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광장
[시대광장/정용관]검사의 존재 이유, 밑바닥서 다시 찾아야
"윤석열 대통령의 가장 큰 문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준 것이다."계엄 사태가 벌어지기 한참 전, 한 언론계 인사가 사석에서 던진 '모멸감'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꽂혔던 적이 있다. 모멸감은 단순한 불쾌감이 아니다. 자신의 가치와 존엄이 부정당했다고 느낄 때 생기는 감정이다. 과학기술인, 의사, 교사, 경제 관료 등 각자의 영역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온 전문가 집단은 물론 평범하게 일상을 영위해 온 보통 사람들까지, 최고 권력자의 '검찰 지상주의'에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새삼 이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그 후과가 심대하기 때문이다. 권력의 정점에 선 개인의 태도가 집단 전체의 얼굴이 됐다. 물론 오로지 윤 전 대통령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검찰은 지금 사실상 '폐족'에 가까운 처지로 내몰렸다. '문제적 검사'들이 아닌 묵묵히 일해온 검사들은 통탄할 일이다. 작금의 검찰개혁 상황을 놓고 모멸감과 자괴감에 빠진 검사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상당 부분은 반작용이다. 그동안 세상을 만만하게 보고, 법을 다루면서도 법 위에 선 듯 행동해온 데 대한 되돌림이다. 자업자득이다. 검찰에 대한 불신은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수사와 기소를 동시에 쥐고, 때로는 권력의 의중과 맞물려 움직였던 기억이 사회 전반에 남아 있다. 무소불위 검찰 시대의 종식은 필연에 가깝다.문제는 그 검찰개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다. 지금 국면은 단순한 형사사법 제도 개편 차원을 넘어선다. 권력의 축을 옮기는 과정에 가깝다. 검찰을 밀어내는 순간, 그 자리는 비어 있지 않다. 누군가는 채운다. '공룡 경찰'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 과정에서 여권 내부의 결도 분명히 갈린다. 검찰을 손보되 정권 운용 도구로서의 쓰임을 남겨두려는 흐름과, 벌써 차기 권력 경쟁에 나선 듯 검찰을 완전히 배제하려는 흐름이 충돌하는 것이다.그 점에서 정치검찰을 없애겠다는 개혁이 오히려 정치 한복판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범죄 대응 역량 강화와 피해자 보호라는 형사사법 제도 개편의 본질은 뒤로 밀렸다. 이 와중에 검찰이 붙잡고 있는 것이 보완수사권이다. 그러나 검찰이 준사법기관으로서 경찰 수사를 1차로 통제하고, 검찰의 오류를 법원이 최종 판단하던 형사사법의 원칙적 구조가 허물어진 상황에서 보완수사권이냐 보완수사요구권이냐는 논쟁은 사실 곁가지다. 게다가 큰 방향은 이미 정해졌고, 검찰은 속수무책이다. 수사와 기소를 끊겠다는 흐름은 되돌리기 어려워 보인다.오히려 더 눈여겨볼 대목은 '권한 잔존' 여부가 아니라 수사 결과에 대한 '책임 구조'다. 보완수사권이 남아 있는 체계에서는 수사 과정에 검찰이 다시 개입할 수 있고, 이 경우 수사가 잘못됐을 때 서로 상대방 탓을 하며 책임 소재가 흐려지기 때문이다. 수사와 기소의 '단절'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보완수사권을 남겨두는 선택은 애매한 형태일 수 있다는 얘기다. 제도가 실패했을 때 누구도 온전히 책임지지 않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그러니 차라리 단순하게 갈 필요가 있다. 검찰 스스로 보완수사권을 포기하고 기소에만 집중하는 구조를 택하는 것이다. 수사와 기소의 완전한 '단절'로 수사에 허점이 생기는 등 혼선이 발생한다면 그것이 바로 제도의 성적표다. 그때 비로소 무엇이 문제였는지 드러날 것이다. 물론 검찰의 수사권 완전 박탈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단할 필요는 없다. 경찰이 제대로 수사하고 피해자가 법의 보호를 충분히 받게 된다면 문제 될 게 없다. 반면 수사 공백이 생기고 피해자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건 전적으로 제도 설계자와 실행자들의 책임이 될 것이다.검사 집단이 이제야 느끼는 모멸감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정치검사들의 설 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특정 타깃을 겨냥한 별건 수사와 억지 기소로 존재감을 키워온 부정적 유산은 사라져야 한다. 지금은 그 대가를 치르는 과정이다. 단죄와 낙인은 구분돼야 한다. 분명한 것은 검찰이 더 철저히 마음을 비우고, 더 처절하게 바닥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만 언젠가는 검사 집단의 진정한 존재 이유가 다시 싹틀 수 있다.역설적으로 지금 검찰을 무너뜨리는 것은, 스스로 내려놓지 못하는 미련일지도 모른다.
