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노트
[기자노트]용비어천가의 결말, 김민석을 향한 기대
"해동(海東) 여섯 용이 날으시어 하는 일마다 모두 하늘의 복이시니, 고대의 성인들과 꼭 같으시니이다." [용비어천가] 제1장의 첫 문장이다. 권제, 정인지, 안지 등 조선의 관리들은 이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나니"라며 왕조 창업의 정당성을 노래했다.약 580년이 지난 현대로 돌아와 보자. 새로 당권을 쥔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전당대회 내내 이재명 대통령과의 관계를 내세웠다. 그는 "완벽한 당정일치"를 외쳤다. 당선 일성으로 "대통령과 국정 방향을 교감하고 눈빛만 봐도 맞출 수 있다"고 했다.김 대표는 국무총리 시절인 지난해 7월 김대중 전 대통령을 기리는 자리에서 "김대중의 길은 지금 이재명의 길이 됐다"고 했다. 같은 해 12월 이 대통령을 두고는 "정책을 가장 깊이 아는 분"이라고 치켜세웠다. 김 대표는 "요새는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5년이 너무 짧다'고 하는 거 아니냐. 심지어 '더 했으면 좋겠다'는 분들도 있다"고도 했다. 야권에선 '명비어천가'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그러나 정작 용비어천가는 군주에 대한 찬사로 끝나지 않는다. 선대 왕들의 업적을 칭송한 노래는 109장까지다. 110장부터 125장까지 16개 장은 임금을 향해 ▲자만하지 말라 ▲역사를 잊지 말라 ▲백성을 두려워하라고 경고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직언하는 신하의 뜻을 잊지 마라"(121장) "군주의 총애를 독차지하려는 소인을 경계하라"(122장) 등이다. [용비어천가]의 125장은 하나라 태강왕의 고사를 소개하며 끝난다. 선조의 위업만 믿고 사냥에 빠졌다 나라를 잃은 인물의 이야기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심은 김 대표를 선택했지만 민심은 달랐다. 국민여론조사에서는 정 후보가 50.70%로 앞섰고 최고위원 5명 중 3명이 친청(친정청래)계로 채워졌다. 이 대통령 측근으로 분류돼 온 김용 후보는 낙선했다.그러나 김민석 지도부는 성찰보다 사법부에 대한 공세로 문을 열었다. 김 대표는 19일 첫 지도부 회의에서 조희대 대법원장을 향해 "당장 나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대표는 20일에는 당에 '법치 파괴 조희대는 물러나야 한다'는 문구를 담은 현수막을 전국에 걸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조 대법원장은 지난해 이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이후 여권과 갈등을 이어왔다. 대통령과 눈빛을 맞추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려운 것은 대통령이 듣기 싫어할 말을 옮기는 일이다. 민심을 가감없이 대통령에게 전하는 것이 집권여당 대표의 본령이다. 그 역할을 수행하는 게 이재명 정부의 성공을 돕는 길이다. 당 태종은 사사건건 쓴소리를 하던 위징을 곁에 뒀다. 643년 위징이 죽자 "거울 하나를 잃었다"고 했다. 이후 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강행했고 결국 실패했다. 김 대표가 이 대통령이 성공한 지도자로 기록될 수 있도록 그 거울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
[기자노트]제도의 늪에 빠진 K방산
#육군이 올해 새 무기가 필요하다고 결정하면 병사 손에 닿는 해는 2041년이다. 소요 제기부터 전력화까지 평균 약 15년이 걸린다. 우크라이나는 군이 필요로 하는 기술의 우선순위를 공개하고 누구나 공모에 참가할 수 있게 한다. 평균 1.5개월 안에 결정이 난다. 실전 투입 뒤에는 전장 데이터를 개발사에 보내 보완을 요구한다. 각 군은 e포인트를 활용해 비공개 온라인 장터에서 새로운 무기를 구매할 수도 있다.[시대]가 올들어 지난 19일까지 '새로운 전쟁의 시대, K방산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3차례 개최한 포럼에서 다뤄진 내용이다. 최근 5년 연평균 126억달러(약 17조5000억원)를 수출한 K방산의 이면이다.한국은 과거 추격국가였다. 앞선 나라의 제도를 들여와 쫓기만 해도 충분했다. 제도는 수입된 개념을 내재화해 현실에 맞춘 변용을 거쳐 자생적 사유와 정책의 창출로 이어져야 한다. 한국은 첫 단계부터 부실했다. 그 제도가 왜 생겼는지 따지지 않고 결과만 들여왔다. 내재화가 없으니 변용도 창출도 쉽지 않다. 따라갈 나라가 사라진 지금 한국은 스스로 제도를 설계할 역량이 부족하다. 이것이 제도의 늪이다.늪은 세 가지다. 인재는 공정성이란 잣대에 막히고, 무기는 절차에 막히며 기술은 보안 문제에 막혀 있다. 해킹 천재를 일반 병사와 같은 공정성의 잣대로 평가하니 수월성은 특혜가 된다. 무기 평가가 늦어지면서 대기업 위주의 심사를 견디지 못한 스타트업은 해외로 떠난다. 전투 데이터를 풀지 않으니 AI(인공지능)와 드론 등 첨단 무기는 실전에서 활용하기 어렵다.한국이 늪에서 나오려면 제도를 설계하고 운용할 사람은 독립적으로 사고할 능력을 갖추고, 시스템은 그 사고를 펼칠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독립적 사고는 주인의식을 가질 때 만들어지고 능력을 발휘할 공간은 책임과 권한을 함께 부여할 때 생긴다. "국방 예산 1%라도 혁신기술 구매에 쓰고 감사 걱정 없이 채택할 안전지대를 두자"(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제안이 나온 이유다.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8일 국무회의에서 방산 수출 세계 4위권 등을 들어 군사력이 "차고 넘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다. 하지만 방산 강국은 구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무기는 동맹뿐 아니라 비우호국에도 팔아야 하는 일이 생긴다. 정부가 나설수록 판로는 오히려 좁아질 수 있다. 정부가 할 일은 자랑이 아니다. 조용히 빗장을 풀어 새로운 전쟁의 시대에 맞춰 제도를 혁신하는 일이다.
[기자노트]신세계 정유경의 십년마일검
유튜브에서 빌 게이츠와 일론 머스크가 대중을 대하는 온도 차를 비교한 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촬영자가 여러 번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어도 게이츠는 빠른 걸음으로 제 갈 길을 갔다. 머스크는 달랐다. 질문을 받자 걸음을 멈추고 카메라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이어지는 질문에도 성의 있게 답했다.기자 입장에서는 머스크 같은 오너가 반갑다. 현장에서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고 어떤 질문에도 답해주는 경영자는 좋은 취재원이다. 언론에 자주 얼굴을 내비치고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소위 약간의 '관종기'까지 있다면 더 좋다.산업부 기자로 기업을 오래 들여다보면 좋은 취재원과 좋은 경영자는 다른 문제라는 걸 알게 된다. 적절한 전략과 판단으로 매출과 이익을 키우고 이를 재투자해 기업가치를 높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경영자의 본업이다.정유경 신세계 회장은 은둔의 경영자로 불린다. 인터뷰는커녕 파파라치 컷도 드물다. 회장 승진 이후 열린 첫 정기주주총회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아 주주와 기자들을 서운하게 했다. 등기이사가 아니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그의 경영 성적표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2019년 국내 백화점 최초로 연매출 2조원을 넘겼고 2023년 단일 점포 최초로 3조원을 돌파했다. 지난해까지 3년 연속 3조원대를 기록했고 올해는 4조원을 바라본다. 비교 대상은 이제 국내에 없다. 영국 런던 해러즈, 일본 도쿄 이세탄 신주쿠점이 경쟁 상대다. 한국 백화점이 글로벌 리그에 진입한 것이다.그 자리에 오르는 데 12년이 걸렸다. 정 회장은 2014년 강남점 증축·리뉴얼을 시작으로 핵심 점포에 자금을 투입했다. 2016년 강남점 확장 개장 이후에도 식품관과 명품관을 다시 손봤다. 본점도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본관과 신관, 옛 제일은행 본점 건물을 럭셔리 공간으로 재편했다. 명품과 VIP 중심으로 포트폴리오를 짜고 외국인을 겨냥한 K콘텐츠를 접목했다.그동안 분기마다 수익성 지적이 따라붙었다. 언론은 영업이익이 투자에 비해 적다고 비판했고 주주들은 원성을 냈다. 운도 따라주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왔고 내수는 가라앉았다.그럼에도 정 회장은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여기서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 12년에 걸친 대규모 투자는 전문경영인의 영역이 아니다. 임기가 정해진 CEO가 먼 미래의 열매를 위해 영업 공간을 공사장으로 만들고 매 분기 실적을 깎아 먹는 결정을 밀어붙이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오너의 영역이다.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갖고 싶다면 오너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정 회장은 그걸 해냈다.당나라 시인 가도(賈島)는 '검객'이라는 시에서 '십년마일검'(十年磨一劍)이라 썼다. 10년 동안 칼 한 자루를 갈았다는 뜻이다. 서릿발 같은 칼날을 아직 시험해보지 못했다는 구절이 뒤에 따라붙는다. 정 회장의 12년이 그랬다.외국인이 언제 얼마나 돌아올지 2014년에는 알 수 없었다. 올해 외국인 관광객이 늘면서 백화점 3사가 일제히 호실적을 거뒀다. 순풍은 셋 모두에게 똑같이 불었다. 신세계 백화점 부문은 2분기 매출이 15.5% 늘어 3사 가운데 성장세가 가장 가팔랐다. 매출 증가율보다 영업이익이 늘어난 폭은 더 컸다. 리뉴얼을 마친 점포가 이익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시장의 평가도 달라졌다. 지난해 초 13만원대까지 내려갔던 신세계 주가는 올해 6월18일 장중 79만원대까지 올라섰다. 이후 증시 전반이 흔들리며 백화점주도 조정을 받았지만 시장이 신세계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신세계 강남점의 도약은 한 점포의 성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기준선이 올라가면 업계 전체가 따라 올라간다. 경쟁력 있는 브랜드 유치와 공간 혁신 등 대규모 투자는 백화점 3사의 공통 과제가 됐다. 외국인 관광객 매출이 사상 최대 기록을 경신하는 지금의 그림은 캠페인이나 프로모션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누군가 먼저 글로벌 수준으로 점포를 끌어 올렸기에 가능했다.주주와 소통하고 경영 전략을 설명하는 것은 여전히 오너의 중요한 책임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같다. 다만 침묵을 비판했던 기자로서 그 침묵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함께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정 회장은 여전히 말이 많지 않다. 대신 12년간 갈고닦은 신세계가 말하고 있다. 숫자보다 명쾌한 해명은 없다.
