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시평
[시대시평/최장혁] 개인정보 못 지키는 기업·국가의 AI 경쟁력은 허상
휴대폰으로 여행지나 관광 상품을 검색하면 곧이어 관련 상품 권유를 받아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을 스스로도 잊고 있었는데, 이를 타임라인 형태로 보내오는 플랫폼 기업들을 보며 현대 문명의 편리함을 실감하는 동시에 개인정보 활용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국내외 주요 기업들의 잇따른 개인정보 유출 사태 역시 국민적 불안을 키우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정부 대응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AI 시대를 맞아 개인정보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지만, 과도한 수집과 이용에 대한 우려 또한 함께 증가하고 있다.국가를 구성하는 사회적 자본 중 하나는 신뢰다. 신뢰 수준이 높은 사회는 불필요한 거래 비용을 줄여 전체적인 효율성이 높다. 반면 신뢰가 낮은 사회는 이를 보완하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이는 곧 비효율로 이어진다.기업의 사회적 신뢰는 전통적으로 재무적 안정성, 최고경영자의 도덕성, 기업 윤리 등을 기준으로 평가되어 왔다. 한때 강조되던 기업의 브랜드 가치 역시 결국은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개인정보 보호 수준이 기업 신뢰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시장 점유율 1위 기업이라도 개인정보 유출 사태가 발생하면 우월적 지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국가 간 신뢰 역시 개인정보 보호 수준과 직결된다. 작년에 통과한 유럽연합과 대한민국 간 '적절성 결정'(Adequacy Decision)은 양국이 서로의 개인정보 보호 수준을 자국과 동등한 수준으로 인정한 결과이며, 이는 개인정보 국외 이전을 허용하는 근거가 된다. 결국 개인정보 보호 수준에 대한 신뢰를 외교적 합의로 확인한 사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용정보 점수 역시 개인의 재정 상태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수치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AI 시대에 개인정보의 의미는 크게 달라졌다. 과거에는 주민등록번호처럼 개인을 식별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지만, 이제는 개인의 행동과 위치를 파악하고 이를 연결하는 핵심 요소로 기능한다. 개인이 인터넷을 이용하거나 휴대폰을 소지하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기기 식별 정보를 통해 다양한 행태 정보가 수집된다. 로그인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개인의 이동 경로와 활동이 파악될 수 있다.자율주행차는 차량 소유주의 개인정보를 중심으로 중앙 서버와 연결되며, 신용카드 거래 내역 역시 단순한 경제 활동을 넘어 개인의 삶의 패턴을 보여주는 정보가 되었다. 이러한 개인정보가 정보 주체의 의사에 반해 수집·활용되거나 해킹으로 유출될 경우, 그 피해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 있다. 특히 AI 학습을 위한 데이터 활용이 확대되면서 개인정보 주체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높이기 위한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 우선 대규모 개인정보를 처리하는 기업과 조직은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관련 인적·물적 인프라를 정비해야 한다. 개인정보 보호를 단순히 실무 담당자의 업무로 한정하거나 관련 투자에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해킹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기 전에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기본적인 투자와 체계를 갖추는 것이 우선이다.정부 역시 개인정보 보호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근 개인정보 보호법 개정을 통해 과징금 상한을 총매출액의 10%로 인상하는 방안이 마련되었고, 시행을 앞두고 있다. 다만 정부는 AI 글로벌 3를 목표로 하는 만큼 개인정보 활용을 통한 기술 혁신 역시 병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결국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신뢰를 높여 유출로 인한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데이터 활용 기반의 기술 혁신을 달성해야 한다. 이를 위해 사후 책임을 강화하는 제도와 함께 내부 통제 체계를 실질적으로 작동시키는 방안이 필요하다. 일정 규모 이상 기업의 감사에 개인정보보호 항목을 포함시키는 미국의 방안도 고려해 볼만하다. 아울러 정보 주체가 사전에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인증 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보안 산업의 경쟁력을 높여 우수한 인재가 개인정보 보호 및 보안 분야로 유입되도록 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개인정보를 지키지 못하는 국가는 AI 강국이 될 자격이 없다.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이 AI 글로벌 3 목표를 달성하기를 기대한다.
