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임희윤의 시대&뮤직]올해 데뷔 아이돌 넷 중 하나는 '인간 아님'
최근 한국의 버추얼 아이돌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싱가포르의 문화 연구 기업 '크로스커런트'와 함께다. 브랜드와 혁신을 축으로 아시아 각국의 문화 트렌드를 분석하며 '베트남=하이브리드 차(茶) 붐' '인도네시아=민속 공포물 열풍' 식으로 국가별 특이 주제를 뽑았는데, 한국에서는 특별히 '플레이브와 버추얼 아이돌의 확장'을 하기로 했다.연구를 해나가며 여러 번 놀랐다. 일단, 올해는 한국 버추얼 가수 역사의 분기점이라 할 만하다. 전수 조사 결과, 2026년 1월부터 9월 현재까지 데뷔한 국내 아이돌 그룹 45개 팀 가운데 10개 팀이 버추얼 아이돌이다. 20%를 상회하는 수치로, 올해 대한민국에서 데뷔한 아이돌 다섯 중 하나는 인간이 아니란 뜻. 솔로 아이돌 가수까지 합치면 48개 팀 중 12개 팀, 즉 1/4이 버추얼이다.2026년 버추얼 아이돌의 '퀀텀 점프'를 추동한 건 뭘까. 플레이브의 입지전이 단단히 한몫 했다. 2023년 데뷔한 이 5인조는 '그래봐야 만화 캐릭터'라는 일각의 비웃음을 가볍게 비웃으며 지난해 밀리언셀러(단일 음반 100만 장 이상 판매)를 달성했다. 인기 (인간) 그룹 데이식스도 데뷔 10년 만에 입성한 고척스카이돔에 단 2년 8개월 만에 들어가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이제 플레이브보다 인기 있는 한국의 인간 그룹은, 몇 팀 없다.한국의 가상 가수 역사는 올해로 28년 됐다. 1998년 데뷔한 사이버 가수 아담이 시초다. 미남 배우 원빈을 닮게 만든 아담은 록 발라드 '세상엔 없는 사랑'을 히트시키며 1집을 당시 20만 장 넘게 파는 파란을 일으켰다. 그 이후 류시아, 사이다, 인츠 등이 나왔지만 그래픽은 조악하고 채산성은 낮아 소비와 생산 양면에서 외면받았다. 근년에 기술의 발달, 팬데믹 영향으로 버추얼 셀럽이나 가수가 출사표를 던졌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불편한 골짜기'를 호소하는 댓글이 달리기 일쑤였다.플레이브는 아담 이후 유일하게 성공한 버추얼 가수다. 이젠 아담을 훌쩍 뛰어넘어 대한민국 최고의 버추얼 가수 자리에 올랐다. 웬만한 인간 아이돌을 능가하는 확실한 대표주자가 튀어나오니 이 판에 돈이 들어온다. 올해 버추얼 아이돌이 10개 팀 이상 나오게 된 배경이다. 유명 투자회사들이 신생 버추얼 가수 제작사들에 수십억 원 규모의 프리시리즈A, 시리즈A 투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기 (인간) 그룹 키스오브라이프의 초기를 다진 이해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오위스', SM엔터테인먼트의 두 자회사인 SM엔터테인먼트 재팬과 스튜디오 리얼라이브가 합작해 일본에 데뷔시킨 '키에피' 등은 인간 아이돌 제작의 노하우가 버추얼 아이돌 생산에 직접 흘러 들어간 케이스다.버추얼과 인공지능(AI)의 결합도 시작됐다. 7월 데뷔한 슬릭트(SLIKT)는 'AI 아티스트 프로젝트' 리프트(ryft)의 첫 주자다. AI 기반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이 차별점이다. 팬들이 플랫폼에 글을 올려 함께 이야기와 이미지를 만들어간다. 사이버 가수 아담이 '에덴'에서 온 것처럼, 슬릭트 등 캐릭터는 'AI가 만든 존재'로, 팬은 '소환자'로 설정돼 있다.지난해 플레이브 신드롬에 즈음해 난 이렇게 예언한 바 있다. '근미래에 인간 가수와 가상 가수의 라그나뢰크, 즉 최종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승자는 버추얼일 수도 있다.' 그 근미래가 생각보다 더 '근(近)'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최근 세계적으로 AI 속도 조절론이 대두한다. 우리 음악계에선 버추얼과 AI가 쫓아온다. 인간은 어디로 달릴 것인가. 질주하는 기술 시대. 곁눈질로 백미러를 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스테이블코인, 금융 스타트업 새로운 인프라로 부상
달러 스테이블코인 기반 금융 스타트업 시장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테더·서클 같은 발행사가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해외송금·B2B 결제·지갑·자금관리·카드·컴플라이언스 API 기업까지 시장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2022년 말부터 2025년 말까지 연평균 약 31% 성장했고, 2026년 9월 현재 약 3,040억 달러(421조 원) 규모다. 가상자산 거래의 보조수단이던 스테이블코인이 결제와 기업금융의 인프라로 부상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금융 스타트업 시장이 형성되고 있단 얘기다.스테이블코인 인프라에 스타트업이 몰리는 이유는 뭘까. 첫째, 국경 간 자금이동이 빠르고 저렴하기 때문이다. 기존 해외송금은 여러 은행과 결제망을 거치고 영업시간의 제약도 받지만, 스테이블코인은 24시간 이동할 수 있어 글로벌 급여와 기업 간 결제에 유리하다.둘째, 처음부터 글로벌 서비스를 만들기 쉽기 때문이다. 국가마다 계좌·결제·환전 망을 따로 구축하는 대신 스테이블코인과 API로 여러 시장을 연결할 수 있다. 미국에서 출발한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업체 Bridge를 활용한 핀테크들이 수주 만에 다국가 서비스를 구축한 사례가 이를 보여준다. 셋째, 제도권 금융의 수용도 빨라지고 있다. 미국은 GENIUS Act를 제정하고 EU는 MiCA를 시행하는 등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제도적 틀이 구체화되고 있다. 또한 비자와 마스터카드도 결제·정산에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서 관련 스타트업이 성장할 기반도 넓어지고 있다.대표 사례는 Bridge다. 국경 간 자금이동 API 등을 구축한 뒤 2025년 Stripe에 인수됐고, 현재는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 플랫폼 Open Issuance까지 제공하고 있다. 영국에서 출발한 BVNK 역시 법정화폐와 스테이블코인의 송금·보관·환전을 연결하며 성장해 2026년 8월 마스터카드에 인수됐다. 미국의 또 다른 업체인 Rain은 스테이블코인 잔액을 Visa 카드 결제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서, 기업의 카드 서비스 구축 기간을 크게 줄였다. 유니콘으로는 2026년 1월 기업가치 19.5억 달러(2.7조 원)로 인정받은 Rain이 대표적이다.이들의 공통된 성공 요인은 두 가지다. 첫째, 복잡한 블록체인 기술을 API 뒤로 숨겨 기업이 지갑·환전·유동성·컴플라이언스를 직접 구축하지 않아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둘째, 기존 금융을 대체하기보다 Stripe·Visa 등 기존 결제 생태계와 연결해 고객 접점과 신뢰를 활용했다.이들 스타트업의 성장으로 금융산업의 경쟁 구도가 바뀌고 있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송금·환전·결제·정산 기능을 직접 구축하던 방식에서 필요한 기능을 외부 인프라로 조합하는 방식으로 바꾸면서, 경쟁력의 중심도 시스템 규모에서 고객 경험과 글로벌 자금 흐름으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은행과 카드사도 스테이블코인을 경쟁상대로 보기보다 기존 금융망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물론 한계도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국경을 쉽게 넘지만, 실제 사업은 각국의 송금·결제·자금세탁방지 규제를 따라야 하고, 은행·카드망과의 연계도 필요하다. 특정 발행사나 블록체인에 대한 의존도 역시 사업위험이 될 수 있다.그럼에도 성장 가능성은 크다. 앞으로 경쟁의 중심은 누가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느냐보다 누가 기업과 소비자가 가장 쉽게 쓸 수 있게 만드느냐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스테이블코인이 금융의 새로운 레일로 자리 잡을수록 그 위에서 서비스를 만드는 API·지갑·결제·정산 인프라 스타트업의 가치도 커질 것이다.우리나라도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주체 논의를 넘어 관련 인프라 산업을 함께 키울 필요가 있다. 국내 핀테크가 해외송금·B2B 결제·수출대금 정산·글로벌 급여 등에서 세계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결국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성패는 누가 발행하느냐보다 그 위에서 어떤 서비스와 기업이 성장하느냐에 달려 있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시대]⑧윤슬의 난반사가 아름다운 이유
초등학생 대상으로 AI 시대의 창의성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강연을 마치고, 강연과 상관없어 보여도 괜찮으니 궁금한 건 뭐든 물어보라고 얘기했다. 어른 청중과 달리 아이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다.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윤슬은 볼 때마다 예쁘고, 보다 보면 멍 때리게 되는데 이유가 뭔가요?" 강연장이 순간 조용해졌다. 창의성 이야기를 한 시간 가까이 했는데, 갑자기 물결 위 반짝이는 햇빛을 물었으니 말이다.인지과학자로서 답할 거리는 있었다. 잔잔한 호수는 거울의 역할을 하는데, 위에서 태양이 비추고 있다. 바람이 불어 수면이 흔들리면 잔물결 각각이 작은 거울이 되어 저마다 다른 각도로 빛을 보내고, 내가 어느 자리에 서든 내 눈으로 들어오는 빛점이 생기며, 물결이 움직이니 그 빛점들은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우리 눈과 뇌는 밝기가 갑자기 바뀌는 지점에 유난히 예민하다. 풀숲에서 움직이는 것을 놓치면 목숨이 위태롭던 시절의 유산일 것이다. 반짝임 자체에 끌리는 본능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코스는 아기들이 광택 있는 접시를 무광 접시보다 더 오래 입에 대고 핥는다는 것을 관찰했고, 인류가 오랫동안 반짝이는 표면을 물이 있다는 신호로 읽어 왔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여기에 심리학자 카플란 부부의 설명을 보탤 수 있다. 물결·구름·모닥불처럼 반쯤만 예측되는 움직임은 힘들이지 않고도 주의를 끈다. 그들은 이것을 쉽게 피로해지지 않는 주의, 부드러운 매혹이라 불렀다. 대략 이런 것들이 윤슬 앞에서 우리가 멍하게 집중하면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과학적 이유다.이런 과학적 설명이 내 머릿속에 스쳤으나, 아이 얼굴을 보는 순간 이 답을 접었다. 망막과 진화와 주의 체계를 늘어놓는 동안 아이의 눈에서 반짝임이 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르게 답하기로 맘먹었다. 윤슬이 예쁜 건 난반사 때문이라고 얘기해줬다. 난반사는 하나의 빛을 받아 여러 방향으로 돌려보내는 반사다. 매끈한 수면은 태양을 한쪽으로 비추지만, 잔물결은 태양 하나를 수천 개로 쪼개서 사방으로 보낸다. 그래서 반짝인다. 여러분의 생각도 그런 난반사로 빛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흑이냐 백이냐,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이렇게 둘로 가르는 생각은 매끈한 수면이다. 친구의 말을 한 방향으로만 받지 말고 여러 방향으로 돌려서 읽어보고, 그렇게 생긴 여러 방향을 버리지 말고 다 안아 보라고, 오늘 이야기한 창의성이 바로 거기서 자란다고 얘기했다.나름 아이가 이해하기 쉽게, 그리고 그날의 강연 주제와 붙여서 즉흥적으로 꺼낸 비유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곱씹어 보니 인지과학이 창의성을 다뤄 온 방식과 닿아 있었다. 창의성 검사 중에 벽돌 하나를 주고 쓰임새를 가능한 한 많이 말해 보라는 방법이 있다. 문진, 받침대, 연필꽂이, 길이를 재는 자 등을 답하는 식이다. 정답을 하나로 모아 가는 사고를 수렴적 사고, 하나의 자극을 여러 갈래로 펼치는 사고를 발산적 사고라 부르는데, 창의성 연구는 주로 후자를 잰다. 빛을 한 방향으로만 돌려보내는 거울과 여러 방향으로 흩뿌리는 잔물결. 아이에게 한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그 질문 자체도 그랬다. 창의성 강연에 윤슬이 왜 나왔을까? 아이는 내가 쏜 빛을 엉뚱한 각도로 돌려보낸 것이다. 그 질문이 없었다면 그날은 준비한 슬라이드 그대로, 매끈한 수면처럼 끝났을 것 같다.어른들의 세상을 돌아본다. 흑과 백, 좌와 우로 갈라 상대의 말을 한 방향으로만 읽고 다투는 이들을 날마다 본다. 한 문장을 받아 한 방향으로만 튕겨내는 대화는 강하게 느껴지지만 반짝이지는 않는다. 그날 아이들에게 했던 말을 어른들에게도 하고 싶다. 여러분 머릿속에 윤슬의 반짝임이 있기를. 하나의 빛을 받아 여러 갈래로 돌려보내는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들을 품어주는 윤슬 같은 아량이 우리 사회에 가득하기를.━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16)벤처기업 감별법
