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AI 전쟁, 반도체서 전력·전력망으로 확장 중
AI 경쟁력을 가르는 핵심이 반도체에서 전력과 전력망으로 확장되고 있다. 아무리 많은 GPU를 확보해도 24시간 가동할 전력과 송전망이 없다면 데이터센터를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IEA(국제에너지기구)는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2024년 415TWh에서 2030년엔 945TWh로 두 배 수준으로 늘어날 것으로 본다. 한마디로 AI 전선이 전력 확보 경쟁으로 비화하고 있단 얘기다.이에 따라 최근 뜨고 있는 벤처 분야가 있다. 에너지 테크(Energy Tech)가 바로 그것. 배터리에 전기를 저장하는 ESS, 송전망의 실제 가용 용량을 실시간 산정하는 DLR(동적 송전용량 산정), AI 기반 에너지관리시스템(EMS), 가상발전소(VPP), 마이크로그리드 등이 대표적이다. 전력의 생산·저장·전송·소비 전 과정을 디지털 기술로 연결해 제한된 전력 인프라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겠다는 분야다.무엇보다 성장 속도가 빠르다. BloombergNEF에 따르면 세계 ESS 신규 설치량은 2023년 45GW에서 2025년 112GW·307GWh로 불과 2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었다. 특히 2025년 설치량은 전년보다 48% 증가했다. 스마트그리드 시장도 Fortune Business Insights에 따르면 2025년 약 610억 달러, 2034년에는 2,456억 달러로 확대될 전망이다.급성장 배경은 세 가지다. 첫째는 AI 데이터센터다. AI 연산은 막대한 전력뿐 아니라 순간적인 부하 변동까지 일으키기 때문에 단순히 발전소를 더 짓는 것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남는 전력을 저장하고 피크 시간에 방전하면 순간적인 부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다.둘째는 태양광·풍력 확대다.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지는 재생에너지 비중이 커질수록 전기를 시간대별로 이동시키는 저장 장치와 실시간 계통제어 기술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셋째는 송전망 건설 속도다. AI 데이터센터 수요는 급증하는데, 송전선은 인허가와 주민 반대 때문에 수년에서 10년 이상 걸리기 일쑤다. 결국 기존 전력망을 효율적으로 쓰는 기술이 현실적인 대안인 셈이다.그럼 대표기업들은 어디인가. 우선 폼 에너지(Form Energy)를 꼽는다. 최대 100시간 전력을 저장할 수 있는 철-공기 배터리를 개발해, 장주기 ESS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는 벤처다. 또한 호주의 스위치딘(SwitchDin)은 가정과 기업에 흩어진 태양광·배터리 등 분산에너지 자원을 하나의 플랫폼에서 통합 제어했고, 미국의 그리드유니티(GridUnity)는 발전·ESS 프로젝트의 복잡한 전력망 접속 절차를 소프트웨어로 자동화하고 있다. 특히 2023년 설립된 미국 베이스파워(Base Power)는 가정에 대용량 배터리를 설치하고 이를 전력망 안정화에 활용하는 사업모델로 급성장한 업체다. 2026년 8월 10억 달러를 추가 유치해, 기업가치 130억 달러의 데카콘 반열에 올라섰다.이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전력 설비를 더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장주기 저장, 분산 전원 통합제어, 계통접속 자동화 등 새로운 기술로 기존 전력 시스템의 병목을 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AI와 에너지 산업에 대한 파급효과도 크다. ESS는 전력 수요가 몰리는 시간대의 부담을 낮추고, 태양광·풍력의 남는 전력을 저장해 재생에너지 활용도를 높인다. 스마트그리드와 VPP는 분산된 전력자원을 실시간으로 조절해 기존 전력망의 활용도를 높인다. 결국 에너지테크는 발전소와 송전망을 무조건 늘리는 방식에서 벗어나 기존 전력 시스템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하게 하는 기술인 셈이다.물론 한계도 있다. ESS는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원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이동시키는 장치이며, DLR도 송전망 자체의 부족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한다. 배터리 화재·수명·원재료 확보, 장주기 ESS의 높은 초기비용, 전력망 디지털화에 따른 사이버보안 위험도 남아 있다.우리나라는 세계적인 반도체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고 AI 데이터센터 투자도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수도권 등 데이터센터 수요가 집중되는 지역에서는 전력망 확충과 계통접속이 제약요인이다. 따라서 AI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선 첫째, DLR 기술을 국내 송전망에 시범 적용해 기존 선로의 여유용량을 찾아내고 계통 접속 대기를 줄여야 한다.둘째,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 간 직접 전력구매계약(PPA)이 활성화되도록 망 이용·요금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셋째, ESS·VPP의 전력시장 참여와 보상체계를 개선해 민간투자를 끌어들이고 국내 에너지테크 생태계를 키워야 한다.결국 반도체에서 확보한 우위를 전력망 병목이 갉아먹지 않도록, 제도 지연이 AI 경쟁력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AI 시대의 전력 패권 경쟁에서 반드시 준비해야 할 전략이란 생각이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⑮]변덕세와 고집세
세금 이야기는 언제나 뜨겁다. 걷는 쪽과 내는 쪽의 셈이 달라서 그렇다. 그런데 세금에는 국세나 지방세만 있는 게 아니다. 고지서 없이 부과되는 것들도 있다. 이번 글은 그런 세금에 대한 것이다.회의가 끝났다. 한 시간 반 동안 의견을 나눈 끝에 결론이 났다. 참석자들은 해야 할 일을 각자 적었다. 누구에게 연락할지, 어떤 자료를 만들지, 언제까지 보고할지.회의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전화가 왔다. 방금 전 결정을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이었다. 회의 중에는 말이 없던 사장이 그분께 따로 보고했는데, 뒤집혔다고 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시 회의실로 돌아가야 했다.리더가 생각을 바꾸는 데에는 몇 분이면 충분했다. 조직이 방향을 바꾸는 데에는 며칠 이상이 걸렸다. 이미 만든 자료를 버려야 했고, 어렵게 잡은 약속을 취소해야 했다. 리더의 한마디는 짧았지만, 그 뒤처리는 짧지 않았다.나는 이것을 '변덕세'라고 부른다. 리더가 충분한 설명 없이 결정을 뒤집을 때마다 조직이 치러야 하는 부담이다. 지시한 사람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이 부과된다는 점에서 세금과 닮았다.변덕세는 회계장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조직의 표정에는 나타난다. 변덕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새 지시를 받아도 바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번에도 곧 바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지시가 내려왔는데도 모두가 한동안 기다린다.이런 조직에서는 실행력이 떨어진다. 리더는 사람들이 느리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리더의 생각이 너무 쉽게 바뀐다고 생각한다. 리더는 더 강하게 지시하고, 사람들은 더 오래 기다린다. 전략보다 눈치가 빨라야 산다.'고집세'라는 것도 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는데도 기존 결정을 고수할 때 조직이 치르는 비용이다. 시장이 달라졌고, 경쟁자가 움직였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는데도 처음 정한 방향을 붙든다. 체면 때문이다. 쉽게 말해, 쪽팔려서다.결정을 바꾸려면 어제의 판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 이제 와서 말을 바꾸느냐는 비난도 감수해야 한다. 이런 게 싫어 잘못된 줄 알면서도 계속 간다. 일관성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체면을 조직의 비용으로 보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는 에이허브 선장이 드물게 생각을 바꾸는 장면이 나온다.피쿼드호는 이미 여러 고래를 잡아 기름통을 채운 상태였다. 어느 날 배 안으로 들어온 물에서 적지 않은 고래기름이 발견된다. 화물칸의 기름통 어딘가에 구멍이 난 것이다. 일등항해사 스타벅은 배를 세우고 기름통을 하나씩 끌어올려 새는 곳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에이허브는 거부한다. 그의 관심은 기름에 있지 않았다. 배의 본래 목적은 고래를 잡아 기름을 싣고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에이허브에게 피쿼드호는 더 이상 포경선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다리를 잃게 한 흰고래를 추격하는 복수의 배였다. 기름이 새든 말든 흰고래를 쫓는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스타벅은 반박한다. 이대로 두면 하루 동안 잃는 기름이 앞으로 1년 동안 새로 얻을 기름보다 많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2만 마일을 항해해 얻은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에이허브는 격노한다. 총을 들어 스타벅을 위협하기까지 한다. 스타벅은 선실을 나가면서 한마디를 남긴다.에이허브는 에이허브를 조심하라고.잠시 뒤 에이허브는 갑판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배를 세우고 기름통을 끌어올리라고 명령한다. 방금 전까지 거부했던 스타벅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선원들은 돛을 조정해야 했고, 항해는 지연됐으며, 무거운 통을 하나씩 옮겨야 했다. 적지 않은 변경 비용이 발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 결정을 지켰다면 더 많은 기름을 잃었을 것이다.이 장면만 놓고 보면 에이허브는 제법 합리적인 리더다. 자신의 명령을 뒤집고, 부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만 멜빌은 에이허브가 왜 마음을 바꿨는지 하나로 확정하지 않는다. 에이허브 자신도 선원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결정을 바꾸는 시험은 통과했지만 설명의 시험은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설명 없이 결정을 바꾸는 리더는 설명 없이 결정을 고집하기도 쉽다. 에이허브는 작은 결정은 바꾸었지만 가장 큰 결정은 끝내 바꾸지 않았다. 기름통은 수리했지만 항해의 목적은 수리하지 않았다.변덕세는 당장 보이지만 고집세는 대개 늦게 청구된다. 변덕세를 아끼려다 훨씬 큰 고집세를 물기도 한다.결정을 바꾸는 데에는 비용이 든다. 그런데 결정을 바꾼 사람과 그 비용을 내는 사람이 다르다. 그래서 결정을 바꾸려면 네 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무엇이 새로 발견됐는지,그 정보가 과거 판단의 어떤 전제를 무너뜨렸는지,바꿀 때와 바꾸지 않을 때 어느 쪽의 비용이 더 큰지,이미 발생한 손실을 누가 감당할 것인지.이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면 번복은 변덕이 아니라 판단의 갱신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질문이다. 좋은 리더는 판단을 바꿔 생긴 비용을 "왜 미리 제대로 하지 못했느냐"는 말로 부하에게 떠넘기지 않는다. 새로운 정보에 따라 자신이 결정을 바꾸었고, 그 때문에 비용이 생겼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변경의 권한을 가진 사람이 변경의 비용도 책임져야 한다.리더가 결정을 내리면 언젠가 계산서가 온다. 리더에게 필요한 것은 말을 바꾸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두 장의 청구서를 함께 들여다보는 능력이다. 누구의 이름이 적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임희윤의 시대&뮤직]방탄소년단과 그래미 파워 게임
