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추억을 소환했던 가을 구둔역 전경. 현재 '구둔 아트스테이션 조성사업' 이후 그동안 간직했던 '옛 감성'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동행미디어 시대 DB


운영하지 않는 기차역과 철길이 관광객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새로운 관광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영화 촬영지는 레트로 붐을 타고 추억을 소환하며 전국에서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경기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에 위치한 옛 구둔역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양평군이 총사업비 187억원을 투입해 추진 중인 '구둔 아트스테이션 조성사업'으로 인해 그동안 구둔역이 간직해온 '옛 감성'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구둔역은 1940년 중앙선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뒤 2012년 선로 변경으로 열차 운행이 중단된 간이역이다. 일제강점기 철도역사의 건축적 특징과 농촌 간이역의 모습을 잘 간직해 그 가치를 인정받았고, 국가등록문화유산 제296호로 지정됐다.

오래된 역사와 철길, 커다란 나무와 소박한 시골 풍경이 어우러진 구둔역은 영화 '건축학개론'과 드라마 '메모리스트' 등의 주요 촬영지로 알려지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찾았던 것은 현대식 편의시설이 아니라 낡은 간이역에 시간에 걸쳐 축적된 세월의 흔적과 아날로그적 추억이었다.

이 사업은 민선7기 정동균 전 군수 시절 '구둔아트스테이션 레지던시'라는 명칭으로 시작되어 올해 말 완료를 앞두고 있다. 당시 군은 근대문화자원과 연계한 문화 공간을 조성해 양평 동부권에 새로운 관광자원을 구축하고, 세대를 초월한 문화 향유와 지역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군에 따르면 사업 초기에는 영화공작소, 막걸리 카페 등을 조성하는 100억원 규모였으나, 2024년 착공 당시 도비 85억원과 군비 102억원을 합쳐 총사업비를 187억원으로 크게 늘렸다. 사업 대상지는 구둔역 주변 6만6557㎡로, 음악감상실과 소극장, 레일 산책로, 광장 등을 새로 조성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구둔역 옆에 조성된 건축물과 주차장.소망글귀가 빼곡했던 향나무는 최근 가지치기로 가지가 크게 잘려 앙상해진 모습이다. /사진=김동우 기자


지난 15일 찾은 현장은 넓게 깔린 바닥 포장재와 새로 들어선 구조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과거 역사와 철길 주변이 선사하던 자연스러운 시골 풍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관광자원화를 명목으로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지만, 정작 역사적 가치와 특유의 감성을 살렸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커지고 있다. 문화유산 안내판의 설명과 달리, 현재 현장에서는 옛 사진 속에 담겨 있던 고즈넉한 건축물과 시설의 원래 모습을 확인하기조차 쉽지 않다.

국가유산청 근현대문화유산 담당자는 "구둔역은 한국철도공사가 소유하고 있으며 관리는 양평군이 하는 상황"이라며 "직접적인 보수사업이나 정비사업은 양평군이 시행하고, 국가유산청은 감독·협의하거나 필요한 경우 예산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관리상 문제가 확인될 경우 "양평군을 통해 해당 내용을 확인하고 조치하도록 지도할 수 있다"고 밝혔다.

국가등록문화유산 주변 공사와 관련해서는 변경 정도와 내용에 따라 국가유산청의 현상변경 허가를 받아야 함을 덧붙였다. 구둔역 주변 사업 역시 등록구역 안팎을 포함해 양평군이 자체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라는 설명이다.

양평군 내부에서도 사업 규모와 정비 방향에 대해 자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군의 한 관계자는 구둔역 개발을 두고 "사업을 너무 크게 벌였다"며 "옛날 감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부만 최소한으로 정비했어야 했는데, 당시 담당자들이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털어놓았다.

무엇보다 그동안 방문객들이 빼곡하게 적어 두었던 소망 글귀와 아늑한 그늘을 만들던 향나무가 사라진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구둔역의 분위기를 완성했던 것은 낡은 건물과 철길뿐만이 아니었다. 방문객들은 역사와 함께 세월을 보낸 향나무 가지와 벽면에 자신들의 소망과 추억을 담은 글귀를 하나둘 걸어두곤 했다.

누군가의 사랑과 우정,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는 글이 쌓이면서 구둔역은 단순한 폐역을 넘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머무는 '추억의 공간'으로 탈바꿈했었다. 소망 글귀가 걸린 향나무와 벽면이야말로 구둔역이 가진 고유한 풍경이었다.

글귀가 사라진 밋밋한 벽과 앙상해진 향나무는 이번 관광자원화 사업이 놓친 본질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87억원을 투입해 거창한 시설을 새로 만들었지만, 돈으로 대체할 수 없는 방문객들의 기억과 장소의 감성을 보존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잡초가 무성한 구둔역 철길. 무분별한 시설 추가를 멈추고, 남아있는 역사와 철길, 주변 경관을 보존해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진=김동우 기자


관광정책은 행정기관 내부의 판단만으로 완성하기 어렵다. 현장에서 만난 한 여행 관련업 대표 A씨는 "이 사업은 문화유산 전문가와 관광기획자, 건축가, 콘텐츠 제작자, 지역주민, 상인, 철도문화 전문가 등 다양한 사람이 계획 수립 단계부터 참여해 장소의 미래를 함께 설계했어야 했다"라고 지적했다.

구둔역의 본래 경쟁력은 대규모 광장이나 새 건물에 있던 것이 아니다. 오래된 역사와 철길, 나무와 시골 마을이 어우러진 감성 자체가 타 지역이 쉽게 복제할 수 없는 독보적 자산이었음을 간과한 셈이다.

이 때문에 양평군의회의 견제·감시 기능 부실에 대한 책임론도 거세지고 있다. 의회는 집행부가 제출한 예산을 단순히 심의·의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업의 타당성과 투입 예산 대비 효과를 철저히 검증했어야 했다.

사업비가 100억원에서 187억원으로 대폭 증액된 사유, 설계 변경 내역, 공정 지연에 따른 추가 예산 발생 여부, 향후 연간 운영비와 예상 이용객 수, 지역 경제 파급효과 등을 면밀히 파헤쳐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아울러 행정사무감사와 예산 심의를 통해 추진 과정상의 문제점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결과를 군민에게 공개해야 할 시점이다.

187억원이 지평면 구둔역을 살리는 마중물이었는지, 아니면 구둔역만의 소중한 감성을 지워버린 비용이었는지 군 차원의 명확한 설명이 요구된다.

문화유산이 지닌 시간과 기억은 한번 훼손되면 아무리 많은 예산을 다시 투입해도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 지금이라도 무분별한 시설 추가를 멈추고, 남아있는 역사와 철길, 주변 경관을 보존해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옛 감성' 사라졌다는 지적이 나오는 구둔역이 다시 관광객을 모을지는 양평군의 행정에 달렸다. /사진=동행미디어 시대 DB


일신리 주민 B씨는 "구둔역의 진정한 매력은 낡은 역사와 철길, 향나무에 매달린 소망 글귀와 벽에 남겨진 추억들이 모두 어우러진 감성에 있었다"며 "187억원짜리 사업이 공간을 새 건물로 채우는 동안, 정작 우리가 지켜야 할 기억과 이야기를 지워버린 것은 아닌지 깊이 돌아봐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