[시대광장/이상복] 한국 저널리즘에 숙제 던진 '공소취소 거래설'
미국 워싱턴 시내 워터게이트 빌딩은 저널리즘의 상징적 공간이다. 1972년 6월, 이곳 야당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던 비밀공작 요원들이 검거됐다. 단순 절도로 묻힐 뻔했지만, '워싱턴포스트'는 집요한 추적 끝에 백악관이 개입한 선거 공작의 실체를 밝혀냈다. 그로부터 40년이 흐른 2012년, 이 빌딩에서 열린 '보도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전·현직 기자들의 자부심은 세월이 무색할 만큼 견고했다. 그들은 방대한 증거 자료와 철저한 교차 검증을 워터게이트 보도의 핵심으로 꼽았다. 특종의 주역 밥 우드워드는 "기자들이여, 현장으로 가라"며 검색과 제보에 기대는 취재 관행을 질타했다. 오래된 기억을 다시 꺼낸 건, 최근 방송인 김어준 씨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을 소환했기 때문이다. 출연자로 나온 한 전직 기자는 소위 '단독'이라며 정부 고위 관계자가 검찰 간부들에게 대통령 관련 사건의 공소 취소를 요구했고, 검찰은 이를 거래로 받아들였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취재원 공개와 명확한 근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김씨는 "워터게이트 제보자 딥 스로트도 33년 후에야 신원이 밝혀졌다"며 익명성 뒤로 숨었다. 워터게이트 보도는 제보에만 의존한 받아쓰기 저널리즘이 아니었다. 편집국 간부들은 기사 작성에 개입해 정보원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수정을 지시했다. 취재팀 역시 '딥 스로트'에 매몰되지 않았다. 결정적인 국면에서만 제한적으로 접촉했고 엄격한 교차 검증을 거쳤다. '두 명 이상 독립된 취재원에 의해 확인되지 않은 한 기사화하지 않는다'는 게 보도의 원칙이었다. 수표 일련번호를 추적하고 정부 문서를 뒤지는 등 취재는 사실상 수사에 가까운 방식으로 진행됐다. 워터게이트 보도의 본질은 취재원 은닉이 아니라 치열한 검증 저널리즘에 있었다.저널리즘의 잣대로 볼 때 김어준씨 유튜브에서 거론된 '공소취소 거래설'은 허점이 적지 않다. 이 정도의 중대 사안이라면 복수의 취재원 확보는 물론 뒷받침할 물증과 당사자 해명이 포함돼야 한다. 말이 오간 정황도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카더라식 발언은 단독 보도가 될 수 없다. 특히 공소취소를 언급했다는 인물을 "대통령 최측근으로 볼 수밖에 없는 정부 고위 관계자"라는 모호함 속에 숨긴 건 납득하기 어렵다. 실명으로 비판받아 마땅한 공직자를 누구를 위해 감춰준단 말인가. 익명의 방패는 불이익을 당할 우려가 큰 약자나 공익 제보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다. 사실 이번 사안 외에도 한국 언론의 익명 취재원 남발은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고위 관계자' '내부 인사'부터 '사정을 잘 아는 소식통'까지, 이름 없는 유령들은 지면과 화면을 가득 채운다. "~라는 말이 나온다" 식의 애매한 전언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기정사실로 둔갑시키는 편리한 수단이다. 평론가들 역시 "내가 들었는데"라며 확인되지 않은 풍문을 무용담처럼 늘어놓는다. 이렇게 배출된 파편적 주장은 정치권으로 번지며 파장을 일으키지만, 정작 실체를 검증하거나 책임을 물을 길은 요원하다. '공소취소 거래설'은 플랫폼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중대한 질문도 던진다. 김어준 씨는 "취재의 신빙성은 기자 본인이 책임질 일"이라며, "제보자를 묻지 않는 것이 이 바닥의 불문율"이라는 취지로 발언했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플랫폼의 '게이트키핑(검증 시스템)' 부재를 자인한 셈이다. 언론은 고정 기고자의 원고 한 줄에서도 사실관계의 오류를 걸러내는 곳이다. 생방송 중 튀어나오는 즉흥적 발언이라 해도 진행자가 이를 제어하고 교정할 책임은 막중하다. 출연자의 발언이 방송사에 법정 제재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수많은 사례가 그 연대 책임을 증명하고 있다.김어준씨의 유튜브는 이제 청와대 출입기자까지 보유한 정식 언론사다. 