지난번 이 칼럼(6월 27일자)에서 '그래미는 월드컵이 아니다. 안(못) 타도 된다'고 썼다. 현실이 됐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7월 29일, "저희는 올해 그래미에 출품하지 않기로 했다"고 직접 밝혔다. 멤버들은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며 "늘 함께해 주는 아미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방탄소년단의 이번 그래미 보이콧 결정은 한국 문화사의 쾌거다. 아니, 세계 음악사의 입지전이다. 그래미에 반기를 든 이는 수십 년 전부터 많았다. 영미권 아티스트들이다. 사회적 분위기나 현상이 그래미의 변화를 이끌 때도 그 무대는 물론 '본토', 미국이었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의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블랙 라이브스 매터'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미 부문 명칭 중 '어번(urban)'도 인종차별적이란 여론이 형성됐다. 결국 그래미는 수정했다. 이번엔 어떤가. '저 멀리' 아시아의 '일개' 아티스트가 보이콧을 통해 뉴욕타임스도 움직이는 강력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번 사건은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으로 재편된 대중문화 패권이 수십년 만에 붕괴되는 소리다. 뉴 미디어 혁명을 통한 권력의 이동과 분산이 '팍스 아메리카나 쿨투라에(Pax Americana Culturae)를 무너뜨리는 파열음이다.'인종차별 타파의 아이콘, 우리의 BTS!' 같은 대의적 시선으로만 이번 사안을 보기엔 그래서 너무 아깝다. 오래된 인권 운동 말고 새로운 산업 대전으로 봐야 재밌다. 일단 이것을 '그래미 내의 파워 게임'으로 조망해 보자. '그래미 vs. BTS' 구도가 아니다. 실은 방탄소년단도 그래미다. 멤버 일곱 명 모두 이미 수년 전부터 그 어렵다는 그래미 정회원이다. 그런데 2만 명에 달하는 그래미 위원회(미국 리코딩아카데미) 내부엔 일종의 계급이 존재한다. 일단 이번 아시아 팝 부문 신설처럼 범주와 제도를 정비하는 소위원회가 있다. 그리고 각종 사안을 최종 승인하는 42명 규모의 전국 이사회(National Board of Trustees)가 있다.('내셔널'이란 로컬적 명칭에 주목!) 일종의 최고 회의다. 수십 명이 이미 그래미 정회원인 방탄소년단과 소속사는 '내부자'로서 진작에 움직일 여지가 있었다. 소위원회가 열리고 의견 수렴 과정이 있을 때 말이다. 다만 힘 싸움에선 역부족이었을 것이다.이번 보이콧은 그래미 내부의 가망 없는 싸움을 외부로, 공론장으로 확전시킨 전략적 묘수다. 방탄소년단이야말로 소셜 파워의 최강자 아닌가. 더구나 '라틴 팝'이란 테두리가 때론 못마땅할 중남미에도 막강한 팬덤을 가졌다. 변화하는 세계 문화 지도에서 아시아와 중남미를 틀어쥔 채 미국 중심주의에 대항하는 판을 짤 '천하삼분지계' 비슷한 묘책…. 이번 선언으로 방탄소년단은 체급을 키웠다. 고작 트로피 하나의 무게를 뛰어넘는 무형의 '국제 영향력' 트로피를 스스로 만들어 즉각 안았다.그래미랑 영영 척질 일도 없다. 2021년 캐나다 가수 더 위켄드는 큰 인기와 예술적 평가에도 그래미에선 후보 지명조차 받지 못하자 사실상 '영영 보이콧'을 선언했다. 말도 방탄소년단처럼 예쁘장하게 하지 않았다. "그래미는 여전히 부패해 있다"고 직격했다. 그래미는 진화에 나섰다. 결국 '영원한 보이콧'은 철회됐다. 더 위켄드는 2025년 그래미 시상식 축하 무대에, 그것도 그래미 회장의 직접 소개로 '깜짝' 등장해 화려한 복귀식을 치렀다. 비슷한 일이 없으리란 법 없다. 그래미가 방탄소년단에게 '감동적 복귀-본상 시상' 시나리오를 언제든 들이밀 수 있다. 드라마는 언제나 잘 팔린다. 이것도 전략, 저것도 전술이다. 중요한 건 실용이다.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바둑돌을 던져버린 게 아니다. 중원에서 한참 벗어난 허를 찌르는 곳에 착점했다. '독립 만세!' 같은 해피엔딩은 없다. 영원히 안 끝나는 흑백의 게임에서 승패는 집수로 결정된다.다른 생각할 거리도 있다. 뒤집어 보면 '아시아 팝 부문' 신설은, 특히 '아시아 언어로 된 노랫말'이란 단서는 수많은 아시아 아티스트에게 되레 희망이 될 수도 있다. 미국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굳이 어려운 영어로 녹음한 방탄소년단 같은 선구자 선배들이 개척한 길 위에서, 뒤에 올 아시아 후배들은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자국어로 뛰어난 작품을 만들면 된다. 일단 아시아 부문을 받은 뒤 그래미 본상으로, 세계 1위 시장(미국) 안쪽으로 진군하는 거다. 이를테면 필리핀 그룹 BINI가 타갈로그어로만 노래를 만들어도 꿈의 그래미를 노려볼 수 있게 됐다. 올해 그래미 최고상을 받은 푸에르토리코의 배드 버니를 비롯한 수많은 라틴 팝 가수가 간 길이다. 1위 사업자가 전체 사업자의 마음과 꿈을, 현재와 미래를 대변할 수는 없다. 새로운 실리적 기회를 노리는 다른 수많은 아시아 아티스트의 생각도 차제에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다시 말하지만 팝은 산업이다. 중요한 건 언제나 실리다.━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시대]⑥억울해하는 학생·직원이 사라졌다
기말 성적을 공지하고 일주일을 기다렸다. 예년 같으면 메일함이 차오를 시기다. 채점 기준을 묻는 메일, 부분 점수를 다투는 메일, 면담을 청하는 메일. 성적 정정 요청은 교수에게 성가신 연례행사지만, 그 성가심에는 생기가 있었다. 올해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학부와 대학원을 통틀어 정정 요청이 거의 없었다. 달라진 것은 하나다. 과제는 물론, 기말 시험까지 AI 활용을 허용하고 장려한 학기였다.처음에는 채점이 후했나 의심했다. 성적 분포를 확인하니 예년과 비슷했다. 점수가 달라진 게 아니라면, 뭐가 사라진 걸까? 나는 그것이 억울함이라고 생각한다.억울함은 아무 때나 튀어나오지 않는다. 내 것이라 믿는 결과물이 낮게 평가될 때 나타난다. 독일과 핀란드 연구진이 2024년에 발표한 실험이 있다. 사람들은 AI가 만들어 준 글을 자기 이름으로 제출하면서도, 그 글을 자기 것으로 느끼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 현상에 AI 대필 효과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름은 올리되, 마음은 담지 못하는 상태다. 좀 더 상세히 보면, 결과물에 자신의 영향력이 크게 들어갔다고 느낄수록, 사람들은 그 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소유감은 실제적 기여의 크기가 아니라, 스스로 기여를 인지하는 정도에 따라 움직였다. 더 오래된 연구도 있다. 2003년 미국의 한 소비자심리 연구는 사람이 컴퓨터와 함께 일할 때 좋은 결과는 자기 공으로, 나쁜 결과는 컴퓨터 탓으로 돌린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줬다.두 연구를 겹치면, 기말 성적 공지 후 내가 경험한 낯선 상황이 조금은 설명된다. 학생에게 성적은 더 이상 자신에 대한 판정이 아니다. AI 산출물에 대한 판정이다. 자아가 빠져나갔으니, 굳이 다툴 이유도 없는 셈이다.교실의 침묵은 예고편일지 모른다. 직장은 사정이 좀 더 복잡하다. 내 수업에서는 AI 활용을 허용하고 장려했으니, 학생들은 AI를 썼다고 드러내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직장인은 AI를 업무에 적극 활용했다고 드러내는 순간 자기 지분이 줄고, 평판이 깎일지 모른다는 압박을 받기도 한다. 2025년 미국에서 조사된 사례에서, 직장인 절반이 AI 사용을 숨긴다고 답했다. 흥미롭게도, AI를 가장 많이 쓰는 경영진이 도리어 가장 많이 숨겼다. 조사 기관은 여기에 AI 수치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실제로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겉으로는 온전히 내 성과인 척해야 하는 상황이다. 소유감 없는 소유권, 이런 불안한 정서 속에서 성과 평가를 받는다. 평가가 박해도 따지기 어렵다. 따지려면 작업 과정을 펼쳐 보여야 하는데, 거기에 AI의 지분이 얼마나 큰지 드러내기 두렵고, 한편으로는 그 지분의 크기를 자신조차 정확히 가늠하지 못한다.성적에 억울해하는 학생이 사라진 이번 학기가 꽤 평화롭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의 침묵을 평화로 읽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그러나, 사라져버린 그들의 억울함이 적잖이 불편하다. 억울함은 성가신 감정이기 이전에 애착의 증거다. 성적에 항의하는 학생은 적어도 자기 답안을 다시 읽는다. 어디서 점수가 깎였는지 따지는 과정은 그 자체로 깊은 복습이다. 평가에 이의를 제기하는 직원은 적어도 자기 일을 자기 것으로 여긴다. 다툼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애착이 사라진 것이라면, 조용한 교실과 조직은 성숙해진 것이 아니다. 아무도 자기 학습, 일을 껴안지 않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껴안지 않은 학습, 일의 결과가 우리를 성장으로 이끌 수 있을지 의문이다.나는 다음 학기 과제, 시험에서도 AI 활용을 금지하지 않을 계획이다. 결과물만이 아니라, AI와 주고받은 과정을 함께 제출하게 하고, 어디까지가 자신의 판단이었는지 좀 더 상세하게 갈라보게 하려 한다. 기업에서는 AI 사용을 숨기게 만드는 문화부터 걷어내길 바란다. 드러내면 지분이 깎이는 조직에서, 구성원은 소유감뿐만 아니라 책임감도 상실한다.조용한 메일함을 다시 열어 본다. 고된 정정 작업에서 벗어난 안도감 뒤에 서늘한 감정이 크게 밀려온다. 다음 학기에는 그들의 억울함이 다시 소환되길 기대한다. 당신은 직장에서 어떤 일 때문에 가장 억울했는가? 억울함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 일은 아직 당신의 것이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한국 제조벤처의 승부처 '피지컬 AI'
모니터 화면 안에 있던 생성형 인공지능(AI)이 드디어 생산 현장으로 뛰어들고 있다. 소위 '피지컬 AI(Physical AI)' 시대의 개막이다. 최근 글로벌 벤처의 뚜렷한 트렌드 중 하나는 챗봇이나 영상 생성 등 소프트웨어 중심의 AI 벤처가 로봇, 물류, 공장 자동화처럼 현장 공간을 제어하는 기술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피지컬 AI의 글로벌 벤처투자 시장 규모도 2025년 기준 약 140억달러(약 21조원)에 달해, 역대급의 투자 열기를 증명했다. 최근 3년간 연평균 성장률이 무려 70%에 육박할 정도로 급성장세다.피지컬 AI 벤처가 뜨겁게 달아오른 배경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전 세계적인 고령화와 저출생 요인이다. 이로 인해 만성적인 제조·물류 현장의 인력 부족과 인건비가 급상승하고 있는 까닭이다. 둘째, 멀티모달 AI 기술의 혁신이다. 이 때문에 거대 언어모델(LLM)을 넘어 시각·촉각·공간 데이터를 종합 처리하는 기술적 임계점을 돌파했다는 평가다. 이외에 미·중 갈등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재편도 한몫하고 있다. 자국 내 첨단 제조 리쇼어링(제조업의 본국 회귀) 현상이 심화되면서, 사람을 대체할 고도의 무인 자동화 수요가 필연적으로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시장은 미국의 피겨AI(Figure AI), 스킬드AI(Skild AI), 앱트로닉(Apptronik), 노르웨이에서 출발한 1X 등 로봇의 '뇌'에 해당하는 AI모델과 제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벤처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피치북(PitchBook)에 따르면 글로벌 로봇 스타트업 투자액은 2025년 약 260억달러로 급증했고, 2026년에는 상반기(6월 기준)에만 이미 230억달러를 넘어서며 연말까지 300억달러 돌파가 예상된다. 벤처 자금이 챗봇 중심의 생성형 AI에서 휴머노이드·산업용 로봇과 자율제어 기술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방증이다.피겨AI는 2025년 9월 10억 달러 이상 유치로 기업가치 390억달러를 인정받았고, 스킬드AI도 2026년 1월 14억달러를 조달하며 기업가치가 140억달러를 넘어 데카콘 반열에 올랐다. 조사기관 마켓앤마켓은 피지컬 AI의 핵심 응용 분야인 글로벌 휴머노이드 로봇시장이 2025년 29억달러에서 2030년엔 153억달러로 5.2배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그렇다면 한국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글로벌 벤처들이 로봇의 '뇌' 경쟁에서 앞서 있다면, 한국은 그 뇌가 힘을 발휘할 '현장 데이터와 로봇 부품' 경쟁력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한국은 세계 1위의 제조 로봇 밀도(근로자 1만 명당 로봇 1220대)를 보유해 피지컬 AI가 학습해야 할 제조 현장의 데이터 생산 잠재력이 엄청나다는 평가다. 여기에 로봇 동체의 성능을 좌우하는 정밀 액추에이터(구동 모터 및 감속기) 분야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런 기반 위에서 국내 피지컬 AI 스타트업 149개사 중 로봇 분야가 70개사로 47%나 되고, 2025년 피지컬 로봇 벤처투자 역시 4800억원으로 전체 벤처투자 13.6조 원의 3.5%에 달한다. 단일 분야 비중으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하지만 국내 스타트업의 현실이 마냥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대기업 중심의 폐쇄적인 제조 생태계 탓에 벤처기업의 데이터 접근이 여전히 어렵고, 기술을 개발해도 실제 공장에 적용해 검증(PoC)할 테스트베드는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기술력은 있는데 이를 증명할 무대가 없는 셈이다.우리나라 피지컬 AI 벤처 육성을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스타트업들은 빅테크와의 범용 로봇 전면전 대신 물류 분류, 정밀 용접, 조립, 조선 블록 생산 등 우리가 독보적인 현장 데이터를 가진 특정 공정에 특화된 '도메인 특화 AI 로봇' 모델로 글로벌 틈새시장을 먼저 선점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 의견이다. 정부 또한 초기 도입 비용 부담으로 망설이는 국내 기업(현재 도입률 15% 수준)을 위해 과감한 정책금융을 지원하고, 벤처들이 안심하고 활용할 수 있는 표준화된 제조 데이터 댐을 구축해야 한다. 아울러 규제 걱정 없이 실전 데이터를 수집하고 시제품을 돌려볼 수 있도록 실증 특구와 규제 샌드박스를 서둘러 확대하는 것이 피지컬 AI 강국으로 가는 급선무다.로봇의 '뇌'는 실리콘밸리가 앞설 수 있어도, 그 뇌가 실제로 일할 '몸'과 '현장'은 결국 데이터와 정밀 기술이 결정한다. 한국이 이 승부처를 놓치지 않는다면, 피지컬 AI 시대의 진짜 승자는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현장을 가진 나라가 될 수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⑭]아침 라디오를 느리게 하자
