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관통하는 어젠다를 제시하고, 구체적 해법을 모색하는 미디어 싱크탱크입니다.
HD현대중공업이 2024년 4월 페루 국영 시마(SIMA)조선소와 맺은 6406억원 규모 계약은 함정 4척을 파는 사업이 아니다. 호위함과 원해경비함 각 1척, 상륙함 2척 모두 페루 현지에서 건조된다. 한국 기업은 설계와 기자재, 기술을 넘긴다. 배를 파는 것이 아니라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계약이다.무기 수출의 성격이 이렇게 달라졌다. 구매국은 자국 공장에서 만들고, 자국에서 고치고, 자국 기술자가 다룰 수 있기를 원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무기·탄약 분야 자국 생산 비중을 대폭 끌어올리겠다고 공언했고, 유럽은 나토 재편 국면에서 역내 조달과 산업 참여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완제품을 실어 보내고 대금을 받는 거래는 성립하지 않는다.지난해 말 기준 국내 방산 4사의 수주잔고는 226조원이 넘는다. 사상 최대다. 그러나 계약서에 적힌 조건을 지킬 사람과 조직, 돈은 따로 준비돼 있지 않다.━법 조문은 있지만 권한이 없다━필리핀에서는 2022년 수출한 호위함 2척의 정비를 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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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집 앞 시위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상투적 장면(클리셰)이다. "갑시다"라는 엑스트라 배우의 대사, 붉은 머리띠, 커다란 글씨의 피켓이 의례적으로 등장한다. 대체로 불행한 폭력 사태로 귀결되는데, 종종 '재벌집 막내아들' 진도준이나 '눈물의 여왕' 홍해인처럼 선량한 회장 가족의 온정적 도움으로 아름다운 결말을 맺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었으면 진작 해결됐을 것이다. 삼성전자 노조가 이재용 회장 집 앞 집회를 예고했다. 자신들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성과급을 맞춰주지 않으면 서울 한남동에서 골목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한다. "이 회장이 결심하라"는 압박이다. 한국의 양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단체는 지난 30여 년 동안 '제왕적 리더십' 해체를 요구해왔다. "기업 오너 한 마디에 모든 게 좌우되는 전근대적 경영에서 벗어나자"고 했다. 투명한 시스템 경영, 민주적 경영의 필요성을 주창해왔다. 노조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그 방향을 지지했고, 실질적 진전이 있었다. 오너가 아닌 이사회의 경영, 주주 이해 우선 제도가 하나둘 만들어졌다. '황제 회장' 폐지를 주장해온 노조가 '오너가 결단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를 말하면서 대통령이 총리와 장관, 나아가 실무자가 할 일에까지 직접 나서길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통령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주주가 회사의 공식 기구를 뛰어넘는 결정을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구시대적 운영이다. 우리 사회는 '회장 집 앞 시위'에 관대하다. 법에 정해진 기준을 벗어나도 공권력이 제지하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 한 세대 간 집회·시위 보장이 우선적 가치로 여겨졌다. 절박한 호소를 위한 최후 수단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바탕이 됐다. 비참하게 해고됐는데 법적 절차로 구제되지 못했을 때, 그 누구도 억울한 사정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회장 집 앞으로 갔다. 다소 물의가 빚어져도 사회가 용인했다. 언론도 대체로 대문 밖 사람 편에 섰다. 삼성전자의 성과급 갈등은 이런 일과 궤를 함께 하지 않는다. 긴급하고 억울한 사정의 사안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임금 체불, 무단 해고와 같은 생존권의 문제가 아니다. 이재용 회장이 두문불출로 직원들을 피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상적으로 출퇴근 하고 있다. 