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광장
[시대광장/박창억]'좋은 헌법'이 '좋은 정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논란의 발단은 3주 전 조정식 국회의장의 기자간담회였다. 조 의장은 "현직 대통령의 연임은 국민이 선택할 문제"라고 말했다. 당장 현직 대통령의 연임을 가능케 하는 개헌의 여지를 남긴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으며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조 의장은 '오해'라며 진화에 나섰다. 실언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정치 경험이 많은 6선의 국회의장이 이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 전형적인 여론 떠보기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그리고 얼마 뒤 이재명 대통령이 국민의힘 의원들과 골프 회동을 가진 사실이 알려졌고, 공교롭게도 그들은 모두 개헌론자였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인 김태호 의원은 이 대통령이 '임기단축'까지 언급하며 분권형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한 사실을 공개했다. 이에 청와대 관계자가 "국회 권한이 강화된 4년 중임 대통령제가 수용성이 가장 높다"고 밝힌 데 이어 이 대통령이 직접 입장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이 대통령은 SNS를 통해 "대통령 임기는 4년 중임 또는 연임제로 변경해 중간평가를 통한 책임정치가 가능하도록 하자는 게 공약이자 일관된 입장"이라며 필요하다면 이를 위해 임기를 단축할 수도 있다고 했다.이 대통령이 개헌론을 제기한 일련의 과정과 형식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대통령은 더구나 후보 시절 권력구조 개편을 강력하게 피력했던 것과 달리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이 문제를 회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다 갑자기 임기단축이라는 배수진까지 치고 개헌 카드를 꺼내드니 그 배경을 놓고 여러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이 대통령은 "이원집정제나 내각제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국민 여론에 비춰 가능하지도 않다"며 다른 권력구조에 대해선 선을 그었다.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고 중임할 수 없으며(70조), 임기 연장 또는 중임 변경 개헌은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게는 효력이 없다(128조)'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도 의구심이 해소되지 않는 것은 이 대통령이 만일 개헌이 되더라도 연임 내지 중임 의사가 없다는 식의 딱 부러진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임기 단축'은 얼핏 상당한 손해를 감수하는 결단으로 보이지만 만약 개헌을 통해 중임이나 연임이 가능해지고 현직 대통령에게도 이를 허용하는 경우라면 현직만큼 유리한 사람이 없다.개헌이 성사되려면 우선 단일안에 의견이 모아져야 한다. 그리고 국민의 뜨거운 열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개헌에 주저하는 정치세력을 압박하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1987년 개헌만 해도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고, 장기 집권을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공감대가 있었다. 현재 모든 여론조사에서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지만, 이는 단순 선호조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추동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과거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 전 대통령의 개헌 제안이 모두 흐지부지되었던 결정적 이유는 국민적 공감대가 결여됐기 때문이다. 현재의 개헌 논의는 여권내에서도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고, 야당은 "연임 개헌을 통한 독재 시도"(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결국 이번에도 개헌론이 탄력을 받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개헌 논의가 전혀 진척이 되지 않는데도 '연임 개헌' 문제에 대해 직접 입장을 내놓지 않는 이 대통령의 속내가 더욱 궁금하다. 1987년 현행 헌법이 탄생한 이후 불행한 대통령을 양산한 것은 제왕적 대통령 권력에 기인한다는 게 개헌론자의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선 안될 게 있다. 그 대안으로 제시되는 4년 중임 대통령제, 분권형 대통령제도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4년 중임제의 경우 현직 대통령이 당선되는 순간부터 재선을 위해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할 수 있다는 점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해서는 국민이 대통령을, 의회가 총리를 선출하면 대통령과 총리 사이 권력 다툼으로 아무것도 안 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아무리 훌륭한 헌법도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아르헨티나의 1853년 헌법, 필리핀의 1935년 헌법은 미국 헌법을 베끼다시피 했다. 하지만 두 나라는 각각 군사 쿠데타와 포퓰리즘, 장기독재로 민주주의를 꽃피우지 못했다. 40년 전인 1987년 10월 12일 이재형 당시 국회의장은 개헌안 국회 통과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헌이 곧 민주화는 아니다. '좋은 헌법'에 정치인의 슬기, 국민적 양식과 협력이 플러스 되어야만 그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금과옥조로 삼을 말이다.
[시대광장/이상복]'억까'에 취약한 사회
팔짱 하나로 한 사람의 인성을 재단한다. 사진 한 장, 영상 몇 초, 앞뒤 잘린 말 한마디가 인격 전체를 규정한다. 최근 아이돌그룹 아이브의 장원영이 겪은 태도 논란이 대표적이다. 놀이동산에서 팔짱을 낀 채 설명을 듣는 사진이 퍼지자 "거만하다" "성의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단편적인 장면만으로는 당시 맥락을 알 수 없다. 공항에서 여권을 한 손으로 받았다는 비판 역시 다른 각도의 영상이 공개되며 오해를 벗었다. 행사장 지각 논란도 주최 측 해명으로 사실관계가 뒤집혔다.비슷한 일은 끊이지 않는다. 과거 연인의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썼다는 이유로 비난받은 가수 아이유의 사례처럼, 유명인의 행동에는 쉽게 과잉 의미가 덧붙는다. 사실을 확인하기도 전에 "왜 하필 저랬을까"라는 추정이 시작되고, 추정은 곧 의도에 대한 단정으로 번진다. 의도가 있다고 믿는 순간 비난은 스스로 정당성을 얻는다.이른바 '억까(억지로 까기)'의 본질은 비판이 아니다. 여러 가능성 중 가장 악의적인 해석을 골라 상대에게 덧씌우는 행위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연예인을 향한 악플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연예계 논란과 정치·사회적 갈등은 겉보기에 다르지만 작동 방식은 닮았다. 사실보다 해석이 앞서고, 해석보다 비난이 빠르다. 그럴 수 있다는 신중함은 주목받지 못하지만,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단언은 감정을 자극하고 공유를 부른다. 한 번 찍힌 낙인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해명은 느리고 낙인은 빠르다.디지털 공간에서는 언론도 이 속도 경쟁에 가세한다. 온라인에서 논란이 일면 일부 매체는 사실 확인 대신 '논란 확산' '누리꾼 갑론을박' 같은 제목을 달아 기사를 쏟아낸다. 이를 다른 매체들이 받아쓰면서 기사는 순식간에 불어난다. 몇몇 댓글에 불과했던 반응이 여론으로 둔갑하고 그 여론은 다시 기삿거리가 된다. 확인되지 않은 해석이 기사라는 외피를 입는 순간 파급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갈등을 조직적으로 증폭시키는 움직임은 이미 현실의 위협이다. 최근 KAIST 연구진은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작성된 네이버 뉴스 댓글 1억1천만여 건을 분석해 외국 연계 활동이 의심되는 계정 약 2만4천 개를 식별했다. 이들은 특정 진영을 일관되게 지지하기보다, 선거철을 기점으로 진영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며 갈등 자체를 키웠다.유튜브에서도 우려스러운 움직임이 포착됐다. 구글은 올해 2분기 조직적인 여론 조작에 관여한 것으로 판단한 정치 관련 유튜브 채널 449개를 차단했다. 특정 정치 세력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정부 비판 채널은 물론 정부 지지, 특정 정치인 지지 등 다양한 성격의 채널이 포함됐다.여기서 물어야 할 것은 누가 불씨를 던졌느냐만이 아니다. 왜 이런 메시지가 이토록 쉽게 퍼지고 소비되는가다. 큰불로 번지려면 마른 장작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 분노와 불신, 적대감이라는 장작이 너무 높게 쌓여 있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돌아볼 때다.이런 구조적 폐해가 가장 거칠게 드러나는 곳은 정치권이다. '쇼츠 정치'가 확산하면서 맥락은 증발하고 자극적인 짧은 장면이 사실을 대체한다. 말 한마디를 잘라내 막말로 규정하고, 행동 하나를 근거로 배신·위장·내부총질의 낙인을 찍는다. 정책의 차이는 곧장 인신공격으로 이어진다. 같은 진영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생각이 다르면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의도부터 의심하는 풍경이 일상이 됐다.생각이 다르면 논쟁하면 된다. 주장이 틀렸다면 근거를 들어 반박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주장이 맞는가"라는 질문이 "왜 저런 주장을 하는가" "배후에 무슨 의도가 있는가"로 변질되는 순간 토론은 끝난다. 논리를 검토하는 대신 속내를 심문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위험한 것은 의견의 차이가 아니라, 상대에게 악의를 덧씌워 대화의 자격 자체를 박탈하는 태도다.그렇다고 표현 규제나 댓글 통제가 해법이 될 순 없다. 입을 막는 방식은 더 큰 부작용을 낳는다. 필요한 것은 악의적 해석과 음모론이 손쉽게 여론으로 둔갑하지 못하도록 공론장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언론은 사실과 반응을 엄격히 분리해 보도해야 한다. 플랫폼은 정보의 확산 경로와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정치권은 미확인 의혹을 지지층 결집 수단으로 악용하는 관행을 끊어내야 한다. 이용자 역시 자신이 믿고 싶은 해석과 확인된 팩트를 분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개인의 도덕성에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악의적 해석이 가장 빨리 퍼지고 가장 큰 보상을 받는 수익 구조 자체를 손봐야 한다. 조회수와 정치적 호응을 얻기 위해 자극을 좇는 유인을 줄여야 한다. 철저히 사실관계를 확인한 콘텐츠가 살아남고, 끈질기게 맥락을 설명하는 저널리즘이 묻히지 않는 미디어 생태계가 필요하다.사실보다 추측이, 논쟁보다 낙인이, 설명보다 비난이 먼저 퍼지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자유롭고 안전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서로 생각이 다른 이들이 부딪치면서도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데서 출발한다. 누가 더 크게 분노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사실이냐가 여론을 이끄는 사회. 그것이 '억까'와 음모론에 흔들리지 않는 최소한의 면역력이다.
