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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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
⑤왜 우리는 한국인만 유별나다고 믿고 싶을까
얼마 전 강연장에서 주제와 무관한 질문을 하나 받았다. 인지과학자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다며, 한 분이 손을 들었다. "고위험-고수익과 안정-확정된 수익 중에 고르라고 하면, 세계에서 한국인만 위험을 피하지 않고 고위험을 택한다던데 왜 그런가요?"행동경제학으로 노벨상을 받은 카너먼의 전망이론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학교에서 여러 번 다뤄 온 내용이라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한국인만 위험회피 성향이 극단적으로 낮다는 실험이나 데이터를, 나는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망이론을 일반적으로 설명드린 뒤, 한국인만 다르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질문하신 분의 표정은 끝내 석연치 않았고, 솔직히 내 마음에도 찜찜한 것이 남았다.그 찜찜함은 며칠 뒤 다시 돌아왔다. 넷플릭스로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바로 그 실험이 등장했다. 80% 확률로 4천만 원을 받거나 20% 확률로 한 푼도 못 받는 A안과, 100% 확률로 3천만 원을 받는 B안. 참가한 한국인 스무 명 중 열일곱 명이 안전한 B안을 골랐다. 카너먼의 원래 실험에서 B안을 택한 비율은 80%였다. 방송용 소규모 실험이었지만 결과는 거의 같았다. 한국인만의 반전 같은 건 없었다. 학술 데이터를 봐도 마찬가지다. 2010년 아크스 등의 연구에서 미국·중국·한국의 위험회피 성향에는 의미 있는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세계에서 한국인만 위험을 즐긴다는 말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반론도 가능하기는 하다. 한국인이 미국 증시에서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높은 레버리지 ETF를 사들이는 비율은 유독 높다. 위험을 덜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엔 다른 맥락이 있다. 카너먼 실험의 확률은 처음부터 못 박혀 있다. 80%는 80%다. 반면 주식시장의 불확실성은 정해진 숫자가 아니다. 투자자는 자기가 모은 정보와 판단으로 그 불확실성을 저마다 다르게 해석한다. 누군가에게 레버리지 ETF는 도박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계산을 끝낸 투자이다. 확정된 확률 앞에서의 선택과, 불확실성을 스스로 읽어내는 선택은 다른 종류의 일이다. 그러니 ETF 통계 하나로 한국인이 유별나다고 결론짓는 것 역시 성급하다.여기서 진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왜 한국인만 유별나다는 이야기에 그토록 솔깃할까? 생각해 보면 그런 이야기는 늘 인기가 많다. 한국인은 정이 많아서, 한국인은 빨리빨리라서, 한국인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어떤 것은 흉처럼, 어떤 것은 자랑처럼 들리지만 구조는 똑같다. 우리를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 세상에서 떼어 놓는다. 한국인만 그렇다는 단정은 검증을 요구받기보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데이터는 미국도 중국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데, 우리는 우리만 다르기를 바란다. 사실로 반박해도 그 믿음이 잘 꺼지지 않는 건, 그것이 세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왜 하필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하고 싶을까? 나는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한 세대 만에 가난을 벗고, 지금도 숨 막히는 경쟁 속에 서 있는 한국인. 우리에게는 그 과격했던 속도와 피 말리는 현재를 설명할 서사가 필요하다. 우리는 늘 남들과 달랐다는 이야기는 거기에 잘 맞는다. 달라서 이만큼 빨리 왔으니, 그 다름이 앞으로도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경쟁도 견딜 만한 것이다. 한국인만 위험을 즐긴다는 거짓은, 안전을 택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알리바이, 달콤한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물론 다름이 참이라 해도, 그 결과에는 늘 양면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다름이 우리를 빠르게 키운 만큼 어딘가를 빠르게 갈아 넣었을 텐데, 자기 위안의 서사는 밝은 쪽만 골라 담는다.강연장에서 끝내 석연찮아 하던 그분의 표정이 다시 떠오른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내 답이 틀려서 지었던 표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듣고 싶던 답이 아니어서였을 것이다. 다음에 어딘가에서, 누군가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할지 고민해본다. 질문하는 이의 얼굴, 표정이 떠오르기에 고민이 쉬이 끝나지 않는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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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의 시대&뮤직
그래미는 월드컵이 아니다. 안(못) 타도 된다
미국 그래미 어워즈가 내년부터 5개 시상 부문을 추가한다고 최근 밝혀서 화제다. 그 중 하나가 '최우수 아시아 팝 음악 퍼포먼스' 부문이라서다. 그래미가 아시아 팝 관련 부문을 만든 건 처음이다. 라틴 팝 관련 부문은 많았다. 심지어 '라틴 그래미'라는 별도의 시상식도 따로 있다. 아시아 부문이 생기면 아시아 가수가 그래미를 받을 수 있고, 아시아권에서 글로벌 선두를 달리는 것이 다름 아닌 케이팝이니 나쁠 게 없어 보인다. 월드 투어를 스타디움 규모로 도는 방탄소년단, 블랙핑크도 그래미에서는 상 하나 못 탔는데, 비로소 수상 가능성이 올라갈 것 같다.그런데 케이팝 팬들 일부는 불안해한다. 첫째, '아시아 팝' 부문 신설이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등 이른바 4대 본상이나 주요 부문 수상을 막는, 아시아 팝의 가두리 양식장이 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 탓이다. 마치 아카데미상이 오랫동안 영미권 외의 영화는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가둬둔 것과 비슷한 차별과 배제의 현상이 일어나리라는 것. 둘째, 무려 4년 만에 컴백한 방탄소년단이 돌아오자마자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을 탈환한 곡 'Swim'의 수상 가능성이 되레 낮아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 때문이다.그래미는 이번에 아시아 팝 부문을 신설하면서, 아시아 국가의 언어를 단편적으로 사용하거나 하나도 안 쓴 노래는 후보 자격에서 제외하겠다고 했다. 방탄소년단의 야심 찬 컴백작이자 빌보드 1위 곡 'Swim'은 100% 영어 노래다. 한국어(아시아 언어) 단어 하나 없다. 컴백 앨범 'ARIRANG' 전체적으로 봐도 영어 가사가 많다. RM을 제외한 6명의 멤버가 유창한 영어 구사자가 아니므로 앨범 녹음 과정에서 애를 먹는 모습은 컴백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BTS: 더 리턴'에도 여러 번 나온다. 그런데도 굳이 애써서 영어 노래, 영어 랩을 대거 담은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미답의 목표, 그래미 수상을 위한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갑자기 이번엔 그래미가 아시아 언어를 요구하는 상황이 된 거다. BTS는 영어로, 그래미는 아시아어로…. 마치 두 대의 큰 차가 동시에 유턴하며 완전히 엇갈리는 듯, '허무 개그' 같은 모양새다.자연스레 2027년 2월 7일 열릴 제69회 그래미에 대한 최대 관심사는 'Swim'의 수상 여부가 돼버렸다. 타도, 못 타도 논란거리가 될 게 뻔하다. 타면 '아시아 언어를 조건으로 내걸고 왜 영어 노래에 상을 주냐'는 논란이, 못 타면 '미국 시장에서 아시아 출신으로 최대 성과를 거둔 노래에 아시아 팝 부문마저 안 주냐'는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진퇴양난이다.벌써부터 그래미를 원망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깟 그래미 따위 안 받으면 뭐 어떤가. 그래미는 노벨상이 아니고, 빌보드는 월드컵이 아니다. 애당초 그래미는 미국의 음반 업자들이 서로를 칭찬해 주려 만든 상이다. 미국에서 안 파는 물건(음악)은 대상도 아니었다. 브라질, 헝가리, 카메룬, 몽골의 음악 거장 중에 그래미 '받은 사람 찾기'가 더 어려운 이유다.빌보드는 '미국 내 주간 판매 차트'다. 아시다시피 1년은 52주다. 이론상으론 (복권 당첨 번호처럼) 한 해에도 1등이 52회나 바뀐다. 우리에겐 빌보드 1위가 희귀하고 신기하니 '세계 정복!'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당장 지난주에 누가 빌보드 1위 했는지, 올해 '빌보드 최우수 팝 듀오/퍼포먼스 부문' 트로피는 누가 가져갔는지 대개 알지도 못하고 기억도 안 난다. 몇 년에 한 번씩 나라마다 대표 선수를 뽑아서 겨루는 올림픽, 월드컵과 음악 차트, 음악 시상식은 이렇게 너무 다르다. 게다가 우리 가요는 애초에 미국 시장이 아닌 한국 시장을 겨냥해 만들어지고 발표된 것 아닌가.한국 노래가 세계에 울려 퍼지고, 한국 가수를 보려고 수만, 수십만 인파가 운집한다는 사실을 요즘 모르는 사람이 어딨나. 미국이 주는 트로피 하나가 뭐 그리 대수인가. 그렇게 치면 우리는 우리 가요가 태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상을 받는지 관심 둔 적 있는가. 테일러 스위프트, 레이디 가가가 세계 음악계를 평정하는데 왜 한국 시상식에선 트로피를 안 주나. 이것도 차별인 건가. 봉준호 감독의 말을 빌면, 그래미는 '미국의 로컬 시상식'일 뿐이다.지금 한국 대중음악의 확장은 파죽지세다. 그래미는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액세서리다. 큰 것을 섬기는 걸 우린 사대주의라 부른다. 오랜 사대의 그늘을 벗어날 만큼 우리도 이미 거대해졌다. 지난달 멕시코시티 대통령궁 앞에 5만 아미가 모였다. 월드컵 폐막식 무대에 방탄소년단이 선다. 그래미 안 타도 그 사실을 세상이 다 안다. 역사는 이미 기록되고 있다.━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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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기술과 인재를 사들이는 시대, 글로벌 M&A의 판이 바뀌고 있다
최근 글로벌 M&A 시장은 역대급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3년간(2022~2025년) 글로벌 벤처투자 금액이 연평균 -25%의 역성장을 기록한 것과는 뚜렷한 대조여서 시장의 관심을 끌고 있다. Bain & Company에 따르면 2025년 M&A 규모는 4조 8000억 달러(6500조원)로 전년 대비 36% 급증해, 2021년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큰 규모를 기록했다. 건당 평균 금액도 약 9400만 달러(1300억원)로 2022년 대비 30% 이상 커지면서, 대형화 추세가 뚜렷해졌다.이번 M&A 사이클은 이전 M&A와 내용·형식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과거 M&A가 피인수 기업의 지분과 지배권을 통째로 매입하는 기업 인수 방식이라면, 최근 M&A는 기술·인력만 인수하는 방식(Acqui-hiring)이 두드러진다. 부실 자산이나 껍데기는 배제하고, 핵심 기술(IP)과 개발 엔지니어만 사들이는 거래 방식이다. 법적으로는 기업 간 자산 양수도 계약 형태를 띠지만, 핵심 인력의 고용 승계와 이적 보상금(Retention Bonus)을 계약 조건으로 묶는 패키지형 M&A다.배경은 뭔가. 첫째는 '기술 패권 경쟁에 따른 시간 압박'이다. 자체 연구개발(R&D)로는 폭발적인 기술 발전(예 : 인공지능)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되자, 검증된 팀을 통째로 흡수해 시차를 없애려는 인수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둘째, 유니콘의 '거품 제거'도 한 요인이다. 벤처투자 침체로 자금난에 빠진 유니콘들의 몸값이 낮아지면서(Down-valuation), 대기업들의 매수가 활발해지고 있다. 셋째, 규제당국의 독과점 규제 강화도 빼놓을 수 없다. 통째로 M&A해선 기업 결합 승인이 어려워지자, 알짜 IP와 핵심 인재 조직만을 골라 담는 전략을 택하고 있는 셈이다.지역별로는 단연 미국이 1위다. 