사람이 바뀌는 시절이다. 자리에 새 얼굴이 앉고, 저 사람이면 다르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인다. 그런데 자리를 바꾸는 일과 사람이 바뀌는 일은 늘 같지 않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오래전에 만들어둔 점수표 하나가 떠올랐다.벤처기업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데 벤처기업확인서까지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직원들의 머리와 다리부터 살펴보면 된다.머리를 박박 민 사람이 있는가. 수염을 기른 사람이 있는가. 보라색이나 초록색으로 염색한 사람이 있는가.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는가. 반바지 아래로 허벅지의 타투가 드러나는가.슬리퍼 1점, 반바지 1점, 수염 1점, 삭발 2점, 보라색 머리 2점, 허벅지 타투 3점. 합계가 높을수록 벤처기업일 가능성이 크다. 정장을 입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가산점 2점이다. 다만 대표만 정장을 입고 있다면 다시 3점을 빼야 한다.농담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농담 또한 관찰에서 시작되지 않나.전통적인 회사에서 복장은 규칙이었다. 짙은색 양복에 흰 셔츠, 치켜 깎은 머리. 구두가 반짝이면 성실한 사람이고, 운동화를 신으면 아직 회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내 첫 직장 은행도 그랬다. 나는 매일 아침 구두를 닦고 바지 주름을 펴고 출근길에 나섰다.벤처기업은 그런 규칙을 뒤집었다. 양복 대신 후드티, 구두 대신 운동화. 직급을 없애고 영어 이름을 불렀다. 자유롭게 입으라는 말은 자유롭게 생각하라는 말처럼 들렸다.어빙 고프먼은 '자아 연출의 사회학'에서 일상을 하나의 무대로 봤다. 사람은 옷과 머리 모양, 말투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연출한다. 대기업의 정장이 충성과 규율을 연출한다면, 벤처의 반바지와 슬리퍼는 자율과 창의를 연출한다. 복장은 몸에 걸치는 회사소개서인 셈이다.그러나 새로움은 성공하는 순간 하나의 양식이 된다. 모두가 다르게 입기 시작하면, 다르게 입는 것이 새로운 규칙이 된다.정장을 입고 벤처기업 면접에 가면 눈치가 보인다. 자유롭게 입으라는데, 무엇을 입어야 자유로워 보이는지를 다시 계산해야 한다. 후드티와 운동화가 정장과 구두를 몰아낸 뒤, 그것들이 새로운 유니폼이 된 거다. 보라색 머리는 취향인 동시에 "나는 정장 입은 사람들과 다르다"는 표지이고, 타투는 몸에 새긴 자유이면서 새로운 부족의 출입증이다.이쯤 되면 조직의 자유도를 다섯 가지 측면에서 따져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셋과 보이지 않는 둘이다.첫 번째는 편의의 자유다. 반바지와 슬리퍼를 허용한다.두 번째는 취향의 자유다.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염색해도 된다.세 번째는 신체의 자유다. 타투나 삭발처럼 되돌리기 어려운 선택을 감출 필요가 없다.네 번째는 발언의 자유다. 회의에서 창업자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표시할 수 있다.다섯 번째는 결정의 자유다. 반대했다는 이유로 인사와 보상에서 손해를 보지 않는다.앞의 셋은 눈으로 확인된다. 사무실을 한 바퀴 돌면 점수가 나온다. 문제는 뒤의 둘이다. 그것은 회의가 시작되고 대표가 자기 생각을 말한 뒤에야 드러난다.에드거 샤인은 조직문화를 세 층위로 나눴다. 복장과 호칭처럼 눈에 보이는 것, 조직이 내세우는 가치,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본 가정. 반바지는 맨 위층일 뿐이다."우리는 자유로운 회사입니다."벽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자유로운 회사가 되지는 않는다. 대표를 영어 이름으로, 존칭 없이 부르면서도 그의 말에는 아무도 반대하지 못할 수 있다. 회의실에 빈백이 놓여 있어도 결정은 대표 머릿속에서 이미 끝나 있을 수 있다.복장은 벤처인데 권력은 대기업인 회사가 있다. 모두 슬리퍼를 끌지만 대표가 들어오면 공기가 달라진다. 자유롭게 말하라더니, 정말 자유롭게 말한 사람이 다음 회의에서 보이지 않는다. 보고서는 세 장이면 된다더니, 대표가 좋아할 결론이 나올 때까지 수십 번을 고친다. 이런 회사에서 반바지는 자유의 증거가 아니다. 자유의 장식이다.반대로 모두 정장을 입고도 자유로운 조직이 있다. 대표에게 반대해도 되고, 실패를 보고해도 되고, 모른다고 말해도 된다. 가장 낮은 직급의 말에 결정이 뒤집히기도 한다. 겉은 옛날 은행처럼 보이지만 속은 진짜 벤처인 조직이다.그렇다면 처음의 점수표를 고쳐야 한다.슬리퍼 1점, 반바지 1점, 수염 1점, 삭발 2점, 보라색 머리 2점, 허벅지 타투 3점. 여기까지는 그대로다.그러나 대표가 먼저 말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 10점을 뺀다. 직급이 낮은 사람이 대표에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면 20점을 더한다. 그 사람이 다음 달에도 회사에 다니고 있다면 다시 30점을 더한다.새 얼굴을 앉히는 일은 겉이다. 그 얼굴이 회의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지, 말한 뒤에도 자리를 지키는지는 속이다.겉을 바꾸는 데는 하루면 된다. 속을 바꾸는 데는 하루로는 어림도 없다. 사람을 바꿔 조직을 바꿨다고 믿기 쉽지만, 대개 바뀐 것은 사람뿐이다.벤처기업 혹은 혁신적인 조직을 감별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은 머리나 허벅지를 살피는 것이 아니다. 회의가 시작된 뒤 대표의 말에 누가 처음으로 아니라고 말하는지를 보는 것이다.슬리퍼를 신을 자유는 발에 있다. 조직의 자유는 입에 있다.추신: 요즘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머리를 애쉬그레이로 물들이고, 수염을 기른다. 수염 1점, 염색 2점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반대할 상사는 없지만 대신 돈을 내는 고객이 있다. 그 앞에서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임희윤의 시대&뮤직]공연장을 떠돈다, 'X 같은 음악'을 찾으려
여름 내내 여러 공연장을 돌고 돌았다. 특히 탈장르 음악, 무경계 무대 예술을 지향하는 여러 페스티벌이 있어 분주함조차 즐거웠다. 국립극장의 '2026 여우락 페스티벌'(7월 3일~25일), 세종문화회관의 '싱크 넥스트 26'(7월 3일~9월 5일), 그리고 '2026 전주세계소리축제'(8월 12일~15일)…. 다양한 프로그램이 달력을 갈마들며 동분서주, 즐거운 움직임을 줬다.여우락과 소리축제는 국악이 기반이다. 올해 여우락에서는 젊은 예술가들이 민요와 대중가요를 휘휘 섞고, 미국의 블루스를 우리 판소리와 칭칭 얽으며 상상을 초월하는 판을 벌였다. 이를테면 블루그래스 그룹 '컨트리공방'과 소리꾼 정윤형은 남도민요 '들국화'를 카터 패밀리의 'Wildwood flower'와 접목하거나 춘향가와 미국 민요 'Shady Grove'를 뒤섞어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 셰이디~' 하고 눙쳤다.소리축제에서 만난 무대도 '텐션'이 높았다. 베이스 가야금-쌍현 가야금-25현 가야금의 신묘한 가야금 트리오에 도전한 '오드리', 거문고의 다양한 주법에 론치 패드와 루프 스테이션을 가미해 시김새의 결로 벽지 바른 테크노 클럽을 연출한 황진아, 동해안 별신굿에 현란한 일렉트로니카를 얹어 미래적 접신의 신(scene)을 구축한 '블루찬트'….싱크 넥스트는 포크와 록 음악, 현대 음악과 현대 무용, 서커스와 아방가르드 연극 등 무대 예술 전반을 조망하는 축제다. '천하제일탈공작소, baan'의 무대를 특히 잊을 수 없다. 전쟁터의 소리 풍경처럼 둔중하게 작열하는 밴드 '반(baan)'의 록, 헤비메탈 사운드 위로 무표정한 탈과 역동적 탈춤이 활개 치는 시청각 부조화. 그 자체가 역설적으로 기막힌 조화였다.종합하면 'X'의 매력이다. 축제들의 공연 제목인 '상자루X안예은' '컨트리공방X정윤형' 등에 박힌 'X'. 이것은 물리적 조합인 더하기(+)를 넘어 두 음악가, 두 장르의 화학적 반응인 곱하기(X)를 주문한다. 이게 말처럼 쉽나. 각자의 판에서는 일당백인 이들도 낯선 분야를 만나 서로 지나치게 눈치 보거나 양보하다 보면 '1X1=1'만도 못한 '0.8X0.8=0.64'의 결과물이 나온다. 곱하기 협업은 그래서 위험천만하다. 과연, '곱하기' 공연 가운데는 기대에 못 미친 것들도 있었다.그래도 바로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에 모든 'X'는 아름답다. 설렌다. 'X'는 아름다운 미지수이기도 하잖나. 가을엔 또 다른 '곱하기+미지수 축제'가 열린다. 10월 1일~4일, 전남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ACC XMF(엑스뮤직페스티벌)다. 여기에 출연할 미국의 세계적 타악 앙상블 '소 퍼커션' 멤버들을 얼마 전 미리 만났다. 화분, 깡통, 나무토막까지 두드려대며 '저 세상' 리듬을 만들어가는 괴짜들. 그들에게 물었다. 0.01초 만에 답을 내고 음악을 짓는 AI의 시대에 당신들의 'X'는 뭐냐고."비디오 게임에서 치트 키를 써 '만랩'이 되면, 과정이 쉬워져 결국 아무 재미도 느낄 수 없죠. 기이하고 무력한 전능함…. 그래서 불완전함도 중요합니다. 때로는 완전히 통제를 벗어난 괴상한 사운드가 터져 나오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야말로 'X'죠. 관객들도 '과연 저 무대 위에서 1초 뒤에 무슨 미친 짓이 벌어질까?'를 기대하며 그 텐션을 함께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며칠 뒤 샤워하다 문득 그 기괴한 리듬이 귓가를 맴돌아 곱씹어 보게 만드는 그런 미친 잔상…. 그런 게 진정한 'X' 아닐까요."좋은 음악은 휴대전화 안에도 있다. 하지만 '위험한 음악'은 그밖에 있다. 여름이 끝나도 한동안 공연장 어귀를 떠돌 것 같다. 열병에라도 걸린 듯 'X 같은' 음악을 찾으려.━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시대]⑦모두가 브랜드가 되는 시대, 당신의 선택은?