[시대광장/정용관]'백지위임장' 받은 듯한 권력의 착각
요즘 이재명 정권을 바라보는 공기가 달라졌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집권 1년 차 때는 대선에서 그를 찍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도 "생각보다 일은 잘한다"는 얘기가 적지 않았다. '실용적'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첫 양자 정상외교 방문국으로 일본을 택하고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보수층 일각의 우려도 누그러뜨렸다. 때마침 반도체 훈풍에 코스피 활황까지 겹치며 "운도 좋다"는 말이 나왔다.자신의 '공소 취소' 문제에만 집착하지 않으면 별 탈 없이 집권 2년 차도 순항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많았지만 역시 정치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국정 지지율이 40%대 초반까지 내려왔다는 수치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지방선거 이후 중도층을 중심으로 부정 평가가 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징벌적 난수표' 비판을 받는 부동산 세제 개편, 매일 천만 개미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는 롤러코스터 장세 등 여러 이유가 거론된다. 하지만 요즘 필자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보다 좀 더 본질적인 문제다. 이 정권은 권력의 정당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말하자면 '권력의 착각'이다."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 2항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 첫날부터 '국민주권 정부'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주권재민을 내세웠다. 반헌법적 비상계엄의 망동을 딛고 출범한 정권인 만큼 국민주권이라는 헌법적 명제를 강조한 것은 타당했다고 본다.그러나 국민주권을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할 것인지는 또 다른 문제다.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과 국민이 선출된 권력에 주권을 통째로 넘겼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요컨대 대통령은 헌법이 정한 '제한적 권한'을 선거를 통해 일정 기간 맡았을 뿐이다. 12·3 비상계엄은 이 원리를 망각한 극단적 사례였다. 그런데 이재명 정권 2년 차 들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일이 부쩍 늘고 있다. 물론 국체(國體)를 뒤흔든 계엄 사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정권 역시 권력의 위임(mandate)을 지나치게 넓게 해석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는 얘기다.선거 승리를 자신의 정치적 선택 전반에 대한 국민의 '사전 동의'처럼 받아들이는 것만큼 위험한 게 없다. 그러면 국정 논리는 간단해진다. '국민이 이것을 원한다→우리가 국민의 뜻을 대표한다→우리를 반대하는 것은 국민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 뜻'을 누가 정할 것인가. 검찰개혁에는 찬성하지만 보완수사권 폐지에는 반대할 수 있고, 군 개혁에는 동의하면서 사관학교 통합에는 반대할 수 있다. 선거 결과 하나로 그 수많은 생각을 하나의 '국민의 뜻'으로 묶을 수는 없다.나아가 5년 임기의 정권이 수십 년간 형성되고 수십 년 이상 영향을 미치게 될 국가 시스템의 근간(根幹)을 어디까지 바꿀 '위임 권한'을 갖는지는 깊이 따져볼 문제다.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통치의 백지위임장을 얻은 것은 아니다. 국가 근간을 바꾸는 정책 목표는 대선 당일 투표함 숫자의 많고 적음을 통해 결정되는 게 아니라 국회와 사회의 공론장에서 충분히 토론하고 논쟁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며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승자가 모든 걸 갖는다'고 하지만 민주공화국의 국정 원리는 아니다.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필요하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손에 쥔 일부 정치 검찰이 권한을 남용한 것도 사실이다. 누린 만큼 대가를 치르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검찰 권력을 통제하라'는 요구와 수십 년간 작동해온 형사사법체계를 단기간에 뜯어고칠 권한까지 위임했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이건 단순히 보완수사권을 폐지하느냐 마느냐의 효율성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70여년 형사사법체계의 근간을 바꾸는 법안을 놓고 "저는 안 읽어봐서…"라며 짐짓 딴청을 부렸다. 내 책임은 아니라는 건가.육·해·공군 사관학교 통합도 같은 맥락으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은 "쿠데타는 다 육사 출신이…"라고 했다. 육사에 원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거 몇 차례의 군사쿠데타 주역들이 육사 출신이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3군 사관학교를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정책적 결론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어느 게 더 효율적이고 미래 전장에 맞는 시스템인지 따져볼 수는 있다. 그러나 특정 정권의 역사적 인식에 따라 결단의 문제로 밀어붙인다면 그건 차원이 다른 얘기가 된다.'전임 정부가 잘못했다'와 '그러므로 우리는 원하는 만큼 바꿀 수 있다' 사이에는 위험한 비약이 있다. 권력의 착각은 바로 이 지점과 닿아 있다. 물론 질적인 차이가 있다. 전임 정부는 그게 비상계엄이라는 3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권력의 폭주'로 이어졌다면, 현 정권은 암세포를 도려내는 식의 해법이 아니라 아예 개별 시스템의 본질을 건드리는 '권력의 과신'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필자는 우리 정치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국정의 진폭'이 너무 크다는 데 있다고 생각해 왔다. 한 정권이 자신의 철학과 역사 인식에 따라 국가 시스템을 크게 바꾸면 다음 정권은 그것을 다시 반대 방향으로 되돌리려 한다. 전임 정권이 한 일을 뒤집는 것이 개혁이 되고, 그 개혁을 다시 뒤집는 것이 또 다른 개혁이 되는 악순환이다. 정권에 따라 국정의 시계추가 너무 크게 흔들리니 안정성과 지속성이 떨어지고 아예 어지러울 정도다. 국력이 세계 6, 7위권이라는 나라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렇게 국정 기조나 정책이 확확 바뀌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중간 지대는 갈수록 설 자리가 좁아지고 두 개의 정치 행성이 따로 돌고 있는 듯한 형국 아닌가.이 대통령은 '중도보수'까지 품는 구조적 다수 구상을 내비쳐왔다. (국민의힘도 '중도진보'까지 품는 구조적 다수 전략으로 전환하면 어떨까 싶다.) 그러나 요즘 모습을 보면 말 따로 행동 따로인 것 같다. 딜레마인가. 어느 학계 원로의 말로 글을 맺고 싶다. "정치나 국정 영역에서 절대적 길은 없다. 상대적 가치가 있을 뿐이다."
[시대광장/박중현]성룡과 젠슨 황이 자꾸 겹쳐 보이는 이유
"재키 찬(성룡)이요. 나랑 똑같이 생겼거든요. 다만 키보드에 타이핑하는 '스턴트 연기'는 내가 직접 할 생각이에요." 실리콘밸리 발상지인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 'HP(휴렛패커드) 창고'에서 촬영된 온라인 토크쇼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한 말이다. 2023년 말 방영된 이 쇼에서 젠슨 황은 "당신 일대기를 다룬 자서전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어느 배우가 당신 역을 맡으면 좋겠나"라는 질문에 위트있게 답했다. 참고로 1963년 태어난 젠슨 황은 1954년생 성룡보다 9살 젊다.중국계이자, 둥글둥글한 인상에 주먹코란 점 말고도 둘은 비슷한 점이 많다. 1970, 80년대 홍콩 영화 전성기에 코믹무협으로 아시아에서 성가를 높인 성룡은 1990년대 후반 헐리우드에 진출해 월드스타가 됐다. 대만 출신 이민자 2세 젠슨 황은 비디오게임용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인공지능(AI)에 적용해 세계 AI 가속기 시장을 독점한 AI 시대의 스타다. 둘 다 한국과 인연도 깊다. 성룡은 홍콩 무협영화를 한국에서 많이 찍던 1970년대 한국에 산 적이 있어 한국말을 곧잘 한다. 엔비디아가 중소기업이던 시절 젠슨 황은 'PC게임 종주국' 한국의 게이머들에게 GPU를 팔기 위해 용산 전자상가에 자주 왔다고 한다.성룡의 공식 방한은 '폴리스 스토리 6' 홍보차 온 2014년이 마지막이었지만 젠슨 황의 공식 방한은 작년에 시작됐다. 지난해 10월 말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에 참석한 그는 이재명 대통령, 4대 그룹 총수와 만났다. 당시 최신 AI 가속기로 공급이 달리던 '블랙웰' 26만 장을 한국에 우선 공급하는 내용의 '한국 AI 이니셔티브'도 발표했다. 판매액만 20조 원이 넘는 규모였다. 검정 가죽재킷을 걸치고 서울 삼성동 '깐부치킨'에 등장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치맥회동을 한 젠슨 황에 한국인들은 환호했다. 엔비디아에 직접 투자한 '서학개미',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엔비디아에 공급하는 SK하이닉스,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한 '동학개미'들에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관심거리가 됐다. 올해 6월 초 방한 때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과 홍대 앞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굽고 소줏잔을 기울이자 AI 팩토리, 피지컬 AI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고조됐다. 지난달 이 대통령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한 'AI서밋'의 핵심인물도 젠슨 황이었다. 아쉽게도 한국인의 '젠슨 황 환호 지수'와 코스피는 따로 움직였다. 작년 11월 초 APEC 정상회의 폐막 다음 거래일에 반짝 상승한 주가는 이후 이틀간 5% 넘게 하락했다. 2차 방한한 올해 6월 5일 코스피는 5% 넘게 내렸고, 한국을 떠난 8일엔 8% 넘게 빠졌다. 지난달 24일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서 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와 한국 기업들의 9500억 달러(약 1350조 원) 투자협력 계획이 발표됐지만, 다음날 코스피는 11% 가까이 폭락하고 장중 한때 6,000선이 무너졌다. 매번 다른 돌발 악재가 있었다곤 해도 한국 주가에 미친 젠슨 황 효과는 신통치 않았던 셈이다.요즘 글로벌 AI 시장에서 펼쳐지는 숨 가쁜 기업들의 움직임을 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오픈AI, 앤스로픽, 구글, 아마존, 메타(페이스북) 등 AI의 미래 패권을 다투는 기업들은 지금 천문학적 투자 비용을 대느라 허덕이는 중이다. 한두 곳만 살아남아 이익을 모두 챙기는 '승자독식 게임'이라 중단하기도 어렵다. 힘에 부쳐 먼저 기권하는 기업이 나오기 시작하면 엔비디아 AI 가속기 수요는 급감할 가능성이 있다.'△△ 기업 돈줄이 말라 간다'는 월가 리포트 한 장에도 엔비디아 주가가 급락하고,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등 메모리반도체 주가 역시 덩달아 춤춘다. 비싼 엔비디아 GPU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빅테크들은 저렴한 자체개발 칩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AI기업들이 엔비디아 칩을 계속 살 수 있도록 돈을 빌려주거나, 보증을 서주는 미심쩍은 '순환금융'에 엔비디아는 더 깊이 말려들고 있다. 금값이 된 메모리반도체 구입비용을 아끼려고 HBM을 절반만 쓰는 기술도 개발 중이라고 한다.당연하게도, 젠슨 황은 한국 투자자, 반도체 기업에 조건 없이 혜택만 주는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다. 성룡이 과거 한국을 자주 찾았던 이유가 한국인에 대한 애정 때문만이 아니었던 거나 마찬가지다. 엔비디아 칩을 계속 사주도록 고객을 관리하고, 세계 최고 경쟁력의 메모리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이 그가 한국에서 달성해야 할 목표일 것이다. 아직 2년 이상 뒤처졌지만, 빠르게 한국을 추격 중인 중국 창신메모리(CXMT)가 한국과 비슷한 제품을 반값에 팔 때에도 젠슨 황의 태도가 지금과 같길 기대하는 건 순진한 일이다. 미중 냉전의 틈새를 뚫고 중국 AI 시장에서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그의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을 향한 젠슨 황의 많은 약속과 애정 어린 메시지들을 이젠 좀 냉정하게 되짚어볼 때가 됐다.
