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서울 세빛섬 한강 앞에 선 이광형 전 KAIST 총장./사진=조현호 기자

-의대 쏠림과 이공계 기피 현상이 지속돼 왔습니다. 반도체, AI의 영향으로 다소 달라지고 있다지만 여전히 똑똑한 학생들이 과학자, 기술자보다 의사가 되고자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똑똑함의 기준이 꼭 수능 석차일까요? 전 그렇게 보지는 않습니다. 여하튼 학업 성적이 우수한 젊은이들이 의대로 몰리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고, 그것이 국가적 손실로 작용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대생들이 국가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의사과학자 양성입니다. 그래서 KAIST에 의과학대학원을 만들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성사시키지 못했습니다.

-의사과학자 양성이 그리 중요한가요?
▶이게 안 되면 우리가 국민소득 5만 달러 시대로 가기 어려워요. 현재 우리나라 청년 실업자가 40만 명에서 50만 명입니다. 이게 해결되려면 새로운 산업이 일어나야 합니다. 기존 산업을 더 잘하기는 굉장히 힘듭니다. 바이오·의료 산업 말고 새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습니다. 의사와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래야 일자리가 생깁니다. 거의 유일한 실업 해결책이죠.

트럼프 없었으면 '국물'도 없는 상황

-모두가 청년 일자리 걱정을 합니다. 특히 AI 시대를 맞아 더 어려워질 것으로 예견합니다.
▶미래는 항상 불안합니다. 불확실성이 크고 혼란스럽죠. 그런데 저는 비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지금 굉장히 중요한 시기인데, 대한민국은 운이 좋은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발전 과정을 보면 중요 고비마다 국제적인 관계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됐고, 우리가 그걸 잘 활용했어요. 저는 지금 우리가 또 한 차례 그런 국면을 맞이했다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죠?
▶트럼프 대통령이 등장해 중국을 눌러주고 있고, AI라는 게 나타나서 중국 추격을 따돌릴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고, 또 마침 정부가 AI 강국을 만들겠다고 해요. 우리가 운이 좋은 나라입니다. 하나씩 설명할게요. 트럼프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산업이 중국에 이미 추월 당했을 겁니다. 우리가 중국에 밀리는 이유는 제조원가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어요. 그런데 트럼프가 나타나 중국이 물건을 팔기 어렵게 만들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시간을 벌었어요. 천재일우죠. 둘째는 AI입니다. 제조업에 AI를 적용하면 생산 효율이 올라가 값싸게 제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열려요. 중국에게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또 시간을 벌게 된 거죠. 셋째는 이재명 정부가 AI를 열심히 하겠다고 해요. 잘된 거죠. 물론 어려움이 있습니다. 중국도 가만히 있지 않으니까요. 중국이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우리가 하늘만 쳐다보고 서로 네 탓, 남 탓만 하면 되는 게 뭐가 있겠어요?

-미국의 견제로 다소 주춤하기는 하지만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기술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걱정스럽죠. 중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 때문에 국산 제품이 갈 데가 없었어요.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공급망 장벽을 쌓아 우리에게 일단 활로가 생겼죠. 천만다행입니다.

-이러다가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좋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고요, 지금 중요한 것은 이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미국이 중국에서 만든 선박의 수출을 자유롭게 허용했다면 우리 조선업은 지금 '국물'도 없는 상태가 됐을 거예요. 일단 시간을 벌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열심히 만들어야죠.


이광형 전 KAIST 총장이 지난 24일 서울 세빛섬 라운지에서 이상언 '동행미디어 시대' 제도혁신연구소장과 대화하고 있다./사진=조현호 기자

유럽과 일본은 이미 '디지털 식민지'

-AI와 로봇에서 중국의 발전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런 첨단 분야에서 미국, 중국과 경쟁할 기술력을 갖출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희망적이라고 봅니다. 우리 시장이 작고, 자본력이 달리니 일반적 AI 경쟁에서는 어렵겠죠. 하지만 우리에겐 기술력에 대한 잠재성이 있고, 이를 뒷받침할 우수한 인력이 있습니다. 결국 자본과 시장이 문제인데, '니치'(틈새)로 돌파해야 합니다. 특화된 AI 모델을 개발해야죠. 예를 들어 제조 AI, 국방 AI, 또 문화나 교육 AI 쪽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와 연대를 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넓히고요. 우선은 아시아 국가들과의 협력을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대만·싱가포르·베트남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거든요. 중국 것 쓸 수 없고, 미국 것에만 의존할 수도 없고, 이런 고민이죠.

-최근에는 유럽연합(EU)이 독자적인 AI 개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성공할까요?
▶유럽의 핵심은 영국·독일·프랑스인데, 그 사람들 해내기 어려울 것으로 봐요. 기개, 결기가 약해요. 인류가 '디지털 혁명'이라는 시기를 거쳤고, 거치고 있죠. 그런데 유럽 국가들은 자기들 포털이 없어요. 자기네 워드 프로세서, 내비게이션, 이커머스도 없고요. 그저 '디지털 식민지'로 살아요. 그 사람들 태도는 '수비 축구'에요. 구글 같은 미국 기업에 세금 더 내게 하고, 관세도 붙이고 하는 거죠. 수비 축구로 이기는 거 봤어요? 디지털 식민지로 사는 것은 일본도 비슷해요.

