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광장
[시대광장/정용관]루즈벨트의 '코트 패킹' 실패가 남긴 교훈
1937년 1월 20일, 재선에 성공한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취임 선서를 위해 오른손을 들었다. 선서를 주재한 찰스 에번스 휴스 대법원장은 "헌법을 보존하고 보호하고 수호한다"는 대목을 천천히, 힘주어 읽었다. 루즈벨트도 따라 읽었다. 두 사람은 함께 '헌법'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마음속에 그린 헌법은 달랐다.루즈벨트는 훗날 당시 속으로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는 취지로 회고했다고 한다. 내가 수호하려는 것은 '내가 이해하는 헌법'이라고 말이다. 민주주의가 맞닥뜨린 새로운 문제에 대응할 만큼 유연한 헌법이지, 법원이 진보와 민주주의 앞에 장벽처럼 세워놓은 헌법은 아니라는 것이었다.불과 보름 뒤 루즈벨트는 승부수를 던졌다. 대법원장을 포함해 사실상 종신직인 9명의 대법관을 최대 15명까지 늘릴 수 있는 사법개편안이었다. 70세가 넘은 대법관이 은퇴하지 않을 경우 대통령이 한 명씩 추가 임명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명분은 고령 법관이 많은 연방 대법원의 재판 적체 해소였다.그러나 정치적 의도는 분명했다. 대법원이 뉴딜 정책에 잇따라 제동을 걸자 대법관 수를 늘려 법원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코트 패킹(Court-packing)'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루즈벨트는 직접 라디오 노변정담을 통해 대법원이 의회 위에 군림하는 '제3의 의회', '초입법부'가 됐다고 몰아붙였다.루즈벨트로서는 억울한 측면도 있었다.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뉴딜 정책을 추진했지만 대법관들에 의해 번번이 좌절됐다. 1936년 대선에서 그는 48개 주 가운데 46개 주를 휩쓸며 역사적 압승을 거뒀다. 민주당은 의회도 압도했다. 선출 권력의 정당성만 놓고 보면 이보다 강력하기 어려웠다. 이 정도의 국민적 위임을 받았다면 사법부가 이를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루즈벨트 생각이었다. 바로 여기에 이 사건의 본질이 있다.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권력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경계선은 어디까지인가. 뜻밖에도 루즈벨트 앞을 막아선 것은 야당인 공화당만이 아니었다. 민주당이 장악한 상원 법사위원회는 대통령의 계획을 "불필요하고, 무익하며, 지극히 위험한 헌법 원칙의 포기"라고 비판했다. 그것이 결국 가져올 것은 '법의 정부'가 아니라 '사람의 정부'라고 경고했다. 오늘 내가 만들고 휘두른 칼을 내일 상대가 쥐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는 얘기였다.다만 흥미로운 것은 그 뒤다. 대법원은 뉴딜 정책에 이전보다 우호적인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고, 고령 대법관들의 퇴임으로 루즈벨트에게 잇따라 대법관 임명 기회도 찾아왔다. 이에 루즈벨트는 "전투에서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겼다"고 자평했다고 하지만, 역사에는 제도 변경의 실패로 남았다.정치학자들이 주목한 것도 이 대목이다. 루즈벨트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뉴딜은 미국 사회의 틀을 바꿨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에게조차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었다. 같은 뉴딜 정책을 적극 지지한 민주당 의원들까지 대통령에게 그 선을 지킬 것을 압박했다.요즘 한국에서 벌어지는 대법관 제청 갈등을 1937년 미국 상황과 그대로 겹쳐 놓을 수는 없다. 갈등의 성격이 다르고 헌법이 다르며 대법관 임명 방식도 다르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대법관 후보자를 지명하고 상원이 인준한다. 무엇보다 우리와 달리 대법원장에게 제청권이 없다. 그럼에도 90년 전 미국에서 벌어진 사건이 던지는 역사적 함의는 가볍지 않다. 선출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통치 권한을 위임받는다. 그렇다면 그 위임의 경계는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성숙된 논의가 필요하다. 이는 좀 더 근원적인 정치철학의 문제로 이어질 수도 있다. '국민의 뜻'이란 무엇인가. 대선이 치러지는 어느 하루, 투표함 속에서 하나의 의지로 완성되는 것인가. 오늘의 다수가 내일의 소수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청와대와 대법원 사이에서 벌어지는 작금의 대법관 교착 상태가 헤어날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진 것 같아 답답하다. 대법관 한 명의 인선 문제였다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대법관 증원, 현 대통령이 무려 22명의 대법관을 임명하는 구조를 만든 것과 맞닿아 있다.해법은 있을까. 헌법의 진가는 권력이 순조롭게 돌아갈 때보다 권력과 권력이 충돌할 때 드러난다. 지금의 문제를 선출된 권력과 선출되지 않은 권력 가운데 누가 더 우위에 있느냐는 식으로만 봐서는 답을 찾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누가 이기고 지느냐의 문제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루즈벨트의 코트 패킹 실패가 남긴 역사적 함의는 단순히 '사법부 독립'이라는 다섯 글자에 있지 않다. 뉴딜은 훗날 미국 사회를 바꾼 정책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압도적인 선거 승리와 의회 다수까지 손에 쥔 루즈벨트도 끝내 넘지 못한 선(線)이 있었다는 점은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미국 대법원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권력의 경계'. 90년 전 루즈벨트의 실패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시대광장/박창억]존재감 키운 한동훈의 빛과 그림자
한동훈 무소속 의원은 최근 보수 진영에서 주가가 급등한 대표적인 정치인이다. 한 의원은 장관 인사 청문 정국에서 김승원 법무장관 후보자의 '신약 로비 의혹'을 집중 제기하며 존재감을 키웠다. 그는 거의 매일 후보자와 관련한 구체적이고 새로운 의혹을 들고 나와 김 후보자와 여권을 궁지로 몰았다. 무소속 의원 한 사람이 국민의힘 전체의 대응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서부 전선 비무장지대(DMZ) 지뢰 폭발 사고와 관련해서도 국방부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등 이목을 끄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특히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점이 눈에 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며 논쟁적인 현안을 직접 띄운다. 그는 가는 곳마다 기자들을 몰고 다니고, 정치 유튜브나 쇼츠 콘텐츠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급기야 한 의원이 수위를 차지한 차기 대선주자 적합도 여론조사(조원씨앤씨)도 등장했다. 지난달 17일 발표된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을 제치고 '신뢰하는 정치인' 1위에 오르기도 했다.그의 행보를 두고 정치권 안팎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온다. 보수 논객인 조갑제 씨는 "우리 국민들이 진짜 야당을 하나 가지게 됐다. 사실상 '한동훈 당'이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반면 그에게 집중되는 관심에 피로감을 느끼는 시선도 적지 않다. 최근 한 유튜브 방송에 출연한 국민의힘 모 중진 의원은 진행자가 한 의원과 관련한 질문을 이어가자 "그 얘기는 이제 그만 하자"며 불편한 기색을 여과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의원직 제명 운운할 정도로 적대감을 표출했으나, 오히려 그의 체급만 올려줄 수 있다는 이유로 최근에는 반격을 자제하는 분위기다.대중 정치인으로 체급을 키우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자신만의 '결정적 장면'이 필요하다. 진보는 물론 보수 진영의 역대 지도자들도 그랬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추진한 '청계천 복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천막당사 등을 통해 자신의 고유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훗날 몰락하긴 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은 검사 시절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한 마디로 잠재적 대선주자로 부상했다.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 의원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윤석열 정부 법무장관 시절,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파상 공세에 밀리지 않고 정교한 논리와 순발력으로 맞받아치며 보수층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했다. 6·3 지방선거 및 재보궐선거에서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총력전을 벌인 부산 북구 갑에 단기필마로 출마한 그는 개인기와 대중성만으로 이를 돌파해 해냈다. 그리고 인사 청문 정국에서도 다시 한번 본인의 존재감을 과시했다.하지만 초재선 의원 시절 저격수, 싸움닭 이미지를 굳힌 정치인이 지도자로 대성한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특히 그의 언어와 태도는 강력한 팬덤을 결집하는 원동력이지만, 동시에 온건파와 중도층에게 피로감을 안기는 양날의 검이다. 그는 범죄자를 압박하던 검사의 스타일 그대로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당시 듣보잡이었는데, 누가 듣보잡을 표적수사하느냐" "9억 받아 처먹고 평생을 스폰서 끼고" "앞으로 민주당을 김민새천년NHK당이라 부르겠다" 등의 표현이 그런 예다.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국가 지도자로서의 포용력을 보여주거나 외연을 확장하는 데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아울러 검사 출신이라는 태생적 배경은 향후 그의 정치 행보에서 아킬레스건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검찰총장 출신인 윤 전 대통령의 국정 운영 실패를 지켜본 국민 입장에서는, 또다시 엘리트 검찰 출신의 정치인에게 나라의 키를 맡기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과 회의감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요즘 한 의원이 구사하는 비타협적·비정치적 언어는 검사 이미지를 씻어내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무소속' 신분도 취약점이다. 정치는 혼자 하는 예술이 아니다. 정치는 철저하게 고도의 조직화된 세력을 기반으로 한다. 현재 그가 외곽에서 민주당 공격에 앞장서고 인기를 끌어 올리자 복당에 부정적이던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도 반감이 옅어지는 추세다. 그러나 그와 대척점에 선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가 여전히 복당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실제 복당까지는 적잖은 난항이 예상된다.최근 한 의원은 많은 주목을 받았으나, 긴 호흡의 정치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한 의원이 팬덤을 이끄는 '스타 정치인'을 넘어, 스스로 세력을 모으고 진보 진영과도 타협을 이끄는 '지도자'로 도약할 수 있을지 진짜 시험대는 지금부터다.
[시대광장/이상복]CNN과 함께 선 폭스뉴스, 우리였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8일 CNN·MS나우·폴리티코를 '가짜뉴스' 매체로 규정하며 백악관 출입을 막았다. 세 매체 기자들의 출입증도 무효화됐다. 마음에 들지 않는 보도를 이유로 특정 언론을 대통령 취재 현장에서 배제한 것이다. 세 매체는 수정헌법 제1조가 보장한 언론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하고 긴급구제를 신청했다.더 눈길을 끈 건 다른 언론사들의 반응이었다. ABC·CBS·NBC·폭스뉴스는 공동으로 대통령 취재단 운영을 중단했다. 그 결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미를 비롯한 트럼프 대통령의 공개 일정이 주요 방송 화면에 제대로 담기지 못했다. 뉴욕타임스와 AP 등 주요 신문·통신사도 백악관 사진 게재를 중단하며 보이콧에 함께했다.특히 폭스뉴스의 동참은 상징적이다. 폭스뉴스는 보수 시청층을 기반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과 정책을 대체로 우호적으로 다뤄 온 매체다. 그럼에도 경쟁사의 출입을 막는 선례가 모든 언론의 질문할 권리를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CNN 논조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그보다 앞서는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법원은 24일 백악관 조치에 일단 제동을 걸었다. 의견 제출 기회 없이 출입 권한을 박탈한 것은 문제라며, 본안 판단 전까지 출입증을 돌려주라는 임시금지명령을 내렸다. 이후 주요 방송사들은 국민의 알 권리를 고려해 공동취재를 재개했다. 다만 백악관은 CNN의 출입이 허용된 뒤에도 대통령 전용기 탑승과 취재단 참여를 제한했다. 출입증은 돌려줬지만 실제 취재 기회까지 온전히 보장할 뜻은 없다는 태도다.백악관은 비판 언론을 내쫓은 직후 '트럼프 TV'라는 자체 스트리밍 채널도 내세웠다. 정부가 영상과 보도자료로 정책을 알리는 일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어느 정부나 홍보 수단을 갖고 있다. 문제는 언론의 취재와 질문을 제한한 자리를 정부가 편집한 화면으로 메우려 한다는 데 있다. 질문은 줄고 일방적인 메시지만 늘어날 수밖에 없다.이 대목에서 우리 상황을 떠올려 보게 된다. 어느 대통령이 자신에게 비판적인 신문·방송을 왜곡 보도나 가짜뉴스로 지목해 대통령실 출입을 금지한다고 하자. 대신 정부는 자체 방송을 앞세워 국정 홍보에 나선다. 그때 진보와 보수 언론, 전통 미디어와 뉴미디어는 표현의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라는 이름 아래 함께 설 수 있을까.선뜻 장담하기 어렵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정치권은 언론을 공정한 심판자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증거가 되고, 상대에게 불리한 보도는 당연한 감시로 여기는 일이 반복됐다. 이제는 같은 진영 안에서도 이런 인식이 뚜렷하다. 최근 유시민 작가가 언론 지형이 이른바 '뉴이재명' 쪽으로 기울었다고 주장한 것도 그런 불신의 한 단면이다. 반대로 김민석 대표가 '민주당TV'를 밀어붙이는 현실 역시 기존 언론과 대형 유튜브가 사실을 왜곡한다는 인식과 맞닿아 있다.문제는 이런 정치권의 인식이 언론의 진영화를 부추기고 언론 스스로 공통의 원칙을 논의할 여지를 좁힌다는 데 있다. 언론사끼리 경쟁하고 논조가 다른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사실 확인, 반론권 보장, 권력 감시, 취재의 자유처럼 경쟁에 앞서는 원칙마저 진영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면 연대는 어려워진다. 어느 보도가 이 기준을 지켰는지보다 어느 편에 유리했는지가 먼저 평가되는 순간, 언론의 독립성과 시민의 신뢰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뉴스가 소비되고 생산되는 방식이 급변한 것도 이런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유튜브 저널리즘은 공론장을 넓히고 시민과 직접 소통하는 통로를 늘렸다는 장점이 분명하다. 하지만 매체와 채널이 잘게 나뉘고 각자의 지지층을 향한 발신이 강해질수록, 서로 다른 언론이 저널리즘의 공통 기준을 논의하고 다듬는 목소리는 오히려 작아졌다.언론도 자유의 이름 뒤에 숨을 수는 없다. 속보 경쟁에 밀린 성급한 보도, 클릭을 노린 제목, 사실과 의견을 뒤섞은 논평, 진영의 기대에 맞춘 선택적 인용은 언론 불신을 키운다.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사실처럼 반복하거나 불리한 정보는 빼고 유리한 장면만 부각하는 순간, 언론은 보도가 아니라 동원에 가까워진다. 언론이 스스로 존립 가치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외부의 공격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연대도, 국민적 공감도 얻기 어렵다.'트럼프 TV'가 던지는 질문은 미국에만 향하지 않는다. 한국 언론은 정권의 성향과 이해관계를 넘어, 취재할 자유와 국민의 알 권리라는 원칙 앞에 함께 설 준비가 돼 있는가. 권력은 불편한 질문을 견뎌야 하고, 언론은 그 질문이 시민의 신뢰를 얻을 만큼 정확하고 공정해야 한다. 그 원칙이 진영보다 뒤로 밀리는 순간, 언론이 비운 자리는 언제든 권력이 만든 영상으로 채워질 수 있다.
