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 A씨는 지난해부터 달라진 근무환경에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체험하고 있다. 주 52시간 조기 도입으로 눈치 보지 않고 출퇴근하는 문화가 생겨서다. 아침에 하던 화상교육과 회의는 사라졌고 주간회의는 월요일 마감 이후로 미뤄졌다. A씨는 “불필요한 회의·업무가 사라지고 야근이 확실히 줄었다. 퇴근 후 운동하고 독서모임에 참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은행권에 워라밸 바람이 불고 있다. 보수적인 조직문화에서 벗어나 업무 효율성을 높이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사진=임한별 기자
/사진=임한별 기자
최근 신한·우리·KEB하나·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은 임단협(임금 및 단체협상)에서 직원들의 근로·복지 조항을 대폭 개선했다. PC오프제를 통한 주52시간 근무제 도입과 임금피크제 진입 1년 지연, 출산 유급휴가 확대, 출근시간 유연화 등이다.
고객들이 몰리는 점심시간에도 직원들의 휴식을 보장키로 했다. 보수적인 문화로 단련된 은행원들이 자유로운 환경에서 근무하면서 삶의 질이 나아질 전망이다.


◆‘저녁이 있는 삶’ 열풍

은행권은 지난해부터 근로시간 단축에 나서고 있다. 오는 7월부터 300인 이상 기업 및 공공기관 중 특례제외업종 사업장도 주 52시간 근무제가 확대·적용돼서다.

최근 임단협을 마친 KB국민은행은 PC오프제를 활용해 직원의 점심 1시간 동안 휴식을 보장키로 했다. PC오프제는 일정시간이 지나면 업무용 PC가 자동으로 꺼져 일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한달에 8일은 예외로 두고 업무시간 안에만 PC를 사용하도록 노사가 약속했다.

신한은행도 PC오프제를 도입해 주 52시간 근무제를 시행 중이다. 부서장의 승인이 있으면 PC 연장 사용이 가능하지만 일주일 최대 10시간 이내로 제한한다. 배우자 출산 시 유급휴가를 5일에서 10일로 확대하고 임신했을 경우 하루 2시간씩 근무시간을 단축한다. 또한 배우자가 유산·조산할 경우 최대 2일, 난임직원이 시술을 받을 때 최대 3일까지 휴가를 낼 수 있는 조항도 신설했다. 


우리은행도 올해 배우자 출산 시 휴가를 5일에서 10일로 연장하고 태아검진휴가도 신설했다. 원거리 출퇴근을 해야 하는 근무자에게는 다달이 주는 교통비를 30만원으로 증액한다. 점심시간에는 스크린세이버가 뜨는 방식으로 1시간 동안 휴식을 보장한다.

KEB하나은행은 직원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해외필드트립(연수) 기회를 근무환경이 열악한 직원에게 우선적으로 부여하기로 했다. 다음달부터 초등학교 입학기 자녀를 둔 직원은 오전 10시에 출근할 수 있다. 쌍둥이를 출산하면 자녀 1인당 1년씩 휴직 기간을 연장하고 미숙아나 장애아를 임신한 경우 6개월 추가 휴직도 가능하다.

농협은행도 올해부터 임신 검진휴가를 기존 2일에서 4일로 늘리고 초등학교 입학기에 학부모의 출근시간을 자유롭게 정하도록 근무제도를 개선했다.

은행 관계자는 “직원들의 근로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각 부서장들의 중요한 업무”라며 “주 52시간 등으로 불필요한 야근이나 회식도 사라져 근로 만족도가 크게 높아졌다”고 말했다.

◆사각지대, 탄력근무제 손질해야

문제는 워라밸 혜택을 못 받는 사각지대가 여전하다는 점이다. 외근이 많은 영업직원이나 24시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전산 및 보안 등 특수직군은 여전히 주 52시간 이상을 근무한다고 호소한다.

단축근무 조기도입 불가능 직무는 ▲정보통신기술(IT) ▲자금관리 ▲핵심성과지표(KPI) ▲결산 ▲여신심사 ▲연수원 ▲안전관리실 ▲자금관리 ▲물류배송 ▲기관영업 ▲공항 및 공단 특수점포 등 20개 직군이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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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직군은 평소에 야근이 잦고 특정 시기에 일이 몰리기 때문에 단축근무제 적용이 어렵다. 업무시간을 단축해도 업무량이 당장 줄어들 소지가 적어 직군별 주 52시간 적용에 세밀한 합의가 필요하다.
단축근무제 도입을 연착륙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영업경쟁이 치열해진 상황에 52시간 근무제는 영업점에 강제할당 등 부작용을 낳을 수 있어서다.

실제 일부 영업점에서 상사는 ‘제시간 퇴근운동’에 의욕을 보이는 반면 직원들은 30분 초과 근무를 보고해야 할지 눈치보기가 한창이다. 지점장이 야근 승인을 반려해 오히려 시간 외 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주 52시간제를 빠르게 도입하면서 사용자는 물론 노동자도 초과 근로에 대한 부담이 생겼다”며 “근로조건에 유연성을 도입해 근로자가 필요로 하는 고용 안정성과 기업이 필요로 하는 노동 유연성을 균형 있게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주 52시간 근무 계도기간 연장을 정할 예정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대·중견기업 317개사를 대상으로 주 52시간 근무제 현황을 조사한 결과 24.4%는 지키지 못하고 있다. 금융권은 예외산업으로 조사에서 제외됐지만 갈등 없는 제도 정착을 위해 계도기간 연장을 바라는 눈치다.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국회는 이달 안에 주 52시간 근무제의 핵심 규정인 탄력근로제 법안을 처리할 계획이다. 쟁점은 주 52시간 기준으로 근무시간을 산출하는 평균 ‘단위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얼마나 더 늘릴지 여부다.

사용자 측은 탄력근무제 단위기간을 1년까지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노동자 측은 단위기간 확대를 반대하며 맞서고 있다. 단위기간이 늘어나면 오히려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해서 일하는 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확대하는 논의가 길어지면서 노사 갈등이 커지고 있다”며 “사회적 대화를 통해 탄력근무제를 손질하면 주 52시간 제도를 본격도입한 후에도 부작용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79호(2019년 2월12~1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