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관통하는 어젠다를 제시하고, 구체적 해법을 모색하는 미디어 싱크탱크입니다.
지난주 캘리포니아 휴양지의 토스카나풍 별장. 하객 대상 토론회에 숲속 스파 피로연까지, 며칠에 걸쳐 이어질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신랑은 24세의 AI 전문 헤지펀드 설립자, 신부는 AI 선두 기업 앤스로픽 CEO의 비서실장이다. 신부가 주문한 콘셉트는 "유럽식 정원에 특이점 직전의 분위기"였다. 미국 경제매체 포천은 이들을 "AI 파워 커플"이라 불렀다.같은 시각 신랑은 자신을 스타로 만든 펀드가 보유한 상장 주식 전량을 헐값에 팔아치우고 있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는 사람은 극소수다." 신랑 레오폴드 아셴브레너가 2024년 인터넷에 공개한 165쪽짜리 에세이의 한 구절이다. 제목은 "상황 인식(Situational Awareness)", 그가 세운 펀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논문도 보고서도 아닌 이 글은 공개 직후 실리콘밸리의 필독서가 됐다.석 달 뒤 그는 펀드를 세웠다. 운용 경험은 전혀 없었지만 컬럼비아대 19세 수석 졸업, 오픈AI 연구원 출신이라는 이력..
시대를 관통하는 어젠다를 제시하고,구체적 해법을 모색하는 미디어 싱크탱크입니다.
2014년 업무차 세콰이어 캐피탈을 방문했다. 세콰이어는 유망 스타트업을 골라 초기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VC) 중에서도 세계 최고로 꼽히는 회사다. 사무실은 독특했다. 샌프란시스코 외곽의 골프장을 인수해 개조한 곳으로, 클럽하우스가 곧 일터였다. 압권은 로비였다. 로비의 가장 넓은 벽으로 그들이 투자한 회사 창업자들의 사진이 흘러갔다. 스티브 잡스(애플),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구글), 래리 엘리슨(오라클), 젠슨 황(엔비디아)…. 실리콘밸리의 역사가 벽 위를 지나가고 있었다.미팅 상대는 다리에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나왔다. 스위스에서 스키를 타다 다쳤다며, 대단히 재밌는 일이라도 겪은 듯 웃었다. 한국에 돌아와 이 회사가 궁금해 찾아봤다. 성과는 분위기보다 더 남달랐다. 21세기 IT 산업이 세콰이어의 자본을 먹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바탕에 깔린 철학은 홈페이지에 걸린 '우리의 신조(Our Ethos)'라는 글에 담겨 있었다."창의적인 영혼들. 언더독들. 결연한 자들. 굳센 자들. 지치지 않는 자들. 아웃사이더들. 굴하지 않는 자들. 독립적으로 사고하는 자들. 파이터들. 그리고 진정한 신봉자들."타임지 기자로 실리콘밸리를 취재하다 투자자가 된 마이클 모리츠가 쓴, 세콰이어가 '파트너로 삼고 싶은 창업자상'이다. 모리츠는 곧장 "이런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덧붙였다.드문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날 세콰이어 로비를 장식했던 얼굴들은 기질만 남달랐던 게 아니다. 상당수가 코딩에 능통하거나, 그런 공동창업자를 곁에 둔 이들이었다. 의지와 아이디어만으로는 혁신의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가장 '핫한' 새 프로그래밍 언어는 영어다." 요즘 AI 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안드레이 카파시가 2023년 한 말이다. 오픈AI 공동창업자이자 테슬라의 자율주행을 이끈 그는 파이썬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가 아니라 사람의 말로 컴퓨터를 부리는 시대가 온다고 내다봤다. 3년이 지난 지금 그의 '예언'은 현실이 됐다.카파시는 지난해 이 새로운 방식에 '바이브 코딩'이라는 이름도 붙였다. 영국 콜린스 사전은 지난해 이 신조어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카파시는 2025년 강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LLM은 기술이 확산하는 방향을 뒤집는다." 