[시대광장/박중현]'닮상'은 성공한 경제부총리 되기 힘든 시대
'8·30 개각 파동' 와중에 조용히 물러난 구윤철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후임 이형일 부총리는 '닮상 다관왕'이란 공통점이 있다. 재경부 노동조합이 2004년부터 선정해온 '닮고 싶은 상사(닮상)'는 과장급 이하 직원들이 본받을 만한 선배 관료를 투표로 뽑는 제도다. 한국 경제 성장을 주도해온 최고 엘리트 관료조직의 후배들로부터 리더십, 업무능력, 인격을 두루 공인받은 것이란 점에서 '닮상' 수상자는 자부심을 가질만 하다. 3회 선정되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르는데, 구 전 부총리와 이 부총리는 둘 다 3관왕으로 '헌액'된 인물들이다. 부드러운 성품과 원만한 소통이 장점으로 꼽히는 구 전 부총리는 관료 생활의 정점에 오른 지난해 예전과 정반대 평가를 받았다. 닮상과 함께 투표하는 '안닮상(안 닮고 싶은 상사)'에 선정된 것이다. 정부조직 개편에 대한 실망감이 가장 큰 이유였을 거다. 경기지사 시절 자신의 기본소득 주장에 반대하는 기재부를 향해 "이 나라는 기재부가 아닌 국민의 나라"라고 했던 게 이 대통령이다. 최강의 정책 수단인 예산권을 신생 기획예산처에 내준 수장에 대한 후배들의 눈길이 고왔을 리 없다. 구 전 부총리가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 작년 7월 국회 인사청문회부터 구 후보자는 윤석열 정부가 25%에서 24%로 낮춘 법인세 최고세율을 다시 높이란 여당 요구에 "종합적으로 적극 검토하겠다"고 했다. 반발하는 야당엔 "법인세가 100조 원에서 거의 60조 원으로 40%나 빠졌다. 그냥 감세를 해준다고 투자하는 건 아니다"라고 맞섰다. '법인세를 내려도 투자가 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정치권의 세율인상 요구에 적극 동조하는 경제부총리는 처음 봤다'는 말이 안팎에서 나왔다.2024년 62조5000억 원까지 줄었던 법인세수는 지난해 84조6000억 원으로 늘고 올해 100조 원, 내년엔 200조 원에 이를 전망이다. 한국의 법인세수는 세율 '1%포인트'가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경기에 달렸던 것이다. 반년도 안돼 급변할 세수를 잘못 예측해 법인세율을 높이는 바람에 '예산통' 구 전 부총리의 세금, 재정에 대한 이해도에 의문이 제기됐다. 첫 단추를 이렇게 꿴 구 전 부총리는 '청와대 경제 브레인' 김용범 전 대통령 정책실장 등에 가려 임기 내내 존재감이 희미했다. '비거주 1주택' 보유세 부담을 높인 '8·3 세제 개편안'을 내놓기 전까지 그랬다. "제 집 놔두고 세 사는 이유가 백만 가지는 될 텐데, 현실을 외면하고 투기세력으로 본다"는 비판이 쏟아지며 세제안을 짠 재경부에 오랜만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는데, 그게 부총리 교체의 원인 중 하나가 됐다.지난달 11일 생중계된 국무회의에서 이 대통령이 구 전 부총리에게 건넨 말은 내상을 더 키웠다. "세금 만지는 사람은 (세제를) 바꾸면 욕을 먹게 돼 있다. 혜택 보는 쪽은 가만히 있고, 부담이 늘어나는 쪽은 엄청나게 반감을 가지게 돼 있으니 무조건 기어서 다니시라"는 대통령의 '농담'에 구 부총리는 따라 웃었다. 올해 1월부터 이 대통령이 직접 드라이브를 건 '비거주 1주택자 중과세'는 세제 원칙과 실무에 정통한 재경부 관료들 머리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아이디어다. 취임식도 없이 이달 22일 임기를 시작한 이 부총리도 비슷한 부담을 안고 출발한다. 재경부 1차관으로 세제 개편안을 주도한 게 이 부총리다. 인사청문회에선 17년 보유한 과천 아파트 실거주 기간이 4개월뿐인 '비거주 1주택자'란 점이 문제가 됐다. 세종시 근무, 해외파견 등을 고려할 때 예전이라면 큰 흠이 될 일이 아닌데, 상부 방침에 맞춰 본인도 못 지킬 제도를 만드는 바람에 제 발등을 찍었다. 여론을 의식한 여당의 대폭 수정 요구에도 "거주 중심 주택문화로 간다는 취지"는 철회하지 않고 있다. 이 대통령이 이달 초 추석물가 집중관리를 주문하며 "이번엔 자신 있습니까? 재경부 장관 지명을 취소할 수도 있는데"라며 '과한 농담'을 던졌을 때엔 "확실히 잡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닮상'에 표를 던진 후배들 마음이 상당히 복잡했을 것 같다.직장에서 이뤄지는 '상향 평가'가 대부분 그렇듯 재경부 '닮상'도 성격이 유순하고, 후배에게 호통치는 일 없는 '착한 상사'가 후한 점수를 받는 경향이 있다. 평상시라면 장점인 이런 원만함이 정치, 사회적 난맥이 심한 시절엔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한국 경제에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안팎의 무리한 요구에 원칙과 소신으로 맞서 굵직한 업적을 남긴 경제부총리들이 강단 있고, 때로는 독한 캐릭터 소유자들이었던 데엔 이유가 있다.지난달 30일 아침, 미국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 회의 참석차 인천공항에서 출국하려다 개각 소식을 듣고 당황해 해외 일정을 취소했다 번복하고 비행기를 탄 게 국민들 기억에 오래 남을 구 전 부총리의 마지막 모습이다. 세계 10위권 대국의 '경제 컨트롤 타워'가 개각 장기판의 졸(卒)처럼 초라하게 퇴장했다. 착한 관료가 성공한 부총리로 남기 참 어려운 시대다.
[시대광장/김화진]'경영판단의 원칙' 빠른 법제화를
대기업의 경영자들은 끊임없이 크고 작은 결정을 내려야 한다. 보고받고, 검토, 협의하고 판단한 후에 결정한다. 사업의 성패가 거기에 달려있다. 요즘은 경영자들이 단독으로 큰 결정은 하지 못하고 사외이사들이 다수인 이사회의 최종 승인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경영자가 결정하고 이사회 승인을 받아 진행한 사업이 실패로 끝나면 어떻게 되는가.회사가 추진한 모든 사업이 성공하는 경우는 없다. 수많은 프로젝트가 추진 중에 다양한 이유로 중단되고 폐기된다. 그런데 그중 규모가 큰 프로젝트나 세간에서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특이하게 잘못된 프로젝트는 이른바 '실패한' 사업으로 언론의 관심을 받게 되고 주주들에게도 알려진다. 주주들은 사업의 중단이나 실패가 회사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중대한 실책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 경우 법률적 책임까지 묻고 싶어 한다.전에는 이 문제가 그다지 큰 걱정은 아니었다. 주주가 나서려면 자신도 시간과 노력, 비용을 투자해야 해서다. 그런데 그런 문제가 덜한 기관투자자들과 외국계 헤지펀드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경영자들의 피부에 와닿는 문제가 되었다. 법률적 책임이란 회사가 입은 손해를 개인적으로 회사에 보상하라는 것이다. 임원 책임보험은 그에 대비해서 있는 것이다.그런데 중단되거나 폐기된 모든 프로젝트에 대해 경영진이 내부적인 책임 외에 법률적으로도 책임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한다면 상당한 위험이 수반될 것 같은 사업은 추진을 하기 어렵다. 일상에서는 '리스크'의 반대말이 '안전'이지만 기업 경영에서는 리스크의 반대말은 '기회'다. 정주영 회장의 트레이드 마크였다는 "이봐, 해봤어?!"라는 말이 생각난다. 후환이 염려되어서 성공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업만 추진되게 된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은 없어진다.크게 잘못된 판단에 따라서 사업이 추진되다가 폐기되거나, 관리에 실패해서 중도 하차하는 경우 담당 임원은 거취를 결정하거나 인사상의 조치가 따른다. 그런데 그런 책임을 다 지는 데 더해서 법률적 책임까지 져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예컨대 회사에 수십억 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면 담당 임원들과 이사들이 개인적으로 그 돈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가. 실제로 더 중대한 문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일단 누군가가 법률적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사법적 절차를 시작하는 경우 훗날 법원의 결정이 나오기까지 해당 임원은 큰 고난을 겪게 된다. 그리고 사업의 결과가 자신의 잘못으로 발생한 것이 아님을 입증해야 한다. 입증하지 못하면 소송에서 진다.미국법에서 유래하는 '경영판단의 원칙'은 회사의 이사가 충분한 정보에 의거해서 신중히 검토하고 판단한 후에 개인적인 이익을 결부시킴이 없이 특정한 사업을 추진했다면, 그 결과가 좋지 않았다 해도 '법률적인 책임'은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정직하고 신중한 판단'은 결과가 나쁘다 해도 해당 결정을 내린 이사에게 법률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법률적' 책임이다. 그 외의 모든 책임은 다 진다.이러한 경영판단의 원칙은 독일에서도 이미 약 20년 전에 수입된 제도다. 그 한 해 전에 '경영판단의 원칙'이라는 561쪽 짜리 교수 자격 논문이 나왔었다. 학계에서 새로운 이론을 입법으로 연결시키자는 취지에서 교수 자격 논문이 나왔다는 것은 그 전에 이미 무수히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학술 논문이 발표되었다는 의미다.독일 주식회사법이 경영판단의 원칙을 다소 간접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과 달리 독일 기업지배구조 모범 규준은 "주식회사의 이사가 적절한 정보에 의거 회사의 최선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고 합리적으로 믿고 경영판단을 내린 경우, 충실의무나 주의의무 위반을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독일 규준의 이 규정은 독일어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에 'Business Judgment Rule'이라고 영문 용어를 붙여 놓았다.최근 상법개정을 통해 주식회사 이사들의 충실의무가 주주들에게도 확대되는 등 경영하는 사람들의 법률적 책임이 무거워진 데 상응해서 이 경영판단의 법칙을 상법에 명문으로 도입하자는 의견이 많고, 국회가 그 도입을 위한 입법 작업을 진행해 왔다. 학계에서도 적지 않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고 판례도 경영판단의 원칙을 인정하고 있다. 입법을 통해 도입이 마무리되어야 할 것이다.경영판단의 원칙이 도입되면 재판 외에서 더 큰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경영판단의 원칙은 기업의 경영자들이 적극적으로 사업기회를 포착하고 공격적으로 추진하는 효과를 일으켜 법률이 기업활동에 활력을 주는 한 사례가 될 것이다.━김화진 고문은 회사법·자본시장법과 기업지배구조 분야의 권위자다. 독일 뮌헨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졸업 후 서울대 로스쿨 교수를 지냈다. 미시간대 로스쿨 석좌교수, 삼성증권 이사회 의장, 현대모비스 선임독립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시대광장/김준술]청와대 인사 검증, 블랙박스부터 열자
청와대의 고위직 인사 검증은 과연 무엇을, 얼마나 들여다볼까. 낙점과 낙마를 가르는 판단의 기준은 또 어떠할까. 역대 정부마다 비밀스러웠고, 그래서 늘 궁금했다. 과거 정부에서 검증을 관장한 인사와 얘기를 나눴다. 힌트를 얻을까 해서였다. 그가 전한 검증 체계는 이랬다. "추천팀이 후보를 올리면, 검증팀이 움직인다. 공무원 출신은 축적된 인사 카드가 있다. 그것부터 본다. 여기에 경찰이 수집한 평판 정보, 이른바 '세평'도 붙는다. 당사자에겐 부동산, 병역, 논문 등을 묻는 대량의 질문지도 보낸다. 이를 국세청, 국토부 자료와 대조한다." 핵심은 한 사람을 두고 동원 가능한 검증의 그물을 최대한 치는 데 있었다.정부가 바뀐다고 검증의 기본 문법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역대 정부마다 세부 방식은 다를지라도 자료를 뒤적이고, 세평을 듣고,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검증 수단은 비슷했다. 하지만 고위직 낙마는 때마다 되풀이됐다. 그럴 때마다 검증 그물은 한 겹씩 더욱 촘촘해졌다. '자가 검증'만 보자. 이명박 정부는 2010년 질문을 150개에서 200개로 늘렸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병역, 부동산, 위장전입 등 '7대 비리'를 포함해 65쪽에 걸쳐 186개 질문에 답하도록 했다. 지금 정부도 예외가 아니다. 출범 이후 이진숙 교육부,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지명을 놓고 시끄러웠다. 그러자 지난해 9월 인사 수석실을 신설해 철저한 검증과 인선을 약속했다.그런데도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 논란이 다시 터졌다.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는 결국 자진 사퇴했다.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지, 문제 가능성을 인지하고도 결격 사유로 보지 않았는지는 밖에서 알기 어렵다. 앞서 대화했던 전 청와대 인사는 김 후보자의 경우 문제의 '코로나19 신약 청탁' 사건과 관련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것을 언급했다. 통상 기소유예는 커다란 결격 사유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사건이 일단락된 것으로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런 의견은 추정일뿐이다. 문제는 이런 추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청와대가 무엇을 확인했고, 무엇을 문제로 봤으며, 어떤 판단을 거쳐 후보자를 골라 발표했는지 국민은 도무지 알 길이 없다.청와대는 이번에도 "국민 눈높이에 부족함이 없게 검증 체계를 강화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후보자 신상을 샅샅이 파악하고, 자기 검증 질문을 늘린다고 인사 시스템이 완벽해지는 건 아니다. 이제는 검증 내용을 적절한 방식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마련할 때가 됐다. 검증이 청와대 안에만 머무는 '블랙박스'로 끝나면 언제든 또 다른 논란이 되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검증 결과의 공개에는 여러 제약이 따를 수 있다. 사생활 침해 가능성, 확인되지 않은 세평, 명예 훼손 여부 등이 그렇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원자료 대신 검증 항목과 기준, 흠결 유무, 결격 사유로 결론 내지 않은 이유를 국민에게 설명하면 된다. 시민단체들도 오래전부터 비슷한 요구를 하고 있는 만큼 이참에 사회적 논의에 부쳐볼 만도 하다. 검증의 강화 못지않게, 검증의 과정과 결과를 잘 보여줘야 한다.앞서 이재명 대통령은 "국가 공무원의 1시간은 5200만 시간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공무원 하나하나가 매우 중요하다는 취지다. 고위직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 인선에도 특별히 공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고위직 인사에선 항상 후보자 능력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공유하고, 손발을 맞출 참모가 필요할 때가 많다. 노무현, 이명박 정부의 장·차관 323명을 분석한 단국대 융합사회연구소 연구가 있다. 임명된 장관들의 '충성심 지표'를 조사했더니 차관들보다 높았던 반면, 장관들의 '능력 지표'는 차관들보다 낮게 측정됐다. 결국 대통령들은 충성심 높은 장관을 선호하되, 능력의 손실은 차관을 통해 보완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소리다. 고위직 인사에 이처럼 주관적 요인이 개입된다면 왜 대통령이 그 사람을 택했고, 어떤 흠결까지 감수하려 하는지 설명할 책임도 커진다.특히 청와대가 검증 내용과 판단 근거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가운데 책임은 국회로 넘겨진다. 하지만 후보자의 오래된 의혹을 국회가 청문회에서 뒤늦게 찾아내고 다투는 구조는 바람직하지 않다. 청문회는 정쟁의 장으로 변질되기 일쑤고, 사회적 비용과 낭비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부작용 속에서 아예 검증 기준과 절차를 명확하게 '법제화'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2023년 '성균관법학'에 실린 노은정 박사의 논문도 이런 제안을 담고 있다. 그는 후보자가 허위로 검증 답변을 하면 처벌하고, 국회가 청와대의 검증 결과서를 받아보게 하는 절차까지 마련하자고 했다. 모두 귀담아들을 만하다.역대 정부는 인사 논란이 터질 때마다 검증 질문을 늘리고 조직을 손댔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갈 때다. 공식 지명한 후보자의 무엇을 확인했고, 주요 흠결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판단했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사람을 쓴다는 것은 고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왜 그를 골랐는지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까지가 인사다.