이번 '공소취소 거래설'이 거센 후폭풍을 몰고 온 이유도 그 위상에 걸맞은 저널리즘의 공적 기준을 요구받고 있어서다. 과거 "냄새가 난다"는 식의 불투명한 의혹 제기가 정쟁으로 비화됐던 구습을 끊어낼 수 있을지 미디어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영향력이 커질수록 발언의 무게는 엄중한 검증과 책임이라는 추에 실려야 한다. 사실 확인과 절제된 논평이라는 저널리즘의 본령에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음모론의 그늘에 머물 것인가. 그 선택은 한국 유튜브 생태계 전반에 중대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칼럼을 끝내기 전 마지막 한마디. 위에서 언급한 '저널리즘의 원칙'은 필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시대광장/채인택] 메기 강 "늦어서 미안하다"…황금보다 귀한 말
"이 상을 한국, 그리고 곳곳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드린다.(This is for Korea and Koreans everywhere.)" 한국계 캐나다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연출가 메기 강 감독이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밝힌 수상 소감이다. 그가 구상하고 공동 연출한 K-팝 소재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는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오스카를 안았다.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인 '골든'까지 주제가상을 받으면서 '케데헌'은 2관왕에 올랐다. 이날 강 감독은 "'저와 닮은 분들'이 주인공인 이런 영화가 나오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미안하다"라는 말로 듣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객석에서 눈물을 훔치는 한국계 영화인의 모습도 카메라에 잡혔다. 이민 생활에서 겪었던 아시아, 특히 한국 문화에 대한 현지의 몰이해나 오해를 나타내는 말로 읽힌다. 하지만 이어서 한 "그러나 해냈다"는 말로 한국계 영화인으로서 성취감과 자부심을 드러냈다. 강 감독의 수상 소감은 한국계 이민자로서의 정체성과 한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또렷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5살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갔지만 평소 자신을 '강민지'로 소개하고, "내 내면은 100%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등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한국 문화의 정서가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인의 마음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K-팝과 한국문화를 소재로 '케데헌'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현대 한국과 한국 문화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해 감탄을 자아낸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문화의 경쟁력을 믿고 이를 글로벌화하는데 진심이었던 셈이다.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고 글로벌 팬들이 주제가 등에 등장하는 한국어 가사를 그대로 따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전율했다는 일화도 이를 잘 드러낸다. 아울러 작품 속에서 한국 여성 캐릭터를 정형화된 모범생으로 그리지 않고 인간적인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한 것도 많은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할리우드 영화에 흔히 나타나는 동아시아인, 특히 한국인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을 무너뜨린 셈이다. 