[기자노트] LIG D&A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 냉정해야 한다
한국 방위산업의 위상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가운데 최근 한 방산업체 임직원이 방위사업청 공무원에 대한 뇌물공여 혐의로 구속되면서 관련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국내 방산업체들은 내수 중심의 사업 구조에서 벗어나 유럽과 중동, 동남아시아 등으로 수출 시장을 넓히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무기체계의 성능뿐 아니라 기업과 국가에 대한 신뢰도 방산 수출 경쟁력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사건의 성격상 엄정한 수사가 필요하지만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을 기업의 조직적인 비리로 성급하게 규정하는 것 역시 경계할 필요가 있다.LIG디펜스앤에어로스페이스(LIG D&A) 관계자가 방위사업청 직원에게 금품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됐다. 회사 측은 임직원이 뇌물을 건넸다는 의혹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관련 규정과 절차를 준수해 사업을 수행해 왔으며 법적 절차를 통해 사실관계를 가려내겠다고 했다.구속된 것을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기에 검찰이 확보한 자료와 수사 결과를 토대로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히는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구속 자체가 유죄 확정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실제 금품 제공이 있었는지, 금품과 사업상 편의 사이에 대가관계가 있었는지, 기업 차원의 관여가 있었는지는 앞으로의 수사와 재판을 통해 확인할 부분이다.과거 방산 관련 사건에서도 수사 단계에서 제기된 의혹과 최종 사법 판단 사이에 차이가 있었던 사례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보병용 대전차 유도무기 '현궁' 사례다. 당시 개발 과정에서 비리 의혹이 제기돼 연구원들이 기소됐다. 그러나 2017년 항소심에서 관련 연구원 전원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연구원 1명이 감사와 수사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이 사례로 인해 모든 방산 비리 수사를 부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국민 세금이 투입되고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방위사업에서 비리 의혹은 모두 철저히 확인해야 한다. 그러나 의혹을 제기하는 것과 그 의혹이 사실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특히 개별 공무원의 일탈 가능성과 기업 차원의 조직적 비리는 반드시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방위사업청도 이번 사건에 대해 직원 개인의 일탈로 보고 있다고 밝히면서 제안서 평가 등 사업 추진 과정에 영향이 없도록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조직의 비리로 확대해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개인의 비위 여부를 확인하는 것과 방위사업의 평가·획득 시스템을 보완하는 것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관련 기업 역시 수사와 재판을 통해 사실관계를 명확히 해 의혹을 해소해야 할 책임이 있다.이번 사건의 파장이 국내에만 그치지 않을 것은 명확하다. 한국 방산은 최근 몇 년간 수출 시장을 빠르게 넓혀왔다. 해외 발주처가 기업의 준법경영과 사업 수행 역량을 함께 보는 상황에서 사실관계가 확정되지 않은 의혹이 기업이나 산업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확대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성급한 결론이 아니다. 수사기관은 개인의 행위와 기업의 책임 범위를 명확하게 구분해 사실관계를 밝혀야 하고 이해 관계자들은 확인된 사실과 의혹을 구분해 전달해야 한다. 이번 사건에서도 잘못이 확인된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물으면 된다. K방산의 위상이 어느 때보다 커진 지금 필요한 것은 어느 한쪽에 미리 색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수사와 재판을 통해 확인된 사실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냉정함이다.
[기자노트]"경찰에 신고했죠. 그렇다고 해결될까요?"
지난달 초 한 독자로부터 제보를 받았다. 중고거래 환불사기로 수십만원을 잃은 피해자였다. 당시 기자에게 피해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하던 피해자는 뜻밖에도 이런 말을 남겼다.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지만, 그렇다고 돈을 찾아줄 거라 기대하진 않아요." 피해금액이 작아 경찰이 별 관심을 갖지 않을 거란 설명이 뒤따랐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경찰이 해결해줄 거라 믿지 않는 시민이 과연 그 피해자일 뿐일까.취재를 시작하자 경찰은 의욕을 보이는 듯했다. '수사를 어떻게 진행하고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경찰은 "조만간 관할 경찰서로 사건을 이첩한 뒤 본격적인 수사를 진행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통화 말미에 이런 요청을 했다.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설명을 기사에 꼭 넣어주세요."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피해자에게 다시 연락했다. 수사 진척이 있냐고. 피해자는 현재까지 수사 진행과 관련해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처음부터 큰 기대가 없었으니 낙담도 없어 보였다. 경찰이 해결해주지 못할 거란 그의 예측은 확신으로 변할 것이다. 그 확신들이 모여 평가가 된다. 현재 경찰의 신뢰도는 이런 시민들의 생각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최근 경찰을 둘러싼 풍경은 낯설다. 아무리 '혐오의 시대'라고 하지만 경찰을 비하하는 일을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다. 지난 6월 올림픽공원 시위에선 일부 경찰관을 두고 '중국 공안 아니냐'는 주장까지 나왔다. 경찰을 향한 불신이 단순 불만을 넘어 공권력 자체에 대한 조롱으로 번지는 모양새다.근거 없는 의혹 제기나 개인을 향한 혐오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경찰을 향한 불신을 일부 시민의 문제로만 치부하긴 어렵다. '장윤기 사건'은 경찰 신뢰도에 너무나 치명적이다. 그냥 부실수사가 아니다. 실수나 일탈을 넘어 경찰이, 경찰에 의해, 경찰을 위해 증거를 없애고, 사건을 조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정춘생 조국혁신당 의원이 최근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전수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경찰 가족이 피의자나 피혐의자인 사건은 45건, 피해자나 고소·고발·진정인인 사건은 72건 등 총 117건으로 집계됐다. 이 중 감찰 조사가 이뤄진 사건은 단 1건에 그쳤다. 다른 관서로 이송했거나 이송할 예정인 사건은 44건, 이송 여부를 검토하는 사건은 15건으로 나타났다. 나머지 57건은 이미 종결했거나 다른 관서로 이송하지 않았다. 이 사건들의 처리는 공정했다고 믿을 수 있을까.경찰 가족이 연루된 사건을 별도로 관리하는 체계가 없다는 점도 이번 전수조사에서 드러났다. 그간 담당 경찰이 제척 및 회피를 신청하지 않으면 조직 내에선 관련 사건을 파악하기조차 어려운 구조였다. 경찰은 다음 달부터 경찰 가족 사건을 다른 관서가 수사하도록 하는 상피제를 시행한다고 했다. 1945년 경찰이 만들어진 지 81년 만에 이런 문제를 알았다는 건가. 아마도 '장윤기 사건'이 없었다면 경찰은 가족들이 연루된 사건을 지금처럼 알음알음 처리하는 관행을 계속 이어갔을 것이다.지금까지 경찰의 내부통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사실은 이번 형사소송법 개정과 맞물려 더 큰 우려를 낳는다. 오는 10월2일부터 검찰의 직접 수사는 전면 금지된다. 그 대신 보완수사를 경찰에 '요구'할 수만 있다. 최대 2개월 내에 보완수사를 마쳐야 하고, 제대로 보완수사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검사가 판단하면 해당 사건을 상급 기관이나 다른 수사기관으로 보낼 수도 있지만, 경찰을 믿을 수 없다면 이런 모든 보완 장치는 사후약방문에 불과하다.권한은 법으로 부여할 수 있다. 신뢰는 더 많은 권한을 갖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권한으로 인해 조직의 실력은 냉정하게 평가될 것이다. 커진 권한에도 수사 공정성을 지켜내지 못한다면 조직 신뢰도는 더 빠르게 추락할 수밖에 없다. 답은 정해져 있다. 조직을 얼마나 투명하게 운영하느냐다. 검찰이 그랬듯 자신의 성(城)에 갇힌 조직은 외부에 의해 강제로 수술대에 오르게 된다. 조직의 투명성은 작은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수사가 늦어지면 왜 늦어지는지, 수사가 어려우면 어떤 부분에서 막혔는지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한다. 경찰이 해결해주지 못할 거란 예측을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바꿀 때, 경찰의 신뢰도에도 변화가 올 것이다.
