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은 늘 격랑(Turbulence)과 혁신(Innovation)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그리고 혁신으로 격랑을 헤쳐 나가는 것만이 살길이다. 안에서는 자금과 인재, 제품이 매일 시험대에 오르고, 밖에서는 시장과 기술, 국제 정세가 쉼 없이 출렁인다. 그중에서도 AI 분야의 격랑은 전대미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최신 AI 모델과 첨단 기술이 등장하고, 그때마다 세계는 놀란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AI 시대에는 혁신끼리 앞다퉈 서로를 추월하고 있다.

반도체 강국인 대한민국에서 혁신은 오랫동안 무어의 법칙(Moore's Law, 칩의 트랜지스터 수가 약 2년마다 두 배로 늘어 성능도 그만큼 향상된다는 성장 공식)을 따라 반도체가 발전해 온 과정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 AI 추론(Inference, 학습을 마친 AI 모델이 실제로 답을 내놓는 과정)의 시대를 맞아 그 무대는 메모리 반도체를 넘어 AI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 전반으로 넓어지고 있다. 자국의 기술과 인프라로 AI 역량을 확보하려는 소버린 AI(Sovereign AI) 경쟁도 이 무대에서 펼쳐진다. 이처럼 무대가 커질수록 혁신이라는 이름은 더욱 설렌다.

스타트업이 회사소개서에서 가장 자주 꺼내 드는 표현인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그 이름이 가리키는 과정은 말보다 훨씬 무겁다. 그 안에는 무수한 도전과 실패, 이를 견디는 용기, 그리고 그 모두를 떠받치는 지원이 함께 들어 있다. 기업은 기술로 가능성을 증명하고, 투자자는 도전의 시간을 벌어주며, 정부와 공공은 시장이 스스로 열지 못하는 첫 문을 열어줘야 한다. 신기술 기업에 가장 열기 어려운 문은 '첫 고객'이다. 공공 부문은 경쟁입찰이 원칙이고, 새로운 제품을 도입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담당자에게 부담이 돌아갈 수 있다. 공정성과 책임성을 위한 장치가 역설적으로 새 기술의 진입에는 높은 문턱으로 작용하는 셈이다.

2024년 3월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세계보안엑스포'를 찾은 관람객들이 CCTV카메라와 AI 연동 시스템을 둘러보고 있다./사진=뉴스1


이 문턱을 낮추기 위한 우리 정부의 해법이 혁신제품 지정 제도라고 생각한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혁신 기술의 '첫 구매자'가 되어 초기 시장을 열어주는 제도다. 소관 부처 추천과 재정경제부 조달정책심의위원회 심의로 지정된 제품은 「조달사업에 관한 법률」 등에 따라 최대 6년간 경쟁입찰 없이 수의계약이 가능하다. 조달청 예산으로 시범구매도 지원받는다. 통상 60일 안팎이던 조달 기간이 10일 이내로 줄어든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혁신은 곧 속도이기 때문이다. 구매 담당자는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없는 한 책임을 지지 않는 '구매 면책'도 적용받는다.

이 제도의 의의는 정부의 역할을 '기술 개발의 지원자'에서 '첫 구매자'로 넓혔다는 데 있다. 그 수혜자는 기업만이 아니다. 공공은 검증된 혁신 기술로 공공서비스의 품질과 효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 이 제도가 특히 중요한 분야는 AI 인프라다. 국산 NPU(AI 연산에 특화된 반도체)를 예로 들어 보자. 기업 입장에서는 글로벌 GPU 생태계 속에서 초기 레퍼런스를 쌓기가 쉽지 않다. 동시에 공공 입장에서 국산 NPU는 AI 인프라의 전력 효율을 높이고 기술 자립을 다지는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NIA(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의 공공 AI CCTV 전환 사업으로 경남·울산 관제센터에 국산 NPU 서버가 공급된 것이 그 시작이다.

소버린 AI가 선언적 구호를 넘어 현실이 되려면, 혁신제품 지정 같은 구체적인 제도의 뒷받침 위에서 우리 기술이 성과를 내야 한다. 물론 혁신제품 지정은 출발선일 뿐, 현장에서 성능과 안정성을 입증하는 것은 기업의 몫이다. 격랑 속에서 혁신을 만들어내는 기업에는 격려가, 그 도전을 뒷받침하는 제도에는 꾸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좋은 제도가 더 널리 알려지고 오래 지속될 때, 혁신은 단단한 토양 위에서 뿌리내리고 자랄 수 있다.

리벨리온 신상규 부사장


신성규 리벨리온 CFO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으며, 한국 공인회계사로 삼일회계법인과 미국 PwC에서 경력을 쌓았다. 2021년 AI 반도체 기업 리벨리온에 합류해 투자 유치와 운영을 총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