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관통하는 어젠다를 제시하고, 구체적 해법을 모색하는 미디어 싱크탱크입니다.
HD현대중공업이 2024년 4월 페루 국영 시마(SIMA)조선소와 맺은 6406억원 규모 계약은 함정 4척을 파는 사업이 아니다. 호위함과 원해경비함 각 1척, 상륙함 2척 모두 페루 현지에서 건조된다. 한국 기업은 설계와 기자재, 기술을 넘긴다. 배를 파는 것이 아니라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계약이다.무기 수출의 성격이 이렇게 달라졌다. 구매국은 자국 공장에서 만들고, 자국에서 고치고, 자국 기술자가 다룰 수 있기를 원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무기·탄약 분야 자국 생산 비중을 대폭 끌어올리겠다고 공언했고, 유럽은 나토 재편 국면에서 역내 조달과 산업 참여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완제품을 실어 보내고 대금을 받는 거래는 성립하지 않는다.지난해 말 기준 국내 방산 4사의 수주잔고는 226조원이 넘는다. 사상 최대다. 그러나 계약서에 적힌 조건을 지킬 사람과 조직, 돈은 따로 준비돼 있지 않다.━법 조문은 있지만 권한이 없다━필리핀에서는 2022년 수출한 호위함 2척의 정비를 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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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나노미터(nm) 초미세 공정의 비용이 급증하며 '무어의 법칙'이 한계에 직면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전 세계는 컴퓨팅 패러다임을 바꿀 '퀀텀 점프'에 사활을 걸고 있다. 바로 양자(Quantum) 기술 개발이다. 업계 전문가들은 출범을 앞둔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와 20조원의 한국형 국부펀드가 이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반도체 강국 한국이 차기 성장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양자 기술 선점이 시급하지만, 막대한 초기 비용과 불확실성을 감당하며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을 민간 자본만으로는 건너기 어려운 탓이다.━"슈퍼컴 '수억 년' 난제, 단숨에 해결"... 연산 혁명이 2000조 시장 연다━양자컴퓨팅은 기존 컴퓨터의 0과 1(비트)이라는 이분법적 한계를 깬다. 양자 역학의 '중첩(Superposition)'과 '얽힘(Entanglement)' 현상을 이용하는 큐비트(Qubit)는 0과 1의 상태를 동시에 가질 수 있다. 이는 연산 속도의 차원이 다른 폭증을 의미한다.실제로 구글이 2019년 '양자 우위'를 선언한 데 이어 최근 IBM은 수천 큐비트급 프로세서를 통해 '양자 유용성(Quantum Utility)' 단계를 증명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구글 역시 오류를 스스로 수정하는 '논리적 큐비트' 구현에 성공하며 상용화 시계를 2030년에서 수년 더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는다.이 기술이 가져올 파급력은 단순한 '빠른 계산'에 그치지 않는다. 맥킨지(McKinsey) 등 주요 글로벌 컨설팅사들은 양자 기술이 AI와 결합하며 시장 개화 속도가 예상보다 빨라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2035년까지 창출할 가치가 2000조원을 상회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가장 기대되는 분야는 '물질 시뮬레이션'이다. 예컨대 전기차 배터리의 효율을 극대화할 새로운 양극재 분자 구조를 찾거나 수년이 걸리는 신약 후보 물질 탐색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양자컴퓨터는 비료 생산 공정을 개선해 전 세계 탄소 배출을 줄이고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는 반도체를 넘어선 전 산업의 제조 혁신을 의미한다. ━'창과 방패'의 대결... 국가 안보의 키(Key)━양자 기술은 미래 안보 분야의 열쇠도 쥐고 있다. 현재의 RSA 암호 체계가 양자컴퓨터의 연산 능력(쇼어 알고리즘) 앞에서 무력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가 지난 2024년 '양자 내성 암호(PQC)' 표준을 확정하고 전 정부 기관에 도입을 의무화하며 '암호 교체'를 서두르는 이유다.보안 전문가들은 'HNDL(Harvest Now, Decrypt Later)' 공격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해커들이 현재의 암호화된 국가 기밀이나 금융 데이터를 미리 탈취해 저장해두고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되는 순간 일시에 해독하는 시나리오다. 결국 양자 기술을 먼저 갖는 자가 전 세계의 데이터를 들여다보는 '창'을 쥐게 되는 셈이다.