전기와 컴퓨터, 인터넷까지 거의 모든 기술은 정부와 대기업이 먼저 쥐었다가 한참 뒤에야 대중에게 흘러왔다. 반면 AI는 평범한 개인들이 먼저 썼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에게 먼저 도착한 기술'인 셈이다.세계 최고 개발자로 꼽히는 카파시조차 올해 "프로그래머로서 이렇게 뒤처졌다고 느낀 적이 없다"고 했다. AI 도구가 그만큼 좋아져, 전문가의 우위마저 빠르게 무너진다는 뜻이다. 최고와 보통의 거리가 좁혀지는 것, 그것이 '기술 민주화'의 가장 선명한 증거다.'바이브 코딩' 덕에 한 사람이 만들 수 있는 임팩트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이스라엘의 한 개발자는 말로 설명하면 앱을 통째로 만들어주는 서비스를 혼자 개발해, 외부 투자 없이 6개월 만에 1000억원 넘는 금액에 매각했다. 예전 같으면 엔지니어 수십명이 매달렸을 일이다. 한국에서도 같은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Z세대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영상 일기 앱 '셋로그'는 AI 시대 1인 창업의 산물이다. 입소문만으로 애플과 구글 앱마켓 SNS 부문 1위에 올랐고, 지금도 두 마켓 모두 1위다. 데이터 분석 업체 와이즈앱·리테일 집계로는 5월 월간활성이용자(MAU)가 778만명에 달했다. 이렇게 코드가 흔해질수록 귀해지는 건 '질문'이다. 와이어드를 공동창업한 기술사상가 케빈 켈리는 2016년 저서에서 AI가 발전할수록 "답은 값싸지고 질문은 값비싸진다"고 내다봤다. 답은 기계의 몫이 됐고, 질문은 인간의 몫으로 남았다. 무엇을, 왜 만들 것인가. 그 답은 현실의 문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2024년 아이들에게 코딩 대신 생물학과 제조업, 농업 같은 현장 전문성을 가르치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프로그래밍 언어는 인간의 언어"이고 "모두가 프로그래머"이기 때문이다.12년 전 세콰이어 로비의 벽을 채웠던 얼굴들을 기억한다. 그들처럼 되는 데 기술은 더 이상 필요조건이 아니다. 더 절실해진 건 현실을 이해하는 깊이, 그리고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려는 의지다. 거창한 무대도 필요 없다. 변화는 각자의 일터에서, 눈앞의 문제를 스스로 풀어내는 순간마다 일어난다. 혁신의 문은 이제 더 많은 언더독과 아웃사이더, 파이터들에게 열려 있다. 불합리·모순과 타협하지 않는 이단아들이여 그 문으로 들어서라.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2012년 봄 런던 세인트판크라스 기차역에서 대학 선배와 조우했다. 나는 파리행 유로스타를 타려고 갔고, 프랑스에서 유학하다 정착해 사업가가 된 그는 일 때문에 영국에 왔다고 했다. 다음 날 치러질 프랑스 대통령 선거 취재 출장 길에 오른 나는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사회당 열성 지지자가 투표 안 하면 어떡해요?" 그러자 그는 "투표는 동네 친구한테 부탁했어"라고 답했다. 내 표정에서 '이해 안 됨'을 알아차린 그가 "대리투표 제도라는 게 있어. 가족이나 이웃에게 위임장만 써 주면 돼"라고 설명했다.'내 표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민주사회에서 가능한 일인가? 서구 민주주의의 한 축인 프랑스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이 솟구쳤다. 나는 "부탁 받은 친구가 올랑드(사회당 대선 후보) 말고 다른 데 찍을 수도 있잖아요?"라고 물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그러니까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지. 배신해도 알 수는 없지만"이라고 대답했다.작은 충격이었다. 유럽 특파원으로 프랑스에서도 2년 동안 산 적이 있는데 대리투표(위임투표) 제도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한국에서 자라면서 선거의 4대 원칙(보통·평등·직접·비밀)을 외우고 또 외웠다. 