[시대광장/채인택]메가 프로젝트, 보안·방첩에도 전격전이 필요하다
청와대에선 10일 대통령이 주재하는 '메가프로젝트 민관합동 제2차 점검 회의'가 열려 추진 상황을 점검했다. 인공지능(AI) 중심의 산업 대전환을 목표로 민간협력을 통해 반도체,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에 총 1500조 원 규모의 자금을 투입하는 초대형 국가성장 전략 사업인 '3대 메가프로젝트'가 이처럼 속도를 내고 있다. 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부지·인재·전력·용수·자금·협력사 등 핵심 요소를 당연히 충족해야 한다. 이러한 양지의 기반 시설만큼 꼭 필요한 '음지의 인프라'가 바로 재산과 안전을 지켜줄 보안과 방첩이다. 보안은 위험·위협·침해, 그리고 비밀 유출 등에 대응하는 모든 보호 활동·조치다. 방첩(counter-intelligence)은 국익을 침해하는 적대 세력(위장우호세력 포함)이나 외국 정보기관·공공기관·학교·기업·개인의 정보 탈취·수집, 파괴 공작 등을 미리 차단·대응하는 안보 활동이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메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려면 보안과 방첩을 위한 비상한 대응이 필수적이다. 이제 한국에서 메가프로젝트를 둘러싼 음지의 경제 전쟁이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식재산권 탈취를 노리는 산업스파이는 물론, 해킹·크래킹에 스파이웨어 침투 등으로 정보를 무단 절취하고 인질화·무력화·마비화를 시도하는 사이버 공격도 등장할 것이다. 메가프로젝트 건설과 가동을 뒷받침하는 원전·SMR·송전선·용수·인력·자재·원료에 대한 정보 입수와 크래킹을 시도하는 배후 스파이전도 당연히 벌어질 것이다. 관련 시설을 대상으로 유사시 발사체·드론 공격, 특수부대 침투, 사보타주 등 테러활동으로 무력화를 시도하는 안보 공작도 있을 수 있다.가장 주목할 대상이 한국의 주요 교역 파트너인 중국이다. 안타깝게도 중국은 국가보안법·데이터보안법·반간첩법 등 3법으로 외국인과 진출 기업의 정보 수집과 해외 전송을 통제하는 것은 물론 국내외 중국계의 친중 정보활동 협조를 의무화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7월 1일 시행에 들어간 민족단결법은 조선족·티베트족·위구르족 등 55개 소수민족 사이에 '공유된' 민족 정체성을 만들고 해외에서 중국 분열 행위를 처벌하는 내용을 담았다. 민족에 상관없이 중국공산당에 충성을 요구하고, 당국의 요구대로 정보수집이나 보고 등을 하도록 압박하는 시스템이다. 물론 구체적 범죄 혐의 등 합리적인 이유가 없는데도 특정 국적자라는 이유로 의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중국의 사법 체계를 감안하면 국내에 머무는 중국인이 이러한 보안·첩보 활동에 나설 엄두를 아예 내지 못하도록 예방적 오프라인·온라인 체크를 강화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주목할 점은 중국이 외국인에게 주로 적용하는 반간첩법이다. 이 법은 전통적인 국가기밀 유출뿐 아니라, 국가 안보·이익과 관련됐다고 당국이 임의로 해석할 수 있는 모든 일반 문건·데이터·자료의 수집·제공까지 간첩 행위로 처벌할 수 있다. 자의적 집행 우려가 크다는 지적을 받는 이유다. 이 때문에 상당수 서방 국가들은 공직자나 국익 관련 기밀 정보 소지자의 중국 본토와 홍콩·마카오 출입을 금한다. 입국은 물론 항공편 환승도 막는다. 중국 공안이나 정보기관이 인신을 구금하고 심문해 정보를 얻거나 노트북·스마트폰 등을 압류해 데이터를 빼낼 수 있는 모든 곳을 정보누출 위험 지역으로 간주해 출입을 막는 셈이다. 한국도 관련 공직자나 산업정보 취급자, 그리고 최소한 메가 프로젝트 종사자는 해당 지역 여행을 제한하는 내부 보안 규범이 필요하다.서방은 사람은 물론 물품의 중국 통과도 통제한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2010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의 방산 전시회에 참가한 뒤 한국으로 돌아오던 육군의 K21 장갑차 1대와 군용 차량이 홍콩 콰이청 화물터미널에서 현지 해관(세관)에 압류됐다가 무려 51일 만인 11월 12일 반환된 사건이 주는 교훈 때문이다. 의문은 2017년 중국 최대 국영 방산업체인 중국북방공업공사(NORINCO)가 VN17 궤도형 장갑차를 내놓으면서 어느 정도 풀렸다. 차체 형상, 포탑 실루엣, 무기 배치 구조, 승무원 구성 등이 K21과 흡사하다는 평가가 나오면서다. 이제는 미래를 주도할 반도체 관련 산업정보가 보안과 방첩 대상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이 지난달 27일 상하이의 중국 국유기업이 개발해 생산에 들어갔다고 보도한 액침식 심자외선(DUV) 노광장비가 시선을 끄는 이유다. DUV 노광장비는 반도체 웨이퍼에 극미세 회로를 새기는 핵심 장비다. 7나노급 이하의 초정밀 칩을 만들려면 세계 최대 반도체 노광장비 업체인 네덜란드 ASML의 최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중국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미국의 수출통제로 이를 도입하지 못한다. 대신 그보다 한등급 떨어지는 7~14나노급 칩을 생산하는 액침 DUV 노광장비를 활용할 뿐이다. 중국은 이처럼 미국 등 서방의 견제나 수출 통제 때문에 확보하지 못한 기술이나 장비를 '목이 졸리고 있다'는 의미의 '차보쯔(卡脖子)'로 표현한다. 중국은 차보쯔 입수를 위해서는 방법의 합법과 비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ASML은 중국 법인에 근무하던 전직 중국인 직원이 자사의 핵심 제조 기술 관련 기밀 데이터를 유출한 사건을 2023년 2월 공식 적발·공개했다. 당시 유출 데이터가 중국의 반도체 장비 개발 시도에 이용됐을지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중국은 이전에 수입한 ASML의 노광장비를 분해해 역설계를 시도하다 적발된 적도 있다. 산업스파이의 지식재산권 탈취를 막고 국익을 지키려면 보안 시스템 업그레이드가 필수적이다. 최첨단 방식으로 인적·물적 보안을 고도화해야 한다. 토종 보안업체를 최대한 활용하되 전 세계 최고 수준의 보안 업체들에 열린 태도를 보이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실 1500조 투자를 둘러싸고 치열한 정보전·방첩전·공작전은 이미 막이 올랐다. 익명의 협조자들이 벌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작이 이미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은 미군 군함이 우리 항구에 기항하면 금지된 드론을 주변에 띄우거나 망원카메라를 들고 접근해왔다. 이제 이런 행동을 메가프로젝트 공사 현장 주변에서도 그대로 할 것으로 보인다. 메가프로젝트 구역을 '보안지대'로 선포해 이러한 접근을 원천 봉쇄하는 대책이 절실하다. 정부는 메가프로젝트에서 속도전을 넘어 전격전을 요구한다. 메가프로젝트를 음지에서 지켜줄 보안·방첩을 위해 우방국 정부나 민간보안기업 등과 손잡고 관련 시스템 구축과 훈련에도 전격적 수준의 속도를 내야 한다. 지키지 않으면 뺏길 수 있다.
[시대광장/김준술]'모두의 증시'는 없다
여권의 경제통 인사를 만난 건 2025년 가을이었다. 증시가 꿈틀대기 시작한 무렵이다. 그는 윤곽 잡힌 정부의 경제 정책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귀에 꽂힌 건 바로 '머니 무브'였다. "부동산에 쏠린 돈을 증시로 끌어오겠다"고 했다. 역대 정권마다 뒷덜미를 잡은 게 부동산이다. '그걸 증시로 해결한다고?' 발상은 신선했다. 그 무렵 이억원 금융위원장을 접할 자리도 있었다. 그는 "첨단기업과 국민성장펀드로 돈을 흘려보내겠다"고 했다. 그걸 "생산적 금융"이라고 불렀다. 비생산적 부동산에서 증시로 자금 물꼬를 확 틀겠다는 구상이었다. 의지가 결연했다.그들의 얘기는 비장한 출사표처럼 들렸다. '정권이 작심했구나' 생각했다. 증시 띄우기에 전력투구하는 건 예상된 수순이었다. 마냥 쉽지만은 않은 싸움이라고 봤다. 지속적인 '주가 상승'이 전제돼야 돈이 옮겨온다. 하지만 이건 의지의 영역을 벗어난다. 아무튼 주가를 부양하는 정책들이 하나둘 선을 보였다. 마침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시작됐고, 코스피가 달아올랐다. 한마디로 '타이밍은 좋았다'.그리고 정부는 5월 말, 출범 1년을 맞아 '38대 국정성과'를 발표했다. '유능'이라는 제목 아래, 성과 1번은 '코스피 8000' 돌파였다. 헷갈렸다. '정부 부양책만으로 주가가 올랐었나?' 어쨌든 코스피는 6월 22일 9000포인트를 뚫을 때까지 파죽지세로 더 달렸다. 수천만 원, 수억 원씩 '평가 이익'을 냈다는 인증 화면이 퍼져나갔다. 회사원은 물론 노인, 주부, 학생들까지 증시로 몰렸다.반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과 한 달. 코스피는 정점에서 30% 가까이 급락했다. 그냥 하락 폭이 문제가 아니다. 하루건너 급등락을 반복하는 '홀짝 증시'로 변질됐다. "정부가 투기판을 조장했다"는 불만이 쏟아진다. 물론 주식 투자는 개인 판단과 책임을 전제로 한다. 그건 일단 논외로 하자. 여기선 정부가 시장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보자.증시는 역사적으로 급등장에서 그 끝이 화려하지 않았다. 정책 책임자라면 과거 교훈을 머리에 입력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2007년 11월로 가보자. 서울 압구정동의 미래에셋증권 지점은 회사원, 주부, 노인들로 가득했다. 펀드에 가입하려는 대열이었다. 500~1000포인트 박스권에 갇혔던 코스피가 2000선까지 오르면서 빚어진 광풍이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가 터졌다. 금융위기가 찾아왔고 2008년 주가는 반토막 났다. 정부가 앞단에서 시장을 주시하고, 경고도 하고, 리스크를 관리해야 했다.다시 돌아와 보자. 지난 1년간 정부는 어떤 메시지를 냈고, 무슨 상품을 도입했는가.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은 "빚투(빚내서 투자)도 레버리지 투자"라고 말해 뭇매를 맞았다. 끝판왕은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다. 6월 말 김어준 방송에 출연해 "세계 5~6위권인 한국 증시가 몇 년 뒤 3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코스피가 4배 오르는 건 기본이라고도 덧붙였다. 한술 더 떠 "내기를 하자"고 했다. '머니 무브'라는 지향점은 동의할 수 있다. 하지만 주가 자체가 목표나 성과처럼 변질될 때 결말은 뻔하다.전례 없던 코스피 질주에 자신감이 생겼던 걸까. 정부는 '삼성전자∙하이닉스 레버리지 ETF' 또한 과감하게, 그리고 서둘러 도입했다. 하지만 증시를 부동산 뺨치는 투기판처럼 만들어 버렸다. 오판이자 오만이다. '그린스펀 풋(Put)'이라는 유명한 경구라도 한 번쯤 새겼어야 했다. 이 말은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이던 앨런 그린스펀이 주가 하락 때마다 금리를 내려 투자자들을 안심시킨데서 유래했다. 풋은 가격 하락시 손실을 막아주는 '풋 옵션'을 뜻한다. 하지만 그가 지속적으로 돈줄을 풀면서 금융위기를 촉발했고, 결국 개인은 큰 손실을 안았다. 정부가 '믿어도 된다'는 생각을 심어줄수록 개인 투자자들도 위험에 무뎌지면서 손실을 입을 수 있다. 지난 1년은 그 교훈을 보여준 값비싼 시간이었다.정부는 '모두'란 말을 즐겨 쓴다. '모두의 성장, 모두의 창업'이 그렇다. 국민에게 고루 혜택이 돌아가는 실용주의 기조를 반영한 구호다. 하지만 증시에서도 그걸 원했다면 실수다. 모든 국민이 동시에 이기는 증시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게 가능하면 대체 누가 돈을 잃겠는가. 정부는 '잃는 증시, 떨어지는 증시, 위험한 증시'는 잘 얘기하지 않았다. 이제 와선 엉뚱한 소리를 한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개인들이 역동적으로 투자하는 특성 때문에 코스피 변동성이 커진다"고 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더욱더 위험을 말했어야 했다. 항상 주식 매수를 외치는 애널리스트와 달리 정부는 위험도 함께 바라보고 얘기해야 한다. 그게 정부와 증권사의 차이다.
[시대광장/이상언]검찰 제국의 몰락
2024년 1월 말, 매서운 겨울 바람을 맞으며 서초동 뒷골목 식당으로 걸어간 저녁의 장면이 생생하다. 박성재 전 법무부 장관과 마주앉아 밥을 먹었다. 박 전 장관은 당시 국회 인사청문회를 앞둔 장관 후보자였다. 박 전 장관과는 병아리 기자 시절부터의 인연이 있다. 내란 가담 혐의로 1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고 수감됐지만 내 기억 속 그는 여전히 강직하고 투박한 검사다.그 1월 정권과 검찰은 모두 편치 않았다. 집권 2년 차 대통령과 정권 2인자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대립했다. 당 최고위원이 대통령 부인을 마리 앙트와네트와 비교했고, 한 위원장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김 여사 특검'을 수용할 태세를 보였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한 위원장에게 사퇴를 종용했다. 대통령 보호막도 흔들리고 있었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친윤'으로 분류된 검사들이 검찰 요직 곳곳에 포진돼 있었지만, 그들의 대통령에 대한 애정은 상당히 식은 상태였다. 이 균열의 복판에 '여사 문제'가 있었다.박 전 장관에게 "어려운 길이 펼쳐질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원칙대로 하면 되지 뭐. 내를 모리나?"라고 했다. 하지만 대화 중 간간이 검찰과 윤 대통령 사이에서의 중재자 역할에 대한 고민이 드러났다. 이원석 총장은 청와대 간섭을 막아줄 우산 구실을, 윤 대통령은 검사들의 불만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냄비 위의 돌멩이 역할을 자신에게 기대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아슬아슬한 줄타기 상황은 넉 달 뒤인 그해 5월 세상에 고스란히 표출됐다. 법무부가 검찰 간부 인사를 발표했다. 송경호 서울중앙지검장이 부산고검장으로 발령 받았다. 이원석 총장은 "협의 없이 진행된 일방적 인사"라며 공개적으로 반발했다(이에 대한 박 전 장관의 입장은 다르다. "총장과 충분히 얘기를 했다"고 당시 통화에서 말했다). 김 여사를 검찰청으로 불러 조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 송 지검장에 대한 인사는 외견상 영전이었으나, 검사들 눈에는 변방으로 쫓아내기였다. 박 전 장관 입장에서는 대통령과 검찰의 충돌을 막을 궁여지책이었겠지만, 정권과 검찰 양쪽 모두의 병은 깊어갔다.송 지검장 후임으로 검찰 내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던 이창수 검사장이 낙점됐다. 그해 가을 이원석 총장은 임기 만료로 검찰청을 떠났다. 그 뒤의 상황은 우리가 목격한 대로다. 김 여사 조사가 청와대 근처의 경호처 건물에서 조용히 이뤄졌고, 결국 불기소 처분으로 끝났다.윤석열 전 대통령이 누구인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고, "성역은 없다"고 선언하고 조국 전 장관을 수사해 명성을 드높였으며,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며 권력에 맞서 대권을 얻은 이다. 공정과 정의를 외치며 집권한 사람이 아내에 대한 수사에서는 검사들에게 충성을 요구했고, 언터처블 성역을 만들었고, 후배 검사들을 업연과 이력으로 누를 장관을 골랐다. 그리고 대통령 되기 전의 자신과 닮은 검사들을 압박하고 배척했다. 몇몇 검사가 이 기막힌 상황에 항의했으나 잠시 뿐이었다. 그렇게 검찰은 망했다.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근위대 '프리토리아니'를 조직했다. 황제를 보호하고 반역을 차단하는 제국 수호자 임무를 맡겼다. 그들은 군주의 가장 날카로운 칼이자 가장 든든한 방패가 됐다. 경호뿐 아니라 치안·사법·행정에도 관여했다. 힘이 점점 커진 프리토리아니는 황제를 시해하고 갈아치웠다.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친 적도 있다. 급기야 프리토리아니 출신이 황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2'에서 덴젤 워싱턴이 연기한 마크리누스가 바로 그다. 마크리누스는 217년 4월 집권(22대 로마 황제)에 성공했으나 1년 2개월 뒤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프리토리아니는 콘스탄티누스 1세 때 완전히 해체됐다.형사소송법 개정안 국회 통과로 대통령이 국회에 재의를 요구하지 않는 한 2개월 뒤에 한국에서 수사권을 가진 검사는 사라진다. 수사를 완전히 떠안은 경찰이 미덥지 않아 많은 이가 걱정한다. 애꿎은 국민의 피해를 줄이는 제도적 보완이 불가피하다. 그렇다고 시계를 되돌릴 수는 없다. '선택적 정의'에 물든 검사들의 날카로운 칼이 스스로를 베어버렸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프리토리아니에 대해 "이토록 무시무시한 하인들은 언제나 필요하지만 종종 치명적이다"고 썼다. 한국 검찰이 1800년 전 그들처럼 몰락의 벼랑 끝으로 내달렸다.