노조의 항의가 불가피하면 사업장에서 하면 된다. 이런 일로 집 앞 시위를 벌이면 정작 필요한 사람들이 할 때마저 행패로 간주되며 외면당한다. 정말 최후의 수단만 남은 이들을 더욱 궁지로 모는 '절박함 가로채기'라고 볼 수 있다. 최근 법원은 기업 경영진 자택 앞 시위를 제한해왔다. 집회 금지 가처분 신청에서 인용 판결이 잇따랐다. 판사들이 '그곳에서 그렇게 할 필요'에 동의하지 않는다. 법률 용어로 '상당성 부족'이다. 노조의 '망신 주기'에 불과한 행위에 가족이나 주민까지 애꿎은 피해를 입는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사적 영역에 대한 존중, 생활권 보장이 어느덧 사회적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도 노조는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는 것처럼 집 앞으로 몰려가 장송곡이나 상여 소리, 운동 가요가 주택가에 울려퍼지도록 한다. 노조원들은 경찰의 제지나 법원 결정 무시에 따른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음 기준 위반은 수십만원의 과태료나 벌금에 그친다. 그 돈은 노조의 투쟁기금에서 조달되고, 노조 간부의 전과는 훈장이 된다. 열일하는 선명한 노조의 상징이다. 업무방해 고소 등으로 사태가 번지기도 하지만 결국 회사는 취소나 처벌 불원서 제출로 끝을 맺는다. 삼성전자 노조가 회장 집 앞 집회에서 요구하겠다는 것은 노동 가치 인정이 아니라 제왕의 결단이다. 평소에는 "독단 경영을 멈추라"고 말하더니 지금은 그 권능을 발휘해 "통 큰 결단을 하라"고 압박한다. 이런 직 거래 요구는 정당한 노조 활동의 선을 넘은, 정상적 경영에 대한 위협이자 시스템 부정이다. 투쟁이 성공하면 실무자들이 허수아비가 되고, 주요 노사 이슈가 오너의 마음에 종속된다. 기업 거버넌스 퇴보가 아닐 수 없다. 세계 산업을 이끄는 한국의 1등 기업 노조에 걸맞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다.
한때 국방 예산만 1000조원에 달한다고 붙여진 '천조국'이라는 미국의 별명도 이젠 옛말이다. '천조국'이 된 지 4년 만인 내년엔 '이천조국'의 자리에 올라설 전망이다.미 전쟁부는 현지시간 21일 공식 예산 홈페이지(comptroller.war.gov)를 통해 '2027 회계연도 전쟁부 예산 개요서(Budget Overview Book, 이하 예산안)'를 공개했다. 총액은 전년 대비 약 44% 증가한 1.5조달러(약 2265조원)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2차 대전 이후 최대 수준의 증액 시도"로 평가했다. 예산안에는 동맹국들의 자위권 확보를 강조하며 "GDP의 5% 수준의 국방비 편성"을 촉구하는 내용도 담겼다. ━드론 앞세워 무인 전투체계 '총력전' ━ 예산안은 드론의 신속한 실전 배치를 목표로 하는 '드론 주도권 이니셔티브'에 536억달러(약 78조원)를 편성했다. 여기에 무인 위협 대응을 위한 대드론(C-UAS) 방어 체계 예산 210억달러를 합산하면 드론 관련 총 투자액은 740억달러(약 109조원)를 웃돈다.드론 공격 체계 구축을 총괄하는 국방자율전투단(DAWG)의 예산은 전년 2억2500만달러에서 540억달러로 240배 급증했다. DAWG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 저비용 드론 신속 배치를 목표로 추진된 '리플리케이터(Replicator)' 사업을 확대 계승한 조직으로, 소모성 소형 드론 중심에서 장거리 무인 체계까지 임무 범위를 확장해 드론 전력화를 총괄하고 있다. ━재래식 전력도 대폭 강화━해군 예산은 1962년 이후 최대 규모인 872억달러가 편성됐으며, 이 중 658억달러가 함정 건조에 투입된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마러라고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신형 대형 전함 '트럼프급 전함(Trump-class)'을 핵심으로 하는 '황금 함대(Golden Fleet)' 구상을 공식 발표했다. 미 군사매체 브레이킹 디펜스는 '황금 함대'를 신규 대형 전함들을 다수의 소형 무인 함정과 결합한 신형 해군력 구상으로 소개했다. 이번 예산안에는 트럼프급 전함의 설계 및 선행 개발 비용으로 18억달러가 신규 편성됐다.미사일·탄약 예산은 이란전 등 교전 상황에 따른 재고 보충 수요를 반영해 전년 대비 약 180% 증가한 679억달러가 책정됐다.━미래전 위해 AI·우주 분야 투자 강화━ AI 분야에는 585억달러가 투자된다. 이 중 460억달러는 정부 소유의 슈퍼컴퓨팅 인프라인 '소버린 AI 병기창(Sovereign AI Arsenal)' 구축에 집중 투입된다. 우주군 예산도 전년 대비 77% 증가한 712억달러로 확대된다. 