"교수님은 왜 유튜브 안 하세요?" 자주 받는 질문이다. 내가 개설한 유튜브 채널이 있기는 하다. 수업 자료를 올리는 용도로만 쓴다. 유튜브, 소셜 미디어, 블로그 중에서 내가 열심히 쓰는 매체는 거의 없다. 그나마 페이스북 정도다.우리가 이런 매체를 쓰는 이유는 대략 넷이다. 생각과 성과를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고,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다.유튜브를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교수들을 보면 혼자 하는 경우는 없다. 주제 선정부터 대본, 촬영, 편집, 댓글 관리까지 업체가 맡는다. 교수는 출연자이자 진행자다. 나도 그렇게 해보자는 제안을 몇 번 받았지만, 고민 끝에 접었다. 작가와 편집자가 붙어도 일주일에 한두 편을 만들려면 내 시간이 적잖이 들어간다. 더 걸렸던 건 따로 있다. 시의성과 조회수를 좇다 보면 언젠가 내 전문성과 철학을 넘어서는 콘텐츠에 손을 대게 될지 모른다는 부담감이었다. 결국 내가 택한 매체는, 고전적이지만 책이다. 한 해 한두 권의 책을 내는 것. 점점 책을 안 읽는 시대에 이게 맞는 길인지 여전히 고민이긴 하다.그런데 이 고민이 나만의 것은 아니다. 조직의 이름을 떼고 자기 생각을 세상에 내보내야 하는 순간은 직업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온다. 조직 안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도, 다음 행보를 준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게다가 두 번째 지능 덕분에 누구나 글과 영상을 쏟아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만드는 일이 쉬워질수록, 무엇으로 어떻게 소통할지 정하는 일은 오히려 무거워진다.그때 우리는 대개 이렇게 묻는다. 요즘 어디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가? 사람이 몰린 곳에서 소통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그런데 순서가 바뀐 질문으로 보인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쪽이다. 나는 무엇을, 어떤 깊이로, 얼마나 오래 나누고 싶은가?미디어 학자 마셜 매클루언은 반세기도 전에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썼다. 무엇을 말하느냐 못지않게, 무엇에 담아 말하느냐가 내용을 규정한다는 뜻이다. 인지과학자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다. 매체는 생각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생각을 빚는 틀이다. 일주일 단위로 영상을 올리는 사람은 일주일 단위로 생각하게 되고, 일 년 호흡으로 책을 쓰는 사람은 일 년 호흡으로 생각하게 된다. 일주일은 나쁘고 일 년이 좋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마감의 리듬이 사고의 리듬이 된다. 독자만 바뀌는 게 아니다. 쓰는 사람이 바뀐다.받아들이는 쪽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는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세대를 관찰하며, 감상이 아니라 소비라는 표현을 썼다. 줄거리를 파악하는 시청과 작품에 잠기는 감상은 다른 종류의 경험이다. 짧고 빠른 콘텐츠에 길들수록 우리의 주의는 짧고 빠른 리듬에 맞춰진다. 매체는 만드는 사람의 사고만 빚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사고까지 빚는다.그렇다고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나도 페이스북에 글을 올린다. 공들여서 자주 쓰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소셜 미디어는 빠르다. 오늘 떠오른 생각이 오늘 독자에게 닿고, 댓글로 정서적 교감이 오간다. 대신 조금은 즉흥적이고, 금세 묻힌다. 어제 올린 글을 다시 찾아 읽는 사람은 드물다. 그 빠름이 장점이고, 그 빠름이 단점이다.내가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 반대편에 있다. 빨리 감기가 안 되고, 띄엄띄엄 보기 어려운 매체. 읽는 사람도 쓰는 나도 좀 더 오래 붙잡아두는 매체는 여전히 책 같아서이다.흔히 브랜드를 노출의 총량으로 여긴다. 나는 다르게 본다. 브랜드는 한순간의 화제가 아니라, 오래 반복된 리듬이 상대의 마음에 남긴 무늬다. 무엇을, 얼마나 자주, 어떤 깊이로 내보내는지, 그 반복이 쌓여 당신이라는 인상이 된다.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으로,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가? 왜 거기서, 왜 그렇게 소통하고 있는가? 당신은 어떤 사고를 빚어내고 싶은가? 어디에 사람이 많은지보다, 어떤 리듬으로 생각하며 살고 싶은지를 먼저 답해보길 바란다. 결국 그 선택이 당신으로 남는다. 그게 당신의 브랜드가 된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AI 전쟁, 반도체서 전력·전력망으로 확장 중
AI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이 반도체에서 전력과 전력망으로 확장되고 있다. 아무리 많은 GPU를 확보해도 24시간 가동할 전력과 송전망이 없다면 데이터센터를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IEA(국제에너지기구)는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2024년 415TWh에서 2030년엔 945TWh로 두 배 수준으로 늘어날 것으로 본다. 한마디로 AI 전선이 전력 확보 경쟁으로 비화하고 있단 얘기다.이에 따라 최근 뜨고 있는 벤처 분야가 있다. 에너지 테크(Energy Tech)가 바로 그것. 배터리에 전기를 저장하는 ESS, 송전망의 실제 가용 용량을 실시간 산정하는 DLR(동적 송전용량 산정), AI 기반 에너지관리시스템(EMS), 가상발전소(VPP), 마이크로그리드 등이 대표적이다. 전력의 생산·저장·전송·소비 전 과정을 디지털 기술로 연결해 제한된 전력 인프라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겠다는 분야다.무엇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 BloombergNEF에 따르면 세계 ESS 신규 설치량은 2023년 45GW에서 2025년 112GW·307GWh로 불과 2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었다. 특히 2025년 설치량은 전년보다 48% 증가했다. 스마트그리드 시장도 Fortune Business Insights에 따르면 2025년 약 610억 달러, 2034년에는 2,456억 달러로 확대될 전망이다.급성장 배경은 세 가지다. 첫째는 AI 데이터센터다. AI 연산은 막대한 전력뿐 아니라 순간적인 부하 변동까지 일으키기 때문에 단순히 발전소를 더 짓는 것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남는 전력을 저장하고 피크 시간에 방전하면 순간적인 부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둘째는 태양광·풍력 확대다.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지는 재생에너지 비중이 커질수록 전기를 시간대별로 이동시키는 저장 장치와 실시간 계통제어 기술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셋째는 송전망 건설 속도다. AI 데이터센터 수요는 급증하는데, 송전선은 인허가와 주민 반대 때문에 수년에서 10년 이상 걸리기 일쑤다. 결국 기존 전력망을 효율적으로 쓰는 기술이 현실적인 대안인 셈이다.그럼 대표기업들은 어디인가. 우선 폼 에너지(Form Energy)를 꼽는다. 최대 100시간 전력을 저장할 수 있는 철-공기 배터리를 개발해, 장주기 ESS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는 벤처다. 또한 호주의 스위치딘(SwitchDin)은 가정과 기업에 흩어진 태양광·배터리 등 분산에너지 자원을 하나의 플랫폼에서 통합 제어했고, 미국의 그리드유니티(GridUnity)는 발전·ESS 프로젝트의 복잡한 전력망 접속 절차를 소프트웨어로 자동화하고 있다. 특히 2023년 설립된 미국 베이스파워(Base Power)는 가정에 대용량 배터리를 설치하고 이를 전력망 안정화에 활용하는 사업모델로 급성장한 업체다. 2026년 8월 10억 달러를 추가 유치해, 기업가치 130억 달러의 데카콘 반열에 올라섰다.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전력 설비를 더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장주기 저장, 분산 전원 통합제어, 계통접속 자동화 등 새로운 기술로 기존 전력 시스템의 병목을 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AI와 에너지 산업에 대한 파급효과도 크다. ESS는 전력 수요가 몰리는 시간대의 부담을 낮추고, 태양광·풍력의 남는 전력을 저장해 재생에너지 활용도를 높인다. 스마트그리드와 VPP는 분산된 전력자원을 실시간으로 조절해 기존 전력망의 활용도를 높인다. 결국 에너지테크는 발전소와 송전망을 무조건 늘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기존 전력 시스템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게 하는 기술인 셈이다.물론 한계도 있다. ESS는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원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이동시키는 장치이며, DLR도 송전망 자체의 부족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한다. 배터리 화재·수명·원재료 확보, 장주기 ESS의 높은 초기비용, 전력망 디지털화에 따른 사이버보안 위험도 남아 있다.우리나라는 세계적인 반도체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고 AI 데이터센터 투자도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수도권 등 데이터센터 수요가 집중되는 지역에서는 전력망 확충과 계통접속이 제약요인이다. 따라서 AI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첫째, DLR 기술을 국내 송전망에 시범 적용해 기존 선로의 여유용량을 찾아내고 계통 접속 대기를 줄여야 한다.둘째,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 간 직접 전력구매계약(PPA)이 활성화되도록 망 이용·요금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셋째, ESS·VPP의 전력시장 참여와 보상체계를 개선해 민간투자를 끌어들이고 국내 에너지테크 생태계를 키워야 한다.결국 반도체에서 확보한 우위를 전력망 병목이 갉아먹지 않도록, 제도 지연이 AI 경쟁력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AI 시대의 전력 패권 경쟁에서 반드시 준비해야 할 전략이란 생각이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⑮]변덕세와 고집세
세금 이야기는 언제나 뜨겁다. 걷는 쪽과 내는 쪽의 셈이 달라서 그렇다. 그런데 세금에는 국세나 지방세만 있는 게 아니다. 고지서 없이 부과되는 것들도 있다. 이번 글은 그런 세금에 대한 것이다.회의가 끝났다. 한 시간 반 동안 의견을 나눈 끝에 결론이 났다. 참석자들은 해야 할 일을 각자 적었다. 누구에게 연락할지, 어떤 자료를 만들지, 언제까지 보고할지.회의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전화가 왔다. 방금 전 결정을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이었다. 회의 중에는 말이 없던 사장이 그분께 따로 보고했는데, 뒤집혔다고 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시 회의실로 돌아가야 했다.리더가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몇 분이면 충분했다. 조직이 방향을 바꾸는 데에는 며칠 이상이 걸렸다. 이미 만든 자료를 버려야 했고, 어렵게 잡은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리더의 한마디는 짧았지만, 그 뒤처리는 짧지 않았다.나는 이것을 '변덕세'라고 부른다. 리더가 충분한 설명 없이 결정을 뒤집을 때마다 조직이 치러야 하는 부담이다. 지시한 사람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이 부과된다는 점에서 세금과 닮았다.변덕세는 회계장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조직의 표정에는 나타난다. 변덕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새 지시를 받아도 바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번에도 곧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지시가 내려왔는데도 모두가 한동안 기다린다.이런 조직에서는 실행력이 떨어진다. 리더는 사람들이 느리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리더의 생각이 너무 쉽게 바뀐다고 생각한다. 리더는 더 강하게 지시하고, 사람들은 더 오래 기다린다. 전략보다 눈치가 빨라야 산다.'고집세'라는 것도 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는데도 기존 결정을 고수할 때 조직이 치르는 비용이다. 시장이 달라졌고, 경쟁자가 움직였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는데도 처음 정한 방향을 붙든다. 체면 때문이다. 쉽게 말해, 쪽팔려서다.결정을 바꾸려면 어제의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느냐는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이런 게 싫어 잘못된 줄 알면서도 계속 간다. 