오전 7시 58분, 강변북로는 오늘도 꽉 막혀 있다.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목소리로 교통정보가 흘러나온다. 정체를 공인해준다.제길, 빠져나가려면 꽤 오래 걸리겠군.8시 짧은 뉴스에 이어 시사 프로그램이 다시 시작된다. 여야 의원이 나와 오늘의 이슈를 토론한단다. 아침부터.말이 좋아 토론이지, 자기 입장의 고함이다. 질문은 짧고, 답은 길고, 반박은 더 길다. 진행자는 중재하는 척하고, 출연자는 듣는 척한다. 각자 준비해온 말만을 꺼내놓는다.나는 그런 목소리 속에서 핸들을 꽉 잡는다. 이 방송을 듣고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켜놓은 것이다.시사 라디오는 부지런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치 뉴스를 쉬지 않고 나른다. 누가 누구를 공격했고, 누가 무슨 말을 번복했으며, 어느 쪽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취해야 하는지.정보량은 꽤 많다. 그런데 하루가 끝날 무렵, 무언가를 많이 알게 됐다는 느낌보다 무언가에 많이 시달렸다는 기분이 든다. 분노는 쌓였고, 피로는 늘었는데, 달라진 것은 없다.정치 뉴스가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시민은 알아야 하고, 권력은 감시되어야 한다. 말의 싸움도 때로는 필요하다.다만 그것이 하루의 첫 번째 목소리여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눈을 뜨자마자 분노를 공급받고, 출근길부터 진영의 말투를 익히며, 커피 한 잔 다 마시지 못한 몸으로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는 일이 과연 건강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프랑스에는 '프랑스 앵테르(France Inter)'라는 공영 라디오가 있다. 뉴스와 시사를 다루는 대중 라디오이지만, 여름이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한 명의 고전 작가나 한 편의 고전을 붙잡고 한 계절을 건넌다. 몽테뉴의 질문을 되묻고, 돈키호테와 산초의 대화를 다시 펼친다. 보들레르, 파스칼, 프루스트, 호메로스, 빅토르 위고 같은 이름들이 아침 공기 속으로 퍼져나간다.목소리는 낮고 느리다. 결론을 서두르지 않는다. 오늘 반드시 알아야 할 쟁점도 없고, 내일 뒤집힐 속보도 없다. 대신 오래된 문장을 다시 읽는다.사람은 왜 허영에 빠지는가.우리는 왜 모험을 떠나는가.좋은 삶이란 무엇인가.실패한 인간은 정말 실패한 인간인가.당신의 분노는 당신의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 아침마다 주입해준 것인가.방송은 책으로도 나왔다. 매년 한 편씩 쌓였다. '함께 하는 여름' 시리즈다. 라디오가 흘려보낸 말이 책이 되고, 여름의 목소리가 독서 목록이 된다.TBS는 한때 사라질 위기까지 갔다.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은 없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편향됐다고, 누군가는 불편한 방송을 압박하려 했다고 말할 것이다. 둘 다 어느 정도는 근거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논쟁 너머에서 한 가지는 생각해볼 만하다.살아 있을 때도 시사였고, 사라질 뻔할 때도 시사가 문제였다. 철학자를 불러 한 시간을 내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시인이 나와 자기 시를 읽어준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공영이라는 이름을 달고도, 공적 사유를 위한 시간은 얼마나 있었는가.공영 라디오가 정치의 도구가 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 일에는 자주 분노한다. 그러나 공영이 현실 정치만을 말하는, 그 빈곤에는 좀처럼 분노하지 않는다. 앞엣것은 권력의 문제고, 뒤엣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는 권력의 오용은 쉽게 알아채면서, 상상력의 부재는 너무 쉽게 당연하게 여긴다.들린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은 다르다. 시사 라디오는 들린다. 철학 라디오는 듣게 한다. 전자는 귀에 닿고, 후자는 어딘가에 걸린다. 전자는 반응을 요구하고, 후자는 생각을 남긴다. 전자는 지금 당장 내 편과 네 편을 나누게 하지만, 후자는 내가 왜 그렇게 빨리 편을 나누고 싶어 하는지를 묻는다.팟캐스트도 있고, 유튜브도 있다. 찾으면 있다. 그러나 찾아야만 들을 수 있는 것과, 흘러나오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선택이고, 후자는 환경이다. 선택은 의지가 있는 사람의 몫이지만, 환경은 의지가 약한 사람까지 조금씩 바꾼다.한국의 공영 라디오가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철학자와 시인을 불러 느리게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한국 철학만이 아니라 세계의 철학으로, 한국 문학만이 아니라 세계의 문학으로. 아침 뉴스 사이에 니체가 끼어들고, 출근길에 보르헤스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점심 무렵에는 장자가 지나가고, 퇴근길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거는 라디오.공영 방송의 존재 이유는 시장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시장은 자극을 판다. 공영은 사유를 나눠야 한다.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리 대단한 일인가. 프랑스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고 있는 일이다.분노는 방향을 알려준다. 사유는 속도를 조절한다.나는 오늘 아침 어느 의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몰랐다. 대신 돈키호테가 왜 풍차를 향해 달려갔는지를 조금 더 생각했다. 풍차가 거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때로 인간은 틀린 대상을 향해서라도 달려가야 자기 삶의 모양을 얻는다. 어느 쪽이 더 유용한지는 모른다. 다만 어느 쪽이 더 오래 남는지는 안다.느린 목소리는 늦게 도착한다. 그래서 더 오래 머문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⑤왜 우리는 한국인만 유별나다고 믿고 싶을까
얼마 전 강연장에서 주제와 무관한 질문을 하나 받았다. 인지과학자에게 꼭 물어보고 싶었다며, 한 분이 손을 들었다. "고위험-고수익과 안정-확정된 수익 중에 고르라고 하면, 세계에서 한국인만 위험을 피하지 않고 고위험을 택한다던데 왜 그런가요?"행동경제학으로 노벨상을 받은 카너먼의 전망이론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학교에서 여러 번 다뤄 온 내용이라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한국인만 위험회피 성향이 극단적으로 낮다는 실험이나 데이터를, 나는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망이론을 일반적으로 설명드린 뒤, 한국인만 다르지는 않은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질문하신 분의 표정은 끝내 석연치 않았고, 솔직히 내 마음에도 찜찜한 것이 남았다.그 찜찜함은 며칠 뒤 다시 돌아왔다. 넷플릭스로 다큐멘터리를 보는데, 바로 그 실험이 등장했다. 80% 확률로 4천만 원을 받거나 20% 확률로 한 푼도 못 받는 A안과, 100% 확률로 3천만 원을 받는 B안. 참가한 한국인 스무 명 중 열일곱 명이 안전한 B안을 골랐다. 카너먼의 원래 실험에서 B안을 택한 비율은 80%였다. 방송용 소규모 실험이었지만 결과는 거의 같았다. 한국인만의 반전 같은 건 없었다. 학술 데이터를 봐도 마찬가지다. 2010년 아크스 등의 연구에서 미국·중국·한국의 위험회피 성향에는 의미 있는 차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세계에서 한국인만 위험을 즐긴다는 말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반론도 가능하기는 하다. 한국인이 미국 증시에서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높은 레버리지 ETF를 사들이는 비율은 유독 높다. 위험을 덜 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엔 다른 맥락이 있다. 카너먼 실험의 확률은 처음부터 못 박혀 있다. 80%는 80%다. 반면 주식시장의 불확실성은 정해진 숫자가 아니다. 투자자는 자기가 모은 정보와 판단으로 그 불확실성을 저마다 다르게 해석한다. 누군가에게 레버리지 ETF는 도박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계산을 끝낸 투자이다. 확정된 확률 앞에서의 선택과, 불확실성을 스스로 읽어내는 선택은 다른 종류의 일이다. 그러니 ETF 통계 하나로 한국인이 유별나다고 결론짓는 것 역시 성급하다.여기서 진짜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왜 한국인만 유별나다는 이야기에 그토록 솔깃할까? 생각해 보면 그런 이야기는 늘 인기가 많다. 한국인은 정이 많아서, 한국인은 빨리빨리라서, 한국인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어떤 것은 흉처럼, 어떤 것은 자랑처럼 들리지만 구조는 똑같다. 우리를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 세상에서 떼어 놓는다. 한국인만 그렇다는 단정은 검증을 요구받기보다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데이터는 미국도 중국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데, 우리는 우리만 다르기를 바란다. 사실로 반박해도 그 믿음이 잘 꺼지지 않는 건, 그것이 세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왜 하필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말하고 싶을까? 나는 우리가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한 세대 만에 가난을 벗고, 지금도 숨 막히는 경쟁 속에 서 있는 한국인. 우리에게는 그 과격했던 속도와 피 말리는 현재를 설명할 서사가 필요하다. 우리는 늘 남들과 달랐다는 이야기는 거기에 잘 맞는다. 달라서 이만큼 빨리 왔으니, 그 다름이 앞으로도 우리를 더 멀리 데려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경쟁도 견딜 만한 것이다. 한국인만 위험을 즐긴다는 거짓은, 안전을 택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알리바이, 달콤한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물론 다름이 참이라 해도, 그 결과에는 늘 양면이 있었을 것이다. 같은 다름이 우리를 빠르게 키운 만큼 어딘가를 빠르게 갈아 넣었을 텐데, 자기 위안의 서사는 밝은 쪽만 골라 담는다.강연장에서 끝내 석연찮아 하던 그분의 표정이 다시 떠오른다. 이제 와 생각하면 내 답이 틀려서 지었던 표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듣고 싶던 답이 아니어서였을 것이다. 다음에 어딘가에서, 누군가로부터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뭐라고 답해야할지 고민해본다. 질문하는 이의 얼굴, 표정이 떠오르기에 고민이 쉬이 끝나지 않는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
[임희윤의 시대&뮤직]그래미는 월드컵이 아니다. 안(못) 타도 된다