대리투표는 언감생심,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멀쩡한 나라에서 버젓이 시행되고 있었다. 다음 날 프랑스 투표소 앞에서 달랑 종이 한 장짜리 투표 위임장을 들고 온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출장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와 알아보니 영국에서도 프랑스와 비슷한 대리투표제가 운영되고 있었다. 유럽에선 특이한 것도 아니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에도 있었다.프랑스 대리투표제는 약 100년의 역사를 지녔다. 출장·여행·입원 등으로 투표 날에 동네 투표소에 갈 수 없는 유권자를 위한 것이다. 과거에는 한 사람이 두 명까지 대리할 수 있었으나 2022년부터 한 사람(해외 체류자 대리 경우는 두 명까지)으로 제한됐다. 투표구가 다른 인척이나 친구에게도 위임할 수 있는데, 투표는 대리를 맡긴 사람의 지역으로 가서 해야 한다.대리투표제 도입을 주장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투표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에 지금의 한국인들이 동의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당장 매수 위험, 권력 관계에 따른 부정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요양원 거주자 집단 위임, 가족 간 억지 위탁 등의 문제가 있었다. 처벌 강화 등의 대응책이 나왔지만 일탈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리투표제를 소개하는 이유는 선거일에 투표하기 어려운 유권자를 위한 제도가 오로지 사전투표만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다.6·3 지방선거 진상규명위원장(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임명)을 맡았던 조현욱 변호사에게 21일 연락했다. 그는 앞서 19일 열린 진상조사 결과 발표 회견에서 사전투표 제도 유지 여부를 판단할 "공론화"를 언급했다. 그는 통화에서 "국민의 불신이 너무 커서 토론의 장을 열어 결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조 변호사는 "사전투표 투표지 보관과 이송 등의 과정은 엄정히 잘 이뤄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정선거 의혹이 쌓여가고 그 중심에 사전투표가 있어 존치 여부를 숙고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조 변호사는 몹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사전투표 신뢰 회복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내친김에 고위 법관 출신의 현직 중앙선관위원에게도 사전투표 존속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솔직히 말해 사전투표 관리에 선관위의 힘이 부치는 것은 사실이다. 과부담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불신 때문에 사전투표에 더욱 신경을 쓰다보니 본투표에서도 실수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익명을 부탁했다.한국은 2012년에 사전투표제를 도입했다. 지금의 여권인 민주통합당에서 주도했다. 한국의 뛰어난 행정(전산) 능력 덕에 통합선거인명부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로 직장이나 학교 근처에서 투표할 수 있게 됐다. 투표율이 올랐다. 그러나 5일 동안의 투표함 관리, 우편 발송, 별도 개표 등의 복잡한 과정이 수반됐다. 실수, 의혹, 음모론이 꼬리를 물고 재생산됐다. 사전투표와 본투표 사이의 후보자 사퇴로 '사표'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데도 투표를 미리 하고 선거일은 보통 휴일처럼 보내는 문화가 퍼졌다.