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서울 국회 본회의에서 '윤석열 정권 검찰청, 국가정보원, 감사원 등 조작수사·조작기소 등 의혹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이 국민의힘의 불참 속에 가결됐다./뉴시스


토머스 보넘은 1595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에서 병원 문을 연 건 1606년 무렵. 그런데 왕립의사협회가 보넘의 진료를 막았다. 협회로부터 의료행위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지금 한국 돈으로 200만원쯤 벌금을 물렸다. 보넘은 물러서지 않았다.

진료를 계속하자 의사협회는 그를 체포해 구금했다. 당시 의사협회엔 그럴 권한이 있었다. 협회는 진료 행위의 적법성을 판단하고, 위법하면 직접 벌금을 물렸다. 벌금의 절반은 협회 수입이었다. 벌금에 불복하면 구금할 권한도 주어졌다. 국왕의 특허장과 의회 제정법에 근거했다.

보넘은 정식 재판으로 맞섰다. 이 재판을 주도한 인물이 에드워드 코크 판사다. 그는 재판에서 "검열관이 재판관인 동시에 집행자이자 당사자일 수 없다"고 했다. 의사를 감독하는 협회가 스스로 판결하고, 집행해선 안 된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 로마법 격언을 인용했다. "누구도 자기 사건의 재판관이 돼선 안 된다." 현대 법치주의의 초석을 놓은 판결이다.

지난 6일 국회를 통과한 '조작기소 특검법안'이 400년 전 보넘 판결 속 로마법 격언을 소환했다. 1999년 특검법을 도입한 이후 지금까지 개별 사건에 관한 특검은 18차례 있었다. 하지만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들'을 무더기로 수사 대상에 넣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수사 대상의 절반인 6건이 현직 대통령 사건이다. 그런데도 특검 임명권을 대통령이 쥐고 있다. 피고인에게 사건을 뒤집고, 재판 결과를 좌우할 권한을 준 '한 사람을 위한 특별 법안'이다.

재판 중인 사건에서 수사가 잘못됐다면 재판에서 다투는 게 법치주의다. 재판 중인 사건을 다시 수사한다는 건 그동안의 재판을 모두 부정하는 일이다. '사법권은 법원에 속한다'며 사법부 독립을 천명한 헌법을 무력화하는 '위인설법(爲人設法)'이다.

로마법은 누구도 자기 사건의 재판관이 될 수 없도록 했을 뿐 아니라 특정인을 위한 법도 금지했다. 법이란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일반 규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이어받아 미국 헌법 1조 9절 3항은 입법부가 특정인을 재판 없이 처벌하는 법률을 만들 수 없도록 했다. 입법부가 사법부 역할을 대신해 특정인의 유무죄를 판단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다음 달 7일 열릴 예정이었던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이달 30일로 앞당겨 열린다. 검찰청과 함께 검사의 보완수사권 폐지, 대법관 증원, 법 왜곡죄 신설에 이어 대법원장 탄핵을 위한 국정조사까지 앞두자 판사들이 침묵을 깼다.

그 계기는 법원 내부망에 올라온 성찬용 판사의 글이다. 그는 자신을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 속 벤자민에 빗댔다. 당나귀 벤자민은 동물농장의 지배자인 돼지만큼 글을 잘 읽고 모든 사안을 꿰뚫어 보지만, 결코 나서지 않는 냉소적 방관자다. 그러다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말 복서가 도살업자에게 끌려갈 때 처음으로 큰 소리로 글씨를 읽으며 날뛰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동물농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벤자민은 늙고 병든 암말 클로버를 위해 동물농장의 헌법과 같은 계명을 읽어준다. 이미 계명들은 돼지 뜻대로 바뀌거나 지워져 단 하나만 남아 있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더 평등하다."

성 판사가 왜 벤자민을 떠올렸는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그는 묻는다. 오늘날 사법체계의 대격변이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느냐'고. 그러면서 법관윤리강령 1조를 읊조린다. '법관은 모든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사법권의 독립을 지켜나간다.'

헌법 11조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11조 2항, 사회적 특수계급은 어떠한 형태로도 창설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 더 평등한 특수계급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