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의 죄를 후손에게 물을 수는 없지만 부당한 유산과 역사까지 외면할 수는 없는 만큼 친일 행위 후손의 성찰과 책임 있는 행동, 이를 받아들이는 사회의 관용이 요구된다. 사진은 배우 하영이 지난 6월29일 오전 서울 강남구 폴렌느 서울에서 열린 아틀리에 오픈 기념 포토 행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해방 후 80년이 흘렀지만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행적과 그것이 남긴 유산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개인의 기본권 보호와 연좌제 금지라는 현대법의 원칙, 조상이 남긴 부당한 유산을 후손이 그대로 누리는 데서 비롯되는 공정의 문제가 서로 부딪친다.

전문가들은 친일파 후손을 둘러싼 갈등이 반복되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공동체 차원의 원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친일파 후손들의 직업 선택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연예인처럼 사회적 주목을 받는 직업을 택할 경우엔 성찰하고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는 등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성찰없는 친일파 후손들"


#배우 하영씨는 최근 여러 방송에서 자신의 집안을 "구한말부터 이어진 뼈대 있는 명문 의사 가문"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증조부 안상호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 준비위원을 맡고 일제 식민통치를 보조한 경성부 협의회원과 경성종로금융조합장, 대정친목회 평의원 등으로 활동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집안 내력을 충분히 알지 못한 채 나온 자랑과 뒤이은 부적절한 해명은 대중의 반발을 키웠고 결국 하씨는 방송에서 하차했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은 이번 논란의 원인으로 '역사 인식의 부재'를 꼽았다. 김 소장은 "당사자들이 집안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명문가라는 교육만 받다 보니 발생한 일"이라며 "과거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진실을 명확히 밝히고 그것이 공동체의 가치에 비춰 잘못됐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갈등 해결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김도형 전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도 후손의 성찰과 사회의 절제가 함께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궁극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가 한쪽으로 너무 외골수적으로 치우치는 측면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후손들이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나 성찰 없이 행동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다만 "친일 문제도 개인의 문제로 들어가면 개인의 인권과 관련된다"며 "너무 선정적으로 몰아가는 방식은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은 조상의 친일 행적을 공개하며 반성한 록음악밴드'양반들'의 리더 전범선. /사진=전범선 인스타그램



조상의 업을 스스로 짊어진 후손들


#나치 독일 고위 간부 한스 프랑크의 아들인 작가 니클라스 프랑크는 평생 아버지의 죄상을 고발하는 강연을 이어오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의 손자 라이너 회스도 나치 범죄의 위험성을 알리는 교육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손자 전우원씨가 일가의 비자금과 과오를 폭로하며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 유족들에게 사죄했다. 을사늑약(1905년) 당시 이완용의 일본어 통역을 맡았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인직의 후손인 가수 전범선씨는 조상의 친일 행적을 알게 된 뒤 유튜브 등을 통해 친일 후손임을 고백하고 역사 단체에 기부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연좌제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라도 후손들 스스로 적극적인 성찰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대중의 신뢰와 인기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연예인이나 정치인 등 공인이라면 가문의 역사에 대해 더 무거운 책임 의식이 요구된다. 김민철 소장은 "누군가 나라를 위해 헌신할 때 지배체제에 협력하며 유산을 누리게 됐다면 그 후손은 최소한 공동체에 미안한 마음을 갖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회 역시 선대의 과오를 직시하고 속죄하는 모습을 보이는 후손에게 낙인보다 관용과 포용으로 답할 필요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식민지의 회색지대' 저자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친일한 사람들은 모두 배부르게 살았고 해방 이후에도 지배계층으로 살았으며 항일한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게 살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그런 이분법적 신화를 언론이 계속 재생산하면 사회적으로 연좌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사진은 이강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2일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친일반민족행위자 제2기 재산조사위원회 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친일파 후손의 부당한 재산 환수"


정부는 오는 12월 시행되는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2기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 6월 제정된 이 법은 기존 친일재산뿐 아니라 후손 등이 제3자에게 매각하는 등 이미 처분한 친일재산의 '처분 대가'까지 환수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했다. 정부는 2기 조사위가 출범하면 325억원 이상의 친일재산을 환수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자인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시대]에 "누군가의 자식으로 태어날 때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며 "나라를 배신해 얻은 부당한 재산을 친일파 후손이 그대로 누리는 것은 연좌제와는 전혀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과거 친일조사위 1기 활동 당시 국가귀속 결정이 내려진 재산을 두고 '우리 조상은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며 친일행위자 지정 자체를 부정하거나 '문중 대대로 내려온 재산'이라며 법정 공방을 벌이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이처럼 친일재산 환수를 둘러싼 법적 공방이 반복될 경우 친일 행적에 대한 사회적 반감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1기 조사위 사무처장을 지낸 장완익 변호사는 "1950~1980년대에 이미 처분된 재산의 대가까지 환수하려 할 경우 소급입법 위헌 논란과 법적 저항이 거셀 수밖에 없다"며 "후손들이 '당시에는 이런 법이 나올지도 모르고 팔았는데 이제 와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냐'며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장완익 변호사가 지난해 12월 서울 서초구 민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