미국 그래미 어워즈가 내년부터 5개 시상 부문을 추가한다고 최근 밝혀서 화제다. 그 중 하나가 '최우수 아시아 팝 음악 퍼포먼스' 부문이라서다. 그래미가 아시아 팝 관련 부문을 만든 건 처음이다. 라틴 팝 관련 부문은 많았다. 심지어 '라틴 그래미'라는 별도의 시상식도 따로 있다. 아시아 부문이 생기면 아시아 가수가 그래미를 받을 수 있고, 아시아권에서 글로벌 선두를 달리는 것이 다름 아닌 케이팝이니 나쁠 게 없어 보인다. 월드 투어를 스타디움 규모로 도는 방탄소년단, 블랙핑크도 그래미에서는 상 하나 못 탔는데, 비로소 수상 가능성이 올라갈 것 같다.그런데 케이팝 팬들 일부는 불안해한다. 첫째, '아시아 팝' 부문 신설이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등 이른바 4대 본상이나 주요 부문 수상을 막는, 아시아 팝의 가두리 양식장이 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 탓이다. 마치 아카데미상이 오랫동안 영미권 외의 영화는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가둬둔 것과 비슷한 차별과 배제의 현상이 일어나리라는 것. 둘째, 무려 4년 만에 컴백한 방탄소년단이 돌아오자마자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을 탈환한 곡 'Swim'의 수상 가능성이 되레 낮아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 때문이다.그래미는 이번에 아시아 팝 부문을 신설하면서, 아시아 국가의 언어를 단편적으로 사용하거나 하나도 안 쓴 노래는 후보 자격에서 제외하겠다고 했다. 방탄소년단의 야심 찬 컴백작이자 빌보드 1위 곡 'Swim'은 100% 영어 노래다. 한국어(아시아 언어) 단어 하나 없다. 컴백 앨범 'ARIRANG' 전체적으로 봐도 영어 가사가 많다. RM을 제외한 6명의 멤버가 유창한 영어 구사자가 아니므로 앨범 녹음 과정에서 애를 먹는 모습은 컴백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BTS: 더 리턴'에도 여러 번 나온다. 그런데도 굳이 애써서 영어 노래, 영어 랩을 대거 담은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미답의 목표, 그래미 수상을 위한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갑자기 이번엔 그래미가 아시아 언어를 요구하는 상황이 된 거다. BTS는 영어로, 그래미는 아시아어로…. 마치 두 대의 큰 차가 동시에 유턴하며 완전히 엇갈리는 듯, '허무 개그' 같은 모양새다.자연스레 2027년 2월 7일 열릴 제69회 그래미에 대한 최대 관심사는 'Swim'의 수상 여부가 돼버렸다. 타도, 못 타도 논란거리가 될 게 뻔하다. 타면 '아시아 언어를 조건으로 내걸고 왜 영어 노래에 상을 주냐'는 논란이, 못 타면 '미국 시장에서 아시아 출신으로 최대 성과를 거둔 노래에 아시아 팝 부문마저 안 주냐'는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진퇴양난이다.벌써부터 그래미를 원망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깟 그래미 따위 안 받으면 뭐 어떤가. 그래미는 노벨상이 아니고, 빌보드는 월드컵이 아니다. 애당초 그래미는 미국의 음반 업자들이 서로를 칭찬해 주려 만든 상이다. 미국에서 안 파는 물건(음악)은 대상도 아니었다. 브라질, 헝가리, 카메룬, 몽골의 음악 거장 중에 그래미 '받은 사람 찾기'가 더 어려운 이유다.빌보드는 '미국 내 주간 판매 차트'다. 아시다시피 1년은 52주다. 이론상으론 (복권 당첨 번호처럼) 한 해에도 1등이 52회나 바뀐다. 우리에겐 빌보드 1위가 희귀하고 신기하니 '세계 정복!'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당장 지난주에 누가 빌보드 1위 했는지, 올해 '빌보드 최우수 팝 듀오/퍼포먼스 부문' 트로피는 누가 가져갔는지 대개 알지도 못하고 기억도 안 난다. 몇 년에 한 번씩 나라마다 대표 선수를 뽑아서 겨루는 올림픽, 월드컵과 음악 차트, 음악 시상식은 이렇게 너무 다르다. 게다가 우리 가요는 애초에 미국 시장이 아닌 한국 시장을 겨냥해 만들어지고 발표된 것 아닌가.한국 노래가 세계에 울려 퍼지고, 한국 가수를 보려고 수만, 수십만 인파가 운집한다는 사실을 요즘 모르는 사람이 어딨나. 미국이 주는 트로피 하나가 뭐 그리 대수인가. 그렇게 치면 우리는 우리 가요가 태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상을 받는지 관심 둔 적 있는가. 테일러 스위프트, 레이디 가가가 세계 음악계를 평정하는데 왜 한국 시상식에선 트로피를 안 주나. 이것도 차별인 건가. 봉준호 감독의 말을 빌면, 그래미는 '미국의 로컬 시상식'일 뿐이다.지금 한국 대중음악의 확장은 파죽지세다. 그래미는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액세서리다. 큰 것을 섬기는 걸 우린 사대주의라 부른다. 오랜 사대의 그늘을 벗어날 만큼 우리도 이미 거대해졌다. 지난달 멕시코시티 대통령궁 앞에 5만 아미가 모였다. 월드컵 폐막식 무대에 방탄소년단이 선다. 그래미 안 타도 그 사실을 세상이 다 안다. 역사는 이미 기록되고 있다.━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기술과 인재를 사들이는 시대, 글로벌 M&A의 판이 바뀌고 있다
최근 글로벌 M&A 시장은 역대급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 3년간(2022~2025년) 글로벌 벤처투자 금액이 연평균 -25%의 역성장을 기록한 것과는 뚜렷한 대조여서 시장의 관심을 끌고 있다. Bain & Company에 따르면 2025년 M&A 규모는 4조 8000억 달러(6500조원)로 전년 대비 36% 급증해, 2021년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큰 규모를 기록했다. 건당 평균 금액도 약 9400만 달러(1300억원)로 2022년 대비 30% 이상 커지면서, 대형화 추세가 뚜렷해졌다.이번 M&A 사이클은 이전 M&A와 내용·형식 면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과거 M&A가 피인수 기업의 지분과 지배권을 통째로 매입하는 기업 인수 방식이라면, 최근 M&A는 기술·인력만 인수하는 방식(Acqui-hiring)이 두드러진다. 부실 자산이나 껍데기는 배제하고, 핵심 기술(IP)과 개발 엔지니어만 사들이는 거래 방식이다. 법적으로는 기업 간 자산 양수도 계약 형태를 띠지만, 핵심 인력의 고용 승계와 이적 보상금(Retention Bonus)을 계약 조건으로 묶는 패키지형 M&A다.배경은 뭔가. 첫째는 '기술 패권 경쟁에 따른 시간 압박'이다. 자체 연구개발(R&D)로는 폭발적인 기술 발전(예 : 인공지능)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게 되자, 검증된 팀을 통째로 흡수해 시차를 없애려는 인수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둘째, 유니콘의 '거품 제거'도 한 요인이다. 벤처투자 침체로 자금난에 빠진 유니콘들의 몸값이 낮아지면서(Down-valuation), 대기업들의 매수가 활발해지고 있다. 셋째, 규제당국의 독과점 규제 강화도 빼놓을 수 없다. 통째로 M&A해선 기업 결합 승인이 어려워지자, 알짜 IP와 핵심 인재 조직만을 골라 담는 전략을 택하고 있는 셈이다.지역별로는 단연 미국이 1위다. 대형 M&A의 70%를 주도하며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고, 유럽·중동·아프리카(EMEA)가 20%로 2위,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약 10% 수준이다. 미·중 갈등 속에 중국이 주춤한 사이, 미국과 유럽이 글로벌 기술과 인력을 빨아들이고 있단 얘기다.분야별로는 정보기술(IT) 및 소프트웨어 M&A(2025년 1조 달러)가 핵심이다. 가장 뜨거운 AI 외에도 최근 AI 자율화에 따른 보안 위협인 이른바 미토스 쇼크(Mythos Shock)로 급부상한 사이버 보안, 차세대 모빌리티의 두뇌인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새로운 금융 인프라로 떠오르는 블록체인과 스테이블코인 등이 핵심이다. 알파벳의 클라우드 보안 스타트업 위즈 인수(320억달러), 팔로알토 네트웍스의 사이버아크 인수(250억달러), 메타의 스케일 AI 지분투자와 인력 M&A(143억달러) 등이 단적인 예다.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 첫째, 스타트업 생태계에 '새로운 회수(Exit) 방식'이 안착하고 있다. 투자자금을 IPO보다 빨리 회수할 수 있어 모험자본의 선순환을 유도한다는 평가다. 둘째, 인재와 기술의 생산적 재배치 효과다. 자금난에 몰린 우수 엔지니어들이 빅테크의 풍부한 인프라와 결합함으로써 혁신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셋째, 중견기업들의 구조 개선 효과다. 자금은 있지만 과거 수익모델에 머물러 있던 전통 중견기업들이 기술·인재 인수를 통해 고부가가치 테크기업으로 체질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같은 인력 중심 인수는 통합 후 핵심 인재의 재이탈 가능성이나, 자산 인수 형식을 빌린 독과점 규제 우회라는 부작용도 함께 안고 있어 정책당국의 면밀한 모니터링이 필요하다.앞으로도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 등 빅테크들이 AI와 보안 인프라 등 인수에 연간 수백억 달러를 쏟아붓겠다고 공언한 만큼, 기술·인재 인수 M&A는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시사점은 뭔가. 그동안 국내 벤처 생태계는 지나치게 상장(IPO)이라는 좁은 통로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AI 3대 강국을 목표로 하는 우리로서는 IPO 외에 M&A를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책당국은 M&A펀드 확대, 법인세 감면, 독과점 규정의 탄력적 적용 등 M&A 활성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대기업과 중견기업 역시 사내 유보금에만 안주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오픈 이노베이션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술혁명 시대엔 사내 R&D 중심의 오가닉(Organic) 성장만으로 글로벌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⑬]배관공이 된 경제학자-래포 시장과 오만의 비용
지난 연말 IRP 포트폴리오를 바꾸며 은행 종목 ETF를 조금 추가했다. 요즘처럼 살벌한 투자판이라면 차라리 '은행 같은 악당'들이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몇 년 전부터 생각하던 일이었는데, 불장에 데이고 난 뒤에야 겨우 실행에 옮겼다.물론 나는 또렷하게 기억해 냈다. 10년간 불입했던 퇴직연금이 DB형에 묶여 고작 세전 연 1% 안팎의 수익을 냈던 사실을.그 정도면 은행은 내게 한 번쯤은 물었어야 했다."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물론 묻지 않았다. 은행은 친절했지만 친절의 방향은 언제나 은행 쪽이었다. 창구 직원은 웃었고, 앱은 반짝였고, 상품 설명서는 길었다. 그러나 정작 내 노후가 1% 안팎의 수익률로 천천히 마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크게 말해주지 않았다.전문가 추천대로 여러 펀드를 섞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그래서 바구니를 여러 개 샀다. 문제는 계란이 아니라 바구니값이었다. 이번엔 아예 마이너스였다. 더 이상 '눈탱이'를 맞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공부해 보기로 했다.그런데 경제학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상한 일이 생겼다. 세상이 더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이 더 또렷해졌다. 경제학은 나를 똑똑하게 만들기보다,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더 정교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경제학을 배운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배관의 목록을 조금 늘렸을 뿐인지도 모른다.최근 미국 금융시장에서 래포, 곧 환매조건부채권 시장이 다시 조용히 주목받고 있다. 터졌기 때문이 아니다. 터질 때마다 가장 먼저 의심받는 배관이기 때문이다.래포 시장은 금융의 실핏줄이자 지하 배관이다. 은행과 증권사, 헤지펀드가 국채를 담보로 맡기고 짧은 기간 돈을 빌렸다가 다시 갚는 시장이다. 말하자면 거대한 전당포다. 맡기는 물건이 금반지가 아니라 미국 국채이고, 돈을 빌리는 사람이 동네 상인이 아니라 세계 금융기관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주식시장의 화려한 전광판, 인공지능 기업의 시가총액, 중앙은행 총재의 한마디가 금융의 거실이라면, 래포 시장은 그 아래 묻힌 배관이다. 막히는 순간 가장 높은 곳부터 흔들린다.문제는 이 조용한 배관 속에서 레버리지가 자라난다는 점이다. 헤지펀드들은 국채를 담보로 자금을 빌려 현물을 사고, 선물을 팔아 그 사이의 작은 가격 차이로 수익을 만든다. 베이시스 트레이드다. 최근에는 스와프 스프레드 거래 같은 다른 상대가치 거래도 같은 압력을 보탠다. 이름은 달라도 구조는 같다. 작은 차이를 크게 빌려 먹는 일이다.평온할 때라면 전략이라 불러도 될 거다. 시장의 작은 틈을 찾아내고, 가격 차이를 줄이며, 유동성을 공급하는 일처럼 보인다. 금융은 늘 자신에게 좋은 이름을 붙이는 데 능숙하다.그러나 유동성이 마르는 순간 전략이 아니라 의존이 된다. 자기 돈으로 들고 있는 국채와 빌린 돈으로 들고 있는 국채는 같은 국채가 아니다. 전자는 자산이고, 후자는 약속이다. 약속은 때로 자산보다 더 빨리 흔들린다.배관은 평소에는 물을 흘려보낸다. 위기 때는 공포를 흘려보낸다. 1998년의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 LTCM은 역사상 가장 똑똑한 바보들의 모임처럼 기억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과 수학 천재들이 모인 그 펀드는 절대 지지 않는 수식을 가졌다고 믿었다. 파산 확률은 우주의 나이 동안 단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시장은 우주의 나이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자 담보는 담보를 불렀고, 매도는 매도를 불렀고, 공포는 더 큰 공포를 불렀다.그들이 놓친 것은 수학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가격 차이가 언젠가 정상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 순간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지는 계산하지 못했다. 투자에서 맞는다는 것과 버틴다는 것은 다르다.시장은 묻는다. 당신 말이 맞을 수 있다. 그런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는가.수식은 진화했지만 오만은 오래 산다.톰 울프의 『허영의 불꽃』에는 스스로를 우주의 지배자라 불렀던 채권 트레이더가 등장한다. 어느 날 밤 작은 길 하나를 잘못 든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울프는 그것을 허영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것을 배관이라고 부른다.LTCM이 무너지던 해, 나는 배관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금융시장의 지하실은커녕 내 퇴직연금의 수도계량기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것이 눈탱이의 본질이다.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다.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몰라도 괜찮다고 믿었던 것이다.모르는 것과 모른 채 맡기는 것은 다르다. 모르는 것과 모른다는 사실을 잊는 것은 더 다르다.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거실에는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 삶을 실제로 버티게 하는 배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현금흐름, 부채, 건강, 관계, 시간. 그리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능력. 이런 것들은 빛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늦게 본다. 늦게 본다는 것은 대개 비싸게 본다는 뜻이다.공부를 조금 했지만 나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점이다.진짜 배관공은 물이 멈춘 뒤에야 드러난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허영의 불꽃이 한 번 꺼진 다음이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④ 거절했는데 강연이 확정됐다