우주군은 극초음속 미사일을 실시간 추적하는 다층 위성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군사 위성 발사를 위해 연간 31회의 로켓 발사를 계획하고 있다.우주 기반의 미사일 요격 체계인 '골든돔' 프로그램에는 179억달러가 배정됐다. BBC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지구 반대편에서 발사된 미사일은 물론 우주에서 발사된 미사일까지 요격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골든돔 추진을 공식화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임기 종료(2029년 1월) 이전 실전 배치 일정도 제시했다.━불붙은 글로벌 군비 경쟁━미 전쟁부는 예산안에서 "동맹국이 GDP의 5%를 국방비로 지출하는 새로운 글로벌 표준"을 제시하고, 동맹국들이 미국의 지원 의존에서 벗어나 자국 방위를 자국이 책임지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명시했다.세계적인 국방비 증가 흐름은 이미 진행 중이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유럽 NATO 회원국의 국방비 지출은 지난해 전년 대비 11.7% 증가했으며, 32개 회원국 중 18개국이 처음으로 GDP 대비 2% 기준을 충족했다. NATO는 지난해 6월 헤이그 정상회의에서 '2035년까지 GDP의 5% 지출'을 목표로 결의했다. 아시아도 이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일본 교도통신은 지난 17일 일본의 2026 회계연도 방위 예산을 10.6조엔(약 98조원·2022 회계연도 GDP 대비 1.9%)로 보도했다. 1976년 이후 반세기 가까이 지켜온 '방위비 1% 이내 억제' 원칙을 사실상 폐기하며 군비 증강에 속도를 내고 있는 것이다. 대만 중앙통신에 따르면 대만의 올해 국방 예산은 전년 대비 23% 늘어난 약 6470억 대만달러(약 27조원)로, 2009년 이후 처음으로 GDP의 3%를 돌파했다(3.3%). 한국의 국방비는 지난해 기준 GDP의 2.3% 수준이다.
"도대체 어디에 얘기를 해야 하는 지 알 수 없었죠. 너무, 너무, 답답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인텔리빅스의 최은수 대표가 말했다. 사연은 이렇다. 이 회사는 업력 26년의 '관제 시스템' 설치 회사다. CCTV를 진화시키는 데 노력해왔다. 카메라 영상 속의 '이상 현상'을 인공지능(AI)이 인식해 관제 시스템에 경고 메시지를 띄우는 기술을 개발했다. 산업 현장과 주요 시설물의 위험을 CCTV로 파악해 관리자에게 바로 알려준다. 그리고 수년 전에 폭설, 폭우, 짙은 안개 속에서도 200m 이내의 사물을 식별해 영상으로 표출하는 기술을 확보했다. 이 업체는 이런 기술이 국방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했다. 악천후에도 특이 징후를 포착하는 전방과 해안의 감시 장비로 활용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2년 전부터 국방부와 방위사업청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아직도 문 턱 주변에 있다. "어렵사리 군수 관계자를 만나 설명했더니 군 품목 분류 체계 때문에 일반 CCTV만 조달 가능하고 우리 것 같은 특수 장비는 항목 자체가 없다고 했어요." 최 대표 말이다. "기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 벽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죠." 이 회사는 '방산혁신기업 100'이라는 제도가 있음을 알게 됐다. 방위사업청이 2022년부터 올해까지 한 해 20개씩 총 100개의 방산 분야 혁신 기업을 선정해 지원하는 사업이다. 2024년에 여기에 지원했다. 온갖 서류를 갖춰서. 그러나 탈락했다. 그리고 지난해 재수를 해 성공했다. 인텔리빅스는 지난해 가을 '서울 국제 우주항공 및 방위산업 전시회(ADEX)'에 참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이 회사 부스에 방문해 설명을 듣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됐다. 이 대통령은 이날 "민간 기술을 군에 접목해 첨단산업을 이끄는 촉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텔리빅스의 AI 카메라가 국군에 쓰일 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최 대표에 따르면 '방산혁신기업 100'에 선정된 뒤 군에서 수개월째 성능 테스트 중이다. 시험을 통과해도 갈 길이 멀다. 