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서울 광화문광장 사거리에서 출근 중인 한 직장인./뉴시스


증권사에서 20년 넘게 금융상품을 팔고 주식 거래를 중개해 온 직원이 있다. 어느 날 회사가 그에게 전혀 다른 일을 맡겼다. 오래된 서류 뭉치를 받아 스캔하는 일이다. 하루 종일, 3년4개월간 이어졌다. 이런 경우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까.

법원은 이런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판단했다. 19일 관련 기관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은 증권사 직원이던 A씨가 2023년 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회사가 A씨에게 위자료 2000만원을 지급하라고 지난해 1월 판결했다.



20년 넘게 증권 영업만 하던 A씨의 업무가 바뀐 건 2018년 9월 판촉팀으로 발령이 나면서다. 전국 영업소에서 서류 상자가 올라왔다. A씨는 칼로 테이프와 노끈을 잘라 상자를 열고, 스테이플러 심을 가위와 펜치로 풀어 낱장을 만들었다. 이후 한 장 한 장 스캔해 제목별로 컴퓨터에 저장했다. 같은 일을 몇 년간 반복한 A씨는 손 통증으로 수술까지 받았다.

자리도 문제였다. A씨가 받은 자리는 공용 회의실이었다. 법원은 "A씨가 이곳에서 수치심을 느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듬해 판촉팀이 해체돼 다른 부서로 옮긴 뒤에는 방송실로 자리를 배정받았다. 사내 방송이 있을 때마다 자리를 비켜 줘야 했다. 나중에는 독방을 썼다. 오래된 서류뭉치에는 먼지와 곰팡이가 쌓여 있었지만 그 방에는 창문이 없었다.

회사는 정당한 업무 조정이었다고 맞섰다. A씨가 지점에서 영업실적이 최하위였고 근무태도도 불량해 더 쓸모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일을 맡겼다는 것이다. 법원은 "영업수익의 단순 비교만으로 근속기간 20년 이상의 근로자에게 업무분장에도 없는 일을 시킬 수는 없다"며 "열악한 공간에서 단순·반복적인 육체노동업무를 시킨 것은 징계조치에 해당할 뿐"이라고 했다.

근로기준법(제76조의2)은 직장 내 괴롭힘을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정의한다. △지위·관계의 우위를 이용했는지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었는지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켰는지 등이 주된 판단 기준이다.



A씨의 사례는 직장 내 괴롭힘 판단 요건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한다. 실적이 낮은 직원이라도 업무분장에 없는 일을 오래 맡기고 다른 직원들과 동떨어져 고립된 곳에 두면 회사의 괴롭힘이라는 게 판결의 골자다.

문해리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는 "폭언이나 폭행이 없어도 괴롭힘은 성립할 수 있다"며 "회사가 직원에게 본래 업무와 무관한 일을 오랜 기간 맡기고 다른 직원들과 분리해 두는 식의 처우는 인사권의 범위를 넘은 괴롭힘에 해당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