[시대광장/박창억]'23년만의 데자뷔' 호르무즈 파병
"이 비행기는 서울로 바로 못 갑니다." 2004년 12월 8일 4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대통령 전세기가 파리 드골 공항을 이륙한지 25분쯤 지났을까.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갑자기 기자간담회를 자청하더니 이라크 아르빌 자이툰 부대 방문 방침을 밝혔다. 깜짝 놀란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한 노 전 대통령은 기수를 쿠웨이트로 돌려 그 곳에서 수송기편으로 갈아탄 후 자이툰 부대를 찾았다. 작전명은 '동방계획'. 쿠웨이트와 이라크에도 아르빌 방문 사실을 사후 통보할 정도로 극비 보안속에 추진됐다. 노 전 대통령이 아르빌에 다녀오는 동안 필자를 포함한 동행 기자들은 쿠웨이트 무라바크 공항의 기내에서 외국 정보기관의 감청을 우려해 위성전화도 사용하지 못 한 채 7시간을 대기했다.이라크 파병 문제는 노 전 대통령에게 고통스러운 결단을 요구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윤태영씨가 최근 펴낸 '노무현 평전'에는 당시 노 전 대통령이 2003년 임기 초부터 파병 문제로 얼마나 고심하고 번민했는가가 잘 드러나 있다. 윤씨는 파병 결정은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정서로부터 이탈하는 결단이었다고 적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후 2008년 12월 봉하마을에서 측근들에게도 "(파병을) 단호하게 거절했을 때 어떤 외교적 후유증이 있을지 가늠이 안 되었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압박을 느꼈다는 말이다.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현재 이재명 정부가 맞닥뜨린 상황도 23년 전과 꼭 닮았다. 이재명 정부도 미국의 거세지는 파병 압력을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과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릴 위험 사이에서 외교적 딜레마에 빠져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최근 호르무즈 해협 파병 가능성에 대해 "한반도 대비 태세에 큰 손상이 있지 않은 범위에서는 운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미·이란 전쟁이 끝나면 기뢰 제거 등을 지원하겠다는 당초 정부 입장에서 벗어나 전쟁 중 군사적 기여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당초 미온적이었던 정부의 파병 검토가 급물살을 타게 된 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잇따른 공개 압박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관세·안보 협상에 진척이 없고 북·미 대화 조율 등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가 필요한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파병 시한을 11월까지로 명시했다는 보도까지 나올 정도로 압박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2003년에 비하면 파병의 명분은 약하고 위험도는 현저히 높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라크 전쟁은 미국이 9·11테러라는 전대미문의 공격을 받은 데 대한 반격 차원이었다. 그래서 당시 영국 등 미국의 우방들도 적극 참전했다. 반면 이번 미국-이란 전쟁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이나 다국적군이 꾸려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영국, 프랑스 등 주요 동맹국도 트럼프 대통령의 참전 요청에 선뜻 응하지 않고 있다. 이번 전쟁은 이라크 전쟁과 달리 미국 의회에서 승인도 못 받았다. 더구나 파병 시 한국은 미·이란 전쟁의 직접적인 당사자로 연루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이란의 보복 가능성도 거론된다. 파병 검토 움직임에 이란은 "직접적인 군사적 침략 및 전쟁에 대한 참여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거여(巨與) 국회' 상황인데도 파병 동의안 통과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도 이 정부에게는 부담이다.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미· 이란전 개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범여권인 조국혁신당·진보당은 파병 불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내부 핵심 지지 기반부터 설득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 대통령은 예전 노 전 대통령보다도 훨씬 더 난감한 상황에 놓여 있는 것 같다.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10년 유시민씨가 정리한 자서전 '운명이다'에서 이런 말도 했다. "대한민국은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할 일이 많다. 경제적으로도 미국과 원만하게 지내야 한다. 마른 나뭇가지 부러뜨리듯이 할 수는 없다. 차근차근 변화를 이루어 나가면, 언젠가는 옳지 않은 전쟁에 대한 파병 요청을 거절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올 것이다." 2003년 이라크 파병 논란 이후 23년이 흘렀지만 노 전 대통령이 소망한 '파병 요청을 거절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아직 멀었다는 게 다시금 확인된다. 안타깝고 서글픈 현실이다.2003년 9월 미국은 추가 파병을 요청하며 '전투병'으로 못 박고 최소 3000~5000명 규모의 경보병 전투여단을 갖춘 폴란드형 사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집요한 협상 끝에 '비전투병 3000명 이내'로 절충했고, 주둔지도 이라크에서 가장 안전한 북부 쿠르드 지역을 택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파병을 피할 수 없다면 동맹의 신뢰를 지키면서도 국익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최적의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다는 점을 미국측에 분명히 알리고 파병 시한도 한정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과 연대하는 형식을 취해야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미국에 분명하게 요구해야 한다.
[시대광장/이상복]'나혼산'의 연출, MBC의 책임
예능은 연출의 예술이다. 카메라가 일상에 들어서는 순간 현실은 재구성된다. 제작진은 볼 만한 장면을 찾고, 출연자는 렌즈를 의식한다. 편집은 며칠의 시간을 한 시간의 이야기로 압축한다. 시청자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리얼리티 예능에 연출이 전혀 없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드물다.그럼에도 시청자가 리얼리티 예능에 마음을 여는 데는 최소한의 약속이 전제된다. 프로그램이 내건 핵심 설정만큼은 사실이라는 믿음이다. 혼자 사는 사람의 일상, 낯선 곳에서 맞닥뜨린 돌발 상황, 출연자 사이의 관계가 실제일 때 편집과 연출도 설득력을 얻는다. 그 약속이 깨지는 순간 시청자는 '재미를 위한 장치'로 웃어넘기지 않는다. 몰입한 시간을 기만당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최근 MBC '나 혼자 산다' 전현무의 카자흐스탄 알마티 여행 편을 둘러싼 논란도 이 지점에서 불거졌다. 방송은 전현무가 인천공항에서 즉흥적으로 목적지를 정하고 항공권과 숙소, 차량을 직접 구하는 '무계획 여행'을 그렸다. 바쁜 일상에서 배낭 하나 들고 훌쩍 떠나는 모습은 대리만족과 해방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을 일탈의 충동을 건드린 셈이다.그러나 방송 뒤 의문이 이어졌다. 적지 않은 촬영 인력이 항공권 발권부터 현지 이동, 촬영 허가까지 모두 즉석에서 해결할 수 있었겠느냐는 지적이었다. 알마티시가 공식 홈페이지에서 관광 당국의 촬영 지원 사실을 언급하면서 논란은 더 커졌다. 제작진은 촬영 지원이나 협찬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엿새 뒤 "금전적 지원은 없었으나 행정 절차와 현장 진행을 위한 촬영 협조는 받았다"고 말을 바꿨다.지난 4일 나온 세 번째 입장문에서는 사전 준비의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났다. 제작진은 전현무가 카자흐스탄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스태프 항공권을 미리 발권하고 현지 촬영 협조도 요청해 뒀다고 밝혔다. 전현무가 당일 공항에서 항공권을 직접 발권한 것은 사실이지만, 촬영을 위한 조건은 이미 상당 부분 마련돼 있었다는 뜻이다. 제작진은 충분한 설명을 하지 못해 혼선을 키웠다며 사과했다.하지만 거듭 달라지는 설명에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제한된 일정에서 선택 가능한 여행지가 한두 곳이 아니었을 텐데, 제작진은 어떻게 카자흐스탄을 미리 특정할 수 있었을까. 현지에서 출연자가 특정 목적지를 향해 밤샘 운전을 한 것도 사전에 짜인 동선은 아니었을까. 제작진은 촬영 협조는 받았지만 협찬은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방송 협찬이 금전과 현물뿐 아니라 장소와 인력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은 다름 아닌 방송 관계자들이다.해외 촬영을 위해 현지 기관과 접촉하고 안전을 점검하는 일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제작진의 당연한 책무다. 쟁점은 그 준비가 방송의 핵심 서사인 즉흥과 무계획에 부합했느냐다. 출연자의 선택 뒤에 제작진이 신속하게 필요한 절차를 밟은 것이라면, 그 과정 역시 방송의 일부로 솔직하게 보여주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사전 협의 없이는 성립하기 어려운 조건을 미리 맞춰놓고 현장의 우연인 양 구성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것은 효과적인 연출이 아니라 현실을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한 속임수다. 제작진은 해명을 거듭하며 얼버무릴 게 아니라 출연자의 선택이 어느 정도 열려 있었는지, 제작진이 어느 범위까지 동선을 준비했는지 자세히 밝힐 책임이 있다.방송계에는 장르의 약속을 어겨 신뢰를 잃은 사례가 적지 않다. 1998년 KBS '일요스페셜'은 야생 수달의 생태를 기록한 듯 방송했으나, 보호 상태의 수달과 세트를 활용한 사실이 드러나 사과방송을 했다. 우연한 순간을 포착한 듯한 화면이 실은 통제된 환경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자연다큐의 핵심 전제를 흔들었다. TV조선 '아내의 맛'은 관찰 예능의 일상성을 둘러싼 의혹 끝에 과장 연출을 인정하고 시즌을 종영했다. Mnet '프로듀스 101' 시리즈의 순위 조작은 시청자 유료 투표를 훼손해 형사처벌로 이어졌다. 사안의 성격과 무게는 다르지만 시청자와의 장르적 약속을 저버렸다는 점은 같다.이번 사안을 개별 제작진의 판단 착오로만 넘길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 혼자 산다'는 오랫동안 MBC를 대표해 온 간판 프로그램이다. 공영성을 내세우는 방송사라면 프로그램의 핵심 설정과 사실관계가 어긋나지 않는지, 논란에 대한 설명은 정확하고 충분한지 살펴야 한다. 이는 담당 제작진에게만 맡겨 둘 일이 아니다. 시청자의 신뢰를 시청률이나 광고 수익의 기반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공적 책임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필요한 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다. 리얼리티 예능의 핵심 설정에 영향을 주는 사전 협조 기준을 명확히 하고, 이를 시청자에게 공개하는 투명한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논란이 불거졌을 때 책임 있게 설명할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 인기 프로그램일수록 '재미를 위해 어디까지 연출할 수 있는가'를 엄격히 물어야 한다. 시청자는 제작진 개인이 아닌 MBC라는 이름을 믿고 채널을 선택한다.연출은 예능의 기술이다. 그러나 속임수는 방송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공감은 그럴듯하게 꾸며 낸 설정이 아니라 불완전한 현실을 정직하게 보여줄 때 생긴다. 지금 MBC가 답해야 할 것은 협찬이냐 협조냐라는 말의 차이가 아니다. 시청자와 맺어 온 약속을 어떻게 다시 세울 것인가다.