까다로운 군납 절차가 기다리고 있다. 군 예산 확보도 필요하다. 부지하세월이다. 민간에는 AI 카메라가 장착된 사족보행 로봇이 순찰을 도는 곳이 있다. 세상과 군의 기술 적응 속도 차가 크다. 최 대표는 지난해 10월 국회의 한 토론회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한국 군 획득 시스템의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2000년대 중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급조폭발물(IED)에 의한 미군 사망자가 급증했다. 군용 차량 아래에서 IED가 터지는 사건이 속출했다. 당시 미 국방부 군수 담당 차관이었던 애쉬 카터는 험비의 하부에 V자(충격 분산용) 형태의 장갑을 부착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예일대와 옥스퍼드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그는 방법을 찾다가 이미 그런 구조의 차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지뢰 제거 작업에 쓰인 것이었다. 카터는 그 차량을 만든 회사가 곧바로 미군에 납품할 수 있도록 국방부 장관(로버트 게이츠)에게 '긴급 조달' 명령을 내려달라고 했다. '관료주의적 절차가 장병들의 생명보다 중요할 수 없었다.' 카터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혀 있다. 그때로부터 약 1년 뒤 '쿠거'라는 이름의 지뢰방호장갑차(MRAP)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미군에 공수되기 시작했다. 그 뒤 5년간 약 2만7000대가 보급됐다. 2022년 애쉬 카터가 62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을 때 뉴욕타임스는 MRAP 보급에 대해 '미군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조달이었다'고 평가했다. 미국 언론들이 "미군 수천 명을 살린 영웅"이라고 그를 기렸다.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5년에 미국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된 카터는 곧바로 실리콘밸리 인근의 스탠퍼드대로 갔다. 연설에서 '국방혁신실험단(DIUx)' 창설을 선언했다. 스타트업 신기술 탐색과 지원이 이 조직의 임무라고 말했다. DIUx 사무실을 아예 실리콘밸리에 뒀다. 이 조직의 첫 작품이 '공중급유 앱' 제작이었다. 수작업이 소프트웨어로 대체되면서 급유 계획이 정밀해졌다. 한 해 수천억원의 비용이 절감됐다. 스타트업과 계약을 맺어 북한의 KN-08 탄도미사일 이동식 발사대를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 위성 정찰 시스템도 마련했다. 초기 2년에만 약 50개의 민간 기술 활용 프로젝트가 진행됐다. 이 과정은 최근 출간된 책 '실리콘밸리와 펜타곤의 비밀 전략실 유닛X'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개혁가 카터는 "세상은 빛의 속도로 변한다. 국방부가 서류의 속도에 갇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동행미디어 시대가 주최한 '새로운 전쟁의 시대, K방산의 현재와 미래' 포럼이 지난 16일 열렸다. 방산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한국 군 획득 시스템 개혁을 주문했다. 맥아더 장군은 전쟁에서 지는 이유를 단 두 단어로 요약했다. '너무 늦었다(Too late)!' 우리에겐 청의 기마술과 왜의 조총 같은 신기술에 강토를 유린당한 역사가 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 '미리 준비하지 못한 죄가 산더미'라고 썼다. 지금 우리는 애쉬 카터처럼 틀을 깨는 혁신 리더가 몹시 필요하다.
"KF-21의 뿌리는 '골든 이글'에 있다." 김형준(65) 경남우주항공방산과학기술원(GADiST) 원장의 설명은 30여 년 전에서 시작됐다. 군사용 항공기 만드는 법을 배우기 위해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 머물던 30대 시절의 기억이다. "우리가 곁눈질 해가며 배운 기술로 T-50을 만들었고, 그게 KF-21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1991년 한국 정부는 미국 록히드마틴과 F-16 전투기 구매 흥정을 하며 '항공기 설계 기술 지원'을 조건으로 달았다. "훈련기 정도는 만들 수 있어야 F-16 조종사를 계속 키워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논리였다. F-18을 만든 보잉과 판매 경쟁을 하던 록히드마틴이 거절하기 힘든 '옵션'이었다. F-16 40대 구매 계약이 이뤄졌고 한국의 항공 기술자들이 1993년에 록히드마틴이 있는 포트워스로 갔다. 