사전투표제 안착의 핵심 조건은 사회 신뢰 자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공동체의 국가 시스템에 대한 믿음은 높지 않다. 한국 국가데이터처가 지난해 말 발표한 사회조사 결과에서 "우리 사회를 신뢰한다"고 대답한 비율은 54.6%에 그쳤다. 반면 한국인의 정치적 민감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런 현실을 바탕에 깔고 사전투표의 효용성과 역효과를 진지하게 따져 보자. 우편투표(독일에서 활성화), 투표 시간 연장 등의 대안도 있다. 최근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52.7%의 응답자가 사전투표 폐지에 찬성(44.2% 반대)했다. 언제나 옳은 제도는 별로 없다.
'호미(homie)'라는 말이 있다. 한 골목에서 자라 총알도 대신 맞아줄 사이를 부르는 미국 흑인 은어다. 그 세계에는 글로 적히지 않은 규칙이 있다. 떠서 큰돈을 만지면 남은 호미들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래퍼 MC 해머는 그 규칙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었다. 1990년 'U Can't Touch This'로 세계를 흔들고 이듬해에만 3300만달러를 벌어들인 그는, 고향의 '호미' 200여 명을 직원으로 들이고 매달 50만달러를 지급했다. 호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6년 그는 거액의 빚을 안고 파산했다. NBA 전설 앨런 아이버슨은 한때 50명에 이르는 식솔을 거두다 2억달러 가까운 돈을 날렸다. 학자들은 성공한 한 사람에게 공동체가 청구서를 내미는 문화에 블랙 택스(black tax)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에서는 반도체 '초과이윤'이라는 말이 블랙 택스의 유령을 불러낸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5월 반도체 호황의 과실을 "전 국민에게 구조적으로 환원"하자며 '국민배당금'을 말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반도체를 두고 "공공재"라 했다. 김 장관은 최근 한발 더 나아갔다. 로이터 인터뷰에서 그 과실을 협력업체와 나누는 방법으로 '단가 조정'을 제시하며, 이를 "공산주의가 아닌 명백한 재투자"라 했다.문제는 그 밑에 깔린 생각이다. '국민배당금'이든 '공공재'든, 두 말이 딛고 선 전제는 같다. 기업이 거둔 이익의 일부는 애초에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다. 두 사람은 그 몫을 '초과이윤'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산업을 지배하는 것은 초과이윤이 아니라 '초과위험'이다.메모리 반도체는 호황과 불황이 극단을 오가는 세계다. 기업은 수십조원을 먼저 투자하고, 그 결실은 몇 해가 지나서야 거둔다. 잘 된다는 보장은 없다. 불과 3년 전인 2023년만 해도 SK하이닉스는 7조원이 넘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은 15조원에 가까운 적자를 냈다. 지금의 이익은 그 위험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에게 주어진 보상이다.경제학은 이 점을 일찍이 정리해뒀다. 훗날 시카고학파의 뿌리가 된 프랭크 나이트는 1921년 펴낸 '위험과 불확실성, 그리고 이윤'에서 오랜 수수께끼를 풀었다. 기업이 큰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배경에는 '불확실성'이 있다는 것이다. 몇 해 뒤의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그 위험은 끝내 누군가 떠안아야 한다. 이윤은 그 짐을 짊어진 자에게 돌아가는 보상이다. 조지프 슘페터도 같은 결론에 닿았다. 이윤이란 남보다 먼저 새 길을 연 혁신가의 차지이며, 경쟁자가 뒤따르는 순간 허물어진다는 것이다. 메모리 기업이 받은 것이 정확히 이것이다. 그러니 이를 '정상을 넘어선 초과'라 부르는 건 번지수가 틀렸다. 이윤은 본래 들쭉날쭉한 불확실성의 대가일 뿐, 따로 잘라낼 '초과분'은 없다.그렇다면 남은 몫은 누구의 것인가. 