[기자노트]집값과 가계빚 사이, 총량규제의 난제
가계대출을 줄이라는 금융당국의 주문이 은행 창구에서 잔금대출 축소로 이어지고 있다. 일부 신축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은 분양계약을 체결한 지 수년 만에 입주를 앞두고도 필요한 자금을 제때 마련할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은행들이 대출을 무작정 내주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올해 정책성 대출을 제외한 5대 은행의 가계대출 증가액이 합산 기준 연간 관리 목표를 웃돌면서 남은 대출 여력이 빠르게 줄었기 때문이다. 일부 은행은 대출 한도와 접수 채널을 제한하고 가산금리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증가 속도를 낮추고 있다.가계대출 총량관리는 집값과 가계부채를 동시에 누르기 위한 대표적인 정책 수단이다. 시중에 공급되는 대출을 줄이면 주택 매수 수요도 위축된다. 높은 가계부채가 금리 상승과 경기 둔화 시 차주의 상환 부담을 키우고 금융시스템의 잠재적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규제의 필요성은 분명하다.문제는 총량이라는 숫자가 개별 대출의 성격까지 가려주지는 못하는 데 있다. 추가 주택 매입을 위한 신규 차입과 이미 체결된 계약을 마무리하기 위한 잔금대출이 은행의 가계대출 관리 목표 안에서 함께 관리된다. 은행의 총량 관리가 강화될수록 필요한 자금을 먼저 신청했는지, 어느 은행을 찾았는지에 따라 대출 가능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금융당국이 신축 아파트 입주 예정자의 잔금대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금융권에서는 잔금대출에 별도 여력을 인정하거나 일반 가계대출과 구분해 관리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규제 방향을 바꾸기보다 이미 체결된 계약의 잔금 조달과 입주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막으려는 보완에 가깝다.하지만 보완 대상을 어디까지 인정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보완책이 신축 아파트 계약자에게만 적용될 경우 새로운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 당국은 지난해 6·27 대출 규제 강화 이후 기존 주택을 매입한 차주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일부에서는 지원 대상을 선별하기보다 가계대출 총량 자체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총량 한도를 그대로 둔 채 특정 대출에 별도 여력을 배정하면 다른 대출의 취급 여력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생길 때마다 예외를 추가하면 규제 체계는 복잡해지고 차주 간 형평성 논란도 반복될 수 있다.그렇다고 대출 총량을 큰 폭으로 늘리는 것 역시 부담이 따른다. 은행권의 대출 공급이 다시 확대되면 가계부채 증가 속도가 빨라지고 주택 매수 수요를 자극할 수 있다. 시장이 이를 규제 완화 신호로 받아들일 경우 집값 안정 효과도 약해질 수 있다.당국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총량을 유지하면 정상적인 거래와 입주에 필요한 자금까지 막힐 수 있고, 총량을 풀면 가계부채와 부동산 시장의 불안을 다시 키울 수 있다. 일부 차주만 보호하면 형평성 논란도 뒤따른다.금융은 집값을 누르는 수단인 동시에 주택 거래를 마무리하는 기반이다. 대출을 조이면 매수 수요는 줄지만, 이미 계약을 맺은 실수요자의 잔금과 입주까지 막힐 수 있다. 개별 규제에서 예외를 인정받더라도 은행의 대출 여력이 부족하면 실제 대출은 실행되지 않을 수 있다. 금융만으로 부동산 시장을 관리하기 어려운 이유다.집값 안정과 실수요자 보호는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다. 투자나 추가 주택 구입을 위한 대출은 엄격히 관리하되, 이미 계약을 맺은 실수요자가 잔금을 치르고 입주하는 데 필요한 자금까지 막아서는 안 된다. 총량규제의 빈틈을 예외로 메우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규제의 기준 자체를 더 정교하게 다시 설계해야 할 때다.
[기자노트]주식투자는 스스로의 선택, 실패도 결국 "내 탓이오"
주식 투자가 부동산 투자보다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용이한 가장 큰 이유는 가격이다. 지방 산골짜기나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의 일부 땅값은 제곱미터(㎡) 당 최소 몇 천원에도 살 수 있지만 그 외에는 대체로 수백만~수 천 만원, 수 억원 이상이기 때문에 구매 여력을 갖는 건 쉽지 않다.반면 주식은 가격대와 종류가 더 다양하다. 정부가 자본시장 체질 개선을 위해 퇴출 대상에 올리긴 했지만 1주에 몇 백원하는 동전주부터 수 천원·수 만원·수 십 만원 등 비교적 투자 종목이 많고 가격 접근성 부담도 적다.주식은 상대적으로 부동산보다 접근성이 용이하고 가격 부담이 적은 만큼 '충동적 투자'와 '묻지마 투자'에도 노출되기 쉽다. 걸핏하면 '사이드카'(프로그램 매수·매도 호가 일시효력정지)가 발동되고 20분 동안 매매가 멈추는 '서킷 브레이커'도 수시로 걸리는 등 최근의 예측하기 힘든 극심한 변동성 장세에선 더더욱 그렇다.가격이 떨어지면 어김없이 "지금이 저점 매수 기회"라는 유혹이 온라인을 도배하고 가격이 뛰면 "지금보다 더 오른다"며 '추격 매수'까지 부추긴다.올 들어 사상 첫 코스피 지수 5000을 찍은 뒤 6000→ 7000→ 8000→ 9000까지 도달하고 급등락을 반복하는 극심한 변동성 장세에서도 어김없이 이런 키워드는 투자자를 현혹했다.'모 대기업·정치인의 수혜주', '애국 기업' 등 다소 잠잠하던 '테마주'도 다시 꿈틀거렸다. 유혹하는 키워드는 각양각색이지만 투자 접근성 측면에서 보자면 너무 일시적이고 형편없다.주식 투자는 내가 가진 여윳돈을 들이거나 빚을 내서도 할 수는 있지만 결국 목적은 '수익 창출'이다. 투자는 수익을 내기 위함인데 무언가 반짝하면 그곳에 쏠리고, 누가 한마디 하면 그 종목에 몰두하고, 어떤 기업이 오랫동안 몰래 좋은 일 했다고 하면 해당 기업에 내 소중한 자산을 그냥 맡긴다. 대중적 분위기에 휩쓸려 투자를 위한 깊은 고민의 과정은 생략한다.국내 증시를 감싸는 대내외적 악재 외에도 투자자의 이런 충동적 묻지마 식 접근 역시 최근의 코스피 시장을 뒤흔든 요인이지만 투자에 실패하면 대체로 그 요인을 나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는다.물론 외부 요인도 상당하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 기업의 경영 리스크나 불확실한 국제 정세 등 갖다 붙일 이유는 많지만 주식 투자 성공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원인도 근본적으로는 최종 선택을 한 나 자신에게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어느 날은 급등하고 어느 날은 급락하는 최근의 지속된 코스피 지수 변동성은 분명 정부가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바로 잡아야 할 영역이다.다만 투자자도 그동안 내가 어떤 정보를 갖고 어떤 종목에 왜 투자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짚어보고 반성해야 한다. 남들은 다 사는데 나만 소외될까 봐 빚내서 무리하게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사지 않았는지, 어느 유망 정치인·기업인의 수혜주라는 이유로 무작정 덤벼들진 않았는지,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상장지수펀드)가 뜬다고 하니까 뭔지도 모르고 그냥 덥석 물진 않았는지를 말이다.주식 투자는 자신의 선택 영역이고 과하면 결국 도박이 된다. 그래서 주식 투자에 성공하면 내 덕이겠지만 실패 역시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정부의 경제 정책과 자본시장 체질 개선 전략이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고 비판하더라도 앞뒤 안 가리고 덤벼서 주가가 가파르게 치솟을 때 마냥 좋아하기만 했던 내 모습이 어땠는지부터 먼저 되돌아보자. 남 탓은 그다음이다.