그들은 자신들을 '재미 황매팀'으로 명명했다. '황금빛 수리'를 만들기 위해 미국에 온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황매를 영어로 '골든 이글'로 표현했다. 재미 황매팀에 앞서 해외에서 항공기 설계 기술을 배우던 팀이 있었다. 한국이 영국 브리티시 에어로스페이스(BAe)의 호크(Hawk)기를 구매하며 기술 이전 약속을 받아내 1992년 한국 국방과학연구소(ADD) 연구진과 삼성항공 등 민간 기업 엔지니어들이 영국에 파견됐다. 이 기술 습득 계획의 이름이 '황매 프로젝트'였다. 여기에 속했던 기술진 중 상당수가 미국의 '골든 이글'에 합류했다. 김 원장이 영국에 체류하다가 미국 포트워스로 간 기술자 중 한 명이다. ━'골든 이글'팀 T-50 개발이 원천━록히드마틴은 한국 연구진과 엔지니어들을 본사 공장에 들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약 5㎞ 떨어진 곳에 조립식 건물을 지어 연구 공간으로 쓰게 했다. 김 원장은 "그들 입장에서는 주요 기술을 가르쳐주길 극도로 꺼릴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그들과 친해지려고 애를 써야 했다"고 말했다. 그때 포트워스에 이일우(65)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전무도 있었다. 공기 역학 전공자인 그는 KF-21 개발에서 수석설계자 역할을 맡았다. 앞서 T-50 개발에도 설계자로 기여했다. 이 전무는 "1993년부터 95년까지 3년간 포트워스에 머문 한국 기술진이 총 88명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T-50, FA-50과 KF-21 개발에 참여했다"고 설명했다. 대학에서 항공공학을 전공한 김 원장과 이 전무는 삼성항공 출신이다. 1990년대 말에 국내 항공 기업이 합병돼 KAI가 만들어진 뒤 인생 대부분을 이 회사와 함께 했다. 전술 훈련기 TA-50 개발팀장이었던 김 원장은 경영전략부문장(부사장) 등을 역임한 뒤 2년 전 GADiST 초대 원장이 됐다. KF-21 개발을 진두지휘한 이 전무는 KAI 기술임원으로 후배들에게 경험과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김 원장과 이 전무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며 세 명의 전직 대통령을 KF-21 탄생의 공로자로 꼽았다. 첫째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록히드마틴으로부터 기술 이전 약속을 받아낸 덕분에 한국이 T-50을 만들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T-50이 없었으면 KF-21은 죽었다 깨어나도 만들 수 없었다"고 말했다. ━DJ 깜짝 선언과 박근혜 결심━ 둘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2001년 3월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김 전 대통령은 "늦어도 2015년까지 최신예 국산 전투기를 개발한다"고 선언했다. 5개월 뒤 김동신 당시 국방부 장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뜻에 따라 공군본부에 전투기 개발 마스터 플랜 작성을 지시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기술적 준비가 부족한 상태에서의 발표였다. IMF 사태(외환 위기)로 의기소침해진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겠다는 뜻이 담겼던 것으로 짐작한다"고 말했다. 이후 '최신예 국산 전투기' 개발은 숱한 논란으로 이어졌다. 정권이 바뀐 뒤 한국개발연구원(KDI) 등에서 '사업 타당성 부족' 판정을 내렸다. 이 전무는 "반대 논리는 크게 세 갈래였다. 한국은 전투기를 독자적으로 개발할 기술이 부족하고, 경쟁력 있는 가격의 전투기를 만들 수 없고, 전투기 수출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그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혀 있다. '방위사업청장과 국방과학연구소장을 만나서 의견을 들어보니 '자체 개발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기술을 안 준다고 벌벌 떨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이나 비용이 다소 들더라도 사업을 추진하는 게 맞겠다는 확신이 생겨 추진을 지시했다.' 2015년의 일이다. 