대형 M&A의 70%를 주도하며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고, 유럽·중동·아프리카(EMEA)가 20%로 2위,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약 10% 수준이다. 미·중 갈등 속에 중국이 주춤한 사이, 미국과 유럽이 글로벌 기술과 인력을 빨아들이고 있단 얘기다.분야별로는 정보기술(IT) 및 소프트웨어 M&A(2025년 1조 달러)가 핵심이다. 가장 뜨거운 AI 외에도 최근 AI 자율화에 따른 보안 위협인 이른바 미토스 쇼크(Mythos Shock)로 급부상한 사이버 보안, 차세대 모빌리티의 두뇌인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새로운 금융 인프라로 떠오르는 블록체인과 스테이블코인 등이 핵심이다. 알파벳의 클라우드 보안 스타트업 위즈 인수(320억달러), 팔로알토 네트웍스의 사이버아크 인수(250억달러), 메타의 스케일 AI 지분투자와 인력 M&A(143억달러) 등이 단적인 예다.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 첫째, 스타트업 생태계에 '새로운 회수(Exit) 방식'이 안착하고 있다. 투자자금을 IPO보다 빨리 회수할 수 있어 모험자본의 선순환을 유도한다는 평가다. 둘째, 인재와 기술의 생산적 재배치 효과다. 자금난에 몰린 우수 엔지니어들이 빅테크의 풍부한 인프라와 결합함으로써 혁신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셋째, 중견기업들의 구조 개선 효과다. 자금은 있지만 과거 수익모델에 머물러 있던 전통 중견기업들이 기술·인재 인수를 통해 고부가가치 테크기업으로 체질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같은 인력 중심 인수는 통합 후 핵심 인재의 재이탈 가능성이나, 자산 인수 형식을 빌린 독과점 규제 우회라는 부작용도 함께 안고 있어 정책당국의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앞으로도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 등 빅테크들이 AI와 보안 인프라 등 인수에 연간 수백억 달러를 쏟아붓겠다고 공언한 만큼, 기술·인재 인수 M&A는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시사점은 뭔가. 그동안 국내 벤처 생태계는 지나치게 상장(IPO)이라는 좁은 통로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AI 3대 강국을 목표로 하는 우리로서는 IPO 외에 M&A를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책당국은 M&A펀드 확대, 법인세 감면, 독과점 규정의 탄력적 적용 등 M&A 활성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견기업 역시 사내 유보금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오픈 이노베이션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술혁명 시대엔 사내 R&D 중심의 오가닉(Organic) 성장만으로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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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의 읽는 인간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⑬]배관공이 된 경제학자-래포 시장과 오만의 비용
지난 연말 IRP 포트폴리오를 바꾸며 은행 종목 ETF를 조금 추가했다. 요즘처럼 살벌한 투자판이라면 차라리 '은행 같은 악당'들이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몇 년 전부터 생각하던 일이었는데, 불장에 데이고 난 뒤에야 겨우 실행에 옮겼다.물론 나는 또렷하게 기억해 냈다. 10년간 불입했던 퇴직연금이 DB형에 묶여 고작 세전 연 1% 안팎의 수익을 냈던 사실을.그 정도면 은행은 내게 한 번쯤은 물었어야 했다."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물론 묻지 않았다. 은행은 친절했지만 친절의 방향은 언제나 은행 쪽이었다. 창구 직원은 웃었고, 앱은 반짝였고, 상품 설명서는 길었다. 그러나 정작 내 노후가 1% 안팎의 수익률로 천천히 마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크게 말해주지 않았다.전문가 추천대로 여러 펀드를 섞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바구니를 여러 개 샀다. 문제는 계란이 아니라 바구니값이었다. 이번엔 아예 마이너스였다. 더 이상 '눈탱이'를 맞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공부해 보기로 했다.그런데 경제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상한 일이 생겼다. 세상이 더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또렷해졌다. 경제학은 나를 똑똑하게 만들기보다,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더 정교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경제학을 배운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배관의 목록을 조금 늘렸을 뿐인지도 모른다.최근 미국 금융시장에서 래포, 곧 환매조건부채권 시장이 다시 조용히 주목받고 있다. 터졌기 때문이 아니다. 터질 때마다 가장 먼저 의심받는 배관이기 때문이다.래포 시장은 금융의 실핏줄이자 지하 배관이다. 은행과 증권사, 헤지펀드가 국채를 담보로 맡기고 짧은 기간 돈을 빌렸다가 다시 갚는 시장이다. 말하자면 거대한 전당포다. 맡기는 물건이 금반지가 아니라 미국 국채이고, 돈을 빌리는 사람이 동네 상인이 아니라 세계 금융기관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주식시장의 화려한 전광판, 인공지능 기업의 시가총액, 중앙은행 총재의 한마디가 금융의 거실이라면, 래포 시장은 그 아래 묻힌 배관이다. 막히는 순간 가장 높은 곳부터 흔들린다.문제는 이 조용한 배관 속에서 레버리지가 자라난다는 점이다. 헤지펀드들은 국채를 담보로 자금을 빌려 현물을 사고, 선물을 팔아 그 사이의 작은 가격 차이로 수익을 만든다. 베이시스 트레이드다. 최근에는 스와프 스프레드 거래 같은 다른 상대가치 거래도 같은 압력을 보탠다. 이름은 달라도 구조는 같다. 작은 차이를 크게 빌려 먹는 일이다.평온할 때라면 전략이라 불러도 될 거다. 시장의 작은 틈을 찾아내고, 가격 차이를 줄이며, 유동성을 공급하는 일처럼 보인다. 금융은 늘 자신에게 좋은 이름을 붙이는 데 능숙하다.그러나 유동성이 마르는 순간 전략이 아니라 의존이 된다. 자기 돈으로 들고 있는 국채와 빌린 돈으로 들고 있는 국채는 같은 국채가 아니다. 전자는 자산이고, 후자는 약속이다. 약속은 때로 자산보다 더 빨리 흔들린다.배관은 평소에는 물을 흘려보낸다. 위기 때는 공포를 흘려보낸다. 1998년의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 LTCM은 역사상 가장 똑똑한 바보들의 모임처럼 기억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과 수학 천재들이 모인 그 펀드는 절대 지지 않는 수식을 가졌다고 믿었다. 파산 확률은 우주의 나이 동안 단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시장은 우주의 나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자 담보는 담보를 불렀고, 매도는 매도를 불렀고, 공포는 더 큰 공포를 불렀다.그들이 놓친 것은 수학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가격 차이가 언젠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 순간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지는 계산하지 못했다. 투자에서 맞는다는 것과 버틴다는 것은 다르다.시장은 묻는다. 당신 말이 맞을 수 있다. 그런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가.수식은 진화했지만 오만은 오래 산다.톰 울프의 『허영의 불꽃』에는 스스로를 우주의 지배자라 불렀던 채권 트레이더가 등장한다. 어느 날 밤 작은 길 하나를 잘못 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울프는 그것을 허영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것을 배관이라고 부른다.LTCM이 무너지던 해, 나는 배관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금융시장의 지하실은커녕 내 퇴직연금의 수도계량기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것이 눈탱이의 본질이다.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다.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몰라도 괜찮다고 믿었던 것이다.모르는 것과 모른 채 맡기는 것은 다르다. 모르는 것과 모른다는 사실을 잊는 것은 더 다르다.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거실에는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 삶을 실제로 버티게 하는 배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현금흐름, 부채, 건강, 관계, 시간. 그리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능력. 이런 것들은 빛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늦게 본다. 늦게 본다는 것은 대개 비싸게 본다는 뜻이다.공부를 조금 했지만 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점이다.진짜 배관공은 물이 멈춘 뒤에야 드러난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허영의 불꽃이 한 번 꺼진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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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
④ 거절했는데 강연이 확정됐다
며칠 전, 한 유명 협회에서 강연 요청 메일이 왔다. 내 책과 연구 배경을 언급하며, 행사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질서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정중하고 반듯한 구성. 그런데 글 전체에서 AI가 쓴 듯한 느낌이 강하게 났다. 나 역시 AI를 많이 쓰니, 그 자체가 별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협회가 요청한 강연 시간에 나는 이미 선약이 있었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어렵다고 답했다. 대신 가능한 다른 시간대를 알려드렸고, 참고하시라고 강연료도 함께 안내했다.얼마 후 답장이 왔다. 강연 수락에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확정된 강연 시간은 내가 분명히 어렵다고 말했던 그 시간이었다. 행사 계획서에는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강연료였다. 내가 안내한 금액보다 25%가량 높게 적혀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내가 수락하지 않은 시간에, 내 이름이 들어간 행사 계획서가 만들어졌고, 강연료는 내가 말한 것보다 올라가 있었다. 강연료가 올라갔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상황은 아니었다.다시 상세하게 메일을 보냈다.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하다고, 그 시간에는 선약이 있어서 강연이 불가능하다고, 이전 메일에서도 그렇게 말씀드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다시 답장이 왔다. 또 강연 수락에 감사한다는 내용. 또 행사 계획서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도 시간은 내가 불가능하다고 한 그 시간. 강연료는 처음 내가 안내한 금액보다 50%가량 높아져 있었다.기괴했다. 솔직히 잠깐 장난스러운 호기심도 생겼다. 여기서 한 번 더 같은 내용으로 거절 메일을 보내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는 강연료가 100% 올라서 올까? 거절할수록 몸값이 오르는 이상한 경매가 시작되는 것일까? 그런 실험은 하지 않았다. 이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간의 이메일 소통 내역을 설명했다. 혹시라도 행사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지금 상황을 정확히 확인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분은 몹시 당황한 듯했다. 이메일 소통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설명은 이랬다. 