위험을 짊어진 투자자와 그 성과를 만들어낸 임직원의 것이다. 그것을 나누든 다시 투자하든 그들이 정할 일이다. 지난달 삼성전자가 내놓은 5년간 5조원의 사회 환원 계획도 회사가 스스로 택한 것이다. 같은 환원이라도 기업이 정해 내놓는 것과 국가가 '모두의 몫'이라며 떼어 가는 것은 전혀 다르다.정부의 몫은 따로 있다. 호황은 이미 법인세라는 이름으로 나라 곳간을 채운다. 정부가 들여다볼 것은 그렇게 늘어난 '초과세수'를 어떻게 쓰느냐이지, 기업의 이익을 전 국민이 나눠 갖는 일이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8일 취임 1주년 회견에서 초과세수와 초과이윤은 "완전히 다르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메모리의 왕좌는 세습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1980년대 D램을 호령하던 일본은 90년대 들어 한국에 그 자리를 내주었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엘피다는 2012년 무너져 미국 마이크론의 품에 안겼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막대한 보조금을 뿌리며 우리의 뒤를 바짝 쫓는다. 미국은 칩스법으로 5년간 527억달러를 자국 반도체에 쏟아붓는다. '초과이윤'을 거둬 나누자는 발상이 어떻게 귀결되는지는 1970~80년대 스웨덴이 보여줬다. 노조가 연대임금제로 산업 전체에 똑같은 임금을 매기자, 잘나가는 기업일수록 덜 치른 임금만큼 이윤이 쌓였다. 노조 경제학자 뤼돌프 메이드네르는 그 이윤을 초과이윤이라 불렀다. 1975년 그가 내놓은 안은 대기업이 해마다 이익의 20%를 새 주식으로 찍어 임노동자기금에 넘기는 것이었다. 1983년 반대 시민들이 스톡홀름 거리를 메웠고, 누더기가 된 기금은 이듬해 도입됐다가 7년 만에 폐지됐다. 하지만 기업들은 그 결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테트라팩은 1981년 본사를 스위스로 옮겼고, 이케아는 1982년 회사 지분 전부를 네덜란드 재단으로 넘겼다.해머는 돈이 영원히 넘쳐날 줄 알고 호미들에게 퍼주다 파산했고, 스웨덴은 존재하지 않는 '초과이윤'을 나눠 가지려다 나라의 간판 기업을 해외로 내몰았다. 둘 다 허상을 좇은 대가였다. 위험은 지지 않으면서 있지도 않은 몫을 나누려 들면 정작 있던 과실도, 그것을 만들 사람도 사라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표면적 이유는 미국에서의 볼보 자동차 판매량이 1975년 6만338대에서 지난해 4만3887대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판매 감소는 국제 경쟁력 하락이라는 고질적 문제의 한 증상일 뿐이다. (중략) 더 큰 문제는 결근율이다. 볼보의 예테보리 본사 옆에 있는 토르스란다 조립 공장의 결근율은 20%에 달한다. 일부 근로자들은 1년에 평균 65일 결근하기도 한다.' 1977년 2월 21일자 타임지 기사 '스웨덴: 일하지 않아도 주는 급여(Sweden: Pay for no work)'의 일부다. ━이직률 50%까지, 무슨 일이?━ '1980년대 초 볼보 생산 현장은 조용하지만 파괴적 반란에 직면해 있었다. 주력인 토르스란다 공장의 일일 결근율은 최고 20%에 육박했고, 연간 직원 이직률은 40% 가까이로 치솟았다. 볼보가 라인을 계속 가동하기 위해서는 매년 수천 명의 신입 사원을 고용하고 교육해야 했음을 의미했다.' 1987년 뉴욕타임스 기사('Making cars the Volvo way')의 한 대목이다.볼보 자동차 공장 이직률이 50%에 달했다는 기록(스웨덴 왕립공대 논문)도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자동차 공장 일은 힘들고 지루하다. 포드가 컨베이어벨트 공정을 도입한 뒤 그게 국제 표준이 됐다. 고된 노동을 버티게 하는 힘은 급여다. 그런데 볼보 자동차 직원 급여는 중소 제조업체 직원이 받는 보수와 다르지 않았다. 볼보 경영진이 월급을 올려주고 싶어도 올려줄 수 없었다. '사회연대임금'이라는 제도에 금액이 묶였기 때문이었다.스웨덴도 제조업 붐이었던 20세기 초중반에 극심한 노사 갈등을 겪었다. 1931년 펄프 공장 파업 투쟁에서 군의 발포로 5명이 숨진 비극도 있었다. 