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창
[시대의창/이상엽]AI 시대 고전어 교육의 의의
인공지능이 한문, 산스크리트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 다양한 고전어를 능숙하게 현대어로 번역할 수 있게 되고 인간에 필적하는 추론 능력까지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낯설지 않다. 얼마 전 열린 국제 디지털인문학협회(ADHO) 연례 학술대회에서는 인공지능의 이러한 고전어 이해 및 추론 능력을 활용하여 대량의 고전어 문헌 분석을 자동화하려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소개되었다.필자 역시 수천 개의 한문 전기(傳記)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하여 동아시아 불교 사상의 통시적 발전을 추적하는 한국연구재단 과제를 발표하였다. 과거에는 다수의 전문 연구자와 협업해야만 수행할 수 있었던 성격의 대형 프로젝트를 이제는 개인 연구자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홀로도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인공지능의 뛰어난 고전어 번역·이해 능력은 기정사실이 되었고 고전 연구 일선에서도 인공지능이 전방위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지만, 필자는 고전어 전문가 양성에 우리 사회가 여전히 투자를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우선 고전 연구는 그 의의가 단지 고전 문헌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찾아내는 것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고전학은 당대 사회의 문제의식을 깊이 있게, 다각도로 성찰할 수 있게 돕는 주요한 매개이자 수단으로서 기능해왔다. 유럽 르네상스기의 그리스어·라틴어 고전 연구가 토대가 되어 근대적 인문주의의 이상이 정착한 과정이 그러하였고, 송명대 유학자들이 선진(先秦) 고전의 재해석을 토대로 새로운 도덕형이상학과 정치철학의 체계를 세운 과정이 그러하였다. 최근 한국의 2030 세대에서 부는 이른바 '힙불교' 열풍도 불교 고전의 메시지가 재해석을 거쳐 현대 사회와 공명한 결과라 할 수 있다.인공지능의 고전어 능력이 아무리 완벽에 가까워진다고 해도, 고전 연구는 원전을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이끌어내고 심화하는 것으로써 완성된다. 이렇게 고전이 가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 중에서 지금 여기의 우리에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참신한 해석을 제시하는 일은 인간 자신이 고전어를 완전한 장악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나아가 고전어 독해 능력은 인간의 실존 자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 어떠한 경제적 보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도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 유년기의 체험과 고민을 떠올릴 수 있는 능력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전은 인류 공동체가 수천년간 쌓아온 경험과 사유를 담고 있는 소중한 기억의 매체이다. 이미 인공지능이 고전어를 잘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이러한 기억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온전히 기계에게 위임하는 것은 유년기의 기억을 포기한 개인이 더 이상 그 개인이 아니듯이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의 누군가는 인류 공동체 기억을 유지하고 보수하는 인간 고유의 과업을 분담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는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국제 사회의 고전어 교육을 뒷받침해온 큰 동력이 아직 번역되지 않은 고전 문헌을 현대어로 번역하고 연구할 전문 인력을 양성하려는 데에 있었음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의 고전어 번역 능력이 인간에 필적하게 된 지금 종래와 같은 고전어 훈련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를 품는 연구자와 학생이 생겨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번역이 고전학의 전부는 아니다. 고전어를 익히고 다루는 인간의 역량은 기계가 온전히 대신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이상엽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미국 스탠포드대에서 초기 불교사상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철학과 불교사상사 권위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대학에서의 연구 및 강의뿐 아니라 방송 출연이나 칼럼 기고를 통해 불교 이야기를 깊이 있으면서도 재미있게 소개해 오고 있다.━
[시대의창/김상근]놀란 감독의 '오디세이'에 놀람
