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


수의대를 졸업한 뒤 동물병원에 처음 취업한 인턴 수의사가 있다. 1년 계약이었지만 원장은 그가 계약 만료 전에 그만두기를 바랐다. 계약상 퇴근 시간은 오후 7시였지만 그는 밤 10시까지 일해야 했다. 바쁘지 않은 날만이라도 먼저 퇴근하게 해 달라고 하자 "월급 깎아도 돼?"라는 답이 돌아왔다. 퇴사 압박에도 버티자 원장은 그를 진료에서 빼고 청소와 접수를 맡겼다. 이런 경우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까.

법원의 답은 '그렇다'였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서부지법 민사1-1부는 지난해 5월 인턴 수의사 A씨가 동물병원 원장 B씨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양측 항소를 모두 기각했다. 이로써 B씨가 A씨에게 위자료 1000만원과 미지급 수당 등 약 1970만원을 지급하라는 2023년 11월 1심 판결이 유지됐다.



2020년 3월 입사한 A씨의 계약서상 근로시간은 하루 9시간이었다. 그러나 6개월 동안 쌓인 연장근로만 285시간에 달했다. A씨가 연장근로를 줄여 달라고 하자 B씨는 "너 인턴이지? 일하는 사람 아니지?"라고 되물었다.

B씨는 "너 이번 달까지만 해라"라며 수차례 해고를 거론했다. A씨가 계약 기간을 채우겠다고 하자 B씨는 그를 진료에서 배제하고 청소·접수를 맡겼다. A씨에게만 단체대화방 출근 보고도 지시했다. A씨가 이의를 제기하자 B씨는 "내가 여기 주인"이라고 말했고 청소만 시켜 괴롭다는 호소에는 "장난하냐?"고 답했다.

B씨는 결국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며 입사 6개월 만에 A씨를 해고했다. 법원은 B씨가 "(A씨가) 자발적으로 사직하는 모양새를 만들기 위해 원장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A씨를 괴롭혔다"고 판단했다. 포괄임금 약정을 이유로 수당을 줄 수 없다는 B씨의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근로기준법 제76조의2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다. 인턴이라도 원장이 지위를 앞세워 계약에 없는 일을 시키고 공개적으로 망신을 줘 스스로 나가게 만들면 괴롭힘이라는 게 판결의 골자다.

정봉수 강남노무법인 노무사는 동행미디어 시대와의 통화에서 "통상 직장 내 괴롭힘에 의한 위자료는 200만~500만원 수준"이라며 "법원이 위자료를 1000만원으로 정한 것을 보면 수의사 인턴을 향한 병원장의 괴롭힘 수준이 상당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13일 서울 광화문광장 사거리에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