파업, 임금 상승, 물가 인상이 꼬리를 물었다. 1952년 노사정 대타협이 이뤄졌다. 노총(LO) 소속 경제학자 두 명의 이름을 딴 '렌-메이드네르' 협약이 체결됐다. 노동을 수백 개 직무로 나누고 각 직무에 따라 보수를 책정했다. 예컨대, 용접공 임금은 자동차 대기업에 다니나 중소 부품 회사에 다니나 차이가 없게 됐다. 이른바 '동일 노동, 동일 임금'이다. 집권 사회민주당은 이 제도에 '사회연대임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우수 기술자들 바다 건너 서독으로━ 중소기업에선 임금이 올랐고, 대기업에선 임금이 깎였다. 어느 곳에선 인건비 비중이 줄었고, 다른 곳에선 부담이 치솟았다. 인건비 감당이 어려워진 한계 기업들이 연쇄 도산했다. 기술 경쟁력 있는 대기업엔 이득이 쌓였다. 수익성 떨어지는 기업에서 돈 잘 버는 기업 쪽으로 인력이 대거 이동했다. 자연스럽게 산업 개편이 이뤄졌다. 섬유 등의 경공업 비중이 줄고 기계·부품 등의 중공업에 무게가 실렸다. 정부가 사회연대임금 도입 때 의도했던 산업 고도화 구조조정이었다. 1970년대 초까지 볼보는 이 제도의 수혜자였다. 노동력을 저렴하게 쓸 수 있었다. 회사에 이익이 누적됐다. 그 돈으로 연구·개발을 열심히 했다. 3점식 안전벨트, '세이프티 케이지' 설계 등이 결과물이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차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성장은 거기까지였다. '튼튼하기는 한데 잔 고장이 많은 차'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높은 이직률에 숙련공 부족이 고착화됐다. 보수에 불만을 품은 기술자들은 대거 독일로 갔다. 발트해만 건너면 '라인강의 기적'을 일구던 서독이었다. 볼보는 전자 제어장치 활용 등의 새 트렌드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독일과 일본의 자동차가 시장의 강자로 급부상했다. 서독 정부는 이주 노동자에게 세제 혜택까지 줬다. ━43년 전 스웨덴이 버린 사회연대임금━ 볼보는 직원 이탈을 줄이기 위해 컨베이어벨트를 없애고 팀 제작 방식(8∼10명이 한 조로 차량을 제작)을 도입했지만 시장 경쟁에서 계속 뒤쳐졌다. 1983년 볼보는 사회연대임금 제도 탈퇴를 선언하고 급여 인상을 단행했다. 볼보에 이어 다른 기업들도 탈퇴 행렬에 들어섰다. 이로써 30여 년의 사회연대임금 역사가 끝났다. 그리하여 볼보는 다시 경쟁력을 되찾았을까? 그런 해피엔딩은 오지 않았다. 1980년대 말 트럭과 특수차량 부문을 제외한 일반 자동차 부문을 미국 포드에 매각했다. 그리고 2010년 포드는 볼보 자동차를 중국 지리(Geely) 자동차에 팔았다. 스웨덴의 다른 자동차 회사 사브(Saab)도 볼보와 비슷한 운명을 겪다가 미국 제너럴모터스(GE)에 인수됐고, 2016년에 회사가 아예 사라졌다. 독일 포르쉐의 터보엔진 기술은 독일로 간 사브 엔지니어에 의해 완성됐다. 중국에서 생산된 볼보 차에는 '메이드 인 스웨덴' 대신 '메이드 바이 스웨덴'이라는 문구가 달렸는데, 2023년 한국 세관당국은 소비자 혼동을 유발한다며 삭제를 요구했다. 오늘날 스웨덴엔 사회연대임금과 같은 평등주의적 정책의 흔적이 남아있을까?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를 소개한다. '스웨덴의 총 공공사회지출액은 국내총생산(GDP)의 24%로 미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중략) 스웨덴은 이제 인구 대비 억만장자 수에서 미국을 앞질렀다. 테크 스타트업 생태계와 게임 산업 덕분이다.' 지난달 말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사회연대임금' 도입을 위한 토론회을 제안하며 스웨덴을 언급했다. 스웨덴 사람들이 놀랄 일이다.