한인 동포를 위한 인문학 강연차 LA로 갔다가, 마침 미국에서 먼저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화제작 <오디세이>를 보았다. 개봉 첫날, 조조할인을 기대하며 영화관을 찾았지만, 엄청나게 비싼 입장료에 먼저 놀랐다. 내 첫마디는 "와이레 비싸노?"였는데, 참고로 나는 그냥 경상도 사람일 뿐이다. 내 두 번째 탄성은 "와이레 재미있노"였다. 2시간 52분이라는 긴 상영 시간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구현한 미장센과 명배우들의 연기를 감상하는 동시에, 약 3000년 전 호메로스가 쓴 원작과 놀란의 영상을 대비하느라 머릿속이 바빴던 탓이다. 나는 어두운 영화관에 앉아, 컴컴한 동굴 속에서 오디세우스 일행을 노려보던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모스처럼 눈을 껌벅이며 고대와 현대의 이야기를 오갔다.오호라! 오디세우스가 휩쓸렸던 바다처럼 광대하고, 칼립소의 섬에서 느꼈던 고통의 심연처럼 깊었던 호메로스의 통찰력을 담아 내기에는, 상영 시간이 너무 짧았다. 호메로스는 전작 <일리아스>에서 '클레오스(불멸의 영광)'를 좇는 영웅 아킬레우스를 그렸지만, <오디세이>에서는 '노스토스(귀환)'를 선택하는 고뇌하는 인간 오디세우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놀란 감독의 캐스팅은 탁월했다. 영원한 젊음과 불멸을 약속하는 칼립소의 유혹을 뿌리치고 인간적인 노스토스를 선택하는 주인공 맷 데이먼의 연기가 일품이었다. 특히 돛대에 몸이 묶인 채 울부짖으며 사이렌의 유혹을 견디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흔히 사이렌의 유혹을 육체적 욕망으로 해석하지만, 원작에서 사이렌이 불렀던 노래는 트로이의 영광과 전지(全知)의 능력을 제안하는 클레오스의 유혹이었다. 오디세우스는 과거의 영광도, 인공지능 따위가 약속하는 전지의 세계도 모두 뒤로한 채 풍랑이 기다리는 거친 바다로, 늙어가는 아내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옆자리에서 영화를 보고 있던 아내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았다.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여! 그의 충직한 역할을 히스패닉계 감초 배우 존 레귀자모가 훌륭하게 연기했다. 그는 <오디세이>의 또 다른 핵심어인 '크세니아(환대)'를 실천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제우스의 명에 따라, 그리스인들은 손님이 찾아오면 이름과 출신과 신분을 묻기 전에 먼저 물을 건네고 발을 씻겨준 뒤 음식을 대접했다. 20년 동안 이타카의 왕을 기다려 온 에우마이오스는 노인으로 변장한 오디세우스를 진심으로 환대한다. 놀란의 영화에서 크세니아로 이름난 파이아케스족과의 만남이 생략된 것은 아쉬웠지만, 복잡한 문학적 구도를 스크린 위에 풀어내기 위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 역할은 칼립소에게 맡겨졌다.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읽지 않고 영화를 본다면,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다채로운 모험담과 이야깃거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트로이 전쟁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배트맨의 마스크를 쓰고 등장하는 장면, 식인 거인족을 중세 철갑 복장으로 그려낸 장면, 1,000척의 배를 띄우게 만든 금발의 절세미인 헬레네 역을 흑인 배우에게 맡긴 캐스팅 등이 이런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를 위한 의도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영화 상영 내내, 다양한 모험 이야기가 숨 가쁘게 펼쳐진다. 원작에서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겪는 다양한 고난과 좌절이 강조되기 때문에 이 역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호메로스는 <오디세이>를 이렇게 시작했다. "내게 말해주오,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 성을 파괴한 뒤 그토록 많은 방랑을 한 사람에 대하여!" "그토록 많은 방랑을 한"으로 묘사된 주인공의 성격에 <오디세이>의 핵심이 담겨 있는데, 이는 '폴리트로폰(πολύτροπον)'이란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 천병희 선생은 이를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으로 옮겼는데, 생성형 인공지능에 물었더니 "천의 얼굴을 가진"이라 번역했다. 오디세우스는 거친 파도 너머에서 기다리던 끊임없는 괴물의 공격에 "천의 얼굴을 가진" 인간으로 대처하며 노스토스(귀환)를 완성한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할 날이 머지않았다지만, 우리 인류는 호메로스와 놀란으로부터 '천의 얼굴을 가진 자'로 미래의 상황에 대처할 지혜를 배운다. 놀란은 <오디세이>를 통해 3,000년 전의 고전이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영화는 문명의 재건을 위해 새로운 항해에 나서는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힘찬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원작에서, 이타카에 도착한 오디세우스에게 또 다른 사명이 있음을 알린다. 고난의 상징인 노를 어깨에 메고 "소금 친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들"의 땅을 찾아가, 포세이돈 신 앞에서 그 노를 땅에 꽂는 것이었다. 오디세우스가 겪었던 모든 폭풍과 고난은 모두 포세이돈이 일으킨 것이었다. 포세이돈과 화해한다는 것은 자신이 겪었던 "눈물과 한숨의 여정"과 화해하란 뜻일 것이다. 진정한 노스토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재회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눈물로 얼룩졌던 자신의 운명과 화해함으로써 성숙한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노스토스이다. 놀란의 영화가 끝났고, LA 인문학 강연도 무사히 마쳤다. 나는 노스토스를 이루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제 나 자신의 운명과 화해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일만 남았다.━김상근 연세대 명예교수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연세대 신과대학장, 연합신학대학원장을 역임했다. 그리스 로마 철학, 르네상스 연구의 권위자로 다양한 저서와 강연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의 설립과 운영을 도왔다. ━
[시대의창/서정건]쿠팡과 미국, 어떻게 볼 것인가?