[시대광장/박창억]청년을 잃은 민주, 미래도 잃는다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최근 2030세대의 지지율은 유독 저조하다. 한국갤럽이 24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민주당 지지율은 44%를 기록했다. 하지만 20대(18~29세) 지지율은 20%, 30대 지지율은 29%에 그쳤다. 60대와 70대에선 민주당 지지율이 각각 46%, 37%였다. 보수성향이 강한 노령층보다 젊은층이 민주당을 훨씬 덜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6·3 지방선거에서도 청년 표심은 민주당에 싸늘했다. 2030세대 지지 확보 실패는 민주당이 서울시장 선거에서 패배한 결정적 요인으로 지목된다.청년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보다 '청년 이슈'를 표를 얻기 위한 정치적 도구로만 이용해 온 민주당을 향한 분노가 고스란히 담겼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더욱이 민주당은 자신들과 뜻을 달리하는 청년 세대를 향해 "보수화·극우화되었다"며 낙인을 찍었고, 이는 청년들의 냉소를 부추겼다. 10~20년 전에는 한나라당·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이 시대착오적 행태로 젊은 유권자들의 조롱 대상이 됐다. 보수이든 진보이든 시대 흐름에 맞춰 변화하지 못하는 정당은 청년과 멀어지게 마련이며, 청년에게 외면받는 정당에는 미래가 없다.6·3 지방선거 결과에 화들짝 놀란 민주당은 일제히 '청년 세대와의 동행'을 외쳤다. 그러나 정작 당의 미래를 설계하는 8·17 전당대회 과정에서 드러난 실상은 이와 정반대였다. 당 대표에 도전한 30대 김보미 후보를 비롯해 최고위원 선거에 나선 20대 정민철, 30대 김형남 후보 등 신인들은 예비경선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조기에 탈락했다. 전당대회가 처음부터 계파 간 세 대결 구도로 흘러가면서, 조직력과 자금이 부족한 청년 후보들의 목소리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청년들의 정치 진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할 당의 시스템은 도리어 장벽으로 작용했다. 전당대회준비위원회가 당초 추진하려 했던 청년 선출직 최고위원 제도는 당내 특정 계파의 반대로 무산됐다. 청년 신인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는 경선 기탁금 인상 조치는 여론의 거센 질타와 이재명 대통령의 재고 요청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철회되는 촌극을 빚었다. 청년을 포용하겠다는 구호와 달리, 실제 경선 룰의 설계에서는 이들의 현실적 한계를 고려하지 않는 무감각함이 여실히 드러났다.이는 주류 정치인들에 대한 관대한 기준과 대비되며 공정성 논란으로 번졌다. 민주당은 송영길 의원과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에게는 각각 대표와 최고위원 출마 자격을 줬다. 당적 취득 기간과 당비 납부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지만 예외를 인정한 것이다. 4년 전 26세인 박지현 전 비상대책위원장에게는 당적 취득 기간 부족을 이유로 출마 자격을 박탈했다. 주류 기득권 인사에게는 예외 조항을 유연하게 적용하면서 청년 신인에게는 엄격한 규칙을 들이대는 이중잣대는 청년 세대로 하여금 당의 시스템을 불신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정당에 청년의 피가 수혈되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기성 정치의 타성에 젖지 않은 새로운 시각으로 당의 체질을 개선하고, 다변화된 사회적 요구를 입법에 반영하기 위해서다. 현재 민주당을 이끌고 있는 686(60대· 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 주류 세력 역시 과거 30대의 나이에 파격적으로 발탁되어 정치적 자산을 쌓고 성장해 온 수혜자들이다. 세대교체를 통해 주류가 된 선배 세대가 이제는 제도적 허들을 높여 후배 세대의 성장을 가로막는 모순적 태도를 보이는 것은 정당의 지속 가능성을 스스로 갉아먹는 행위다.청년 정치는 선거철마다 반복되는 시혜성 이벤트나 일회성 인재 영입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당규의 예외 규정을 공평하게 개정하고, 청년층의 경제적 장벽을 낮추는 기탁금 제도의 전면 혁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청년과 정치 신인의 대표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은 "AI(인공지능) 3대 강국을 향해야 할 나라에서 화염병과 짱돌을 들던 세대가 아직도 주축이어야 하느냐"는 한 청년 후보의 일갈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시대광장/이상복]공영방송은 우리에게 필요한가
공영방송 이사진 교체와 새 경영진 선임 절차가 본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출발부터 잡음이 적지 않다. 개정된 법에 따라 KBS·MBC·EBS 이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결격사유 논란이 잇따랐다. 대선 캠프 전력 등이 문제가 되면서 후보자 3명의 추천이 철회되거나 자진 사퇴했다. 선대위 부위원장 활동 논란이 제기된 전직 외교관은 자격 시비가 계속되는 가운데 법정 시한 경과로 자동 임명됐다. 언론노조 MBC본부와 민언련 등 시민단체가 "과거 정권의 방송 장악을 비판했던 명분이 무색해졌다"고 비판할 정도로 후폭풍도 이어지고 있다.낯선 풍경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 이사진과 사장 선임을 둘러싼 갈등은 되풀이됐다. 여당은 '방송 정상화'를, 야당은 '언론 장악'을 외쳤지만 정권이 바뀌면 입장도 손쉽게 뒤바뀌곤 했다. 이 같은 정치적 악순환을 끊겠다며 지난해 방송3법이 개정됐다. 사장후보국민추천위원회를 도입하고 이사 추천 방식을 다양화하는 등 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그러나 절차를 고쳤다고 정치의 영향력까지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오히려 새 법 체계는 다른 허점을 드러낸다. 그동안 정치권은 관행적으로 공영방송 이사 선임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제 그 영향력은 법적 틀 안으로 들어왔다. 방송3법은 공영방송 이사의 약 40%를 정치권 추천 몫으로 규정하고 있다. 선임된 이사들이 자신을 추천한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방송 심의·규제기구가 구성 방식 때문에 끊임없이 정파성 논란을 겪어온 현실을 떠올리면 과장된 우려가 아니다.공영방송은 특정 정권이나 진영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다. 시장 논리만으로는 채워지기 어려운 공적 정보를 제공하고 지역과 문화, 교육 콘텐츠를 책임지며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 존재 이유다. 국민이 수신료와 공적 재원을 부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제는 현실이 그 기대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KBS의 경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장 교체를 둘러싼 극심한 갈등을 반복해 왔다. 강압적으로 교체된 사장에 대해 법원이 뒤늦게 부당성을 인정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기대도 있지만, 이사의 숫자를 늘리는 것만으로 체질까지 달라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제도적 혼란도 추가됐다. 개정 방송법은 이사 추천 방식 등을 편성위원회에서 방송편성규약으로 정하도록 했다. 그런데 노조 간 갈등이 이어지며 내부 임직원과 시청자위원 몫 이사 추천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민주화하겠다며 만든 절차가 현장에서는 대표성 다툼과 절차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MBC의 문제는 더 복합적이다. MBC는 소유구조상 공영성을 갖고 있지만, 재원구조나 영업 방식은 민영방송과 크게 다르지 않다. MBC가 공영방송을 자임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공정성과 사회적 신뢰를 먼저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신호는 가볍지 않다. MBC는 지난해 시사인이 한국갤럽에 의뢰한 조사에서 '가장 신뢰하는 언론'과 '가장 불신하는 언론'에 동시에 이름을 올렸다. MBC 경영평가단은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기반이 특정 수용자층에 편중돼 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신뢰도와 불신도가 동시에 높다는 사실은 공영방송이라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경고다.최근 내부의 자성도 있었다. 언론노조 MBC본부 산하 민주방송실천위원회는 6·3 지방선거 보도를 점검하면서 일부 뉴스 오프닝이 특정 정당의 선거 광고처럼 비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여야 관련 보도에서 균형감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최승호 전 MBC 사장도 SNS에서 "진실 추구와 선거 보도 편파성은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공영방송의 신뢰는 외부의 공격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내부의 관행과 편향에 둔감해질 때 더 깊이 흔들린다.공영방송이 변해야 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국민은 저녁 뉴스 시간에 맞춰 TV 앞에 앉았다. 이제 뉴스는 스마트폰으로 소비된다. 유튜브와 온라인 플랫폼이 뉴스 유통의 중심이 되면서 지상파가 정보를 독점하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시청자는 언제든 다른 플랫폼으로 이동한다. 신뢰를 잃은 매체는 빠르게 외면받는다.이런 시대에는 '공영방송'이라는 이름만으로 존재 이유를 인정받을 수 없다. 영향력이 줄어든 만큼 더 높은 수준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증명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가 추진하는 통합미디어법도 결국 이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작업이다. 방송과 통신, 온라인 플랫폼을 하나의 체계로 재편하려면 무엇보다 공영과 민영의 역할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공영방송은 공적 책무에 걸맞은 책임과 규율을 감당하고, 민영방송과 플랫폼은 시장 경쟁 속에서 자율성과 창의성을 최대한 보장받는 구조가 바람직하다.'공영은 공영답게, 민영은 민영답게.' 이 단순한 원칙이 바로 서야 통합미디어법도, 미디어 규제 혁신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공영방송이 그 책무를 감당할 자신과 의지가 없다면 공영의 이름을 계속 유지할 명분도 약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제도를 앞세운 또 한 번의 사장 교체 쟁탈전이 아니다. 권력과 자본, 진영 논리로부터 독립해 왜 한국 사회에 여전히 공영방송이 필요한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일이다. 공영방송의 미래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가 결정한다.