5월 22일 원달러 환율은 1520원으로 17년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 1년간 한국의 수출은 월 단위로 사상 최대치를 경신했지만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11% 가까이 떨어졌다. 한국은행은 기록적인 흑자 속에서도 원화가 약세를 보이는 현상을 달러가 외환시장으로 돌아오지 않는 "구조적 변화"로 진단했다.━흑자로 벌어와도 풀리지 않는 달러━사상 최대 흑자에도 환율이 약세를 면치 못한 1차 원인은 증시를 둘러싼 '비대칭적 수급'이다. 한 시중은행 외환딜러는 "과거에는 수출이 좋으면 원화가 강해지는 흐름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 공식이 약해졌다"며 "수출은 여전히 좋은데 해외 투자 확대 등으로 달러가 예전처럼 국내 현물환시장에 공급되지 않는 구조 변화가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2023~2025년 한국의 경상흑자 누계는 2556억달러다. 그러나 같은 기간 거주자가 해외 주식·채권을 사들 금액만 2527억달러에 이른다. 벌어들인 흑자를 가계와 기관이 해외 증권투자로 거의 그대로 내보낸 셈이다. 여기에 기업의 해외 직접투자 1231억달러까지 더하면, 빠져나간 달러가 외국인의 국내 투자 유입(증권 1110억달러·직접투자 477억달러)을 크게 웃돈다. 벌어온 달러보다 내보낸 달러가 많으니, 외환시장에서는 원화를 팔려는 힘이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 거주자의 해외주식 순매수는 2025년 분기 평균 280억달러로, 2024년(107억달러)의 두 배를 훌쩍 넘었다. '서학개미'가 분기마다 약 110억달러를 사들였고, 보험사·자산운용사·공적기금 등 기관이 나머지를 차지했다. 국민연금은 올해 환율 부담을 의식해 해외 비중을 공격적으로 늘리지는 않고 있지만, 장기 자산배분 계획상 국내 자산을 줄이고 해외 자산을 키워야 하는 구조여서 시차를 두고 원화를 팔아 달러를 사야 한다.수요가 이렇게 큰데 공급은 막혀 있다. 수출로 사상 최대 실적을 낸 기업들도 번 외화를 현지에 유보한다. 정부는 이 유보를 풀려고 2023년 외국 자회사가 본사에 보내는 배당에 세금을 거의 매기지 않는 제도(수입배당금 익금불산입)를 도입했지만 효과는 단발에 그쳤다. 그동안 해외에 쌓아둔 자금이 일시에 들어오면서 그해 직접투자 일반배당 수입이 144억달러에서 443억달러로 세 배로 뛰었지만, 그 증가분의 상당 부분을 삼성전자 한 곳이 송금한 약 226억달러(29.5조원)가 채웠다. 누적분을 털어낸 효과가 사라지자 기업들의 국내 송금액은 다시 줄었다. 달러 수급 비대칭 현상은 올해 들어 심화했다. 올해 1분기에도 거주자의 해외주식 순매수는 지난해와 비슷한 강도를 유지한 가운데(275억달러),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424억달러어치 팔아치우며 환율 상승을 주도했다. 서정훈 하나은행 연구원은 "주식시장 덩치는 커졌는데 외환시장의 체력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며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갈 때 외환시장이 이를 충분히 흡수하지 못하면 환율 변동성이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면 달러 유입은 더 줄었다. 삼성전자 별도재무제표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1분기 해외 자회사로부터 받은 배당 송금은 2500억원으로 평년 1분기(약 3.6조원)의 7% 수준으로 급감했다. 들여온 돈은 줄고 미국 공장 등으로 내보낸 돈은 늘면서, 삼성전자는 한 분기 동안 외환시장에서 달러 24억달러어치를 매수했다.━'고환율 고통'…물가, 내수, 기업 연쇄 파장━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5월 24일 코스피 급등에 따른 외국인의 차익 실현과 그 환전 수요를 환율 상승의 원인으로 짚으며,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을 "한국 경제가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성공의 비용"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여러 연구와 데이터는 고환율의 충격을 '성공의 비용'으로 치부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창용 전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해 12월 환율 상승이 "이익을 보는 사람과 손해 보는 사람을 극명히 나눈다"고 지적했듯, 고환율은 그 비용을 약한 쪽에 몰아주며 'K자 양극화'를 키운다.