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히스토리
[시대&히스토리/임용한] '입'으로 하는 부국강병…조선 후기 5군영제의 허상
조선 후기 군사제도의 변경은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테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의 군사제도는 일반 농민들을 불러모으는 징병제였다. 평민들은 농사철에 농사에 전념하다가 겨울이 되면 군사훈련을 받았다. 일부 병사들은 지금처럼 징병, 혹은 소집되어서 일정 기간 부대에서 복무했다.이 방식은 군대의 전문성을 떨어트리고,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을 약화시키는 단점이 분명했다. 그런 문제가 고스란히 노출된 사건이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 후 정부는 직업군인인 급료병을 양성하는 방식으로 군사제도를 개혁했다. 그렇게 탄생한 전문, 상설부대가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등 5개의 군영을 대표로 하는 '5군영' 제도다.흐름으로 보면 합리적 선택이었다. 기본 무기도 전통적인 활에서 신무기인 조총으로 바뀌었다. 영·정조 때 궁궐 행사를 그린 그림 속 궁궐 수비대원들은 총을 메고 도열한 모습이다. 꽤나 훌륭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군대가 구한말이 되면 보이지 않게 된다. 수만 명을 헤아리던, 아니 최소한 수만 명 유지를 목표로 했던 5군영 병사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5군영 중에서 최정예였고, 진정한 급료병으로 구성됐던 훈련도감을 예로 들어 보자. 훈련도감 병력은 최대 6000명 정도였다. 17세기 후반이 되자 이 병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호조 재정의 3분의 2가 들어갔다. 돈이 드는 만큼 훈련도감 병사의 대우가 좋았던 것도 아니다. 겨우 서울에 살면서 월세나 내고, 기본 식비나 충당하는 수준이었다.아이들 교육이라도 시키려면 군인들이 '투잡'을 뛰고, 부인은 장사라도 해야 했다. 더 기가 막힌 건 장비 유지비도 병사의 몫이란 거였다. 병사 개인이 화약을 사서 조달해야 했는데, 비싼 화약이 아까워 사격 연습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최정예였다고 하는 도감병이 정말 정예 병사였는지 몹시 의심스럽다.훈련도감 하나, 6000명의 병력마저 재정으로 감당이 안 돼 18세기부터는 감축을 시작했다. 이전의 역사학자들은 군사 재정이 빈약해진 게 양반들이 세금을 내지 않아서, 또 농민이 낸 세금을 양반과 관료들이 중간에 착복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조선 후기에 신분제가 해체되면서 세금 안내는 양반층이 늘고, 군역을 담당하는 양민은 줄어 군사재정이 바닥나고 군대도 축소됐다고 했다. 얼핏 보면 그럴듯한 설명이고, 일부는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아니었다.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총과 대포가 주력 무기가 된 뒤에는 군대를 육성하고 유지하는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중세 유럽의 기사 한 명이 완전한 무장을 갖추는 데에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갑옷, 무기 제작의 기술적 측면에서도 기사를 대량으로 키우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총과 화약이 기본 화기가 되고, 두툼한 시민층이 형성된 유럽에선 돈과 기술만 받쳐 주면 대규모 군대를 육성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부유한 국가, 산업력이 앞선 나라는 강력한 무장을 갖춘 군대를 이전의 수십 배 규모로 보유할 수 있게 됐다.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 50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다.반면 조선은 상공업을 천시하는 태곳적 경제 사상에 갇혀 있었다. 결국 최저 생계 수준의 삶을 살아가는 농민들이 병사로 잠시 복무하며 군사제도를 지탱해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이런 군대는 쓸모가 없어졌다. 농민들이 곡물로 세금을 내고, 그 곡물로 식량 정도를 간신히 조달하는 재정으로는 총, 대포로 무장한 군대를 키워낼 수도, 유지할 수도 없었다. 조선의 관료들이 한 푼의 횡령도 하지 않고 양반들이 모두 세금을 충실하게 냈더라도, 호조의 재정이 몇 배로 불어났더라도 안정된 생활을 하며 무장을 제대로 갖추고 언제든 전투에 나설 수 있을 만큼 훈련된 병사를 1만, 2만 명씩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조선의 부국강병이 실패한 건 농본(農本)에만 집착해 상공업을 통한 자본축적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군수산업도 국가가 통제해 이윤의 확대를 막았다. 반면 중세 이후 유럽의 군수산업은 장인 입장에서도 수지가 맞는 사업이었다. 파생상품도 많았다. 시계, 식칼, 나이프, 스테인리스 제품의 기원을 추적해보면 무구(武具)를 만들던 금속 장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군수품 판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국제적 상업, 금융업, 조선업, 운송업의 통로가 뚫렸다. 이 네트워크에 올라탄 장인들이 다시 수익을 내고, 경쟁하면서 신기술을 개발해 군수산업과 무기발달의 선순환을 형성했다.그런 유럽에서도 군대를 줄이고, 해체하면 국민들에게 돌아갈 몫이 늘어난다는 철없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 있었다.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구석기 시대에는 사유재산도, 국가도 없어서 전쟁이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황당한 주장을 폈다. 21세기 한국 땅에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진 지식인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이미 2000년 전 중국의 사마천은 한나라의 '루소'들을 비판하며 이렇게 썼다. "세속의 유생은 세상의 실정을 모르고 함부로 덕치(德治)를 거론하며 용병(用兵)에 반대한다. 어찌 이들의 주장을 들어서 군주가 욕을 당해 나라를 잃고, 작게는 외적의 침공으로 영토가 줄어들고, 나라가 쇠약해지는데도 고집스럽게 자기주장만 내세우며 마냥 망하기를 기다릴 수 있겠는가." (사마천, 사기 권25 서, 율서 편)━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석사, 경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전공인 조선시대사에서 출발해 전쟁사와 경영학 분야로 관심의 영역을 넓혀 왔다.『 조선국왕 이야기』, 『 전쟁으로 보는 인류사』,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해서 탄생했다』등 60여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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