[시대광장/김화진]'주주 충실의무' 상법, 오해와 진실
상법은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모두 세 번 개정되었다. 개정 내용은 거의 전부가 회사 지배구조에 관한 것들이다. 그중 지난해 7월 22일 공포된 1차 개정 내용 중 주식회사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도입이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다.상법상 주식회사의 이사는 '회사'에 충실의무를 졌다. 그런데 상법이 개정되어서 이제 이사는 '회사와 주주'에게 충실의무를 진다. 상법 제382조의3 제1항은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 및 주주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회사에 충실의무를 진다. 회사가 잘 되도록, 회사가 돈을 많이 벌도록 열심히 일해야 하고 회삿돈이나 자산을 축내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 특히 회사에 해를 끼치면서 개인적 이익을 챙기면 안된다. 그렇게 하면 주주들이 손해를 본다.대형 상장회사에는 주주가 수백만명까지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6월 기준 약 797만명이다. 그래서 이사가 주주 모두를 위해 일을 제대로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회사에 대한 충실의무를 이행하는 것이다.그런데 개정된 상법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이사가 모든 주주 각자에게 직접 충실의무를 지게 한다. 이사가 일부 주주만 좋도록 일하면서 다른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많았다. 여기서 일부 주주란 이사 선임을 좌지우지할 만큼 영향력이 큰 주주다. '오너'라고 부른다.입법 취지는 좋은데 다들 헷갈려 한다. 수십만, 수백만명에 이르는 주주는 크건 작건 회사경영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이 있을 것이고 이해관계도 다를 수 있다. 회사의 투자가 잘된 투자인지 아닌지도 주주마다 생각이 다르다. 그런데 새 상법에 따르면 그 모든 주주 각각에게 충실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이사는 비난이나 퇴출에 그치치 않고 법률을 위반하게 된다.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문제는 집행할 방법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사의 주주 전원에 대한 충실의무 이행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그 규칙은 법원이 집행할 방법이 없다. 그러면 왜 법률은 그렇게 고쳐졌는가? 왜 미국이나 다른 나라들은 우리보다 먼저 그런 법률을 만들었고 계속 운용하고 있는가?쉬운 답은 '오해'다. 미국 회사법은 주식회사 이사들에게 회사뿐 아니라 주주에게도 충실의무를 지우지만 그 주주는 '주주 전체'다. 개별 주주가 아니다. 그래서 회사에 대한 충실의무와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법률 운용상 어려운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교과서나 판례집을 보아도 이사의 개별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위반을 다룬 사례가 거의 없다. 주주가 몇 없는 소형 비상장회사 사례가 가끔 있을 뿐이다.미국법이 이사의 회사에 대한 충실의무에 더해서 주주 전체에 대한 충실의무를 도입하고 있는 이유는 이사가 주주들의 이익까지 고려해서 회사의 이익을 생각하라는 뜻이다. 법률의 해석을 '개별 주주의 이익'이 아닌 '전체 주주의 이익'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다. 오랜 세월 발달해온 미국 회사법의 어려운 대목이다. 소송이 거의 없어서 학설도 발달되지 못했다.국회가 법률을 개정할 때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보다는 이사의 전체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라는 개념을 사용했더라면 불필요한 논란과 해석의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실제로 이사의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규칙이 위력을 발휘하는 경우는 소형 회사에서 대주주 경영자(이사)가 소수주주(동업자)에게 피해를 주면서 전횡을 부릴 때다. 그런 경우 주주대표소송은 비싸고 의미도 없기 때문에 소수주주가 바로 경영자에게 충실의무 위반을 이유로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도입하기 위해 상법을 고치느라 많은 사람들이 애썼다. 그런데 사실 꼭 하지 않아도 되었을 작업이었다. 선언적 효과가 있고 정치인들은 점수도 땄을 것이다. 그러나 상법 개정은 민법 개정 못지않은 신중을 기할 일인데 경제가 커지고 자본시장 투자자가 늘어나면서 유권자 동향에 민감한 정치인들이 손을 많이 댄다. 필요하면 고쳐 써야 하지만 신중에 신중을 기해 주었으면 좋겠다.━김화진 고문은 회사법·자본시장법과 기업지배구조 분야의 권위자다. 독일 뮌헨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졸업 후 서울대 로스쿨 교수를 지냈다. 미시간대 로스쿨 석좌교수, 삼성증권 이사회 의장, 현대모비스 선임독립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시대광장/정용관]대통령의 '선택적 침묵'
이재명 대통령은 말에 능하고, 말하는 데도 거침이 없다. 크고 작은 현안의 핵심을 빠르게 파악해 자신의 생각을 막힘없이 풀어낸다. 생중계되는 국무회의나 정책토론회를 보다 보면 "어떻게 저런 세밀한 부분까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그런 이 대통령이 유독 말을 아끼는 순간이 있다. 자신의 정치적·사법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 앞에서다. 일반 현안에 대해서는 세부 사항까지 설명하고, 맞든 그르든 나름의 해법이나 결론까지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의 임기와 재판, 사법부 인선이 걸린 문제에서는 침묵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요 몇 달 사이 국정 지지율이 뚝 떨어진 원인을 놓고 부동산 세제 논란과 정책 혼선 등 여러 진단이 나온다. 필자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원인이 있다고 본다. 흔히 말하는 진정성, 곧 '말의 신뢰'다. 아무리 공(公)을 말해도 그 뒤에 사(私)가 어른거린다고 느끼는 국민이 많아지면 국정에 대한 신뢰를 쌓기 어렵다.한동안 뜨거웠다가 시들해진 개헌 문제부터 보자. 이 대통령은 4년 중임제 또는 연임제를 거론하며 개헌을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의 임기 단축도 수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얼핏 전향적인 제안처럼 들렸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중임·연임의 대상에 포함되는지에 대해서는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 "나는 대상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밝히면 될 터인데 그러지 않는다. 선택적 침묵이다.더욱이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며 미리 선을 그은 것도 정치적 복선을 깐 것처럼 비친다. 자신의 임기 단축을 언급하면서 개헌의 범위를 대통령 중임·연임제로 좁힌다면 40년 만의 개헌을 '거래와 손익'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대법관 인선 논란도 마찬가지다. 대법원장의 제청권과 대통령의 임명권이 충돌했다느니, 서면 제청이 관행을 깼다느니,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를 새로 구성해야 한다느니 하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절차와 형식이 갈등의 본질이 아니라는 점을 국민도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보고 있다. 대법원 구성의 다양성을 위해 여성 대법관이 필요하다는 것이 청와대의 입장이었다면, 애초 여성 후보 2명 가운데 한 명을 놓고 조율할 여지가 충분했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문제가 꼬인 것은 청와대가 대통령이 지명한 현직 헌법재판관의 배우자를 사실상 특정해 제청을 요구하면서부터다. 법원의 확정판결에 대한 재판소원제가 도입된 상황이라면 이해충돌 논란이 제기될 소지가 충분하다. 이른바 '상피제(相避制)'를 떠올리는 것도 상식의 차원이다. 국민이 궁금해하는 것은 제청의 형식이나 권한 갈등이 아니라 청와대가 특정 후보를 고집하는 '진짜 이유'다. 그런데도 왜 그 후보여야 하는지, 이해충돌 우려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 아무 설명이 없다.공소 취소 문제에 이르면 의구심은 더욱 짙어진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공소 취소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온 판사 출신 재선 의원을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검찰이든 특검이든 어떤 수단을 동원해 현 정권 내에서 '법적으로' 정리해도 다음 정권에서 다시 불거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무엇보다 국정 지지율 하락과 맞물려 공소 취소 문제에 대해서는 여권 내부에서도 부정적 기류가 강하다.그런데도 이런 흐름에는 눈을 감은 채 공소 취소 모임의 대표를 지낸 의원을 아예 법무부 장관으로 기용하려 한다. 이런 비상식적 결정까지 끌어낸 '심리적 동인(動因)'이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다. "검찰개혁 완성"을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국민이 얼마나 될까. 정작 대통령 자신은 뻔히 예상됐던 이런 논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 모든 권력은 자신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본다. 자신의 선택에 합법과 정당성의 외피를 씌우려는 속성도 있다. 그러나 절차가 합법적이라고 해서 선택의 동기와 결과까지 저절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실책과 오판 가능성을 걸러내는 집권당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 하지만 대통령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됐다는 평가를 받는 새 지도체제가 견제와 견인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당정일체'는 때로 국정 운영의 미덕이 될 수도 있지만 권력의 오판을 키울 수 있는 위험한 도그마이기도 하다. '집단 착각'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국정 난조(亂調)는 대통령 개인의 문제를 넘어선다. 필자 주변엔 여러가지 위험 신호를 느낀다는 이들이 점점 늘고 있다. 대통령이 국정을 활력있게 이끌어가려면 무엇보다 국민 신뢰가 굳건해야 한다. 지지율 반등의 모멘텀을 찾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겠지만, 지금은 무엇이 문제였는지 근본부터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 출발은 공과 사를 구분하는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긴급 기자회견이든 언론 인터뷰든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개헌과 공소 취소, 대법관 인선 등에 사적 이해를 개입시키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히고 국민의 의문에 답해야 한다. 역대 정권의 흥망이 보여주듯 최고 권력자가 입을 닫고 참모들도 말하지 못하는 '금기의 영역'은 훗날 혹독한 대가로 돌아올 수 있다.
