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 테러범들이 여객기를 몰고 돌진한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화염이 솟구치고 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오늘(11일)로 9·11 테러가 25주년을 맞았다. 9·11 테러는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테러 조직 알카에다가 납치한 여객기로 뉴욕 세계무역센터, 버지니아주 국방부 등 미국 본토를 공격해 약 3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상 최악의 동시다발 자살 공격이다.

국제사회에서 9·11의 의미는 초유의 미국 본토 대형 피격, 냉전 이후의 극단주의와 테러리즘의 21세기 안보로의 전환점, 문명 간의 충돌 상징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이 사건은 외세의 침략을 거의 받지 않던 미국 본토가 무참히 공격받은 최초의 대형 사건이다. 그리고 20세기의 이념 대결 대신 극단주의와 테러리즘이 21세기 세계 안보의 핵심 화두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면서 냉전 이후의 전환점이 됐다.



아울러 알카에다는 물론 일부 서구의 보수주의자들이 9·11을 서구 문명과 무슬림의 전쟁으로 규정하고 종교적·정치적 공포와 갈등, 그리고 증오를 극대화하려고 시도했다. 이를 통해 9·11은 문명 간의 충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자리 잡았다.

9·11 테러 이후 미국 주도의 대테러 전쟁(War on Terror)이 시작돼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 시작됐으며, 미국은 중동 지역에 깊숙이 개입했다. 미국의 중동 개입은 베트남전보다 훨씬 길고 깊었으며, 비용도 더 많이 들었다. 더욱더 비극적이며 들어가기보다 빠져나오기가 더욱 힘든 진창 같은 분쟁이었다.

9.11 테러를 기획한 이슬람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왼쪽)과 그의 부하인 아이만 알 자와히리의 모습. 파키스탄에 숨어살던 빈 라덴은 2011년 5월 2일 미 중앙정보국(CIA)의 장기 추적으로 위치가 발각돼 미 해군 특수부대인 DEVGRU(옛 SEAL 6팀)의 공격으로 사살됐다. 알 자와히리는 2022년 7월 31일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 은신해 있다가 대형 칼날이 장착된 미군의 변형 헬파이어 미사일 공격으로 사망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미, 전쟁 이겨도 민주주의·시장경제 확산이라는 세계전략 펼치지 못해>
9·11 테러 이후 4반세기가 지나면서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군사개입'만으로는 국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미국은 2001년 9·11테러 이래 중동지역의 국제적 문제에 5차례에 걸쳐 군사적으로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개입했지만, 정치적으로 원하는 것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2001~2021년 미군 철수까지), 이라크 전쟁(2003년~2011년 미군 철수까지), 리비아 공습(2011년), 시리아 공습(2017년), 그리고 이란 전쟁(2026년) 등 5개의 전쟁 또는 분쟁이 그것이다. 물론 군사적으로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특히 초기에는 강한 화력과 기동력, 그리고 정보전·디지털전 능력을 바탕으로 막강한 전력을 과시했다. 미군은 토마호크 순항미사일로 전력, 통신, 방공망을 제거한 뒤 공중폭격으로 지상의 중화기를 제압하고 이어 지상 병력을 투입해 '퍼펙트게임'으로 승리했다. 미국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전력을 보유한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 군사력으로 전쟁에선 승리했지만 이를 통해 의도했던 국제정치적인 목적은 제대로 달성한 경우가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2011년 5월 2일 미국 백악관 상황실에 모인 버락 오바바 대통령 등 미국 지휘부가 위성통신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달된 오사마 빈 라덴 사실작전을 지켜보고 있다. 작전을 잘 아는 미군 장성이 중앙에 앉고 작전 보안을 위한 기만작전을 위해 골프를 치고 돌아온 오바마 대통령은 구석에 앉아 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아프가니스탄 전쟁: 독재정권 몰아냈더니 혼란·학살·내전·테러 이어져>
미국이 2001년 시작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에 숨어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9.11 테러 배후 오사마 빈 라덴을 체포하고 테러 조직 알카에다 훈련기지를 제거하며 그를 비호해온 탈레반 세력을 응징하는 것이었다. 미군은 압도적인 점령으로 신속하게 수도 카불을 점령하고 탈레반을 내쫓고 아프가니스탄에 새 정권을 세웠다. 하지만 이 정권은 카불의 지역 정권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아프가니스탄 상당 지역은 여전히 탈레반이 지배했다. 게릴라전이나 부족 간의 이해관계도 문제였지만 3200만 인구의 42%를 차지하는 최대 민족 파슈툰족에 기반을 두고 있는 탈레반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패착의 하나로 지적된다.