며칠 전, 한 유명 협회에서 강연 요청 메일이 왔다. 내 책과 연구 배경을 언급하며, 행사에서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질서에 대해 강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정중하고 반듯한 구성. 그런데 글 전체에서 AI가 쓴 듯한 느낌이 강하게 났다. 나 역시 AI를 많이 쓰니, 그 자체가 별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협회가 요청한 강연 시간에 나는 이미 선약이 있었다. 그래서 그 시간에는 어렵다고 답했다. 대신 가능한 다른 시간대를 알려드렸고, 참고하시라고 강연료도 함께 안내했다.얼마 후 답장이 왔다. 강연 수락에 감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확정된 강연 시간은 내가 분명히 어렵다고 말했던 그 시간이었다. 행사 계획서에는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강연료였다. 내가 안내한 금액보다 25%가량 높게 적혀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내가 수락하지 않은 시간에, 내 이름이 들어간 행사 계획서가 만들어졌고, 강연료는 내가 말한 것보다 올라가 있었다. 강연료가 올라갔다고 해서 기분이 좋아지는 상황은 아니었다.다시 상세하게 메일을 보냈다. 뭔가 착오가 있는 듯하다고, 그 시간에는 선약이 있어서 강연이 불가능하다고, 이전 메일에서도 그렇게 말씀드렸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다시 답장이 왔다. 또 강연 수락에 감사한다는 내용. 또 행사 계획서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이번에도 시간은 내가 불가능하다고 한 그 시간. 강연료는 처음 내가 안내한 금액보다 50%가량 높아져 있었다.기괴했다. 솔직히 잠깐 장난스러운 호기심도 생겼다. 여기서 한 번 더 같은 내용으로 거절 메일을 보내면 어떻게 될까? 이번에는 강연료가 100% 올라서 올까? 거절할수록 몸값이 오르는 이상한 경매가 시작되는 것일까? 그런 실험은 하지 않았다. 이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간의 이메일 소통 내역을 설명했다. 혹시라도 행사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니, 지금 상황을 정확히 확인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분은 몹시 당황한 듯했다. 이메일 소통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설명은 이랬다. 동명이인 교수가 있어서 그랬다는 것이다. 설령 동명이인 교수가 있다고 해도, 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시간에 왜 내 이름이 들어갔는지, 왜 강연료가 두 번이나 달라졌는지, 왜 같은 수락 감사 메일이 반복됐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조금 더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비슷했다. AI와 인지과학을 연구하는 교수 중에 김상균이 또 있다고?아이러니한 것은, 그 협회가 내게 요청한 강연 주제가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질서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짧은 이메일과 통화 과정에서 내 머릿속은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새로운 무질서로 가득 찼다.나는 이 일이 반드시 AI 때문에 벌어졌다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사람의 착오였을 수도 있다. 내부 전달의 문제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원인이 무엇이냐보다, 이런 일이 앞으로 점점 더 자주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AI 시대의 무서움은 AI가 틀린 답을 낸다는 데만 있지 않다. 더 무서운 것은, 틀린 답이 아주 그럴듯한 문장과 공식 문서의 모양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예전의 실수는 대체로 티가 났다. 그런데 이제는 다르다. 문장은 매끄럽고, 형식은 완성되어 있고, 첨부 파일은 그럴듯하다. 그런데 그 안의 사실관계가 틀려 있다. 더 곤란한 것은, 그 오류가 어디서 시작됐는지 아무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그 협회에 나는 크게 실망했다. 유명한 기관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이번 일이 앞으로 우리 사회가 마주할 미래의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인공지능 시대의 진짜 위험은 기계가 인간처럼 말하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이 기계 뒤에 숨는 데 있다.새로운 질서를 말하기 전에, 우리는 오래된 질서부터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사람 사이 신뢰의 원천은 무엇인지부터 말이다. 그 단순한 질서가 무너지면, 아무리 좋은 AI를 붙여도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그저 더 빠르고, 더 공손하고, 더 그럴듯하게 무질서해질 뿐이다.━김상균 경희대 교수는 인지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사고와 경험, 그리고 기술변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왔다. 최근엔 AI 확산과 인간의 확장된 미래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저술활동 외에도 강연과 유튜브 등을 통해 기술 변화를 쉽게 풀어내며 대중적으로 폭넓은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
[임희윤의 시대&뮤직]강소(强小) 콘텐츠 육성이 문화 강대국 발판이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기…. 이런 환경과 조건들이야말로 (한 아티스트가) 긴 생명력을 유지하게 하는 큰 전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의 작은 극장. CJ문화재단 설립 20주년 기념 '리더스 토크'에 참여한 민규동 영화감독의 말은 적잖은 울림을 줬다. 1999년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로 데뷔한 그는 '파과' '간신' '내 아내의 모든 것' 등의 작품으로 다양한 장르를 종횡하며 선 굵은 필모그래피를 일군 연출자다. 그 역시 한 편, 한 편의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실패와 성공 사이의 외줄타기를 해왔다고, 특히나 신인 시절 스스로를 의심할 때 주변에서 내미는 따뜻한 손길과 격려로 버티며 여기까지 왔노라고 털어놨다. 그 불안한 길을 그는 심지어 "지옥길"에 비유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자서전에서 '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지옥길을 걷는 듯했다'고 했습니다. 신진 창작자분들이 자기만의 작은 지옥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문화재단 분들이 많은 손을 잡아줬습니다." 작은 지옥길을 걸어온 민 감독은 이제 중견이 돼 CJ문화재단의 신진 영화인 지원 사업인 '스토리업'의 디렉터이자 멘토로 활약하고 있다. 가능성을 증명할 단 한 번의 기회 자체를 얻는 것조차 힘겨웠던 신인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절실한' 후배들에게 더운 손길을 내밀고 있다. 얼마 전, 제79회 칸 영화제가 폐막했다. 나홍진 감독의 기대작 '호프'는 수상에 실패했지만 한국 신진 창작자의 결실이 떠들썩한 뉴스 사이로 반가운 새싹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학생 영화 부문 '라 시네프' 시상식에서 진미송 감독이 2등상을 받은 것이다. 진 감독은 뉴욕으로 이민 간 4인 가족의 하루를 담은 15분짜리 단편 영화 '사일런트 보이시스'로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사일런트 보이시스'라니….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대중문화계에도 수많은 '조용한 목소리들'이 있다. 숨죽인 채 자신의 잠재력을 제련중인 이들에게 첫 번째 마이크를 건네주는 일은 소중하다. 최근 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살목지'. '장화, 홍련'을 제치고 23년 만에 한국 공포 영화 흥행 1위 기록을 새로 쓴 이 작품은 1995년생 이상민 감독의 솜씨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지만 한국 영화 시장의 침체기에 졸업해 사회에 나온 그는 CJ문화재단 '스토리업' 지원작으로 단편 '돌림총'이 선정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영화제에 초대되며 데뷔작 '살목지'에 이르렀다. '작은 지옥길'을 지나 마침내 '작은 꽃길'에 다다른 데는 고사의 위기에 물과 거름을 내준 작은 지원의 힘도 있었다. 신진 창작자 지원의 효과는 지원금과 멘토링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당장 100만 장 판매, 1000만 관객 돌파, 1억 조회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원작 선정을 위해 업계 동료들과 경쟁하는 것부터가 그들에겐 가장 중요한 창작 욕구, 동기부여가 된다. 작은 음악가들도 그렇다. 인디 밴드 멘토링을 하다 보면 'CJ튠업에 선정된다면 원이 없겠다' 'EBS 스페이스 공감-헬로루키에 당선된다면 날아갈 것 같다'는 1차 목표를 말하며 눈을 반짝이는 신예들을 늘 만나게 된다. 우린 언젠가부터 'K-컬처 대박'의 신화 앞에 너무 많은 것만 바라고 또 바라보게 된 건 아닐까. '빌보드 1위' '황금종려상' '그래미 후보 등재' 같은 'SF적 성과'에만 열광하기엔, 우리 곁에서 조용히 어깨를 움츠린 '작은 거인'들이 너무 많다. 등잔 밑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이들을 손등에 올려놓고 더 나아가 거인의 어깨로 향하는 사다리에 놓아줄 손길이 절실하다. 요즘 가요 종합차트에서 케이팝과 함께 맹위를 떨치는 록 싱어송라이터 한로로. 그도 'CJ 튠업'을 비롯한 여러 신인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날을 벼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극소수의 거인 콘텐츠만이 아니다. 작지만 강한 창작자에 대한 기업과 국가의 지속적인 주목과 지원이야말로 작지만 큰 징검다리가 돼줄 것이다. 강소(强小) 콘텐츠가 풍부한 나라야말로 문화 강대(强大)국이다.━임희윤 문화평론가는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문화부 기자로 15년간 현장을 누볐다. 글쟁이, 라디오 게스트, 강연자, MC로 클래식 음악부터 여행 문화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디펜스 테크, 글로벌 벤처투자의 중심으로 급부상