쿠팡이라는 기업 하나를 위해 미국 의회 공화당을 중심으로 압박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 정부가 미국 기업을 차별한다는 비판과 항의가 반복되고 있는데 최근에는 트럼프 백악관 일부도 가세하는 모양새다. 3천7백만 명이 넘는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발생했고 그 책임에 대한 과징금을 부과한 일종의 사건이었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애초의 탈팡 움직임도 조금씩 시들해지는 분위기다. 그런데 정작 개인정보 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미국이 매출의 90퍼센트 이상을 한국에서 올리는 기업을 위해 이토록 따지고 드는 배경은 무엇일까?첫째, 한국의 통상 정책에 관해 미국 의회는 오래된 불신을 가지고 있다. 198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경선에 출마했던 게파트 하원 의원은 경선 초반에 "현대"라는 제목의 선거 동영상을 뿌렸다. 한 대당 1만 달러면 사는 크라이슬러 자동차가 한국으로 수출되면 4만 8천 달러짜리로 둔갑하고 이는 한국 정부의 규제와 세금 탓이라는 과장된 주장이었다. 미국 노동자들은 무죄요, 한국 정부만 유죄라는 1980년대식 미국 우선주의였다. 2024년 11월 대선에서 승리한 트럼프 당선인이 12월에 NBC 방송과 가졌던 첫 인터뷰 초반에 갑자기 한국이 화제로 등장한다. 조던(Jordan) 의원으로부터 오하이오주 소재 월풀 세탁기 공장이 한국 기업의 덤핑 탓에 문을 닫게 생겼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한국산 세탁기에 최대 50퍼센트 관세를 부과해 미국 제조업을 살렸다는 전형적인 자기 자랑이 뒤따랐다. 한국 정부가 쿠팡에 차별적이라고 비판하는 보고서를 최근에 발간한 하원 법사위원회의 위원장이 조던 의원이다.둘째, 미국 의회의 대중국 견제 분위기에 쿠팡이 올라탄 형국이다. 주미 한국대사에게 보낸 공화당 연구위원회의 공개 서한을 보면 먼저 개인정보 유출을 민감도가 낮은 데이터 문제 정도로 규정한다. 쿠팡을 위협하면 한국 내 온라인 유통시장의 공백이 생길 것이고 결국 중국 기업들만 이득을 보게 된다는 주장을 펼친다. 중국 기업들은 중국 공산당과 가깝고 이는 역내 안보 위협까지 불러온다는 해석도 담고 있다. 쿠팡 사태는 대중국 견제 경쟁에 나선 미국 의원들이 활용하기 좋은 정치적 스토리인 셈이다. 레이건 시대 이후부터 자유무역 성향이 강했던 공화당은 트럼프 임기 중에 급속히 변하고 있다. 중국과의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NTR)를 전면 폐기하자는 의원들 대부분이 공화당 소속일 정도다. 보호무역을 선호하는 민주당과 보호무역으로 변신 중인 공화당의 묵인을 이용해 트럼프 대통령은 비교적 손쉽게 국제 통상 규범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셋째, 미국은 로비와 선거의 나라다. 잘 알려진 대로 합법적인 로비가 활성화되어 있는 미국에서 쿠팡은 올해 상반기에만 237만 달러를 로비 비용으로 사용했다. 쿠팡을 가장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의원 중 하나는 아이사(Issa)라는 공화당 중진 의원이다. 과거에 하원 감독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현재 법사위원회 등에 소속되어 있는 아이사 의원은 쿠팡의 기업 정치활동위원회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았다. 핵심 보좌관이 쿠팡 로비스트가 되었고 이미 선언한 대로 올해를 끝으로 의회에서 은퇴한다. 한국의 통상교섭본부장이 직접 방문해서 면담한 후 의원실을 나서자마자 아이사 의원이 쿠팡을 차별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곧바로 발표했던 장면은 상징적이다. 한국 관료의 설명보다 미국 정치의 로비 자금과 인적 네트워크가 아이사 의원의 판단에 더 강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넷째, 현재까지 쿠팡 사태는 주로 공화당이 주도하고 있는 이슈다. 