[기자노트]시멘트시장 발목 잡는 전봇대
"제도가 제자리 걸음 입니다" 최근 만난 시멘트업계 관계자들은 약속이나 한듯 불만을 터트렸다. 정권이 바뀔때 마다 친환경 탄소 중립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정부 정책은 탄소 고배출 사업인 시멘트 기술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다. 업계에선 시멘트 제조사들이 친환경, 저탄소 제품을 생산할 기술과 기반을 갖추고도 제도적 장벽에 가로막혀 성장통을 겪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산업표준(KS)이 유럽보다 혼합재(산업 부산물) 종류와 사용비율(대체율) 등이 까다로워 저탄소 시멘트 생산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국내 KS 규정에 따르면 주력제품인 일반(포틀랜드) 시멘트의 혼합재 대체율은 10% 이내로 제한하고 섞을 수 있는 혼합재도 4종 뿐이다. 반면 친환경 문화가 일상화 된 유럽 국가들은 1990년대부터 혼합재 관련 규정을 완화했다. 대체율은 최대 36%까지 가능하다. 혼합재도 10가지에 달한다. 이 때문에 정부가 혼합재와 대체율 비율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체율 상향과 함께 공공 발주 등을 통해 혼합재 비중이 높은 시멘트 시장 파이(규모) 자체를 키우는 제도 정비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시멘트 제조사 관계자는 "단계적으로 혼합재 종류와 대체율을 최대 20%까지 확대하고 그에 맞는 시장 활성화 후속 방안 도입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했다.국내 시멘트사들은 기존 기술과 생산 기반을 활용하면 당장 혼합재 함량을 높인 제품 생산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관련 규제와 시장 수요가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적극적인 생산과 공급 확대에 나서기 어렵다고 설명한다. 한국의 시멘트 산업은 온실가스 배출량이 국가 전체 배출량의 약 6%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조공정의 핵심원료(클링커)를 태우는 과정에서 막대한 양의 이산화탄소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면 재활용 혼합재 사용이 늘어나는 만큼 핵심원료를 적게 사용하고 태우는 과정에서 이산화탄소 발생도 줄일 수 있다.이재명 정부는 강도 높은 저탄소 중립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2035년까지 53%에서 61% 수준으로 감축하는 목표를 수립했다. 하지만 정작 건설현장에선 다양한 친환경 원자재들의 시장 진입이 쉽지 않다. 탄소중립은 기업의 기술 개발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준비된 기술이 실제 건설현장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시장을 만들어야 가능하다.
[기자노트]장기채무, '도덕적 해이'보다 재기가 먼저다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최근 정부의 장기 연체채권 채무조정 정책을 둘러싼 포퓰리즘 논란에 대해 "특혜가 아니라 금융시스템을 선진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앞서 장기 연체채무자에 대한 탕감을 두고 "갚을 수 없는 사람은 빨리 탕감해 경제활동에 복귀시키는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도움이 된다"며 도덕적 해이 비판을 무책임한 선동이라고 일축했다.논쟁의 중심엔 도덕적 해이가 있다.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사람들과의 형평성 문제와 '어차피 나중에 탕감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금융권도 반복적인 채무 탕감이 금융 질서를 훼손하고 결국 대출 심사 강화나 금융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원 이하 채권 가운데 상환 능력이 사실상 없는 취약계층을 엄격히 심사해 채무를 조정하거나 면제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새도약기금과 같은 배드뱅크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형평성과 도덕적 해이 우려는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 그렇지만 정작 따져봐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회생 가능성이 사실상 없는 장기 연체자를 제도권 밖에 계속 방치하는 비용은 결국 누가 부담하는가. 장기 연체자 상당수는 빚을 갚고 싶어도 상환 능력을 잃은 경우가 적지 않다. 급여와 계좌가 압류되면서 취업과 경제활동 자체가 막히는 것이다.해외 실증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피터 가농(Peter Ganong)과 파스칼 노엘(Pascal Noel)은 채무자의 연체가 자산 규모보다 당장의 현금 유동성에 크게 좌우된다고 분석했다. 이는 많은 연체가 고의적인 채무 회피보다 갑작스러운 유동성 악화와 상환 능력 상실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이런 상황에서 장기 연체자를 제도권 밖에 오래 방치할수록 사회적 비용은 커진다. 생산과 소비에서 배제된 채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면 복지 비용과 경제적 손실이 결국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금융회사 입장에서도 이미 충당금을 쌓았거나 사실상 회수가 불가능한 채권이라면 장기간 보유하며 관리 비용을 들이는 것보다 정리하는 편이 효율적인 경우가 많다.채무조정의 효과를 분석한 연구도 있다. 하버드대 윌 도비(Will Dobbie)와 지에 송(Jae Song)은 채무조정을 받은 이들의 취업과 소득이 증가하는 등 경제활동이 회복되는 효과를 확인했다. 채무조정이 경제활동 복귀를 돕고 사회 전체의 편익을 높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경제학적으로도 채무조정을 무조건 나쁜 정책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금융회사는 애초에 연체 가능성을 감안해 금리를 책정하고 위험을 관리하는 만큼, 회수가 어려운 채권을 장기간 보유하는 것보다 정리하는 편이 오히려 비용을 줄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악의적 채무자는 엄격히 가려내야 한다. 하지만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상환 능력을 잃은 사람들까지 장기간 경제활동에서 배제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는 더 큰 비용이 될 수도 있다. 관건은 지원 대상을 얼마나 정교하게 선별하느냐다. 소득과 재산을 철저히 심사하고 반복 지원을 차단해야 한다. 은닉재산이 드러날 경우 채무조정을 취소하는 등 도덕적 해이를 막을 장치도 뒷받침돼야 한다. 아울러 성실 상환자를 위한 인센티브와 금융교육, 자립 프로그램을 함께 마련해야 정책의 형평성과 효과를 모두 높일 수 있다.장기채무 정리는 빚을 없애주는 정책으로만 볼 게 아니다. 다시 일할 수 있는 사람을 경제활동으로 복귀시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수단에 가깝다. 논의는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도덕적 해이를 막을 장치를 촘촘히 마련하는 동시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지원이 닿도록 제도를 다듬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기자노트]'롤러코스피' 레버리지 ETF만 원인일까…문제는 '구조'
최근 국내 증시는 이른바 '롤러코스피' 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하루는 급등, 하루는 급락을 반복하며 시장 과열을 막는 장치인 '사이드카'와 '서킷 브레이커'도 수시로 발동되고 있다.21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기준 올해 들어 국내 증시에서는 코스피와 코스닥을 합쳐 사이드카가 62차례, 서킷 브레이커가 9차례 발동됐다. 코스피 사이드카는 39차례, 코스닥은 23차례였으며 서킷 브레이커는 각각 7차례와 2차례 발동됐다.문제는 이 같은 변동성 장세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이 과도한 공포에 잠기면서 전반적으로 작은 악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이러한 변동성 장세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개인투자자의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투자다. 레버리지 ETF는 기초지수 하루 수익률을 두 배 추종하는 상품이다. 지수가 오를 때는 수익이 확대되지만 하락할 때는 손실도 그만큼 커진다. 특히 최근처럼 시장 방향이 수시로 바뀌는 장에서는 레버리지 상품 위험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 5월 상장 이후 코스피 변동성의 주범으로 지목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단일종목 2배 레버리지 ETF'가 대표적이다.상승을 기대하고 몰린 자금이 급락장에서 손실을 입으면 투자 심리가 빠르게 위축된다. 투자자들의 손절매와 운용사의 기계적 리밸런싱 매도, 신용거래 반대매매가 얽히며 다시 주가가 요동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증시 변동성이 지나치게 확대되자 당국은 최근 레버리지 ETF 고위험 투자에 대한 관리 강화에 나섰다. 물론 투자자 보호를 위해 상품 위험성을 보다 명확히 알리고 과도한 레버리지 거래를 억제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은 필요하다.다만 규제 초점이 개인투자자 투자 행태에만 맞춰질 경우 최근 증시 변동성의 근본 원인을 놓칠 수 있다. 레버리지 상품이 시장 진폭을 키우는 증폭 장치라면 작은 충격에도 지수 전체가 크게 흔들리는 국내 증시의 구조는 그보다 앞서 살펴야 할 문제다.국내 증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반도체 대형주 지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글로벌 인공지능(AI) 산업에 대한 우려가 커지거나 미국 증시에서 주요 반도체 종목들이 흔들리면 국내 반도체주도 곧바로 영향을 받고, 이는 다시 코스피 전체 변동성으로 이어진다. 일부 대형주 주가가 사실상 시장 전체 방향을 결정하는 셈이다.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높은 수급 의존도도 문제다. 