일관성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체면을 조직의 비용으로 보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는 에이허브 선장이 드물게 생각을 바꾸는 장면이 나온다.피쿼드호는 이미 여러 고래를 잡아 기름통을 채운 상태였다. 어느 날 배 안으로 들어온 물에서 적지 않은 고래기름이 발견된다. 화물칸의 기름통 어딘가에 구멍이 난 것이다. 일등항해사 스타벅은 배를 세우고 기름통을 하나씩 끌어올려 새는 곳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에이허브는 거부한다. 그의 관심은 기름에 있지 않았다. 배의 본래 목적은 고래를 잡아 기름을 싣고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에이허브에게 피쿼드호는 더 이상 포경선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다리를 잃게 한 흰고래를 추격하는 복수의 배였다. 기름이 새든 말든 흰고래를 쫓는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스타벅은 반박한다. 이대로 두면 하루 동안 잃는 기름이 앞으로 1년 동안 새로 얻을 기름보다 많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2만 마일을 항해해 얻은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에이허브는 격노한다. 총을 들어 스타벅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스타벅은 선실을 나가면서 한마디를 남긴다.에이허브는 에이허브를 조심하라고.잠시 뒤 에이허브는 갑판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배를 세우고 기름통을 끌어올리라고 명령한다. 방금 전까지 거부했던 스타벅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선원들은 돛을 조정해야 했고, 항해는 지연됐으며, 무거운 통을 하나씩 옮겨야 했다. 적지 않은 변경 비용이 발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결정을 지켰다면 더 많은 기름을 잃었을 것이다.이 장면만 놓고 보면 에이허브는 제법 합리적인 리더다. 자신의 명령을 뒤집고, 부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만 멜빌은 에이허브가 왜 마음을 바꿨는지 하나로 확정하지 않는다. 에이허브 자신도 선원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결정을 바꾸는 시험은 통과했지만 설명의 시험은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설명 없이 결정을 바꾸는 리더는 설명 없이 결정을 고집하기도 쉽다. 에이허브는 작은 결정은 바꾸었지만 가장 큰 결정은 끝내 바꾸지 않았다. 기름통은 수리했지만 항해의 목적은 수리하지 않았다.변덕세는 당장 보이지만 고집세는 대개 늦게 청구된다. 변덕세를 아끼려다 훨씬 큰 고집세를 물기도 한다.결정을 바꾸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그런데 결정을 바꾼 사람과 그 비용을 내는 사람이 다르다. 그래서 결정을 바꾸려면 네 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무엇이 새로 발견됐는지,그 정보가 과거 판단의 어떤 전제를 무너뜨렸는지,바꿀 때와 바꾸지 않을 때 어느 쪽의 비용이 더 큰지,이미 발생한 손실을 누가 감당할 것인지.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면 번복은 변덕이 아니라 판단의 갱신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질문이다. 좋은 리더는 판단을 바꿔 생긴 비용을 "왜 미리 제대로 하지 못했느냐"는 말로 부하에게 떠넘기지 않는다. 새로운 정보에 따라 자신이 결정을 바꾸었고, 그 때문에 비용이 생겼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변경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 변경의 비용도 책임져야 한다.리더가 결정을 내리면 언젠가 계산서가 온다.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말을 바꾸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두 장의 청구서를 함께 들여다보는 능력이다. 누구의 이름이 적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임희윤의 시대&뮤직]방탄소년단과 그래미 파워 게임
지난번 이 칼럼(6월 27일자)에서 '그래미는 월드컵이 아니다. 안(못) 타도 된다'고 썼다. 현실이 됐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7월 29일, "저희는 올해 그래미에 출품하지 않기로 했다"고 직접 밝혔다. 멤버들은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며 "늘 함께해 주는 아미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방탄소년단의 이번 그래미 보이콧 결정은 한국 문화사의 쾌거다. 아니, 세계 음악사의 입지전이다. 그래미에 반기를 든 이는 수십 년 전부터 많았다. 영미권 아티스트들이다. 사회적 분위기나 현상이 그래미의 변화를 이끌 때도 그 무대는 물론 '본토', 미국이었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의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블랙 라이브스 매터'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미 부문 명칭 중 '어번(urban)'도 인종차별적이란 여론이 형성됐다. 결국 그래미는 수정했다. 이번엔 어떤가. '저 멀리' 아시아의 '일개' 아티스트가 보이콧을 통해 뉴욕타임스도 움직이는 강력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번 사건은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으로 재편된 대중문화 패권이 수십년 만에 붕괴되는 소리다. 뉴 미디어 혁명을 통한 권력의 이동과 분산이 '팍스 아메리카나 쿨투라에(Pax Americana Culturae)를 무너뜨리는 파열음이다.'인종차별 타파의 아이콘, 우리의 BTS!' 같은 대의적 시선으로만 이번 사안을 보기엔 그래서 너무 아깝다. 오래된 인권 운동 말고 새로운 산업 대전으로 봐야 재밌다. 일단 이것을 '그래미 내의 파워 게임'으로 조망해 보자. '그래미 vs. BTS' 구도가 아니다. 실은 방탄소년단도 그래미다. 멤버 일곱 명 모두 이미 수년 전부터 그 어렵다는 그래미 정회원이다. 그런데 2만 명에 달하는 그래미 위원회(미국 리코딩아카데미) 내부엔 일종의 계급이 존재한다. 일단 이번 아시아 팝 부문 신설처럼 범주와 제도를 정비하는 소위원회가 있다. 그리고 각종 사안을 최종 승인하는 42명 규모의 전국 이사회(National Board of Trustees)가 있다.('내셔널'이란 로컬적 명칭에 주목!) 일종의 최고 회의다. 수십 명이 이미 그래미 정회원인 방탄소년단과 소속사는 '내부자'로서 진작에 움직일 여지가 있었다. 소위원회가 열리고 의견 수렴 과정이 있을 때 말이다. 다만 힘 싸움에선 역부족이었을 것이다.이번 보이콧은 그래미 내부의 가망 없는 싸움을 외부로, 공론장으로 확전시킨 전략적 묘수다. 방탄소년단이야말로 소셜 파워의 최강자 아닌가. 더구나 '라틴 팝'이란 테두리가 때론 못마땅할 중남미에도 막강한 팬덤을 가졌다. 변화하는 세계 문화 지도에서 아시아와 중남미를 틀어쥔 채 미국 중심주의에 대항하는 판을 짤 '천하삼분지계' 비슷한 묘책…. 이번 선언으로 방탄소년단은 체급을 키웠다. 고작 트로피 하나의 무게를 뛰어넘는 무형의 '국제 영향력' 트로피를 스스로 만들어 즉각 안았다.그래미랑 영영 척질 일도 없다. 2021년 캐나다 가수 더 위켄드는 큰 인기와 예술적 평가에도 그래미에선 후보 지명조차 받지 못하자 사실상 '영영 보이콧'을 선언했다. 말도 방탄소년단처럼 예쁘장하게 하지 않았다. "그래미는 여전히 부패해 있다"고 직격했다. 그래미는 진화에 나섰다. 결국 '영원한 보이콧'은 철회됐다. 더 위켄드는 2025년 그래미 시상식 축하 무대에, 그것도 그래미 회장의 직접 소개로 '깜짝' 등장해 화려한 복귀식을 치렀다. 비슷한 일이 없으리란 법 없다. 그래미가 방탄소년단에게 '감동적 복귀-본상 시상' 시나리오를 언제든 들이밀 수 있다. 드라마는 언제나 잘 팔린다. 이것도 전략, 저것도 전술이다. 중요한 건 실용이다.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바둑돌을 던져버린 게 아니다. 중원에서 한참 벗어난 허를 찌르는 곳에 착점했다. '독립 만세!' 같은 해피엔딩은 없다. 영원히 안 끝나는 흑백의 게임에서 승패는 집수로 결정된다.다른 생각할 거리도 있다. 뒤집어 보면 '아시아 팝 부문' 신설은, 특히 '아시아 언어로 된 노랫말'이란 단서는 수많은 아시아 아티스트에게 되레 희망이 될 수도 있다. 미국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굳이 어려운 영어로 녹음한 방탄소년단 같은 선구자 선배들이 개척한 길 위에서, 뒤에 올 아시아 후배들은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자국어로 뛰어난 작품을 만들면 된다. 일단 아시아 부문을 받은 뒤 그래미 본상으로, 세계 1위 시장(미국) 안쪽으로 진군하는 거다. 이를테면 필리핀 그룹 BINI가 타갈로그어로만 노래를 만들어도 꿈의 그래미를 노려볼 수 있게 됐다. 올해 그래미 최고상을 받은 푸에르토리코의 배드 버니를 비롯한 수많은 라틴 팝 가수가 간 길이다. 1위 사업자가 전체 사업자의 마음과 꿈을, 현재와 미래를 대변할 수는 없다. 새로운 실리적 기회를 노리는 다른 수많은 아시아 아티스트의 생각도 차제에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다시 말하지만 팝은 산업이다. 중요한 건 언제나 실리다.━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시대]⑥억울해하는 학생·직원이 사라졌다
기말 성적을 공지하고 일주일을 기다렸다. 예년 같으면 메일함이 차오를 시기다. 채점 기준을 묻는 메일, 부분 점수를 다투는 메일, 면담을 청하는 메일. 성적 정정 요청은 교수에게 성가신 연례행사지만, 그 성가심에는 생기가 있었다. 올해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학부와 대학원을 통틀어 정정 요청이 거의 없었다. 달라진 것은 하나다. 과제는 물론, 기말 시험까지 AI 활용을 허용하고 장려한 학기였다.처음에는 채점이 후했나 의심했다. 성적 분포를 확인하니 예년과 비슷했다. 점수가 달라진 게 아니라면, 뭐가 사라진 걸까? 나는 그것이 억울함이라고 생각한다.억울함은 아무 때나 튀어나오지 않는다. 내 것이라 믿는 결과물이 낮게 평가될 때 나타난다. 독일과 핀란드 연구진이 2024년에 발표한 실험이 있다. 사람들은 AI가 만들어 준 글을 자기 이름으로 제출하면서도, 그 글을 자기 것으로 느끼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 현상에 AI 대필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은 올리되, 마음은 담지 못하는 상태다. 좀 더 상세히 보면, 결과물에 자신의 영향력이 크게 들어갔다고 느낄수록, 사람들은 그 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소유감은 실제적 기여의 크기가 아니라, 스스로 기여를 인지하는 정도에 따라 움직였다. 더 오래된 연구도 있다. 2003년 미국의 한 소비자심리 연구는 사람이 컴퓨터와 함께 일할 때 좋은 결과는 자기 공으로, 나쁜 결과는 컴퓨터 탓으로 돌린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줬다.두 연구를 겹치면, 기말 성적 공지 후 내가 경험한 낯선 상황이 조금은 설명된다. 학생에게 성적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판정이 아니다. AI 산출물에 대한 판정이다. 자아가 빠져나갔으니, 굳이 다툴 이유도 없는 셈이다.교실의 침묵은 예고편일지 모른다. 직장은 사정이 좀 더 복잡하다. 내 수업에서는 AI 활용을 허용하고 장려했으니, 학생들은 AI를 썼다고 드러내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직장인은 AI를 업무에 적극 활용했다고 드러내는 순간 자기 지분이 줄고, 평판이 깎일지 모른다는 압박을 받기도 한다. 2025년 미국에서 조사된 사례에서, 직장인 절반이 AI 사용을 숨긴다고 답했다. 흥미롭게도, AI를 가장 많이 쓰는 경영진이 도리어 가장 많이 숨겼다. 조사 기관은 여기에 AI 수치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제로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온전히 내 성과인 척해야 하는 상황이다. 소유감 없는 소유권, 이런 불안한 정서 속에서 성과 평가를 받는다. 평가가 박해도 따지기 어렵다. 따지려면 작업 과정을 펼쳐 보여야 하는데, 거기에 AI의 지분이 얼마나 큰지 드러내기 두렵고, 한편으로는 그 지분의 크기를 자신조차 정확히 가늠하지 못한다.성적에 억울해하는 학생이 사라진 이번 학기가 꽤 평화롭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침묵을 평화로 읽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그러나, 사라져버린 그들의 억울함이 적잖이 불편하다. 억울함은 성가신 감정이기 이전에 애착의 증거다. 성적에 항의하는 학생은 적어도 자기 답안을 다시 읽는다. 어디서 점수가 깎였는지 따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깊은 복습이다.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는 직원은 적어도 자기 일을 자기 것으로 여긴다. 다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애착이 사라진 것이라면, 조용한 교실과 조직은 성숙해진 것이 아니다. 아무도 자기 학습, 일을 껴안지 않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껴안지 않은 학습, 일의 결과가 우리를 성장으로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다.나는 다음 학기 과제, 시험에서도 AI 활용을 금지하지 않을 계획이다. 결과물만이 아니라, AI와 주고받은 과정을 함께 제출하게 하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판단이었는지 좀 더 상세하게 갈라보게 하려 한다. 기업에서는 AI 사용을 숨기게 만드는 문화부터 걷어내길 바란다. 드러내면 지분이 깎이는 조직에서, 구성원은 소유감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상실한다.조용한 메일함을 다시 열어 본다. 고된 정정 작업에서 벗어난 안도감 뒤에 서늘한 감정이 크게 밀려온다. 다음 학기에는 그들의 억울함이 다시 소환되길 기대한다. 당신은 직장에서 어떤 일 때문에 가장 억울했는가? 억울함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 일은 아직 당신의 것이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한국 제조벤처의 승부처 '피지컬 AI'