그리고 2021년 4월 경남 사천시 KAI에서 KF-21 시제기(시험용 항공기) 출고식이 열렸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소식을 옥중에서 접했다. 그는 회고록에 '현실성이 없다며 반대했던 정치인이 이날 출고식에서 'KF-21 시제기가 늠름한 위용을 드러냈다'며 치하했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국방부 대변인이었던 김민석 전 우주항공산업협회 부회장은 "박 전 대통령이 부친의 신념이었던 '자주국방'을 말하며 KF-21 개발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엔지니어 귀한 현실이 걱정"━ 이 전무는 KF-21 개발 타당성이 논란이 될 때마다 "반드시 증명해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김 원장은 "그랜저를 만들었는데 제네시스를 못 만들 이유가 없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그랜저는 T-50이고, 제네시스는 KF-21이다. 김 원장과 이 전무는 소년 시절 항공기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다고 했다. 나라에 항공기 제작 기술이 전무했고, 기초적인 정비 기술만 있던 때였다. 두 사람처럼 도전 정신을 가진 청년들과 미래를 개척하는 국가적 리더십이 있었다. KF-21을 만든 힘이다. 이 전무는 미래를 염려했다. "젊은이들이 점점 어려운 일을 꺼려서 걱정"이라고 했다. 김 원장도 "우주항공산업 클러스터가 형성된 경남 진주와 사천의 생활 인프라와 교육 환경이 제대로 갖춰져야 후진들이 잘 육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천시에 따르면 2027년까지 필요한 우주항공 분야 인력 중 실제 공급 가능한 규모가 55% 수준이다. 인구 감소, 공학 전공 인기 하락, 엔지니어의 지방 근무 회피가 주요 원인이다. 항공 산업 육성에 대한 정치권의 말은 무성했으나 실질적 진전은 별로 없었다. 진주와 사천 지역 교통망 확충, 교육 인프라 구축, 주거 지원 등의 계획을 담은 '우주항공복합도시 특별법'은 2년 넘게 국회 상임위원회에 머물러 있다.
"업체로부터 받은 돈은 뇌물이 아니라 격려금 차원이었다." 군 관계자는 '돈봉투 관행'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 '성역'이었던 군 전력 증강 사업의 치부가 처음으로 드러난 '율곡 비리' 당시의 일이다. "실무 검토 보고서는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다"는 말도 나왔다. 감사원은 성역없는 조사를 천명했다. 검찰은 전직 국방장관 2명과 전직 참모총장 2명을 구속기소했고 이들 전원이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여론은 수사가 충분치 못했다는 쪽이었다.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방산 비리가 터졌고, 패턴은 반복됐다.━트라우마가 낳은 '절차주의' 덫━한국군의 '하드웨어(실물 무기)' 중심 DNA는 1970년대 중공업 육성 시기부터 시작됐다. 여기에 과거 굵직한 방산 비리들이 남긴 트라우마가 결합하면서 지금의 '꽉 막힌 조달 패러다임'이 완성됐다. 율곡사업부터 2014년 통영함 비리까지 대형 사건이 반복되면서 '투명성'을 지상 과제로 삼게 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는 2006년 국방부, 합참, 각 군, 조달본부 등 8개 기관에 분산 운영되던 획득관련 조직 및 기능을 모두 통폐합해 방위사업청을 설립했다. 문제는 투명성에 대한 강박이 과도한 '절차주의'로 이어진 점이다. 이는 실무자들에게 "'새로운 시도를 하다 감사에 걸리느니 차라리 검증된 옛 방식을 택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뼈아픈 학습효과를 남겼다."(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 이상경 안보경영연구원 책임연구위원 역시 "(한국군은) 절차는 완벽한데, 전력화는 늦다. 현재 제도는 투명성 확보를 위해 완벽함을 추구한 나머지 경제성과 효율성을 침해하는 기형적 구조"라고 말했다.소요 결정 단계에서 요구 성능(ROC)이 한 번 확정되면 이후 10년 이상 고치기 힘들다. 수개월 단위로 기술이 도약하는 소프트웨어나 AI를 수십 년 전의 경직된 규격서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다 보니, 배치될 때는 이미 기술이 시대에 뒤처지는 '진부화' 현상도 당연해졌다. ━'올드 패러다임', 곳곳서 파열음━이러한 관성은 속도가 생명인 현대전 준비에 큰 걸림돌이다. 