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소속 산업은행·기업은행·수출입은행 조합원 약 2000명이 11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 의사당대로에서 열린 '국책은행 지방 이전 저지 총력투쟁 결의대회'에 참가한 모습./사진=전나경 시대 기자

"저는 지난해에 결혼한 신혼입니다. 요즘 우리 부부가 자주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본점이 지방으로 가면 우린 어떡하지?', '아이 낳으면 주말 부부가 되어야 하나?', '집을 어디에 구입해야 하지?' 주거 계획, 가족 계획, 그리고 미래의 계획까지 다 망가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노동자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정책 결정이 이해 당사자인 우리와 한마디도 없이 추진하는 것은 정말 독선적인 행위라 생각합니다."

11일 오후 7시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 의사당대로에서 열린 '국책은행 지방 이전 저지 총력투쟁 결의대회'에 나선 노희진 기업은행 대리는 이렇게 말했다. 본점 이전이 단순한 근무지 변경을 넘어 직원들의 주거와 결혼, 출산 계획까지 뒤흔들고 있다는 호소였다.


퇴근 무렵 산업은행과 기업은행, 수출입은행의 깃발이 도로변을 가득 메웠다. '단결 투쟁'이라고 적힌 빨간 머리띠를 두른 직원들이 "졸속 이전 반대"를 외칠 때마다 집회장은 함성으로 울렸다. 소속은 달랐지만 요구는 하나였다. 국책은행 본점의 지방 이전을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이날 열린 결의대회에는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소속 산업은행·기업은행·수출입은행 조합원 약 2000명이 참여했다. 국책은행 3사 노조가 본점 지방 이전에 반대해 공동 집회를 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세 은행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배경에는 정부의 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 계획이 있다. 정부는 '2026년 하반기 경제성장전략'을 통해 올해 하반기 중 구체적인 이전 계획을 마련하고, 내년부터 선도기관을 중심으로 이전에 착수하겠다고 밝혔다. 수도권에 남는 공공기관을 최소화하고 '5극 3특' 성장전략과 연계해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을 권역별로 집적한다는 구상이다.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에서 세 번째)과 한창민 사회민주당 의원(왼쪽에서 두 번째)이 11일 서울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앞 의사당대로에서 열린 '국책은행 지방 이전 저지 총력투쟁 결의대회'에 참석한 모습./사진=전나경 시대 기자

정부가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공공기관 이전에 속도를 내는 사이 국책은행 내부에서는 정책금융의 경쟁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산업·기업·수출입 금융을 담당하는 국책은행은 정부 부처와 금융시장, 기업 등과 긴밀하게 움직여야 하는 만큼 본점 이전을 단순한 사옥 이동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다.


김현정(더불어민주당·경기 평택시병) 의원과 한창민(사회민주당·비례대표) 의원도 집회에 참석해 연대사를 했다. 김 의원은 국책은행이 서울에 남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금융의 본질은 집적과 네트워크"라며 "실시간 금융 외교와 국가적 프로젝트 협의가 원활이 이루어져야 정책금융의 효율성도 극대화된다"고 짚었다.

이어 "지방에 필요한 건 단순한 국책은행 본점 이전이 아니라 지방 기업에 적기에 충분한 저리 정책자금이 공급되는 것"이라며 "국책은행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최적의 조건으로 자금을 조달해야 지방 기업에도 더 나은 금리로 지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이러한 이유로 2005년 공공기관 지방 이전 계획이 추진되었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책은행인 산업은행, 기업은행, 수출입은행 지방 이전이 안 된다고 이야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집회장에서는 본점 이전을 둘러싼 청년 직원들의 불안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유진 한국산업은행지부 대리는 "깊어지는 고용 불안 속에 소중한 동료들이 하나둘 회사를 떠났다"며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씁쓸한 말이 농담처럼 오고 갔지만 사실 아무도 웃지 못했다. 서로 위로하면서도 누가 떠날지 불안해했고, 함께 손 잡아야 할 동료마저 곁눈질해야 했다"고 말했다.

세 노조는 전날 발표한 공동 입장문에서도 정부의 지방 이전 검토를 두고 "현 정권에 국가 경제를 위한 최소한의 우선순위와 전략이 없다는 방증"이라고 비판했다. 정책금융기관을 지역 균형발전의 수단으로 활용하면 전문인력 이탈과 업무 비효율이 발생해 국책은행의 기능이 약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격려사에 나선 김동명 한국노총 위원장은 "충분한 검토 없이 정책 금융 생태계를 일방적으로 분산한다면 신속한 금융 지원과 국가적 위기에 대응하는 능력까지 약화시킬 수 있다"며 "산업 전환의 위기를 겪는 기업과 노동자, 자금난에 시달리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수출 기업과 국민 경제 전체가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고 목소리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