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인트와 플라스틱, 종이를 하얗게 만드는 이산화티타늄(TiO₂). 1990년대 중국은 이 물질을 더 깨끗하고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염소법' 기술을 확보하려 했다. 당시 중국 기업들이 자체 개발하지 못했던 기술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가진 미국 듀폰은 수십 년간 연구개발로 축적한 이 기술을 중국 기업에 판매하거나 라이선스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자 중국 정부 당국자들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던 월터 리우에게 듀폰의 염소법 기술을 확보해 중국으로 이전하는 임무를 맡겼다. 리우는 듀폰의 생산기술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전직 직원들을 끌어모았다. 이후 그들은 중국의 대형 철강기업 판강과 2000만달러가 넘는 계약을 맺고 중국 내 대규모 이산화티타늄 생산시설 건설에 필요한 기술과 설계를 제공했다.
중국 정부가 정한 목표 아래 수많은 중국 기업과 미국 내 사업가가 연결됐고 이렇게 빼낸 기술은 실제 중국의 산업 프로젝트 설계에 활용됐다. 전직 미국 정보기관 요원인 니컬러스 에프티미아데스는 [시대]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중국의 이런 전략을 '전사회적 접근법'(whole-of-society approach)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나 영국 해외정보국(MI6)처럼 정보기관을 중심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전통적인 정보 활동과 달리 중국은 기업과 개인, 중국공산당 조직까지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주체가 정보 획득에 관여한다는 것이다.
에프티미아데스는 듀폰의 이산화티타늄 기술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이 지금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서도 반복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기술을 확보한 뒤 중국 정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은 기업이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경쟁국의 생산 기반을 흔드는 방식이다. 지금은 반도체지만 다음은 인공지능(AI)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한국도 대응의 문턱을 높이고 있다. 오는 9월 13일부터는 기존 '적국'뿐 아니라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의 지령·사주 등에 따라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한 행위도 '간첩죄'로 처벌할 수 있다. 그러나 에프티미아데스는 법을 바꾸고 처벌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중국의 정보 활동을 막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그는 "간첩죄만으로 산업 스파이를 막을 순 없다"며 "아무도 붙잡힐 것을 예상하면서 간첩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기업과 군·정부기관의 교육, 산업계와 방첩기관의 협력, 동맹국의 공동 대응이다. 그는 "산업계가 스스로를 보호할 책임을 더 많이 맡고 정부, 기업, 동맹국이 통합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한국 방첩 체계의 성공을 좌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에프티미아데스는 CIA와 미국 국무부 외교안보국, 국방정보국(DIA) 등에서 34년간 근무한 전직 미국 정보기관 요원이다. DIA에서는 대테러 작전과 초국가적 위협, 미래전, 우주 분야 등의 고위직을 지냈다. 퇴직 이후에는 중국의 간첩, 경제스파이 활동 사례 1000여건을 분석하며 중국의 정보 활동 방식을 연구해왔다. 저서 '중국의 정보작전'을 펴냈다. 이 책 출간 이후 중국 정부가 인민일보를 통해 자신을 '인민의 적'으로 지목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다음은 에프티미아데스와의 일문일답.

-중국의 정보 활동 방식은 전통적인 국가 간첩 활동과 무엇이 가장 다른가.
▶중국의 정보 활동은 정보기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에는 국정원이 있고 미국에는 CIA, 영국에는 MI6가 있다. 모두 각국의 전문 정보기관이다. 하지만 중국은 사회 전체를 활용하는 전사회적 접근법을 사용한다. 정보기관은 중국의 전체 정보 수집에서 비교적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중국은 국유기업과 민간기업, 개인을 활용한다. 중국공산당 조직과 통일전선공작부를 비롯한 여러 조직도 동원한다. 즉 국가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해외에서 정보 활동을 수행한다.