[시대광장/박중현]개각 부른 '비거주 1주택 중과세'… 아이디어 누가 냈나
1일 이재명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8·3 세제 개편안' 중 논란이 가장 큰 '비거주 1주택자' 부동산세 중과 방안을 일부 수정했다. 비거주 1주택자의 종합부동산세 기본공제액을 현행 12억 원으로 유지하는 게 핵심이다. 당초 정부의 세법 개정안은 실거주자의 경우 기본공제를 14억 원으로 높여 세 부담을 덜어주되, 비거주자는 9억 원으로 낮춰 부담을 높이는 것이었다. 자기 집을 빌려주고 다른 곳에 세를 산다면 1주택자라도 '갭투자' 등 부동산 투기의 소지가 있는 만큼 세금을 더 물리자는 게 이번 개편안의 기본 전제였다.같은 날 청와대에서 세제개편을 총괄한 김용범 대통령 정책실장의 사표가 수리됐다. 그 이틀 전에는 세제 개편안을 만든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과 부동산 정책 책임자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이 개각으로 교체됐다. 최근 정부 지지율 추락의 최대 원인으로 꼽히는 부동산 문제, 특히 세제 개편안 논란이 '경제 투톱'을 비롯한 장관급 이상 고위관료 세 명의 계급장을 뗀 셈이다.세제 개편안이 8월 초 나왔을 때 부동산, 세제 전문가들의 공통된 반응은 "정말 추진하냐"는 거였다. 갭투자가 뒤섞여 있다고 하지만, 달랑 집 한 채가 전 재산인 이들에게 페널티를 물리는 세제를 진짜 추진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던 거다. 20년도 안 돼 '원본 자산'을 바닥 나게 만들 정도로 다주택자 종부세율을 높이고, 양도소득세 거주요건을 만든 문재인 정부도 시도한 적 없는 게 비거주 1주택 중과세다.취학, 이직, 부모봉양 등 정부가 정한 예외사유 범주에 속하지 않는 비거주 1주택자들의 개인적 사정들이 추가로 나올 때마다 국민의 반응은 싸늘해졌다. 손자녀를 돌보려고 집을 빌려주고 자녀 집 주변 전세를 얻은 조부모, 반대로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기려고 부모 집 옆으로 이사한 이들이 하소연한다. 학교폭력, 이혼소송 등 드러내기 싫은 이유로 집을 놔두고 세 사는 이들은 "내밀한 집안 사정을 세금 때문에 정부에 보고해야 하냐"며 분통을 터뜨렸다.성공한 정책은 공치사하는 이들이 많아서, 실패한 정책은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어서 특정 정부 정책의 '원작자'를 가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1주택자 세금 중과'는 예외다. 올해 1월 이재명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자기가 살지도 않으면서 투기용으로 투자용으로 가지고, 오랫동안 가지고 있다고 왜 세금 깎아줍니까. 동의 되세요?"라고 했다. 이어 2월 말에는 "정책 수단을 총동원해 주거용이 아닌 투자·투기용 1주택자도 보유보다 매각이 유리한 상황을 만들겠다"며 정책 방향을 더 구체화했다.'거주용'이 아닌 1주택에 세금을 더 물려야 한다는 이 대통령의 생각은 뿌리가 깊다. 경기도지사 시절인 2020년 7월 "실거주용 1주택은 통상적 수준의 부동산세 부과와 조세 감면으로 일부 불로소득을 허용하되, 그 외 비주거용 주택이나 법인의 비업무용 부동산 등은 불로소득을 대부분 회수해 투자나 투기가 불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글을 소셜미디어(SNS)에 올린 적이 있다. 당시 집값 폭등에 고민하던 문재인 정부에 제안한 부동산 해법이었다. 부동산 불로소득을 세금으로 환수해 전 국민에게 나눠주는 '기본소득 토지세' 구상과도 연결된다.오랜 지론을 대통령이 아이디어로 냈으니 청와대와 재정경제부, 국토부는 실행에 옮기기 위한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집주인들이 모두 실거주하면 전세·월세난이 가중될 수 있다는 지적이 시장에서 나왔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다주택과 임대사업을 압박하면 전·월세 부족으로 서민 주거불안이 심화된다는 주장은 집값 상승과 전·월세 부족의 주요 원인인 다주택, 주택임대사업을 비호하는 기적의 논리다. 전·월세 매물도 줄겠지만, 그만큼 무주택자, 즉 전·월세 수요도 줄어든다"고 했던 이 대통령 발언도 고려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 논리대로라면 비거주 1주택에 대한 세금 중과도 주택 수급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집주인이 자기 집으로 복귀하면 세 살던 집 한 채가 비고, 그 집에 다른 세입자가 들어가 살면 계산이 딱 맞는다. 하지만 현실에선 대통령이 비판한 '기적의 논리'가 시장을 움직이고 있다. 전·월세 난이 깊어지면서 지난달 서울 아파트 평균 전세가는 7억1178만 원으로 전달보다 720만 원 올랐다. 강북의 아파트 평균 월세도 처음 150만 원을 넘어섰다. 신혼부부, 분가한 청년 등 전·월세 수요는 계속 추가되는데, 들어가 살만한 주택은 충분히 공급되지 않아서다.이번에 정부가 비거주 1주택자 종부세 기본공제를 3억 원 높였지만, 실거주 1주택자의 14억 원과는 차이가 있다. 보유 기간보다 거주 기간 중심으로 양도세 장기보유특별공제를 개편하는 방안도 그대로여서 '거주·비거주 차등과세'라는 세제개편의 원칙이 철회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다만 국정 지지율 추락 속에서 핵심 참모와 내각 구성원을 내보낸 이 대통령의 정책에 대한 태도는 사뭇 달라졌다.수정된 개편안을 국회로 넘기면서 이 대통령은 "정부안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고 완벽할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역대 대통령들에 비해 정책 디테일에 유난히 강한 이 대통령도 비거주 1주택 중과세 아이디어를 내놓을 때 이 사안이 '거주·이전의 자유' 논란으로까지 번질 거라곤 미처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국회가 전례 없는 비거주 1주택 중과세 세제개편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세심히 살펴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이유다.
[시대광장/채인택]여의도 모욕정치를 보면 떠오르는 두 사람
여당 대표가 취임 첫날부터 '불량학생 조희대씨'라는 모욕적 언사를 내뱉고, 야당 대표는 '재명아 봤지'라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에 나서는 등 서로 헌법기관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포기한 듯한 '능멸의 정치'를 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9월 1일 개원식을 열고 100일간의 일정에 들어가는 2026년 정기국회는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여야 격돌이 전망된다. 역대 최대 규모로 예상되는 내년도 예산안은 물론 부동산 공급 정책, 세제 개편안, 사법 개혁, 3대 메가프로젝트 지원 법안 등 여야 간 견해차가 큰 쟁점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더불어민주당은 주요 국정과제 '입법'에, 국민의힘은 정부·여당의 정책과 '입법 견제'에 방점을 두고 있어 서로 막말과 모욕을 주고받으며 '불타는 여의도'를 연출할까 우려된다. 도저히 서로 타협이 불가능해 보이는 대치 상황에서 역사적 거인들은 어떻게 행동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도도한 시대의 물줄기를 돌렸을까? 대표적인 인물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1882~1945년, 1933~1945년 재임)이다.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단호한 지도자로 통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가하자 다음날 의회 연설에서 "영원히 치욕으로 기억될 날"이라며 의회에 전쟁 선포를 요청해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 것으로만 알려졌다. 하지만 호주의 역사학자 마거릿 맥밀런의 저서『개인은 역사를 바꿀 수 있는가』에 따르면 미국은 1937년 초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무려 95%가 '자국이 어떤 전쟁에도 관여해선 안 된다'고 응답했을 정도로 압도적인 고립주의 성향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의회의 통제로 1935년의 한 해 예산 811억 달러 중 국방비는 전체의 1.36%도 안 되는 11억 달러에 불과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의회와 국민을 설득해 인기 없는 전쟁에 참전하도록 이끌 수 있었을까. 멋진 연설 몇 차례 했다고 의회와 국민이 순순히 따라주었을까?맥밀런은 그런 상황에서 루스벨트가 2차대전에서 파시즘과 나치즘, 그리고 군국주의를 격멸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고립주의를 선호하는 의회와 국민을 상대로 끈기 있게 설득 작업을 펼친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루스벨트는 의회와 국민에게 일본 제국주의와 독일 나치즘의 위험성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설명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몇 년간 계속된 결과 1939년이 되자 여론이 나치 위협을 받는 영국·프랑스·폴란드에 대한 지원에 찬성하는 쪽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의회와 국민이 일본과의 즉각 참전에 찬성한 건 이런 오랜 '설득작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루스벨트의 위대한 업적 뒤에는 소통·설득·통솔의 리더십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의미다. 역사에 대한 비전과 신념이 있었기에 끈기 있게 기다리며 반대파를 설득해 함께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지도자들에게 절실한 덕목이다. 어떤 새도 한쪽 날개로는 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목할 인물이 19세기 프로이센의 총리로 1871년 독일 통일을 이룬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다. '현대 독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를 우리는 부국강병을 강조한 교과서의 영향인지 흔히 '철혈 재상'이라고만 기억되는 경향이 있다. 무력 사용과 강경 보수 입장에만 초점을 맞추기 일쑤였다. 하지만 맥밀런은 이를 '비스마르크의 일면만 바라보는 바람에 생긴 오해'라고 지적한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국제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꼭 필요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활용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오래전 만난 적이 있는 영국 출신의 미국 예일대 역사학 교수인 폴 케네디도 같은 입장이었다. 1500년 이래 글로벌 강대국들의 부상·몰락이 경제력·군사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강대국의 흥망』으로 명성을 얻은 국제관계와 강대국 세계전략 분야의 석학이다. 그는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총리이던 1866년에 내린 결정에 주목했다. 당시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놓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쟁을 벌여 지금의 체코 남부인 쾨니히그레츠(체코어로 자도바)에서 압승을 거뒀다. 승리에 도취한 프로이센군 지휘관들은 곧바로 빈을 점령해 "황제의 수염을 뽑아버리자"고 외쳤다. 당시 프로이센의 무력으로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냉철했다 그는 "오스트리아인에게 더 이상의 모욕을 주면 안 된다. 미래에 그들이 중립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당시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빌헬름 2세 왕자를 설득해 빈 점령과 오스트리아 모욕을 막았다. 훗날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될 경우 오스트리아가 적어도 중립을 지키도록 패자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는 이를 비스마르크의 '현실정치(Realpolitik)'로 부른다. 이념이나 도덕·감정 대신 오직 국익과 권력관계만을 정치와 외교의 기준으로 삼은 철저한 실용주의 정책을 뜻한다. 1866년 사례에서 프로이센을 여당에, 오스트리아를 야당에 대입하면 오늘날 한국 정치의 현실과 많이 닮았다.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펼친 현실정치는 큰 보상으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의 중립으로 배후 안전을 확보한 프로이센은 부국강병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4년 뒤인 1870~71년 숙적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 황제의 항복을 받았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는 프랑스 수도 파리를 포위한 채 인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을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비스마르크는 1866년 힘을 앞세운 감정적인 모욕이나 승전 퍼레이드가 아닌 먼 날의 큰 목표인 독일 통일을 내다본 것이다. 상대를 능멸하지 않고 존중한 것은 힘이 없거나 소심한 게 아니라 깊은 사유와 세상을 읽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 지도자도 지금 당장 눈앞이 아니라 앞으로 몇 년 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지혜를 갖고 모욕과 막말을 버리고 존중의 정치를 펼칠 것으로 기대해본다.
[시대광장/김준술]제복을 입을 자격
'오원춘 사건'부터 복기해보자. 국민의 구조 요청을 접한 경찰의 부실 대응을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었다. 지난 2012년 4월, 경기지방경찰청 112 신고센터에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오원춘에게 납치돼 성폭행 위기에 처한 A씨 신고였다. 그러나 경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시간을 날려 보냈다. A씨는 끝내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특히 경찰은 A씨와 통화한 시간을 축소해 허위 발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은폐 논란과 함께 거센 국민적 공분이 일었다.파장은 상당했다. 조현오 경찰청장과 서천호 경기지방경찰청장이 동시에 옷을 벗었다. 사면초가의 경찰은 시스템 개선에 착수했다. 112 센터에서 신고 전화를 받지 못하면, 경찰이 신고자에게 전화하는 '콜백 제도'가 이때 생겼다. 또 신고자 휴대전화의 위치 파악도 쉽게 하도록 만들었다. 경찰은 장비와 기술로 '시스템'을 고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그리고 14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얼마나 안전해졌을까. 제주도에서 숨진 채 발견된 장미란씨 사건은 여러모로 오원춘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먼저 연인과 가족이 보낸 구조 신호에 경찰이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다는데서 그렇다. 또 경찰은 "장씨와 연락이 닿았다"며 사건을 마무리했지만 거짓이었다. 14년이 지나면서 국가의 '치안 시스템'은 더욱 견고해졌다. 장씨 실종 당시 한림읍 일대에는 CCTV도 118대나 있었다. 그러나 경찰의 허무한 사건 종결로 무용지물이 됐다.경찰은 장씨가 범죄 피해를 당했을 가능성은 작다고 본다. 하지만 국민의 안전에 국가가 응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경찰은 이번에도 '시스템'을 손대려 한다. 실종 사건을 종결할 때 형사과장이 서면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즉각 시행키로 했다. 그러나 결재 칸을 하나 늘리는 것으론 해법이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보다 '사람'이다. 전국 13만명 경찰이 현장에서 사명감을 발휘하지 않으면 기술과 장비, 절차는 말짱 도루묵이다. 전례가 이를 입증한다. 앞서 콜백 제도를 도입한 뒤 3년이 지나 감사원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조사했다. 회신 비율은 고작 8%였다.결국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해도 그걸 움직이는 사람이 관건이다. 사실 경찰에서 사람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93년 영화 '투캅스'는 뇌물 받는 경찰 이야기를 풍자해 인기였다. 당시 경찰을 바라보는 사회상을 반영했다. 보이는 부패는 처벌하면 됐다. 그 뒤로 경찰은 많이 변했다. 과학수사 시스템을 도입했고, 업무 전문성도 높였다. 이제 눈으로 보이는 직무 역량이 떨어진다면 재교육이나 인사 조치를 하면 된다.그러나 '책임감이 부족해서, 귀찮아서, 관행이어서' 국민 신고에 제대로 응하지 않는 경찰이 존재한다면 해법도 달라야 한다. 외부에서 쉽사리 알아챌 수 없기 때문이다. 짧은 임용 절차에서는 책임감, 판단력, 직업적 소명의식을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이런 자질이 5년, 10년 뒤 어떻게 바뀔지도 모른다. 상시적인 평가와 관리, 처방이 따라야 하는 이유다.참고로 미국은 80년대부터 문제 징후 경찰관을 미리 발견해 관리하는 '조기경보체계(EWS)'를 확대해 왔다. 예컨대 동일한 경찰관에게 민원이 3번 제기되면 경고 신호로 판단해 재교육하고 업무 모니터링에 나서는 프로그램도 있다. '누군가 경찰을 지켜보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준다. 자연스럽게 책임감도 높인다. 국내 경찰은 5년마다 직무적성 검사를 해왔는데 직무 스트레스 관리에 무게를 둔 측면이 있다. 최근엔 이를 '정신건강 종합검진'으로 재편했다. 경찰청에 확인해보니 EWS처럼 반복적 문제 행위, 직무 태도 등을 데이터로 조기 포착해 관리하고 재교육이나 업무조정으로 연결하는 별도의 체계는 없다고 한다.나아가 일각에선 10월 시행되는 검찰의 보완수사권 폐지와 연계해 제주도 사건을 바라본다. 경찰의 견제 장치가 약화되면서 '사건 암장'이 잇따를 것이란 우려다. 물론 보완수사권이 존재하면 경찰도 검사를 의식할 수 있다. 다만 검사가 모든 사건을 감시하진 못한다. 무엇보다 보완수사권에 프레임을 맞추면 해법의 방향도 틀어진다. '경찰 내부'로부터 변화를 끌어낼 수 없다. 경찰 자질과 역량을 놓고 논란이 확산되자 이재명 대통령은 "경찰 개혁 기구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하려면 제대로 나서야 한다. 한국 실정에 맞는 상시 자격 관리제를 마련하는 작업을 논의해볼 만하다.국가는 경제력, 국방력, 외교력만으로 강해지는 건 아니다. 국민 한명이 사라지고 위험에 처했을 때, 끝까지 찾아내고 적시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13만명에게 경찰 제복을 입히는 것은 쉽지만, 13만벌 제복 모두에 책임감을 얹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경찰 개혁 기구'가 그 임무를 맡아야 한다. 다만 상시 자격 관리가 경찰관 처벌이나 감시를 위한 것이어선 안된다. 미래의 문제 가능성을 사전에 파악해 경찰관이 제 역할을 하도록 돕는다는 목적이 더 크다. 장미란씨 제주도 숙소와 사망 장소는 도보 5분 거리였다. 그 짧은 거리를 국가가 다시 찾아가는 데 104일이 걸렸다. 그 시간을 줄이는 것이 국가의 책무다.