대신 개성과 결점을 가진 현실적 인물로 구현했다. 한국 출신의 문화적 자부심,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담은 것이다. 이날 수상 소감이 많은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것도 이런 진솔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골든'을 부른 한국계 미국인 가수로 공동 작사·작곡가인 이재의 수상 소감 역시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어린 시절 K-팝을 좋아하는 저를 사람들이 놀렸지만, 지금은 모두가 우리의 노래를 부른다. "다만 공동 연출자 크리스 아펠한스 감독의 수상 소감은 조금 다른 결을 보여준다. "음악과 이야기에는 문화와 국경을 초월해 우리를 연결하는 힘이 있다."강 감독과 이재가 K-팝과 한국인, 또는 아시아인의 문화가 변방에서 중심으로 자리를 옮겼음을 강조했다면, 아펠한스 감독은 문화권 간의 소통과 '문화적 혼종(Cultural Hybridization)'에 좀 더 무게를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류, 특히 K-팝을 한국문화의 전지구적 파급으로 보는 입장과, 한국문화와 다양한 문화간 혼종의 산물로 보는 시각이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차이는 하버드대 영문학 교수인 마틴 푸크너가 설파한 '문화를 보는 두 가지 렌즈'를 떠올리게 한다. 『컬처, 문화로 쓴 세계사(Culture: The Story of Us, From Cave Art to K-Pop)』라는 책에서다. 바로 '정체성'과 '보편성'이다. 문화연구에서 정체성은 '민족(공동체) 문화' '전통 문화' '고유 문화'라는 말로 주로 설명된다. 문화를 내부 소속인의 공동 자산이자 고유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개념이다. 보편성이라는 개념에서 보면 문화는 특정 집단이 아닌 인류 전체의 소유물이다. 서로 교류하고 접촉하면서 시너지를 얻어 생긴 혼종의 산물이 문화라는 입장이다. 서로 다른 요소·문화·인간집단이 혼합·융합·교배돼 완전히 새로운 형태나 제3의 산물, 또는 특성을 만들어내는 것을 혼종이라고 부른다.전 세계 팬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K-팝은 한국문화의 저력과 전통이라는 정체성과, 고유 문화가 외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생긴 보편적인 혼종의 힘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가사에 한국어와 영어가 섞이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이유일 것이다. 이제 K-팝은 특정 국가의 문화라기보다 인류의 문화적 성취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푸크너 교수도 "서구의 록, 미국 흑인에서 비롯한 재즈, 자메이카의 레게, 아프리카계 미국문화에서 비롯한 아프로 비트 등이 자연스럽게 뒤섞인 것"을 K-팝 파급력의 원천으로 꼽았다. 그러면서 K-팝이 한국 생활문화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해 미국 팝과 랩에선 지나칠 정도로 흔한 폭력·외설·약물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경쟁력으로 꼽았다. 결국 교류·소통·혼종을 이끈 한국문화의 개방성과 포용성, 그리고 전연령층이 즐길 수 있는 '깨끗한 콘텐츠'가 K-팝 세계화의 동력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문화에서 개방과 소통의 힘을 이처럼 잘 보여주는 것이 또 있을까. K-팝의 문화적, 산업적 성공은 '자유방임형 글로벌화'의 산물이다. 정치나 권력이 깊이 개입하지 않은 환경이 창작자들의 자유로운 실험과 글로벌 진출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K-팝의 성공은 문화가 국경을 넘어 어떻게 확장되는 지를 보여주는 살아 있는 사례다. 하지만 성공이 영원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적 색채를 지키면서도 세계와 더 자유롭게 섞이고, 끊임없이 변주하는 것. 바로 그 역동성이 앞으로도 그 생명력을 결정할 것이다.