개인 차원에서 밀어붙이는 아이사 의원과 제도 차원에서 지원하는 조던 위원장 둘 다 공화당 소속이다. 공화당 연구위원회 명의의 항의 서한도 전부 54명 공화당 의원의 서명만 담고 있다. 민주당 의원으로 쿠팡을 거론한 경우는 워싱턴 주 출신 델베니(DelBene) 의원 정도다. 그나마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 합의를 비판하면서 쿠팡을 다른 기업들과 함께 다룬 정도였다. 심지어 쿠팡 본사가 위치한 지역구를 대표하는 진보 성향의 민주당 자야팔(Jayapal) 의원도 쿠팡을 공개적으로 적극 옹호한 사례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중국을 배척하고 기업에 친화적인 공화당에 주로 쿠팡의 로비가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올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만약 민주당이 하원을 되찾아온다면 내년 1월 새 하원에서는 민주당이 모든 위원장직과 의사일정을 장악하게 된다. 조직적인 의회 내 쿠팡 옹호가 계속될 것인지 두고볼 일이다.쿠팡 사태의 해결을 위한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미국 정부와 의회, 언론 등을 상대로 당당하고 차분하게 쿠팡 사태의 본질을 알리는 것이다. 누구를 상대로, 어떤 논리로, 언제 어떻게 설명할지는 한국의 대미 의회외교와 통상외교, 공공외교가 풀어야 할 과제다. 다만 우리 모두 아는 것처럼 정답이 곧 해법은 아닐 수도 있는 시대가 트럼프 시대다. 따라서 우선 쿠팡과 관련된 미국 내 작동방식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호들갑을 떨 일도 위축될 일도 아니다. 로비의 나라 미국에서는 그들만의 정치적 셈법과 생태계가 돌아가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이 상대해야 할 미국은 이제 하나가 아니다. 조선업과 반도체 협력을 원하는 동맹국 미국이 있는가 하면 의회 정치와 로비 자금, 선거와 양극화가 맞물려 돌아가는 미국만의 미국도 있다. 오히려 쿠팡 사태를 우리 초당파 외교의 계기로 삼아서 두 개의 미국을 이해하고 대응하는 새로운 차원의 대미 전략을 짜야할 때다.━서정건 경희대 정외과 교수는 미국 텍사스대(오스틴)에서 미국 의회와 외교정책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국내 대표적인 미국 정치 전문가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윌밍턴) 교수와 윌슨센터 풀브라이트 펠로우를 거쳤고, 한국정당학회 회장과 미국정치연구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
[시대의창/서영아]세상에 '쓸모없는 세대'란 없다
현역 기자로 일하던 2022년, 어느 독자가 보낸 이메일 첫머리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우리처럼 쓸모 없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뤄줘서 고맙습니다."메일을 보낸 분은 당시 70대 중반의 작가 김지수 씨. '이런 인생2막'이란 인터뷰기사 후보로 남편 박삼령 씨의 사연을 소개해줬다. 박씨는 국내 은행에서 정년퇴직한 뒤 병마를 이겨내고 산림치유지도사로 일하고 있었다. 지방의 개방직 공무원으로 일하던 65세 무렵 대학병원에서 눈 뒤쪽 림프선에 숨어있던 악성 종양을 발견했다. 수술은 고사하고 방사선 치료조차 어렵다는 말을 들었지만 6차례의 항암치료를 이겨내고 2019년 완치판정을 받았다.박씨는 치료에 집중하는 동시에 삶의 환경을 180° 바꿨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일하기 위해 항암치료 틈틈이 숲 해설사, 산림치유지도사 자격증에 도전했다. 73세에 산림치유지도사 자격을 얻고는 국립공원 근무를 위해 몇 달씩 지방에서의 자취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졌고 7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이의 한계에 부닥쳤다. 