피의자 방어권 보장을 위해 가장 필요한 제도 중 하나로 꼽는다. 무죄추정과 불구속 재판이란 형사 사법 체계의 핵심 원칙을 실현할 제도라는 것이다.현재 판사는 청구된 구속영장을 발부 또는 기각하는 양자택일만 할 수 있다. 구속과 불구속 사이 중간 선택지가 없다 보니 피의자의 다양한 사정은 고려하지 않는다. 범죄 혐의가 소명되고, 도주 및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면 여러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 미성년 자녀를 혼자 양육하는 한부모, 피해자와 합의를 위해 경제활동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도 구속할 수밖에 없다. 박성현 변호사(법률사무소 유)는 "치매에 걸린 부모를 홀로 부양하는 사람이 구속되자 방문요양원 관계자들이 나서서 탄원서를 쓴 적도 있다"고 전했다.
이미 선진국에선 조건부 석방과 유사한 제도를 폭넓게 활용하고 있다. 프랑스는 조건부 석방과 유사한 '사법 통제'를 운영한다. 피해자 접근금지, 거주지 제한, 정기 출석 등 의무를 부과한 뒤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받도록 하는 방식이다. 프랑스 법무부에 따르면 2023년 재판 전 예심 단계에서 내려진 자유 제한 조치 3만767건 가운데 사법 통제가 53%로 가장 많았고, 미결구금(구속) 44%, 가택 전자감시 3%였다.
미국도 재판 출석과 사회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하면 피고인을 조건부 석방한다. 미국 법무부에 따르면 2011~2018년 연방지방법원의 불구속 피고인 중 79%가 조건부로 석방된 이들이었다. 이들 중 법원 심리에 출석하지 않은 비율은 1%에 그쳤다. 수사기관은 흔히 원활한 재판을 위해 구속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미국 사례를 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구속되면 직장생활도, 자녀 양육도 중단되고 피해자와의 합의금 마련도 어려워진다"며 "조건부 석방은 판사의 재량으로 피의자에게 전자발찌를 부착해 직장과 집을 오갈 수 있게 해주되, 피해자에 대한 접근금지, 공범과의 연락 금지 등 여러 조건을 붙여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검찰 권한 축소 논의에 밀려 또 입법 좌절
'조건부 석방'은 피의자 사정이나 사건 성격에 따라 판사가 '맞춤형 조건'을 부여할 수 있기에 법조계에선 오래전부터 도입 필요성에 공감대가 있다. 1999년 대통령 직속 사법개혁추진위원회가 처음 제안한 이후 국회에는 6번 이상 관련 법안이 제출됐다. 조희대 대법원장도 2023년 12월 취임 당시 조건부 석방 제도의 도입 필요성을 언급했다.검사 수사권을 완전히 없앤 이번 형소법 개정을 주도한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박은정 조국혁신당 의원이 공동 발의한 형소법 개정안에도 '조건부 석방' 제도가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가 11차례 열리는 동안 조건부 석방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전체 소위 회의 시간은 46시간 12분에 달했는데, 조건부 석방 논의는 단 2차례, 1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진행되다가 결론 없이 끝났다. 나머지 시간 대부분은 검사 수사권 폐지를 포함한 검찰 권한 축소에 할애됐다.
형소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1주일 앞둔 지난달 24일 법안심사소위에서 박균택 민주당 의원은 "(조건부 석방이) 긍정적으로 검토할 여지도 많지만, 입법 의도와 달리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며 "인신구속에 관한 문제를 검찰 개혁에 관한 문제(검사 수사권 폐지 등)에 묻어서 함께 처리하는 것을 부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고, 이것으로 조건부 석방 논의는 끝났다.
법사위의 한 위원은 [시대]와의 통화에서 "검사 수사권 폐지는 여권 법사위원들 간 합의가 있었지만, 조건부 석방은 제도를 잘 모르는 의원도 있어서 추후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검사의 보완수사권을 폐지하고 보완수사 요구권만 남기면서 검경 간 '수사 핑퐁'으로 인한 수사 장기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피의자 인권과 피해자 보호 대책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셈이다.
조건부 석방 도입 앞서 전자발찌 실시간 추적 강화해야
'조건부 석방' 제도를 도입하려면 사전에 전자발찌 관리 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조건부 석방에 반대하는 쪽에선 피의자가 조건부로 석방된 뒤 피해자에게 2차 가해, 보복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기 때문이다.다만 조건부 석방 주장이 힘이 실린 계기는 역설적으로 2022년 발생한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이었다. 당시 범인 전주환은 피해자인 동료 역무원의 고소로 구속영장이 청구됐으나 법원은 주거가 일정하고 도주나 증거인멸 우려가 적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했다. 이에 불구속 상태로 재판받던 그는 1심 선고 전날 피해자를 찾아가 살해했다.
만약 당시 조건부 석방 제도가 있었다면 그를 풀어주는 대신 전자발찌 부착과 피해자 접근금지 등의 조건을 붙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구속 요건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피해자에 대한 보복 우려가 있을 때 조건부 석방 제도를 활용하면 오히려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조건을 붙이더라도 피해자가 불안해할 수 있는 만큼 조건부 석방 제도가 안착하려면 전자발찌 관리 체계를 보완해야 한다. 현재 전자장치는 법무부 보호관찰소가 관리하고, 사건 발생 시 경찰이 현창 출동 및 피해자 보호 업무를 맡는 구조다. 문제는 두 기관이 업무를 나눠 맡다 보니 전자발찌 위치 정보가 경찰에 실시간으로 공유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보호관찰소에서 경찰에 피의자 위치를 알려줘야만 추적이 가능한 체계다.
보호관찰소의 전자발찌 관리 인원도 확충해야 한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5년 동안 전자장치 감독관 1인당 관리 인원은 2021년 17.7명에서 2025년 20.7명으로 늘었다. 법무부 내부 규칙에선 '1인당 10명'을 권고하고 있는데, 실제 관리 인원은 두 배가 넘는 셈이다. 조건부 석방 제도가 도입되면 전자발찌 관리 인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 수 있는 만큼 사전 대비가 필요하다.
일각에선 모든 범죄에 조건부 석방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보다 범죄 유형에 따라 적용 범위를 달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교제 폭력, 스토킹, 가정폭력 같은 관계성 범죄는 조건부 석방 대상에 포함하지 않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