━국민성장펀드·국부펀드, '데스 밸리' 건널 구명줄이자 생태계 화수분━현재 글로벌 양자 기술은 미국과 중국이 주도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등에 따르면 한국의 기술 수준은 선도국 대비 약 85%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뒤처져 있지만 반도체 미세 공정 노하우를 살린다면 여전히 선도 그룹에 합류할 '골든 타임'이 남아 있다고 진단한다.문제는 기술이 산업이 되기까지 버텨야 할 시간과 비용이다. 아이온큐(IonQ) 등이 고성능 칩(예: 템포 등)을 내놓으며 기술력을 입증했지만 막대한 R&D 비용 탓에 여전히 적자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펀드 만기가 5~7년인 벤처캐피털(VC)이 10년 이상의 적자를 감내하며 딥테크 기업에 투자를 지속하기란 구조적으로 어렵다.업계가 국민성장펀드와 한국형 국부펀드에 기대를 거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민간이 유망 기업 발굴과 초기 검증에 집중한다면 이들 국가주도펀드가 대규모 자본 투입이 이뤄지는 '스케일업(Scale-up)' 구간에서 자금 공백을 메우는 전략적 투자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10년 단위의 시간을 견디는 '인내 자본'이 있어야 유망 기업이 데스 밸리를 넘어 '산업'으로 안착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국가주도펀드가 인프라 투자나 인수 금융과 같은 전통적인 자본 운용 방식을 통해 생태계 조성 효과를 거둘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양자 팹(Fab)·전용 테스트베드 같은 필수 인프라를 구축하면 자산 가치를 확보하면서 스타트업의 진입장벽을 낮출 수 있고, 핵심 기술을 보유한 해외 기업 인수 딜(deal)에 참여하면 투자 수익과 기술 격차 해소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150조원 규모 '국민성장펀드'의 첫번째 메가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로 전남 해남 솔라시도 AI(인공지능)데이터센터가 검토되고 있다. 글로벌 AI 패권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국가 차원에서 AI에 선제적이고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는 정부의 인식이 깔려 있다. AI데이터센터가 최우선 투자 대상으로 거론되는 이유는 크게 4가지다. △국내 AI 이용 수요 충당 △고수익 기대 △데이터주권 보호 △국산 AI 반도체 수요처 창출 등이다.━AI데이터센터 수요 폭발에 공급 병목━현재 글로벌 데이터센터 시장은 단순한 '확장기'를 지나 폭발적인 수요와 제한적인 공급이 충돌하는 '슈퍼 사이클'에 진입했다는 지적이다. IT(정보기술) 업계에선 AI 시장이 질문에 답하는 '챗봇(Chatbot)' 단계를 넘어 AI가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행동하는 '자율 에이전트(AI Agents)'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분석한다. 이는 데이터 수요의 급증을 초래하는 핵심 트리거(Trigger)로 꼽힌다. 과거 데이터 트래픽은 입력 속도와 수면 시간 같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에 종속돼 있었지만 AI 에이전트 시대에는 기계가 기계와 소통하며 24시간 데이터를 생성한다.예컨대 인간은 몇 차례의 검색만으로 여행 계획을 수립하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하는 AI 에이전트는 항공권과 숙박 예약, 현지 동선 최적화를 위해 외부 플랫폼과 복잡한 API 통신을 주고받으며 수천 회의 연산을 통해 최적해를 도출한다. 단일 작업을 위해 소모되는 연산량과 데이터가 기존 대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구조다. 엔비디아(NVIDIA)의 젠슨 황 CEO(최고경영자)가 "향후 추론 수요가 10억 배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반면 데이터센터 공급은 심각한 병목 상태에 놓여 있다. 상업용 부동산 서비스 기업 CBRE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기준 북미 주요 데이터센터 시장의 공실률은 1.6%로 역대 최저 수준이다. 이는 전력과 부지 확보의 어려움으로 신규 공급이 제한된 결과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구조적 공급 부족 국면에서 AI데이터센터에 투자할 경우 향후 수십 년간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AI데이터센터의 수익률은 전통 인프라 자산을 웃돈다. 도로와 항만 등 민자사업의 기대 수익률이 연 4~5% 수준인 반면 데이터센터의 자본환원율(순영업소득/자산가치)은 6~7%대에 형성돼 있다. 여기에 전력 공급 확약과 인허가 신속 처리 등 정책 지원이 더해질 경우 내부수익률(IRR)이 2~3%포인트 상승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 경우 연 8~10% 수준의 수익률도 기대할 수 있다.