-일본은 요즘 반도체 공장을 지으며 '공격 축구'를 시도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한데, 결국 의식의 문제라고 봐요. 우리는 네이버도 있고, 카카오도 있고, 분야별로 디지털 생태계가 갖춰져 있어요. 우리는 독파모(독자적 AI 파운데이션 모델) 하겠다고 하는데, 일본은 그런 결기가 부족해요. 가장 중요한 게 정신이죠. 쉽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소버린(주권) AI를 갖추는 게 가능할까요?
▶말한 대로 외국과 연대해 분야별로 해야죠. 자본과 시장을 키우면 가능할 것으로 봐요. 노력을 해야죠. 그게 안 되면 결국 우리도 미국 것 쓰게 되지 않겠어요? 얼마 전 미국 정부가 앤트로픽의 새 AI 모델을 우리가 못 쓰게 막은 적이 있었죠? 앞으로 그런 일이 계속 생기면 어떻게 할 건가요?

-KAIST 교수님들은 우리의 독자적 AI 모델 구축 가능성을 어느 정도로 보나요?
▶생성형 AI 전공 교수들 얘기를 들어보면 자금만 충분히 조달되면 할 수 있다고 해요. 지금 정부가 헛돈 쓰고 있다고도 하고요. 자신들처럼 할 수 있는 사람들한테 돈을 줘야 하는데, 회사에 있는 B급 연구원들에게 돈을 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들의 좁은 생각일 수도 있는데, 우리에게 그런 자신감과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중요해요.

2023년 7월 대한상공회의소 제주포럼에서 AI 인재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이광형 당시 KAIST 총장./사진=대한상공회의소 제공

'AI 탑재된 공장' 수출이 미래 먹거리

-책상 위에 10년 뒤 달력을 세워둔다고 들었습니다. 2036년의 세계,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요?
▶AI 세상이겠죠. 슈퍼 AI가 등장해 있을 거예요. 자율주행 다 돼 있고요. 운전하는 사람 별로 없겠죠. 우리나라는 미·중 사이에서 나름의 자리를 잡고 국제적 산업 지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미·중과 동등한 위치가 되기는 어렵지만 일정한 영역을 확보할 겁니다. 피지컬 AI, 제조 AI는 우리가 잘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는 제조업이 쇠퇴해 제조 데이터가 없습니다. 제조업 공장에서 쓰는 AI를 잘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한국입니다. 그런데 미국이 중국 것을 막으니 미국 쪽 진영에서는 한국 거밖에 없잖아요? 예를 들어 다른 나라에서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만들 때 우리가 제조 공정 AI를 얹어서 플랜트 설비 수출을 하는 거예요. 공장을 세워주는 거죠. 이런 게 앞으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 예상이 맞으려면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상황이 지속돼야겠네요.
▶네, 트럼프 같은 사람이 계속 집권해야 해요. 미국과 중국이 친하게 지내게 돼서 시장의 벽이 다 허물어지면 우리가 설 데가 없어요. 다 중국한테 밀려요. 그런데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신흥 강국이 기존 패권국과 충돌하는 상황)이라고 하잖아요? 두 나라의 사이가 좋을 수 없습니다. 미국이 1980년대에는 일본을 견제했죠. 그때 일본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의 65% 정도였어요. 지금 중국의 GDP는 미국의 70%에서 75%입니다. 미국 입장에선 다소 버겁지만 계속 압박할 수밖에 없어요. 이게 우리에겐 '신의 한 수'입니다. 지금 우리가 트럼프 때문에 손해 보는 것 같잖아요? 실은 얻는 게 훨씬 많아요. 사람들이 트럼프 싫어하는데, 저는 속으로 '트럼프 덕에 이 정도로 먹고살고 있는데 너무 욕하면 안 되지'라고 생각합니다.

-나라가 중대한 고비를 맞은 것 같습니다. 부강한 대한민국이 되려면 국민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나이 든 사람의 뻔한 얘기 같지만, '헝그리 정신'으로 돌아가서 '할 수 있다. 해야 한다' 이런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봐요. 우리가 놀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10년, 20년 뒤에 금방 결과가 나오겠죠. 어느 사회나 국가관이 확실한 사람들이 10%는 있고, 그들의 헌신으로 공동체가 발전을 이루죠. 교수가 편안하고 안정된 직업으로는 최고 아닙니까? 제가 총장이 되자마자 '국가적 소명 의식'을 주제로 연사 초청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연사들에게는 교수로서의 책임감을 강조해달라고 당부했죠. 교수, KAIST 같은 국가 지원이 많은 학교의 학생은 사회적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죠. "내가 아니면 누가 하겠나?" 이런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이광형 프로필
1954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서울사대부중고, 서울대 산업공학과 졸업, KAIST 산업공학 석사/프랑스 리옹 국립응용과학원(INSA) 박사/KAIST 전산학과, 바이오뇌공학과 교수(1985∼2020)/KAIST 과학영재교육원장(2006∼2012)/KAIST 총장(2021.3∼2026.7)/국가지식재산위원회 위원장(현)/2045 과학기술 프론티어 전략위원회 총괄 위원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