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B산업은행 본점. /사진제공=KDB산업은행
KDB산업은행 본점. /사진제공=KDB산업은행


“정책금융의 역할이 분산돼 산업은행의 지배구조를 개편해야 한다. 정부에 수출입은행과의 합병을 건의하겠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이 수출입은행에 합병을 공식 제안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두 국책은행은 중복된 정책금융 기능이 많아 이를 통합하면 인력과 예산을 효율화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합병대상으로 지목된 수은은 반발하며 갈등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금융당국의 신경전 등 후폭풍도 거세다. 


◆총선 전 합병론 꺼낸 이동걸… 왜?

수은은 산은과 합병이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수은 노조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두기관이 합병할 경우 불필요한 구조조정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며 “국내기업의 성장과 발전을 견인해야 할 산은이 구조조정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스스로 경영능력이 부재한 것을 입증한 것”이라며 날을 세웠다.

수은은 수출신용기관(ECA, Export Credit Agency)이다. 산은과 합병할 경우 경쟁국은 수은이 획득한 이 지위를 문제 삼을 수 있다. 이 경우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유일하게 허용되는 수출 보조금 지원 대출이 어려워질 수 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도 수은의 손을 들었다. 은 위원장은 “산은과 수은의 합병은 이 회장의 개인적인 의견”이라며 “아무 의미 없는 얘기다. 더 이상 논란이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수은의 담당부처인 기획재정부도 이 회장의 주장을 반박했다. 정책금융기관의 지원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각 기관이 보유한 핵심기능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산은과 수은의 합병은 부처 간 합의가 필수적이다. 산은 회장과 수은 은행장은 각각 금융위원장과 기획재정부장관의 임명제청으로 이뤄진다. 산은은 금융위, 수은은 기재부가 각각 관할하고 있어 정부 부처 간 파워게임으로 격화될 소지를 배제할 수 없다.

국책은행 간 합병은 전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는 점도 합병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독일의 정책금융기관 KfW금융그룹은 개발은행과 수출은행 등을 자회사로 두며 통합운영을 하고 있다.

국내에선 산은과 수은, 무역보험공사, 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 간 상설 협의기구를 구축하는 정책금융체제 개편 방안을 내놨다. 하지만 2년이 지난 현재 협의회 차원의 정책금융체제 개편은 유명무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0년간 산은은 부실기업의 구조조정을 추진했으나 정보통신기술(ICT) 중심의 벤처·중소기업이 국가 성장동력으로 성장하며 개발금융 주도권은 시장에 넘어갔고 구조조정 업무를 자회사 KDB인베스트먼트로 이관했다.

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3월 말 기준 국내외 임직원수는 산은이 4192명, 수은은 1303명이다. 국내외 영업점포도 산은이 97개로 수은(41개)의 두배가 넘는다. 지난해 기준 순이익은 수은 5970억원, 산은 2조5098억원이다. 

이 회장이 수은과 합병을 공론화 한 것은 국내 경제산업 변화로 산은의 정책금융 역할이 축소됐음을 방증한다.

여기에 여당을 중심으로 산은과 수은을 각각 부산, 전북에 이전하는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현재 국회에서는 국책은행을 비롯한 공공기관 지방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여당 정무위 국회의원들은 내년 총선 공약으로 두 국책은행의 지방이전을 내놓을 전망이다.

정무위 관계자는 “두 국책은행의 역할이 중복된다는 지적에 일부 공감하지만 장점도 크기 때문에 통폐합은 극단적인 대안”이라며 “결국 금융중심지 이전을 막기 위해 두 국책은행의 본사가 서울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말했다.


총선 전 ‘합병론’ 꺼내든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정책금융 재편 실효성 “글쎄”

국책은행의 합병론은 정권 초마다 나왔던 화두다. 이번 정권은 2년이나 지났지만 이 회장의 임기가 1년밖에 남지 않아 정책금융 개편의 그림을 완성하려면 시간이 빠듯하다는 계산이다.
문제는 정책금융의 재편이 반복될수록 실효성은 미미하다는 점이다. 지난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산은과 우리금융지주, 기업은행을 합병하는 자산 550조원 규모의 ‘메가뱅크’ 설립 논의를 본격화했다. 아이디어는 강만수 당시 기재부 장관의 ‘챔피온 뱅크’를 모태로 삼은 것으로 한국판 골드만삭스를 설립하자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정책은 논란만 키운 채 막을 내렸다.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대형 글로벌 투자회사들이 파산했고 정책금융 개편의 동력을 잃었다.

2005년에는 김창록 당시 산은 총재가 국제투자금융기관으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하자 수출입은행이 “업무영역 침해”라며 반발했다. 수은은 이듬해인 2006년 국정감사에서 “산은의 설립목적상 대외금융업무는 산은의 업무 범위에 속하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여당에서 정책금융 역할을 재정립하려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싱크탱크 ‘더미래연구소’는 정책금융기관이 할 필요 없는 기능 등을 정리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는 ▲2019년 통합정책금융기관 논의안 마련 ▲2020년 상반기 법안 제출·논의 ▲2020년 말 법안 통과 ▲2021년에는 통합 실무추진 계획을 제시했다.

이 회장이 수은과 합병을 완성하려면 적어도 내년에는 통합법안이 통과돼야 실무작업에 속도를 낼 수 있다. 여야가 대치중인 가운데 이 회장의 통합론이 금융권과 정치권에서 얼마나 수용될지는 미지수다. 남은 임기동안 차기 수은 행장과의 힘겨루기만 하다가 한국GM, 현대중공업 등 수은과 함께 풀어나가야 할 구조조정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 회장이 정책금융 기관의 개편에 군불만 지피고 임기를 마칠 가능성이 높다”며 “정치적 계산만 앞세워 정책금융 개편을 반복할 수록 기관간 갈등만 키울 뿐 생산적인 결과를 얻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11호(2019년 9월24~30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