동명이인 교수가 있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설령 동명이인 교수가 있다고 해도, 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시간에 왜 내 이름이 들어갔는지, 왜 강연료가 두 번이나 달라졌는지, 왜 같은 수락 감사 메일이 반복됐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금 더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비슷했다. AI와 인지과학을 연구하는 교수 중에 김상균이 또 있다고?아이러니한 것은, 그 협회가 내게 요청한 강연 주제가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질서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짧은 이메일과 통화 과정에서 내 머릿속은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무질서로 가득 찼다.나는 이 일이 반드시 AI 때문에 벌어졌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사람의 착오였을 수도 있다. 내부 전달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인이 무엇이냐보다, 이런 일이 앞으로 점점 더 자주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AI 시대의 무서움은 AI가 틀린 답을 낸다는 데만 있지 않다. 더 무서운 것은, 틀린 답이 아주 그럴듯한 문장과 공식 문서의 모양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예전의 실수는 대체로 티가 났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문장은 매끄럽고, 형식은 완성되어 있고, 첨부 파일은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 안의 사실관계가 틀려 있다. 더 곤란한 것은, 그 오류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무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그 협회에 나는 크게 실망했다. 유명한 기관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이번 일이 앞으로 우리 사회가 마주할 미래의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인공지능 시대의 진짜 위험은 기계가 인간처럼 말하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이 기계 뒤에 숨는 데 있다.새로운 질서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오래된 질서부터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사람 사이 신뢰의 원천은 무엇인지부터 말이다. 그 단순한 질서가 무너지면, 아무리 좋은 AI를 붙여도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그저 더 빠르고, 더 공손하고, 더 그럴듯하게 무질서해질 뿐이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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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의 시대&뮤직
강소(强小) 콘텐츠 육성이 문화 강대국 발판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기…. 이런 환경과 조건들이야말로 (한 아티스트가) 긴 생명력을 유지하게 하는 큰 전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의 작은 극장. CJ문화재단 설립 20주년 기념 '리더스 토크'에 참여한 민규동 영화감독의 말은 적잖은 울림을 줬다. 1999년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로 데뷔한 그는 '파과' '간신' '내 아내의 모든 것' 등의 작품으로 다양한 장르를 종횡하며 선 굵은 필모그래피를 일군 연출자다. 그 역시 한 편, 한 편의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실패와 성공 사이의 외줄타기를 해왔다고, 특히나 신인 시절 스스로를 의심할 때 주변에서 내미는 따뜻한 손길과 격려로 버티며 여기까지 왔노라고 털어놨다. 그 불안한 길을 그는 심지어 "지옥길"에 비유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자서전에서 '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지옥길을 걷는 듯했다'고 했습니다. 신진 창작자분들이 자기만의 작은 지옥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문화재단 분들이 많은 손을 잡아줬습니다." 작은 지옥길을 걸어온 민 감독은 이제 중견이 돼 CJ문화재단의 신진 영화인 지원 사업인 '스토리업'의 디렉터이자 멘토로 활약하고 있다. 가능성을 증명할 단 한 번의 기회 자체를 얻는 것조차 힘겨웠던 신인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절실한' 후배들에게 더운 손길을 내밀고 있다. 얼마 전, 제79회 칸 영화제가 폐막했다. 나홍진 감독의 기대작 '호프'는 수상에 실패했지만 한국 신진 창작자의 결실이 떠들썩한 뉴스 사이로 반가운 새싹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학생 영화 부문 '라 시네프' 시상식에서 진미송 감독이 2등상을 받은 것이다. 진 감독은 뉴욕으로 이민 간 4인 가족의 하루를 담은 15분짜리 단편 영화 '사일런트 보이시스'로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사일런트 보이시스'라니….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대중문화계에도 수많은 '조용한 목소리들'이 있다. 숨죽인 채 자신의 잠재력을 제련중인 이들에게 첫 번째 마이크를 건네주는 일은 소중하다. 최근 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살목지'. '장화, 홍련'을 제치고 23년 만에 한국 공포 영화 흥행 1위 기록을 새로 쓴 이 작품은 1995년생 이상민 감독의 솜씨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지만 한국 영화 시장의 침체기에 졸업해 사회에 나온 그는 CJ문화재단 '스토리업' 지원작으로 단편 '돌림총'이 선정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영화제에 초대되며 데뷔작 '살목지'에 이르렀다. '작은 지옥길'을 지나 마침내 '작은 꽃길'에 다다른 데는 고사의 위기에 물과 거름을 내준 작은 지원의 힘도 있었다. 신진 창작자 지원의 효과는 지원금과 멘토링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당장 100만 장 판매, 1000만 관객 돌파, 1억 조회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원작 선정을 위해 업계 동료들과 경쟁하는 것부터가 그들에겐 가장 중요한 창작 욕구, 동기부여가 된다. 작은 음악가들도 그렇다. 인디 밴드 멘토링을 하다 보면 'CJ튠업에 선정된다면 원이 없겠다' 'EBS 스페이스 공감-헬로루키에 당선된다면 날아갈 것 같다'는 1차 목표를 말하며 눈을 반짝이는 신예들을 늘 만나게 된다. 우린 언젠가부터 'K-컬처 대박'의 신화 앞에 너무 많은 것만 바라고 또 바라보게 된 건 아닐까. '빌보드 1위' '황금종려상' '그래미 후보 등재' 같은 'SF적 성과'에만 열광하기엔, 우리 곁에서 조용히 어깨를 움츠린 '작은 거인'들이 너무 많다. 등잔 밑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이들을 손등에 올려놓고 더 나아가 거인의 어깨로 향하는 사다리에 놓아줄 손길이 절실하다. 요즘 가요 종합차트에서 케이팝과 함께 맹위를 떨치는 록 싱어송라이터 한로로. 그도 'CJ 튠업'을 비롯한 여러 신인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날을 벼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극소수의 거인 콘텐츠만이 아니다. 작지만 강한 창작자에 대한 기업과 국가의 지속적인 주목과 지원이야말로 작지만 큰 징검다리가 돼줄 것이다. 강소(强小) 콘텐츠가 풍부한 나라야말로 문화 강대(强大)국이다.━임희윤 문화평론가는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문화부 기자로 15년간 현장을 누볐다. 글쟁이, 라디오 게스트, 강연자, MC로 클래식 음악부터 여행 문화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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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디펜스 테크, 글로벌 벤처투자의 중심으로 급부상
정부 의존적인 분야로 여겨졌던 디펜스 테크(방산 기술) 분야가 최근 벤처 시장에서 급부상하고 있다. 러-우 전쟁과 중동 분쟁, 미·중 전략경쟁이 전쟁의 양상을 급격히 바꾸고 있기 때문이란 게 전문가들 평가다.우선 성장 속도가 빨라졌다. 2025년 글로벌 디펜스 테크 시장은 벤처투자금액 기준 491억달러(67조원)로 러-우 전쟁이 시작된 2022년 대비 4배로 확대됐다. 연평균 성장률로 봐도 무려 59%로 2020년 전후의 10~15%보다 4~5배 빠른 속도다. 관련 벤처기업 수도 빠르게 늘고 있다. Crunchbase 등 자료에 의하면, 디펜스 테크 벤처기업 수는 2020년 약 1,500개에서 2025년 약 5,000개로 3배 이상 증가했다. AI·드론·사이버보안 분야 창업이 러-우 전쟁 이후 급증했고, 미국이 45~50%, 유럽 25~30%, 중국이 10~15%로 미국이 압도적이다.왜 디펜스 테크 분야가 급부상하고 있나. 첫째, 전쟁 방식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과거엔 전차·전투기·항공모함 등 대규모 재래식 무기가 중심이었다면, 이젠 AI·드론·위성·사이버보안 기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고 있다. 실제 러-우 전쟁에서 수백만원짜리 소형 드론이 수백억 원 규모의 전차와 군함을 무력화하는 사례가 잇따랐다. 이는 미 국방부의 핵심 전략을 저비용 자율무기 체계로 전환시켰고, 이에 따라 AI 자율비행과 드론기술을 보유한 벤처업체에 투자자금이 몰리고 있다.둘째, 대형 방산업체만으론 기술 변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통 방산기업들은 무기체계가 대형 중심이고 개발 기간도 워낙 길어서, AI와 소프트웨어 혁신 대응이 느리다. 반면 벤처 스타트업들은 AI와 데이터, 드론기술 등을 빠르게 군사 분야에 적용하고 있다. AI드론 벤처의 대명사인 안두릴(Anduril)의 자율 감시 시스템이 대표 사례다. 미 남부 국경과 군사기지 방어에 실전 배치되고 있다. 록히드마틴·보잉 같은 대형 방산업체가 독점하던 시장에 기술 스타트업들이 본격 진입하고 있는 셈이다.셋째, 국가안보가 곧 산업 경쟁력인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미·중 전략경쟁이 장기화되면서, 각국은 반도체·AI뿐 아니라 드론·사이버보안 등도 국가의 핵심 인프라로 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정부 자금투입도 급증하고 있다. 예컨대 미 국방혁신 단위(DIU)의 민간 기술도입예산은 지난 5년간 연 65%의 급증세고, 유럽연합(EU)도 2021~2027년 동안 유럽방위기금(EDF)에 80억 유로(약 12조원)를 투입해 국방 첨단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어떤 국가와 기업들이 대표적인가. 현재 디펜스 테크 시장은 미국 주도다.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안두릴(Anduril), 팔란티어(Palantir), 쉴드AI(Shield AI) 등이 AI·드론·데이터 기술을 앞세워 급성장하고 있다. 특히 안두릴 외에 팔란티어가 관심 대상이다. 팔란티어는 군 정보분석과 전장 데이터 소프트웨어를 공급, 미군과 NATO의 핵심 AI 플랫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선 데이터 기술기업인 독일의 헬싱(Helsing), 이스라엘은 사이버 정보·감시 기술기업인 NSO Group, 중국에선 세계 드론 시장점유율 1위 기업인 DJI가 대표적이다.유니콘은 몇 개나 되나. 동 업계의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업체는 현재 약 20개로 수백 개에 달하는 AI, 핀테크 등에 비해선 훨씬 적다. 하지만 20개의 유니콘 중 10개가 작년 한 해 동안 탄생했다는 점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대표 기업으론 안두릴이 기업가치 약 610억달러(85조원), 자율비행 드론업체인 Shield AI는 기업가치 127억달러(약 17조원), 해상·공중·지상 무인 기술을 개발한 UFORCE(10억달러 이상) 등이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배터리·드론·로봇 기술을 갖춘 우리나라도 디펜스 테크 벤처투자에 정부와 업계 모두 관심을 높여야 할 시점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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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의 읽는 인간
[김영태의 읽는 인간⑫]배터리가 먼저 닳는다-하이데거의 잡담, 한병철의 피로
