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피해자도 일괄 배상받을 수 있는 집단소송제 도입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산업계가 대립하고 있다. 피해 구제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여당의 주장에 맞서 야당과 재계는 3년 소급 적용에 따른 헌법상 신뢰보호 원칙 위배 논란과 산업계 전반 경영 리스크 심화를 이유로 반발하고 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이르면 이달 중 법안심사제1소위원회를 열고 박균택 의원(더불어민주당·광주 광산갑) 등 32인이 발의한 집단소송법 제정안 심사를 재개할 예정이다. 지난 3월 발의돼 계류 중이던 해당 법안이 주목받는 배경에는 최근 연이어 발생한 대규모 정보 유출 사태가 자리 잡고 있다.
지난달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는 3756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쿠팡에 집단분쟁조정 신청인 1인당 10만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라는 조정을 결정했다. 위원회는 쿠팡이 해당 조정안을 수락할 경우 집단분쟁조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비신청 피해자들에게도 동일한 기준의 보상이 확대 적용될 수 있도록 보상계획서 제출 등 후속 절차를 진행하겠다는 방침이다.
비신청 피해자까지 보상안을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으나 분쟁조정 결정에 강제성은 없다. 2025년 4월 발생한 SK텔레콤 유심 정보 유출 사고에서도 회사가 올해 1월 조정안 불수용 의견서를 내면서 신청인들은 민사소송 절차로 돌아섰다. 현행 단체소송 역시 피해 배상이 아닌 '행위 중지 청구'로 한정돼 개별 피해자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직접 소송을 낼 수밖에 없다.
이번 제정안은 2005년 시행 이후 20년간 소 제기가 12건(본안판결 2건)에 그친 증권관련 집단소송법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골자로 한다. 집단소송의 적용 범위를 개인정보 침해, 제조물 책임, 담합 등 손해배상 청구 전반으로 넓혔다. 쟁점은 '옵트아웃'(제외신고형) 방식과 '3년 소급 적용'이다. 여당은 법 시행 전 3년 이내 발생한 사건 가운데 소멸시효가 남은 과거 사건까지 법을 적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민법상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시효인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에서 끌어온 기준이다.
여당은 집단소송법이 실체법이 아닌 절차법에 해당해 소급 적용에 문제가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박균택 의원은 지난 4월 22일 공청회에서 "집단소송법을 소급 적용하는 것은 이미 의무가 있던 책임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소송 절차상 편의를 제공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박은정 조국혁신당 의원도 같은 자리에서 소송 남용 문제는 법원의 허가 조항을 두면 방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야당과 재계는 반발하고 있다. 과거 경영 행위에 대해 예측할 수 없는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헌법상 신뢰보호 원칙에 위배되고 법적 안정성을 훼손한다는 지적이다. 방어 능력이 취약한 중견·중소기업에까지 리스크가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같은 공청회에서 윤상현 의원(국민의힘·인천 동구미추홀구을)은 "기본적인 입법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단계적인 적용이 필요하다"며 "소급 적용까지 포함될 경우 기업들은 과도한 소송 리스크를 짊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소급 적용에 따른 절차적 혼란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잇따른다. 이미 진행 중인 개별 소송이나 기존 합의의 효력을 어떻게 처리할지 기준이 마련되지 않아 사법적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제도 전반의 정밀한 설계가 선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민법상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시효가 원칙적으로 10년인데 3년 소급을 적용하면 법적 안정성이 와해되고 불필요한 차별이 발생한다"며 "소급 자체가 집단소송법의 본래 취지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특정 항목만 단편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소송비용 부담, 법원의 허가 절차와 기준, 옵트아웃 방식 등 법안 전체의 요건을 종합적으로 설계해야 제도의 효과성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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