중국 국가정보법은 모든 조직과 시민에게 국가 정보 활동을 지원·협조·협력할 의무를 부과하기 때문이다. 반간첩법과 국가안전법에도 시민과 기업 등 조직이 국가안전·방첩 업무에 협조하도록 하는 조항이 담겨 있다.
또 대부분의 국가는 자국의 안보를 위해 정보 활동을 하지만 중국은 경제적 이익을 얻거나 다른 나라의 상업적 경쟁력을 훼손하는 데까지 정보 활동을 활용한다. 바로 이 점도 중국의 정보 활동이 전통적인 국가 간첩 활동과 다른 중요한 특징이다.
-그렇다면 대학 교수나 연구자, 기업인과 같은 비전문 정보요원의 역할도 큰가.
▶그렇다. 중국 경제스파이의 경우 절반 이상이 민간기업이다. 민간 주체들은 기술이나 영업비밀을 훔친다. 그다음 중국 정부가 보조금 등으로 이들을 지원한다. 그러면 이 기업들은 가격을 극도로 낮출 수 있고 결국 경쟁사를 무너뜨리거나 시장에서 퇴출시킨다.
미국의 태양광 패널 산업이 그 사례다. 중국군 사이버부대인 61398부대가 태양광 패널 개발 기술을 훔쳤고 중국 정부가 해당 산업을 막대한 보조금으로 지원했다. 결국 중국 기업들은 다른 어느 나라도 경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싼 가격에 제품을 생산했고 다른 나라의 생산 기반을 파괴했다. 철강 산업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의 반도체 산업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이를 막지 못한다면 중국 내에서 보조금을 받은 기업들이 한국보다 훨씬 싸게 제품을 생산할 것이고 결국 한국의 생산 역량을 파괴할 것이다. 이 패턴은 계속 반복돼왔다. 지금은 반도체이고 앞으로는 인공지능(AI) 기술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 한국은 미국·일본 등과 비교해 어느 정도로 중요한 정보 표적인가.
▶한국은 중국 정보기관이 매우 높은 우선순위를 두는 표적이다. 한국에서 특히 중요한 두 분야가 있다. 첫째는 기술이다. 이미 드러난 반도체, LED 디스플레이 시스템 등에서 벌어진 간첩 활동이 여기에 포함된다. 결국 기술 인프라 전반이다. 둘째는 군사다. 특히 한국과 일본이 가까워질수록 중국의 우려는 커질 것이다. 중국은 한일 관계뿐 아니라 한미 관계를 약화시키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할 것이다.
동시에 한국은 중국의 전복·영향력 공작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표적이다. 선전 활동, 정치인을 포섭하는 활동, 특정한 내러티브를 한국 사회에 확산시키는 활동이 포함된다.
-한중 간 무역·투자·학술·인적 교류의 확대가 중국의 정보 활동 기회를 늘린다고 보나.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 국가의 개방성과 제도는 엄청난 강점이 된다. 무역과 문화적 이해도 그 덕분에 가능하다. 하지만 동시에 취약성도 만든다. 중국은 그 취약성을 활용한다. 분명히 해야 할 점은 중국은 민주주의 국가들만큼 개방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이 중국과 연계된 정보·간첩 사건을 잇따라 적발하기 시작했다. LED 디스플레이 기술이든 반도체 생산 기술이든 여러 사례가 나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드러난 것은 분명 빙산의 일각이다. 중국은 수십 년 동안 이런 활동을 해왔는데 그동안 그 규모에 상응하는 체포나 대응 조치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 정보 활동의 목적은 무엇인가.
▶중국은 이를 미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광범위한 국가 전략으로 본다. 시진핑은 이를 '중국몽'(China Dream)이라고 부른다. 중국이 세계의 정상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과 영업비밀 절취, 전통적인 간첩 활동, 은밀한 영향력 공작 모두가 이 목표를 뒷받침한다.
-경제·문화 교류와 중국 정부가 지휘하는 정보 활동 사이의 선은 어디에 그어야 하나.