휴대전화가 먼저 피곤해진다.배터리 잔량 39%. 아직 오전이다.무거운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알림은 이미 여러 겹이다.선거철이다.모두가 입장을 가지고 있다.누군가는 단정했고,누군가는 분노했고,누군가는 해설을 붙였다.나는 아직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이미 결론이 나버린 세계가 도착해 있다.지친다.몸이 아니라 반응이 먼저 닳는다.생각보다 먼저 도착한 결론들 사이에서나는 잠깐 멈출 틈을 찾는다.그 틈이 잘 보이지 않는다.아니, 보이기는 한다.다만 그 틈으로 들어가기 전에다음 알림이 온다.■ 허락된 알림, 허락된 긴장예전에는 회의 중에도 휴대전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임원회의 자리에서 알림이 울리면 잠깐 고개를 숙였다.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울 수도 있었다.누군가는 말을 멈추지 않았고,누군가는 내가 누구의 메시지를 받는지 궁금해했다.그건 신뢰처럼 보였다. 동시에 긴장이었다.아무 때나 알림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누군가가 아무 때나 나를 호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권한은 늘 족쇄를 함께 데리고 온다.열려 있는 통로는 선택권이 아니라 상시 대기 상태다.그 시절의 알림은 결정과 연결되어 있었다.짧은 문장 하나가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배터리는 빨리 닳았지만내가 왜 닳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결정을 내려야 했고,대답을 해야 했고,책임이 있었다.일이 나를 소모시켰다.피로는 설명이 가능했다.설명 가능한 피로는 견딜 만했다.■ 잡담 속에서 사는 사람지금은 결정이 줄었고 책임도 가벼워졌다.그런데도 더 빨리 닳는다.뉴스 몇 개를 읽고,댓글 몇 줄을 훑고,짧은 동의와 짧은 냉소를 오간다.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일상 속에 유통되는 말을 '잡담(Gerede)'이라 불렀다.잡담은 나쁜 말이 아니다.거짓말도 아니다.그저 깊이를 통과하지 않은 말이다.이미 누군가가 정리해 둔 문장을다시 말하는 상태.생각의 형식을 빌렸지만생각의 과정은 생략된 언어다.생각을 하기 전에이미 누군가의 생각을 공유한다.말은 내 것이지만문장은 내 것이 아니다.하루에도 수십 번이미 완성된 문장을 소비한다.생각은 깊어지지 않는데감정은 계속 움직인다.작은 분노,짧은 연대,가벼운 판단.하루가 끝날 무렵무엇을 깊이 생각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소모하는 시대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오늘날 우리는 억압받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주체에 가깝다고 말한다.과거의 사회가 "해야 한다"로 움직였다면 지금의 사회는 "할 수 있다"로 움직인다.강요가 사라진 자리에 자기 착취가 들어선다.감시자는 없다.마감도 없다.벌칙도 없다.그런데도 나는 쉬지 않는다.참여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고,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감각.그 감각이 나를 계속 화면 앞으로 데려온다.아무도 즉각적인 의견을 요구하지 않는다.그럼에도 나는 계속 반응한다.좋아요를 누르고,공유를 하고,짧은 단정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킨다.성과는 쌓이지 않는데소모는 분명하다.예전에는 일이 배터리를 닳게 했다.요즘엔 반응이 배터리를 깎는다.그때의 피로는 무거웠고지금의 피로는 얇다.얇아도 오래간다.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나를 낮은 전압 상태로 만든다.■ 덜 반응하는 기술어느 날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두고 책을 펼친다.알림은 오지 않는다.문장은 도망가지 않는다.한 문장을 세 번 읽는다.뜻이 바로 정리되지 않는다.손이 자꾸 휴대전화를 찾는다.그래도 글을 놓지 않는다.느림이 답답함이 아니라 저항이 된다.읽는 동안 나는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멈춰 있는 사람이 된다.문장은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당장 판단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생각은 천천히, 내 속도로 모양을 갖춘다.그 속도가 낯설다.뉴스의 속도와 다르고,알림의 속도와 다르다.처음엔 느리다고 생각했는데사실은 한동안 잊었던 내 원래의 속도는 아니었을까.오늘은 조금 덜 반응하기로 한다.세상은 그대로다.다만 나는 덜 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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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
③ 성적표가 없어서 불안해요
한 대학생이 말했다. 뭔가 해야 할 과제가 없어서 불안한 느낌이 든다고. 예전에는 시험 점수가 잘 나오면, 본인이 잘하고 있다고 안도하고, 점수가 부족하면 빈 부분을 채우려 애쓰면 되니까 편했다고. 성적표가 안 나오니 오히려 불안하다고. 얼마 전 시청한 KBS 다큐멘터리 <다큐3일>의 한 장면이다. 참으로 밝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의 대학생인데, 인터뷰 말미에 시험과 성적표를 그리워하는 얘기를 남겼다.당신은 고등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매달 시험 보고, 등수가 적힌 성적표를 다시 받아보고 싶은가? 그때가 뭐가 좋아서 다시 돌아가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으나, 나는 영상 속 학생의 마음이 이해된다. 참으로 아프게 이해된다.예전, 그리 멀지 않은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는 선명한 목표가 있었다. 대학에서 A라는 학과를 졸업하면, 대부분이 B라는 진로로 흘러갔다. 기업에서 한 직무를 맡으면, 최소한 몇 년, 운이 좋으면 수십 년을 그 일만 하면 됐다. 우리 삶의 흐름은 크게 세 단계였다. 인생의 첫 1/3은 공부하며 준비하고, 다음 1/3은 두어 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보내고, 마지막 1/3은 은퇴하며 여생을 보내는 식이었다. 인생 삼분론이 비교적 명확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삼분론은 통하지 않는다. 내 수업에는 60대 나이의 석사과정 학생이 보이고, 70세가 넘으신 선배들도 직업 전선에서 물러날 기미가 없다.요컨대, 내가 젊었던 시절만 봐도, 우리 사회에서 각자의 삶에는 선배들이 걸어간 경로가 내비게이션 안내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각자의 취향, 꿈을 조금만 누른다면, 그 경로대로 안전하게 걸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 내비게이션이 꺼졌다. 아니다. 먼저 경로를 보여주며 길을 갔던 선배가 말한다. 자신이 걸어온 길대로 따라오면 안 된다고. 그 길은 이미 끊어졌다고 말이다.모든 게 흔들리고 있다. 사회의 목표, 조직의 목표, 그에 따라 개인의 목표까지 동시에 흔들린다. 젊은 세대는 윗세대에게 묻고, 서로에게 답을 찾아보지만, 그 누구도 명확하게 답을 얘기하지 못한다. 보이스피싱처럼 보이는 강의, 300만 원 내고 자신의 강의만 수강하면 답이 보인다고 현혹하는 저질 온라인 콘텐츠만 범람하고 있다."교수님이 제 롤모델입니다." 가끔 이런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 말이 참으로 부담되고, 틀렸다고 본다. 이 시대에는 롤모델이 없다. 많은 이들이 한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뛰어야 했던 고속 성장형 산업화 시대에는 롤모델이 명확했다.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제일 잘 뛰는 사람이 롤모델이었다.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좋게 말하면 무한한 자유와 꿈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두어 명을 롤모델로 삼아 쫓아가는 경로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한다. 한정된 자원으로 산업을 키우던 시대를 넘어서, AI라는 두 번째 지능을 새로운 레버리지로 삼아서 한없는 꿈을 꾸는 시대를 말이다. 여기서 '무한한 자유와 꿈'이란 표현이 불편한 가시처럼 느껴질 수 있다. 미세 먼지 가득한 듯 숨 막히는 현실인데, 무슨 자유와 꿈을 얘기하냐고 말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AI라는 거대한 전환이 우리에게 미세 먼지보다 더 큰 압박과 답답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이 먼지 뒤편에는 그간 우리가 잊고 지냈던 자유와 꿈을 향한 여정이 펼쳐질 수 있다고 말이다.그때까지 선배가 후배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그리고 때로는 후배가 선배에게, 아이가 어른에게, 이렇게 얘기해주면 좋겠다. 나도 방향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발을 내딛다 보면, 좋은 방향이 보일 것 같다고, 네가 사랑하고 빠져들 길을 멋지게 찾을 것이라고, 그때까지 내가 곁에서 친구가 되어줄 테니,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지내자고 말이다.<다큐3일>속 대학생은 젖은 머리로 수건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수면 바지 차림, 집 앞에 분리수거할 때 신을만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런데 표정은 참 밝았다. 그 학생에게 꼭 얘기해 주고 싶다. 성적표는 없지만, 당신이 오늘 스스로 내린 결정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말이다. 미세 먼지를 통과해서 당신이 걸어갈 꿈의 여정을 응원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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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의 시대&뮤직
한반도를 거대한 '문화의 자기장'으로 만들자
그들을 '오게' 하는 건 음악과 드라마이지만 그들을 '오래' 머물게 하는 건 그 너머에 있다. 지난 28일 에어비앤비가 서울 성동구에서 연 미디어 간담회 현장에 찾았다. 토론 사회자로 참가했다 여러 통찰을 얻어 왔다. 이날 에어비앤비는 한국을 방문한 해외 여행객 4500명을 대상으로 최근 진행한 'K-컬처와 한국 여행' 설문 조사 결과를 밝혔다. 이에 따르면, 'K-컬처가 한국 여행에 대한 관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 응답자는 무려 94%다. 한국의 음악, 영화, 드라마가 실제로 대다수 여행객이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단순히 뮤직비디오에 나온 건물, 드라마에 나온 계단에 가서 인증샷만 찰칵 찍고 떠나는 걸 원하는 건 아니었다. 전체의 91%는 '진정한 현지 문화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92%는 K-팝을 넘어 음식, 역사, 자연 등 폭넓은 한국 문화를 경험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일까. 74%는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한 서울 외 지역을 방문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현실은 많이 달랐다. 3분의 2에 달하는 66%가 서울에서 대부분의 일정을 소화했다고 했다. '동백꽃 필 무렵' '갯마을 차차차'를 보고 'Pohang'(경남 포항)을 검색해 보고, '도깨비' '폭싹 속았수다'를 통해 'Gochang'(전북 고창)을 찾아본 이라도 연계해서 즐길 다른 문화나 좋은 숙박 시설이 없다면 간다 해도 당일치기 인증샷 여행에 그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봐도 그렇다. 해외 여행을 갈 때 공항에 면한 대도시를 거점으로 삼되, TV나 유튜브에서 본 근사한 풍광을 떠올리며 타 지역을 가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가끔은 복잡한 교통편이나 다른 볼거리의 부재 때문에 기약 없는 '다음에…'만 뇌까린 게 부지기수다. 그 '다음'은 10년째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큰맘 먹고 나선 지역 여행이 반짝반짝한 수도의 야경보다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경우도 많다. 취재차 노르웨이를 방문했을 때 수도 오슬로보다 더 좋았던 건 멀리 서안에 자리한 고도(古都) 베르겐이었다. 옛 바이킹의 수도로서 알록달록한 브뤼겐의 구시가도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베르겐 고성(古城)에서 고색창연한 성벽과 노을을 배경으로 관람한 바이킹 포크 밴드 '바르드루나'와 팝가수 오로라의 합동 콘서트는 잊을 수 없다. 다음엔 특별한 공연이 있는 기간에 여러 날 숙소를 잡아 베르겐에 머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돌아온 뒤, '노르웨이 다녀왔어? 오슬로는 어때?'