모니터 화면 안에 있던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드디어 생산 현장으로 뛰어들고 있다. 소위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의 개막이다. 최근 글로벌 벤처의 뚜렷한 트렌드 중 하나는 챗봇이나 영상 생성 등 소프트웨어 중심의 AI 벤처가 로봇, 물류, 공장 자동화처럼 현장 공간을 제어하는 기술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피지컬 AI의 글로벌 벤처투자 시장 규모도 2025년 기준 약 140억달러(약 21조원)에 달해, 역대급의 투자 열기를 증명했다. 최근 3년간 연평균 성장률이 무려 70%에 육박할 정도로 급성장세다.피지컬 AI 벤처가 뜨겁게 달아오른 배경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전 세계적인 고령화와 저출생 요인이다. 이로 인해 만성적인 제조·물류 현장의 인력 부족과 인건비가 급상승하고 있는 까닭이다. 둘째, 멀티모달 AI 기술의 혁신이다. 이 때문에 거대 언어모델(LLM)을 넘어 시각·촉각·공간 데이터를 종합 처리하는 기술적 임계점을 돌파했다는 평가다. 이외에 미·중 갈등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재편도 한몫하고 있다. 자국 내 첨단 제조 리쇼어링(제조업의 본국 회귀) 현상이 심화되면서, 사람을 대체할 고도의 무인 자동화 수요가 필연적으로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시장은 미국의 피겨AI(Figure AI), 스킬드AI(Skild AI), 앱트로닉(Apptronik), 노르웨이에서 출발한 1X 등 로봇의 '뇌'에 해당하는 AI모델과 제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벤처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피치북(PitchBook)에 따르면 글로벌 로봇 스타트업 투자액은 2025년 약 260억달러로 급증했고, 2026년에는 상반기(6월 기준)에만 이미 230억달러를 넘어서며 연말까지 300억달러 돌파가 예상된다. 벤처 자금이 챗봇 중심의 생성형 AI에서 휴머노이드·산업용 로봇과 자율제어 기술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방증이다.피겨AI는 2025년 9월 10억 달러 이상 유치로 기업가치 390억달러를 인정받았고, 스킬드AI도 2026년 1월 14억달러를 조달하며 기업가치가 140억달러를 넘어 데카콘 반열에 올랐다. 조사기관 마켓앤마켓은 피지컬 AI의 핵심 응용 분야인 글로벌 휴머노이드 로봇시장이 2025년 29억달러에서 2030년엔 153억달러로 5.2배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그렇다면 한국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글로벌 벤처들이 로봇의 '뇌' 경쟁에서 앞서 있다면, 한국은 그 뇌가 힘을 발휘할 '현장 데이터와 로봇 부품' 경쟁력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한국은 세계 1위의 제조 로봇 밀도(근로자 1만 명당 로봇 1220대)를 보유해 피지컬 AI가 학습해야 할 제조 현장의 데이터 생산 잠재력이 엄청나다는 평가다. 여기에 로봇 동체의 성능을 좌우하는 정밀 액추에이터(구동 모터 및 감속기)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기반 위에서 국내 피지컬 AI 스타트업 149개사 중 로봇 분야가 70개사로 47%나 되고, 2025년 피지컬 로봇 벤처투자 역시 4800억원으로 전체 벤처투자 13.6조 원의 3.5%에 달한다. 단일 분야 비중으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하지만 국내 스타트업의 현실이 마냥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대기업 중심의 폐쇄적인 제조 생태계 탓에 벤처기업의 데이터 접근이 여전히 어렵고, 기술을 개발해도 실제 공장에 적용해 검증(PoC)할 테스트베드는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기술력은 있는데 이를 증명할 무대가 없는 셈이다.우리나라 피지컬 AI 벤처 육성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스타트업들은 빅테크와의 범용 로봇 전면전 대신 물류 분류, 정밀 용접, 조립, 조선 블록 생산 등 우리가 독보적인 현장 데이터를 가진 특정 공정에 특화된 '도메인 특화 AI 로봇' 모델로 글로벌 틈새시장을 먼저 선점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정부 또한 초기 도입 비용 부담으로 망설이는 국내 기업(현재 도입률 15% 수준)을 위해 과감한 정책금융을 지원하고, 벤처들이 안심하고 활용할 수 있는 표준화된 제조 데이터 댐을 구축해야 한다. 아울러 규제 걱정 없이 실전 데이터를 수집하고 시제품을 돌려볼 수 있도록 실증 특구와 규제 샌드박스를 서둘러 확대하는 것이 피지컬 AI 강국으로 가는 급선무다.로봇의 '뇌'는 실리콘밸리가 앞설 수 있어도, 그 뇌가 실제로 일할 '몸'과 '현장'은 결국 데이터와 정밀 기술이 결정한다. 한국이 이 승부처를 놓치지 않는다면, 피지컬 AI 시대의 진짜 승자는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현장을 가진 나라가 될 수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⑭]아침 라디오를 느리게 하자
오전 7시 58분, 강변북로는 오늘도 꽉 막혀 있다.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목소리로 교통정보가 흘러나온다. 정체를 공인해준다.제길, 빠져나가려면 꽤 오래 걸리겠군.8시 짧은 뉴스에 이어 시사 프로그램이 다시 시작된다. 여야 의원이 나와 오늘의 이슈를 토론한단다. 아침부터.말이 좋아 토론이지, 자기 입장의 고함이다. 질문은 짧고, 답은 길고, 반박은 더 길다. 진행자는 중재하는 척하고, 출연자는 듣는 척한다. 각자 준비해온 말만을 꺼내놓는다.나는 그런 목소리 속에서 핸들을 꽉 잡는다. 이 방송을 듣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켜놓은 것이다.시사 라디오는 부지런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치 뉴스를 쉬지 않고 나른다. 누가 누구를 공격했고, 누가 무슨 말을 번복했으며, 어느 쪽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취해야 하는지.정보량은 꽤 많다. 그런데 하루가 끝날 무렵, 무언가를 많이 알게 됐다는 느낌보다 무언가에 많이 시달렸다는 기분이 든다. 분노는 쌓였고, 피로는 늘었는데, 달라진 것은 없다.정치 뉴스가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시민은 알아야 하고, 권력은 감시되어야 한다. 말의 싸움도 때로는 필요하다.다만 그것이 하루의 첫 번째 목소리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뜨자마자 분노를 공급받고, 출근길부터 진영의 말투를 익히며, 커피 한 잔 다 마시지 못한 몸으로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는 일이 과연 건강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프랑스에는 '프랑스 앵테르(France Inter)'라는 공영 라디오가 있다. 뉴스와 시사를 다루는 대중 라디오이지만, 여름이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한 명의 고전 작가나 한 편의 고전을 붙잡고 한 계절을 건넌다. 몽테뉴의 질문을 되묻고, 돈키호테와 산초의 대화를 다시 펼친다. 보들레르, 파스칼, 프루스트, 호메로스, 빅토르 위고 같은 이름들이 아침 공기 속으로 퍼져나간다.목소리는 낮고 느리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다. 오늘 반드시 알아야 할 쟁점도 없고, 내일 뒤집힐 속보도 없다. 대신 오래된 문장을 다시 읽는다.사람은 왜 허영에 빠지는가.우리는 왜 모험을 떠나는가.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실패한 인간은 정말 실패한 인간인가.당신의 분노는 당신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아침마다 주입해준 것인가.방송은 책으로도 나왔다. 매년 한 편씩 쌓였다. '함께 하는 여름' 시리즈다. 라디오가 흘려보낸 말이 책이 되고, 여름의 목소리가 독서 목록이 된다.TBS는 한때 사라질 위기까지 갔다.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은 없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편향됐다고, 누군가는 불편한 방송을 압박하려 했다고 말할 것이다. 둘 다 어느 정도는 근거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논쟁 너머에서 한 가지는 생각해볼 만하다.살아 있을 때도 시사였고, 사라질 뻔할 때도 시사가 문제였다. 철학자를 불러 한 시간을 내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시인이 나와 자기 시를 읽어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공영이라는 이름을 달고도, 공적 사유를 위한 시간은 얼마나 있었는가.공영 라디오가 정치의 도구가 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일에는 자주 분노한다. 그러나 공영이 현실 정치만을 말하는, 그 빈곤에는 좀처럼 분노하지 않는다. 앞엣것은 권력의 문제고, 뒤엣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는 권력의 오용은 쉽게 알아채면서, 상상력의 부재는 너무 쉽게 당연하게 여긴다.들린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은 다르다. 시사 라디오는 들린다. 철학 라디오는 듣게 한다. 전자는 귀에 닿고, 후자는 어딘가에 걸린다. 전자는 반응을 요구하고, 후자는 생각을 남긴다. 전자는 지금 당장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게 하지만, 후자는 내가 왜 그렇게 빨리 편을 나누고 싶어 하는지를 묻는다.팟캐스트도 있고, 유튜브도 있다. 찾으면 있다. 그러나 찾아야만 들을 수 있는 것과, 흘러나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선택이고, 후자는 환경이다. 선택은 의지가 있는 사람의 몫이지만, 환경은 의지가 약한 사람까지 조금씩 바꾼다.한국의 공영 라디오가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철학자와 시인을 불러 느리게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한국 철학만이 아니라 세계의 철학으로, 한국 문학만이 아니라 세계의 문학으로. 아침 뉴스 사이에 니체가 끼어들고, 출근길에 보르헤스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점심 무렵에는 장자가 지나가고, 퇴근길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거는 라디오.공영 방송의 존재 이유는 시장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시장은 자극을 판다. 공영은 사유를 나눠야 한다.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리 대단한 일인가. 프랑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있는 일이다.분노는 방향을 알려준다. 사유는 속도를 조절한다.나는 오늘 아침 어느 의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대신 돈키호테가 왜 풍차를 향해 달려갔는지를 조금 더 생각했다. 풍차가 거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때로 인간은 틀린 대상을 향해서라도 달려가야 자기 삶의 모양을 얻는다. 어느 쪽이 더 유용한지는 모른다. 다만 어느 쪽이 더 오래 남는지는 안다.느린 목소리는 늦게 도착한다. 그래서 더 오래 머문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⑤왜 우리는 한국인만 유별나다고 믿고 싶을까