[시대광장/정용관]대통령 '주변'의 문제, 대통령 '자신'의 문제
역대 정권은 대부분 대통령 '주변'에서 흔들렸다. 친인척 비리와 비선 실세, 여사 리스크가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그런 점에서 임기 1년을 넘긴 이재명 정부는 이전 정부들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가족이나 친인척 문제가 국정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고, '여사 리스크'도 없다. 성남 라인이나 사법연수원 동기 등 실세로 거론되는 인물들은 있지만 '비선 논란'으로 번진 적도 없다.공식 의사결정 체계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와 비서실장 주재 회의를 통해 주요 현안을 조율하고, 중요한 보고도 비서실장을 거치는 체계를 갖췄다고 한다. 한 참모가 특정 현안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자 대통령이 "비서실장도 알고 있느냐"고 되물었다는 일화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식 회의에서 어렵게 결론을 내린 사안이 밤사이 이유 없이 뒤집히는 일이 허다했다는 지난 정권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그러나 비선이 없고 공식 시스템이 작동한다고 해서 권력 운영까지 건강하다고 단언하긴 어렵다. 대통령실을 보면 정책과 메시지가 이례적으로 일사불란하다. 치열한 토론과 숙의를 거쳐 도출된 결론인지, 처음부터 하나의 방향으로만 의견이 수렴된 결과인지는 국민이 알 길이 없다. 메가 프로젝트를 포함해 초고가 주택 보유세, 임신중지 의약품 도입 등 크고 작은 정책 방향이 대통령의 입을 통해 먼저 제시되고 내각은 이를 챙기는 역할에 머무르는 모습이 반복된다.요컨대 지금의 국정 운영은 머리만 커지는 가분수 구조를 닮아가고 있다. 대통령실이라는 머리는 갈수록 비대해지는데 내각이라는 몸통은 점점 왜소해지는 것이다. 사실 민주화 이후 대통령의 민주적 정당성은 커졌지만, 그만큼 권력도 대통령실로 집중돼온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검찰 개혁 방향 등 거대 여당과 삐걱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지지층 내부의 이슈이고 웬만한 정책 결정은 거의 대통령실, 즉 대통령 뜻대로 이뤄진다고 볼 수 있다.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정당과 내각, 관료 조직을 이전보다 훨씬 강하게 장악하고 있고, 내각제 국가에서도 '수상의 대통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정치학에서는 이를 '프레지던셜라이제이션(Presidentialization)'이라고 한다.문제는 권력의 집중이 곧 판단의 집중으로 이어지는 것의 위험성이다. 모든 정책의 첫 문장을 대통령이 쓰기 시작하면 청와대 참모들이나 장관은 국정의 동반자가 아니라 대통령 뜻의 '답정너' 실행자가 된다.2000여 년 전 한비자는 '세난(說難)'에서 권력의 본질을 간파했다. 흔히 '세난'은 군주에게 직언하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한 글로 읽힌다. 그러나 그의 더 깊은 통찰은 따로 있다. 신하들이 각자의 직분보다 군주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더 골몰한다는 점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래야 살아남든 자리를 보전하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오늘날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 정책의 타당성 보다 '선출직 임기제 군주'라 불리는 대통령의 생각을 먼저 헤아리게 될 때 집단사고의 위험이 시작된다. 집단사고는 토론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각이 사라지고 모두가 같은 방향만 바라볼 때 나타나는 조직의 병리다.그래서 '프레지던셜라이제이션'의 세상일수록 숙의의 통로는 더욱 넓어져야 한다. 문제는 여당 자체가 강성 지지층에 휘둘려 공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실 안에서라도 다양한 의견이 끝까지 경쟁하는 구조가 살아 있어야 한다. 참모진 회의도 좋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국가적 의제일수록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한 발 떨어진 전문가 집단과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중요한 축으로 참여해 실질적 자유 토론을 거쳐 정책의 큰 흐름을 설정하는 다층적인 '비공개 숙의 구조'가 필요하다. '부동산 대토론회'처럼 정부가 방향을 상당 부분 정한 뒤 국민 의견을 확인하는 '직접 소통' 방식 보다는 방향을 결정하기 전에 서로 다른 진단과 해법을 놓고 충분히 토론하는 선행 과정이 훨씬 중요하다. 대통령은 모든 문제를 직접 챙기는 해결사가 아니라 국가 전체를 지휘하는 '제너럴 리더'다. 뛰어난 장군일수록 모든 전투를 직접 지휘하지 않는다. 큰 전략은 제시하되 전술은 현장에 맡기고, 서로 다른 지휘관들의 판단을 끝까지 들은 뒤 결정을 내린다. 국가 운영은 전쟁보다 훨씬 복잡하다. 대통령의 '주변' 문제가 잠복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 정부에서 더 경계해야 할 것은 대통령 '자신', 정확히 말하면 대통령 개인에게 권력과 판단이 함께 집중되는 구조다. 이는 특정 대통령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도 '의심'해야 하는 제도가 민주주의다. 대통령이 가장 많이 알고 있을 수 있지만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 위에서 다른 의견을 수렴하는 숙의 구조를 만드는 것, 앞으로는 그것이 국가의 시스템 경쟁력이자 핵심적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시대광장/박중현]2년 차 정권 발목 잡는 1년 차 '정책 과속'
#. "빚투를 그동안은 너무 나쁘게만 봤는데, 레버리지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 지난해 11월 초 권대영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이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와 이 말을 했을 때만 해도 대다수 국민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정부 안에서도 '레버리지 상장지수펀드(ETF)' 도입 논의가 본격화하기 전이었다. 올해 5월 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 도입 후 두 달이 채 안 된 지금은 '레버리지'가 뭔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상황이 됐다.이 '레버리지' 발언이 나온 건 사상 첫 코스피 4,000선 돌파 1주일 뒤였다. 무리한 목표처럼 보이던 이재명 대통령의 '코스피 5,000' 대선 공약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한 때다. 이후 올해 들어 코스피는 '오천피', '육천피', '칠천피'를 거쳐 5월 26일 '팔천피'까지 돌파했다. 그 다음 날 단일종목 2배 레버리지 ETF가 시장에 선보였고, 20일 뒤 코스피는 '구천피'까지 넘겼다. 어떻게 봐도 당시 레버리지 ETF는 시장 상황에 대한 신중한 고려 없이 급하게 도입된 정황이 역력하다. 홍콩 증시의 삼성전자·SK하이닉스 레버리지 상품으로 빠져나가는 달러를 국내로 돌려 고공행진하는 원-달러 환율을 낮추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그 결과는 포모(FOMO·소외 공포)에 쫓겨 뒤늦게 증시에 뛰어든 개인투자자의 계좌를 강제청산 위험에 빠뜨리는 개미지옥이 됐다.'팔천피' 돌파 다음날 이 상품 도입이 예정됐다면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아니라도 정부, 청와대 내의 누군가는 "드러누워서라도" 과속을 경고했어야 했다. 하지만 정부 1년 차의 막바지이자, '6·3 지방선거'를 코앞에 둔 시점에 휘슬을 분 사람은 없었다. 금융당국은 최근에야 투자 장벽을 높이기로 했는데, 이 대통령은 "신속, 과감한 추가 보완대책"을 다시 주문했다.#. "발생하지 않은 갈등 상황을 지나치게 우려하기보다 노사 간 대화와 협의가 필요하다." 올해 3월 10일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법) 시행에 즈음해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한 말이다. 당시 재계의 우려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사용자' 개념을 넓혀 하청 근로자들이 대기업 등 원청을 상대로 교섭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는 점, 다른 하나는 파업 등 쟁의의 사유를 '근로조건의 결정'에서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업 경영상 결정'으로 확대한 거다.법 시행 직후엔 하청 노조들의 교섭 요구 폭증에 관심이 집중됐다. 하지만 '영업이익 N% 성과급 논란'의 주연인 삼성전자 초기업노조가 6월 말 발표된 '800조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 문제를 내년도 단체교섭 의제로 삼겠다고 나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노조의 주장은 '호남 반도체' 때문에 조합원이 향후 근무지를 옮겨야 한다면 근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인 만큼 노조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작년 9월 정부, 여당이 입법을 밀어붙인 노란봉투법이 현 정부 최대 역점 사업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생겼다. 이 대통령이 "그렇게 따지면 경영권 행사와 관련이 없는 게 없다",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며 노동부에 지침 마련을 지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다.#. "원자력 발전소 짓는 데 최하 15년이 걸리는데 지을 곳이 없다. 내가 보기에 거의 실현 가능성이 없다." 작년 9월 11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인공지능(AI),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으로 전력수요가 폭증하는 만큼 원전을 더 지어야 한다는 주장에 "가장 신속하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은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라며 원전 확대 요구를 반박한 것이다.이랬던 대통령과 정부가 달라졌다. 간헐성이 큰 신재생 에너지에만 의존해선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에 품질 좋은 전력을 공급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지적이 빗발쳤기 때문이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이달 초 "새 부지를 만들지 않더라도 전남 영광 한빛 원전에 2기, 울산 울주 새울 원전에 2기 등 총 4기를 더 지을 수 있는 땅이 있다"고 했다. 부지확보 상태에서는 7년이면 완공이 가능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지난달 2년 차에 접어든 정부는 1년 차 때 이재명 정부와 싸우고 있다. 단일종목 레버리지 ETF는 이미 최고 속도로 달리는 코스피에 터보엔진을 붙였다가 탈이 난 경우다. 역대 어떤 정부보다 '노동친화적'인 현 정부가 재계와 야권의 반발을 무릅쓰고 작년에 도입한 노란봉투법은 "가장 큰 국민적·역사적 성과"의 장애 요인으로 떠올랐다. 원전에 대한 정부의 자세는 2년 차 들어 극적으로 바뀐 경우인데, "과거 발언 사과부터 하라"는 일각의 요구가 있긴 해도 현 정부 '실용주의' 기조에 잘 맞는다는 평가가 많다.이재명 정부는 1년 차 정책이 난관에 부딪힌 또 하나의 사안을 23일 마주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2년 걸린 대책을 1년 만에 '2배속'으로 추진했지만 '매매·전세·월세 트리플 강세'만 초래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부동산 정책을 놓고 벌이는 청와대 국민토론회다. 이 대통령은 최근 사회개혁과 관련해 "요란하게 하면 멋있을지는 몰라도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고 했다. 1년 차 때 요란한 '정책 과속'을 통해 배운 교훈들이 2년 차 부동산 정책에 반영되길 기대한다.