국내 증시는 외국인이 대규모 매수에 나설 때 빠르게 상승하지만 반대로 외국인이 자금을 회수하면 낙폭도 급격히 커진다. '연기금의 국내주식 비중 상한 제약'이나 '단기 성과 중심의 기관 자금' 운용 탓에 외국인 매도 물량을 안정적으로 받아줄 연기금과 기관, 장기 투자자금 완충 기능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결국 반도체 쏠림과 외국인 수급 의존이라는 약한 증시 체질이 변동성의 기반을 만들고, 레버리지 ETF는 그 위에서 상승 하락 속도를 더욱 높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이를 해결하려면 단기적인 투자 규제에 앞서 국내 증시의 구조적 취약성을 개선하는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 반도체와 일부 대형주에 집중된 지수 구조를 완화하고 다양한 업종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시장의 저변을 넓혀야 한다.외국인 수급을 대신해 시장 충격을 흡수할 국내 장기 자금도 키워야 한다. 연기금의 국내 주식 운용 여력을 합리적으로 확대하고 퇴직연금과 장기 적립식 자금이 증시로 안정적으로 유입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상장사의 낮은 주주환원과 불투명한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다. 국내 투자자가 장기간 믿고 자금을 맡길 기업이 늘어나야 외국인이 매도할 때마다 지수가 흔들리는 수급 구조도 바뀔 수 있다.결국 변동성을 낮추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거래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국내 증시 자체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개인의 투자 선택만을 탓하는 손쉬운 처방이 아니라 산업 쏠림과 외국인 의존, 부족한 장기 자금이라는 국내 증시의 약한 체질을 바꾸는 일이다.롤러코스터를 멈추기 위해서는 속도를 높인 승객만 탓할 것이 아니다. 작은 충격에도 휘청이는 선로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기자노트]이케아 육아휴직 논란이 쏘아올린 공
"육아휴직은 권리가 됐지만 복직은 여전히 두려움의 영역입니다." 최근 기자와 만난 한 인사·노무 전문가의 말이다. 그는 "휴직을 사용하는 문화는 자리 잡아가고 있지만 복직 이후 인사상 불이익을 걱정하는 직원들은 여전히 많다"고 지적했다. 육아휴직자가 증가세를 보이는 가운데 이케아코리아의 육아휴직이 도마위에 올랐다. 유아휴직 복귀 임원급 직원의 평사원 강등 의혹이 사회적 논란으로 떠오른 것. 이달 8일 육아휴직 후 복귀한 직원이 원직 복귀 대신 하위 직급 발령과 권고사직 압박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다. 이케아코리아 관계자는 "조직개편에 따른 인사조치였을 뿐 불이익은 없었다"며 관련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논란 이후 개별 기업의 인사 문제를 넘어 육아휴직 제도의 실효성과 직장 내 복귀 문화를 둘러싼 논쟁으로 확산되는 형국이다. 지난 10일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해당 사안을 직접 언급하며 철저한 조사를 지시하고 사실로 확인될 경우 엄정 조치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파장이 더욱 커졌다.이번 논란이 더 큰 주목을 받는 이유는 이케아가 가족친화적 조직 문화를 내세운 글로벌 기업이라는 점이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과 다양성, 포용성을 강조하는 기업들조차 실제 현장에서는 제도와 문화 사이에 간극이 존재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 고용노동부의 관련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핵심은 분명하다. 단순히 육아휴직을 얼마나 사용할 수 있느냐를 넘어 휴직을 마친 직원이 다시 조직으로 돌아왔을 때 어떤 대우를 받느냐는 문제다. 육아휴직 경험이 있는 한 대형 IT업체 여직원은 "대부분 직원들은 육아휴직을 쓰는 순간 회사에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게 된다"며 "복귀 후 인수 인계와 업무 조정 과정에서 불만을 갖지 않도록 공정한 업무 처리가 필요하다"고 털어놨다.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육아휴직급여 수급자는 약 13만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여성은 물론 남성 육아휴직 사용자가 늘면서 전체의 약 30% 수준까지 늘었다. 육아휴직 급여 상향과 6+6 부모육아휴직제 도입 등으로 제도적 기반도 강화됐다.정권이 바뀔 때마다 육아휴직 확대와 각종 출산·육아 지원 등 저출생 육성 정책이 쏟아진다. 하지만 실속 없는 제도 확대만으론 근본적으로 저출생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기업에서 부모들이 육아휴직을 마음 편히 사용하고 복직 이후에도 어떠한 불이익 없이 자신의 일터로 돌아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이케아 육아휴직 논란이 우리사회에 던진 과제다.
[기자노트]코오롱티슈진 인보사 사태의 교훈
코오롱티슈진은 TG-C의 미국 식품의약국(FDA) 품목허가를 위한 글로벌 임상 3상 톱라인(주요지표)을 이번 달 발표할 예정이다.무릎 골관절염 세포·유전자 치료제인 TG-C는 과거 논란이 됐던 인보사와 같은 약이다.임상 3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품목허가로 이어질 경우 한국 기업이 독자적으로 FDA 임상 과정을 완수하고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첫 사례가 된다. 국내 바이오 업계가 이번 임상 톱라인 발표에 주목하는 이유다. 코오롱티슈진은 TG-C 임상 3상 톱라인을 확인한 뒤 내년 1분기 FDA 품목허가를 신청할 것으로 관측된다.벌써 상품성에 대한 기대감이 무르익고 있다. 앞선 임상에서 통증과 기능성 개선이 확인된 덕분이다. 한국투자증권은 "임상 2상 결과가 3상에서 재현되기만 해도 FDA 신약 승인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다올투자증권은 "앞서 인종과 임상 환경이 다른 두 임상에서 효과가 입증된 만큼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고 했다.하지만 TG-C 상업화를 앞두고 과거 인보사 사태가 다시 회자된다.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선 옛 인보사 사태와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해선 안된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복수의 전문가들은 "과거처럼 개발 당시 발견하지 못했던 사항이 추후 문제가 될 수 있어 사전에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코오롱티슈진은 2017년 인보사 국내 허가를 받았지만 임상 약에 허가 내용과 다른 세포가 들어간 것으로 나타나 2019년 4월 제조·판매 중지 명령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국내 허가가 취소됐고 미국에서 진행하던 임상 3상도 보류됐다. 이 과정에서 국내 제조·판매 중지 명령 직전 7만원 안팎이었던 주가는 두 달 만에 1만6000원대 초반으로 급락했다.인보사 사태에서 문제가 됐던 건 인재(人災)에 가까웠다. 인보사는 1액과 2액으로 구성된 약물이다. 국내 허가 추진 당시 서류에 2액의 기원 성분을 연골유래 세포라고 기재했으나 실제론 신장유래 세포였던 것으로 뒤늦게 밝혀졌다. 개발 초기 2액 기원 성분이 되는 세포의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하며 착오가 발생한 것이다. 해당 내용이 문제 되자 코오롱티슈진은 과학적 데이터를 기반으로 FDA 소명 절차를 진행하고 코드명 TG-C라는 이름으로 인보사 미국 임상을 새롭게 추진해 현재까지 왔다.TG-C가 글로벌 임상 3상에서 긍정적인 결과를 확보하더라도 아직 갈 길은 멀다. FDA 등 규제기관 승인을 확보해야 하고 수 많은 상업화 절차도 수행해야 한다. 과거의 실패를 반면교사 삼아 새로운 인보사 사태가 재발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기자노트]잘못된 낙인 '무섭노 논란'의 결자해지
MBC경남 시청자게시판에는 8일 하루(오후 6시 기준)에만 200여개의 글이 올라왔다. 대부분의 글은 걸그룹 리센느 멤버 원이의 일명 '무섭노' 논란에 처음 불을 댕긴 해당방송국 PD를 비판하고 항의하는 내용이다. 해당 방송국 PD가 원이의 발언을 공개 비판한 이후 온라인에서는 '일베' 표현 여부를 둘러싼 공방이 이어졌다. 여기에 정치권 인사들까지 가세하면서 논란은 걷잡을 수 없어 커졌다. 사안의 본질은 사라지고 진영간 극단적 대립과 소모적 감정싸움으로 치달았다. 이번 논란이 남긴 과제 중 하나는 과연 공적 영향력을 가진 언론인이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느냐다. 어떤 사건이나 이슈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언론인은 여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언론인의 발언은 일반인과 같은 무게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 영향력만큼 책임을 져야한다. 때문에 사회적 이슈에 대한 언론인의 공개 발언은 신중해야한다. 더구나 그 발언이 특정인에 대해 낙인을 찍고,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힐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시민들이 해당 PD 발언을 반박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번 논란은 잘못짚은 낙인찍기 시도로 마무리되는 모양새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실수 이후의 행동이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이를 수습하려는 책임있는 행동이 뒤따라야한다. 해당 PD는 반성과 사과보다는 자기 방어에 급급한 모습이다. 그는 시민들의 거센 반박에 "사용자를 일베로 단정 짓거나 사투리를 검열하자는 것은 아니다. 혐오 표현에 뿌리를 둔 표현임을 알았을 때의 선택은 태도의 영역"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런 가운데 그가 연출에 참여한 프로그램에서 "뭐라하노" "어딨노" "오노" 등 영남권 사투리를 활용한 자막이 사용된 사실이 알려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도 일베다. 게시물 삭제와 계정 비활성화는 결코 책임있는 모습이 아니다. 원이가 입은 상처와 피해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자신의 잘못을 알았을 때 상식있는 시민이 선택할 태도는 반성과 사과다.