얼마 전 강연장에서 주제와 무관한 질문을 하나 받았다. 인지과학자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다며, 한 분이 손을 들었다. "고위험-고수익과 안정-확정된 수익 중에 고르라고 하면, 세계에서 한국인만 위험을 피하지 않고 고위험을 택한다던데 왜 그런가요?"행동경제학으로 노벨상을 받은 카너먼의 전망이론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학교에서 여러 번 다뤄 온 내용이라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한국인만 위험회피 성향이 극단적으로 낮다는 실험이나 데이터를, 나는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망이론을 일반적으로 설명드린 뒤, 한국인만 다르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질문하신 분의 표정은 끝내 석연치 않았고, 솔직히 내 마음에도 찜찜한 것이 남았다.그 찜찜함은 며칠 뒤 다시 돌아왔다. 넷플릭스로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바로 그 실험이 등장했다. 80% 확률로 4천만 원을 받거나 20% 확률로 한 푼도 못 받는 A안과, 100% 확률로 3천만 원을 받는 B안. 참가한 한국인 스무 명 중 열일곱 명이 안전한 B안을 골랐다. 카너먼의 원래 실험에서 B안을 택한 비율은 80%였다. 방송용 소규모 실험이었지만 결과는 거의 같았다. 한국인만의 반전 같은 건 없었다. 학술 데이터를 봐도 마찬가지다. 2010년 아크스 등의 연구에서 미국·중국·한국의 위험회피 성향에는 의미 있는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세계에서 한국인만 위험을 즐긴다는 말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반론도 가능하기는 하다. 한국인이 미국 증시에서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높은 레버리지 ETF를 사들이는 비율은 유독 높다. 위험을 덜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엔 다른 맥락이 있다. 카너먼 실험의 확률은 처음부터 못 박혀 있다. 80%는 80%다. 반면 주식시장의 불확실성은 정해진 숫자가 아니다. 투자자는 자기가 모은 정보와 판단으로 그 불확실성을 저마다 다르게 해석한다. 누군가에게 레버리지 ETF는 도박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계산을 끝낸 투자이다. 확정된 확률 앞에서의 선택과, 불확실성을 스스로 읽어내는 선택은 다른 종류의 일이다. 그러니 ETF 통계 하나로 한국인이 유별나다고 결론짓는 것 역시 성급하다.여기서 진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왜 한국인만 유별나다는 이야기에 그토록 솔깃할까? 생각해 보면 그런 이야기는 늘 인기가 많다. 한국인은 정이 많아서, 한국인은 빨리빨리라서, 한국인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어떤 것은 흉처럼, 어떤 것은 자랑처럼 들리지만 구조는 똑같다. 우리를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 세상에서 떼어 놓는다. 한국인만 그렇다는 단정은 검증을 요구받기보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데이터는 미국도 중국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데, 우리는 우리만 다르기를 바란다. 사실로 반박해도 그 믿음이 잘 꺼지지 않는 건, 그것이 세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왜 하필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하고 싶을까? 나는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한 세대 만에 가난을 벗고, 지금도 숨 막히는 경쟁 속에 서 있는 한국인. 우리에게는 그 과격했던 속도와 피 말리는 현재를 설명할 서사가 필요하다. 우리는 늘 남들과 달랐다는 이야기는 거기에 잘 맞는다. 달라서 이만큼 빨리 왔으니, 그 다름이 앞으로도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경쟁도 견딜 만한 것이다. 한국인만 위험을 즐긴다는 거짓은, 안전을 택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알리바이, 달콤한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물론 다름이 참이라 해도, 그 결과에는 늘 양면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다름이 우리를 빠르게 키운 만큼 어딘가를 빠르게 갈아 넣었을 텐데, 자기 위안의 서사는 밝은 쪽만 골라 담는다.강연장에서 끝내 석연찮아 하던 그분의 표정이 다시 떠오른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내 답이 틀려서 지었던 표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듣고 싶던 답이 아니어서였을 것이다. 다음에 어딘가에서, 누군가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할지 고민해본다. 질문하는 이의 얼굴, 표정이 떠오르기에 고민이 쉬이 끝나지 않는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
[임희윤의 시대&뮤직]그래미는 월드컵이 아니다. 안(못) 타도 된다
미국 그래미 어워즈가 내년부터 5개 시상 부문을 추가한다고 최근 밝혀서 화제다. 그 중 하나가 '최우수 아시아 팝 음악 퍼포먼스' 부문이라서다. 그래미가 아시아 팝 관련 부문을 만든 건 처음이다. 라틴 팝 관련 부문은 많았다. 심지어 '라틴 그래미'라는 별도의 시상식도 따로 있다. 아시아 부문이 생기면 아시아 가수가 그래미를 받을 수 있고, 아시아권에서 글로벌 선두를 달리는 것이 다름 아닌 케이팝이니 나쁠 게 없어 보인다. 월드 투어를 스타디움 규모로 도는 방탄소년단, 블랙핑크도 그래미에서는 상 하나 못 탔는데, 비로소 수상 가능성이 올라갈 것 같다.그런데 케이팝 팬들 일부는 불안해한다. 첫째, '아시아 팝' 부문 신설이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등 이른바 4대 본상이나 주요 부문 수상을 막는, 아시아 팝의 가두리 양식장이 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 탓이다. 마치 아카데미상이 오랫동안 영미권 외의 영화는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가둬둔 것과 비슷한 차별과 배제의 현상이 일어나리라는 것. 둘째, 무려 4년 만에 컴백한 방탄소년단이 돌아오자마자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을 탈환한 곡 'Swim'의 수상 가능성이 되레 낮아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 때문이다.그래미는 이번에 아시아 팝 부문을 신설하면서, 아시아 국가의 언어를 단편적으로 사용하거나 하나도 안 쓴 노래는 후보 자격에서 제외하겠다고 했다. 방탄소년단의 야심 찬 컴백작이자 빌보드 1위 곡 'Swim'은 100% 영어 노래다. 한국어(아시아 언어) 단어 하나 없다. 컴백 앨범 'ARIRANG' 전체적으로 봐도 영어 가사가 많다. RM을 제외한 6명의 멤버가 유창한 영어 구사자가 아니므로 앨범 녹음 과정에서 애를 먹는 모습은 컴백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BTS: 더 리턴'에도 여러 번 나온다. 그런데도 굳이 애써서 영어 노래, 영어 랩을 대거 담은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미답의 목표, 그래미 수상을 위한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갑자기 이번엔 그래미가 아시아 언어를 요구하는 상황이 된 거다. BTS는 영어로, 그래미는 아시아어로…. 마치 두 대의 큰 차가 동시에 유턴하며 완전히 엇갈리는 듯, '허무 개그' 같은 모양새다.자연스레 2027년 2월 7일 열릴 제69회 그래미에 대한 최대 관심사는 'Swim'의 수상 여부가 돼버렸다. 타도, 못 타도 논란거리가 될 게 뻔하다. 타면 '아시아 언어를 조건으로 내걸고 왜 영어 노래에 상을 주냐'는 논란이, 못 타면 '미국 시장에서 아시아 출신으로 최대 성과를 거둔 노래에 아시아 팝 부문마저 안 주냐'는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진퇴양난이다.벌써부터 그래미를 원망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깟 그래미 따위 안 받으면 뭐 어떤가. 그래미는 노벨상이 아니고, 빌보드는 월드컵이 아니다. 애당초 그래미는 미국의 음반 업자들이 서로를 칭찬해 주려 만든 상이다. 미국에서 안 파는 물건(음악)은 대상도 아니었다. 브라질, 헝가리, 카메룬, 몽골의 음악 거장 중에 그래미 '받은 사람 찾기'가 더 어려운 이유다.빌보드는 '미국 내 주간 판매 차트'다. 아시다시피 1년은 52주다. 이론상으론 (복권 당첨 번호처럼) 한 해에도 1등이 52회나 바뀐다. 우리에겐 빌보드 1위가 희귀하고 신기하니 '세계 정복!'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당장 지난주에 누가 빌보드 1위 했는지, 올해 '빌보드 최우수 팝 듀오/퍼포먼스 부문' 트로피는 누가 가져갔는지 대개 알지도 못하고 기억도 안 난다. 몇 년에 한 번씩 나라마다 대표 선수를 뽑아서 겨루는 올림픽, 월드컵과 음악 차트, 음악 시상식은 이렇게 너무 다르다. 게다가 우리 가요는 애초에 미국 시장이 아닌 한국 시장을 겨냥해 만들어지고 발표된 것 아닌가.한국 노래가 세계에 울려 퍼지고, 한국 가수를 보려고 수만, 수십만 인파가 운집한다는 사실을 요즘 모르는 사람이 어딨나. 미국이 주는 트로피 하나가 뭐 그리 대수인가. 그렇게 치면 우리는 우리 가요가 태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상을 받는지 관심 둔 적 있는가. 테일러 스위프트, 레이디 가가가 세계 음악계를 평정하는데 왜 한국 시상식에선 트로피를 안 주나. 이것도 차별인 건가. 봉준호 감독의 말을 빌면, 그래미는 '미국의 로컬 시상식'일 뿐이다.지금 한국 대중음악의 확장은 파죽지세다. 그래미는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액세서리다. 큰 것을 섬기는 걸 우린 사대주의라 부른다. 오랜 사대의 그늘을 벗어날 만큼 우리도 이미 거대해졌다. 지난달 멕시코시티 대통령궁 앞에 5만 아미가 모였다. 월드컵 폐막식 무대에 방탄소년단이 선다. 그래미 안 타도 그 사실을 세상이 다 안다. 역사는 이미 기록되고 있다.━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기술과 인재를 사들이는 시대, 글로벌 M&A의 판이 바뀌고 있다
최근 글로벌 M&A 시장은 역대급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3년간(2022~2025년) 글로벌 벤처투자 금액이 연평균 -25%의 역성장을 기록한 것과는 뚜렷한 대조여서 시장의 관심을 끌고 있다. Bain & Company에 따르면 2025년 M&A 규모는 4조 8000억 달러(6500조원)로 전년 대비 36% 급증해, 2021년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큰 규모를 기록했다. 건당 평균 금액도 약 9400만 달러(1300억원)로 2022년 대비 30% 이상 커지면서, 대형화 추세가 뚜렷해졌다.이번 M&A 사이클은 이전 M&A와 내용·형식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과거 M&A가 피인수 기업의 지분과 지배권을 통째로 매입하는 기업 인수 방식이라면, 최근 M&A는 기술·인력만 인수하는 방식(Acqui-hiring)이 두드러진다. 부실 자산이나 껍데기는 배제하고, 핵심 기술(IP)과 개발 엔지니어만 사들이는 거래 방식이다. 법적으로는 기업 간 자산 양수도 계약 형태를 띠지만, 핵심 인력의 고용 승계와 이적 보상금(Retention Bonus)을 계약 조건으로 묶는 패키지형 M&A다.배경은 뭔가. 첫째는 '기술 패권 경쟁에 따른 시간 압박'이다. 자체 연구개발(R&D)로는 폭발적인 기술 발전(예 : 인공지능)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되자, 검증된 팀을 통째로 흡수해 시차를 없애려는 인수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둘째, 유니콘의 '거품 제거'도 한 요인이다. 벤처투자 침체로 자금난에 빠진 유니콘들의 몸값이 낮아지면서(Down-valuation), 대기업들의 매수가 활발해지고 있다. 셋째, 규제당국의 독과점 규제 강화도 빼놓을 수 없다. 통째로 M&A해선 기업 결합 승인이 어려워지자, 알짜 IP와 핵심 인재 조직만을 골라 담는 전략을 택하고 있는 셈이다.지역별로는 단연 미국이 1위다. 대형 M&A의 70%를 주도하며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고, 유럽·중동·아프리카(EMEA)가 20%로 2위,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약 10% 수준이다. 미·중 갈등 속에 중국이 주춤한 사이, 미국과 유럽이 글로벌 기술과 인력을 빨아들이고 있단 얘기다.분야별로는 정보기술(IT) 및 소프트웨어 M&A(2025년 1조 달러)가 핵심이다. 가장 뜨거운 AI 외에도 최근 AI 자율화에 따른 보안 위협인 이른바 미토스 쇼크(Mythos Shock)로 급부상한 사이버 보안, 차세대 모빌리티의 두뇌인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새로운 금융 인프라로 떠오르는 블록체인과 스테이블코인 등이 핵심이다. 알파벳의 클라우드 보안 스타트업 위즈 인수(320억달러), 팔로알토 네트웍스의 사이버아크 인수(250억달러), 메타의 스케일 AI 지분투자와 인력 M&A(143억달러) 등이 단적인 예다.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 첫째, 스타트업 생태계에 '새로운 회수(Exit) 방식'이 안착하고 있다. 투자자금을 IPO보다 빨리 회수할 수 있어 모험자본의 선순환을 유도한다는 평가다. 둘째, 인재와 기술의 생산적 재배치 효과다. 자금난에 몰린 우수 엔지니어들이 빅테크의 풍부한 인프라와 결합함으로써 혁신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셋째, 중견기업들의 구조 개선 효과다. 자금은 있지만 과거 수익모델에 머물러 있던 전통 중견기업들이 기술·인재 인수를 통해 고부가가치 테크기업으로 체질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같은 인력 중심 인수는 통합 후 핵심 인재의 재이탈 가능성이나, 자산 인수 형식을 빌린 독과점 규제 우회라는 부작용도 함께 안고 있어 정책당국의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앞으로도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 등 빅테크들이 AI와 보안 인프라 등 인수에 연간 수백억 달러를 쏟아붓겠다고 공언한 만큼, 기술·인재 인수 M&A는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시사점은 뭔가. 그동안 국내 벤처 생태계는 지나치게 상장(IPO)이라는 좁은 통로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AI 3대 강국을 목표로 하는 우리로서는 IPO 외에 M&A를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책당국은 M&A펀드 확대, 법인세 감면, 독과점 규정의 탄력적 적용 등 M&A 활성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견기업 역시 사내 유보금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오픈 이노베이션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술혁명 시대엔 사내 R&D 중심의 오가닉(Organic) 성장만으로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⑬]배관공이 된 경제학자-래포 시장과 오만의 비용