[시대시평/이정민]충돌의 시대, '한국형 모델'의 길
언제 종료될지 모르는 이란전쟁, 4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에너지와 주요 공급망의 취약성, 그리고 인공지능 (AI) 혁명의 가속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의 충돌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 가속화되고 있는 북핵 위협, 중국의 발 빠른 군사력 강화, 그리고 미국의 예측하기 여려운 대외정책까지 고려하면 모든 분야가 불확실하고 불안할 뿐이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올 것이 왔구나"라는 인식 아래, 한국의 맷집을 키우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구한말부터 극심한 절망·위기·억압·전쟁·가난·고속 성장·민주화·글로벌화 등의 연장선상 속에서 한국인 특유의 융합적·창의적 DNA를 기반으로 세계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선진국으로 발전한 저력이 있다. <Made in Korea>는 이제 일본과 독일 제품을 능가하는 상표가 됐다. 그러나 앞으로 필요한 것은 본격적인 AI 시대에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그리고 동서양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한국형 모델』(Modelled in Korea)을 만들고 다듬고 전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것이다.2025년 데이터에 의하면 세계 GDP랭킹 1∼5위는 미국, 중국, 독일, 일본, 영국이다. 2015년 이후 10년간 중국은 72% 인도는 77% 성장했다. 같은 기간 50%이상의 성장을 기록한 나라는 튀르키예 (59%)와 인도네시아 (51%)다. 물론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등은 인구분포 변화, 성장둔화, 극심한 부정부패, 그리고 확산되는 소득격차와 같은 구조적 문제를 동시에 안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미국, 중국, 그리고 인도 등 어느 나라도 다가오는 AI시대에 지구촌 대부분의 나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모델국가가 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전 세계의 모든 부정적인 요소(저출산, 초고령화, 높은 자살률, 저성장 진입, 고조되고 있는 북핵 위협)와 긍정적인 요소 (선진 제조 산업, 로봇화, 기술혁신, 문화산업, 높은 교육률, 그리고 진취적 도전 정신)가 쉬지 않고 충돌하고 있는 한국이야말로 '충돌의 시대'에 『패러다임 이동』 (paradigm shift)을 주도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그 방향을 네 가지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다.첫째, AI기반 산업 전환이다. 인구 감소 시대에도 AI기반 공장을 중심으로 고부가가치를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다면, 인간과 휴머노이드와의 새로운 사회적 규범과 시스템을 단계적으로 체계화함으로써 보건·복지·요양 서비스 등 저성장·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새로운 성장 로드맵을 제시할 수 있다. 둘째, 단순한 무기수출 강국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전장환경에 적합한 스마트 무기체계와 양용기술의 혁신을 주도해야 한다. 30∼40년 주기로 무기체계와 안보시스템을 개선해야 되는 수퍼 사이클 (super cycle)에서 주도적인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며, 나아가 서방국 중심의 안보제공 체제에서도 서서히 벗어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셋째, 『선도적 실증국가』 (First Prover)로서 국가와 사회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AI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그러나 AI없는 나라 발전도 환상이다. 따라서 한국이 AI시대에 『살아가는 방식』을 제시할 수 있다면 강대국과 중견국 그리고 후발주자들도 한국사례를 검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넷째, 정치 구조의 혁신이다. 지금처럼 여야간의 극심한 증오로 가득 찬 정치체제로는『선도적 실증국가』에 필요한 국가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다. 특정 정당이 절대적인 정치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하더라도 영원할 수 없고, 돌멩이만 던지고 연속적인 자살골을 자처하는 정당에서 진정한 대안을 기대할 수 없다. 후진적 정치체제가 존속하는 한 '대한민국 2.0'은 그림의 떡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태극기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음양의 조화와 우주의 4괘인 하늘, 땅, 물, 그리고 불을 상징하는 문양을 지닌 국기이다. 상충되는 요소들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만큼 대립의 뿌리가 길고 짙은 나라도 찾기 힘들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의 소용돌이와 조선의 붕괴, 그리고 분단 이후의 대치상황 등 역사적 전환점마다 양극단의 대립 속에서 제대로 된 국가개혁을 한 적이 없다. 유일한 예외가 건국 이후 우리나라가 이룬 경제발전·자유민주주의의 정착이다. 기존의 국제질서가 서서히 와해되고 새로운 글로벌 질서가 구축되기 전까지 지금 발생하고 있는 각종 충돌은 더 심화될 수밖에 없다. 1960∼1970년대에 도입된 급속성장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뿐더러 『충돌의 시대』에는 새로운 접근과 전략이 필수적이다. 5천년 역사상 중국보다 앞선 시기는 지난 50년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대륙과 해양, 동서양,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연결하는 독특한 위치에 있다. 그리고 가장 민첩한 진화와 혁신 경험을 두루 갖춘 지구촌의 유일한 나라다. 충돌하는 지구촌 속에서 한국 주도로 AI시대의 새로운 국가모델을 만드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이라고 봐야 한다.