인터뷰 당시 그는 하루 일자리를 따내기 위해 이틀을 현지답사를 나가는 노력을 거듭하고 있었다.대체 그는 왜 이렇게까지 애를 쓰는 걸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상에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읽혔다. 이런 분투를 지켜보며, 젊은 시절 신춘문예 당선 작가였던 부인 김씨도 10여 년의 공백을 딛고 다시 펜을 잡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인 지난해 보내온 소설집 제목은 '명자꽃이 피었다'. 스스로를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두 사람은 누구보다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새롭게 창조해가고 있었다.일본의 신인 만담가 '오바아짱(할머니라는 뜻의 예명)'의 활약상도 재미있다. 오바아짱은 71세에 데뷔했고 79세인 지금도 전용극장 무대에 서고 각종 행사를 뛴다. 또박또박 기품 있는 어투에 겸손하고 예의바른 태도, 목소리는 성우를 했어도 좋았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만담은 센류(川柳)라는 한줄짜리 정형시를 활용한 경우가 적지 않다. '오늘 아침도 활기차게 일어나 병원에 간다' 같은 식이다. 한국에도 '사랑인 줄 알았는데 심부전' '그때 뽑은 흰 머리, 지금 아쉬워' 등의 '실버 센류' 작품들이 알려져 있다.정년퇴직 뒤 취미삼아 고령자극단에 들어갔다가 '연기 폭을 넓히기 위해' 개그계의 연예기획사 교육과정에 등록했다. 졸업까지의 힘든 과정을 젊은 동기들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그녀는, "나이 들었다고 비슷한 연령대만 만나면 자극이 없다"며 "젊은이들과의 소통이 만담가 생활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의사 출신 젊은 개그맨과 콤비를 이룬 '의사와 할머니' 무대는 두 사람이 진료실에서 투닥거리는 대화가 따스한 웃음을 자아내며 인기를 끌었다. 그녀의 유튜브 사이트에는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난다"거나 "건강 유의해서 오래오래 만담을 보여달라"는 류의 따뜻한 댓글들이 넘쳐난다. 그녀가 보여주는 노년의 여유와 유머는 동년배에게는 용기를, 젊은 세대에게는 나이듦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선물하는 듯하다.필자는 지난해 말 36년간 다닌 언론사에서 정년퇴직했다. 퇴직 전 약 5년간 초고령 시대를 맞이한 한국의 여러 현상과 과제들을 다룬 기획기사와 칼럼들을 연재했다. 퇴직 후 반년 여, 생각보다 상실감은 적고 홀가분함은 크다. 앞으로 펼쳐질 시대에 대한 기대감도 적지 않다.인구구조 면에서 세계는 유례없는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다. 한국은 아예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든 사람들은 쓸모없다는 통념은 사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국 인구 20% 이상을 차지하는 고령자가 모두 쓸모없는 존재라면 사회 전체로 볼 때 얼마나 손해인가.다만 각자 자신의 쓸모, 즉 새로운 역할을 찾되 다음 세대가 주인공이 될 무대는 양보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조심스레 덧붙이고 싶다. 사회 여러 곳에서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 버티는 시니어들이 종종 보이기 때문이다. 시니어 세대는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이미 충분히 주인공 역할을 해보지 않았던가. 주연이 아니어도 작품을 빛내는 명품 조연이 있듯이, 초고령사회의 시니어에게도 시대에 맞는 저마다의 자리가 있을 터다. 세상에 쓸모없는 세대는 없다.━서영아 동서대 일본연구센터 객원교수는 동아일보 도쿄지국장과 논설위원, 콘텐츠기획본부장을 지낸 언론인 출신이다. 한일관계와 고령 사회 문제 등에 천착해 왔다. 정년퇴직 직전 5년간 동아일보에 '서영아의 100세 카페'를 연재했다.
