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1968년 6월 한양식품 독산동공장에서 코카콜라 국내 첫 생산라인을 둘러보는 모습. / 사진=두산그룹
고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이 1968년 6월 한양식품 독산동공장에서 코카콜라 국내 첫 생산라인을 둘러보는 모습. / 사진=두산그룹
3일 별세한 고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은 고 박두병 초대회장의 장남이었지만 ‘남의 밥’을 먹는 것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고인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1960년 4월이다. 두산그룹이 아닌 한국산업은행에 공채 6기로 입행했다. 이는 “남의 밑에 가서 남의 밥을 먹어야 노고의 귀중함을 알 것이요, 장차 아랫사람의 심경을 이해할 것이다”고 강조한 선친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3년 동안 은행 생활을 한 고인은 1963년 4월 동양맥주에 말단 사원으로 입사했다. 첫 업무는 공장청소와 맥주병 씻기였다.


이후 선진적인 경영을 잇따라 도입하며 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했고 한양식품, 두산산업 대표 등을 거쳐 1981년 두산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고인은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모든 결정의 중심에 있었지만 좀처럼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경청한 뒤 자신의 뜻을 짧고 간결하게 전했다. 사업적 결단의 순간 때도 그는 실무진의 의견을 먼저 경청했고 다 듣고 나서야 입을 열어 방향을 정했다.

한 번 일을 맡기면 상대방을 신뢰하고 오래도록 지켜보는 ‘믿음의 경영’을 실천한 고인에 대해 두산 직원들은 “세간의 평가보다 사람의 진심을 믿었고 다른 이의 의견을 먼저 듣고 존중하던 ‘침묵의 거인’이셨으며 주변의 모든 사람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큰 어른’이셨다”고 말한다.


이 같은 경청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그룹회장을 맡은 이후 1985년 동아출판사와 백화양조, 베리나인 등의 회사를 인수하며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990년대에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두산창업투자, 두산기술원, 두산렌탈, 두산정보통신 등의 회사를 잇따라 설립했다.

1974년에는 연합뉴스 전신인 합동통신 사장에 취임해 세계적인 통신사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국제상업회의소 한국위원회 의장,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경영성과를 인정 받아 1984년 은탑산업훈장, 1987년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두산그룹 회장 재임 시 그는 국내 기업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하고 대단위 팀제를 시행하는 등 선진적인 경영을 적극 도입했다. 1994년에는 직원들에게 유럽 배낭여행 기회를 제공했고 1996년에는 토요 격주휴무 제도를 시작했다. 또 여름휴가와 별도의 리프레시 휴가를 도입했다.

동양맥주에 재직중이던 1964년에는 당시 국내 기업에서는 생소하던 조사과라는 참모 조직을 신설해 회사 전반에 걸친 전략 수립, 예산 편성, 조사 업무 등을 수행하며 현대적 경영체계를 세우기 시작했다.

부단한 혁신도 시도했다. 창업 100주년을 한해 앞둔 1995년의 혁신이 대표적이다. 경영위기 타개를 위해 당시 주력이던 식음료 비중을 낮추면서 유사업종을 통폐합하는 조치를 단행, 33개에 이르던 계열사수를 20개사로 재편했다.

이어 당시 두산의 대표사업이었던 OB맥주 매각을 추진하는 등 획기적인 체질 개선작업을 주도해 나갔다. 이 같은 선제적인 조치에 힘입어 두산은 2000년대 한국중공업, 대우종합기계, 미국 밥캣 등을 인수하면서 소비재 기업을 넘어 산업재 중심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두산 관계자는 “박 명예회장은 새로운 시도와 부단한 혁신을 통해 두산의 100년 전통을 이어갔다”며 “더 나아가 두산의 새로운 100년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