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바뀌는 시절이다. 자리에 새 얼굴이 앉고, 저 사람이면 다르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인다. 그런데 자리를 바꾸는 일과 사람이 바뀌는 일은 늘 같지 않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오래전에 만들어둔 점수표 하나가 떠올랐다.
벤처기업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데 벤처기업확인서까지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직원들의 머리와 다리부터 살펴보면 된다.
벤처기업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데 벤처기업확인서까지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직원들의 머리와 다리부터 살펴보면 된다.
머리를 박박 민 사람이 있는가. 수염을 기른 사람이 있는가. 보라색이나 초록색으로 염색한 사람이 있는가.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반바지 아래로 허벅지의 타투가 드러나는가.
슬리퍼 1점, 반바지 1점, 수염 1점, 삭발 2점, 보라색 머리 2점, 허벅지 타투 3점. 합계가 높을수록 벤처기업일 가능성이 크다. 정장을 입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가산점 2점이다. 다만 대표만 정장을 입고 있다면 다시 3점을 빼야 한다.
농담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농담 또한 관찰에서 시작되지 않나.
전통적인 회사에서 복장은 규칙이었다. 짙은색 양복에 흰 셔츠, 치켜 깎은 머리. 구두가 반짝이면 성실한 사람이고, 운동화를 신으면 아직 회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 첫 직장 은행도 그랬다. 나는 매일 아침 구두를 닦고 바지 주름을 펴고 출근길에 나섰다.
벤처기업은 그런 규칙을 뒤집었다. 양복 대신 후드티, 구두 대신 운동화. 직급을 없애고 영어 이름을 불렀다. 자유롭게 입으라는 말은 자유롭게 생각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어빙 고프먼은 '자아 연출의 사회학'에서 일상을 하나의 무대로 봤다. 사람은 옷과 머리 모양, 말투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연출한다. 대기업의 정장이 충성과 규율을 연출한다면, 벤처의 반바지와 슬리퍼는 자율과 창의를 연출한다. 복장은 몸에 걸치는 회사소개서인 셈이다.
그러나 새로움은 성공하는 순간 하나의 양식이 된다. 모두가 다르게 입기 시작하면, 다르게 입는 것이 새로운 규칙이 된다.
정장을 입고 벤처기업 면접에 가면 눈치가 보인다. 자유롭게 입으라는데, 무엇을 입어야 자유로워 보이는지를 다시 계산해야 한다. 후드티와 운동화가 정장과 구두를 몰아낸 뒤, 그것들이 새로운 유니폼이 된 거다. 보라색 머리는 취향인 동시에 "나는 정장 입은 사람들과 다르다"는 표지이고, 타투는 몸에 새긴 자유이면서 새로운 부족의 출입증이다.
이쯤 되면 조직의 자유도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따져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셋과 보이지 않는 둘이다.
첫 번째는 편의의 자유다. 반바지와 슬리퍼를 허용한다.
두 번째는 취향의 자유다.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염색해도 된다.
세 번째는 신체의 자유다. 타투나 삭발처럼 되돌리기 어려운 선택을 감출 필요가 없다.
네 번째는 발언의 자유다. 회의에서 창업자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표시할 수 있다.
다섯 번째는 결정의 자유다. 반대했다는 이유로 인사와 보상에서 손해를 보지 않는다.
앞의 셋은 눈으로 확인된다. 사무실을 한 바퀴 돌면 점수가 나온다. 문제는 뒤의 둘이다. 그것은 회의가 시작되고 대표가 자기 생각을 말한 뒤에야 드러난다.
에드거 샤인은 조직문화를 세 층위로 나눴다. 복장과 호칭처럼 눈에 보이는 것, 조직이 내세우는 가치,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본 가정. 반바지는 맨 위층일 뿐이다.
"우리는 자유로운 회사입니다."
벽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자유로운 회사가 되지는 않는다. 대표를 영어 이름으로, 존칭 없이 부르면서도 그의 말에는 아무도 반대하지 못할 수 있다. 회의실에 빈백이 놓여 있어도 결정은 대표 머릿속에서 이미 끝나 있을 수 있다.
복장은 벤처인데 권력은 대기업인 회사가 있다. 모두 슬리퍼를 끌지만 대표가 들어오면 공기가 달라진다. 자유롭게 말하라더니, 정말 자유롭게 말한 사람이 다음 회의에서 보이지 않는다. 보고서는 세 장이면 된다더니, 대표가 좋아할 결론이 나올 때까지 수십 번을 고친다. 이런 회사에서 반바지는 자유의 증거가 아니다. 자유의 장식이다.
반대로 모두 정장을 입고도 자유로운 조직이 있다. 대표에게 반대해도 되고, 실패를 보고해도 되고, 모른다고 말해도 된다. 가장 낮은 직급의 말에 결정이 뒤집히기도 한다. 겉은 옛날 은행처럼 보이지만 속은 진짜 벤처인 조직이다.
그렇다면 처음의 점수표를 고쳐야 한다.
슬리퍼 1점, 반바지 1점, 수염 1점, 삭발 2점, 보라색 머리 2점, 허벅지 타투 3점. 여기까지는 그대로다.
그러나 대표가 먼저 말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 10점을 뺀다. 직급이 낮은 사람이 대표에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 20점을 더한다. 그 사람이 다음 달에도 회사에 다니고 있다면 다시 30점을 더한다.
새 얼굴을 앉히는 일은 겉이다. 그 얼굴이 회의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지, 말한 뒤에도 자리를 지키는지는 속이다.
겉을 바꾸는 데는 하루면 된다. 속을 바꾸는 데는 하루로는 어림도 없다. 사람을 바꿔 조직을 바꿨다고 믿기 쉽지만, 대개 바뀐 것은 사람뿐이다.
벤처기업 혹은 혁신적인 조직을 감별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머리나 허벅지를 살피는 것이 아니다. 회의가 시작된 뒤 대표의 말에 누가 처음으로 아니라고 말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슬리퍼를 신을 자유는 발에 있다. 조직의 자유는 입에 있다.
추신: 요즘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머리를 애쉬그레이로 물들이고, 수염을 기른다. 수염 1점, 염색 2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반대할 상사는 없지만 대신 돈을 내는 고객이 있다. 그 앞에서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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