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아마존웹서비스(AWS), 구글 등 하이퍼스케일러(Hyperscaler)들은 한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는 추세다. 싱가포르의 전력난 등 대외 변수 속에 한국의 우수한 전력 품질과 통신 인프라가 부각된 결과다. 업계에서는 한국이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시아태평양(APAC)의 핵심 디지털 거점으로 격상된 것으로 평가한다. ━국내 AI데이터센터, 선택 아닌 필수━일각에서는 이미 고도화된 글로벌 빅테크의 인프라를 활용하는 대신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자체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것에 대한 회의론도 제기된다. 그러나 자율주행이나 로봇 제어처럼 지연 시간이 치명적인 서비스는 해외 서버가 아닌 국내 '엣지(Edge)' 데이터센터에서 처리돼야 한다. 엣지 데이터센터는 데이터 생성 지점이나 사용자와 가까운 네트워크 가장자리에 위치한 것을 말한다.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디지털 지도 반출 관련 논란이 그 사례다. 이밖에도 행정·금융·의료·국방 등 국가 핵심 데이터가 해외 서버에 저장될 경우 해당 국가의 법령이나 외교 환경에 따라 접근이 제한될 수 있다. 자체 인프라가 없으면 국내 기업이 고가의 사용료를 지불하며 해외 자산을 임차해야 해 글로벌 빅테크의 가격 정책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데이터 보안 전문가는 "식량 안보를 위해 농지를 지키듯 데이터 안보를 위해 물리적인 '소버린 AI 요새'를 국내에 보유해야 한다"고 했다. 업계에선 향후 국내 AI 이용 수요에 비춰볼 때 전력소비량 기준으로 최소한 1기가와트(GW) 규모의 AI데이터센터 건설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생성형 AI 확산으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향후 5년 내 현재의 2~3배로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해서다. 이 경우 약 50조원의 비용이 소요된다. AI 데이터센터 투자는 크게 건물과 설비를 짓는 '코어 인프라'와 그 안을 채우는 'IT 자산'으로 나뉜다. 건축 및 전력 설비 비용으로만 15조~20조 원이 소요된다. 여기에 GPU(그래픽처리장치)와 AI 서버, 네트워크 장비 등 핵심 IT 자산 확보에 전체 비용의 60%가 넘는 30조~35조 원이 투입돼야 하는 구조다.AI데이터센터 건설을 위한 50조원 규모의 투자는 국내 산업 전반에 막대한 파급 효과를 가져올 전망이다. 반도체 업계는 국산 HBM과 차세대 AI 가속기의 대규모 수요처이자 '테스트베드'를 확보하게 된다. 전력기기와 냉각 설비 분야 역시 성장 기회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건설 업계는 글로벌 데이터센터 시장 진출을 위한 시공 실적을 확보할 수 있다. 정책적 시너지도 기대된다. 대규모 전력 소비 거점을 지방에 구축하는 것은 송배전망 효율화를 꾀하는 정부의 '에너지고속도로' 정책과 맞물려 국가 전력망 안정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분석된다. 송배전 효율 등을 고려해 장기적으로 신재생에너지 전력 공급이 늘어날 새만금 지역 등을 입지로 선택하는 방안도 업계에선 거론된다. 금융투자업계 전문가들은 AI데이터센터 건설과 관련, 리스크 관리를 위해 역할 분담 구조가 필요하다고 제언한다. 건물과 전력, 냉각 설비 등 기반 시설은 국민성장펀드나 한국형 국부펀드가 투자해 토대를 닦고, 교체 주기가 짧고 감가상각이 큰 GPU와 서버에 대한 비용은 입주 기업이 부담하는 방식이다. 자산 성격에 맞춰 투자 주체를 나누는 것이 막대한 초기 비용 부담을 줄이고 사업의 안정성을 높이는 해법이라는 분석이다.
#. 2001년 3월, 싱가포르 1위 통신사 싱텔이 호주 통신사 옵투스의 인수를 결정했다. 인수 금액은 172억 호주달러(당시 약 19조원). 인수 검토부터 완료까지 걸린 기간은 단 7개월에 불과했다. 싱텔의 지분 51%를 보유한 최대주주 '테마섹 홀딩스'가 투자 결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다.테마섹 관계자는 20일 동행미디어 시대에 "싱텔이 통신사(옵투스)를 인수하려 했을 때 테마섹과 상의하지 않았고, 싱가포르항공이 수십억 달러 상당의 항공기를 구매했을 때도 그 소식을 신문에서 접했다고 테마섹 전 회장은 말했다"며 "싱가포르의 대통령이나 총리 등 정부는 테마섹의 투자나 기타 사업, 기업 결정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테마섹은 싱가포르 재무부가 100% 지분을 보유한 글로벌 투자지주회사다. GIC(싱가포르투자청)처럼 국부펀드로 분류되지만, 해외 투자에 집중하는 GIC와 달리 국내 산업 육성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1974년 6월 정부 기금으로 3억5400만 싱가포르달러(당시 약 700억원, 1억4500만 달러)를 조성하며 시작됐다. 이후 순가치는 지난해 3월 기준 4340억 싱가포르달러(당시 약 450조원, 3250억달러)까지 불어났다. 