[시대의창/이상엽]AI 시대 대학 교육과 불완전함의 가치
대학 교육 현장에서는 이제 학부 입문 수준의 지식이라면 웬만한 강사나 교수보다 AI가 더 정확하고 균형 잡힌 설명을 제공한다는 감탄을 어렵지 않게 듣는다. 향후 AI의 발전이 지금과 같은 극적인 양상으로 계속될지 아니면 어느 정도 한계에 이를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대학 교육의 상당 부분에서 AI가 이미 인간 교사에 필적하는 수준의 교습 능력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그런데 지식과 기술의 전수에서 앞으로 AI가 맡게 될 역할을 논할 때 간과되기 쉬운 문제가 있다. 인류 문화와 지식의 발전에 있어서 인간 특유의 불완전함이 수행해 온 역할이 그것이다.가령 필자의 전공인 불교철학의 역사를 보면, 한국을 포함한 한자문화권의 불교가 인도불교와 별개의 사상 전통을 형성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도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생긴 크고 작은 오역과 오독이 있었다. 원전에 대한 이해 부족과 번역상의 오류가 인도에서는 제기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의식을 낳았고, 그 결과 독창적인 철학적 논변들이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역된 경문에서 처음 사용된 불멸하는 정신이라는 개념이 그 예다. 불교의 무아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윤회전생을 설명하기 위해 주목된 이 개념은, 훗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중국 불교 특유의 이론의 기반이 되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잘못된 이해였지만, 바로 그 잘못이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이 된 셈이다.이처럼 지식 전승 과정에 수반되는 인간적인 불완전성이 혁신의 계기가 된 사례는 철학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류학의 문화진화론 역시 문화는 완벽한 복제가 아니라 불완전한 변형과 변이의 축적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한다고 설명한다. 만약 한 세대가 정답으로 여긴 사고방식이나 문제 해결법이 다음 세대에 완벽하게 전수된다면, 지식의 축적은 있을지언정 새로운 사유나 접근법이 등장할 가능성은 사라질 것이다.이는 단지 심미적인 차원에서의 문제가 아니다. 지구 생명체가 수십억 년에 걸친 환경 변화 속에서 끊이없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DNA가 복제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미세한 오류, 곧 돌연변이가 축적되어 다양한 종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듯이, 인류 공동체 역시 문화와 사고의 다양성을 바탕으로 예측할 수 없는 변화에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반면 AI는 이러한 창조적인 오류를 만들어내도록 설계된 존재가 아니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장 객관적이고 타당한 답을 생성하도록 학습되며, 발전의 방향 또한 환각이라는 오류를 줄이고 일관성을 높이는 데 있다. 인간의 문화가 불완전한 복제를 통해 진화해 왔다면, AI는 가능한 한 완전한 복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AI에 의존하는 작업이 결과물의 획일화를 가져온다는 점은 여러 연구를 통해서도 입증된 바가 있다.AI는 앞으로도 훌륭한 교육 보조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정답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의 객관적이고 최적화된 답만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는 사회에서는 기존의 전제를 의심하는 새로운 질문이 등장하기 어렵고, 예상하지 못한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공동체의 적응력 또한 약화될 수밖에 없다. 교육자는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인 동시에 자신의 삶과 경험을 통해 형성된 문제의식과 사고방식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교육자들의 서로 다른 해석과 관점이 교육 현장에서 적용될 때 사회는 다양한 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 다양성이야말로 미래의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불완전하고 비효율적이더라도 인간이 교습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이상엽 서울대 철학과 교수는 미국 스탠포드대에서 초기 불교사상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불교철학과 불교사상사 권위자로 잘 알려져 있으며 대학에서의 연구 및 강의 뿐 아니라 방송 출연이나 칼럼 기고를 통해 불교 이야기를 깊이 있으면서도 재미있게 소개해 오고 있다. ━
[시대의창/김상근]그래도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
