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스스로를 '군사(君師)'라 불렀다. 임금이자 만백성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배경 그림은 1795년 정조의 화성 행차 7일째 되는 날 행렬이 시흥행궁에 도착한 장면을 그린 '시흥환어행렬도'./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 Gemini



1781년(정조 5년) 동구릉(현 경기 구리시 인창동). 정조가 영조의 원릉에 참배하고 몇 걸음 떨어진 태조의 건원릉으로 옮겨 절을 마친 뒤 돌아보니 따르는 관원이 열두어 명이었다. 현종의 숭릉에 이르렀을 때 따라붙은 대신은 한 명도 없었다. 선왕들의 능을 빠짐없이 도는 강행군에 대신부터 노비까지 지쳐 주저앉았다. 조선 시대에는 윗사람 앞에서 쩔쩔맸을 것 같지만, 사람의 본성은 똑같다. 분노한 정조는 "이러면 나라가 망한다"며 우의정을 파면했고, 대간도 내쳤다.

조부 영조도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대응한 방식이 달랐다. 영조는 딸의 집에 들어가 밤늦도록 나오지 않았다. 수행원들은 새벽까지 대기하면서 '벌'을 서야 했다. 이후로 수행원들은 감히 농땡이를 부리지 않게 되었다. 영조는 다른 사람의 심리를 읽고 해결 방법을 찾았다. 정조는 '원리원칙'에 의존했다. 자신이 왕이다 보니 모든 원칙이 자신의 편이었다. 왕의 자리도 부족하다고 여겨 자신을 '군사(君師)'라 불렀다. 임금이자 만백성의 스승이라는 뜻이다.



리더십의 관점에서 보자면 위험한 자기 규정이다. 왕은 다스리는 사람이고, 스승은 가르치는 사람이다. 둘 다 배우는 쪽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는다. 정조를 '개혁 군주'로 치켜세우는 사람이 많지만, 개혁과 별도로 리더란 관점에서 보면 정조는 실수를 많이 했다.

첫째, 그는 직접 조직했다. 정조 12년 '장용영'을 세웠다. 수도 방위를 맡은 '오군영'이 당파에 장악당하자, 개혁하는 대신 자기 '친위 군영'을 새로 만들었다. 재정도 개인 비용으로 조달했다. 당연히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러자 집단농장을 만들어 병사들이 경작하게 하고, 이자를 받을 수 있도록 '환곡'까지 맡겼다. 병사들은 땅은 소작을 주고 고리대를 운영했다. 농부도 아니고 전사도 아닌 집단이 되었다. 오군영 병사들은 불법을 저지르면 나라의 눈치라도 보는데, 왕이 뒷배인 장용영 병사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정조는 관리들의 불법을 비판하고 자신은 정직한 권력자라고 자신했지만, 비리가 발생하는 구조적 원인을 몰랐다.

둘째, 그는 직접 가르쳤다. 세종의 '사가독서제'는 문신 몇을 뽑아 일정 기간 아무 책이나 읽게 했다. 읽은 책의 수와 시문을 보고하게 했다. 정조가 만든 '초계문신제'는 달랐다. 매달 두 번 사서삼경 시험을, 매달 한 번은 임금이 주관하는 시험을 치르고 임금의 강의도 들어야 했다. 낙제하면 벌금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백일장에서 지은 글에는 개혁 논의가 없다. 화려한 미사여구와 정조에 대한 예찬이 있었을 뿐이다. 이상할 것도 없다. 임금이 시험을 주관하는데 뭘 쓰는 게 유리한지 모를 사람은 없다. 세종은 '뭐라도 성과가 나올 것'이라는 전제로 제도를 세웠는데, 정조는 '무엇이 나와야 하는지' 정해놓고 제도를 운영했다. 천재는 나오지 않고 아부꾼만 늘었다.



셋째, 그는 직접 판정했다. 서얼 박제가를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하고 네 차례나 북경에 보냈지만, 정작 그가 쓴 『북학의』는 묻어두었다. 『열하일기』 등 박지원의 글은 불순한 '잡문체'로 규정해 반성의 의미로 순정한 고문을 지어 바치게 했다. 정조 15년 최초의 천주교 박해로 꼽히는 '진산사건' 때는 사태 확대에 반대하고 남인을 지켰지만, 한역(漢譯) 서학서는 거둬 불태웠다. 조치와 처벌엔 관용을 베풀었지만 판단은 늘 자신이 내렸다. 무엇이 바른지 이미 안다고 믿는 사람에게 다른 생각은 반박할 대상이 아니라 교정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우리는 정조의 시대를 조선에서 가장 개방적인 시대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 시대 임금은 가장 확신에 찬 정통 성리학자이기도 했다. 두 얼굴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였다. 바른 것이 이미 서 있다고 믿었기에 낯선 것을 겁내지 않고 들여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같은 이유로 그것이 제자리를 넘어서면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정조가 세상을 뜬 이듬해 천주교를 배척하는 '척사윤음'이 반포되고, 그가 지키려 했던 남인들이 그 칼에 스러졌다. 정조는 온건했고, 사람을 널리 죽이지 않았다. 다만 무엇이 '바른 문체'이고 무엇이 '바른 학문'인지 위에서 판정한다는 문법을 이십 년 넘게 국가의 공식 언어로 다듬어 놓았다. 그의 사후 이런 확신의 언어를 온건하지 않은 사람들이 집어 들면서 탈이 났다. 정조가 만든 제도는 대부분 남지 않았는데 그 '문법'은 오래 남았다.

오늘날의 조직에서도 같은 장면을 본다. 기존 조직을 못 믿어 '직할 조직'을 세운다. 사람을 기른다며 만든 프로그램은 어느새 친목과 찬사의 자리가 된다. 어렵게 영입한 외부 인재의 보고서를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한마디로 덮는다. 무능의 결과가 아니다. 가장 부지런하고, 문제의식이 뚜렷한 리더가 오히려 이 길로 들어선다. '내가 제일 잘 알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대체로 사실이어서 더 위험하다.

리더가 가장 똑똑한 조직은 리더만큼만 간다. 그리고 리더가 떠나는 날 거기서 멈춘다. 더 무서운 건 아주 멈추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제도는 남지 않아도 '금기'는 남는다. 정조가 끝내 묻지 않은 질문이 있다. '내가 옳은가'가 아니라, '내가 없어도 이 옳음이 굴러가는가'. 스스로 스승이 돼버린 리더는 그 질문에 도달하지 못한다.


노혜경 호서대 혁신융합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