현대전의 핵심으로 떠오른 드론은 개발 단계부터 막혀 있다. 근거법은 없고, 개발 과정도 규제 투성이다. 유용원 의원에 따르면 "한국은 적의 전파 교란(재밍) 방어 시험 시 주파수를 변경하는 단순한 작업조차 전파법에 따라 매번 행정 절차를 밟아야 한다." 김일동 방사청 차장도 "정부 주도 방식만으로는 전장의 판도를 바꿀 혁신적 전력을 적시에 확보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육·해·공군이 각각 무기를 도입하다 보니 두뇌 격인 지휘통제 체계의 원활한 작동이 어렵다. 데이터가 고립되어 서로 호환되지 않는 '사일로(Silo)' 현상 때문이다. 실제로 육군의 전술지휘정보체계(ATCIS)와 해·공군과 제대로 연동되지 않아, 합동 작전 시 표적 정보를 수동으로 재입력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군사 전문가는 "각 군이 각자의 규격과 예산으로 시스템을 발주하다 보니, 정작 실전에서는 서로의 전장 상황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볼 수 없는 '깜깜이' 상황이 여전하다"고 지적했다.데이터 비표준화와 경직된 보안 규정 역시 AI 전력화에 치명적이다. 우리 군은 데이터 규격이 제각각이고, 기밀 유지를 이유로 모든 데이터가 외부와 단절된 로컬망에 있다. 한 AI 벤처기업 대표는 "전장 데이터를 통합해 AI를 고도화하는 미군과 달리, 우리는 외부의 뛰어난 AI를 들여와도 데이터 표준화라는 첫 단추를 꿰지 못해 '깡통'에 불과할 것"이라고 꼬집었다.━'SW 중심 전쟁'… 법조차 없는 한국━우리가 낡은 패러다임에 묶여 있는 사이 전 세계 군사 패러다임은 AI와 소프트웨어(SW) 중심으로 바뀌었다. 크리스천 브로스 전 미 상원 군사위 정책국장을 비롯한 글로벌 혁신 전문가들은 "소프트웨어는 보조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안보의 근간인 무기체계"라고 강조한다.새로운 패러다임은 민간 기술기업이 이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3월 24일 팔란티어의 메이븐 스마트 시스템(MSS)이 미 국방부의 공식 사업으로 격상됐음을 보도했고, 로이터는 1850억 달러 규모의 우주 기반 미사일 방어망 '골든 돔(Golden Dome)' 프로젝트의 핵심 소프트웨어를 팔란티어와 안두릴이 공동 기획한다고 전했다.한국의 현행법은 SW를 '하드웨어의 부속품' 정도로 취급한다. 현행 방위사업법에는 SW만을 단독으로 신속하게 획득하기 위한 별도 조항이 없다. 하드웨어 획득 절차를 무리하게 준용하다 보니, 스마트폰 앱 업데이트하듯 간단히 끝낼 수 있는 작업도 정식 조달 절차를 밟으며 수년을 허비한다.━뉴 패러다임 키워드는 '민간'과 '속도' ━ 전문가들은 무기 획득 생태계 전반을 뒤엎는 총체적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축적의 시간' 저자인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관료주의적 '절차적 결벽증'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진국을 모방하던 시절의 완벽주의에서 벗어나, '도전적 질문을 통한 시행착오'를 용인하고 민간의 혁신 아이디어를 국방 기술로 '스케일업(Scale-up)'하는 유연한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신속 획득 프로세스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다. 조관호 한국국방연구원(KIDA) 책임연구위원은 "기존의 무거운 조달 방식으로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기술을 담아낼 수 없다"며 "완벽한 성능을 10년 뒤에 배치하는 것보다, 70% 수준의 초기 시제품을 1년 이내에 신속히 배포하고 피드백을 반영해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는 '진화적 획득' 체계 마련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신속 획득 제도의 안착을 위해서는 민간의 '진입 장벽'을 걷어내야 한다. 한 방산 스타트업 대표는 "한국 국방 조달 시스템에서는 미국의 팔란티어나 스페이스X 같은 혁신 기업이 탄생하기는커녕 입찰조차 불가능하다. 절차적 완결성이라는 명분을 넘어 민간의 압도적인 속도와 기술력을 온전히 수혈할 수 있는 제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특별취재팀=제도혁신연구소 이상언 소장·이무영 부소장, 정치경제부 김인한·김성아 기자, 산업1부 최유빈 기자, 증권부 이동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