[시대광장/박창억]'좋은 헌법'이 '좋은 정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논란의 발단은 3주 전 조정식 국회의장의 기자간담회였다. 조 의장은 "현직 대통령의 연임은 국민이 선택할 문제"라고 말했다. 당장 현직 대통령의 연임을 가능케 하는 개헌의 여지를 남긴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으며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조 의장은 '오해'라며 진화에 나섰다. 실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정치 경험이 많은 6선의 국회의장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 전형적인 여론 떠보기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그리고 얼마 뒤 이재명 대통령이 국민의힘 의원들과 골프 회동을 가진 사실이 알려졌고,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개헌론자였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인 김태호 의원은 이 대통령이 '임기단축'까지 언급하며 분권형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한 사실을 공개했다. 이에 청와대 관계자가 "국회 권한이 강화된 4년 중임 대통령제가 수용성이 가장 높다"고 밝힌 데 이어 이 대통령이 직접 입장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 대통령은 SNS를 통해 "대통령 임기는 4년 중임 또는 연임제로 변경해 중간평가를 통한 책임정치가 가능하도록 하자는 게 공약이자 일관된 입장"이라며 필요하다면 이를 위해 임기를 단축할 수도 있다고 했다.이 대통령이 개헌론을 제기한 일련의 과정과 형식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대통령은 더구나 후보 시절 권력구조 개편을 강력하게 피력했던 것과 달리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이 문제를 회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다 갑자기 임기단축이라는 배수진까지 치고 개헌 카드를 꺼내드니 그 배경을 놓고 여러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 대통령은 "이원집정제나 내각제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국민 여론에 비춰 가능하지도 않다"며 다른 권력구조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고 중임할 수 없으며(70조), 임기 연장 또는 중임 변경 개헌은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게는 효력이 없다(128조)'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이 대통령이 만일 개헌이 되더라도 연임 내지 중임 의사가 없다는 식의 딱 부러진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임기 단축'은 얼핏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는 결단으로 보이지만 만약 개헌을 통해 중임이나 연임이 가능해지고 현직 대통령에게도 이를 허용하는 경우라면 현직만큼 유리한 사람이 없다.개헌이 성사되려면 우선 단일안에 의견이 모아져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뜨거운 열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개헌에 주저하는 정치세력을 압박하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1987년 개헌만 해도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고, 장기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공감대가 있었다. 현재 모든 여론조사에서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지만, 이는 단순 선호조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추동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과거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의 개헌 제안이 모두 흐지부지되었던 결정적 이유는 국민적 공감대가 결여됐기 때문이다. 현재의 개헌 논의는 여권내에서도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고, 야당은 "연임 개헌을 통한 독재 시도"(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결국 이번에도 개헌론이 탄력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개헌 논의가 전혀 진척이 되지 않는데도 '연임 개헌' 문제에 대해 직접 입장을 내놓지 않는 이 대통령의 속내가 더욱 궁금하다. 1987년 현행 헌법이 탄생한 이후 불행한 대통령을 양산한 것은 제왕적 대통령 권력에 기인한다는 게 개헌론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선 안될 게 있다.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4년 중임 대통령제, 분권형 대통령제도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4년 중임제의 경우 현직 대통령이 당선되는 순간부터 재선을 위해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할 수 있다는 점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해서는 국민이 대통령을, 의회가 총리를 선출하면 대통령과 총리 사이 권력 다툼으로 아무것도 안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아무리 훌륭한 헌법도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아르헨티나의 1853년 헌법, 필리핀의 1935년 헌법은 미국 헌법을 베끼다시피 했다. 하지만 두 나라는 각각 군사 쿠데타와 포퓰리즘, 장기독재로 민주주의를 꽃피우지 못했다. 40년 전인 1987년 10월 12일 이재형 당시 국회의장은 개헌안 국회 통과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헌이 곧 민주화는 아니다. '좋은 헌법'에 정치인의 슬기, 국민적 양식과 협력이 플러스 되어야만 그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금과옥조로 삼을 말이다.
[시대광장/이상복]'억까'에 취약한 사회
팔짱 하나로 한 사람의 인성을 재단한다. 사진 한 장, 영상 몇 초, 앞뒤 잘린 말 한마디가 인격 전체를 규정한다. 최근 아이돌그룹 아이브의 장원영이 겪은 태도 논란이 대표적이다. 놀이동산에서 팔짱을 낀 채 설명을 듣는 사진이 퍼지자 "거만하다" "성의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단편적인 장면만으로는 당시 맥락을 알 수 없다. 공항에서 여권을 한 손으로 받았다는 비판 역시 다른 각도의 영상이 공개되며 오해를 벗었다. 행사장 지각 논란도 주최 측 해명으로 사실관계가 뒤집혔다.비슷한 일은 끊이지 않는다. 과거 연인의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썼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가수 아이유의 사례처럼, 유명인의 행동에는 쉽게 과잉 의미가 덧붙는다. 사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왜 하필 저랬을까"라는 추정이 시작되고, 추정은 곧 의도에 대한 단정으로 번진다. 의도가 있다고 믿는 순간 비난은 스스로 정당성을 얻는다.이른바 '억까(억지로 까기)'의 본질은 비판이 아니다. 여러 가능성 중 가장 악의적인 해석을 골라 상대에게 덧씌우는 행위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연예인을 향한 악플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연예계 논란과 정치·사회적 갈등은 겉보기에 다르지만 작동 방식은 닮았다. 사실보다 해석이 앞서고, 해석보다 비난이 빠르다. 그럴 수 있다는 신중함은 주목받지 못하지만,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단언은 감정을 자극하고 공유를 부른다. 한 번 찍힌 낙인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해명은 느리고 낙인은 빠르다.디지털 공간에서는 언론도 이 속도 경쟁에 가세한다. 온라인에서 논란이 일면 일부 매체는 사실 확인 대신 '논란 확산' '누리꾼 갑론을박' 같은 제목을 달아 기사를 쏟아낸다. 이를 다른 매체들이 받아쓰면서 기사는 순식간에 불어난다. 몇몇 댓글에 불과했던 반응이 여론으로 둔갑하고 그 여론은 다시 기삿거리가 된다. 확인되지 않은 해석이 기사라는 외피를 입는 순간 파급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갈등을 조직적으로 증폭시키는 움직임은 이미 현실의 위협이다. 최근 KAIST 연구진은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작성된 네이버 뉴스 댓글 1억1천만여 건을 분석해 외국 연계 활동이 의심되는 계정 약 2만4천 개를 식별했다. 이들은 특정 진영을 일관되게 지지하기보다, 선거철을 기점으로 진영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며 갈등 자체를 키웠다.유튜브에서도 우려스러운 움직임이 포착됐다. 구글은 올해 2분기 조직적인 여론 조작에 관여한 것으로 판단한 정치 관련 유튜브 채널 449개를 차단했다. 특정 정치 세력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정부 비판 채널은 물론 정부 지지, 특정 정치인 지지 등 다양한 성격의 채널이 포함됐다.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누가 불씨를 던졌느냐만이 아니다. 왜 이런 메시지가 이토록 쉽게 퍼지고 소비되는가다. 큰불로 번지려면 마른 장작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 분노와 불신, 적대감이라는 장작이 너무 높게 쌓여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돌아볼 때다.이런 구조적 폐해가 가장 거칠게 드러나는 곳은 정치권이다. '쇼츠 정치'가 확산하면서 맥락은 증발하고 자극적인 짧은 장면이 사실을 대체한다. 말 한마디를 잘라내 막말로 규정하고, 행동 하나를 근거로 배신·위장·내부총질의 낙인을 찍는다. 정책의 차이는 곧장 인신공격으로 이어진다. 같은 진영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생각이 다르면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의도부터 의심하는 풍경이 일상이 됐다.생각이 다르면 논쟁하면 된다. 주장이 틀렸다면 근거를 들어 반박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주장이 맞는가"라는 질문이 "왜 저런 주장을 하는가" "배후에 무슨 의도가 있는가"로 변질되는 순간 토론은 끝난다. 논리를 검토하는 대신 속내를 심문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위험한 것은 의견의 차이가 아니라, 상대에게 악의를 덧씌워 대화의 자격 자체를 박탈하는 태도다.그렇다고 표현 규제나 댓글 통제가 해법이 될 순 없다. 입을 막는 방식은 더 큰 부작용을 낳는다. 필요한 것은 악의적 해석과 음모론이 손쉽게 여론으로 둔갑하지 못하도록 공론장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언론은 사실과 반응을 엄격히 분리해 보도해야 한다. 플랫폼은 정보의 확산 경로와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정치권은 미확인 의혹을 지지층 결집 수단으로 악용하는 관행을 끊어내야 한다. 이용자 역시 자신이 믿고 싶은 해석과 확인된 팩트를 분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개인의 도덕성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악의적 해석이 가장 빨리 퍼지고 가장 큰 보상을 받는 수익 구조 자체를 손봐야 한다. 조회수와 정치적 호응을 얻기 위해 자극을 좇는 유인을 줄여야 한다. 철저히 사실관계를 확인한 콘텐츠가 살아남고, 끈질기게 맥락을 설명하는 저널리즘이 묻히지 않는 미디어 생태계가 필요하다.사실보다 추측이, 논쟁보다 낙인이, 설명보다 비난이 먼저 퍼지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자유롭고 안전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서로 생각이 다른 이들이 부딪치면서도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누가 더 크게 분노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사실이냐가 여론을 이끄는 사회. 그것이 '억까'와 음모론에 흔들리지 않는 최소한의 면역력이다.