정부 의존적인 분야로 여겨졌던 디펜스 테크(방산 기술) 분야가 최근 벤처 시장에서 급부상하고 있다. 러-우 전쟁과 중동 분쟁, 미·중 전략경쟁이 전쟁의 양상을 급격히 바꾸고 있기 때문이란 게 전문가들 평가다.우선 성장 속도가 빨라졌다. 2025년 글로벌 디펜스 테크 시장은 벤처투자금액 기준 491억달러(67조원)로 러-우 전쟁이 시작된 2022년 대비 4배로 확대됐다. 연평균 성장률로 봐도 무려 59%로 2020년 전후의 10~15%보다 4~5배 빠른 속도다. 관련 벤처기업 수도 빠르게 늘고 있다. Crunchbase 등 자료에 의하면, 디펜스 테크 벤처기업 수는 2020년 약 1,500개에서 2025년 약 5,000개로 3배 이상 증가했다. AI·드론·사이버보안 분야 창업이 러-우 전쟁 이후 급증했고, 미국이 45~50%, 유럽 25~30%, 중국이 10~15%로 미국이 압도적이다.왜 디펜스 테크 분야가 급부상하고 있나. 첫째, 전쟁 방식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과거엔 전차·전투기·항공모함 등 대규모 재래식 무기가 중심이었다면, 이젠 AI·드론·위성·사이버보안 기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고 있다. 실제 러-우 전쟁에서 수백만원짜리 소형 드론이 수백억 원 규모의 전차와 군함을 무력화하는 사례가 잇따랐다. 이는 미 국방부의 핵심 전략을 저비용 자율무기 체계로 전환시켰고, 이에 따라 AI 자율비행과 드론기술을 보유한 벤처업체에 투자자금이 몰리고 있다.둘째, 대형 방산업체만으론 기술 변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통 방산기업들은 무기체계가 대형 중심이고 개발 기간도 워낙 길어서, AI와 소프트웨어 혁신 대응이 느리다. 반면 벤처 스타트업들은 AI와 데이터, 드론기술 등을 빠르게 군사 분야에 적용하고 있다. AI드론 벤처의 대명사인 안두릴(Anduril)의 자율 감시 시스템이 대표 사례다. 미 남부 국경과 군사기지 방어에 실전 배치되고 있다. 록히드마틴·보잉 같은 대형 방산업체가 독점하던 시장에 기술 스타트업들이 본격 진입하고 있는 셈이다.셋째, 국가안보가 곧 산업 경쟁력인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미·중 전략경쟁이 장기화되면서, 각국은 반도체·AI뿐 아니라 드론·사이버보안 등도 국가의 핵심 인프라로 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정부 자금투입도 급증하고 있다. 예컨대 미 국방혁신 단위(DIU)의 민간 기술도입예산은 지난 5년간 연 65%의 급증세고, 유럽연합(EU)도 2021~2027년 동안 유럽방위기금(EDF)에 80억 유로(약 12조원)를 투입해 국방 첨단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있다.어떤 국가와 기업들이 대표적인가. 현재 디펜스 테크 시장은 미국 주도다.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안두릴(Anduril), 팔란티어(Palantir), 쉴드AI(Shield AI) 등이 AI·드론·데이터 기술을 앞세워 급성장하고 있다. 특히 안두릴 외에 팔란티어가 관심 대상이다. 팔란티어는 군 정보분석과 전장 데이터 소프트웨어를 공급, 미군과 NATO의 핵심 AI 플랫폼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선 데이터 기술기업인 독일의 헬싱(Helsing), 이스라엘은 사이버 정보·감시 기술기업인 NSO Group, 중국에선 세계 드론 시장점유율 1위 기업인 DJI가 대표적이다.유니콘은 몇 개나 되나. 동 업계의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 업체는 현재 약 20개로 수백 개에 달하는 AI, 핀테크 등에 비해선 훨씬 적다. 하지만 20개의 유니콘 중 10개가 작년 한 해 동안 탄생했다는 점은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대표 기업으론 안두릴이 기업가치 약 610억달러(85조원), 자율비행 드론업체인 Shield AI는 기업가치 127억달러(약 17조원), 해상·공중·지상 무인 기술을 개발한 UFORCE(10억달러 이상) 등이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배터리·드론·로봇 기술을 갖춘 우리나라도 디펜스 테크 벤처투자에 정부와 업계 모두 관심을 높여야 할 시점이란 생각이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⑫]배터리가 먼저 닳는다-하이데거의 잡담, 한병철의 피로
휴대전화가 먼저 피곤해진다.배터리 잔량 39%. 아직 오전이다.무거운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알림은 이미 여러 겹이다.선거철이다.모두가 입장을 가지고 있다.누군가는 단정했고,누군가는 분노했고,누군가는 해설을 붙였다.나는 아직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이미 결론이 나버린 세계가 도착해 있다.지친다.몸이 아니라 반응이 먼저 닳는다.생각보다 먼저 도착한 결론들 사이에서나는 잠깐 멈출 틈을 찾는다.그 틈이 잘 보이지 않는다.아니, 보이기는 한다.다만 그 틈으로 들어가기 전에다음 알림이 온다.■ 허락된 알림, 허락된 긴장예전에는 회의 중에도 휴대전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임원회의 자리에서 알림이 울리면 잠깐 고개를 숙였다.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울 수도 있었다.누군가는 말을 멈추지 않았고,누군가는 내가 누구의 메시지를 받는지 궁금해했다.그건 신뢰처럼 보였다. 동시에 긴장이었다.아무 때나 알림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건누군가가 아무 때나 나를 호출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권한은 늘 족쇄를 함께 데리고 온다.열려 있는 통로는 선택권이 아니라 상시 대기 상태다.그 시절의 알림은 결정과 연결되어 있었다.짧은 문장 하나가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배터리는 빨리 닳았지만내가 왜 닳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결정을 내려야 했고,대답을 해야 했고,책임이 있었다.일이 나를 소모시켰다.피로는 설명이 가능했다.설명 가능한 피로는 견딜 만했다.■ 잡담 속에서 사는 사람지금은 결정이 줄었고 책임도 가벼워졌다.그런데도 더 빨리 닳는다.뉴스 몇 개를 읽고,댓글 몇 줄을 훑고,짧은 동의와 짧은 냉소를 오간다.독일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일상 속에 유통되는 말을 '잡담(Gerede)'이라 불렀다.잡담은 나쁜 말이 아니다.거짓말도 아니다.그저 깊이를 통과하지 않은 말이다.이미 누군가가 정리해 둔 문장을다시 말하는 상태.생각의 형식을 빌렸지만생각의 과정은 생략된 언어다.생각을 하기 전에이미 누군가의 생각을 공유한다.말은 내 것이지만문장은 내 것이 아니다.하루에도 수십 번이미 완성된 문장을 소비한다.생각은 깊어지지 않는데감정은 계속 움직인다.작은 분노,짧은 연대,가벼운 판단.하루가 끝날 무렵무엇을 깊이 생각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소모하는 시대철학자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오늘날 우리는 억압받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주체에 가깝다고 말한다.과거의 사회가 "해야 한다"로 움직였다면 지금의 사회는 "할 수 있다"로 움직인다.강요가 사라진 자리에 자기 착취가 들어선다.감시자는 없다.마감도 없다.벌칙도 없다.그런데도 나는 쉬지 않는다.참여하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고,입장을 밝히지 않으면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감각.그 감각이 나를 계속 화면 앞으로 데려온다.아무도 즉각적인 의견을 요구하지 않는다.그럼에도 나는 계속 반응한다.좋아요를 누르고,공유를 하고,짧은 단정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킨다.성과는 쌓이지 않는데소모는 분명하다.예전에는 일이 배터리를 닳게 했다.요즘엔 반응이 배터리를 깎는다.그때의 피로는 무거웠고지금의 피로는 얇다.얇아도 오래간다.조용히, 그러나 지속적으로나를 낮은 전압 상태로 만든다.■ 덜 반응하는 기술어느 날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두고 책을 펼친다.알림은 오지 않는다.문장은 도망가지 않는다.한 문장을 세 번 읽는다.뜻이 바로 정리되지 않는다.손이 자꾸 휴대전화를 찾는다.그래도 글을 놓지 않는다.느림이 답답함이 아니라 저항이 된다.읽는 동안 나는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멈춰 있는 사람이 된다.문장은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당장 판단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생각은 천천히, 내 속도로 모양을 갖춘다.그 속도가 낯설다.뉴스의 속도와 다르고,알림의 속도와 다르다.처음엔 느리다고 생각했는데사실은 한동안 잊었던 내 원래의 속도는 아니었을까.오늘은 조금 덜 반응하기로 한다.세상은 그대로다.다만 나는 덜 닳는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③ 성적표가 없어서 불안해요
한 대학생이 말했다. 뭔가 해야 할 과제가 없어서 불안한 느낌이 든다고. 예전에는 시험 점수가 잘 나오면, 본인이 잘하고 있다고 안도하고, 점수가 부족하면 빈 부분을 채우려 애쓰면 되니까 편했다고. 성적표가 안 나오니 오히려 불안하다고. 얼마 전 시청한 KBS 다큐멘터리 <다큐3일>의 한 장면이다. 참으로 밝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의 대학생인데, 인터뷰 말미에 시험과 성적표를 그리워하는 얘기를 남겼다.당신은 고등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매달 시험 보고, 등수가 적힌 성적표를 다시 받아보고 싶은가? 그때가 뭐가 좋아서 다시 돌아가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으나, 나는 영상 속 학생의 마음이 이해된다. 참으로 아프게 이해된다.예전, 그리 멀지 않은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는 선명한 목표가 있었다. 대학에서 A라는 학과를 졸업하면, 대부분이 B라는 진로로 흘러갔다. 기업에서 한 직무를 맡으면, 최소한 몇 년, 운이 좋으면 수십 년을 그 일만 하면 됐다. 우리 삶의 흐름은 크게 세 단계였다. 인생의 첫 1/3은 공부하며 준비하고, 다음 1/3은 두어 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보내고, 마지막 1/3은 은퇴하며 여생을 보내는 식이었다. 인생 삼분론이 비교적 명확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삼분론은 통하지 않는다. 내 수업에는 60대 나이의 석사과정 학생이 보이고, 70세가 넘으신 선배들도 직업 전선에서 물러날 기미가 없다.요컨대, 내가 젊었던 시절만 봐도, 우리 사회에서 각자의 삶에는 선배들이 걸어간 경로가 내비게이션 안내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각자의 취향, 꿈을 조금만 누른다면, 그 경로대로 안전하게 걸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 내비게이션이 꺼졌다. 아니다. 먼저 경로를 보여주며 길을 갔던 선배가 말한다. 자신이 걸어온 길대로 따라오면 안 된다고. 그 길은 이미 끊어졌다고 말이다.모든 게 흔들리고 있다. 사회의 목표, 조직의 목표, 그에 따라 개인의 목표까지 동시에 흔들린다. 젊은 세대는 윗세대에게 묻고, 서로에게 답을 찾아보지만, 그 누구도 명확하게 답을 얘기하지 못한다. 보이스피싱처럼 보이는 강의, 300만 원 내고 자신의 강의만 수강하면 답이 보인다고 현혹하는 저질 온라인 콘텐츠만 범람하고 있다."교수님이 제 롤모델입니다." 가끔 이런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 말이 참으로 부담되고, 틀렸다고 본다. 이 시대에는 롤모델이 없다. 많은 이들이 한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뛰어야 했던 고속 성장형 산업화 시대에는 롤모델이 명확했다.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제일 잘 뛰는 사람이 롤모델이었다.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좋게 말하면 무한한 자유와 꿈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두어 명을 롤모델로 삼아 쫓아가는 경로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한다. 한정된 자원으로 산업을 키우던 시대를 넘어서, AI라는 두 번째 지능을 새로운 레버리지로 삼아서 한없는 꿈을 꾸는 시대를 말이다. 여기서 '무한한 자유와 꿈'이란 표현이 불편한 가시처럼 느껴질 수 있다. 미세 먼지 가득한 듯 숨 막히는 현실인데, 무슨 자유와 꿈을 얘기하냐고 말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AI라는 거대한 전환이 우리에게 미세 먼지보다 더 큰 압박과 답답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이 먼지 뒤편에는 그간 우리가 잊고 지냈던 자유와 꿈을 향한 여정이 펼쳐질 수 있다고 말이다.그때까지 선배가 후배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그리고 때로는 후배가 선배에게, 아이가 어른에게, 이렇게 얘기해주면 좋겠다. 나도 방향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발을 내딛다 보면, 좋은 방향이 보일 것 같다고, 네가 사랑하고 빠져들 길을 멋지게 찾을 것이라고, 그때까지 내가 곁에서 친구가 되어줄 테니,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지내자고 말이다.<다큐3일>속 대학생은 젖은 머리로 수건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수면 바지 차림, 집 앞에 분리수거할 때 신을만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런데 표정은 참 밝았다. 그 학생에게 꼭 얘기해 주고 싶다. 성적표는 없지만, 당신이 오늘 스스로 내린 결정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말이다. 미세 먼지를 통과해서 당신이 걸어갈 꿈의 여정을 응원한다고.