[시대광장/정용관] '동굴 정치'의 어두운 그림자
플라톤의 비유처럼 동굴에 갇히면 벽에 비친 그림자를 현실로 착각한다. 정치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강성 지지층의 공간에 오래 머물다 보면 그들의 목소리가 마치 다수 민심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 순간 정치의 기준 자체가 흔들린다는 점이다. 정치가 '의식의 동굴'에 갇히는 것이다."계엄도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발언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국민의힘 장동혁 의원이 당 대표에까지 오르는 과정을 보며 한때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렸던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이 떠올랐다. 보우소나루 정치의 핵심 기반은 복음주의 교회였다. 브라질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는 이 네트워크는 강력한 정치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 세력에 올라탄 그는 반좌파 노선에 종교적 보수 가치를 결합해 강력한 정치 동원력을 만들어냈다.지지층의 에너지는 폭발적이었다. 그러나 그 정치의 기반은 넓은 민심이 아니라 협소한 열광층이었다. 도덕의 이름으로 상대를 악마화하는 종교적 '선악' 구도와 갈라치기의 정치적 폐해는 심대했다. 2022년 대선에서 룰라 현 대통령에게 패한 보우소나루가 지금은 선거 출마 금지와 쿠데타 의혹 수사에 묶여 정치적 수세에 몰린 건 우연이 아니다. 극단 정치가 결국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윤 어게인' 세력 가운데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거론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트럼프 정치의 핵심은 반이민과 국경 봉쇄, 낙태 인종 이슈 등 문화전쟁이었다. 백인 복음주의도 결합했다. 윤 어게인 세력 역시 그런 트럼프 지지층과 문화적·심리적 연대를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메리카 퍼스트'로 수렴되는 트럼프 정책은 기본적으로 동맹국의 이익까지 훼손하는 국가주의적 포퓰리즘 성격이 강하다.한국의 정치 구조는 미국이나 브라질과 다르다. 자유무역을 근간으로 하는 우리 경제에선 이념에 따른 정책 차별성이 크지 않다. 종교 정치의 동원력도 제한적이다. 그래서 '윤 어게인' 세력의 등에 올라탄 장 대표의 정치 노선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도통 가늠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계엄 사태는 보수 대 진보의 경쟁을 넘어 '민주 대 반민주'라는 원초적 기준을 많은 국민에게 각인시켰다. 정치 노선 이전에 상식과 법치의 문제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체제 전쟁" "제2의 건국전쟁" 같은 낡은 구호에 매달렸으니 동굴에서 바깥 세상을 재단한 꼴이다.존립 위기에 놓인 국민의힘이 참고할 만한 사례는 독일 보수 정치다. 독일 역시 극우의 부상이라는 시험대 위에 올라 있다. 반이민을 앞세운 극우 정당 AfD가 지지율 20% 안팎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키웠지만 독일 보수의 중심인 기독민주당(CDU)은 극우와 선을 긋는 '방화벽' 원칙을 허물지 않았다. 극단의 언어로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유혹이 결국 보수 정치의 토대를 무너뜨린다는 역사적 교훈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나치 집권의 경험이다. 물론 보수 가치와 중도의 실용주의를 아우르는 '넓은 정치적 우산'이었던 기독민주당이 메르켈 퇴임 이후 극우 득세 속에 지지 기반이 다소 흔들리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극우와 경쟁하되 극우로 이동하지 않았다. 이것이 독일 보수의 생존 전략이다.국민의힘이 어정쩡하게 '윤 어게인' 세력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당장 눈앞의 지방선거가 급했을 것이다. 이제 국민의힘은 다시 40% 정당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있을까.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선언이 아니라 실질이다. 국민의힘이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다시 서려면 '절윤' 선언을 넘어 '상식과 법치'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장과 미래의 담론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게 '동굴 정치'에서 벗어나 중도 보수와 합리적 보수의 지지를 회복하는 길이다. 동굴 밖에는 체제 전쟁이니 제2의 건국전쟁이니 하는 소리에 공감할 이들이 없다. 장동혁의 국민의힘이 단호하게 그 길을 가지 못한다면…. 차라리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확대해 전국 정당의 외피를 벗고 일정 지지층을 대표하는 몇십 석 규모의 '중형 정당'으로 가는 것이 현실적 생존 전략일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없기를 바란다. 보수와 진보의 팽팽한 긴장 관계야말로 중도를 확장하고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힘이라 믿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의 균형추는 이미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다.