[시대시평/강석훈] 대한민국은 다시 꿈꿔야 한다
최근 중견 기업을 경영하는 한 기업가로부터 흥미로운 일화를 들었다. 자사 주가의 저평가를 역설하는 그에게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던진 질문은 생소했다. "이 회사의 PDR은 얼마입니까?" PER(주가수익비율)도, PBR(주가순자산비율)도 아닌 용어에 당황한 그에게 돌아온 답은 짧고 강렬했다. "지금은 Dream, 즉 꿈의 시대입니다."물론 '꿈 대비 가격 비율(Price to Dream Ratio)'은 정식 학술 용어가 아니다. 그러나 시장의 현실을 설명하는 비유로는 꽤 의미심장하다. 결국 어떤 자산의 가격은 현재의 실적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기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PDR에서 꿈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꿈의 크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 꿈의 실현 가능성이다. 꿈의 크기란 단지 미래 수익의 현재가치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 수익이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크게 팽창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대까지 포함한다. 실현 가능성이란 그 기대를 현실로 바꿔낼 능력, 다시 말해 기술과 제도, 인재와 조직, 리더십과 실행력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로봇 한 대, 기술 시연 한 번, 혹은 아직 이익도 내지 못한 기업이 비전만으로 기업가치가 급등하는 현상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 원래 시장은 현재보다 미래를 사고, 더욱이 요즘 시장은 실적보다 서사를 산다.이 비유는 개별 기업을 넘어 국가 경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 기업의 가치가 시가총액 또는 1주당 가격으로 표현되듯, 국가의 가치는 GDP 또는 1인당 GDP로 표현될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꿈이 크고 실현 가능성이 높은 기업의 가치가 올라가듯, 국가 역시 미래 비전이 분명하고 그것을 실현할 역량이 있다고 평가받을수록 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PDR 관점에서 오늘의 한국 경제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가? 냉정하게 말해, 한국 경제의 중장기 성장 둔화는 더 이상 추상적 우려가 아니다. 1964년부터 1994년까지 30년 동안 달러 기준 한국의 1인당 GDP는 100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1994년부터 2024년까지 다음 30년의 증가 폭은 3배 남짓에 그쳤다. 2024년부터 2054년까지 다가오는 30년의 증가폭은 2배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 거의 확실시 된다. 성장의 속도와 밀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아졌다.성장 둔화 추세는 그 자체로 큰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성장에 대한 열망이 소멸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PDR 관점에서 보면, 한 나라의 미래 가치는 그 국민이 그리는 꿈의 크기와 실현 가능성의 곱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문제는 실현 가능성 이전에, 정작 꿈 자체의 크기가 왜소하거나 목표가 희미하다는 데 있다. 꿈이 없으면 계획도 없고, 계획이 없으면 실행도 없다.이른바 '피크 코리아' 논의가 던지는 진짜 경고도 여기에 있다. 정점에 도달했느냐 아니냐가 본질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새로운 도약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꿈을 잃은 사회는 미래에 투자하기보다 현재를 소진한다. 자산을 축적하기보다 부채를 앞세워 오늘의 만족을 늘리려 한다. 사회 전체의 시선이 내일이 아니라 오늘에만 머무는 것이다.그러나 한국은 원래 꿈이 없던 나라가 아니라, 매번 더 큰 꿈을 꾸면서 하나씩 꿈을 달성하던 나라였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산업화의 꿈을 이뤘고, 한강의 기적을 통해 중진국 도약의 꿈을 이뤘다. IMF 외환위기라는 혹독한 충격을 겪고도 제도와 산업을 재정비하며 중진국 함정을 넘어서 선진국 진입의 꿈을 이뤘다. 불가능해 보이던 꿈을 현실로 만든 경험이 이미 우리 안에 축적돼 있다. 이제 새로운 대한민국, 더 큰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는 다시 꿈을 꿔야 한다. 대한민국이 더 부강해지고, 대한 국민이 더 행복해지는 것이 꿈의 방향이다. 대한민국이 세계 경제의 번영과 지속가능성을 선도하는 필수불가결한 핵심국가가 되는 것이 꿈의 크기이다. 꿈을 실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연료는 리더십과 국민 공감대이다. 분열을 통해 작은 이익을 탐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희생과 헌신을 통해 더 큰 미래를 만드는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수없이 많은 토의와 합의 과정을 거쳐 광범위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꿈이 나의 꿈이 되어야 그 꿈은 달성될 수 있다. 이제 다시 꿈을 시작하자. 다시 꿈꾸는 대한민국이 나를 설레게 한다.