[임희윤의 시대&뮤직]한반도를 거대한 '문화의 자기장'으로 만들자
그들을 '오게' 하는 건 음악과 드라마이지만 그들을 '오래' 머물게 하는 건 그 너머에 있다. 지난 28일 에어비앤비가 서울 성동구에서 연 미디어 간담회 현장에 찾았다. 토론 사회자로 참가했다 여러 통찰을 얻어 왔다. 이날 에어비앤비는 한국을 방문한 해외 여행객 4500명을 대상으로 최근 진행한 'K-컬처와 한국 여행' 설문 조사 결과를 밝혔다. 이에 따르면, 'K-컬처가 한국 여행에 대한 관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 응답자는 무려 94%다. 한국의 음악, 영화, 드라마가 실제로 대다수 여행객이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단순히 뮤직비디오에 나온 건물, 드라마에 나온 계단에 가서 인증샷만 찰칵 찍고 떠나는 걸 원하는 건 아니었다. 전체의 91%는 '진정한 현지 문화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92%는 K-팝을 넘어 음식, 역사, 자연 등 폭넓은 한국 문화를 경험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일까. 74%는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한 서울 외 지역을 방문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현실은 많이 달랐다. 3분의 2에 달하는 66%가 서울에서 대부분의 일정을 소화했다고 했다. '동백꽃 필 무렵' '갯마을 차차차'를 보고 'Pohang'(경남 포항)을 검색해 보고, '도깨비' '폭싹 속았수다'를 통해 'Gochang'(전북 고창)을 찾아본 이라도 연계해서 즐길 다른 문화나 좋은 숙박 시설이 없다면 간다 해도 당일치기 인증샷 여행에 그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봐도 그렇다. 해외 여행을 갈 때 공항에 면한 대도시를 거점으로 삼되, TV나 유튜브에서 본 근사한 풍광을 떠올리며 타 지역을 가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가끔은 복잡한 교통편이나 다른 볼거리의 부재 때문에 기약 없는 '다음에…'만 뇌까린 게 부지기수다. 그 '다음'은 10년째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큰맘 먹고 나선 지역 여행이 반짝반짝한 수도의 야경보다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경우도 많다. 취재차 노르웨이를 방문했을 때 수도 오슬로보다 더 좋았던 건 멀리 서안에 자리한 고도(古都) 베르겐이었다. 옛 바이킹의 수도로서 알록달록한 브뤼겐의 구시가도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베르겐 고성(古城)에서 고색창연한 성벽과 노을을 배경으로 관람한 바이킹 포크 밴드 '바르드루나'와 팝가수 오로라의 합동 콘서트는 잊을 수 없다. 다음엔 특별한 공연이 있는 기간에 여러 날 숙소를 잡아 베르겐에 머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돌아온 뒤, '노르웨이 다녀왔어? 오슬로는 어때?'라 묻는 지인들에게 베르겐행을 추천한 게 십수 년간 헤아릴 수 없다. 한국은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해외 여행객들의 지역 관광 비율이 낮은 편이다. 가까운 일본만 봐도 다르다. 일본 소도시 여행이 한국인들에게도 중요한 화두일 정도다. 인프라와 홍보가 두텁다. 그럼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문화 콘텐츠를 통해 찾는 이가 절대다수인 나라인 만큼, 한반도를 거대한 '문화의 자기장'처럼 만드는 건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부터 지역 축제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하지만 차별화된 축제는 드물다. TV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비슷비슷한 가수들을 섭외해 대동소이한 잔칫상을 차려낸다. 자국민들조차 시큰둥하다. 하지만 한국 문화를 조화롭게 차려낸 음악 축제도 이미 꽤 있다. 전북의 전주세계소리축제, 광주광역시의 ACC 엑스뮤직페스티벌은 우리 전통음악을 기반에 두되 해외의 첨단 음악, 실험 음악과 충돌하는 특별한 난장을 만든다. 며칠씩 이어지는 이런 축제를 지역 관광과 연계해 해외 관광객까지 끌어들인다면 어떨까. 숙박, 관광과 문화 체험 프로그램까지 연계해 'K-지역 관광/문화 체험'의 시험지로 써볼 만하다. 에어비앤비 토론 때 프랑스 출신 방송인 파비앙 씨의 이야기가 귓가에 생생하다. 최근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는 그는 "외국 친구들은 이제 한국인처럼 살아보기, 한국 문화 더 깊게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편의점에 들러도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컵라면에 치즈 소시지를 직접 넣어 녹여 먹고 싶어 한다"면서 "원주 한지테마파크에 가서 만들기 체험을 하고 더 나아가 한지에 기록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까지 알려주면 한국 문화와 역사를 자연스레 배우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인의 입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음되는 게 무척 신기했다. 그렇다. 케이팝을 듣고 멀리 한국까지 날아온 이들을 더 오래 머물고, 더 깊게 느끼게 하는 힘. 5박이 10박이 되고, 5년이고 10년이고 한국 문화를 '파게' 만드는 그 무언가는 이제 우리가 설계하기 나름이다. 관광객 숫자가 는다고 당장의 그래프에만 집착하다 대충 흘려보내기엔 지금의 이 흐름이 너무 소중하다. 100년 뒤에도 한국 팬이 넘쳐나는 지구별을 그려본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AI 열풍, 닷컴 버블의 재현인가
최근 2~3년간 글로벌 주식시장을 지배한 핵심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이다. 엔비디아 주가는 2022년 말 약 14달러에서 2026년 4월 약 200달러로 3년 만에 14배 이상 상승하며 시가총액 4조 9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오픈AI는 2026년 초 기업가치 8400억 달러에 대규모 투자를 유치했고, 앤트로픽 역시 수천억 달러 수준의 평가를 받으며 시장 기대를 끌어올리고 있다.그러나 이 같은 급격한 성장 이면에서는 경고 신호도 뚜렷하다. 2025년 한 해 AI 분야에 200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투입됐지만, 수익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오픈AI는 약 120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지만, 막대한 연산 비용과 인건비로 약 90억 달러의 현금을 소진하며 대규모 적자 구조를 지속하고 있다. 매출이 증가해도 비용이 더 빠르게 늘어나는 구조가 이어지면서, 시장에서는 닷컴 버블을 떠올리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이 같은 우려는 과거와의 유사성에서 비롯된다. 시장을 움직이는 힘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대다. 인터넷이 산업 전반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이 2000년대 초 나스닥 버블을 형성했듯, 현재도 AI가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고 생산성을 혁신할 것이라는 기대가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투자 기준 역시 수익성보다 미래 가능성에 기울어 있다. 과거에는 클릭 수와 방문자 수가, 지금은 모델 규모와 컴퓨팅 파워가 기업 가치를 설명하는 지표로 활용되며 적자 구조를 정당화하고 있다.반면 현재 상황은 닷컴 버블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반론도 설득력을 갖는다. 가장 큰 차이는 주도 세력이다. 당시에는 수익 기반이 취약한 벤처기업들이 시장을 이끌었지만, 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구글·아마존과 같은 빅테크가 AI 투자를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연간 수천억 달러의 현금 흐름을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재무적 체력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에 130억 달러를 투자했고, 아마존과 구글도 앤트로픽에 각각 수십억 달러를 투입했다. 과거처럼 자금 경색으로 시장이 급격히 붕괴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기술 환경 또한 다르다. 인터넷 시대에는 인프라 구축에 시간이 필요했지만, AI는 이미 구축된 클라우드 기반 위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기업용 영역에서는 업무 효율을 개선하는 성과가 나타나며, 점진적인 수익화 가능성도 확인되고 있다.결국 AI 열풍의 향방은 하나로 수렴된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돈이다. 기술의 가능성은 이미 입증됐지만, 이를 지속 가능한 수익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기업 고객이 실제 비용을 지불할 만큼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확산되고, 동시에 막대한 컴퓨팅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연간 수억 달러에 달하는 GPU 운영 비용을 효율적 알고리즘과 자체 칩으로 낮추지 못한다면 현재의 성장도 지속되기 어렵다. 한마디로 AI 향방은 얼마나 빠르게 '돈이 되는 산업'으로 전환되느냐가 그 운명을 결정할 거란 생각이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⑪]뒤늦게 용감해진 당신에게 묻다
예전에 몸담았던 조직이 비난의 대상이 될 때, 기분이 묘해진다.먼저 드는 생각은 떠나서 다행이었다는 것이다. 세상만사(世上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으니, 험한 꼴을 비켜간 셈이다.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른 생각이 따라온다. 조금 더 오래 있었더라면, 지금의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는 없지만.어느 쪽이든 과거가 부정되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지 않다. 사람들이 어떤 집단을 비난하는 방식이, 그 안에 있었던 나의 시간을 함께 욕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라도 목소리를 내기란 만만하지 않고, 침묵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는 쓰지 못했던 문장들이 이제는 쉽게 다가온다.■ 장면 1방 안은 조용했다."왜 그렇게 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가, 분위기가 한 번 꺾인 뒤부터였다.몇몇은 시선을 내렸고, 몇몇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노트북을 두드렸다.누군가는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영리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침묵했다. 입을 다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의견이라는 듯이.(좋은 기자의 태도는 자리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고 배웠다. 이미 기자가 아니었지만, 그 습관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장면 2회사는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다.더 빠르게, 더 크게, 더 멀리.나는 그때, 커질수록 옆을 보고, 때로는 뒤를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돌아온 것은 질책이었다. 아직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말.문을 나서며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누군가의 얼굴보다, 나 자신의 불안이 더 또렷했기 때문이다.타이밍도 좋지 않았다.조직 생활을 하고 있다면, 꽤나 익숙한 장면일 것이다. 평가, 보상, 다음 기회. (더 이상) 말하지 않는 데에는 언제나 그럴듯한 이유가 있고, 그것을 '현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그렇게 겪고도 또다시 문제를 제기하는 나의 감각이 때로는 성가시다. 하지만 그것을 애써 고칠 생각은 없다. 불편함이 사라지는 순간, 아마도 내가 나를 배신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겠다.조직이 성장할수록 침묵은 빠르게 퍼진다.상처받은 사람도, 이상한 결정도, 대부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그 침묵이 각자의 안전이 된다.그러다 그 힘이 흔들리면, 풍경은 바뀐다.사람들이 모여들고, 말들이 쏟아진다.조금 전까지 조용하던 곳이 갑자기 정의의 광장이 된다.쓰러진 대상은 그냥 두어지지 않는다. 탈탈 털리고, 자근자근 밟힌다. 넘어졌기 때문이다.프랑스의 사상가 미셀 드 몽테뉴는 『에세』에 이렇게 썼다."인간은 자신이 비겁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때의 조용한 방을 떠올린다.사람들은 과거의 침묵을 견디는 대신, 현재의 분노로 자신을 씻어낸다. 쓰러진 대상을 더 세게 밟을수록, 그에게 고개를 숙였던 시간이 더 빨리 지워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일까.분노는 종종 정의보다 먼저 온다.정말로 옳아서가 아니라, 예전에 옳지 못했다는 기억이 너무 아프기 때문일 거다.개인도, 군중도 대개 뒤늦게 용감해진다. 상대가 강할 때는 말하지 않고, 약해졌을 때에야 외친다.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이렇게 적었다."악은 사악해서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그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았다.옳고 그름을 따진 것이 아니라, 안전과 불안을 계산했을 뿐이다.손익이 맞는 쪽으로, 아주 조용하게.몰락한 힘 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언제나 비슷하다.강할 때는 침묵. 약해지면 정의.그저 유리한 쪽에 먼저 섰을 뿐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았고, 어쩌면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뒤늦은 정의는 정의라기보다 계산에 가깝다.그리고 침묵이든 웅변이든,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들이 오랜 시간에도 살아남을 진실인지는 아직 알기 어렵다.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들은 대부분 이미 오래전에 쓰였다.니체는 도덕으로 포장된 복수를 말했다.토크빌은 다수의 폭정을 경고했다.그러나 이 글이 묻고 싶은 것은, 아마도 이 질문일 것이다.그들이 강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그리고 그들이 악이었을 때, 당신은 정말 선이었는가.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②노조는 AI와 싸워야 하나?