▶한국뿐 아니라 모든 민주주의 국가가 고민하는 문제다. 우리는 문화 교류와 경제 교류를 원한다. 문제는 중국이 그것을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때다. 문화 교류로 만들어진 조직이 중국 정부를 대신해 정치 활동을 벌인다면 다른 문제다. 미국에서는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에 따라 중국 정부를 대신해 활동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자신이 중국 정부를 대표한다는 사실을 등록하도록 한다.
-한국은 간첩죄 적용 대상을 기존 '적국'에서 '외국 또는 이에 준하는 단체'로 확대한다. 형법 개정만으로 어느 정도 억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나.
▶한국이 북한 같은 적국에 국한하지 않고 외국을 위한 간첩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중요한 진전이다. 하지만 억지 효과는 제로(Zero)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단순하게는 아무도 붙잡힐 것을 예상하면서 간첩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에는 중국 관련 사건이 하루 평균 2건씩 들어온다. 사건 하나를 조사하는 데 몇 달씩 걸리기 때문에 법 집행이나 사법적 대응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중국의 접근 방식은 너무 광범위하고 촘촘하다. 그것만을 대응책으로 삼으면 결국 뒤처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의 정보 활동을 억제할 실효적 수단은 무엇인가.
▶가장 효과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는 교육이다. 기업과 정부기관, 군의 직원들에게 무엇이 허용되고 금지되는지, 의심스러운 접근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응하고 누구에게 신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기술과 영업비밀 탈취를 막는 데 교육은 매우 강력한 방어 수단이다. 록히드마틴과 보잉을 비롯해 미국 정부와 거래하는 기업들은 정보 보안 체계를 구축하고 직원 보안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또 미국의 수사기관은 적발한 작전을 활용해 해당 요원을 전향시키거나 이른바 '뒤집어서' 중국을 상대로 활동하는 이중간첩(double agent)으로 만들기도 한다. FBI는 이런 방식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중국의 요원들을 전향시켜 중국에 맞서 활동하도록 하는 데 성공해왔다. 당사자가 이를 인지한 채 협조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도 모르게 이용되는 경우도 있다.
아울러 중국의 간첩·기술 탈취 행위가 확인됐다면 미국과 일본, 유럽의 파트너들이 함께 대응해야 한다. 관련 중국 국유기업에 대한 투자를 제한하거나 기술 탈취에 연루된 개인의 비자 발급과 입국을 제한하고 관련 대학·기관과의 교류를 중단하는 방식이 가능하다. 동맹국들이 함께 움직이고 정보를 공유한다면 중국의 공격적 활동에 맞서 말 그대로 통일된 전선(united front)을 만들 수 있다.
실질적인 억지력은 중국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데서 나온다. 중국은 외국인 투자와 해외 시장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이 동맹국들과 함께 "이런 행동을 계속하면 투자와 시장 접근에 비용이 따른다"는 신호를 일관되게 보낸다면 중국의 행동을 바꾸는 강한 유인이 될 수 있다.
-미국의 경제스파이 대응 경험에서 한국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체포만으로 이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법 집행만으로 이를 멈추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 여러 전략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앞서 말한 직원 교육과 동맹국 공조가 대표적이다.
-강력한 방첩과 중국과의 경제·학술·인적 교류는 양립할 수 있나.
▶물론이다. 강력한 방첩 체계를 갖추는 것이 문화 교류나 외국인 투자를 반드시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도 중국과 매우 큰 경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강한 방첩 체계를 운영한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방첩 역량이 뛰어난 국가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문제는 정보 역량 자체가 아니다. 더 필요한 것은 산업계와의 협력이다. 기업 역시 자신을 보호하는 데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정부와 방첩기관, 산업계가 하나의 체계로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한국이 중국의 정보 활동에 대응하는 데 성공할 수 있는 핵심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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