2021년 8월 30일 밤,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에서 미 육군 82 공수사단장인 크리스토퍼 도나휴 장군이 단독 군장 차림으로 마지막 철수인원으로서 수송기에 오르고 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이런 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은 내전과 부족 갈등, 테러의 삼중고로 혼란에 빠졌으며 주민들은 질곡에 빠졌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라크 전역을 점령했어도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게릴라와 급조폭발물(IED)로 인해 주둔 미군은 계속 숨져갔다. 지역 혼란과 치안 공백을 틈타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한 새로운 테러 세력에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미국은 급기야 유럽 국가 중심의 나토군에 아프가니스탄의 안전을 맡겼지만, 상황이 제대로 수습되지 못했다.

이라크전 당시 미군이 바그다드로 진입하자 주민들이 사람 후세인 대통령의 동상을 끌어내리고 있다. 마지막엔 지나가던 미군 차량의 도움을 얻어 동상을 밧줄로 묶어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이라크 전쟁: 민주 선거 치렀더니 친이란 시아파 정권 들어서>
이는 이라크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이라크와는 1991년 쿠웨이트 점령에 따라 걸프전쟁을, 1993년 대량파괴 무기(WMD) 사찰 거부 문제로 이라크전쟁을 각각 치렀다.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쿠웨이트 수복이라는 애초 목표만 달성하고 전쟁을 끝냈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라는 '화근'을 그대로 두는 바람에 1993년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은 이라크 전쟁 때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미군에 체포된 후세인은 정적들의 손에 넘어가 처형됐다. 이후 이라크는 미국과 서방의 요구대로 민주적인 선거를 치렀고 새로운 정권이 탄생했다. 선거 결과는 인구조사 결과나 마찬가지였다. 인구에서 다수인 이슬람 시아파가 정권을 차지했다. 당시 국제사회에선 '이라크에서의 선거는 인구조사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돌았다. 부족사회 성격이 강한 이라크에선 서구식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식되기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2003년 12월 3일 9개월간 은신해 있던 토굴에서 미군 관계자에게 체포되고 있다. 그를 안고 있는 사람은 사미르라는 이름의 이라크 출신 미국인 통역이다. 1968년 바트당 쿠데타로 집권한 후세인은 1979년부터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이라크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이라크·시리아에선 극단주의 IS 세력 확대로 주민 희생>
후세인 정권 당시 박해를 받았던 시아파는 정권을 잡으면서 이웃 시아파 맹주 이란과 관계를 강화했으며 교역 등 경제 분야에서도 밀착했다. 수니파 맹주 사우디아라비아를 앞세워 중동의 반미국가 이란을 견제하려던 미국의 대중동 전략이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권력을 잃고 박해받게 된 수니파들이 들고일어나 이라크는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졌다. 무기력한 중앙정부는 극단주의 이슬람 무장세력인 IS(이슬람국가)가 2014년 6월 북부의 제2도시 모술과 인근 유전지대를 점령한 뒤에도 3년간 해결하지 못하다 2017년 7월에야 간신히 탈환했다. IS는 중동지역 세력 공백을 틈타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일부를 근거지로 2014년부터 세력을 떨치다 2019년 마지막 거점을 잃었다.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2011년 10월 20일 고향인 시르테의 수로에 숨어있다 주민들에게 붙잡힌 뒤 10대의 총에 머리를 맞고 괴로워하고 있다. 카다피는 이날 숨졌다. 1969년 무혈 쿠데타로 집권해 42년간 집권한 가다피의 최후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리비아 공습(2011년): 카다피 몰락 뒤 군벌이 동서 내전 벌이고 전국적 혼란>
리비아도 무력을 통한 정권 전복이 국가 안정에 항상 도움을 주지는 못 한다는 교훈을 준다. 2011년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나토 국가는 당시 '아랍의 봄'으로 봉기한 반정부 시민군을 돕기 위해 무아마르 카다피 정부의 군대와 기지를 순항미사일과 전투기로 폭격했다. 나토 폭격 속에서 정부는 전복됐고 카다피는 주민에게 피살됐다. 하지만 서방의 예상과 달리 독재자가 사라졌어도 민주주의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리비아는 서부의 트리폴리, 동부의 벵가지로 동서로 나뉘어 내전을 벌였다. 그것도 부족해 2014년에는 선거 분쟁으로 트리폴리와 투브루크로 정부가 2개로 쪼개져 대립 중이다. 여기에 부족 간의 대결도 극심한 상황이다. 권력 공백을 틈타 침투한 IS, 알카에다 등 테러 집단 때문에 대혼란에 빠졌다. 2012년에는 벵가지의 미국대사관이 무장단체의 습격을 당해 크리스토퍼 스티븐스 대사 등 4명이 숨졌다.