[시대시평/오연천] 야권의 표류와 여권역할 기대의 역설
야권의 정부·여당에 대한 견제와 비판, 그리고 대안 제시 노력은 대통령제 정부 시스템의 건강한 운영과 국가경쟁력 확립에 있어 필수적 조건이다. 그럼에도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지 1년이 다가오는 시점에 야권의 기본역할이 정치과정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여권의 입장에서는 지지기반 유지·확대에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표정을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재명 정부는 여론조사 상 국민 지지율 50% 후반 수준을 견고히 유지하면서, 곧 치러질 지방선거 결과도 낙관론이 우세한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문제는 국회 의석 107석을 점유하고, 오랜 기간 대안 정치세력의 한 축을 형성해왔던 야권이 국정의 견제와 균형화 노력을 통한 기본 책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국민들이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정운영에서 정부의 정책 기조 형성과 주요 정책의 집행에 늘 일정 수준의 대안 제시 노력과 비판이 용해됨으로써 미래의 위험도를 줄이고 보편적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107석의 원내 의석을 가진 야당이 탄핵정국의 총체적 책임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대안정당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역설적으로 그러한 부작위와 정치적 공백에 대한 비용이 국민으로 향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정부·여당의 추가적 몫으로 전가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야권 본연의 역할이 충실히 작동하지 않는 「불균형 상태」가 지속되면 궁극적으로 야권이 해야 할 몫의 상당 부분을 정부·여당이 스스로 여과하고 조율해야 하는 이중적 번뇌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야권의 심기일전을 기대하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대통령을 포함한 여권이 국민의 「일반 의사」에 기초한 국가의 보편적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하는 소명감에 부응해야 한다. 이를 위해 상당수 국민의 감추어진 의지와 기대를 적극 감안하는 정치적 지도력이야말로 지도자의 귀감이라고 생각한다. 탄핵정국을 거치며 대선에 승리하고 높은 지지도를 유지하고 있는 여권이지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경쟁 후보들이 득표한 49% 유권자들의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는 신념을 주요 정책 변수의 하나로 고려할 수 있는 특단의 지혜를 기대해 본다. 여권은 현재의 취약한 여·야 정국 구도 하에서 야권을 포용하고, 대화와 협상의 파트너로 적극 존중함으로써 국정운영의 눈높이를 격상하려는 성숙된 자세를 새롭게 견지할 필요가 있다. 집권 여당이 판단하는 주요 정책 내용의 상대적 우위마저도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조율하려는 성숙된 정치문화 형성에 앞장설 것을 기대한다. 선거 승리라는 정책목표에 앞서 공동체의 보편 이익 실현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일 때 대통령을 비롯한 집권 여당의 존재감은 한 단계 격상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듯이, 지방선거를 거치면서 여당 핵심 지지계층 중심의 인사의 틀을 대폭 개방하여 사실상 「거국내각」에 준하는 지도 체계의 구축에 투혼을 투입하기를 기대한다. 상당수 국민의 입장에서 야권이 해야 할 일의 상당 부분을 여권이 대체하는 역설적 상황을 현 야권은 냉철히 직시해야 한다. 야권의 존재감 상실 우려에 대한 기우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야권역할의 복원(resilience)을 통한 존재가치를 확립하려는 창당수준 이상의 변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 지방선거나 총선에서의 패배를 염려할 것이 아니라 특정 지역의 대표성과 기득이익의 틀에서 벗어나 국민정당으로서의 본질적 존재감의 전통과 뿌리를 착근시키려는 발상의 전환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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