라 묻는 지인들에게 베르겐행을 추천한 게 십수 년간 헤아릴 수 없다. 한국은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해외 여행객들의 지역 관광 비율이 낮은 편이다. 가까운 일본만 봐도 다르다. 일본 소도시 여행이 한국인들에게도 중요한 화두일 정도다. 인프라와 홍보가 두텁다. 그럼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문화 콘텐츠를 통해 찾는 이가 절대다수인 나라인 만큼, 한반도를 거대한 '문화의 자기장'처럼 만드는 건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부터 지역 축제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하지만 차별화된 축제는 드물다. TV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비슷비슷한 가수들을 섭외해 대동소이한 잔칫상을 차려낸다. 자국민들조차 시큰둥하다. 하지만 한국 문화를 조화롭게 차려낸 음악 축제도 이미 꽤 있다. 전북의 전주세계소리축제, 광주광역시의 ACC 엑스뮤직페스티벌은 우리 전통음악을 기반에 두되 해외의 첨단 음악, 실험 음악과 충돌하는 특별한 난장을 만든다. 며칠씩 이어지는 이런 축제를 지역 관광과 연계해 해외 관광객까지 끌어들인다면 어떨까. 숙박, 관광과 문화 체험 프로그램까지 연계해 'K-지역 관광/문화 체험'의 시험지로 써볼 만하다. 에어비앤비 토론 때 프랑스 출신 방송인 파비앙 씨의 이야기가 귓가에 생생하다. 최근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는 그는 "외국 친구들은 이제 한국인처럼 살아보기, 한국 문화 더 깊게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편의점에 들러도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컵라면에 치즈 소시지를 직접 넣어 녹여 먹고 싶어 한다"면서 "원주 한지테마파크에 가서 만들기 체험을 하고 더 나아가 한지에 기록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까지 알려주면 한국 문화와 역사를 자연스레 배우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인의 입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음되는 게 무척 신기했다. 그렇다. 케이팝을 듣고 멀리 한국까지 날아온 이들을 더 오래 머물고, 더 깊게 느끼게 하는 힘. 5박이 10박이 되고, 5년이고 10년이고 한국 문화를 '파게' 만드는 그 무언가는 이제 우리가 설계하기 나름이다. 관광객 숫자가 는다고 당장의 그래프에만 집착하다 대충 흘려보내기엔 지금의 이 흐름이 너무 소중하다. 100년 뒤에도 한국 팬이 넘쳐나는 지구별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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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AI 열풍, 닷컴 버블의 재현인가
최근 2~3년간 글로벌 주식시장을 지배한 핵심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이다. 엔비디아 주가는 2022년 말 약 14달러에서 2026년 4월 약 200달러로 3년 만에 14배 이상 상승하며 시가총액 4조 9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오픈AI는 2026년 초 기업가치 8400억 달러에 대규모 투자를 유치했고, 앤트로픽 역시 수천억 달러 수준의 평가를 받으며 시장 기대를 끌어올리고 있다.그러나 이 같은 급격한 성장 이면에서는 경고 신호도 뚜렷하다. 2025년 한 해 AI 분야에 200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투입됐지만, 수익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오픈AI는 약 120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지만, 막대한 연산 비용과 인건비로 약 90억 달러의 현금을 소진하며 대규모 적자 구조를 지속하고 있다. 매출이 증가해도 비용이 더 빠르게 늘어나는 구조가 이어지면서, 시장에서는 닷컴 버블을 떠올리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이 같은 우려는 과거와의 유사성에서 비롯된다. 시장을 움직이는 힘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대다. 인터넷이 산업 전반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이 2000년대 초 나스닥 버블을 형성했듯, 현재도 AI가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고 생산성을 혁신할 것이라는 기대가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투자 기준 역시 수익성보다 미래 가능성에 기울어 있다. 과거에는 클릭 수와 방문자 수가, 지금은 모델 규모와 컴퓨팅 파워가 기업 가치를 설명하는 지표로 활용되며 적자 구조를 정당화하고 있다.반면 현재 상황은 닷컴 버블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반론도 설득력을 갖는다. 가장 큰 차이는 주도 세력이다. 당시에는 수익 기반이 취약한 벤처기업들이 시장을 이끌었지만, 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구글·아마존과 같은 빅테크가 AI 투자를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연간 수천억 달러의 현금 흐름을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재무적 체력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에 130억 달러를 투자했고, 아마존과 구글도 앤트로픽에 각각 수십억 달러를 투입했다. 과거처럼 자금 경색으로 시장이 급격히 붕괴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기술 환경 또한 다르다. 인터넷 시대에는 인프라 구축에 시간이 필요했지만, AI는 이미 구축된 클라우드 기반 위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기업용 영역에서는 업무 효율을 개선하는 성과가 나타나며, 점진적인 수익화 가능성도 확인되고 있다.결국 AI 열풍의 향방은 하나로 수렴된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돈이다. 기술의 가능성은 이미 입증됐지만, 이를 지속 가능한 수익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기업 고객이 실제 비용을 지불할 만큼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확산되고, 동시에 막대한 컴퓨팅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연간 수억 달러에 달하는 GPU 운영 비용을 효율적 알고리즘과 자체 칩으로 낮추지 못한다면 현재의 성장도 지속되기 어렵다. 한마디로 AI 향방은 얼마나 빠르게 '돈이 되는 산업'으로 전환되느냐가 그 운명을 결정할 거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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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의 읽는 인간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⑪]뒤늦게 용감해진 당신에게 묻다
예전에 몸담았던 조직이 비난의 대상이 될 때, 기분이 묘해진다.먼저 드는 생각은 떠나서 다행이었다는 것이다. 세상만사(世上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으니, 험한 꼴을 비켜간 셈이다.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른 생각이 따라온다. 조금 더 오래 있었더라면, 지금의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는 없지만.어느 쪽이든 과거가 부정되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지 않다. 사람들이 어떤 집단을 비난하는 방식이, 그 안에 있었던 나의 시간을 함께 욕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라도 목소리를 내기란 만만하지 않고, 침묵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는 쓰지 못했던 문장들이 이제는 쉽게 다가온다.■ 장면 1방 안은 조용했다."왜 그렇게 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가, 분위기가 한 번 꺾인 뒤부터였다.몇몇은 시선을 내렸고, 몇몇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노트북을 두드렸다.누군가는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영리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침묵했다. 입을 다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의견이라는 듯이.(좋은 기자의 태도는 자리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고 배웠다. 이미 기자가 아니었지만, 그 습관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장면 2회사는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다.더 빠르게, 더 크게, 더 멀리.나는 그때, 커질수록 옆을 보고, 때로는 뒤를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돌아온 것은 질책이었다. 아직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말.문을 나서며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누군가의 얼굴보다, 나 자신의 불안이 더 또렷했기 때문이다.타이밍도 좋지 않았다.조직 생활을 하고 있다면, 꽤나 익숙한 장면일 것이다. 평가, 보상, 다음 기회. (더 이상) 말하지 않는 데에는 언제나 그럴듯한 이유가 있고, 그것을 '현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그렇게 겪고도 또다시 문제를 제기하는 나의 감각이 때로는 성가시다. 하지만 그것을 애써 고칠 생각은 없다. 불편함이 사라지는 순간, 아마도 내가 나를 배신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겠다.조직이 성장할수록 침묵은 빠르게 퍼진다.상처받은 사람도, 이상한 결정도, 대부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그 침묵이 각자의 안전이 된다.그러다 그 힘이 흔들리면, 풍경은 바뀐다.사람들이 모여들고, 말들이 쏟아진다.조금 전까지 조용하던 곳이 갑자기 정의의 광장이 된다.쓰러진 대상은 그냥 두어지지 않는다. 탈탈 털리고, 자근자근 밟힌다. 넘어졌기 때문이다.프랑스의 사상가 미셀 드 몽테뉴는 『에세』에 이렇게 썼다."인간은 자신이 비겁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때의 조용한 방을 떠올린다.사람들은 과거의 침묵을 견디는 대신, 현재의 분노로 자신을 씻어낸다. 쓰러진 대상을 더 세게 밟을수록, 그에게 고개를 숙였던 시간이 더 빨리 지워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일까.분노는 종종 정의보다 먼저 온다.정말로 옳아서가 아니라, 예전에 옳지 못했다는 기억이 너무 아프기 때문일 거다.개인도, 군중도 대개 뒤늦게 용감해진다. 상대가 강할 때는 말하지 않고, 약해졌을 때에야 외친다.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이렇게 적었다."악은 사악해서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그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았다.옳고 그름을 따진 것이 아니라, 안전과 불안을 계산했을 뿐이다.손익이 맞는 쪽으로, 아주 조용하게.몰락한 힘 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언제나 비슷하다.강할 때는 침묵. 약해지면 정의.그저 유리한 쪽에 먼저 섰을 뿐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았고, 어쩌면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뒤늦은 정의는 정의라기보다 계산에 가깝다.그리고 침묵이든 웅변이든,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들이 오랜 시간에도 살아남을 진실인지는 아직 알기 어렵다.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들은 대부분 이미 오래전에 쓰였다.니체는 도덕으로 포장된 복수를 말했다.토크빌은 다수의 폭정을 경고했다.그러나 이 글이 묻고 싶은 것은, 아마도 이 질문일 것이다.그들이 강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그리고 그들이 악이었을 때, 당신은 정말 선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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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
②노조는 AI와 싸워야 하나?