내가 축구를 사랑하는 이유는 발로 차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물론 육상도 발로 하는 운동이지만, 공을 차면서 뛰지는 않는다. 발로 하는 축구는 특별히 손을 싫어한다. 공에 손을 대면 핸드볼 파울 휘슬이 울리고, 골대 앞에서 손을 대면 페널티 킥이라는 치명적인 벌을 받는다. 축구는 발과 머리, 심지어 몸통까지 허용하지만, 손만큼은 반칙이다. 인간은 손을 사용하는 영장류로 태어났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에서 인간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로 규정했는데,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세상에 도구를 발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축구는 오직 발의 사용을 강제함으로써, 인간의 가장 고유한 특징과 장점을 통째로 부정한다.대한민국 사람들은 손으로 하는 일에 유독 뛰어나다. 중국 사람도 어색해한다는 철제 젓가락으로 파리를 잡는 달인이 있는가 하면, 반도체를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3D 적층 기술까지, 한국인의 손재주는 현란하기 그지없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속삭이듯 움직이는 임윤찬의 손가락을 보라. 배드민턴 채를 신들린 듯 휘두르는 안세영을 보라. 그들은 모두 손의 달인이며 진정한 '호모 파베르'이다. 그러니 월드컵에서 일찍 탈락한 우리 대표팀을 너무 나무라지 마시라. 축구를 손으로 했다면, 우리가 우승했을 것이다.고대 그리스에서 스포츠의 필요성이 처음 대두된 것은 전쟁의 참혹한 기억 때문이었다. 기원전 800년까지 이어진 암흑기 동안 칼과 창, 화살로 너무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반성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776년 올림피아에 함께 모여, 이제부터는 싸우는 대신 싸우는 척하자고 합의를 보았다. 이것이 최초의 올림픽이다. 첫 종목은 약 180m를 달리는 스타디온, 즉 단거리 달리기였다. 이후 디아울로스(왕복 달리기), 돌리코스(장거리 달리기), 팔레(레슬링), 펜타슬론(5종 경기), 하르마토드로미아(전차 경주), 판크라티온(격투기), 퓌그메(복싱) 등이 순차적으로 도입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모두 전투에 필요한 기술이었으니, 스포츠가 전쟁을 대신한 것이다. 올림픽을 통해 그리스인들은 탁월함(아레테)의 기준을 바꾸었다. 전쟁터에서 적을 쓰러뜨리는 용맹한 전사가 아니라, 경기장에서 빛을 발하는 선수에게 찬사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고대 올림픽에 축구가 없었다는 사실은, 축구가 전쟁과 무관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축구가 좋다.내가 축구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서민적이고 평등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축구는 공 하나면 된다. 특별한 장비도, 넓은 시설도 필요 없다. 그래서 가난한 나라도 얼마든지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다. 역대 최다 우승국은 브라질이고, 직전 대회 우승국은 아르헨티나였는데, 둘 다 그리 부유한 나라가 아니다. 축구는 서민적이기에 기회의 평등을 보장한다. 브라질 빈민가 출신 펠레가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것이 그 증거이다. 그는 어릴 때 맨발로 양말 뭉치를 공 삼아 차며 축구를 배웠다. 축구는 출신 계급이나 신분이 아닌, 오직 실력으로 평가받는 운동이다.나는 또 축구에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우리 인생을 목격한다. 둥근 공이 어디로 굴러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축구화 앞코 역시 직각이 아니라 완만한 타원형이다. 둥근 공이 둥근 축구화에 맞았을 때 어디로 날아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결정적인 순간에 공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것은 축구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동네 축구에서는 이를 '똥볼'이라고 한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똥볼'을 차며 살아가는가. 분명히 골대를 향해 찼는데, 어라, 공중으로 날아가네? 분명히 골문 안으로 찼는데, 이런, 골대를 때리네? 군 복무 시절, 혹한기 훈련의 일환으로 DMZ에서 보초를 선 적이 있었다. 그때 간간이 잡히던 북한 라디오 축구 중계 해설자의 긴박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다. "우리 선수, 헐레벌떡 달려와, 뻥 찼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러하지 않은가. 헐레벌떡 달려와 힘껏 찼지만, 헛발질이었던 순간이 과연 몇 번이던가.축구는 전쟁의 기억 없이 태어난 평화의 운동이자 평등한 스포츠라 좋고, 우리 인생을 닮아 더욱 좋다. 화려한 스타디움이 아니라 동네 공터에서, 골목길에서, 공 하나면 시작할 수 있는 운동이다. 찢어질세라 조심해야 하는 선수복이 아니라 청바지를 입고도, 반바지를 입고도 할 수 있는 운동이다. 선수가 헛발질을 할 때마다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우리 인생을 꼭 닮은 운동이다.이처럼 평화롭고 평등하며 철학적인 스포츠가 한국에서 위기를 맞아 모두가 아우성이다.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탈락한 대표팀을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팬들은 전쟁을 다시 시작하려는 것인가. 평등의 정신 위에 세워진 이 고귀한 스포츠를 특정 집단이 독점하여 카르텔을 형성했다면, 그 결과에 대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나는 한국 축구를 사랑한다. 선수들이 땀 흘리며 뛰는 모습에서 우리 인생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도 헐레벌떡 달려가 뻥 차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 아니겠나.━김상근 연세대 명예교수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연세대 신과대학장, 연합신학대학원장을 역임했다. 그리스 로마 철학, 르네상스 연구의 권위자로 다양한 저서와 강연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의 설립과 운영을 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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