[시대광장/채인택]군인에게 목숨 바치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
조선은 1907년 7월 31일 순종이 일제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강요로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 지 3년쯤 지난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망했다. 망군은 망국의 전초였던 셈이다. 그 뒤 군대도, 나라도 없이 지내던 우리는 1946년 1월 15일 국군 모체인 국방경비대를 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자리에서 창설하면서 다시 정식 군대를 보유하게 됐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보다 앞선다. 군사학교는 군보다 먼저 창설됐다.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로 시작해 이듬해 5월 1일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6월 15일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쳐 1948년 9월 5일 비로소 육군사관학교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이렇게 탄생한 국군 중 육군은 '위국헌신·책임완수·상호존중' 등 3대 요소를 핵심 가치로 삼는다. 육사 생도들은 여기에 화랑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교훈인 '지(智)·인(仁)·용(勇)'을 더한 정신교육을 받으며 군인정신과 리더십을 배운다. 이 핵심 가치는 사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군인정신에서 나왔다. 안 의사가 남긴 유묵 등에 나타난 군인 사상이 육군 3대 요소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영남대 군사학과 이영한 겸임교수가 안 의사의 유묵과 자서전인『안응칠 역사』, 미완성 저서인 『동양평화론』, 당시 공판기록과 매일신보 보도 등을 바탕으로 그의 군인사상을 분석한 결과다. 그 내용은 국방부 산하 국방정신전력원이 발행하는 학술지 『정신전력연구』에 2024년 게재된 '안중근의 가치관과 군인정신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에 실렸다. 안 의사의 사상은 군인정신의 6대 요소인 명예·충성심·용기·필승신념·임전무퇴·애국애민' 중 특히 명예·용기·애국애민이 두드러졌으며 그 근원에는 '정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는 2014년 3월 서울 만리동의 보덕사에서 만나서 들은 삼중 스님(1942~2024년)의 증언과 일치한다. 40년 이상 사형수 구명 및 교화 활동과 더불어 안중근 의사 숭모 사업에 헌신한 삼중 스님은 안 의사가 남긴 57점 이상의 유묵에 읽힌 사연을 소개하면서 안 의사가 생전에 특히 군인정신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들려줬다. 삼중 스님에 따르면 안 의사는 항일 의병 운동에 참여한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소개하는 등 자신을 나라를 헌신하는 군인이라고 여겼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 사살을 군인으로서 할 일을 한 것으로 여겼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은 뒤 같은 해 3월 26일 뤼순(旅順) 감옥에서 처형된 안 의사가 집행 직전 일본 감시병인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휘호를 써준 것은 이런 신념을 반영한다. 뤼순 법원 취조 담당인 야스오카 세이시로(安岡靜四郞) 검찰관에게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마음을 쓰며 애를 태운다)'라는 글을 써준 것도 마찬가지다. 일본으로 건너갔던 두 유묵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와 국립민속박물관 파주관에 보관되고 있다. 안 의사가 유묵으로 남긴 '위국헌신 군인본분'과 '국가안위 노심초사'를 실천한 대한민국 군인으로 누가 있을까 생각하다 2010년 6월에 만났던 황규만(1931~2020) 예비역 준장을 떠올렸다. 황 장군은 만 18살 때인 1949년 7월 15일 2년 과정의 육군사관학교에 생도 1기(나중에 육사 10기가 됨)로 태릉 육사에 입교했다. 1기생은 1950년 7월 14일로 예정된 졸업 및 임관식을 불과 20일을 앞두고 6·25전쟁을 만났다. 황 장군은 "당시 모든 생도가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총을 들고 나섰다"고 증언했다. 생도들은 북한 남침 다음 날인 6월 26일 실전에 투입돼 포천지구에서 적과 교전했다. 1기생 262명 중 65명은 군번도 없이 생도 신분으로 전사했다. 1기는 6·25전쟁을 통틀어 113명이 희생됐다. 1950년 6월 1일 입교한 생도 2기는 기초교육도 마치지 못하고 3발의 소총 영점사격만 끝낸 상태에서 전투에 긴급 투입됐다. 포천 및 의정부 지구 등에서 북한군 남침을 저지하다 60여 명이 전사했다. 장교 단기 양성과정인 육군 갑종간부후보생 1기도 1950년 1월 31일 경기도 시흥 육군보병학교에 146명이 입교했는데, 전투에 나서 30명이 전사했다. 이처럼 사관생도들이 전투에 참여한 것은 유례가 드물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4~5월 베를린 전투에 독일 장교 후보생들이 투입된 정도다. 사관생도는 과학기술자와 더불어 국가와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마지막까지 보호하고 지켜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많은 희생자를 낸 생도들은 포천에서 태릉-한강-용인 김량장-수원을 거쳐 대전에 재집결했다. 그해 7월 10일 충남도청 광장에서 서로 마주 보며 반창고로 만든 계급장을 달아주는 것으로 소위 임관식을 대신했다. 화랑대로 불리는 육사 교내에는 1959년 1기 생도의 희생을 기리는 불멸탑이 서 있어 피로 시작한 사관학교의 호국 전통을 후배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베트남전 참전을 앞두고 훈련 중 누군가가 실수로 떨어뜨린 수류탄을 온몸으로 덮쳐 부하들을 구한 강재구 소령을 기리는 재구탑도 서 있다. 생도 단체 사진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소다. 육사에는 그를 기리는 재구생도대도 있다. 육사가 자리 잡은 화랑대는 단순한 교정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80년 전인 1946년 1월 15일 국군 모체인 국방경비대가 창설된 곳이자, 군번도 없이 생도 신분으로 전사한 생도 1기 65명이 내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꿈을 키우던 호국 성지다. 사관생도들은 나라와 부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선배들을 길러낸 호국 성지에서 교육받으면서 헌신과 희생의 군인정신을 기른다. 과거 일부의 일탈은 이러한 전통을 해치는 오점일 뿐이다. 일부의 오점을 바탕으로 군인과 사관학교 전체를 '개혁 대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장소를 사실상 아파트 건설 부지로 내주고 육사를 해군사관학교 및 공군사관학교와 통합해 대전으로 옮겨가는 방안이 정부에 의해 일사천리로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집단이고, 더구나 민주사회에선 국민이 선출한 정부의 명령에 당연히 따라야 한다. 하지만 간과한 게 하나 있다. 군인은 죽음을 명령받을 수 있는 특수 집단이지만 그만큼 이에 수반되는 명예와 자부심이 절대적이라는 사실이다. 민주사회에서 선출된 권력인 군 통수권자는 군인에게 죽음을 명령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명령은 합리적이어야 하고 군인에 대한 존경과 존중이 바탕에 깔려야 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명예와 자부심을 지켜줘야 한다. 최근 사관학교 통합과 이전을 추진하는 정부의 속도전을 보면 존중과 존경 대신 독선과 일방통행만 보인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민 우위의 원칙에 따라 선출직 정치인은 군인을 지휘해야 하지만 존경과 예우 없는 독단적인 명령과 지시는 역사에 새로운 오점이 될 수 있다. 사관학교 통폐합 추진이든, 장교·부사관 인력 충원이든 국방 인력 정책은 군인을 존중하는 자세에서 시작해야 마땅하다. 더 큰 문제는 국방부가 예비역과 퇴역군인을 포함한 군 출신이나 일반 국민과의 충분한 상호 소통도, 사회적인 숙의도 없이 일을 진행해왔다는 점이다. 특히 군과 군사 문제를 가장 잘 아는 군인 세계와는 소통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 흔한 공청회, 세미나도, 연구용역도 보기 힘들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모든 개혁은 개혁 당사자나 일반 국민과 쌍방향으로 충분히 소통하면서 진행할 때 비로소 명분과 공정성을 확보하면서 힘을 얻을 수 있다. 일방적인 개혁은 독선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군인들에게 유사시 목숨을 바치라고 명령하려면 국가와 공동체가 그들의 명예와 자부심을 최고의 예우로 철저히 지켜줘야 한다.
[시대광장/김준술]누가 '혐오'를 가르치는가
'영국 북부의 평범한 동네에 중무장 경찰이 나타난다. 경찰은 배관공 가정의 문을 부수고 급습한다. 목표는 테러범도 마약범도 아니다. 체포 대상은 앳된 얼굴의 13세 소년, 제이미 밀러다. 동급생 여자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를 받는다. 영문도 모른 채 부모는 울부짖지만 소용 없다. 뒤늦게 드러나는 제이미의 범행 동기. 그것은 바로 혐오였다.'제이미는 가상 인물이다. 동시에 얼마든지 현존하는 아이일 수 있다. 그는 '소년의 시간'(Adolescence, 2025)이라는 넷플릭스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작품은 어른들이 간과했던 10대의 감춰진 현실을 적나라하게 짚어낸다. 공개 직후 영국과 유럽에서 '문제작 대접'을 받았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모든 중학교에서 시청하라"고 조치했을 정도다. 시종일관 어둡고 불편한 전개 속에서 카메라 시선은 하나의 질문으로 일관한다. '소년은 왜, 언제부터 혐오와 폭력에 물들기 시작했을까.'단서는 바로 '소셜 미디어'에 있다. 13세 제이미가 인스타그램으로 친구들과 구축한 세상. 그곳엔 '또래 집단'만의 언어와 문화가 존재한다. 필수적 소통 수단인 '좋아요' 하트는 5~6가지 색깔마다 뜻이 다를 정도다. 어른들은 모르는 암호이자, 서로의 소속감을 확인하는 놀이 문화다. 그리고 온라인에 널린 혐오 콘텐츠가 그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마저 놀이처럼 소비됐다. 교사는 물론 부모조차 모르는 사이 제이미는 혐오를 쌓아왔고, 끝내 폭력을 선택했다.'소년의 시간'이 던진 질문은 한국 사회에도 투영된다. 배재고 야구부 사건이 계기다. 우리 아이들의 '혐오 문화'도 예사롭지 않다. 뒤늦게 실태 조명에 나선 언론 보도는 생경한 팩트로 가득하다. 아이들은 "또래만 공유하는 소셜 미디어 뉴스 계정이 따로 있다"고 증언한다. 희화화된 밈과 왜곡된 카드 뉴스가 넘쳐난다. "무시했다간 집단에서 뒤처지고, 바로 따돌림"이라고 한다. 대다수가 동조하면서 죄의식은 사라지고 혐오는 더욱 증폭된다. 하지만 수익과 성장을 중시하는 소셜 미디어의 플랫폼 구조 앞에서 '사회적 책임'은 쪼그라든다.최근 동행미디어 시대는 배재고 사건을 계기로 연속 보도를 했다. 혐오와 조롱이 부추기는 '갈등 사회'를 진단하고 해법을 숙의하자는 시도였다. 특히 소셜 미디어의 책임 강화를 해법의 하나로 제시했다. 사회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가 '불안 세대'라는 책에서 꼬집은 내용도 이와 맞닿아 있다. 그는 "현실 세계에선 부모가 과잉 보호를 일삼는다"고 봤다. 하지만 "온라인에선 '과소 보호'로 방치되기 일쑤"라고 지적했다. 과소 보호라는 불균형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마침 불균형 교정을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소년의 시간' 배경이던 영국이 그렇다. 지난달 '16세 미만'의 소셜 미디어 사용을 금지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아이들이 중독되도록 설계됐다는 이유에서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정부도 동참할 방침이다. 원래 유럽은 디지털 미디어 정책을 '공공성' 차원에서 접근한다. 미국이 빅테크 기업을 키우기 위해 '진흥과 자율'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다르다. 유럽은 '미국 빅 테크와 맞짱을 떠서라도 지킬 건 지킨다'는 태세다. 칼럼을 쓰는 사이 따끈한 소식도 들려왔다. 유럽연합(EU)은 13일 아동의 소셜 미디어 접근을 제한하는 법안을 여름 이후 발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EU는 직접 나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아이들에겐 '현실 세계'의 시간이 필요하다."같은 고민에 빠진 한국의 선택지는 무엇일까. 우리도 국회에 여러 법안이 올라와 있다. 14세 미만의 가입을 금지하거나, 16세 미만의 이용 시간을 줄이자는 제안이다. 반면 일각에선 청소년의 정보 접근권과 알 권리를 얘기한다.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는 연령을 제한하려면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먼저라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내친김에 '사회적 대토론회'라도 열어 해법을 좁혀 보는 것은 어떤가. 공론화 착수 자체가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배재고 사건이 남긴 질문을 일회성 담론으로 사장시켜선 안된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몇시간씩 소셜 미디어를 끼고 산다. 하지만 학교에서 올바른 사용법을 배우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1년에 6시간 정도가 고작이라고 한다. 부모도, 학교도 모르는 사이 혐오와 조롱의 알고리즘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소년의 시간'이 피고석에 세운 것은 사실 제이미가 아니었다. 혐오를 방관하고 소비하도록 방치한 어른들과 기업, 사회 전체였다. 드라마 엔딩은 처절하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아빠는 제이미 침대에 얼굴을 묻고 오열한다. '미안해, 아들. 내가 더 잘할 걸…' 그런 후회만큼은 드라마 속 아빠 하나로 끝나야 한다.
[시대광장/이상언]'거짓의 해악' 심판자는 누구인가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제1항은 헌법에 위반된다.> 2010년 12월 28일의 대한민국 헌법재판소 결정이다. 47조 1항은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하여 공연히 허위의 통신을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이다. 헌재의 7대 2 판결로 이 조항은 바로 효력을 잃었다. 위헌소원을 제기한 것은 박대성씨(필명 미네르바) 변호인단이었다.16년 뒤인 2026년 7월 7일 대한민국에는 새 법률 조항(정보통신망법 44조의 7-②)이 생겨났다. '손해를 끼칠 의도 또는 부당한 이득을 얻을 목적으로 타인의 인격권이나 재산권 또는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는 '허위조작정보'를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유통하여서는 아니 된다.' 허위조작정보는 ①내용의 일부 또는 전부가 허위인 정보(허위정보) ②내용을 사실로 오인하도록 변형된 정보(조작정보)로 규정됐다. 둘 중 하나에만 해당되면 처벌이다. '부당한 이득'이나 '공공의 이익 침해'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이 법에 쓰여 있지 않다. 허위·조작 여부를 누가 판정하는지도 알 수 없다.<'허위 사실'이라는 것은 언제나 명백한 관념은 아니다. 어떠한 표현에서 '의견'과 '사실'을 구별해내는 것은 매우 어렵고, 객관적인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 역시 어려우며, 현재는 거짓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그 판단이 뒤바뀌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2010년의 헌재 결정문에 준엄하게 적혀 있다. 민주사회의 상식 아닌가? 이런 대목도 있다. <'공익'이라는 개념은 매우 추상적인 것이어서 어떠한 표현 행위가 과연 '공익'을 해하는 것인지, 아닌지에 관한 판단은 사람마다의 가치관, 윤리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중국의 검열 수단 '심흔자사죄'━헌재는 성실히 해외 입법례도 살펴보고 결과를 간략히 결정문에 넣었다. <허위 사실의 유포를 그 자체만으로 처벌하는 민주국가의 사례는 현재 찾아보기가 힘들다.> 당시 재판관들이 중국을 민주국가로 여기지 않았던 듯하다. 중국에는 '공공장소에서 소동을 일으켜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심흔자사죄'(중국 형법 293조)라는 게 있었고, 지금도 있다. '공공장소'에 온라인 플랫폼이 포함된다. 중국 정부는 바이두·텐센트·바이트댄스 등에 유언비어 유포 방지 책임을 지운다. 이들은 인력과 인공지능(AI)을 동원해 실시간 자체 검열을 한다. 시진핑 주석이나 정부를 비판하는 글은 보기 힘들다. 간혹 올라와도 금세 사라진다.2010년 위헌소원의 발단은 박대성씨 처벌이었다. 1988년생인 박씨는 인터넷 포털 다음의 커뮤니티(아고라)에 '미네르바'라는 닉네임으로 가끔 글을 게재했는데, '정부, 달러 매수 금지 긴급 공문 발송' 주장이 문제가 됐다. 정부는 허위 사실이며, 이 때문에 환율 방어에 20억 달러가 쓰였다고 밝혔다. 박씨는 전기통신기본법 47조 위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징역 1년 6월을 구형했다.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고, 항소심은 헌재 결정으로 공소 기각됐다. 1심 재판부는 허위 사실 게재는 인정하면서도 "공익을 해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무죄 판결 이유를 밝혔다.━17년 전 민주당, 미네르바 체포 규탄━2009년 1월 박씨가 체포돼 구속되자 민주당 대변인은 "이명박 정권의 막무가내식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성명을 냈다. "국제적 망신"이라고 비난했다. 송영길 의원 등이 구치소에서 박씨를 만나 지원을 약속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인터넷에서의 허위 사실 유포로 사회적 혼란과 손해가 엄청나다고 주장했다. 2009년 한나라당은 '사이버 모욕죄'와 '인터넷 실명제' 도입을 추진했다. 전자는 민주당의 반대와 사회적 비판에 제동이 걸렸고, 후자는 실행됐으나 위헌 결정으로 3년 만에 사라졌다. 그랬던 민주당이 우리사회 각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허위조작정보 금지법(개정 정보통신망법)을 탄생시켰다. 사이버 모욕죄 신설과 박대성씨 처벌에 열을 올리던 당시 여권(지금은 야권) 인사들은 요즘 앞다투어 "입틀막법 폐기"를 외친다. 서는 곳이 바뀌니 보는 풍경이 달라진 것인가.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의 부조리극에 어질어질하다.헌재 결정문에 쓰여 있듯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다. 인류는 오랫동안 신(神), 사제, 군주와 그의 대리인에 그 일을 맡겼다. 근대의 과학적 이성 발달로 그들의 독점 심판권은 허물어졌다. 그 누구도 진실 감별사의 지위를 가질 수 없게 됐다. 고도로 훈련받은 판사만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다. 이것이 '근대정신'이다. 절대적 진실은 없다. 잠정적 진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허위 유포에 의한 공익 침해는 어떻게 막아야 하나? 2010년 헌재 결정문에 힌트가 있다. <어떤 표현이나 정보의 가치 유무, 해악성 유무가 국가에 의하여 1차적으로 재단되어서는 아니 되며, 이는 시민사회의 자기 교정 기능과 사상과 의견의 경쟁 메커니즘에 맡겨져야 한다.> '사이버 렉카'가 판치는 세상이라 한가한 소리로 들리나? 그러나 어쩌겠는가? 자유민주주의의 숙명이 그런 것을.