2012년 시리아 내전으로 파괴된 이 나라 제2의 도시 알레포의 거리. 시리아 정부군과 러시아군이 수니파 반군과 이들을 지지하는 시민을 집속탄 등으로 지속적으로 폭격해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당시 시민들의 끈질긴 저항은 내전의 주요 변곡점으로 꼽힌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시리아 폭격(2017년): 주민 가스 공격한 시리아 정부군에 미사일 발사했지만 '상징적'>
2017년 4월 1기 행정부 당시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시리아 미사일 공격을 명령했다. 당시 미국은 자국민(반정부군과 민간인)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한 것으로 의심되는 시리아 알아사드 정권의 공군기지 등을 향해 지중해의 군함에서 순항미사일을 발사했다. 이 공격은 상징적인 의미만 있었을 뿐, 당시까지 33만~47만5000명이 숨지고 760만이 집을 잃은 시리아 내전이라는 인류사의 비극을 해결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시리아에선 7년 뒤 미국이 아닌 튀르키예의 개입으로 타흐리르 알샴이 주도하는 수니파 반군이 대규모 공세를 벌여 2024년 12월 8일 수도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면서 정권 교체를 이뤘다. 1971년 공군 장교 출신 하피즈 알아사드가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2000년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로 이어진 2대 세습 정권은 그날로 무너지고 러시아로 망명을 떠났다. 인구에서 다수인 수니파와 집권 알아사드의 소수 알라위파(시아파의 한 분파) 세력이 2011년 3월부터 2024년 12월까지 약 13년간 벌인 내전은 이렇게 끝났다.

이란전 초기인 3월 3일 테헤란에서 폭격으로 부상을 입은 한 노인이 청년들의 도움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사진=퍼블릭 도메인


<미, 이란전에선 AI 전쟁 능력 선보였지만, 테헤란의 드론·지정학 전술에 쩔쩔>
미국이 군사력에서 상대를 압도했음에도 이를 전쟁 종결과 평화협상으로 연결하지 못한 것은 지난 2월 28일 개전한 '장대한 분노 작전'이라는 이름의 이란전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개전 당일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이란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에 대한 '참수 작전'을 수행했다. 미군은 AI 민간업체인 팰런티어의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MSS)' '고담' 등 AI 시스템을 이용해 위성 영상, 드론 정찰 데이터, 통신 기록, SNS 등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하메네이와 이란 지도부의 동선을 정확히 포착했다. 앤스로픽의 AI 프로그램인 '클로드' 등은 수만 가지에 이르는 공습 직전 시나리오 중 최적의 작전 경로를 제시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AI 활용으로 당시 표적 포착부터 타격 완료까지 단 11분 23초가 걸렸다.

하지만 이란은 페르시아만(아라비아만) 연안의 미국 동맹국을 미사일과 드론으로 공격하고 세계 에너지의 약 20%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을 틀어막는 비대칭전과 지정학적 봉쇄 전술을 펼치면서 저항했다. 이란·러·중·북한이 드론·미사일 등으로 실질적인 협력체를 구성했다.

그 결과 미국은 초기 참수 작전 성공 여파를 이어가지 못하고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란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지만, 어느 정도 버티고 있다. 미국의 군사적 개입으로 민주화를 외치던 이란 청년층은 괴멸적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현재 미국은 이란에서 전쟁도 아니고 평화도 아닌 '장기 소모전' 상황을 맞고 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가슴을 칠 수밖에 없다.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 지도자가 지난 2017년 종교 행사에서 기도하고 있다. 이슬람 시아파와 이란 국가의 최고 수장이다. 올해 전쟁 첫날 미국의 폭격으로 숨졌으나 이란의 전쟁 지속능력에는 변함이 없었다. /사진=이란 최고지도자실


<비서구 사회에 대한 이해 부족이 원인…무력 아닌 소프트파워 필요한 '신국제정치 패러다임'>
이처럼 9·11 이후 미군이 벌여온 5개의 전쟁을 살펴보면 국제관계에 대한 미국의 한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서구가 아닌 지역에서, 종교·종파·민족·정체성·지역주의·부족주의·지역 역사·주민문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군사력을 앞세운 개입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질적인 중동 사회에서도 독재자만 제거하면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도입되고 글로벌에 편입될 것으로 오해한 셈이다. 이런 오해는 중동의 안정을 해치고 내전·혼란·테러 등 부정적인 영향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벌인 5개의 전쟁은 국제사회가 군사력 의존에서 벗어나 소프트파워, 대화, 상호존중, 교류 확대 등 다양한 정치적 노력으로 평화와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5개 전쟁은 힘에 의지한 무력 개입으로 평화, 안정, 인도주의, 영향력을 얻는 시대가 이제는 종언을 고했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이제 힘으로는 어느 것도 제대로 얻지 못하는 '신국제정치 패러다임'의 시대를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