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청년정당 시대역량은 2016년 원내 제3당에 올랐지만 8년 만에 의석을 모두 잃었다. 부실한 당내 조직과 약한 지지 기반을 극복하기 위해 지역 정치인 육성과 데이터 기반 정책 경쟁으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다./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


대만 타이베이에서 왕완위 시대역량 주석(대표)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낡은 10여 층짜리 상가 건물이었다. 1층 상가 위로 2층이 툭 튀어나와 보행로에 그늘을 드리우는, 대만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의 건물이었다. 쿰쿰한 냄새가 밴 좁고 어스름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오르자 '시대역량'(New Power Party)이라고 적힌 작은 현판과 조그마한 사무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 타이베이역 인근 번화가에 대형 당사를 뒀던 대만의 청년정당 시대역량은 이제 이곳에서 재기를 준비하고 있다. 2024년 총선에서 국회 의석을 모두 잃고 정당보조금마저 끊기면서 운영비부터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시대역량의 출발점은 2014년 3월17일의 '30초'였다. 당시 대만 입법원(국회)에서는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정 심사를 놓고 집권 국민당과 야당 의원들이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이 와중에 장칭중 국민당 의원은 불과 30초 만에 협정 심사를 마친 것으로 보고 본회의에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대만 경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협정을 제대로 심의하지도 않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튿날인 18일 밤 분노한 청년과 시민 수백 명이 경찰 저지선을 뚫고 본회의장을 점거했다. 한 꽃집 주인이 보낸 해바라기 1000여 송이가 현장에 등장하면서 시위는 '해바라기 운동'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점거는 4월10일까지 24일간 이어졌다. 운동의 주역들은 이듬해인 2015년 1월 시대역량을 창당했다. 법학자 출신 황궈창과 록밴드 보컬 출신 린창쭤 등 다양한 분야의 젊은 인재도 합류했다.

시대역량은 2016년 총선에서 정당 득표 74만4315표(6.11%)를 얻어 지역구 3석과 비례대표 2석 등 모두 5석을 확보했다. 단숨에 원내 제3당으로 올라선 데 이어 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지방의원 16명을 배출했다. 그러나 해바라기의 기적은 10년을 채 가지 못했다. 2020년 총선에서는 정당 득표율이 7.75%로 오히려 올랐지만 지역구 의석을 모두 잃어 의석이 3석으로 줄었다. 2024년에는 정당 득표가 35만3670표(2.57%)로 급감해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비례대표 배분 기준인 5%는 물론 정당보조금 지급 기준인 3%에도 못 미쳤다.

지난 7월 동행미디어 시대와 만난 왕 주석은 10년간의 실패 원인으로 당내 시스템의 부재를 가장 먼저 꼽았다. 젊은 인재들이 뜻을 모아 정당을 만들었지만 이들이 당에 남아 성장할 조직적 기반은 취약했다는 것이다. 시대역량이 2024년 7월 발표한 자체 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당원들의 평균 당적 유지 기간은 3년에 못 미쳤다.

왕 주석은 달라진 미디어 환경에 제때 적응하지 못한 점도 패인으로 꼽았다. 그는 "창당 초기에는 SNS가 청년들의 정치 진출을 돕는 강력한 무기였지만 이후 새로운 홍보 방식과 소통 수단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이어 세대마다 사회를 이해하는 방식과 미래를 상상하는 모습이 다르고 디지털 시대 들어 그 차이가 더 커졌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기성세대의 관점만으로 미래를 결정해서는 안 되며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도록 더 많은 청년의 정치 참여가 필수적이다"라고 강조했다.

국회 밖으로 밀려난 시대역량이 내세운 재기의 무기는 '실력'이다. 과학기술과 데이터 분석으로 시민의 문제를 해결해 정책 역량을 입증하겠다는 것이다. 시대역량은 지난 7월 태풍 '바비'가 대만에 영향을 미쳤을 때 다른 소수정당들과 함께 약 28시간 만에 온라인 '태풍 상황실'을 구축했다. 정부 기관별로 흩어져 있던 기상·교통·의료·대피시설 등 공공 데이터를 한데 모아 시민들이 재난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시대역량은 무게중심도 국회 입성을 노린 '공중전'에서 마을 단위의 '지상전'으로 옮겼다. 선거철 바람에 기대기보다 지역에 뿌리내린 정치인을 키우겠다는 전략이다. 당은 오는 11월28일 지방선거에서 지방의원뿐 아니라 향·진·시민대표 등 기초 단위 선출직에도 후보를 내 단계적으로 정치 경험을 쌓게 하고 있다.

25세에 리장(里長·마을 대표)이 돼 8년간 활동한 청년 정치인이 대표적이다. 시대역량의 청년 정치인들은 주민들의 생활 속 문제를 해결하며 쌓은 신뢰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고 있다. 왕 주석은 "2016년 당선 열풍을 보며 '출마만 하면 당선된다'고 착각한 이들도 있었다"며 "하지만 정치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오랜 시간 주민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일이다. 이 과정을 통해 성장한 뒤 더 큰 정치 무대에 도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시대역량은 청년 인재 발굴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이를 위해 대만기진·대만녹당·소민참정구파상연맹 등 다른 소수정당들과 '대만전진전선'을 꾸려 시민단체 활동가와 과학기술·의료·상업 분야 전문가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왕 주석은 "이번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시대역량 후보 가운데 45세 이하 청년 비중이 약 90%에 이른다"고 말했다.

2014년 3월 대만 '해바라기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정에 반대하며 입법원(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한 모습./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