[기자노트]편의점에서 만난 고객, 시장에서는 놓치는 현대차
그랜저가 2200원에 풀렸다. 할부도 필요 없다. 물론 진짜 그랜저는 아니다. 현대자동차가 GS25와 손잡고 선보인 아이스크림 '현차는 빵빵' 이야기다. 카스텔라 사이에 크림치즈 아이스크림을 넣은 샌드 아이스크림인데 포장을 뜯으면 현대차 승용·SUV 라인업 20종을 담은 띠부씰(스티커)이 들어 있다. 아이오닉 시리즈부터 그랜저, 아반떼, 캐스퍼까지 현대차 대표 차종이 총출동했다.발단은 농담이었다. 2022년 만우절, 현대차는 공식 SNS에 '현차'와 경적 소리 '빵빵'을 엮은 가상의 베이커리 콘텐츠를 올렸다. 하루 웃고 지나갈 이벤트였지만 소비자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진짜를 만들어 달라"는 고객들의 요청이 이어졌고 현대차는 4년 만에 이를 현실화했다.전통적인 자동차 광고가 잘 통하지 않는 세대에게 TV 대신 편의점 냉동고로 찾아간 발상은 영리하다. 포켓몬빵이 증명했듯 수집은 재구매를 부르고 소비자는 스티커를 하나 더 얻기 위해 아이스크림을 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현대차 라인업을 익히게 된다.이 '현대차 도감'을 보고 있자니 문득 묘한 생각이 든다. 띠부씰 속에서는 캐스퍼도, 아반떼도, 그랜저도 모두 같은 2200원짜리 아이스크림 하나면 손에 넣을 수 있지만 현실은 다르다.캐스퍼 일렉트릭은 현재 최대 28개월을 기다려야 받을 수 있다. 최상위 트림인 EV 라운지를 제외하면 대부분 22개월 이상 대기해야 한다. "군대 간 아들보다 늦게 나온다"는 말도 있다. 생산을 맡은 광주글로벌모터스(GGM)가 물량 상당수를 유럽 수출에 배정한 영향이다. 유럽에서 '인스터'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이 차는 지난해 A세그먼트 전기차 시장 2위에 오를 만큼 인기를 끌고 있다. 국내 소비자가 기다리는 동안 해외 판매는 계속 늘고 있다.아반떼 역시 예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지난해 출시된 아반떼 시작 가격은 2034만원이지만 주력 트림인 '모던'은 2355만원부터다. 옵션과 취득세, 보험료까지 더하면 사회초년생이 체감하는 첫 차 가격은 2500만원을 훌쩍 넘긴다. 최근 공개된 8세대 신형 아반떼는 배기량 확대와 플레오스 탑재 등을 반영해 가격이 더 오를 것으로 보인다.현대차의 논리도 이해는 된다. 자동차는 더 이상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 대형 디스플레이,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OTA), 강화된 안전사양이 기본이 됐고,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도 크게 올랐다. 상품성을 높인 만큼 가격이 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도 최근 부산모빌리티쇼에서 아반떼 가격 관련 질문에 "엔트리 모델에도 최신 기술과 상품성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은 회사가 처음 현대차를 선택하는 고객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엔트리 시장 소비자가 가장 먼저 체감하는 것은 잔존가치보다 가격, 서비스보다 공급이다.현대차가 엔트리 모델의 상품성을 높이며 가격을 끌어올리는 사이 중국 업체들은 가격 장벽을 낮추며 젊은 소비자에게 다가가고 있다. '싼 차'를 팔던 중국 업체가 합리적인 가격의 전기차를 앞세워 첫 차 시장을 노리는 시대가 됐다.BYD는 올해 국내에 소형 전기 해치백 '돌핀'을 출시했다. 기본 트림 가격은 2450만원이다. 전기차 보조금을 받으면 실제 구매 가격은 2000만원 초반대로 떨어진다. 캐스퍼 일렉트릭을 2년 가까이 기다릴지, 지금 계약해 곧바로 탈 수 있는 전기차를 선택할지는 소비자의 몫이다.자동차 산업에서 첫 구매 경험은 차 한 대를 파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첫 차는 다음 차와 그다음 차의 브랜드를 결정하는 출발점이다. 현대차 역시 엑셀과 베르나, 클릭, 아반떼를 통해 지금의 고객층을 만들었다.문제는 냉동고 밖이다. 오늘 아반떼 띠부씰을 모으는 스무 살이 정작 첫 차를 사려는 순간 다른 브랜드 전시장을 찾게 된다면 현대차는 미래 고객을 편의점에서는 만났지만 시장에서는 놓친 셈이다. 2200원짜리 그랜저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첫 차 고객을 끝까지 현대차에 남게 하는 일이다.
[기자노트]최저임금 심사 지연 되풀이…소모적 논쟁 언제까지
내년도 최저임금을 결정하기 위한 최저임금위원의 심의 일정이 또 다시 지연됐다. 위원장 선임을 놓고 빚어진 신경전으로 전원회의가 시작부터 삐걱인 데다 도급제 근로자에 대한 최저임금 확대적용, 업종별로 구분적용 등 주요 쟁점을 놓고 예년과 다를 바 없는 주장만 끊임없이 되풀이한 탓이다.최저임금법 시행령에 따르면 노동부 장관은 매년 3월31일까지 최저임금위원회에 다음 연도 최저임금 심의를 요청해야 한다. 이후 최임위가 90일 내 결론을 도출하면 노동부 장관은 8월5일 내년도 최저임금을 최종적으로 고시하도록 규정돼 있다. 하지만 1988년 최저임금 제도가 도입된 이후 법정 심의기한을 지킨 것은 단 9차례에 그친다. 노동자를 대표하는 근로자위원, 경영계를 대표하는 사용자위원, 이들을 중재해야할 공익위원들의 서로 다른 입장이 충돌하면서 매년 파행이 반복되고 있다.올해도 4월21일 개최된 첫 전원회의부터 불안한 상황이 연출됐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전문대학원 교수를 최임위 위원장으로 임명한 것에 대해 민주노총 측 근로자위원들이 강력히 반발하며 첫 회의부터 회의장에서 퇴장했다. 권 위원장이 윤석열 정부 시절 '주 69시간 근로'를 정당화했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두번째 회의는 첫 전원회의 이후 한달을 지난 5월26일에 이뤄졌다. 그러나 이 마저도 도급제 근로자 확대 여부와 업종별 최저임금 구분적용 문제를 놓고 노동계와 경영계의 입장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소모적인 논쟁이 지속됐다.해당 안건들을 표결 끝에 도입이 무산됐지만, 이는 예년과 다를 바 없는 과정과 결과다. 노동계와 경영계는 사실상 매년 똑같은 쟁점을 놓고 똑같은 주장만 반복한 끝에 공익위원의 중재에 따라 안건을 표결에 부쳐 부결로 마무리지었다.최저임금의 법적 고시 일정을 감안하면 최임위가 심의를 할 수 있는 기간은 100여일 정도 뿐이다. 이 기간 동안 도급제 근로자 확대 적용과 업종별 구분적용 문제들까지 다루다보니 정작 최저임금 인상률 논의는 가장 나중으로 밀리다 시간에 쫓겨 황급이 마무리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매년 되풀이되는 관행을 끊어야 한다. 국내 노동시장에 커다란 변화를 몰고올 수 있는 핵심 쟁점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등에서 기간 제한 없이 논의를 진행하고, 최임위는 정해진 일정 내에 최저임금 인상률 심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사회적으로 큰 후폭풍을 몰고올 수 있는 부담스러운 결정을 정작 정부는 뒷짐을 진채 최임위에 떠넘기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부가 책임감을 갖고 문제 해결에 나서길 바란다.
