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의 근육을 마비시키던 보툴리눔 독소가 눈 질환을 치료하고 주름을 개선하는 의약품으로 변신했다. 치명적인 독성을 없앤 것이 아니라 신경 전달을 차단하는 작용을 정밀하게 통제하면서 생명을 위협하던 물질이 치료·미용 산업의 기반이 된 것이다. 시장조사업체 포천비즈니스인사이트는 지난해 치료용과 미용용을 합친 세계 보툴리눔 톡신 시장을 118억7000만달러로 추산했다. 달러당 1400원을 적용하면 약 16조6000억원에 달한다.
질병관리청 등에 따르면 보툴리눔 독소는 가장 치명적인 독소 가운데 하나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적은 양으로도 근육 마비와 호흡 곤란, 사망을 일으킬 수 있으며 생물테러에 악용될 우려가 있다고 설명한다. 국내에서는 보툴리눔균이 고위험병원체로 관리돼 균을 분리하거나 이동할 때 신고해야 한다.
보툴리눔의 역사는 식중독에서 시작됐다. 1790년대 독일에서는 소시지를 먹은 뒤 시력 저하와 마비 증상을 겪는 사례가 잇따라 보고됐다. 원인은 알 수 없었지만 훗날 보툴리즘으로 명명됐다. 독일 의사 유스티누스 케르너는 1822년 소시지 독 증상을 체계적으로 기록하며 독소가 신경 전달을 차단한다는 사실을 추정했고, 치명적인 독이 의학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제시했다.
1895년 벨기에 세균학자 에밀 판에르멩헴은 식중독 사고를 조사하며 독소를 생성하는 세균을 발견했다. 보툴리눔균(Clostridium botulinum)으로 명명된 이 혐기성 세균은 토양 등에 서식한다. 보툴리눔이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소시지를 뜻하는 '보툴루스'(botulus)에서 유래했다.
전환점은 1970년대 찾아왔다. 미국 안과의사 앨런 스콧은 사시 환자의 눈 근육을 교정하기 위해 보툴리눔 독소 연구에 나섰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1989년 사시와 안검경련 치료용으로 보툴리눔 톡신 제제를 처음 허가했다. 투여 과정에서 눈가와 미간 주름이 완화되는 효과가 보고되면서 치료제였던 보툴리눔 톡신은 미용 산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1991년 미국 제약사 앨러간은 오큘리눔(Oculinum)을 인수한 뒤 제품명을 보톡스(BOTOX)로 바꿔 판매했다. 주름 개선 효과로 널리 알려지면서 보톡스는 보툴리눔 톡신 시술을 통칭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2002년 FDA가 미간 주름 개선 목적의 사용을 승인하면서 시장은 본격적인 성장 국면에 진입했다. 주사 한 번으로 주름을 개선할 수 있다는 점이 부각되며 대표적인 비수술 미용 시술로 자리 잡았고, 적응증은 다한증과 편두통, 근긴장이상 등으로 확대됐다.
김범준 중앙대병원 피부과 교수는 "독소의 성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정제된 독소를 극히 적은 양으로 정확한 부위에 투여해 그 작용을 치료 목적으로 활용한다"고 말했다. 필러가 볼륨을 보충하는 시술이라면 보툴리눔 톡신은 근육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시술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대중화의 배경에는 짧은 시술 시간과 적은 회복 부담이 있었다. 김 교수는 "간단한 주사 시술만으로 효과를 얻을 수 있고 회복에 필요한 시간이 짧으며 효과를 예측하고 조절하기가 비교적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효과는 대개 3~4개월 유지되지만 개인과 제품에 따라 차이가 난다.
보툴리눔 톡신은 세계적으로 연간 수백만 건이 시행되는 미용 시술로 자리 잡았다. 국제미용성형외과학회(ISAPS) 조사에 따르면 세계 성형외과 의사들의 보툴리눔 톡신 시술은 2016년 493만건에서 지난해 733만건으로 약 1.5배 늘었다. 지난해 히알루론산 필러 시술(약 474만건)을 크게 웃도는 규모다.
고령화와 비수술 미용 치료 수요 증가는 보툴리눔 톡신 시장의 성장 요인으로 꼽힌다. 포천비즈니스인사이트는 고령인구 증가가 성장을 뒷받침한다고 분석했다. 국내에서도 수천억원대 규모 시장이 형성됐다. 그랜드뷰리서치는 지난해 국내 보툴리눔 톡신 의약품 시장을 2억7940만달러(약 3912억원)로 추산했다.
글로벌 시장이 성장하면서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도 본격화했다. 국내에서는 2006년 메디톡스가 국내 최초 톡신 의약품 메디톡신을 출시했다. 대웅제약 나보타(미국명 주보)는 2019년, 휴젤 보툴렉스(미국명 레티보)는 2024년 미국 허가를 받았다.
지난해 휴젤 보툴렉스 매출은 2338억원으로 전년 대비 15% 증가했다. 나보타는 2289억원으로 23%, 메디톡신은 1277억원으로 8.2% 늘었다. 해외 매출 비중은 휴젤과 메디톡스가 톡신·필러 합산 기준 각각 74%, 52%였고 대웅제약은 나보타 기준 84%를 기록했다.
독소가 의약품이 되는 조건은 정밀한 통제다. 김 교수는 "보툴리눔 톡신을 안전하게 활용하려면 정확한 용량과 투여 위치, 의약품 품질이 중요하다"며 "제조 과정에서 순도와 역가, 무균성, 품질의 일관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치명적 독소에서 17조원 규모 산업으로 성장한 보툴리눔 톡신 시장은 이제 품질과 기술력을 앞세운 경쟁 국면에 들어섰다. K톡신의 다음 경쟁력은 시장 확대가 아니라 품질과 기술력에서 판가름 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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