[시대광장/박창억]민주당은 지금 위기다
6·3 지방선거 직전만 해도 더불어민주당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민주화 이후 최고의 '패권세력'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22대 총선 압승으로 의회 권력을 장악했고, 불법 비상계엄으로 자멸한 국민의힘을 내란 세력으로 몰아붙이며 정권교체에 성공한 뒤 일방적으로 국정을 주도했다. 지방선거 과정에서도 한때 경북을 제외한 모든 광역단체장 선거를 싹쓸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입법·행정·지방권력까지 모두 손에 쥔 민주당이 독주를 이어가고, 국민의힘은 만년 야당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올만 했다.그러나 이런 전망에 고개를 젓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권력은 외부 공격보다 내부 분열로 몰락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이유에서다. 민주당의 과거 궤적을 돌아볼때 독점적 권력을 장악한 이 정권에서도 치명적 내분이 발생할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지방선거가 끝난 지금 8·17 전당대회를 앞두고 민주당 내부에서 전개되는 양상은 이러한 예측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이런 분열의 DNA는 역사적 데자뷔를 불러일으킨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 직후, 2003년 새천년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빽바지(친노 신당파)'와 '난닝구(호남 사수파)'로 상징되는 극단적 대결이 당을 찢어놓았다. 내부 투쟁에 골몰했던 민주당은 결국 민심의 엄중한 심판을 받았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민주당은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에서 사상 유례없는 '전국 선거 3연속 참패'를 당하며 긴 암흑기로 들어갔다.전당대회를 앞두고 최근 '친명(이재명)' 세력과 '친청(정청래)' 세력으로 갈라져 싸우는 모습은 과거의 비극을 고스란히 재연하고 있다. 이들은 당의 주도권과 차기 대권 교두보를 차지하기 위해 헤게모니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유시민 작가 등 외곽의 영향력 있는 스피커들이 노선 갈등을 부추기는 양상은 세력 간의 전면전을 방불케 한다. 유 작가는 이 대통령의 통합·확장 노선을 '재건축'에 비유하며, 핵심 지지층이 진정 원했던 것은 외연 확장이 아닌 '증축'이었다고 날을 세웠다. 이에 대해 친명계의 김민석·송영길 의원이 반발하며 양측은 격렬하게 충돌했다.이제 민주당 의원들과 지지층은 이른바 '친명'과 '친청'이라는 두 진영으로 완전히 갈라섰다. 이들은 온·오프라인에서 서로를 향해 입에 담기 힘든 멸칭을 퍼부으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양 진영 핵심 인물들의 이름을 악의적으로 합성한 정체불명의 멸칭들을 보고 있으면 20여년 전 '난닝구 대 빽바지' 논쟁, 10년 전의 새정치민주연합 분당 사태, 4년 전의 '수박 논란' 등이 차례로 오버랩된다. 표현의 겉포장만 바뀌었을 뿐, 권력을 향한 증오와 배제라는 본질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급기야 이들의 싸움은 시대착오적인 적통 논쟁을 넘어, 과거 역사까지 헤집는 '파묘 소동'으로 치달았다. 노사모 시절 갈등이나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파동을 다시 꺼내 드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노 전 대통령 장례식 참석 여부라는 해묵은 논란까지 소환해 서로를 비난하는 형국이다.정당이란 본래 다양한 생각과 정책이 역동적으로 공존하는 광장이다.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가더라도 선택하는 방법론은 다를 수 있으며, 정치적 견해의 상반은 오히려 정당의 생명력을 높이는 촉매제가 된다. 그러나 나만 옳고 상대는 틀렸다는 독선에 빠지는 순간 정당은 무너진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동지를 토론과 설득의 파트너가 아닌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정당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민주당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패배에 익숙한 무기력한 정당이었다. 과거 보수 진영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선거의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리멸렬한 내분을 일삼던 민주당의 무능함이 있었다. 민주당은 여러 차례 분열의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도 역사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듯하다. 민주당이 이대로 분열의 늪에 빠져 허우적댄다면 2028년 총선과 2030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과거를 잊은 지금의 민주당은 분명 위기다.
[시대광장/이상복]징벌적 손해배상, '입틀막법' 되지 않으려면
오래전 방송심의기구를 출입한 적이 있다. 일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 기관을 '자판기 위원회'라고 부르는 냉소가 있었다.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결론을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안건은 여야 추천 위원 구성에 따라 결론이 갈리곤 했다. 정권이 바뀌면 공정성과 중립성의 잣대도 달라지는 듯했다. 어느 정부나 독립적 심의를 강조했지만 정파를 넘어선 신뢰는 끝내 쌓이지 못했다. 남은 교훈은 분명했다.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운영에 대한 신뢰였다.7일부터 시행되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이른바 '허위조작정보 근절법'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이 법은 고의로 허위·조작정보를 유포해 타인에게 피해를 준 경우 손해액의 최대 5배를 배상하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도입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유튜버에는 강화된 책임을, 대형 플랫폼에는 허위정보 대응 체계와 투명성 보고 의무도 부과했다.정치권에서는 이를 두고 '입틀막법'이라는 비판과 가짜뉴스 대응이라는 옹호가 맞서고 있다. 그러나 찬반 논쟁보다 중요한 핵심은 따로 있다. 무엇을 허위정보로 볼 것인가. 그 기준을 누가 정하고, 국민이 얼마나 납득할 수 있느냐다.허위정보를 가르는 일이 모두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경계다. 법은 허위·조작정보를 '전부 또는 일부가 허위이거나 사실로 오인되도록 변형된 정보'로 규정한다. 여기에 혐오·차별 정보를 새로운 불법정보 유형으로 포함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현저히 훼손하는 정보'라는 표현도 사용했다. 이런 개념은 일정 부분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판단은 법적 기준보다 정치적 해석에 끌려갈 위험이 커진다.진짜 난제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이다. 선거, 정책, 권력 비판처럼 사회적 갈등이 첨예한 영역에서는 같은 자료도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힌다. 이 지점에서 허위정보 규제는 팩트체크 기술이 아니라 판단 기준의 문제로 바뀐다. 방송심의가 끊임없이 논란이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물론 허위정보를 방치할 수는 없다. 일부 유튜버와 이른바 '사이버 렉카'는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사실처럼 유포하며 명예를 훼손해왔다. 그 과정에서 막대한 수익도 따라왔다. 거짓 정보는 선거와 정책, 사회적 갈등을 동시에 흔들어왔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이지만, 고의적 허위정보까지 보호할 수는 없다.문제는 규제 방식이다. 이번 제도는 플랫폼 사업자가 게시물 삭제나 노출 제한 여부를 판단하도록 설계됐다. 그러나 플랫폼은 수사기관이나 법원이 아니다. 사실관계를 판단할 권한과 역량이 충분하지 않고, 과거 사례를 보면 정치적 편향성 논란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여기에 이번 법은 누구든 허위정보를 신고할 수 있도록 했다. 시민 참여를 넓힌다는 취지가 있지만, 정치적 쟁점에서는 조직적 신고 경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신고가 몰리면 플랫폼은 가장 안전한 선택, 즉 '일단 삭제'로 기울 수밖에 없다. 그 순간 공익적 비판까지 함께 위축된다.제도를 뒷받침할 장치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플랫폼과 협력해 허위 여부를 검증할 사실확인단체는 구성 단계이고, 이를 지원할 투명성센터도 출범을 앞두고 있다. 객관적 판단 체계가 자리 잡기도 전에 법부터 시행되는 셈이다. 준비보다 시행이 앞서는 제도는 초기 혼란을 피하기 어렵다.결국 관건은 독립성과 신뢰다. 사실확인단체와 투명성센터가 정치적 중립성과 일관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제도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정부에 유리한 주장에는 관대하고 비판에는 엄격하다는 의심이 생기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 보수와 진보, 권력자와 권력비판 세력 모두에 동일한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제도는 공론장의 안전장치가 아니라 또 하나의 '입틀막법' 논란으로 남을 수 있다.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마찬가지다. 권력자나 대기업이 소송을 통해 상대를 위축시키는 방식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 정부와 여당은 보완장치를 마련했다는 입장이지만, 언론 현장의 우려는 여전하다. 그만큼 추가적인 보완 입법 논의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 허위정보는 엄정하게 다루되, 공익적 비판과 탐사보도는 더 두텁게 보호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전략적 봉쇄소송을 막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거짓은 처벌만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더 빠르고 넓게 진실이 확산되는 정보 생태계가 필요하다. 앞으로 구성될 미디어발전위원회도 규제 중심을 넘어 공익적 저널리즘이 성장할 환경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시민이 사실과 의견을 구별할 수 있도록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도 강화해야 한다. 좋은 저널리즘이 살아야 허위정보의 공간은 자연스럽게 줄어든다.방송심의가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정파성 논란이 시작되는 순간 제도는 신뢰를 잃는다. 허위정보 규제도 다르지 않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일관된 기준이 있을 때만 제도는 작동한다. 이 법이 허위정보를 줄이는 장치로 자리 잡을지, 또 다른 '입틀막법' 논란으로 남을지는 결국 신뢰의 문제다. 법의 권위는 처벌의 강도가 아니라 기준의 공정성에서 나온다.