[기자노트]가격표와 영수증의 간극
소비자는 가격표보다 영수증을 먼저 기억한다. 라면값이 몇십 원 내렸다는 뉴스보다 장을 본 뒤 손에 쥔 영수증 속 총액이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최근 정부는 밀가루와 전분당 가격 인하를 계기로 라면 등 일부 가공식품 가격을 낮추며 물가 안정에 나섰다. 소비자 부담을 덜기 위한 조치이나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은 다르다. 분명 일부 품목 가격은 내렸지만 장바구니 총액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생활비가 줄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다.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반문했다. "라면 가격을 50원 내린다고 소비자가 얼마나 체감하겠느냐." 처음에는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는 말처럼 들렸다. 원가 구조를 들여다보니 질문의 무게가 달라졌다. 물가는 과연 가격표만으로 움직이는 것인지 되묻게 됐다.라면 원가에서 밀가루가 차지하는 비중은 10~20% 수준이다. 나머지는 팜유와 스프 원료, 포장재, 물류비, 인건비, 에너지 비용 등으로 구성된다. 밀가루 가격이 하락하더라도 제품 가격을 같은 폭으로 낮추기 어려운 배경이다. 여기에 국제 유가와 환율까지 변동 폭을 키우면서 원가는 여러 갈래에서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단순한 가격 인하만으로 흡수하기에는 구조가 복잡하다.가격 인하 요구가 이어질수록 기업의 선택지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수익성이 줄어들면 연구개발(R&D)이나 설비 투자, 신제품 개발 여력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부 품목만 가격을 조정했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원가 구조를 고려하면 그 역시 현실적인 한계 속에서 나온 판단으로 보인다.더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원재료다. 계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계란값이 오르면 단순히 계란 한 판 가격에서 끝나지 않는다. 빵과 과자, 김밥과 샌드위치, 도시락, 외식 메뉴까지 줄줄이 영향을 받는다. 하나의 원재료가 식품 산업 전반으로 파급되는 구조다.소비자의 장바구니는 이처럼 다양한 품목이 얽혀 구성된다. 이 구조에서는 완제품 하나의 가격을 낮춘다고 해서 생활비 전체가 곧바로 내려가기는 어렵다. 소비자는 라면 한 봉지가 아니라 장바구니 전체를 기준으로 물가를 체감하기 때문이다.이 지점에서 정책과 체감의 간극이 드러난다. 정책은 개별 품목의 가격표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반면 소비자는 영수증의 총액을 기준으로 물가를 판단한다. 같은 물가를 두고도 출발점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가격 인하 정책 자체는 필요하다. 다만 물가를 움직이는 중심이 원재료와 공급망, 산업 간 연결 구조로 확장된 지금, 개별 품목 중심의 접근만으로는 체감 물가를 설명하기 어려워 보인다.결국 중요한 것은 영수증이다. 총액이 줄어들지 않는 한 소비자는 물가가 내렸다고 느끼지 않는다. 가격표를 낮추는 정책만으로 장바구니 전체 비용을 낮추기 어렵다. 물가를 바라보는 기준이 바뀌지 않는다면 체감 물가와 정책 사이의 간극은 계속 남을 수밖에 없다.
[기자노트]대출 조이기만으론 못 막는 '벼락거지'의 기억
금융당국이 다시 대출 조이기에 나섰다. 신용대출과 마이너스통장, 카드론, 보험계약대출까지 자금 흐름을 들여다보며 가계부채 관리 수위를 높이고 있다. 증시 랠리 속에 빚을 내 투자하는 이른바 '빚투' 수요가 커지고, 부동산 시장으로도 자금이 흘러들고 있다는 분석 때문이다. 한국은행도 최근 가계대출 증가세의 배경으로 주택거래 확대와 자산시장 자금 유입을 함께 짚었다.수치만 보면 경고음은 분명하다. 신용거래융자 잔고는 사상 최대치를 다시 썼고 인터넷전문은행 신용대출 잔액도 처음으로 30조원을 넘어섰다. 카드론 잔액 역시 43조원을 넘어서며 역대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은행권뿐 아니라 카드론과 보험계약대출 등 제2금융권 대출까지 불이 붙으면서 당국의 관리 대상도 전 금융권으로 넓어지는 모습이다.당국 입장에서는 가계부채와 금융권 건전성을 걱정할 수밖에 없다. 빚을 내 오른 주식이나 집을 샀다가 시장이 꺾이면 손실은 개인에게, 부실 위험은 금융권으로 번질 수 있다. 과열된 투자심리를 방치할 수 없다는 논리도 설득력이 있다.다만 지금의 빚투 현상을 개인의 무분별한 투자 성향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이미 한 차례 '벼락거지'가 되는 경험을 했다. 집값이 단기간에 급등했던 시기, 집을 갖지 못했거나 제때 사지 못했던 사람들은 자산 격차가 순식간에 벌어지는 현실을 목격했다. 성실히 저축한 사람보다 무리해서라도 집을 산 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큰 자산을 갖게 되는 장면도 봤다.그 경험은 강한 학습효과로 남았다. 자산 가격이 오를 때 참여하지 못하면 뒤처진다는 공포가 시장에 깊게 깔렸다. 지금 증시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모습을 보며 일부 투자자들이 신용대출과 카드론까지 동원하는 배경에도 이런 심리가 있다. 단순히 '빚내서 투자하지 말라'는 경고만으로는 이 흐름을 막기 어려운 이유다.문제는 제도와 정책이 이 공포를 지금도 충분히 완화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거 사다리가 안정적으로 작동했다면, 근로소득과 저축만으로도 일정한 자산 형성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었다면, 사람들은 빚을 내서라도 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압박을 덜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집값과 주가가 오를 때마다 참여자와 비참여자의 격차가 커졌고 정책은 대체로 자산 가격이 달아오른 뒤 대출을 조이는 방식으로 움직였다.대출 규제도 필요하지만 사후적 총량 관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은행권 대출이 조여지자 카드론과 상호금융 등 비은행권으로 수요가 번지는 모습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특정 업권을 누르면 다른 업권의 대출이 늘어나는 풍선효과가 현실화된 셈이다. 자금 사용처를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부 업권만 압박하면 부채는 줄어들기보다 더 취약한 곳으로 숨어들 가능성이 크다.결국 빚투를 막으려면 개인의 투자 판단만 문제 삼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투자자가 위험을 책임져야 한다는 원칙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의 레버리지 투자는 단순한 투자 과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집값 급등기를 지나며 형성된 자산 격차의 기억, 노동소득만으로는 따라잡기 어렵다는 체념, 정책이 늘 시장보다 늦게 움직였다는 불신이 함께 만든 결과다.당국도 자금 흐름의 위험을 모르지 않는다. 자산시장으로 돈이 몰리고, 은행권 규제 이후 비은행권으로 수요가 옮겨가는 흐름도 이미 인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위험을 확인한 뒤 대출 창구를 조이는 방식이 반복될수록 시장에는 "정책은 늘 뒤따라온다"는 신호가 남는다. 과열을 식히기 위한 규제조차 늦게 등장하면 투자자에게는 오히려 서둘러 올라타야 한다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대출 조이기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해법이라기보다 최소한의 방어선에 가깝다. 다음 빚투를 막으려면 자산 가격이 급등한 뒤에야 대출을 누르는 대응에서 벗어나야 한다. 벼락거지의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사람들은 시장이 달릴 때마다 다시 빚을 낼 것이다. 당국이 정말 줄여야 할 것은 대출 잔액만이 아니라, 빚을 내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공포다.
[기자노트]느린 정책, 빠른 자본…부동산 세금 집값 잡을 수 있나
"급매는 다 소진됐고 지난 4월 말에 많이 팔렸어요. 중개 사이트의 매물들은 관망 목적으로 호가를 올리는 분들로 보여요. 집값이 오르기 전 주택을 사려는 사람은 늘었는데, 팔 사람이 부족하다 보니 거래가 없는 상황입니다." - 서울 송파구 잠실동 A공인중개사오는 7월 발표하는 세제 개편안에 부동산 보유세(재산세·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인상안이 담길 것으로 예고됐다. 부동산 매물 잠김 현상도 뚜렷해지고 있다.새로운 세제 개편의 방향은 실거주 여부와 보유 형태에 따라 증세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투자 목적의 주택은 보유세 부담을 대폭 높여 실거주 목적의 주택과 차등한다는 취지다.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 20일 소셜미디어(SNS) 페이스북에 "부동산 과세를 정상화해야 한다. 보유세와 양도세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은 필요하고 옳은 방향"이라며 부동산 과세 방침을 알렸다. 우려되는 점은 "집값을 반드시 잡겠다"는 정부 메시지와 다르게 부동산 거래시장이 영악한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다. 관망세에 돌입한 집주인들이 전셋값을 올리는 추세가 두드러졌다.서울 서초구의 대장주 아파트 아크로 리버파크(1612가구)는 지난달 전용 84㎡ 전세가 24억원에 거래됐다. 전세 실거래가는 올 1월 17억원에서 4월 20억원을 넘어선 후 한 달 만에 4억원 더 올랐다. 반년이 안 지난 시점에 7억원 올랐다. 강북 주요 단지들에서도 전세 최고가가 등장했다. 중구 서울역 센트럴자이(1341가구) 전용 84㎡의 올해 1월 전세 계약은 7억5000만원에 체결됐다. 마포 자이힐스테이트라첼스(1101가구) 전용 84㎡도 전세 10억5000만원에 신고됐다. 지난 1월 8억원대와 비교하면 2억원 이상 올랐다.정부의 세금 카드가 민간 주택 공급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주택시장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지 우려의 시선이 적지 않다. 지난 5월9일부터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가 시행됐고, 오는 7월 세제 개편에선 장기보유특별공제 축소도 예상되며 매도 시 대폭 오른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현재 조정대상지역 내 주택을 보유한 다주택자의 경우 주택 매도 시 기본세율 6~45%에 중과세율을 더해 과세가 이뤄진다. 2주택자는 기본세율에 20%포인트, 3주택 이상 보유자는 30%포인트가 각각 가산된다. 여기에 지방소득세 10%를 적용하면 3주택 이상 보유자의 실효세율은 최대 82.5%까지 올라간다. 설상가상 입주 물량은 줄어들고 있다. 부동산 플랫폼 직방에 따르면 오는 7월 전국 아파트 입주 물량은 총 1만4106가구로 전월(1만3505가구) 대비 4.5% 증가하는 데 그친다. 올해 하반기 전국 입주 물량은 8만6352가구(수도권 4만4613가구·지방 4만1739가구)로 상반기(9만2810가구) 대비 7.0% 감소할 전망이다.역대 정부의 부동산 과세 정책도 득보다 실이 컸다. 2018년 문재인 정부의 9·13 대책을 통해 종합부동산세 최고세율은 2.0%에서 3.2%로, 2020년 7·10 대책에서 다시 6.0%로 올랐지만 매물이 잠겼고 집값은 큰 폭으로 뛰었다. 한국부동산원 통계에 따르면 당시 서울 아파트의 매매가격 상승률은 ▲2018년 6.22% ▲2019년 1.25% ▲2020년 3.01% ▲2021년 6.56% 등을 기록했다.정부의 강력한 규제 정책에도 부동산 과열이 지속되는 배경에는 경기 남부로 유입된 반도체 머니가 있다. 역대급 성과급을 받을 예정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 직원들의 아파트 투자, 코스피 9000선 돌파에 따른 주식 차익실현이 부동산 유동성으로 유입되며 반도체 산업벨트인 화성 동탄신도시의 지난주 아파트값 상승률은 9%를 넘어섰다.전국 시·군·구 가운데 가장 높은 상승률이자 소비자물가 연 상승률의 세 배에 달한다. 부동산 정책은 단순한 '집값 관리' 차원을 넘어 자산 양극화, 초고령화, 금융 시스템의 안정을 연결한 거대한 구조적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부동산 과열현상이 자산 양극화로 이어지고 청년 세대의 박탈감과 결혼·출산 포기, 세대간 자산 격차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커지고 있다.
