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생성한 그래픽. /사진=챗gpt


# 30대 직장인 A씨는 상장사 재무팀에서 자금 관리를 맡고 있다. 자금 조달과 운용 계획을 짜는 게 주된 업무였지만 최근에는 배당과 자사주, 신규 투자에 얼마를 배분할지를 정하는 일도 늘었다. 관련 안건을 이사회에 올리고 의결 결과를 공시해야 하다 보니 배분안을 뒷받침할 근거를 마련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공시 문안을 다듬고 투자자에게 설명할 내용을 정리하면서 기업설명(IR) 업무까지 맡게 됐다.

기업이 돈을 쓰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회사가 벌어들인 돈을 공장이나 연구개발(R&D), 인수합병(M&A)에 투자할지, 빚을 갚을지,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소각으로 주주에게 돌려줄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예전과 같다. 이제는 얼마를 어디에 쓸지뿐 아니라 왜 그렇게 결정했는지를 시장에 설명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기업들은 배당성향과 주주환원율, 자기자본이익률(ROE) 등 목표치를 제시하고 이를 토대로 투자와 배당 규모를 정하고 있다. 몇 년간 적용할 자본배분 원칙을 미리 공개하는 기업도 늘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기업가치 제고(밸류업) 계획을 공시한 기업은 2024년 5월 관련 제도가 도입된 이후 지난 7월 말까지 747곳으로 늘었다. 코스피 348개사, 코스닥 399개사다. 이들 기업의 시가총액은 4945조원으로 전체 시장의 84.6%를 차지한다. 코스피만 놓고 보면 공시기업의 시가총액 비중은 88.4%다. 대형 상장사 대부분이 기업가치와 자본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계획을 시장에 내놓고 있다.

주주에게 돌려주는 돈도 크게 늘었다. 지난해 상장기업의 현금배당액은 50조9000억원으로 전년보다 11.1% 증가했다. 자사주 매입액은 20조1000억원, 소각액은 21조4000억원으로 모두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특히 자사주 소각액은 2023년 4조8000억원에서 지난해 21조4000억원으로 2년 만에 4배 이상 늘었다.



상법 개정은 이런 결정을 내리는 이사회의 책임을 키웠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은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됐고 새로 취득하는 자기주식은 원칙적으로 1년 이내 소각해야 한다. 독립이사 확대와 집중투표제 시행으로 이사회를 구성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상법이 기업에 배당을 늘리거나 투자를 줄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의 과정이다. 성장투자를 결정했다면 배당이나 자사주 소각보다 투자가 회사와 주주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반대로 주주환원을 늘렸다면 필요한 투자와 현금 여력을 충분히 따져봤는지가 문제가 될 수 있다. 재무팀에서 숫자를 맞추는 데 그쳤던 문제가 이사회가 직접 판단하고 근거를 남겨야 할 사안이 된 셈이다.

기업들은 아예 돈을 쓰는 기준을 숫자로 정하고 있다. 포스코홀딩스는 올해부터 2028년까지 조정 지배지분순이익의 35~40%를 주주에게 환원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현금배당과 자사주 매입·소각을 병행하고 연간 실적에 따라 전체 환원 규모를 결정한다. 기존 주당 1만원의 기본배당 정책을 없애고 실제 이익에 따라 주주환원 규모가 달라지는 방식으로 바꿨다.

배당을 '작년 수준'으로 정하거나 전년도 투자액을 기준으로 다음해 계획을 세우던 방식도 바뀔 가능성이 크다. 투자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수익과 회사에 필요한 현금, 주주에게 돌려줄 돈을 함께 비교해야 해서다. 배당정책과 자사주 소각 계획, 투자 우선순위를 미리 정해둘 필요가 커진 이유다.

첫 시험대는 2027년 정기주총이 될 전망이다. 2027년 1월1일부터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회사에 전자주주총회가 시행되고 집중투표제도 함께 적용된다. 주주의 주총 참여 방식과 이사 선임 구조가 동시에 바뀌는 만큼 기업이 주주를 상대로 설명해야 할 사안도 늘어난다. 배당과 투자, 자사주 등 주요 의사결정도 예외가 아니다.

어디까지가 적절한 경영 판단인지 아직 명확한 기준이 없다는 것은 문제다. 확대된 이사의 의무와 새로운 이사회 규칙이 실제 분쟁에서 어떻게 적용될지 보여주는 판례가 충분하지 않다. 당분간 기업들은 결과 못지않게 어떤 선택지를 검토했고 왜 특정 방안을 택했는지 의사결정 과정을 남기는 데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김동한 가천대 교수(법무법인 지평 고문)는 "확대된 의무와 새 규칙이 실제 분쟁과 판결에서 어떻게 해석될지는 아직 선례가 부족하다"며 "의사결정 위축이나 소송 남용에 대한 재계의 우려가 현실화할지는 향후 판례가 쌓이는 과정에서 판단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