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보약을 먹는 것과 같아요. 체질을 개선하고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미리 먹는 것이지 병이 났을 때 먹는 것이 아니잖아요. 외교도 결정적 순간을 대비하기 위한 예방의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적절한’ 관심이 늘 필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대 러시아 외교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주러시아 공사를 지낸 러시아 전문가 박병환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은 한국의 대 러시아 외교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한·러 양국이 1990년 9월30일 수교를 맺은 후 올해로 30주년을 맞았음에도 그동안 서로의 관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고 했다.
Q. 한-러 수교 30주년을 평가한다면.
A. 러시아는 잘 관리해야 하는 국가다. 그동안 한·러 양국의 교역 규모만을 미국이나 중국과 비교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냉전시대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경영을 한 경험이 있는 만큼 그 위상과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러시아와의 교역은 수교 이후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왔고 한국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도 늘고 있다. 1990년 2억달러(약 2300억원)에 못미쳤던 교역 규모가 2019년 223억달러(약 26조원)로 급증했고 현재 러시아는 한국의 열 번째 교역국으로 떠올랐다. 한국의 수출품목은 일반 소비재에서 자동차·기계류 등으로 변화했고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와 원유 등을 수입하는 양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Q.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계산하기에 바쁘다. 다소 소극적으로 보이는 러시아가 남·북 화합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지.
A. 한국은 안보를 미국에 맡기고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는 소위 ‘안미경중’(安美經中) 방식을 채택해왔다. 이런 분위기에선 미국과 중국에 관심이 계속 쏠릴 수밖에 없고 그만큼 시야는 좁아진다. 하지만 안보 분야에선 방위비와 무기구입 등 일종의 서비스 이용료를 꾸준히 내야 한다. 그동안 한국기업이 투자를 이어온 중국은 미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를 두고 보복을 가했다. 중국에 투자할수록 되려 볼모가 늘어나는 상황이다. 이제는 해외투자처에 다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UN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은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 등 5개국이다. 각국은 거부권이 있다. 북한에 대한 제재는 5개국 모두 찬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북핵 문제에 있어 러시아도 의견이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북핵 문제는 북·미의 직접협상이 아니면 해결이 어렵다고 본다. 북한은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를 원한다. 러시아는 북한이 원한다면 미국 단독이 아니라 다자 형태로 북한의 안전보장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Q. 러시아와 북한의 관계는 어떤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러시아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A. 강대국끼리는 ‘묵계’(默契·말 없는 가운데 뜻이 서로 맞음)라는 게 있다. 자기 영향권을 건드리지 않으면 가만히 있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북한과의 국경지대에 상당히 많은 군사력을 배치했다. 언제든 북한 내정에 문제가 생기면 관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것이고 미국은 이에 반발하지 않을 수 있다.
Q. 현재 한·러 사이의 주요 현안은.
A. 한·러 양국의 이해를 고려해야 한다. 한국의 신북방정책의 9개 협력분야에 포함된 ‘남·북·러’ 삼각협력이 중요하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과 한반도종단철도(TKR) 및 LNG 가스관과 전력망 연결 등은 러시아의 핵심 관심사다. 아·태지역 진출 교두보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기초과학과 원천기술 수준은 매우 높다. 반면 소련 붕괴 후 어려움을 겪으며 제조업 기반은 약해졌다. 러시아의 원천기술과 한국의 응용기술이 만나면 새로운 역사를 쓸 수도 있다.
▶박병환 전 주러시아 공사, 현 유라시아전략연구소장 프로필
▲1956년 서울 출생 ▲경기고 ▲고려대 법학과 ▲1985년 외무고시 합격 ▲2016년 말까지 11년동안 4차례 주러시아 대사관 근무 ▲대표 저서 ‘한국 외교에는 왜 러시아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