[정용관 칼럼] 권력은 스스로 절제하지 않는다
정치는 발전하는가, 아니면 반복되는가. 정치학자들이 오래 붙잡아 온 질문이다. 미국 정치학은 오랫동안 발전 가능성을 설파해 왔다. 전통사회에서 근대국가로,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은 하나의 방향성을 갖는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제도의 확산이 곧 정치의 성숙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민주주의는 이식될 수 있었지만, 권력을 둘러싼 인간의 본성까지 함께 바뀌지는 않았다. 정치사상은 이 점에서 훨씬 신중했다. '권력은 스스로 절제하지 않는다.' 민주정도 타락할 수 있고, 공화정도 무너질 수 있으며, 선의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 같은 전통적 공화주의자들은 인간의 이익 추구 본성을 전제로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했다. 통제와 견제가 정치의 출발점이라는 얘기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정치의 성숙은 권력을 통제하는 장치의 정교화에 가깝다. 요즘 우리 정치를 보며 이런 고전적 통찰이 새삼 떠오른다. 계엄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중대한 헌정 위기를 거쳐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시민은 헌정 질서를 지켜냈고 민주주의 제도는 작동했다. 이는 분명한 성취다. 그러나 제도가 국체(國體)의 위기를 견뎌냈다고 해서 우리 정치가 한층 성숙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아직도 계엄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야당이 한심하지만 국정을 맡은 집권 세력의 책임은 훨씬 더 크다. 권력은 공백을 두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집권 초반임에도 미래 권력 투쟁이 전면에 등장하는 모습은 대체 뭔가. 무슨 무슨 유튜버들이 여론을 호도하고 배후 권력을 행사한다는 논란도 뜨겁다. 그러다 보니 국정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권력 내부의 역학 관계만 고스란히 노출돼 뉴스를 장식한다. 온갖 정책이 쏟아지지만 적지 않은 것들은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진영 결집의 수단이 되곤 한다. 개혁이라는 이름은 붙지만 사회적 논의의 축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수 의석이 조정의 자산이 아니라 집행의 근거로 기능하는 것이다. 힘이 있으니 밀어붙이는 방식, 그것이 반복된다. 결국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구조다. 승자독식의 권력 구조,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정치문화, 진영에 포획된 공론장. 이 조건이 유지되는 한 권력이 교체돼도 그 작동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대착오적 계엄 사태를 한 개인의 일탈이나 망동 정도로 환원하는 순간, 권력 작동의 구조적 교훈은 가려진다. 헌재가 대통령 파면 결정과 함께 '정치 복원'을 그리 강조했음에도…. 결국 대화와 타협, 조율과 합의의 실종이 우리 정치가 넘어서야 할 가장 본질적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충분한 사회적 논의도 조율도 없이 중대한 제도 변화가 추진된다. 급기야 사법 권력을 입법 권력이 지배하려는 듯한 시도까지 벌어지고 있다. 입법·행정·사법 권력을 둘러싼 긴장과 균형이 약화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지만 이를 흡수할 공론의 장은 취약하다. 속도만 있고 숙의는 없다. 선동적 언어와 자극적 메시지가 여론을 선점하고, 정치인은 이를 다시 동원하는 일이 반복될 뿐이다. 정치는 권력을 다루는 기술이다. 권력을 장악하는 기술이 아니라 적절히 관리하고 활용하는 기술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권위'다. 권력에 대한 탐닉만 남고 권위가 사라지면 민주주의는 취약해진다. 그 권위는 힘이 아니라 다수 국민의 신뢰에서 나온다. 그 신뢰는 합의를 끌어내는 절차적 정당성, 절제된 권력 행사 등을 통해 하나둘 쌓이는 것이다. 절제는 도덕적 미덕이 아니라 제도적 훈련의 결과다. 국가적 위기를 겪고도 정치의 작동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건 국민에 대한 또 다른 신뢰 위배다. 절제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만이 자라고, 오만이 구조화 되면 위기는 반복된다. 권력은 스스로 절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생명력은 권력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제한하려는 시민의식에 있다. 양쪽 모두 극단적 목소리가 크지만 그게 전부인 양 착각해선 안 된다. 중간지대의 침묵하는 다수가 조용히 움직이는 순간, 그 매는 정파를 가리지 않는다. 절제되지 않은 권력은 늘 시민들의 선택에 의해 교정돼 왔다. 그 교정은 언제나 목소리 큰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으로 오지는 않는다. 그게 느릴지는 몰라도….