초기 자본금 대비 643배 성장한 셈이다. 연평균 수익률 14%를 기록 중이다. 테마섹의 투자 대상 가운데 41%가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의 연결 매출액은 총 1500억 싱가포르달러(약 170조원)이고, 싱가포르에서만 약 16만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다.테마섹의 핵심 투자 분야는 △디지털화(digitization) △지속가능한 삶(Sustainable Living) △소비의 미래(Future of Consumption) △장수 시대(Longer Lifespans) 등 4가지다. 디지털화를 주도하는 AI(인공지능), 데이터, 사이버보안 등 분야에 집중 투자한 결과 테마섹은 현재 엔비디아를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데이터브릭스 등 빅테크의 주식을 상당부분 보유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삶 차원에선 재생에너지와 저탄소 솔루션 기업 등에 주목했다. 열 펌프 기반 청정에너지, 암모니아 전력 솔루션, 분산 태양광 개발 등 기술력이 우수한 '딥테크 스타트업'에 투자가 집중됐다. 소비의 미래 분야의 경우 전자상거래, 디지털 결제와 관련해 텐센트, 메이트완 등 중국 테크기업은 물론 자국 내 물류·소비 플랫폼인 메이플트리 등에도 집중 투자했다. 장수 시대에 맞춰 헬스케어와 바이오 분야도 주된 투자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한국의 셀트리온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병원 체인 등 전 세계 혁신기업을 찾아 지분을 확보했다. 자국 내 혁신 의료 서비스, 병원 네트워크 스타트업에도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산업 육성에 힘을 보태고 있다.━성공한 싱가포르, 실패한 말레이시아━ 재정경제부는 올 상반기 초기 자본금 20조 원 규모의 '한국형 국부펀드'의 마스터플랜(재원·투자 범위·지배구조·운영체계)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또 정부는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올해부터 5년간 30조원씩, 총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도 출범한다. 두 국가주도펀드 모두 테마섹과 같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선 2가지를 벤치마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첫째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거버넌스(조직체계) 구축, 둘째 나눠주기 방식이 아닌 국가 미래산업 육성 등을 위한 집중투자다.투자의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해 국부펀드가 제 역할을 못한 대표적인 사례가 싱가포르의 이웃국가인 말레이시아다. 말레이시아는 2008년 테렝가누투자청(TIA)을 통해 33억달러(당시 약 3조6500억원), 2009년 '하나의 말레이시아를 위한 국가 개발 투자회사'(1MDB)에서 11억2500만달러(당시 약 1조3000억원)를 조성했다. 국가 전략산업 투자와 글로벌 자본 유치 등을 목표했지만 나지브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국부펀드 관련 인사권과 투자 권한 등을 독점했다. 첫 해외 투자 건부터 자금을 무리하게 투자했고, 결국 나지브 전 총리가 국부펀드를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등의 부패 스캔들이 터졌다. 이후 펀드는 2016년 재정 파산 직전까지 갔고 현재까지 잔여 부채를 상환 중이다.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만약 국민성장펀드와 한국형 국부펀드가 정치권 낙하산과 관료들의 회전문 인사 수단이 된다면 싱가포르가 아닌 말레이시아의 길을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파급력 큰 AI·바이오·양자에 집중투자해야━ 국민성장펀드의 목적은 첨단 전략산업 육성이다. 5년간 △직접투자 15조원(기금 7.5조원 + 민간 7.5조원) △간접투자 35조원(기금 7.5조원 + 민간 27.5조원) △인프라투융자 50조원(기금 10조원 + 민간 40조원) △초저리대출 50조원(기금 50조원) 등 150조원이 투입된다. 투자 대상은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바이오·백신 △수소·연료전지 △항공우주·방산 △모빌리티 △원전 △미디어·콘텐츠 △로봇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른다.그러나 국민성장펀드가 실질적 성과를 거두려면 여러 분야에 골고루 나눠주는 방식보단 파급력이 큰 일부 산업에 전략적으로 집중 투자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AI, 바이오, 양자 분야가 최우선 투자 대상이 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유회준 KAIST 인공지능반도체대학원장은 "n분의 1로 예산을 나눈다면 단기적으로 연구자들이 만족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나라에 남는 게 없다"고 말했다. 