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은행 유언대용신탁 잔액이 올해 8개월 만에 3조원 넘게 늘며 상속 준비가 사후에서 생전 설계로 앞당겨지고 있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시중은행의 유언대용신탁 잔액이 올해 들어 8개월 만에 3조원 넘게 불었다. 직전 3년 동안 늘어난 금액을 올해 들어 단 8개월 만에 넘어선 것이다. 그간엔 상속이 임박한 고령층을 중심으로 이용되던 상품이었지만 생전 자산관리와 사후 승계를 함께 설계하려는 수요에 주목을 받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 4대 은행의 유언대용신탁 잔액은 지난달 말 기준 7조6581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말 4조5002억원에서 3조1579억원(70.2%) 증가했다.



증가 속도는 이전과 비교해 가팔라졌다. 2023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늘어난 잔액은 2조4061억원으로 올해 8개월 간 증가분보다 적다. 월평균 증가액으로 보면 직전 3년간 668억원에 그쳤던 게 올해 들어서는 3947억원으로 늘었다.

유언대용신탁은 생전에 금융회사와 신탁계약을 맺고 재산을 맡긴 뒤 사망 이후 미리 지정한 수익자에게 재산이 넘어가도록 설계하는 상품이다. 신탁법 제59조에 근거를 둔다.

상속 직전서 생전 설계로

은행권에선 상품 가입 문턱도 낮아지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지난해 간편형 유언대용신탁을 내놓으며 가입 대상을 넓혔고, 우리은행도 소액 가입이 가능한 초간편형 상품을 출시했다. 신한은행은 간편계약과 금전기본계약을 잇달아 도입했다. 우리은행이 현재 판매하는 유언대용신탁도 생전에는 본인을 수익자로 두고 사후에는 배우자·자녀·제3자 등으로 수익자를 지정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과거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고령층이 상속을 앞두고 찾는 상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가입 시점을 앞당겨 본인의 생전 생활비와 사후 재산 승계를 함께 설계하려는 수요가 늘고 있다는 게 은행권의 설명이다.



원정현 신한은행 프리미어PWM 강남센터 팀장은 "최근에는 상속이 임박해서 준비하기보다는 비교적 건강하고 의사결정이 명확할 때부터 본인의 노후생활과 사후 자산 이전을 함께 설계하려는 고객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장애가 있는 자녀가 있는 가구처럼 부모 사후에도 지속적인 재산 관리가 필요한 가족에서 활용도가 높다는 설명이다. 신한은행은 상속재산을 둘러싼 가족 간 다툼이 예상되는 경우나 특정 자녀·손자녀에게 재산을 남기려는 경우, 1인 가구가 기부단체 등에 재산을 승계하려는 경우 등을 주요 활용 사례로 제시한다.

급격한 고령화도 유언대용신탁이 주목받는 이유로 꼽힌다. 보건복지부의 2023년 치매역학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치매 환자는 올해 1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해 97만명에서 올해 101만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치매 환자가 보유한 자산 관리 문제도 커지고 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 치매환자 약 124만명이 보유한 소득·재산 등 이른바 '치매머니'는 154조원으로 집계됐다. 2050년에는 488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

공공 영역에서도 재산관리 수요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국민연금공단은 올해 '치매안심 재산관리서비스' 시범사업을 시작했고, 7월에는 첫 계약 사례가 나왔다. 치매 등으로 스스로 재산을 관리하기 어려운 고령자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의료비·요양비·생필품 구매 등에 필요한 자금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식이다.

신탁해도 분쟁은 남는다

다만 유언대용신탁이 상속 분쟁을 자동으로 막아주는 것은 아니다. 원 팀장은 "상담 과정에서 '유류분과 관계없이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 재산을 줄 수 있느냐'는 질문이 가장 많다"며 "신탁을 설정하더라도 상속 관련 법률 분쟁 가능성이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 유언대용신탁과 유류분의 관계를 둘러싼 법적 쟁점은 이어지고 있다. 대법원은 2024년 유언대용신탁 계약에서 위탁자 사망 후 수탁자를 유일한 수익자로 정한 부분의 효력 등을 판단한 바 있다. 절세 수단으로 보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원 팀장은 "유언대용신탁 자체를 상속세를 회피하거나 줄이는 수단으로 보기는 어렵다"며 "실제 세금은 개별 자산과 가족관계 등을 따져 별도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