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솜을 입안 가득 물고 잠을 청한다. 잘 때 이를 가는 소리가 거슬린다고 집주인이 이야기를 했었다. 입주가정교사로 들어왔지만 이 집 역시 중학생 가정교사에게 방을 따로 내어줄만큼 넉넉하지는 않다.
이 집으로 떠나던 날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거기서는 밥은 주지 않겠느냐며 엄마를 달랬다. 엄마는 시장에서 일을 했다. 매일 큰 소쿠리에 나물같은 걸 이고 나가서 팔았다.
이 집으로 떠나던 날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거기서는 밥은 주지 않겠느냐며 엄마를 달랬다. 엄마는 시장에서 일을 했다. 매일 큰 소쿠리에 나물같은 걸 이고 나가서 팔았다.
아빠는, 나의 아빠는 경제활동이 어려웠다. 일본경찰에게 당한 고문, 특히 손톱 밑에 대나무침을 꽂아넣는 고문은 손을 사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엄마가 시장에서 물건을 내다팔면서 네 남매를 키우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한살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이모가 결혼반지를 팔아서 학비를 내줬다. 너는 공부를 잘하니 고등학교는 졸업하라고 이모가 이야기했다. 그렇다고 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아빠처럼 국가를 위해 여군에 자원 입대했다. 월남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은 파병을 결정했다. 또 아빠 생각이 났다. 나도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겠다. 더구나 대한민국 장교가 되어 월남으로 가면 내 입 하나 뿐 아니라 엄마도, 그리고 동생들도 도울 수 있었다.
월남으로 출발 하는 날 엄마는 또 울었다. 딸을 사지로 내모는 기분이 들었으리라. 미군들하고 같이 있어서 맛있는 거 많이 먹을 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하얼빈에서 태어났다. 아빠가 일본경찰을 피해 중국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큰아버지 전부 영주에서 이룬 부를 모두 독립운동에 사용했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광복 후 돌아왔을 때 우리에게 재산은 없었다. 광복의 기쁨으로 마음은 벅찼으나 다시 살아갈 생각으로 막막했다.
우리나라가 성장하면서 우리 집안이 기여했다는 자부심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대신 채웠다.
군대에서 남편을 만났고, 아이들이 태어났고, 손주들이 태어났다. 얼마전 할아버지 묘를 대전국립묘지로 옮겼다.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그리고 아빠가 모두 독립유공자이기 때문이다. 그날 하늘은 파랬고, 해는 내려쬤다. 아무것도 모르는 손녀는 내가 눈물을 흘리자 따라서 운다. 내 아이들은 배고픈건 모르고 컸다. 돈이 없어서 학교를 못간다는 걱정도 해본 적이 없다. 나와 내 남편은 운이 좋았다.
뉴스를 봤다. 할아버지가 뭘 했는지 모르고 이야기한 배우 이야기가 여기 저기서 나왔다. 왜 몰랐을까? 어떻게 몰랐을까? 그런데, 너는 친일파 후손이라고, 그걸 모르고 떠들었냐고 소리치면 우리 기분은 좋아질 건지 생각이 들었다.
그녀 말대로 몰라서, 그런 역사를 배우지를 못해서, 그래도 이제라도 뭐가 문제였는지 알게 되어서 미안한 생각이 든다면 그 말을 하라고 하고 싶다. 가족과 후손이 곤궁해지고 어려워질 걸 알면서도 모든 걸 다 버리고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들의 가족과 후손들은 그 말이 듣고 싶은 거라고. 그리고나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그거면 됐다, 너도 힘들텐데."
#필자가 모친과 대화를 한 후에 모친의 입장에서 쓴 글입니다.
우정엽 미국허드슨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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