[시대광장/정용관]'백지위임장' 받은 듯한 권력의 착각
요즘 이재명 정권을 바라보는 공기가 달라졌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집권 1년 차 때는 대선에서 그를 찍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도 "생각보다 일은 잘한다"는 얘기가 적지 않았다. '실용적'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첫 양자 정상외교 방문국으로 일본을 택하고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보수층 일각의 우려도 누그러뜨렸다. 때마침 반도체 훈풍에 코스피 활황까지 겹치며 "운도 좋다"는 말이 나왔다.자신의 '공소 취소' 문제에만 집착하지 않으면 별 탈 없이 집권 2년 차도 순항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많았지만 역시 정치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국정 지지율이 40%대 초반까지 내려왔다는 수치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지방선거 이후 중도층을 중심으로 부정 평가가 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징벌적 난수표' 비판을 받는 부동산 세제 개편, 매일 천만 개미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롤러코스터 장세 등 여러 이유가 거론된다. 하지만 요즘 필자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보다 좀 더 본질적인 문제다. 이 정권은 권력의 정당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말하자면 '권력의 착각'이다."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 2항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 첫날부터 '국민주권 정부'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주권재민을 내세웠다. 반헌법적 비상계엄의 망동을 딛고 출범한 정권인 만큼 국민주권이라는 헌법적 명제를 강조한 것은 타당했다고 본다.그러나 국민주권을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할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과 국민이 선출된 권력에 주권을 통째로 넘겼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요컨대 대통령은 헌법이 정한 '제한적 권한'을 선거를 통해 일정 기간 맡았을 뿐이다. 12·3 비상계엄은 이 원리를 망각한 극단적 사례였다. 그런데 이재명 정권 2년 차 들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일이 부쩍 늘고 있다. 물론 국체(國體)를 뒤흔든 계엄 사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정권 역시 권력의 위임(mandate)을 지나치게 넓게 해석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는 얘기다.선거 승리를 자신의 정치적 선택 전반에 대한 국민의 '사전 동의'처럼 받아들이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 그러면 국정 논리는 간단해진다. '국민이 이것을 원한다→우리가 국민의 뜻을 대표한다→우리를 반대하는 것은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뜻'을 누가 정할 것인가. 검찰개혁에는 찬성하지만 보완수사권 폐지에는 반대할 수 있고, 군 개혁에는 동의하면서 사관학교 통합에는 반대할 수 있다. 선거 결과 하나로 그 수많은 생각을 하나의 '국민의 뜻'으로 묶을 수는 없다.나아가 5년 임기의 정권이 수십 년간 형성되고 수십 년 이상 영향을 미치게 될 국가 시스템의 근간(根幹)을 어디까지 바꿀 '위임 권한'을 갖는지는 깊이 따져볼 문제다.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통치의 백지위임장을 얻은 것은 아니다. 국가 근간을 바꾸는 정책 목표는 대선 당일 투표함 숫자의 많고 적음을 통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국회와 사회의 공론장에서 충분히 토론하고 논쟁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승자가 모든 걸 갖는다'고 하지만 민주공화국의 국정 원리는 아니다.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필요하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손에 쥔 일부 정치 검찰이 권한을 남용한 것도 사실이다. 누린 만큼 대가를 치르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검찰 권력을 통제하라'는 요구와 수십 년간 작동해온 형사사법체계를 단기간에 뜯어고칠 권한까지 위임했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이건 단순히 보완수사권을 폐지하느냐 마느냐의 효율성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70여년 형사사법체계의 근간을 바꾸는 법안을 놓고 "저는 안 읽어봐서…"라며 짐짓 딴청을 부렸다. 내 책임은 아니라는 건가.육·해·공군 사관학교 통합도 같은 맥락으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은 "쿠데타는 다 육사 출신이…"라고 했다. 육사에 원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 몇 차례의 군사쿠데타 주역들이 육사 출신이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3군 사관학교를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정책적 결론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어느 게 더 효율적이고 미래 전장에 맞는 시스템인지 따져볼 수는 있다. 그러나 특정 정권의 역사적 인식에 따라 결단의 문제로 밀어붙인다면 그건 차원이 다른 얘기가 된다.'전임 정부가 잘못했다'와 '그러므로 우리는 원하는 만큼 바꿀 수 있다' 사이에는 위험한 비약이 있다. 권력의 착각은 바로 이 지점과 닿아 있다. 물론 질적인 차이가 있다. 전임 정부는 그게 비상계엄이라는 3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권력의 폭주'로 이어졌다면, 현 정권은 암세포를 도려내는 식의 해법이 아니라 아예 개별 시스템의 본질을 건드리는 '권력의 과신'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필자는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국정의 진폭'이 너무 크다는 데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한 정권이 자신의 철학과 역사 인식에 따라 국가 시스템을 크게 바꾸면 다음 정권은 그것을 다시 반대 방향으로 되돌리려 한다. 전임 정권이 한 일을 뒤집는 것이 개혁이 되고, 그 개혁을 다시 뒤집는 것이 또 다른 개혁이 되는 악순환이다. 정권에 따라 국정의 시계추가 너무 크게 흔들리니 안정성과 지속성이 떨어지고 아예 어지러울 정도다. 국력이 세계 6, 7위권이라는 나라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렇게 국정 기조나 정책이 확확 바뀌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중간 지대는 갈수록 설 자리가 좁아지고 두 개의 정치 행성이 따로 돌고 있는 듯한 형국 아닌가.이 대통령은 '중도보수'까지 품는 구조적 다수 구상을 내비쳐왔다. (국민의힘도 '중도진보'까지 품는 구조적 다수 전략으로 전환하면 어떨까 싶다.) 그러나 요즘 모습을 보면 말 따로 행동 따로인 것 같다. 딜레마인가. 어느 학계 원로의 말로 글을 맺고 싶다. "정치나 국정 영역에서 절대적 길은 없다. 상대적 가치가 있을 뿐이다."
[시대광장/박중현]성룡과 젠슨 황이 자꾸 겹쳐 보이는 이유
"재키 찬(성룡)이요. 나랑 똑같이 생겼거든요. 다만 키보드에 타이핑하는 '스턴트 연기'는 내가 직접 할 생각이에요." 실리콘밸리 발상지인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 'HP(휴렛패커드) 창고'에서 촬영된 온라인 토크쇼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한 말이다. 2023년 말 방영된 이 쇼에서 젠슨 황은 "당신 일대기를 다룬 자서전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어느 배우가 당신 역을 맡으면 좋겠나"라는 질문에 위트있게 답했다. 참고로 1963년 태어난 젠슨 황은 1954년생 성룡보다 9살 젊다.중국계이자, 둥글둥글한 인상에 주먹코란 점 말고도 둘은 비슷한 점이 많다. 1970, 80년대 홍콩 영화 전성기에 코믹무협으로 아시아에서 성가를 높인 성룡은 1990년대 후반 헐리우드에 진출해 월드스타가 됐다. 대만 출신 이민자 2세 젠슨 황은 비디오게임용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인공지능(AI)에 적용해 세계 AI 가속기 시장을 독점한 AI 시대의 스타다. 둘 다 한국과 인연도 깊다. 성룡은 홍콩 무협영화를 한국에서 많이 찍던 1970년대 한국에 산 적이 있어 한국말을 곧잘 한다. 엔비디아가 중소기업이던 시절 젠슨 황은 'PC게임 종주국' 한국의 게이머들에게 GPU를 팔기 위해 용산 전자상가에 자주 왔다고 한다.성룡의 공식 방한은 '폴리스 스토리 6' 홍보차 온 2014년이 마지막이었지만 젠슨 황의 공식 방한은 작년에 시작됐다. 지난해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에 참석한 그는 이재명 대통령, 4대 그룹 총수와 만났다. 당시 최신 AI 가속기로 공급이 달리던 '블랙웰' 26만 장을 한국에 우선 공급하는 내용의 '한국 AI 이니셔티브'도 발표했다. 판매액만 20조 원이 넘는 규모였다. 검정 가죽재킷을 걸치고 서울 삼성동 '깐부치킨'에 등장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치맥회동을 한 젠슨 황에 한국인들은 환호했다. 엔비디아에 직접 투자한 '서학개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엔비디아에 공급하는 SK하이닉스,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한 '동학개미'들에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관심거리가 됐다. 올해 6월 초 방한 때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과 홍대 앞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굽고 소줏잔을 기울이자 AI 팩토리, 피지컬 AI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고조됐다. 지난달 이 대통령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한 'AI서밋'의 핵심인물도 젠슨 황이었다. 아쉽게도 한국인의 '젠슨 황 환호 지수'와 코스피는 따로 움직였다. 작년 11월 초 APEC 정상회의 폐막 다음 거래일에 반짝 상승한 주가는 이후 이틀간 5% 넘게 하락했다. 2차 방한한 올해 6월 5일 코스피는 5% 넘게 내렸고, 한국을 떠난 8일엔 8% 넘게 빠졌다. 지난달 24일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서 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와 한국 기업들의 9500억 달러(약 1350조 원) 투자협력 계획이 발표됐지만, 다음날 코스피는 11% 가까이 폭락하고 장중 한때 6,000선이 무너졌다. 매번 다른 돌발 악재가 있었다곤 해도 한국 주가에 미친 젠슨 황 효과는 신통치 않았던 셈이다.요즘 글로벌 AI 시장에서 펼쳐지는 숨 가쁜 기업들의 움직임을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오픈AI, 앤스로픽, 구글, 아마존, 메타(페이스북) 등 AI의 미래 패권을 다투는 기업들은 지금 천문학적 투자 비용을 대느라 허덕이는 중이다. 한두 곳만 살아남아 이익을 모두 챙기는 '승자독식 게임'이라 중단하기도 어렵다. 힘에 부쳐 먼저 기권하는 기업이 나오기 시작하면 엔비디아 AI 가속기 수요는 급감할 가능성이 있다.'△△ 기업 돈줄이 말라 간다'는 월가 리포트 한 장에도 엔비디아 주가가 급락하고,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메모리반도체 주가 역시 덩달아 춤춘다. 비싼 엔비디아 GPU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빅테크들은 저렴한 자체개발 칩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AI기업들이 엔비디아 칩을 계속 살 수 있도록 돈을 빌려주거나, 보증을 서주는 미심쩍은 '순환금융'에 엔비디아는 더 깊이 말려들고 있다. 금값이 된 메모리반도체 구입비용을 아끼려고 HBM을 절반만 쓰는 기술도 개발 중이라고 한다.당연하게도, 젠슨 황은 한국 투자자, 반도체 기업에 조건 없이 혜택만 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다. 성룡이 과거 한국을 자주 찾았던 이유가 한국인에 대한 애정 때문만이 아니었던 거나 마찬가지다. 엔비디아 칩을 계속 사주도록 고객을 관리하고, 세계 최고 경쟁력의 메모리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이 그가 한국에서 달성해야 할 목표일 것이다. 아직 2년 이상 뒤처졌지만, 빠르게 한국을 추격 중인 중국 창신메모리(CXMT)가 한국과 비슷한 제품을 반값에 팔 때에도 젠슨 황의 태도가 지금과 같길 기대하는 건 순진한 일이다. 미중 냉전의 틈새를 뚫고 중국 AI 시장에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그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을 향한 젠슨 황의 많은 약속과 애정 어린 메시지들을 이젠 좀 냉정하게 되짚어볼 때가 됐다.
[시대광장/채인택]메가 프로젝트, 보안·방첩에도 전격전이 필요하다
청와대에선 10일 대통령이 주재하는 '메가프로젝트 민관합동 제2차 점검 회의'가 열려 추진 상황을 점검했다. 인공지능(AI) 중심의 산업 대전환을 목표로 민간협력을 통해 반도체,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에 총 1500조 원 규모의 자금을 투입하는 초대형 국가성장 전략 사업인 '3대 메가프로젝트'가 이처럼 속도를 내고 있다.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부지·인재·전력·용수·자금·협력사 등 핵심 요소를 당연히 충족해야 한다. 이러한 양지의 기반 시설만큼 꼭 필요한 '음지의 인프라'가 바로 재산과 안전을 지켜줄 보안과 방첩이다. 보안은 위험·위협·침해, 그리고 비밀 유출 등에 대응하는 모든 보호 활동·조치다. 방첩(counter-intelligence)은 국익을 침해하는 적대 세력(위장우호세력 포함)이나 외국 정보기관·공공기관·학교·기업·개인의 정보 탈취·수집, 파괴 공작 등을 미리 차단·대응하는 안보 활동이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메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려면 보안과 방첩을 위한 비상한 대응이 필수적이다. 이제 한국에서 메가프로젝트를 둘러싼 음지의 경제 전쟁이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식재산권 탈취를 노리는 산업스파이는 물론, 해킹·크래킹에 스파이웨어 침투 등으로 정보를 무단 절취하고 인질화·무력화·마비화를 시도하는 사이버 공격도 등장할 것이다. 메가프로젝트 건설과 가동을 뒷받침하는 원전·SMR·송전선·용수·인력·자재·원료에 대한 정보 입수와 크래킹을 시도하는 배후 스파이전도 당연히 벌어질 것이다. 관련 시설을 대상으로 유사시 발사체·드론 공격, 특수부대 침투, 사보타주 등 테러활동으로 무력화를 시도하는 안보 공작도 있을 수 있다.가장 주목할 대상이 한국의 주요 교역 파트너인 중국이다. 안타깝게도 중국은 국가보안법·데이터보안법·반간첩법 등 3법으로 외국인과 진출 기업의 정보 수집과 해외 전송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 국내외 중국계의 친중 정보활동 협조를 의무화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7월 1일 시행에 들어간 민족단결법은 조선족·티베트족·위구르족 등 55개 소수민족 사이에 '공유된' 민족 정체성을 만들고 해외에서 중국 분열 행위를 처벌하는 내용을 담았다. 민족에 상관없이 중국공산당에 충성을 요구하고, 당국의 요구대로 정보수집이나 보고 등을 하도록 압박하는 시스템이다. 물론 구체적 범죄 혐의 등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데도 특정 국적자라는 이유로 의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중국의 사법 체계를 감안하면 국내에 머무는 중국인이 이러한 보안·첩보 활동에 나설 엄두를 아예 내지 못하도록 예방적 오프라인·온라인 체크를 강화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주목할 점은 중국이 외국인에게 주로 적용하는 반간첩법이다. 이 법은 전통적인 국가기밀 유출뿐 아니라, 국가 안보·이익과 관련됐다고 당국이 임의로 해석할 수 있는 모든 일반 문건·데이터·자료의 수집·제공까지 간첩 행위로 처벌할 수 있다. 자의적 집행 우려가 크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이 때문에 상당수 서방 국가들은 공직자나 국익 관련 기밀 정보 소지자의 중국 본토와 홍콩·마카오 출입을 금한다. 입국은 물론 항공편 환승도 막는다. 중국 공안이나 정보기관이 인신을 구금하고 심문해 정보를 얻거나 노트북·스마트폰 등을 압류해 데이터를 빼낼 수 있는 모든 곳을 정보누출 위험 지역으로 간주해 출입을 막는 셈이다. 한국도 관련 공직자나 산업정보 취급자, 그리고 최소한 메가 프로젝트 종사자는 해당 지역 여행을 제한하는 내부 보안 규범이 필요하다.서방은 사람은 물론 물품의 중국 통과도 통제한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2010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의 방산 전시회에 참가한 뒤 한국으로 돌아오던 육군의 K21 장갑차 1대와 군용 차량이 홍콩 콰이청 화물터미널에서 현지 해관(세관)에 압류됐다가 무려 51일 만인 11월 12일 반환된 사건이 주는 교훈 때문이다. 의문은 2017년 중국 최대 국영 방산업체인 중국북방공업공사(NORINCO)가 VN17 궤도형 장갑차를 내놓으면서 어느 정도 풀렸다. 차체 형상, 포탑 실루엣, 무기 배치 구조, 승무원 구성 등이 K21과 흡사하다는 평가가 나오면서다. 이제는 미래를 주도할 반도체 관련 산업정보가 보안과 방첩 대상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이 지난달 27일 상하이의 중국 국유기업이 개발해 생산에 들어갔다고 보도한 액침식 심자외선(DUV) 노광장비가 시선을 끄는 이유다. DUV 노광장비는 반도체 웨이퍼에 극미세 회로를 새기는 핵심 장비다. 7나노급 이하의 초정밀 칩을 만들려면 세계 최대 반도체 노광장비 업체인 네덜란드 ASML의 최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중국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미국의 수출통제로 이를 도입하지 못한다. 대신 그보다 한등급 떨어지는 7~14나노급 칩을 생산하는 액침 DUV 노광장비를 활용할 뿐이다. 중국은 이처럼 미국 등 서방의 견제나 수출 통제 때문에 확보하지 못한 기술이나 장비를 '목이 졸리고 있다'는 의미의 '차보쯔(卡脖子)'로 표현한다. 중국은 차보쯔 입수를 위해서는 방법의 합법과 비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ASML은 중국 법인에 근무하던 전직 중국인 직원이 자사의 핵심 제조 기술 관련 기밀 데이터를 유출한 사건을 2023년 2월 공식 적발·공개했다. 당시 유출 데이터가 중국의 반도체 장비 개발 시도에 이용됐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중국은 이전에 수입한 ASML의 노광장비를 분해해 역설계를 시도하다 적발된 적도 있다. 산업스파이의 지식재산권 탈취를 막고 국익을 지키려면 보안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필수적이다. 최첨단 방식으로 인적·물적 보안을 고도화해야 한다. 토종 보안업체를 최대한 활용하되 전 세계 최고 수준의 보안 업체들에 열린 태도를 보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실 1500조 투자를 둘러싸고 치열한 정보전·방첩전·공작전은 이미 막이 올랐다. 익명의 협조자들이 벌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작이 이미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은 미군 군함이 우리 항구에 기항하면 금지된 드론을 주변에 띄우거나 망원카메라를 들고 접근해왔다. 이제 이런 행동을 메가프로젝트 공사 현장 주변에서도 그대로 할 것으로 보인다. 메가프로젝트 구역을 '보안지대'로 선포해 이러한 접근을 원천 봉쇄하는 대책이 절실하다. 정부는 메가프로젝트에서 속도전을 넘어 전격전을 요구한다. 메가프로젝트를 음지에서 지켜줄 보안·방첩을 위해 우방국 정부나 민간보안기업 등과 손잡고 관련 시스템 구축과 훈련에도 전격적 수준의 속도를 내야 한다. 지키지 않으면 뺏길 수 있다.
