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크리스 르베크 테라파워 CEO, 추형욱 SK이노베이션 대표이사, 최태원 SK그룹 회장, 빌 게이츠 테라파워 이사회 의장, 제프 밀러 테라파워 사업개발 수석 부사장이 14일 서울 종로구 선혜원에서 만찬 전 회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SK이노베이션


미국 테라파워가 차세대 원전인 비경수로형(4세대) 소형모듈원전(SMR) 상용화를 위해 한국 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과 HD현대, 두산에너빌리티 등은 테라파워와 손잡고 투자부터 원자로 제조, 핵심 기자재 공급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며 차세대 원전 시장 선점 경쟁에 속도를 높이고 있다.

19일 업계에 따르면 테라파워는 지난 3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로부터 첫 나트륨 원전의 건설허가를 받고 4월 건설에 착수했다. 테라파워가 개발하는 나트륨 원전은 기존 경수로와 달리 물 대신 액체 나트륨을 냉각재로 사용하는 소듐냉각고속로(SFR)와 용융염 기반 열에너지저장시스템을 결합한 것이다. 원자로에서 생산한 열을 저장했다가 전력 수요가 급증할 때 발전량을 높일 수 있어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른 전력망 변동성에도 대응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4세대 원전은 기존 3세대 경수로의 한계를 넘어 연료 활용 효율과 안전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개발돼 왔다. 특히 소듐냉각고속로는 사용후핵연료에 남은 에너지를 다시 활용할 수 있어 장기적으로 방사성폐기물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기대를 받고 있다.

테라파워의 상용화 추진은 국내 기업들에게도 기회다. SK는 일찌감치 테라파워에 투자해 전략적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2022년 테라파워의 투자 유치에 SK㈜와 SK이노베이션이 2억5000만달러를 투자해 2대 주주로 올라선 데 이어 최근 테라파워 창업자인 빌 게이츠 게이츠재단 이사장의 방한을 계기로 미국을 비롯한 해외 SMR 사업을 공동 추진하기로 했다. 단순 투자자를 넘어 향후 프로젝트 개발과 사업 수행에 함께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HD현대는 제조 분야에서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지난 5월 업무협약을 맺고 소듐냉각고속로(SFR) 기반의 차세대 SMR인 '나트륨 원자로'의 상용화에 있어 테라파워는 나트륨 기술 제공을, HD현대는 주기기 제조를, 현대건설은 EPC(설계·조달·시공)를 담당하기로 협력체계를 구축한 바 있다.



HD현대는 추후 원자로 용기를 연간 2~3기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상용화 전 선제적인 생산 설비 투자에 속도를 낼 예정이다. 현대건설은 최대 8개 호기의 후속 원전에 대한 EPC 우선권을 확보하며 협력 범위를 더욱 확대하기로 했다.

두산에너빌리티 역시 테라파워의 핵심 공급망에 진입했다. 원자로 보호용기를 비롯해 지지구조물과 내부구조물 등 나트륨 원자로에 필요한 주요 기자재를 제작한다. 두산에너빌리티가 공급하는 기자재는 테라파워 초도 호기의 적기 건설과 상업운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내 기업들이 테라파워에 주목하는 이유는 향후 차세대 원전 공급망에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할 수 있어서다. 미국의 첫 4세대 SMR 프로젝트에서 설계·제작·시공 경험을 확보함으로써 글로벌 밸류체인에 참여할 수 있다. SK가 투자와 사업개발을 담당하고 HD현대와 두산에너빌리티가 제조·기자재 분야를 맡는 구조가 자리 잡으면 한국 원전업계 전체의 수출 경쟁력도 높아질 수 있다.

다만 테라파워의 첫 나트륨 원자로 건설 참여가 곧바로 한국 기업의 대규모 시장 창출로 이어진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업계 관계자는 "나트륨을 냉각재로 사용하는 만큼 기존 경수로와 다른 안전성·규제 기준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며 "미국 첫 4세대 원전의 성공적인 건설과 안정적인 운전이 시장 확대의 분수령이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