환율이 오르면 수입물가가 오르고, 그것이 소비자물가로 번지며 가계의 실질구매력을 깎는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환율이 10% 오르면 소비자물가가 6개월 뒤 최대 0.5%포인트 높아진다고 분석했다. 부담이 유독 무거운 건 한국의 구조 탓이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한국은 1차에너지의 약 96%를 수입에 의존하고 곡물도 상당 부분 수입한다. 약세의 충격이 에너지요금과 식탁물가라는 가장 피하기 어려운 항목부터 가계를 때리는 이유다. 타격은 기업으로도 번진다. 특히 원자재·중간재를 수입해 국내에 파는 내수·소비재 기업이 직격탄을 맞는다. 수출로 환차익을 누리는 기업은 소수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수출하는 중소기업은 전체의 1.2%에 그친다 .나머지 대부분 기업은 오른 수입원가를 떠안으면서 그것을 가격에 전가할 내수 여력도 충분치 않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제조업체 2208곳을 조사한 결과 38%가 고환율로 실적이 악화됐다고 답한 반면, 수출이 개선됐다는 응답은 8%에 그쳤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달러 강세로 환율이 오를 때는 물가 전가가 시간이 지나며 옅어지지만, 국내 요인으로 오를 때는 오히려 점점 짙어진다고 분석했다. 지금 한국의 약세는 바로 그 국내 요인, 자본유출이 주도한다. 원인이 구조적이라는 것은 그 부담 또한 일시적 충격에 그치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깊이 쌓인다는 뜻이다.━정교한 제도로 투자 늘리고 외화 유출 막는 일본━전문가들은 지금까지의 환율 안정책만으로는 이 특수한 상황을 풀 수 없다며 '꼬인 수급'을 직접 겨냥한 정책을 주문한다. 개입·금리·환헤지 같은 기존 수단은 흐름의 속도만 늦출 뿐, 원화로 자금이 모이게 하려면 결국 수요와 공급 양쪽을 손봐야 한다는 것이다.먼저 해외에 쌓인 기업 이익을 들여올 정교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도 2023년 외국 자회사 배당세를 한시 면제해 그해 직접투자 일반배당 수입이 세 배로 뛰었지만, 그 돈이 국내에 머물 이유까지는 설계하지 못해 효과는 한 해로 그쳤다.관건은 '설계'다. 조건부 세금 감면을 통해 기업이 번 돈이 국내로 들어와 생산적인 자본으로 귀결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미국의 연구개발(R&D) 세액공제는 기업이 전년보다 R&D 지출을 '늘린 만큼'에만 혜택을 줘, 단순히 비용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투자를 매년 키우도록 유도한다. 일본의 투자촉진세제 역시 해외가 아닌 국내 설비투자분에 한해 공제해, 자금이 국내 실물로 흘러야만 감세 혜택이 돌아가도록 했다. 들여온 돈이 국내 투자·고용으로 이어질 때만 보상하는 설계다. 일본 정부는 2026년 도입한 설비투자 감세 4000억엔이 그 10배인 연간 4조엔 규모의 설비투자를 끌어낼 것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외국 자회사 배당에 매기는 세금을 깎아줄 때도 이렇게 국내 투자·고용 증가분에 연계하면 국내 고용 창출과 함께 지속적이고 건전한 원화 수요를 만들 수 있다고 진단한다.국내 기업의 체질을 개선해 자본시장에서 원화 수요를 구조화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삼일PwC경영연구원이 블룸버그 자료로 집계한 결과 한국 상장사의 최근 10년 평균 자기자본이익률(ROE)은 8%로, 미국 15%의 절반 수준에 그쳤다. 2023년 말 기준으로는 5%까지 떨어졌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본질은 저하된 수익력과 인색한 주주환원이 투영된 적정한 평가에 더 가깝다"며, 단기적으로는 주주환원 확대,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체질 개선이 정공법이라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