[시대광장/김준술]'모두의 증시'는 없다
여권의 경제통 인사를 만난 건 2025년 가을이었다. 증시가 꿈틀대기 시작한 무렵이다. 그는 윤곽 잡힌 정부의 경제 정책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귀에 꽂힌 건 바로 '머니 무브'였다. "부동산에 쏠린 돈을 증시로 끌어오겠다"고 했다. 역대 정권마다 뒷덜미를 잡은 게 부동산이다. '그걸 증시로 해결한다고?' 발상은 신선했다. 그 무렵 이억원 금융위원장을 접할 자리도 있었다. 그는 "첨단기업과 국민성장펀드로 돈을 흘려보내겠다"고 했다. 그걸 "생산적 금융"이라고 불렀다. 비생산적 부동산에서 증시로 자금 물꼬를 확 틀겠다는 구상이었다. 의지가 결연했다.그들의 얘기는 비장한 출사표처럼 들렸다. '정권이 작심했구나' 생각했다. 증시 띄우기에 전력투구하는 건 예상된 수순이었다. 마냥 쉽지만은 않은 싸움이라고 봤다. 지속적인 '주가 상승'이 전제돼야 돈이 옮겨온다. 하지만 이건 의지의 영역을 벗어난다. 아무튼 주가를 부양하는 정책들이 하나둘 선을 보였다. 마침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시작됐고, 코스피가 달아올랐다. 한마디로 '타이밍은 좋았다'.그리고 정부는 5월 말, 출범 1년을 맞아 '38대 국정성과'를 발표했다. '유능'이라는 제목 아래, 성과 1번은 '코스피 8000' 돌파였다. 헷갈렸다. '정부 부양책만으로 주가가 올랐었나?' 어쨌든 코스피는 6월 22일 9000포인트를 뚫을 때까지 파죽지세로 더 달렸다. 수천만 원, 수억 원씩 '평가 이익'을 냈다는 인증 화면이 퍼져나갔다. 회사원은 물론 노인, 주부, 학생들까지 증시로 몰렸다.반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과 한 달. 코스피는 정점에서 30% 가까이 급락했다. 그냥 하락 폭이 문제가 아니다. 하루건너 급등락을 반복하는 '홀짝 증시'로 변질됐다. "정부가 투기판을 조장했다"는 불만이 쏟아진다. 물론 주식 투자는 개인 판단과 책임을 전제로 한다. 그건 일단 논외로 하자. 여기선 정부가 시장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보자.증시는 역사적으로 급등장에서 그 끝이 화려하지 않았다. 정책 책임자라면 과거 교훈을 머리에 입력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2007년 11월로 가보자. 서울 압구정동의 미래에셋증권 지점은 회사원, 주부, 노인들로 가득했다. 펀드에 가입하려는 대열이었다. 500~1000포인트 박스권에 갇혔던 코스피가 2000선까지 오르면서 빚어진 광풍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가 터졌다. 금융위기가 찾아왔고 2008년 주가는 반토막 났다. 정부가 앞단에서 시장을 주시하고, 경고도 하고, 리스크를 관리해야 했다.다시 돌아와 보자. 지난 1년간 정부는 어떤 메시지를 냈고, 무슨 상품을 도입했는가.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빚투(빚내서 투자)도 레버리지 투자"라고 말해 뭇매를 맞았다. 끝판왕은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다. 6월 말 김어준 방송에 출연해 "세계 5~6위권인 한국 증시가 몇 년 뒤 3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코스피가 4배 오르는 건 기본이라고도 덧붙였다. 한술 더 떠 "내기를 하자"고 했다. '머니 무브'라는 지향점은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주가 자체가 목표나 성과처럼 변질될 때 결말은 뻔하다.전례 없던 코스피 질주에 자신감이 생겼던 걸까. 정부는 '삼성전자∙하이닉스 레버리지 ETF' 또한 과감하게, 그리고 서둘러 도입했다. 하지만 증시를 부동산 뺨치는 투기판처럼 만들어 버렸다. 오판이자 오만이다. '그린스펀 풋(Put)'이라는 유명한 경구라도 한 번쯤 새겼어야 했다. 이 말은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던 앨런 그린스펀이 주가 하락 때마다 금리를 내려 투자자들을 안심시킨데서 유래했다. 풋은 가격 하락시 손실을 막아주는 '풋 옵션'을 뜻한다. 하지만 그가 지속적으로 돈줄을 풀면서 금융위기를 촉발했고, 결국 개인은 큰 손실을 안았다. 정부가 '믿어도 된다'는 생각을 심어줄수록 개인 투자자들도 위험에 무뎌지면서 손실을 입을 수 있다. 지난 1년은 그 교훈을 보여준 값비싼 시간이었다.정부는 '모두'란 말을 즐겨 쓴다. '모두의 성장, 모두의 창업'이 그렇다. 국민에게 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실용주의 기조를 반영한 구호다. 하지만 증시에서도 그걸 원했다면 실수다. 모든 국민이 동시에 이기는 증시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게 가능하면 대체 누가 돈을 잃겠는가. 정부는 '잃는 증시, 떨어지는 증시, 위험한 증시'는 잘 얘기하지 않았다. 이제 와선 엉뚱한 소리를 한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개인들이 역동적으로 투자하는 특성 때문에 코스피 변동성이 커진다"고 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더욱더 위험을 말했어야 했다. 항상 주식 매수를 외치는 애널리스트와 달리 정부는 위험도 함께 바라보고 얘기해야 한다. 그게 정부와 증권사의 차이다.
[시대광장/이상언]검찰 제국의 몰락
2024년 1월 말, 매서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서초동 뒷골목 식당으로 걸어간 저녁의 장면이 생생하다.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과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박 전 장관은 당시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둔 장관 후보자였다. 박 전 장관과는 병아리 기자 시절부터의 인연이 있다. 내란 가담 혐의로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수감됐지만 내 기억 속 그는 여전히 강직하고 투박한 검사다.그 1월 정권과 검찰은 모두 편치 않았다. 집권 2년 차 대통령과 정권 2인자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대립했다. 당 최고위원이 대통령 부인을 마리 앙트와네트와 비교했고, 한 위원장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김 여사 특검'을 수용할 태세를 보였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한 위원장에게 사퇴를 종용했다. 대통령 보호막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친윤'으로 분류된 검사들이 검찰 요직 곳곳에 포진돼 있었지만, 그들의 대통령에 대한 애정은 상당히 식은 상태였다. 이 균열의 복판에 '여사 문제'가 있었다.박 전 장관에게 "어려운 길이 펼쳐질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원칙대로 하면 되지 뭐. 내를 모리나?"라고 했다. 하지만 대화 중 간간이 검찰과 윤 대통령 사이에서의 중재자 역할에 대한 고민이 드러났다. 이원석 총장은 청와대 간섭을 막아줄 우산 구실을, 윤 대통령은 검사들의 불만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냄비 위의 돌멩이 역할을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아슬아슬한 줄타기 상황은 넉 달 뒤인 그해 5월 세상에 고스란히 표출됐다. 법무부가 검찰 간부 인사를 발표했다. 송경호 서울중앙지검장이 부산고검장으로 발령 받았다. 이원석 총장은 "협의 없이 진행된 일방적 인사"라며 공개적으로 반발했다(이에 대한 박 전 장관의 입장은 다르다. "총장과 충분히 얘기를 했다"고 당시 통화에서 말했다). 김 여사를 검찰청으로 불러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 송 지검장에 대한 인사는 외견상 영전이었으나, 검사들 눈에는 변방으로 쫓아내기였다. 박 전 장관 입장에서는 대통령과 검찰의 충돌을 막을 궁여지책이었겠지만, 정권과 검찰 양쪽 모두의 병은 깊어갔다.송 지검장 후임으로 검찰 내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이창수 검사장이 낙점됐다. 그해 가을 이원석 총장은 임기 만료로 검찰청을 떠났다. 그 뒤의 상황은 우리가 목격한 대로다. 김 여사 조사가 청와대 근처의 경호처 건물에서 조용히 이뤄졌고, 결국 불기소 처분으로 끝났다.윤석열 전 대통령이 누구인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고, "성역은 없다"고 선언하고 조국 전 장관을 수사해 명성을 드높였으며,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며 권력에 맞서 대권을 얻은 이다. 공정과 정의를 외치며 집권한 사람이 아내에 대한 수사에서는 검사들에게 충성을 요구했고, 언터처블 성역을 만들었고, 후배 검사들을 업연과 이력으로 누를 장관을 골랐다. 그리고 대통령 되기 전의 자신과 닮은 검사들을 압박하고 배척했다. 몇몇 검사가 이 기막힌 상황에 항의했으나 잠시 뿐이었다. 그렇게 검찰은 망했다.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근위대 '프리토리아니'를 조직했다. 황제를 보호하고 반역을 차단하는 제국 수호자 임무를 맡겼다. 그들은 군주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자 가장 든든한 방패가 됐다. 경호뿐 아니라 치안·사법·행정에도 관여했다. 힘이 점점 커진 프리토리아니는 황제를 시해하고 갈아치웠다.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친 적도 있다. 급기야 프리토리아니 출신이 황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2'에서 덴젤 워싱턴이 연기한 마크리누스가 바로 그다. 마크리누스는 217년 4월 집권(22대 로마 황제)에 성공했으나 1년 2개월 뒤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프리토리아니는 콘스탄티누스 1세 때 완전히 해체됐다.형사소송법 개정안 국회 통과로 대통령이 국회에 재의를 요구하지 않는 한 2개월 뒤에 한국에서 수사권을 가진 검사는 사라진다. 수사를 완전히 떠안은 경찰이 미덥지 않아 많은 이가 걱정한다. 애꿎은 국민의 피해를 줄이는 제도적 보완이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시계를 되돌릴 수는 없다. '선택적 정의'에 물든 검사들의 날카로운 칼이 스스로를 베어버렸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프리토리아니에 대해 "이토록 무시무시한 하인들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종종 치명적이다"고 썼다. 한국 검찰이 1800년 전 그들처럼 몰락의 벼랑 끝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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