[기자노트]축제 같던 젠슨 황 방한, 공허한 환호로 끝나지 않으려면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 9일 4박 5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출국했다. 짧은 일정 속에서도 숨 가쁜 행보를 이어가며 한국 사회를 온통 '젠슨 황 열풍'으로 물들였다. 특히 우리에게 친숙한 장소들을 잇달아 방문하며 소탈하고 격의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방한 첫날 입국 직후 곧바로 e스포츠 게임단 T1이 운영하는 PC방을 방문했고, 같은 날 저녁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구광모 LG그룹 회장·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과 홍대 인근에서 삼소(삼겹살에 소주) 회동에 나서며 이례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이후에도 국내 유명 예능 토크쇼 촬영에 임하거나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 홈경기에서 시구자로 나서는 등 글로벌 기업 총수로서 보기 드문 일정을 잇달아 소화했다. 황 CEO의 꾸밈없는 모습에 대중들 역시 열광했다. 그가 가는 곳곳마다 구름 인파가 모였고 악수와 사진 촬영 요청 역시 끊임없이 쏟아졌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 그려진 팬아트를 들고 다니며 특별한 애정을 과시했다. 젠슨 황 특유의 셀럽 마케팅이 본인과 엔비디아의 호감을 높이며 긍정적인 브랜딩 효과로 이어졌다는 평가다. 다만 황 CEO가 한국을 떠난 지금, 화려하고 유쾌했던 순간들은 뒤로하고 우리가 보낸 환호에 걸맞은 성과가 있었는지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내 유수 기업 및 대학, 정부와 AI 팩토리·로보틱스·자율주행을 아우르는 AI 파트너십을 공고히 한 건 사실이나 주요 협력 계획을 구체화하기까지는 상당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관측되기 때문이다. 일례로 SK하이닉스·SK텔레콤 등은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바탕으로 AI 팩토리 구축에 나서기로 했으나 구체적인 로드맵과 생산 규모 등은 아직 논의 단계에 머물러있다. LG그룹도 엔비디아와 피지컬 AI 분야에서 협력을 진행 중인 건 맞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양사는 더 세부적인 협력 내용을 추후 캘리포니아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일각에선 엔비디아로에게 AI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GPU 시장에서 독보적 지위에 있는 엔비디아가 피지컬 AI 시장까지 선도하면서, 국내 기업들 역시 엔비디아를 중심으로 사업 전략을 구상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어서다. 반도체 기업에는 엔비디아가 최대 고객이고, 피지컬 AI 업체는 엔비디아 소프트웨어 생태계 없이 사업을 확장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가고 있다는 지적이다. 조준희 한국인공지능·소프트웨어산업협회장도 "GPU의 지배 사업자에 의해 피지컬 AI의 핵심인 로보틱스 파운데이션 모델(월드모델)까지의 종속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며 "제조강국인 대한민국이 왜 그들에게 상응하는 막대한 지원 없이 (단순한 쇼잉만으로) 협력할 이유가 있을까"라고 조언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에겐 2가지 숙제가 생겼다. 먼저 AI 시장의 핵심축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선 이를 선도하고 있는 엔비디아와의 협력을 계속해서 고도화해 나가야 한다. 이벤트성으로 마무리되는 협력이 아닌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AI 생태계에서 상부상조할 수 있는 관계가 돼야 한다. 국내 AI 인프라에 대한 실제적인 투자를 이끄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지나친 종속을 막기 위한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한국만의 AI 독자 기술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하며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전력·제도적 인프라 등도 적극 지원돼야 한다. 황 CEO와 함께했던 즐거운 축제는 막을 내렸다. 이제 그를 향해 보냈던 환호가 일회성 열기로 끝나지 않도록 내실을 다지고 AI 생태계를 선도하는 핵심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해야 한다.
[기자노트]'2030 남성 보수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시대마다 그 시대를 움직인 정신이 있었다. 1960년대에는 가난에서 벗어나 잘 살아보자는 열망이 산업화를 밀어붙였다. 1980년대에는 독재에 맞선 저항이 민주화를 이뤘다. 성격은 달랐지만 한 세대를 한 방향으로 묶은 분명한 지향이었다. 청년은 늘 그 한복판에 있었다.지금의 2030세대는 선 자리가 다르다. 산업화도 민주화도 이미 이뤄진 뒤다. 거대한 과업이 완수된 시대에 태어난 첫 세대다. 묶어줄 지향이 옅어지자 정당을 고르는 기준도 변화했다. 세대 정체성이 아니라 자기 이익과 손해 계산이 그 자리를 채웠다.6·3 지방선거에서 그 단면이 드러났다. 방송 3사 출구조사에서 20대 남성은 더불어민주당 33%, 국민의힘 55.8%를 지지했다. 30대 남성도 민주당 42.1%, 국민의힘 48.6%로 보수 우위였다. 반면 20대 여성은 66.4%, 30대 여성은 63.5%가 민주당을 지지했다.표면적으로 남성은 보수로, 여성은 진보로 갈렸다. 이를 두고 2030 남성이 보수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청년이 보수화된 게 아니라 저항의 대상인 기득권 세력이 바뀐 건 아닐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기존의 정치 문법으로는 이들을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민주당 계열 진보 진영은 2010년대 이후 지방선거와 총선, 대선에서 9승을 거뒀다. 국민의힘 보수 계열은 4승에 그쳤다. 최근 총선에선 진보 진영이 3연승을 거뒀다. 유례 없는 일이다. 최근 15년 사이 한국 정치의 주류가 보수에서 진보로 탈바꿈한 셈이다.주류의 얼굴은 586세대(50~6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다. 이들은 과거 독재에 맞서 싸웠다. 스스로를 진보라 부르며 평등을 말했다. 그러나 청년의 눈에는 자산과 지위를 쌓아 올린 또 다른 기성세대로 비쳤다. 청년들이 느끼는 불평등의 중심에 진보 편향의 기성세대가 있다.불평등에 대한 불만은 자산 문제에서 두드러진다. '재분배'와 '복지'는 이미 자산을 쥔 기성세대의 언어로 들린다. 자신들은 아직 사다리를 오르지도 못했는데 사다리를 나누자는 말로 읽힌다. 코스피 8000 시대, 실용주의적 시장 정책을 지지하는 '뉴이재명'(민주당이 아닌 이재명 대통령 개인 지지 흐름) 현상도 같은 맥락이다.그래서 2030 남성이 보수화됐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이들이 보수에 표를 준 것은 맞다. 그러나 보수가 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들은 기득권 세력이 된 민주당에 맞섰고 그 저항의 출구에 보수가 있었을 뿐이다. 청년이 맞선 상대가 진보라는 사실 자체가 달라진 지형을 보여준다. 진보는 더 이상 비주류가 아니고, 보수는 더 이상 주류가 아니다. 차기 총선의 승부처도 이곳이다. 2030의 표심은 아직 어느 정당에도 정착하지 않았다. 2028년 총선과 2030년 대선의 승리는 '민주화 대 산업화'라는 낡은 틀을 깨고 시대정신을 먼저 읽어내는 진영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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