[정용관 칼럼] 시대와의 동행… '속도'를 넘어 '숙의'로 가야 할 이유
<동행미디어 시대>가 담대한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새삼 시대(時代)라는 개념을 곱씹어 본다. 우리는 흔히 무슨 무슨 시대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만, 시대는 단순한 시간의 구분이 아니다. 사람들의 삶과 정신, 그리고 그들이 발 딛고 선 공간까지 함께 품는 시간의 큰 그릇이다. 그것은 누구도 함부로 규정할 수 없고 온전히 장악할 수도 없는 거대한 흐름이다. 어쩌면 시대는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생명체에 가깝다.그럼에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어떤 시대인가.' 거창한 시대정신을 설파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이 질문을 회피하는 순간, 시대는 우리를 앞질러 가고 우리는 그저 떠밀려 다니는 존재로 남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시대에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가장 생생하게 담아내는 통로는 결국 언론이다. 전통 있는 서구 유력 매체들이 저마다 'Times'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언론이 시대라는 큰 그릇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거대한 흐름을 좇고, 그 안의 사람들과 호흡하며, 복잡한 항로를 찾아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언론의 존재 이유가 아닐까.오늘의 시대는 분명 속도가 지배한다. 가히 초가속의 시대라 할 만하다. 기술은 예고 없이 일상을 바꾸고, AI를 비롯한 혁신은 인간의 판단 영역마저 흔들고 있다. 언론 역시 이 예측하기 힘든 물결의 한복판에 서 있다. 어쩌면 가장 먼저 존재의 시험대에 오른 영역일지도 모른다. 온갖 연결망을 통해 정보는 끝없이 유통되지만, 의미는 점점 얇아지고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희미해졌다. 말초적 흥미를 자극하는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건강한 공론의 장이 갈수록 황폐해지고 있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우리를 둘러싼 냉엄한 현실을 떠올리면 그 위기감은 더욱 커진다. 구구절절 언급하지 않더라도, '힘의 논리'가 압도하는 국제 질서 속에서 국가 간 생존 경쟁은 이미 사활(死活)이 걸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어떻게 생존의 길을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외부 환경의 압박은 결국 우리 사회 내부의 의사결정 방식과 공론의 질을 정면으로 시험하고 있다.불안과 혼돈의 시대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출발점은 의외로 단순하다. '존중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이라는 공통의 가치다. 이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 나갈 수 있는 건강한 공론장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시대>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숙의 미디어'를 표방하며 이 길에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존중받는 개인을 우선에 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강해지기 위해 개인의 존엄이 희생되어도 된다는 발상은 종종 달콤한 유혹처럼 등장했지만, 역사적으로 성공한 적은 없다. 개인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는 책임 있는 시민도, 창의적인 기업도, 지속 가능한 번영도 기대하기 어렵다.'국연(國緣)'이라는 말이 있다. 한 나라를 삶의 무대로 공유하게 된 인연이다. 이 인연은 감상적인 애국심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이해관계, 궁극적으론 생존 문제와 직결돼 있다. 나라가 흔들리면 개인의 삶도 함께 흔들린다. 때론 외부 침략에 고스란히 노출된다. 반면 국가의 부강은 기업과 시장, 그리고 개인의 역동성으로 귀결되고, 행복의 경제적 기반 역시 그 위에서 다져진다.문제는 이 복잡한 관계를 어떻게 조정하고 설계할 것인가다. '존중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이라는 공공선의 가치를 중심에 두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함께 논의하며 답을 찾아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것이 바로 숙의의 길이다. 공동체 발전에 실질적으로 보탬이 될 국가 어젠다, 제도 개선 이슈가 한둘이 아니다. 정치권, 시민사회, 학계, 언론이 각자의 자리에서 깊이 연구하고 대안까지 함께 모색한다면 우리의 내적 역량은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반대로 숙의를 포기한 사회는 힘의 논리로 회귀한다. 숫자와 세력, 목소리의 크기로 결론이 정해지는 사회다. 그 대가는 언제나 개인의 삶으로 되돌아온다.시대와 동행한다는 것은 유행을 좇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이끌거나 가르치려는 오만도 아니다. 언론이 시대를 규정할 수는 없지만 시대의 흐름을 비추는 거울이 될 수는 있다. 시대의 주체는 사람이다. 그들과 함께 걷고, 시대의 과제를 정면으로 응시하되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것. 그 속에서 공존의 길을 찾는 것. 그것이 오늘 언론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가장 무거운 질문이자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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