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완성차업체는 기존 자동차 제조방식을 고수하며 엔진과 변속기 등 전통적인 구동장치가 들어가는 내연기관차의 뼈대를 활용해 전기차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테슬라는 이 같은 방식을 탈피해 새로운 가치를 전달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던 완성차업체는 기존 제품의 한계를 뛰어넘을 비책으로 ‘전기차 전용 플랫폼’ 카드를 꺼내 들었다.
레고 블록처럼 구성 쉬운 설계
플랫폼은 엔진과 변속기 등 자동차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담는 일종의 ‘그릇’이다. 일부 업체는 구성 방식을 뜻하는 ‘아키텍처’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지금까지 나온 전기차는 대부분 내연기관차의 설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차체 구조는 물론 차별화된 성능을 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반면 전기차 전용 플랫폼에서는 차체 구조 등 기존의 틀을 깨면서도 성능 향상과 원가 절감이라는 목표를 모두 만족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통해 탑승자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효용은 넓은 실내공간이다. 배터리를 차체 바닥에 배치하고 엔진과 변속기 등 부피가 큰 부품이 차지하던 공간을 활용할 수 있어서다. 이로 인해 바퀴의 중심축부터 범퍼 끝까지의 거리(오버행)가 줄고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의 거리인 휠베이스(축거)가 늘어난다. 차체 크기는 준중형급이어도 대형차급의 탑승 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 저중심 설계와 이상적인 앞-뒤 무게 배분에 따른 향상된 주행 안전성은 덤이다.
이런 이유로 글로벌 자동차 제조사는 전기차시대를 대비하기 위한 전용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다. 최근 현대차그룹이 공개한 ‘E-GMP’와 폭스바겐의 ‘MEB’가 대표적이다. ▲제너럴모터스(GM) ‘BEV3’ ▲PSA그룹 ‘eVMP’ ▲메르세데스-벤츠 ‘EVA2’ ▲토요타 ‘E-TNGA’ 등도 주요 전기차 전용 플랫폼으로 꼽힌다.
신규 플랫폼 개발에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업체는 폭스바겐이다. ‘디젤 게이트’로 구긴 체면을 새로운 전동화 플랫폼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한 결과가 MEB 플랫폼이다. 올 6월쯤 이 플랫폼을 처음 적용한 전기차 ‘ID.3’의 유럽 판매가 시작됐고 이보다 큰 ‘ID.4’도 대기 중이다. 폭스바겐은 2025년까지 전기차 판매 비중을 25%로 높일 방침이다.
폭스바겐의 설명에 따르면 MEB의 핵심은 ‘유연한 설계’다. 배터리는 차체 바닥에 넓게 설치하고 앞바퀴와 뒷바퀴에 각각 전기모터를 장착하는 단순한 구조를 통해 자동차의 제품 콘셉트에 따라 차 크기나 구동 방식 등을 쉽게 변경할 수 있다.
이 같은 전용 플랫폼의 효과는 숫자로 드러났다. 전기차 시장 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 들어 9월까지 전기차 판매 1위는 테슬라, 2위는 지난해 8위에 머물렀던 폭스바겐이다. 올 상반기만 해도 테슬라는 17만9050대의 판매량을 기록하며 2위 르노닛산얼라이언스(6만5521대)와 3위 폭스바겐(6만4542대)과 큰 격차를 보였다. 하지만 9월까지 통계를 살펴보면 테슬라 31만6000대, 폭스바겐 23만3000대로 좁혀졌다.
자동차업계는 앞으로 이 같은 격차가 더욱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유연한 생산 시스템으로 시장의 수요에 맞춘 빠른 대응이 가능해졌다”며 “독일 등 유럽의 주요 자동차 생산국이 친환경 공장과 친환경차에 보조금을 지원해준 것도 한몫했다”고 폭스바겐의 성장을 설명했다.
현대차의 E-GMP,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이달 2일 현대자동차그룹은 전기차 전용 플랫폼인 E-GMP를 공개했다. 폭스바겐의 MEB처럼 모듈화와 표준화 개념을 도입한 게 특징이다. 제품 기획단계부터 복잡성을 줄이면서도 하나의 플랫폼으로 ▲세단 ▲CUV ▲SUV ▲고성능·고효율 모델까지 다양한 차종을 신속하게 선보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E-GMP는 1회 충전으로 500㎞(국내 기준) 이상 주행할 수 있으며 400V/800V 멀티 급속 충전 시스템을 갖춰 초고속 급속충전기 이용 시 18분 이내 80% 충전이 가능하다. 기름을 넣는 시간과 비슷한 5분 충전만으로도 100km쯤을 주행할 수 있는 셈이다.
소비자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변형이 가능한 표준화 배터리 시스템도 핵심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E-GMP를 기반으로 개발되는 모든 차종은 최고 수준의 에너지 밀도 셀로 구성된 표준화된 단일 배터리 모듈이 탑재된다”며 “표준화 모듈을 바탕으로 기본형과 항속형 등 모듈 탑재 개수에 따라 다양한 배터리 팩 구성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다른 플랫폼과 차별화되는 요소는 또 있다. 통합 충전 시스템(ICCU)과 차 충전관리 시스템(VCMS)을 통해 별도의 추가 장치 없이 일반 전원(110V/220V)을 차 외부로 공급할 수 있는 V2L(Vehicle to Load) 기능을 갖췄다. 최대 3.5kW의 전력을 공급할 수 있으며 배터리 용량에 따라 56㎡형 에어컨과 55인치 TV를 동시에 약 24시간 가동할 수 있는 수준이다. 물론 다른 전기차를 충전하는 것도 가능하다.
자동차업계에서는 기존 자동차회사가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선보이면 테슬라의 독주는 계속되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수입차업계 관계자는 “포르쉐가 순수 전기차 ‘타이칸’을 선보이면서 고성능 전기 스포츠카의 가능성을 제시했고 폭스바겐은 보급형 모델 ID.3를 통해 저렴한 전기차의 출시를 선언했다”며 “현대·기아도 플랫폼 경쟁에 뛰어든 만큼 앞으로 전기차 시장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