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 넘게 일본에서 건너오던 '기린 이치방 시보리'가 국내에서 만들어진다. 하이트진로가 일본 맥주의 높아진 인기에 맞춰 기린과의 협력을 수입·유통에서 생산으로 넓히면서다. 국내 맥주 시장 성장세가 둔화하는 가운데 프리미엄 맥주 수요를 겨냥한 승부수로 평가된다.
하이트진로는 지난 8일 경기 용인시 통합연구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기린 이치방 시보리 캔 제품을 국내에서 생산한다고 밝혔다. 양사는 지난 7월 기술제휴 협약을 체결했으며 생산은 전북 완주군 전주공장이 맡는다. 초도 생산 목표는 150만ℓ(500㎖ 캔 약 300만개)다. 내년까지 국내 판매 물량의 75%를 전주공장에서 생산할 계획이다.
기린 이치방 시보리는 1990년 출시된 일본 대표 프리미엄 맥주다. 하이트진로는 2003년부터 국내 수입·유통을 맡아왔다. 20년 넘게 이어진 협력 관계가 수입과 유통을 넘어 제조로 확대된 셈이다.
양사는 기린 고유의 맛과 품질을 구현하기 위해 1년 넘게 기술 교류를 이어왔다. 하이트진로는 맥아에서 처음 추출한 맥즙만 사용하는 '이치방 시보리' 공법을 적용하고 일본에서 공급받은 전용 효모를 배양한다. 세 차례 이상 시험 생산을 진행했고 기린 측의 품질 검증을 통과했다.
간담회에 앞서 열린 시음회에서는 맥즙과 국내 생산 제품을 직접 맛볼 수 있었다. 맥즙은 식혜를 연상시키는 달콤한 풍미가 두드러졌고, 처음 추출한 맥즙의 맛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완성된 맥주는 진한 풍미와 부드러운 목넘김, 깔끔한 뒷맛이 인상적이었다.
일본 맥주의 성장세는 수치로 확인된다. 하이트진로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전체 수입 맥주 판매량은 연평균 약 3% 감소했지만 일본 맥주는 약 72% 증가했다. 기린 이치방의 2020~2026년 연평균 판매량 증가율 전망치는 82.4%에 달한다.
하이트진로는 국내 생산의 강점으로 신선도와 공급 안정성을 꼽는다. 일본에서 생산한 제품이 국내 매장에 깔리기까지는 통상 한 달 반가량이 걸리지만 전주공장에서 생산하면 1~2주 수준으로 단축할 수 있다. 국제 물류 환경 변화에 따른 공급 차질 위험을 줄일 수 있다.
20년 넘게 이어온 양사의 협력은 이번 국내 생산을 계기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기린이 자본 관계가 없는 아시아 지역 수입·유통 파트너에게 생산 라이선스를 제공한 것은 처음이다. 장인섭 하이트진로 대표는 "이번 기술 협정은 생산 현장의 이전이 아닌 발전된 기술과 품질을 함께 만들어가는 전략적 파트너십의 시작"이라며 "20년 넘게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 범위를 더욱 확대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국내 생산이 공급 안정성뿐 아니라 판촉과 마케팅 운영 측면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수요 변화에 맞춰 생산 물량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고 시장 대응 속도를 높일 수 있어서다. 프리미엄 맥주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하이트진로의 선택지가 한층 넓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기린의 국내 생산은 하이트진로가 프리미엄 맥주 시장에서 입지를 넓힐 수 있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테라와 켈리로 대중 시장을 지키는 한편 국내 생산 체계를 확보한 기린을 앞세워 프리미엄 수요를 공략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일본 맥주 인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전주에서 생산한 기린이 수입·유통을 넘어 제조 역량까지 확보한 하이트진로의 새로운 성장 카드로 자리 잡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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