최근 내게 걸려 오는 전화의 발신지가 바뀌고 있다. 과거엔 기업의 전략기획 부서나 IT 팀이 주를 이뤘다면, 요즘은 노사협의체나 노동조합 측의 연락이 부쩍 늘었다. 질문은 단 하나로 수렴된다. "AI 도입을 앞두고 있는데, 도대체 우리 노동자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이 질문을 마주할 때 내 마음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우선 반갑다. 막연한 공포에 질려 눈을 감는 대신, 변화의 실체를 파악하고 대응하려는 의지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려가 엄습한다. 대화를 나눠보면 AI 도입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막상 "무엇을 논의할 것인가?"라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테이블 위에 올릴 어젠다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협의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협의를 시작하려는 형국이다.이런 상황은 올 초 현대차 노조에서도 그대로 펼쳐졌다. CES 2026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가 공개되자 노조는 노사 합의 없이는 단 한 대도 들어올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노조 스스로도 덧붙였다. 도입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반대가 아니라 논의 요청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논의해야 하는가? 바로 거기서 말문이 막힌다.지금 우리에겐 기술보다 질문의 설계가 시급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AI가 내 일자리를 뺏을 것인가?"라는 빈약한 질문에 갇혀 있었다. 이제 질문의 틀을 바꿔야 한다. X축을 현재와 미래로, Y축을 AI가 대체할 수 있는 것과 대체하면 안 되는 것으로 나누어 보자.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 영역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는 시간과 순서의 문제일 뿐, 거스를 수 없는 파도다. 진짜 핵심은 대체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는 기술 수준과 무관하게 인간이 끝까지 붙들어야 할 존엄과 가치의 영역이다. 어떤 업무를 효율화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가치를 인간의 손에 남겨둘 것인가를 논의하는 조직은 거의 없다.우리가 겪는 혼란의 본질은 속도에 있다. 경제학자 카를로타 페레즈는 기술 혁명이 두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기술이 폭발하며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는 설치 국면과 새로운 법과 제도가 정착되며 번영을 이루는 전개 국면이다. 과거 산업혁명기에 이 과정은 수십 년이 걸렸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이 과정을 압축하며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국가와 산업, 기업마다 서 있는 단계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어떤 곳은 여전히 디지털전환, DX의 연장선에서 프롬프팅 기법에 매몰되어 있고, 어떤 곳은 이미 AI 에이전트가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는 2단계로 진입했다.이 전환이 조직 내부에도 그대로 관통한다. AI가 실행의 상당 부분을 맡게 되면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지능의 종류 자체가 바뀌고 있다. AI는 지금 KPI, 정량, 효율 중심의 산업화 지능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동시에 구성원들을 "나는 왜 일하는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 앞으로 내몰고 있다. 일은 빨라지고 많아졌는데 공허하다는 감각. 이것이 지금 수많은 조직 구성원들이 느끼는 본질적 혼란이다. AI가 이미 점유한 영역에서 인간이 계속 다투려 한다면, 개인도 조직도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조직 구조도 함께 변하고 있다. 소수가 비전을 제시하고 다수가 실행하던 리더, 팔로워의 이분법은 끝났다. 이제 모든 구성원은 직급과 무관하게 리더처럼 사고해야 한다. 정답을 빠르게 수행하는 능력보다, 정답이 없는 안개 속에서 방향을 설정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현장에서 솔직히 말하면 안타까운 장면도 자주 목격한다. 기업은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는데 구성원은 변화를 외면한 채 고용 보장만 요구하는 경우. 반대로 회사는 효율화에만 급급해 구성원이 새 역할을 배울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 둘 다 지는 게임이다.노사가 마주 앉기 전,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 조직은 AI를 통해 사업을 확장할 것인가, 효율화할 것인가? 그 방향에 따라 구성원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 역할에 맞는 역량을 노사가 어떻게 함께 키울 것인가? 이 세 질문이 정리되지 않으면 협의 테이블에 앉아도 서로 할 말이 없다. AI 기술의 동향이나 프롬프트 작성법보다, AI와 인간의 유사성과 차이를 이해하고 변화하는 구성원의 역할과 책임을 직시하는 일이 먼저다. 테이블에 앉기 전, 우리는 먼저 이 거대한 질문들과 독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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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의 시대&뮤직
'K헤리티지'와 노리개 문화
'습관성 K 접두어 추가 현상' 최근 우리 언론과 언중에 떠도는 이 기현상을 아예 어문 규정에 추가해 줄 것을 국립국어원에 제안한다. '반농담'이다. 이런저런 말에 하도 'K'가 붙다 보니 살짝 어지러워서 그런다. 요즘은 또 'K헤리티지'란 말이 추가됐다. 케이팝 그룹이 개량된 한복이나 노리개를 착용하고 화보나 영상을 찍는 유행, 국립중앙박물관의 재치 있는 기념품에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트렌드에 착안한 말로 보인다. 'heritage'가 '유산'이니 'K헤리티지'는 한국 문화유산이라 해도 충분하다. 'K 접두어 현상'은 'K방산'이나 'K뷰티'처럼 그 분야에서 해외가 한국을 주목하거나, 수출이 잘 되든가, 아니면 젊은 층이 뜻밖의 한국적인 뭔가에 열광할 때 주로 발생한다. 이젠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까지 이 말을 갖다 쓴다. 두 기관은 지난달 30일 'K헤리티지 스테이지' 공모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K헤리티지'건 '국가 문화유산'이건 우리 전통문화가 조명받는 현상은 어쨌든 반갑다. 스마트폰과 숏폼 게시물을 통해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 영상에만 빠지기 쉬운 시대다. 세월의 나이테가 쌓여 그윽한 우리의 오랜 고전을 돌아보는 물결은 그래서 더 의미 있다. 최근엔 케이팝 최대 그룹인 방탄소년단이 'ARIRANG' 앨범을 내서 미국과 영국 차트 1위에 올렸다. 세계 가수 최초로 유튜브 공식 채널 구독자 수 1억 명을 돌파한 그룹 블랙핑크는 새 앨범 'DEADLINE'을 내면서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했다. 멤버들이 전시 해설을 맡거나 박물관 공간 일부를 블랙핑크의 상징색으로 꾸미고 신곡이 흘러나오게 했다. 하지만 'K헤리티지'가 때론 제품과 양념으로만 소비되는 듯해 아쉬울 때도 있다. 또, '한국적'이란 수식어로 상찬받는 콘텐츠 속에서 실상은 한중일 문화가 정체불명으로 뒤섞인 서양 관점의 오리엔털리즘 범벅을 마주하게 되는 때도 왕왕 있다. 해외 팬들의 이국 취향을 자극하는 소품이나 장치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국가 홍보, 방문객과 매출 증대, 유튜브 조회수와 구독자 수 증가 등을 내세우면서 국가 기관이 이런 흐름에 동참하기도 한다. 지난해 국가유산청이 공식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탈, 춤으로 잇다' 영상은 33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올해 초 열린 문화유산 이수자 간담회에서는 전통무용인들의 성토도 나왔다. 한 참가자는 "유명 댄서를 내세우고 탈이 등장했다 뿐이지, 봉산탈춤 특유의 춤 선은 어찌 된 일인지 영상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면서 "'봉.산.탈.춤' 네 글자를 알렸다고는 할 수 있어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우리 춤의 매력을 알리는 데는 실패한 콘텐츠"라고 말했다. 우리 전통 유산이 어떤 식으로든 호명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 미학이 거세된 채 명칭과 인상만 알려지는 것은 공허하다. 요즘처럼 'K컬처'가 주목받는 시대엔 그 공허가 더 안타깝다. 세계인은 물론이고 전통에 호기심을 갖게 된 한국인에게도 그 맥락과 매력을 알릴 절호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국악인의 억울한 사연을 들었다. 이름만 대면 알 케이팝 녹음에 연주자 겸 작곡자로 참여했다가 저작권 배분을 받지 못했다는 것. 새로 창작된 국악 선율이 절묘하게 주효한 글로벌 히트곡이었음에도 말이다. 힙합, 전자음악 편곡을 맡은 프로듀서진이 참여 국악인 모두를 작곡가 크레딧에서 빼버렸다고 한다. 엄연한 창작을 '어차피 국악이 비슷비슷하게 들리는데, 이게 연주이지 작곡이냐'고 치부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진지한 공동 작업의 대상이 아니라 독특한 장치나 이국적 양념쯤으로 생각했다는 얘기다. 전통문화를 구성하는 유형 문화, 무형 문화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개량한복, 뮷즈 같은 제품형 전통문화, 해외 쇼핑몰에서도 쉽게 복제해 팔 수 있는 물품은 각광받는 가운데 복제가 힘든 고유의 문화는 적당히 넘어가는 건 아닌지…. 전통문화가 'K컬처'란 산업적 강령의 작은 노리개 정도에 그치는 곳은 없는지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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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솔로 유니콘 시대의 개막
글로벌 창업 생태계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수백 명의 엘리트가 밤새워 만들어냈던 유니콘(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비상장사)을 이젠 극소수(10인 이하)의 창업자와 직원들만으로 달성하고 있다. 바야흐로 '솔로 유니콘(Solo Unicorn) 시대'의 개막이다. 실리콘밸리 데이터에 따르면 2021년 단 2개에 불과했던 솔로 유니콘이 2025년엔 52개로 연평균 126%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이러한 변화의 핵심 동력은 '에이전트 AI' 기반의 생산성 혁명이다. 과거 수천 명이 감당하던 코딩, 마케팅, 고객 응대를 AI 시스템으로 대체하면서 1인당 생산성이 50~100배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제 기업 가치는 인력 규모가 아니라 보유한 AI 에이전트의 지능과 실행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시장의 지배적 의견이다.어떤 분야가 활발한가. 고부가가치 지식서비스, 미디어, 이커머스, 바이오테크의 순으로 활발하다. 고부가가치 지식서비스에선 특히 법무, 회계, 세무 분야가 대표적이다. 예컨대 이전엔 하나의 소송을 위해 수주간 변호사 50명이 수만 장의 증거 자료를 분석했다면, 지금은 한 명의 창업자가 운영하는 에이전트 AI 하나로 초당 10만 장 문서를 분석하고, 승소확률 계산 및 계약서 독소 조항 적발 정확도도 90% 이상이라고 한다. 인건비·운영비를 70~80% 줄인 만큼, '솔로 유니콘 등극'이 가능해졌단 얘기다. 대표 기업으론 하비(Harvey)와 아이언클래드(Ironclad)를 꼽는다.미디어 산업에선 피카(Pika) Labs나 헤이젠(HeyGen) 같이 소수 정예로 시작해 영상 제작의 문법을 바꾼 기업들이 선두 주자다. 이들은 기획부터 촬영, 다국어 더빙과 실시간 로컬라이징까지 에이전트 AI를 활용해서, 맞춤형 콘텐츠를 전 세계에 송출하는 '1인 글로벌 스튜디오' 모델을 정착시켰다.이커머스와 바이오테크 분야도 빼놓을 수 없다. 미드저니(Midjourney)는 AI로 디자인과 마케팅을 최적화시켜, 40여 명의 직원으로 기업 가치를 13조 원으로 끌어올렸다. 인실리코 메디슨(Insilico Medicine)도 단백질 구조와 신약물질 분석과정을 AI로 자동화, 5~6년 걸리던 제약사의 임상 전 단계를 18개월 만에 돌파, 유니콘 지위(4~5조 원)를 확보했다.이들의 공통적인 성공 요인은 뭔가. 한마디로 초저비용, 빠른 의사결정, 틈새시장 확보라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클라우드와 AI 구독 서비스로 인프라를 구축해서 고정비를 최소화했고, 창업자 중심의 의사결정 체계로 시장 변화에 대한 실시간 대응, AI활용으로 대기업 침투가 어려운 니치 마켓 장악 등이 그것이다.어떤 효과가 있을까. 솔로 유니콘의 증가는 고용 지표엔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창업 생태계의 선순환 측면에선 대단히 긍정적이다. 막대한 투자자금이 필요 없는 만큼, 벤처캐피털들이 더 많은 벤처 기업에 분산 투자할 수 있고, 이는 연쇄 창업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솔로 유니콘의 고부가가치 서비스는 전통 제조업·서비스업의 운영 비용을 절감시켜,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대폭 끌어올릴 수 있는 강력한 동인이 될 수 있다.우리나라는 고령화·저성장 위험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벤처 창업과 신산업 육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런 국면에서 솔로 유니콘 육성은 경제·산업 활성화는 물론 AI 산업과의 시너지효과도 확실히 낼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단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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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의 읽는 인간