최근 내게 걸려 오는 전화의 발신지가 바뀌고 있다. 과거엔 기업의 전략기획 부서나 IT 팀이 주를 이뤘다면, 요즘은 노사협의체나 노동조합 측의 연락이 부쩍 늘었다. 질문은 단 하나로 수렴된다. "AI 도입을 앞두고 있는데, 도대체 우리 노동자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이 질문을 마주할 때 내 마음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우선 반갑다. 막연한 공포에 질려 눈을 감는 대신, 변화의 실체를 파악하고 대응하려는 의지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려가 엄습한다. 대화를 나눠보면 AI 도입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막상 "무엇을 논의할 것인가?"라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테이블 위에 올릴 어젠다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협의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협의를 시작하려는 형국이다.이런 상황은 올 초 현대차 노조에서도 그대로 펼쳐졌다. CES 2026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가 공개되자 노조는 노사 합의 없이는 단 한 대도 들어올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노조 스스로도 덧붙였다. 도입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반대가 아니라 논의 요청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논의해야 하는가? 바로 거기서 말문이 막힌다.지금 우리에겐 기술보다 질문의 설계가 시급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AI가 내 일자리를 뺏을 것인가?"라는 빈약한 질문에 갇혀 있었다. 이제 질문의 틀을 바꿔야 한다. X축을 현재와 미래로, Y축을 AI가 대체할 수 있는 것과 대체하면 안 되는 것으로 나누어 보자.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 영역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는 시간과 순서의 문제일 뿐, 거스를 수 없는 파도다. 진짜 핵심은 대체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는 기술 수준과 무관하게 인간이 끝까지 붙들어야 할 존엄과 가치의 영역이다. 어떤 업무를 효율화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가치를 인간의 손에 남겨둘 것인가를 논의하는 조직은 거의 없다.우리가 겪는 혼란의 본질은 속도에 있다. 경제학자 카를로타 페레즈는 기술 혁명이 두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기술이 폭발하며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는 설치 국면과 새로운 법과 제도가 정착되며 번영을 이루는 전개 국면이다. 과거 산업혁명기에 이 과정은 수십 년이 걸렸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이 과정을 압축하며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국가와 산업, 기업마다 서 있는 단계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어떤 곳은 여전히 디지털전환, DX의 연장선에서 프롬프팅 기법에 매몰되어 있고, 어떤 곳은 이미 AI 에이전트가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는 2단계로 진입했다.이 전환이 조직 내부에도 그대로 관통한다. AI가 실행의 상당 부분을 맡게 되면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지능의 종류 자체가 바뀌고 있다. AI는 지금 KPI, 정량, 효율 중심의 산업화 지능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동시에 구성원들을 "나는 왜 일하는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 앞으로 내몰고 있다. 일은 빨라지고 많아졌는데 공허하다는 감각. 이것이 지금 수많은 조직 구성원들이 느끼는 본질적 혼란이다. AI가 이미 점유한 영역에서 인간이 계속 다투려 한다면, 개인도 조직도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조직 구조도 함께 변하고 있다. 소수가 비전을 제시하고 다수가 실행하던 리더, 팔로워의 이분법은 끝났다. 이제 모든 구성원은 직급과 무관하게 리더처럼 사고해야 한다. 정답을 빠르게 수행하는 능력보다, 정답이 없는 안개 속에서 방향을 설정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현장에서 솔직히 말하면 안타까운 장면도 자주 목격한다. 기업은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는데 구성원은 변화를 외면한 채 고용 보장만 요구하는 경우. 반대로 회사는 효율화에만 급급해 구성원이 새 역할을 배울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 둘 다 지는 게임이다.노사가 마주 앉기 전,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 조직은 AI를 통해 사업을 확장할 것인가, 효율화할 것인가? 그 방향에 따라 구성원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 역할에 맞는 역량을 노사가 어떻게 함께 키울 것인가? 이 세 질문이 정리되지 않으면 협의 테이블에 앉아도 서로 할 말이 없다. AI 기술의 동향이나 프롬프트 작성법보다, AI와 인간의 유사성과 차이를 이해하고 변화하는 구성원의 역할과 책임을 직시하는 일이 먼저다. 테이블에 앉기 전, 우리는 먼저 이 거대한 질문들과 독대해야 한다.
[임희윤의 시대&뮤직]'K헤리티지'와 노리개 문화
'습관성 K 접두어 추가 현상' 최근 우리 언론과 언중에 떠도는 이 기현상을 아예 어문 규정에 추가해 줄 것을 국립국어원에 제안한다. '반농담'이다. 이런저런 말에 하도 'K'가 붙다 보니 살짝 어지러워서 그런다. 요즘은 또 'K헤리티지'란 말이 추가됐다. 케이팝 그룹이 개량된 한복이나 노리개를 착용하고 화보나 영상을 찍는 유행, 국립중앙박물관의 재치 있는 기념품에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트렌드에 착안한 말로 보인다. 'heritage'가 '유산'이니 'K헤리티지'는 한국 문화유산이라 해도 충분하다. 'K 접두어 현상'은 'K방산'이나 'K뷰티'처럼 그 분야에서 해외가 한국을 주목하거나, 수출이 잘 되든가, 아니면 젊은 층이 뜻밖의 한국적인 뭔가에 열광할 때 주로 발생한다. 이젠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까지 이 말을 갖다 쓴다. 두 기관은 지난달 30일 'K헤리티지 스테이지' 공모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K헤리티지'건 '국가 문화유산'이건 우리 전통문화가 조명받는 현상은 어쨌든 반갑다. 스마트폰과 숏폼 게시물을 통해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 영상에만 빠지기 쉬운 시대다. 세월의 나이테가 쌓여 그윽한 우리의 오랜 고전을 돌아보는 물결은 그래서 더 의미 있다. 최근엔 케이팝 최대 그룹인 방탄소년단이 'ARIRANG' 앨범을 내서 미국과 영국 차트 1위에 올렸다. 세계 가수 최초로 유튜브 공식 채널 구독자 수 1억 명을 돌파한 그룹 블랙핑크는 새 앨범 'DEADLINE'을 내면서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했다. 멤버들이 전시 해설을 맡거나 박물관 공간 일부를 블랙핑크의 상징색으로 꾸미고 신곡이 흘러나오게 했다. 하지만 'K헤리티지'가 때론 제품과 양념으로만 소비되는 듯해 아쉬울 때도 있다. 또, '한국적'이란 수식어로 상찬받는 콘텐츠 속에서 실상은 한중일 문화가 정체불명으로 뒤섞인 서양 관점의 오리엔털리즘 범벅을 마주하게 되는 때도 왕왕 있다. 해외 팬들의 이국 취향을 자극하는 소품이나 장치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국가 홍보, 방문객과 매출 증대, 유튜브 조회수와 구독자 수 증가 등을 내세우면서 국가 기관이 이런 흐름에 동참하기도 한다. 지난해 국가유산청이 공식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탈, 춤으로 잇다' 영상은 33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올해 초 열린 문화유산 이수자 간담회에서는 전통무용인들의 성토도 나왔다. 한 참가자는 "유명 댄서를 내세우고 탈이 등장했다 뿐이지, 봉산탈춤 특유의 춤 선은 어찌 된 일인지 영상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면서 "'봉.산.탈.춤' 네 글자를 알렸다고는 할 수 있어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우리 춤의 매력을 알리는 데는 실패한 콘텐츠"라고 말했다. 우리 전통 유산이 어떤 식으로든 호명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 미학이 거세된 채 명칭과 인상만 알려지는 것은 공허하다. 요즘처럼 'K컬처'가 주목받는 시대엔 그 공허가 더 안타깝다. 세계인은 물론이고 전통에 호기심을 갖게 된 한국인에게도 그 맥락과 매력을 알릴 절호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국악인의 억울한 사연을 들었다. 이름만 대면 알 케이팝 녹음에 연주자 겸 작곡자로 참여했다가 저작권 배분을 받지 못했다는 것. 새로 창작된 국악 선율이 절묘하게 주효한 글로벌 히트곡이었음에도 말이다. 힙합, 전자음악 편곡을 맡은 프로듀서진이 참여 국악인 모두를 작곡가 크레딧에서 빼버렸다고 한다. 엄연한 창작을 '어차피 국악이 비슷비슷하게 들리는데, 이게 연주이지 작곡이냐'고 치부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진지한 공동 작업의 대상이 아니라 독특한 장치나 이국적 양념쯤으로 생각했다는 얘기다. 전통문화를 구성하는 유형 문화, 무형 문화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개량한복, 뮷즈 같은 제품형 전통문화, 해외 쇼핑몰에서도 쉽게 복제해 팔 수 있는 물품은 각광받는 가운데 복제가 힘든 고유의 문화는 적당히 넘어가는 건 아닌지…. 전통문화가 'K컬처'란 산업적 강령의 작은 노리개 정도에 그치는 곳은 없는지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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