유 원장은 "AI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하고 나머지는 계속 추격해야 한다"며 "AI 반도체는 국가 기술력의 상징이자 미래 국방력과 산업에 기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유 원장은 한국 반도체 기술이 여전히 경쟁국은 넘어설 수 없는 '초격차'를 유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AI 시대에도 반도체가 기반 기술이라며 지속적인 투자를 강조했다. 바이오, 양자 분야 역시 반도체를 활용하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1GW 이상 AI데이터센터 필요━ AI 분야의 경우 데이터센터 건설이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로 지목된다. 현재 국내 AI 이용 수요 증가 추세에 비춰보면 전력소비량 기준으로 최소한 1기가와트(GW) 규모의 AI데이터센터가 추가로 필요할 전망이다. 일각에선 현재 AI 시장을 구글 등 미국의 빅테크와 중국 기업 등이 주도하고 있는데 굳이 국내에 데이터센터를 구축해야 하느냐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자율주행 자동차나 로봇 등 데이터 송수신 시간이 결정적인 분야는 국내 데이터센터가 필수적이다. 국가 핵심 데이터가 해외 서버에 저장될 경우 이른바 'AI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또 AI데이터센터는 공급 부족 탓에 연간 최대 10% 이상의 고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전통 인프라 자산을 웃도는 수익률이다. 도로와 항만 등 민자사업의 기대 수익률이 연 4~5% 수준인 반면 데이터센터의 자본환원율(순영업소득/자산가치)은 6~7%대에 형성돼 있다. 여기에 전력 공급 확약과 인허가 신속 처리 등 정책 지원이 더해지면 내부수익률(IRR)이 2~3%포인트 상승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 경우 연 8~10% 수준의 수익률도 가능하다. 시장에선 전남 해남 솔라시도에 건설될 AI데이터센터와 해상풍력 배후 단지가 국민성장펀드의 투자 대상 중 하나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현재 해남군은 66만㎡ 부지에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있고, 화원 산단에 20만㎡의 해상풍력 배후 단지를 만들고 있다. 국민성장펀드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해상풍력과 AI 데이터센터 연계 투자가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고 전했다.━"K양자기술 승산 있다"━ 한국 뿐 아니라 선진국의 고령화로 수요가 확대되는 바이오 분야에 대한 집중투자 필요성도 제기된다. 특성상 장기간의 연구개발(R&D)과 전임상·임상시험 기간을 거쳐야 하는 바이오 분야는 민간 자본만으론 초반 데스밸리(창업 위기기간)를 버티기 어려운 만큼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KAIST 등에서 배출되는 의과학자들이 창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초기 스타트업 지원 펀드 등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양자 분야는 경제 뿐 아니라 안보 차원에서도 투자가 절실한 분야다. 양자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리지 않으면 국내 대·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술탈취 가능성 뿐 아니라 군사기밀 유출 가능성도 높아진다.양자컴퓨터는 0과 1만 활용하는 디지털 컴퓨터와 달리 양자 역학 원리에 따라 0과 1을 중첩해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연산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다. 구글이 슈퍼컴퓨터로 1만년 걸릴 계산을 양자컴퓨터로 200초 만에 풀었다고 발표한 게 대표적이다. 양자컴퓨터는 신약 개발 등 분야에서도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한다. 국내 전문가들은 한국이 양자컴퓨터 분야에선 다소 뒤처져 있지만 양자암호통신과 양자센서는 비교 우위에 있다고 진단한다. 한국이 강점을 지닌 반도체 등 제조업을 접목하면 미국 등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력이 가능하다는 분석이다.한상욱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양자기술활용연구거점 사업단장은 "앞으로는 양자의 활용과 산업화 쪽으로 투자의 무게를 옮겨야 한다"며 "한국은 ICT(정보통신기술) 강국인 만큼 전자계측 장비, 알고리즘, 반도체 공정 기반 QPU(양자처리장치) 제조 등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