지난 연말 IRP 포트폴리오를 바꾸며 은행 종목 ETF를 조금 추가했다. 요즘처럼 살벌한 투자판이라면 차라리 '은행 같은 악당'들이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몇 년 전부터 생각하던 일이었는데, 불장에 데이고 난 뒤에야 겨우 실행에 옮겼다.물론 나는 또렷하게 기억해 냈다. 10년간 불입했던 퇴직연금이 DB형에 묶여 고작 세전 연 1% 안팎의 수익을 냈던 사실을.그 정도면 은행은 내게 한 번쯤은 물었어야 했다."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물론 묻지 않았다. 은행은 친절했지만 친절의 방향은 언제나 은행 쪽이었다. 창구 직원은 웃었고, 앱은 반짝였고, 상품 설명서는 길었다. 그러나 정작 내 노후가 1% 안팎의 수익률로 천천히 마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크게 말해주지 않았다.전문가 추천대로 여러 펀드를 섞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바구니를 여러 개 샀다. 문제는 계란이 아니라 바구니값이었다. 이번엔 아예 마이너스였다. 더 이상 '눈탱이'를 맞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공부해 보기로 했다.그런데 경제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상한 일이 생겼다. 세상이 더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또렷해졌다. 경제학은 나를 똑똑하게 만들기보다,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더 정교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경제학을 배운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배관의 목록을 조금 늘렸을 뿐인지도 모른다.최근 미국 금융시장에서 래포, 곧 환매조건부채권 시장이 다시 조용히 주목받고 있다. 터졌기 때문이 아니다. 터질 때마다 가장 먼저 의심받는 배관이기 때문이다.래포 시장은 금융의 실핏줄이자 지하 배관이다. 은행과 증권사, 헤지펀드가 국채를 담보로 맡기고 짧은 기간 돈을 빌렸다가 다시 갚는 시장이다. 말하자면 거대한 전당포다. 맡기는 물건이 금반지가 아니라 미국 국채이고, 돈을 빌리는 사람이 동네 상인이 아니라 세계 금융기관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주식시장의 화려한 전광판, 인공지능 기업의 시가총액, 중앙은행 총재의 한마디가 금융의 거실이라면, 래포 시장은 그 아래 묻힌 배관이다. 막히는 순간 가장 높은 곳부터 흔들린다.문제는 이 조용한 배관 속에서 레버리지가 자라난다는 점이다. 헤지펀드들은 국채를 담보로 자금을 빌려 현물을 사고, 선물을 팔아 그 사이의 작은 가격 차이로 수익을 만든다. 베이시스 트레이드다. 최근에는 스와프 스프레드 거래 같은 다른 상대가치 거래도 같은 압력을 보탠다. 이름은 달라도 구조는 같다. 작은 차이를 크게 빌려 먹는 일이다.평온할 때라면 전략이라 불러도 될 거다. 시장의 작은 틈을 찾아내고, 가격 차이를 줄이며, 유동성을 공급하는 일처럼 보인다. 금융은 늘 자신에게 좋은 이름을 붙이는 데 능숙하다.그러나 유동성이 마르는 순간 전략이 아니라 의존이 된다. 자기 돈으로 들고 있는 국채와 빌린 돈으로 들고 있는 국채는 같은 국채가 아니다. 전자는 자산이고, 후자는 약속이다. 약속은 때로 자산보다 더 빨리 흔들린다.배관은 평소에는 물을 흘려보낸다. 위기 때는 공포를 흘려보낸다. 1998년의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 LTCM은 역사상 가장 똑똑한 바보들의 모임처럼 기억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과 수학 천재들이 모인 그 펀드는 절대 지지 않는 수식을 가졌다고 믿었다. 파산 확률은 우주의 나이 동안 단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시장은 우주의 나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자 담보는 담보를 불렀고, 매도는 매도를 불렀고, 공포는 더 큰 공포를 불렀다.그들이 놓친 것은 수학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가격 차이가 언젠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 순간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지는 계산하지 못했다. 투자에서 맞는다는 것과 버틴다는 것은 다르다.시장은 묻는다. 당신 말이 맞을 수 있다. 그런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가.수식은 진화했지만 오만은 오래 산다.톰 울프의 『허영의 불꽃』에는 스스로를 우주의 지배자라 불렀던 채권 트레이더가 등장한다. 어느 날 밤 작은 길 하나를 잘못 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울프는 그것을 허영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것을 배관이라고 부른다.LTCM이 무너지던 해, 나는 배관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금융시장의 지하실은커녕 내 퇴직연금의 수도계량기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것이 눈탱이의 본질이다.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다.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몰라도 괜찮다고 믿었던 것이다.모르는 것과 모른 채 맡기는 것은 다르다. 모르는 것과 모른다는 사실을 잊는 것은 더 다르다.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거실에는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 삶을 실제로 버티게 하는 배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현금흐름, 부채, 건강, 관계, 시간. 그리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능력. 이런 것들은 빛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늦게 본다. 늦게 본다는 것은 대개 비싸게 본다는 뜻이다.공부를 조금 했지만 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점이다.진짜 배관공은 물이 멈춘 뒤에야 드러난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허영의 불꽃이 한 번 꺼진 다음이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④ 거절했는데 강연이 확정됐다
며칠 전, 한 유명 협회에서 강연 요청 메일이 왔다. 내 책과 연구 배경을 언급하며, 행사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질서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정중하고 반듯한 구성. 그런데 글 전체에서 AI가 쓴 듯한 느낌이 강하게 났다. 나 역시 AI를 많이 쓰니, 그 자체가 별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협회가 요청한 강연 시간에 나는 이미 선약이 있었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어렵다고 답했다. 대신 가능한 다른 시간대를 알려드렸고, 참고하시라고 강연료도 함께 안내했다.얼마 후 답장이 왔다. 강연 수락에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확정된 강연 시간은 내가 분명히 어렵다고 말했던 그 시간이었다. 행사 계획서에는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강연료였다. 내가 안내한 금액보다 25%가량 높게 적혀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내가 수락하지 않은 시간에, 내 이름이 들어간 행사 계획서가 만들어졌고, 강연료는 내가 말한 것보다 올라가 있었다. 강연료가 올라갔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상황은 아니었다.다시 상세하게 메일을 보냈다.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하다고, 그 시간에는 선약이 있어서 강연이 불가능하다고, 이전 메일에서도 그렇게 말씀드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다시 답장이 왔다. 또 강연 수락에 감사한다는 내용. 또 행사 계획서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도 시간은 내가 불가능하다고 한 그 시간. 강연료는 처음 내가 안내한 금액보다 50%가량 높아져 있었다.기괴했다. 솔직히 잠깐 장난스러운 호기심도 생겼다. 여기서 한 번 더 같은 내용으로 거절 메일을 보내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는 강연료가 100% 올라서 올까? 거절할수록 몸값이 오르는 이상한 경매가 시작되는 것일까? 그런 실험은 하지 않았다. 이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간의 이메일 소통 내역을 설명했다. 혹시라도 행사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지금 상황을 정확히 확인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분은 몹시 당황한 듯했다. 이메일 소통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설명은 이랬다. 동명이인 교수가 있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설령 동명이인 교수가 있다고 해도, 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시간에 왜 내 이름이 들어갔는지, 왜 강연료가 두 번이나 달라졌는지, 왜 같은 수락 감사 메일이 반복됐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금 더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비슷했다. AI와 인지과학을 연구하는 교수 중에 김상균이 또 있다고?아이러니한 것은, 그 협회가 내게 요청한 강연 주제가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질서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짧은 이메일과 통화 과정에서 내 머릿속은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무질서로 가득 찼다.나는 이 일이 반드시 AI 때문에 벌어졌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사람의 착오였을 수도 있다. 내부 전달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인이 무엇이냐보다, 이런 일이 앞으로 점점 더 자주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AI 시대의 무서움은 AI가 틀린 답을 낸다는 데만 있지 않다. 더 무서운 것은, 틀린 답이 아주 그럴듯한 문장과 공식 문서의 모양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예전의 실수는 대체로 티가 났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문장은 매끄럽고, 형식은 완성되어 있고, 첨부 파일은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 안의 사실관계가 틀려 있다. 더 곤란한 것은, 그 오류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무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그 협회에 나는 크게 실망했다. 유명한 기관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이번 일이 앞으로 우리 사회가 마주할 미래의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인공지능 시대의 진짜 위험은 기계가 인간처럼 말하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이 기계 뒤에 숨는 데 있다.새로운 질서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오래된 질서부터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사람 사이 신뢰의 원천은 무엇인지부터 말이다. 그 단순한 질서가 무너지면, 아무리 좋은 AI를 붙여도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그저 더 빠르고, 더 공손하고, 더 그럴듯하게 무질서해질 뿐이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