[김영태의 읽는 인간⑩] 침묵할 때와 나서야 할 때-'광장'의 쇼랑과 '자기만의 방'의 파스칼
봄은 나서는 자들의 계절이었다. 광장에, 거리에 목소리가 모였다. 그런데 요즘의 봄은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같은 장면이 동시에 '화면'에서도 펼쳐진다. 겨우내 안으로 파고들었던 확신은 알고리즘 위로 떠오르고, 소수가 공유하던 독설은 네트워크를 통해 증폭된다. 빠르게 복제되고, 오래 노출된다.다만 침묵은 검색되지 않는다.새로운 무대가 열리면 어김없이 웅변이 그 자리를 채운다. 확신에 찬 목소리, 상대를 베어 넘기는 날 선 문장들. 사람들은 화려한 말의 잔치에 환호한다. 그러나 조명이 꺼지고 난 뒤, 남는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 말이 거칠고 화려할수록 우리는 종종 그 안의 빈자리를 늦게 알아차린다. 소란스러운 언어는 때로 자신의 불안을 덮기 위한 소음처럼 들리기도 한다.무대 아래에는 시선을 낮추고 말을 아끼는 이들이 있다. 세상은 그들을 내성적이거나 소극적이라 부르지만, 어쩌면 말의 무게를 더 오래 견디는 쪽은 그들일지도 모른다.■ 웅변가의 독설, 그 가벼운 유혹살면서 마주한 웅변가들은 대개 매혹적이었다. 명쾌했고 뜨거웠다. 그러나 무대가 끝나고 조명이 꺼진 뒤, 그들과 마주 앉아 보면 묘한 공허가 느껴지곤 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구원할 듯 외치던 문장들은 사라지고, 타인의 인정에 목마른 초조함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독설은 때로 가장 쉬운 방식의 배설이 된다. 상대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가장 손쉬운 방식의 권력 행사다.에밀 쇼랑(Emil Cioran)은 '태어났다는 불행'에서 확신과 웅변의 허위를 여러 차례 지적한다. 그는 인간이 확신에 매달릴수록 스스로를 더 깊이 속이게 된다고 말한다.웅변은 진리를 드러내기보다, 때로 자기기만을 세련되게 포장하는 기술에 가깝다. 나서는 자들의 언어는 타인을 향한 칼날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자기 안의 불안을 향해 휘두르는 비명일지도 모른다.미디어는 질문보다 확신을 좋아한다. 망설임은 편집되고, 단정은 제목이 된다. 그 구조 속에서 웅변은 더욱 힘을 얻는다.■ 수줍은 외면, 그 깊은 응시소란 속에서 고개를 숙인 이들이 있다. 그들은 말할 줄 몰라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복잡함을 알기에 신중할 뿐이다.그들의 수줍음은 나약함이라기보다, 상황의 무게를 감각하는 예민함에 가깝다.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팡세'에 이렇게 적었다."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사실, 즉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나서는 자들이 소음으로 자신을 채울 때, 침묵하는 자들은 고독 속에서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들의 외면은 비겁함이 아니라, 거짓된 무대에 쉽게 동조하지 않겠다는 거리두기일 수도 있다.물론 침묵이 언제나 고결한 것은 아니다. 침묵 역시 계산이 되는 순간 다른 얼굴을 갖는다. 말하지 않음이 신중함이 아니라 편의가 될 때도 있고, 책임을 미루는 방식이 될 때도 있다.■ 말의 배반과 침묵의 복권우리는 오랫동안 웅변을 지성으로, 침묵을 무지로 오해해왔다. 그러나 인문학은 종종 그 반대를 말한다.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를 불편한 질문을 제거하고 세계를 단순한 감동과 확신으로 포장해 버리는 태도라 정의한다.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대답의 세계. 그곳에서 확신은 미덕이 되고, 망설임은 나약함이 된다. 웅변이 지배하는 곳에서 진실은 종종 소음 뒤로 물러난다. 매끈하게 가공된 문장만이 떠다닌다.독설이 현란한 이유는 알맹이가 비어 있어서다. 반대로 침묵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안에 너무 많은 생각이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요한 응시에서 찾은 힘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계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수줍음이 아니라 말의 과잉이다. 웅변하는 혀는 쉽게 단정하지만, 망설이는 눈동자는 쉽게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지금 우리는 어떤 말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가. 큰 목소리인가, 아니면 조용히 생각하는 사람의 눈빛인가.우리가 오늘 내뱉은 확신 속에 정말 생각이 충분히 머물러 있었는지 묻게 된다.어쩌면 곁에서 조용히 시선을 피하던 누군가는 더 오래 고민하고 있었을 거다.큰 목소리는 늘 먼저 도착한다. 그러나 오래 남는 것은 대개 늦게 도착한 생각이었다.그래서 책을 읽는다.이미 오래전 침묵 속에서 사유를 다듬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소음이 아니라 생각을 따라가기 위해.만사유책(萬事有冊).읽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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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
① 대단한 지능을 만났는데, 왜 우리는 더 고단한가?
HFK, 트레바리, 최인아책방, 리댁션. 최근 내가 방문한 모임들이다. 누군가에게는 낯설겠지만, 배움에 목마른 직장인들이 모여드는 뜨거운 현장이다. 대학 강단보다 더 역동적인 에너지를 기대하며 그들과 AI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 현장에서 비명에 가까운 질문을 받았다. "AI로 성과는 나는데 왜 허탈할까요?", "일은 빨라졌는데 숨 돌릴 틈 없이 다음 작업이 밀려와요.", "결국 내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새로운 기회에 관한 기대보다 거대한 변화의 파도에 휩쓸려 자신이 마모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우울이 짙게 배어 있었다.기업의 AI 교육 현장으로 가면 이 간극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경영진은 이런 요구를 던진다. "비전공자가 AI로 대박 성과를 낸 사례로 직원들에게 충격을 주세요.", "혼자서 팀 단위 성과를 낸 사례를 소개해 압박감을 주십시오." 이런 요구의 이면에는 직원들이 절박함이 없어 안 움직인다는 불신이 깔려 있다.반면, 강의장에 앉은 직원들의 눈동자는 흔들린다. 그들은 이미 AI라는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나침반이 없다. 자신의 전문성이 지워지고 있다는 상실감, 조직의 성과가 개인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소외감, 그리고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홀로 생존을 감당해야 한다는 막막함에 짓눌린 모습이다. 사측은 몰아붙이고, 직원은 표류하는 형국이다.대단한 지능이 등장했는데, 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가? 우리가 여전히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사측은 AI 전환을 외치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갈지에 대한 비전은 모호하다. 리더들은 자본과 노동력을 대량으로 투입해 성과를 뽑아내던 자본 레버리지 시대의 종말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이제는 AI라는 두 번째 지능이 개인과 산업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대다. 리더가 먼저 이 본질을 이해하고 비전을 재설계하지 않는 한, AI 도입은 조직의 피로도만 높이는 재앙이 될 뿐이다.직원들 역시 직시해야 할 사실이 있다. 이런 혼란의 원인은 리더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가 통제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회사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AI가 못하는 일을 찾으며 조직 내에서 도망 다니는 회피자, 지시를 기다리는 이행자의 정체성으로는 이 파도를 넘을 수 없다.해결책은 공존에 있다. 노사가 대립해 한쪽을 굴복시켜서 풀리는 사안이 아니다. 조직은 산업화 시대의 사고에서 벗어나 구성원과 고통을 분담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개인은 이제껏 학교와 직장에서 배운 친숙한, 그러나 이미 낡아버린 인지 시스템을 과감히 재구성해야 한다. AI라는 두 번째 지능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기 업의 역할과 책임, 흔히 기업에서 R&R이라고 부르는 것을 근본부터 재정의해야 한다.올해 초 출간한 저서에서 나는 이렇게 강조했다.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인간의 판단을 보조하고 확장하는 새로운 인지 능력이라고. 우리가 이 대단한 지능을 곁에 두고도 힘든 이유는, 두 번째 지능의 본질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화려한 기술과 눈앞의 프롬프트에만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도구에만 매몰될 때, 우리의 타고난 뇌인 첫 번째 지능은 오히려 퇴화하고 만다.두 번째 지능을 키우는 법은 단순히 코딩을 배우거나 생성형 AI 사용법을 익히는 데 있지 않다. AI를 외부에 존재하는 도구가 아니라 확장된 메타인지 시스템으로 수용해야 한다. AI가 내놓는 결과물에 감탄하거나 압도당하기보다, 그것을 내 생각의 재료로 삼아 더 높은 차원의 판단을 내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가끔 돌아보기 바란다. 두 번째 지능을 받아들인 후, 당신이 더 깊게 성찰하고 있는지, 당신의 인간적 사고가 더 날카롭게 벼려졌는지, 우리 조직의 사고가 더 촘촘하게 연결되고 확장되고 있는지를 말이다.그리고 실험자의 길을 가기 바란다. 정해진 절차를 효율적으로 따르는 모범생이 산업화 시대의 인재상이었다면, 두 번째 지능 시대는 자신의 가설을 세우고 AI와 협업하여 끊임없이 시도하는 실험가를 원한다. 완벽한 결과물을 기다리지 말고, 부족한 결과물을 AI와 함께 다듬어가는 과정 자체가 곧 지능을 키우는 과정이다.나는 우리가 고단함을 넘어서, 큰 도약을 하리라 믿는다. 이제 그 길의 초입에 들어섰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와 함께 그 여정을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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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의 시대&뮤직
① BTS 컴백과 한류, 이젠 그 너머를 볼 때다
이달 21일 서울에서 열릴 방탄소년단의 컴백 쇼가 벌써부터 화제다. 특설무대가 설치되는 광화문 일대에 약 26만 명이 몰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 시간짜리 공연의 연출자는 영국인 해미시 해밀턴 감독. 매년 지상 최대의 쇼로 꼽히는 미국 '슈퍼볼 하프타임 쇼'를 지휘한 인물이다. 이 메가톤급 컴백 쇼는 넷플릭스를 통해 190개국에 생중계된다고 한다. 한국을 방문한 해외 관광객들 중 상당수는 경복궁, 덕수궁, 숭례문이 현대적 빌딩과 어우러진 이율배반적 스카이라인에 매혹된다고 한다. 심장을 울리는 방탄소년단의 비트, 랩, 노래…. 이것이 강렬한 퍼포먼스와 무대 연출을 만나며, 더욱이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서울의 랜드마크에서 펼쳐지리라는 데서 이번 쇼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서울 관광에 대한 잠재적 홍보 효과가 막대하리라는 예측도 나온다. 안전이나 시민 불편 문제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공연은 한 시간짜리이지만 종일 교통 통제가 불가피해 보인다. 통제가 촉발할 토요일 저녁 서울 한복판의 혼잡, 안전관리에 투입될 사회적·경제적 비용은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일 수 있다. 공연 시작 전후 흥분한 인파가 한번에 쏠릴 때의 위험성도 제기된다. 만에 하나 현장 관리에 실패한다면 이런 의문도 나올 수 있다. 방탄소년단이 국위선양의 아이콘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사기업이 진행하는 앨범 발매 기념 행사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리스크를 '우리 모두'가 떠안는 게 맞냐는 이야기다. 이는 사회적 비용을 감당할 만큼 이 행사가 충분한 '공공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시청권 이야기도 불거질 수 있다. 방탄소년단 컴백 쇼는 넷플릭스가 독점으로 중계하는 행사다. 넷플릭스와 하이브는, 190개국 3억 명이 가입된 네트워크에 뿌려지므로 서울 홍보 효과가 충분하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넷플릭스 가입자 중 절대다수가 이 콘텐츠를 선택해 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도심 혼잡과 안전 리스크는 대한민국이 오롯이 지불할 사회적 비용이지만 정작 그 주체인 국민 중 다수는 이 국가적 쇼를 지켜볼 수 없다. 