[임희윤의 시대&뮤직]강소(强小) 콘텐츠 육성이 문화 강대국 발판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기…. 이런 환경과 조건들이야말로 (한 아티스트가) 긴 생명력을 유지하게 하는 큰 전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의 작은 극장. CJ문화재단 설립 20주년 기념 '리더스 토크'에 참여한 민규동 영화감독의 말은 적잖은 울림을 줬다. 1999년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로 데뷔한 그는 '파과' '간신' '내 아내의 모든 것' 등의 작품으로 다양한 장르를 종횡하며 선 굵은 필모그래피를 일군 연출자다. 그 역시 한 편, 한 편의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실패와 성공 사이의 외줄타기를 해왔다고, 특히나 신인 시절 스스로를 의심할 때 주변에서 내미는 따뜻한 손길과 격려로 버티며 여기까지 왔노라고 털어놨다. 그 불안한 길을 그는 심지어 "지옥길"에 비유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자서전에서 '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지옥길을 걷는 듯했다'고 했습니다. 신진 창작자분들이 자기만의 작은 지옥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문화재단 분들이 많은 손을 잡아줬습니다." 작은 지옥길을 걸어온 민 감독은 이제 중견이 돼 CJ문화재단의 신진 영화인 지원 사업인 '스토리업'의 디렉터이자 멘토로 활약하고 있다. 가능성을 증명할 단 한 번의 기회 자체를 얻는 것조차 힘겨웠던 신인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절실한' 후배들에게 더운 손길을 내밀고 있다. 얼마 전, 제79회 칸 영화제가 폐막했다. 나홍진 감독의 기대작 '호프'는 수상에 실패했지만 한국 신진 창작자의 결실이 떠들썩한 뉴스 사이로 반가운 새싹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학생 영화 부문 '라 시네프' 시상식에서 진미송 감독이 2등상을 받은 것이다. 진 감독은 뉴욕으로 이민 간 4인 가족의 하루를 담은 15분짜리 단편 영화 '사일런트 보이시스'로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사일런트 보이시스'라니….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대중문화계에도 수많은 '조용한 목소리들'이 있다. 숨죽인 채 자신의 잠재력을 제련중인 이들에게 첫 번째 마이크를 건네주는 일은 소중하다. 최근 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살목지'. '장화, 홍련'을 제치고 23년 만에 한국 공포 영화 흥행 1위 기록을 새로 쓴 이 작품은 1995년생 이상민 감독의 솜씨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지만 한국 영화 시장의 침체기에 졸업해 사회에 나온 그는 CJ문화재단 '스토리업' 지원작으로 단편 '돌림총'이 선정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영화제에 초대되며 데뷔작 '살목지'에 이르렀다. '작은 지옥길'을 지나 마침내 '작은 꽃길'에 다다른 데는 고사의 위기에 물과 거름을 내준 작은 지원의 힘도 있었다. 신진 창작자 지원의 효과는 지원금과 멘토링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당장 100만 장 판매, 1000만 관객 돌파, 1억 조회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원작 선정을 위해 업계 동료들과 경쟁하는 것부터가 그들에겐 가장 중요한 창작 욕구, 동기부여가 된다. 작은 음악가들도 그렇다. 인디 밴드 멘토링을 하다 보면 'CJ튠업에 선정된다면 원이 없겠다' 'EBS 스페이스 공감-헬로루키에 당선된다면 날아갈 것 같다'는 1차 목표를 말하며 눈을 반짝이는 신예들을 늘 만나게 된다. 우린 언젠가부터 'K-컬처 대박'의 신화 앞에 너무 많은 것만 바라고 또 바라보게 된 건 아닐까. '빌보드 1위' '황금종려상' '그래미 후보 등재' 같은 'SF적 성과'에만 열광하기엔, 우리 곁에서 조용히 어깨를 움츠린 '작은 거인'들이 너무 많다. 등잔 밑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이들을 손등에 올려놓고 더 나아가 거인의 어깨로 향하는 사다리에 놓아줄 손길이 절실하다. 요즘 가요 종합차트에서 케이팝과 함께 맹위를 떨치는 록 싱어송라이터 한로로. 그도 'CJ 튠업'을 비롯한 여러 신인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날을 벼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극소수의 거인 콘텐츠만이 아니다. 작지만 강한 창작자에 대한 기업과 국가의 지속적인 주목과 지원이야말로 작지만 큰 징검다리가 돼줄 것이다. 강소(强小) 콘텐츠가 풍부한 나라야말로 문화 강대(强大)국이다.━임희윤 문화평론가는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문화부 기자로 15년간 현장을 누볐다. 글쟁이, 라디오 게스트, 강연자, MC로 클래식 음악부터 여행 문화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디펜스 테크, 글로벌 벤처투자의 중심으로 급부상
정부 의존적인 분야로 여겨졌던 디펜스 테크(방산 기술) 분야가 최근 벤처 시장에서 급부상하고 있다. 러-우 전쟁과 중동 분쟁, 미·중 전략경쟁이 전쟁의 양상을 급격히 바꾸고 있기 때문이란 게 전문가들 평가다.우선 성장 속도가 빨라졌다. 2025년 글로벌 디펜스 테크 시장은 벤처투자금액 기준 491억달러(67조원)로 러-우 전쟁이 시작된 2022년 대비 4배로 확대됐다. 연평균 성장률로 봐도 무려 59%로 2020년 전후의 10~15%보다 4~5배 빠른 속도다. 관련 벤처기업 수도 빠르게 늘고 있다. Crunchbase 등 자료에 의하면, 디펜스 테크 벤처기업 수는 2020년 약 1,500개에서 2025년 약 5,000개로 3배 이상 증가했다. AI·드론·사이버보안 분야 창업이 러-우 전쟁 이후 급증했고, 미국이 45~50%, 유럽 25~30%, 중국이 10~15%로 미국이 압도적이다.왜 디펜스 테크 분야가 급부상하고 있나. 첫째, 전쟁 방식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과거엔 전차·전투기·항공모함 등 대규모 재래식 무기가 중심이었다면, 이젠 AI·드론·위성·사이버보안 기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고 있다. 실제 러-우 전쟁에서 수백만원짜리 소형 드론이 수백억 원 규모의 전차와 군함을 무력화하는 사례가 잇따랐다. 이는 미 국방부의 핵심 전략을 저비용 자율무기 체계로 전환시켰고, 이에 따라 AI 자율비행과 드론기술을 보유한 벤처업체에 투자자금이 몰리고 있다.둘째, 대형 방산업체만으론 기술 변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통 방산기업들은 무기체계가 대형 중심이고 개발 기간도 워낙 길어서, AI와 소프트웨어 혁신 대응이 느리다. 반면 벤처 스타트업들은 AI와 데이터, 드론기술 등을 빠르게 군사 분야에 적용하고 있다. AI드론 벤처의 대명사인 안두릴(Anduril)의 자율 감시 시스템이 대표 사례다. 미 남부 국경과 군사기지 방어에 실전 배치되고 있다. 록히드마틴·보잉 같은 대형 방산업체가 독점하던 시장에 기술 스타트업들이 본격 진입하고 있는 셈이다.셋째, 국가안보가 곧 산업 경쟁력인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미·중 전략경쟁이 장기화되면서, 각국은 반도체·AI뿐 아니라 드론·사이버보안 등도 국가의 핵심 인프라로 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정부 자금투입도 급증하고 있다. 예컨대 미 국방혁신 단위(DIU)의 민간 기술도입예산은 지난 5년간 연 65%의 급증세고, 유럽연합(EU)도 2021~2027년 동안 유럽방위기금(EDF)에 80억 유로(약 12조원)를 투입해 국방 첨단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어떤 국가와 기업들이 대표적인가. 현재 디펜스 테크 시장은 미국 주도다.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안두릴(Anduril), 팔란티어(Palantir), 쉴드AI(Shield AI) 등이 AI·드론·데이터 기술을 앞세워 급성장하고 있다. 특히 안두릴 외에 팔란티어가 관심 대상이다. 팔란티어는 군 정보분석과 전장 데이터 소프트웨어를 공급, 미군과 NATO의 핵심 AI 플랫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선 데이터 기술기업인 독일의 헬싱(Helsing), 이스라엘은 사이버 정보·감시 기술기업인 NSO Group, 중국에선 세계 드론 시장점유율 1위 기업인 DJI가 대표적이다.유니콘은 몇 개나 되나. 동 업계의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업체는 현재 약 20개로 수백 개에 달하는 AI, 핀테크 등에 비해선 훨씬 적다. 하지만 20개의 유니콘 중 10개가 작년 한 해 동안 탄생했다는 점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대표 기업으론 안두릴이 기업가치 약 610억달러(85조원), 자율비행 드론업체인 Shield AI는 기업가치 127억달러(약 17조원), 해상·공중·지상 무인 기술을 개발한 UFORCE(10억달러 이상) 등이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배터리·드론·로봇 기술을 갖춘 우리나라도 디펜스 테크 벤처투자에 정부와 업계 모두 관심을 높여야 할 시점이란 생각이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⑫]배터리가 먼저 닳는다-하이데거의 잡담, 한병철의 피로
휴대전화가 먼저 피곤해진다.배터리 잔량 39%. 아직 오전이다.무거운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알림은 이미 여러 겹이다.선거철이다.모두가 입장을 가지고 있다.누군가는 단정했고,누군가는 분노했고,누군가는 해설을 붙였다.나는 아직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이미 결론이 나버린 세계가 도착해 있다.지친다.몸이 아니라 반응이 먼저 닳는다.생각보다 먼저 도착한 결론들 사이에서나는 잠깐 멈출 틈을 찾는다.그 틈이 잘 보이지 않는다.아니, 보이기는 한다.다만 그 틈으로 들어가기 전에다음 알림이 온다.■ 허락된 알림, 허락된 긴장예전에는 회의 중에도 휴대전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임원회의 자리에서 알림이 울리면 잠깐 고개를 숙였다.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울 수도 있었다.누군가는 말을 멈추지 않았고,누군가는 내가 누구의 메시지를 받는지 궁금해했다.그건 신뢰처럼 보였다. 동시에 긴장이었다.아무 때나 알림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누군가가 아무 때나 나를 호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권한은 늘 족쇄를 함께 데리고 온다.열려 있는 통로는 선택권이 아니라 상시 대기 상태다.그 시절의 알림은 결정과 연결되어 있었다.짧은 문장 하나가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배터리는 빨리 닳았지만내가 왜 닳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결정을 내려야 했고,대답을 해야 했고,책임이 있었다.일이 나를 소모시켰다.피로는 설명이 가능했다.설명 가능한 피로는 견딜 만했다.■ 잡담 속에서 사는 사람지금은 결정이 줄었고 책임도 가벼워졌다.그런데도 더 빨리 닳는다.뉴스 몇 개를 읽고,댓글 몇 줄을 훑고,짧은 동의와 짧은 냉소를 오간다.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일상 속에 유통되는 말을 '잡담(Gerede)'이라 불렀다.잡담은 나쁜 말이 아니다.거짓말도 아니다.그저 깊이를 통과하지 않은 말이다.이미 누군가가 정리해 둔 문장을다시 말하는 상태.생각의 형식을 빌렸지만생각의 과정은 생략된 언어다.생각을 하기 전에이미 누군가의 생각을 공유한다.말은 내 것이지만문장은 내 것이 아니다.하루에도 수십 번이미 완성된 문장을 소비한다.생각은 깊어지지 않는데감정은 계속 움직인다.작은 분노,짧은 연대,가벼운 판단.하루가 끝날 무렵무엇을 깊이 생각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소모하는 시대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오늘날 우리는 억압받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주체에 가깝다고 말한다.과거의 사회가 "해야 한다"로 움직였다면 지금의 사회는 "할 수 있다"로 움직인다.강요가 사라진 자리에 자기 착취가 들어선다.감시자는 없다.마감도 없다.벌칙도 없다.그런데도 나는 쉬지 않는다.참여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고,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감각.그 감각이 나를 계속 화면 앞으로 데려온다.아무도 즉각적인 의견을 요구하지 않는다.그럼에도 나는 계속 반응한다.좋아요를 누르고,공유를 하고,짧은 단정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킨다.성과는 쌓이지 않는데소모는 분명하다.예전에는 일이 배터리를 닳게 했다.요즘엔 반응이 배터리를 깎는다.그때의 피로는 무거웠고지금의 피로는 얇다.얇아도 오래간다.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나를 낮은 전압 상태로 만든다.■ 덜 반응하는 기술어느 날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두고 책을 펼친다.알림은 오지 않는다.문장은 도망가지 않는다.한 문장을 세 번 읽는다.뜻이 바로 정리되지 않는다.손이 자꾸 휴대전화를 찾는다.그래도 글을 놓지 않는다.느림이 답답함이 아니라 저항이 된다.읽는 동안 나는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멈춰 있는 사람이 된다.문장은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당장 판단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생각은 천천히, 내 속도로 모양을 갖춘다.그 속도가 낯설다.뉴스의 속도와 다르고,알림의 속도와 다르다.처음엔 느리다고 생각했는데사실은 한동안 잊었던 내 원래의 속도는 아니었을까.오늘은 조금 덜 반응하기로 한다.세상은 그대로다.다만 나는 덜 닳는다.


![[시대포럼] AI 대전환의 시대, AI 풀스택 대한민국의 도약](https://i.ytimg.com/vi/VcbpSJtXg6o/maxresdefault.jpg?width=1920&quality=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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