넷플릭스 가입자만 즐길 수 있다. 넷플릭스의 국내 월간 이용자 수가 1000만 명을 상회한다는 통계도 있지만 우리 인구의 약 20% 수준이다. 최근 막 내린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의 경우, 독점 중계를 한 JTBC가 95%의 가시청 가구를 확보함에도 '보편적 시청권' 논란이 인 바 있다. 올림픽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진정한 스포츠 강국은 메달의 색이나 수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소수 엘리트의 성과보다 전 국민이 일상에서 향유하는 건강한 '생활 스포츠'의 수준이 높아야 진짜 체육 강국이다. '태릉 스포츠'가 일각에서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받는 건 그 때문이다. 문화도 비슷하다. 문화의 요체는 이기는 것, 셈 세는 것, 버는 것 따위에 있지 않다. 문화의 본질은 꽃피우는 것, 편안한 것, 다양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더불어 함께 즐기는 것에 있다. 한 나라의 문화는 우상향 그래프로 '그려지는' 게 아니다. 다채로운 색으로 '칠해가는' 것이다. 어쩌면 '대한민국->BTS->국위선양->BTS->세계인의 관심과 막대한 홍보 효과'라는 흐름도는 자칫 '도식화된 환상'에 머물 수도 있다. 설사 '국가 홍보를 위한 모든 일=절대 선(善)'이란 명제가 참이라 가정한다 해도 할 일은 남는다. 차제에 이런 행사를 둘러싼 여러 요소에 대한 치밀한 과학적 접근과 논리적 연구가 수반됐으면 한다. '190개국의 3억 명이 시청할 수 있었다'든지 'BTS 앨범이 몇백만 장 팔려 또 자랑스러운 빌보드 정상에 올랐다' 등의 숫자와 보도자료 이면에 있는 것. 그 인과와 득실 관계를 여러 관점에서 한 번쯤 따져봐야 한다. '세계적'이란 수식어, '세계인 열광…'의 정신 승리만으로 배부르던 '문화적 곤궁기'는 진작에 지나왔다. 진정한 문화 강국, 사회 강국으로 가려면 이제 그 너머를 봐야 한다. 부디 이번 'BTS 2026 컴백쇼 서울'이 안전사고 하나 없이 시민 불편이 최소화된 상태로 성황리에 잘 마무리되길 기원한다. 한국의 성숙한 시민 의식, 뛰어난 인파 관리 능력이 쇼의 화려함 못잖게 세계인의 주목을 받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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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의 읽는 인간
[김영태의 읽는 인간⑨]달팽이의 보폭으로 2월을 복구하다-고바야시 잇사의 달팽이와 니체의 망치
새해의 결심이 유효기간을 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한 달이다. 2월의 찬 공기 속에는 1월의 호기로움이 남긴 미세한 민망함들이 떠다닌다. 헬스장 바닥에 떨어진 땀방울보다, 책상 머리맡에 적어둔 계획표의 여백이 더 무겁다.사람들은 이 시기를 '실패'라고 명명하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2월은 실패의 달이 아니라, 비로소 내 몸에 맞는 보폭을 찾아가는 '교정'의 시간이다. 1월의 계획이 남의 눈을 의식한 전시용이었다면, 2월의 재구성은 내 영혼의 안녕을 묻는 실존적 복구이어야 한다.■ 숫자가 지배하던 2월의 회의실임원 혹은 CEO 시절의 2월은 늘 서늘했다. 입춘이 지나도 봄은 오지 않았다.초라한 1월의 성적표를 들고, 연간 계획을 '현실화'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숫자를 만졌다. 그곳에서 계획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달성해야 할 고지였고, 수정은 곧 무능의 자백이었다. "올해 목표를 재구성해라"는 지시는 "더 쥐어짜라"는 말의 우아한 통역어였다. 우리는 그럴듯한 그래프를 그려내야 했다. 하지만 그 계획 안에 정작 '나'라는 인간의 리듬이 들어설 자리가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숫자가 커질수록 개인의 호흡은 가빠졌고, 조직의 효율이 높아질수록 개인의 감수성은 말라갔다. 그때 우리가 세운 것은 계획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가둘 창살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이쿠가 건네는 서두르지 않는 위로조직을 떠나 내 책상 위에 느슨한 계획표를 펼쳤을 때, 에도 시대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하이쿠가 떠올랐다."달팽이여천천히 올라가거라후지산을."이 짧은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우리는 왜 스스로를 달팽이가 아니라 경주마로 착각하며 살았을까.1월의 계획이 우리를 다그친 이유는 우리가 오르는 산이 높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허락하는 속도를 잊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혹은 우리가 우리의 '점액'으로 땅을 딛는 법을 잊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달팽이에게 중요한 것은 산의 높이가 아니라 자기 몸의 리듬이다. 천천히 간다는 것은 멈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정해준 시계가 아니라, 내 근육과 신경이 허락하는 속도로 세상을 감각하며 나아가는 일이다.2월은, 바로 그 보폭을 다시 찾는 시간이다.■ 헤세의 나무와 니체의 망치우리는 계획이 무너졌을 때 왜 이토록 괴로워하는가.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철학자는 '망치로 우상을 두드려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망치는 파괴의 도구라기보다, 속이 빈 우상을 가려내기 위한 청진기 같은 진단의 도구였다.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가 1월에 세운 계획은 과거의 나를 벌주기 위해 만들어낸 도덕적 우상에 다름 없다.지금의 나를 부정하기 위해 세운 계획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헤르만 헤세는 '나무들'에서 나무를 이렇게 묘사한다.나무는 겨울 동안 바깥으로 자라지 않는다.대신 안으로 침잠하며 중심을 단단히 하고, 다가올 계절을 준비한다.2월의 시간도 그렇다. 계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해서 삶이 멈춘 것은 아니다. 겨울의 침잠은 정지가 아니라 준비다. 계획의 재구성은 포기가 아니라, 내 삶의 뿌리를 어디로 뻗어야 할지 다시 가늠하는 도약을 위한 내면의 침잠이다. ■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감수성이다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시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에서 이렇게 썼다."자신의 감수성 정도는스스로 지켜라이 바보 같은 놈아."2월의 계획표에 우리가 써넣어야 할 첫 문장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낄 것인가'이다. 2월의 끝자락, 나는 당신의 계획표가 다시 한 번 더럽혀지기를 바란다.빽빽한 할 일 목록 대신, 당신을 설레게 하는 문장 한 줄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란다.당신이 1월에 세웠던 계획 중에서 정말로 당신의 가슴을 뛰게 했던 것이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혹시 그 계획들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몸이 거부한 남의 옷은 아니었는가.서두르지 마라.후지산은 도망가지 않는다.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반짝이는 흔적처럼, 당신의 2월 또한 결과가 아닌 과정의 빛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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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태의 읽는 인간
[김영태의 읽는 인간⑧]취향은 배신하지 않는다 - 프루스트의 감각과 무너지지 않는 나만의 루틴
1월은 '의지의 과부하'가 걸리는 달이다. 세상은 온통 "결심하라"는 명령어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쓰듯 비장한 각오를 쥐어짜 낸다. 하지만 단언컨대, 머리로 세운 결심은 몸의 관성을 이기지 못한다. 결심이 무너지는 것은 당신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결심 자체가 원래 그렇게 설계된 연약한 유구(遺構)이기 때문이다.우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비장한 각오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취향이다. 습관이라고 해도 좋다. 1월에 우리가 세워야 할 것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나를 나답게 유지해 주는 사소하지만 단단한 '감각의 의식(Ritual)'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의지보다 강한 감각의 기억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주인공을 거대한 과거의 기억으로 데려간 것은 "과거를 기억해 내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연히 입안에 들어온 차 한 모금과 마들렌 한 조각의 촉각이었다.파스칼 메르시에(Pascal Mercier)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역시 비슷한 진실을 말한다. 평생을 고전문헌학자로 살던 그레고리우스가 안락한 삶을 버리고 리스본으로 떠난 것은 위대한 결단 때문이 아니었다. 비에 젖은 포르투갈 여인의 매혹적인 음성, 그리고 우연히 손에 든 낡은 책 한 권의 촉감. 그런 것들이 그의 일상을 뒤흔들었을 뿐이다.소설은 묻는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한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우리의 실제 생활도 마찬가지일거다. 작은 것이 감각을 만든다. 감각이 전체가 된다. "올해는 매일 운동하겠다"는 결심보다, 운동화를 신을 때 발끝에 닿는 단단한 감촉이나 새벽 공기의 서늘한 감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훨씬 강력한 힘이 된다. 의지는 배반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즐거움은 배반하지 않는다. 우리의 1월이 억지로 자신을 개조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어떤 감각에 반응할 때 가장 평온하고 단단해지는지 관찰하는 시간이어야 하는 이유다.■ '의식'을 설계하기어느 작가는 매일 아침 책상을 닦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거창한 집필 계획을 세우는 대신, 물걸레가 책상 위를 지나가는 그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쓰는 몸'을 깨우는 것이다. 결심이 아니라 의식(Ritual)이다. 의식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몸이 먼저 반응하게 만든다.1월의 다이어리에 적어야 할 것은 성취해야 할 숫자가 아니라, 내가 반복할 '동사'들이라면 좋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 한 잔을 마시는 감각", "잠들기 전 시집 한 권을 무작위로 펼치는 손맛". 이런 사소한 취향의 조각들이 모여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티게 하는 성벽이 된다. 목표라는 이름의 깃발은 바람에 쉽게 꺾이지만, 취향이라는 이름의 뿌리는 태풍 속에서도 흔들릴지언정 뽑히지 않는다.■ 취향이 곧 존재다취향은 사치스러운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유일한 영토다. 1월에 남들이 선망하는 목표를 내 계획표에 옮겨 적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영토를 침범 당한다.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진정한 시작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존재하던 선한 취향들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월의 '보폭'을 고민하기 전, 그리고 3월의 '침묵'으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1월의 한복판에서 나만의 '감각적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무너지지 않는 루틴은 의지가 아니라 당신의 취향에서 나오므로.■ 다시 당신의 1월에게 묻는다지금 당신의 계획표에 적힌 것들 중, 당신의 '몸'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혹시 '해야 한다'는 당위의 감옥에 갇혀, 당신만의 고유한 감각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결심이 무너졌다고 자책하기 전에,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나만의 사소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1월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달이 아니라, 자신을 가장 잘 대접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거창한 성공의 서사보다, 오늘 당신의 손끝에 닿는 책장의 감촉이나 커피 잔의 온기에 더 집중해 보자. 그 사소한 감각들이 모여 비로소 당신의 일 년이 완성될테니까.내게도 똑같은 주문을 건다. 세상이 강요하는 '성공의 문장'이 아니라, 내 영혼의 결에 맞는 '취향의 문장'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 문장들이 무너지지 않는 나의 새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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