[시대광장/정용관]권력의 회로가 바뀌었다
샴페인은 잔에 따르는 순간 가장 화려하다. 기포는 눈부시게 솟아오르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다.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이자 오래 정치권을 지켜본 한 지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선 도전에 실패한 어느 정치인의 부인이 위로 자리에서 샴페인 잔을 바라보다 "꼭 지지율 같네"라고 했다는 것이다. 권력도 그렇다. 가장 높이 치솟는 순간이 가장 불안정하다.지지율은 오르내리는 것이 정치의 숙명이다. 그러나 한 번 꺾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좀처럼 되돌아오지 않는다. 어느 정권이든 취임과 동시에 레임덕이 시작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년 동안 대선 득표율을 크게 웃도는 높은 지지율을 유지했다. 행정부와 국회를 장악했고 사법개혁의 주도권도 확보했다. 지방 권력까지 더해지면 '단군 이래 가장 강한 대통령'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반도체 초호황까지 겹치면서 "운이 좋은 대통령"이라는 말도 따라다녔다.그런데 지방선거 이후 공기는 사뭇 달라졌다. 집권 1년을 갓 넘긴 대통령에게 여당 대표가 공개적으로 "권력은 짧다"고 맞섰다. '90도 폴더 인사'를 두고도 온갖 해석이 쏟아졌다. 왕조 시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역린'을 건드리는 듯한 일이 예사로워졌다.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많은 사람은 이를 유튜브 정치나 팬덤 정치의 영향으로 설명한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상이다. 본질은 권력이 작동하는 회로가 바뀌었다는 데 있다. 과거 정당은 여론을 걸러내고 다듬는 필터였다. 대통령이 당을 이끌고, 당은 의원을 움직였으며, 의원은 지지층을 설득했다.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 흘렀다. 지금은 순서가 뒤집혔다. 플랫폼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형성된 강성 지지층의 정서가 당을 움직이고, 당의 기류가 다시 대통령을 압박한다. 권력은 아래에서 위로 역류한다. 대통령이 당을 통제하지 못하는 시대가 아니라, 당조차 지지층을 통제하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문제는 비전도 질서도 없는 지지층의 분열이다. 최근 여권에서 벌어진 '적통' 논란과 '파묘' 공방, 멸칭 경쟁은 그 단면이다. 누구는 'ABC론'이니 '코어층'이니 하며 카테고리를 나누고 "증축을 하랬더니 재건축을 한다"며 그럴듯한 프레임을 내세우지만 결국은 당권 투쟁이다. 정치적 언어만 복잡해졌을 뿐 팬덤 동원이라는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사실 이 대통령 역시 이런 정치 환경의 수혜자이자 산물이다. 변방 정치인이던 그는 손가락혁명군과 개딸로 이어지는 팬덤의 힘을 발판으로 중앙 정치의 중심에 섰다. 정청래 대표 역시 같은 정치 문법을 구사하고 있다. 어쩌면 더 능숙한 방식으로 당 조직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호남 반도체를 둘러싸고 전당대회를 의식한 결정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것도 이런 정치 지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그런 해석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현실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 점에서 대통령이 당내 권력투쟁의 한 축이 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이겨도 상처가 남고, 지면 치명적이다. 지금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권력이 아니라 '정치적 권위'다. 이 대통령은 "나는 선거 전후로 변한 것이 없는데 국정 지지율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달라져야 한다. 직전 총리는 그를 '괴력의 슈퍼맨', '악덕 상사'라고 표현했다. 누구보다 부지런한 대통령이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모든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 할수록 오히려 권위는 소모된다. 국무회의 생중계나 SNS를 통한 잦은 의견제시도 마찬가지다. 만기친람이 권위의 원천이 되진 못한다. 대통령이 전면에 설수록 국정은 대통령 개인에게 더 의존하게 될 뿐이다.이 대통령은 중도 보수를 아우르는 '구조적 다수'를 만들겠다고도 했다. 방향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권력을 더 행사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권위는 자신에게 불리한 문제를 피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공소 취소 문제도 그런 차원에서 봐야 한다. 그것이 여권 내부 권력투쟁의 고리가 되고 국정 운영의 부담으로 남아 있는 한 대통령은 스스로 정치적 공간을 좁히게 된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매듭짓는 것, 그것이 국가 지도자의 권위다.긴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권력이야말로 샴페인 거품과 닮았다. 대통령의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권력의 회로가 바뀐 시대, 이제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의 시간이 아니라 '권위의 시간'이다.
[시대광장/채인택]반도체·AI 몰입 투자의 위험성과 타산지석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보고회'에서 앞으로 10년간 1000조가 넘는 반도체 클러스터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 벨트 투자 계획이 발표됐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비롯한 관련 기업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앞으로 AI 산업으로 국가 경제성장 잠재력을 끌어올린다는 전략 아래 '초격차 반도체 산업'과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를 대상으로 역대급 '국가기획 민간투자'를 하겠다는 발표다. 모든 것이 뜻대로 진행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돌다리도 두들겨본다'는 속담대로 혹시 생길지도 문제점을 미리 살펴 대비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하다. 타산지석을 살펴본다.가장 염려되는 것이 반도체와 AI 산업 '몰입'이 불러올 부작용이다. 대표적인 것이 '극단적인 의존경제'에 대한 우려다. 지금도 주식시장에선 역대급 이익을 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덕분에 코스피는 훨훨 날고 코스닥은 침체에 빠져 서로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날 정도다. 삼전닉스는 한국경제에 엄청난 활력을 가져왔지만, 한편으로는 중소·벤처기업의 실적 부진과 경기침체를 감추는 가림막 구실을 해왔다. 경제의 다양한 분야가 고루 성장하는 것은 국가 경제의 건전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특정 산업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경제 안보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산유국들이 잘 보여준다. 세계적 석유 공급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수출의 약 90%, 정부 재정 수입의 75% 이상, GDP의 약 40%를 에너지에서 얻고 있다. 국제 유가 변동에 국가 경제가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취약한 구조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네옴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 등이 포함된 '비전 2030'을 추진하는 것도 관광·금융·IT·첨단제조업 등 비석유 부문의 비중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 최대 수준의 액화천연가스(LNG) 공급국인 카타르도 원유·천연가스가 전체 GDP의 약 27%, 총수출액의 약 86%, 정부 재정 수입의 약 80%를 차지한다. 극단적인 에너지 의존의 카타르는 수출 항로가 지나는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1991년 옛 소련이 무너진 뒤 원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 산업에 크게 의존해왔다.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국제 제재를 받기 전까지 에너지 부문은 연방정부 국가재정의 절반 정도를 충당했으며, GDP의 최대 24%를 차지했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한 비중은 60%를 넘었다. 에너지라는 단일 분야에 대한 지나친 의존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이뤄진 국제 제재의 충격파 증폭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식량·에너지·생필품을 자급하지만, 석유 금수로 인한 외화 확보의 어려움으로 전쟁 수행 능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는 평가다.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면서도 국가와 국민은 가난한 남미의 베네수엘라도 일부 산업에 대한 극단적인 의존의 대표 사례다. 베네수엘라는 수출의 90%, 국가 재정의 절반 이상을 석유에 의존하는 '극단적인 석유 의존 경제'를 보여준다. 석유에 투자와 자원, 인력이 몰리면서 농업이나 제조업 등 다른 산업은 서서히 몰락해갔다. 경기 사이클에 따라 유가가 하락하면 국가 경제가 파탄 날 우려가 있는 취약한 구조다.그런데도 1999년 집권한 우고 차베스 정권은 석유경제에 취했다. 막대한 오일달러를 '차비시모(차베스주의)'로 불리는 무상 의료·교육과 보조금 등 포퓰리즘 정책에 투입했다. 포퓰리즘으로 탄탄한 지지층이 형성되자 차베스는 반대파를 국가의 적으로 돌리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사법부와 언론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고, 법과 제도를 뜯어고쳐 임기를 계속 연장했다. 그러다 2010년대 중반부터 국제유가가 떨어지면서 오일머니 수입이 크게 줄었다. 그런데도 2013년 차베스를 이어받은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정권은 정치적 이유에서 무상복지나 국가재정 씀씀이를 줄일 수 없었다. 대신 화폐 발행을 늘렸다. 이는 2018년 170만%에 이르는 초인플레이션을 불러 사실상의 국가경제 파탄으로 이어졌다. 최근 강진이 강타한 베네수엘라의 구조작업과 사태 수습이 원만하지 않았던 이유의 하나로 꼽힌다. 반면에 모범 사례도 있다. 아랍에미리트(UAE)는 세계적인 산유국이지만 경제에서 석유·에너지 의존도를 전략적으로 줄이면서 금융·무역·금융·부동산·건설업 등으로 산업을 다각화해왔다. 그 결과 UAE 연방경쟁통계청(FCSC) 데이터에 따르면 2025년 전체 GDP에서 비석유 부문이 차지하는 비율이 약 78%를 차지하고 있다. 산업별 비율을 살펴보면 도소매·무역(16.9%), 금융·보험(13.2%), 건설(12.9%), 제조업(12.8%)이 국가 경제를 이끌고 있다. 수도 아부다비의 해안에는 걸프 산유국에서 보기 힘든 거대 수리 조선소와 제철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인근 사디야트 섬에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최초 해외 분관인 '아부다비 루브르'가 들어서 중동의 관광·문화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UAE는 한국과 원전은 물론 SMR·반도체·배터리·방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바란다.노르웨이는 GDP의 약 50%와 총수출액의 70% 이상을 석유·천연가스 산업에 의존하는 자원 부국이다. 하지만 에너지 수출로 얻는 수익을 당장 재정에 활용하지 않고 '글로벌연금기금(국부펀드)'에 투입해 전 세계 주요 산업에 투자하고 있다. 미래 세대를 위해 전액 저축하는 셈이다. 경기변동 등으로 유가가 변해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는 구조다. 한국에서도 즐기는 고등어와 연어를 잡는 어업과 임업·제지산업·조선업·해운업·금속산업·화학산업·관광업 등 전통 경제활동이 여전히 활발하다. 게다가 노르웨이는 석유·천연가스는 대부분 수출하고 국내 전력의 약 98%를 수력 발전에서 얻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알루미늄 제련 등 에너지 집약적 산업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석유로 얻은 횡재가 아니라 국민이 다양한 산업에 종사하면서 알뜰하게 벌어들인 돈으로 나라를 유지하는 노르웨이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참고해야 한다. 경기변동의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지속이 가능한 경제 모델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경제는이번 투자에서 반도체·AI 비중이 높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여전히 다양성이 넘친다. 다만 최근 들어 우려되는 점은 삼전닉스가 포함된 코스피는 활기를 띠지만 중기·벤처 중심의 코스닥에는 상대적으로 그늘이 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래를 위한 반도체·AI 투자도 좋지만, 산업 간 격차에 따른 박탈감을 줄여줄 중기·벤처 산업 육성책도 절실하다. 그게 경제 민주화이고 산업 간 균형발전일 것이다.
[시대광장/김준술]누가 빌런을 만들어 내는가
불편한 얘기부터 꺼내려 한다. 나는 1980년대 초중반에 중고교를 다녔다. 체벌하면 으레 '대걸레 자루'부터 떠오른다. 성적 부진, 흡연, 싸움까지. 학생들은 여러 이유로 자루가 부러질 때까지 엉덩이를 맞았다. 어떤 선생님은 '쇠줄 시계'부터 풀었다. 뺨을 내려칠 때 상처를 남기지 않으려고. 그것이 훈육 효과를 발휘했는지는 모른다. 지금 돌이켜 보면 폭력과 다름없었다.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은 공개하자마자 봤다. 나는 폭력 옹호자가 아니다. 처음엔 불편했던 체벌 기억이 겹쳤다. 그것도 잠시였다. 장면마다 '맞아도 싸다'는 통쾌함이 솟구쳤다. 드라마 속 '빌런(악인)'들은 과거와 차원이 달랐다. 학내 죽음과 마약 유통 같은 극악한 범죄 행위의 가해자였고 '공분 유발자' 그 자체였다.비슷한 시선은 나 말고도 많았다. 삽시간에 '교권 확립' 구호가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잠겨있던 교실의 병폐도 낱낱이 떠올랐다. 지난주 서울 용산의 기자회견장은 그 압축판 같았다. 11개 교원, 학부모, 교육 단체들이 모여 토로를 쏟아냈다. 한 참석자는 "5년간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교사가 125명"이라며 "교권 5법도 만들었지만, 위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호소했다. 교실 갈등을 법과 소송으로 해결하려는 '학교의 사법화'가 교권 위축을 부추긴다는 구조적 진단에는 나도 공감했다.정책 당국은 아직 중구난방이다. 충남교육청에선 교육감 직속의 '교권 보호관'을 7월에 출범시킨다는 소식이 들린다. 반면 최교진 교육부 장관은 22일 학부모들을 만난 자리에서 "응징과 대립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누군들 당장 똑 부러지는 묘안을 내놓긴 쉽지 않은 듯하다.나는 교권보호국 논쟁을 넘어 다른 제안을 하고 싶다. 교실 밖의 '빌런'들로 시야를 확장해보자. 선을 넘는 자들은 수두룩하다. '민원 공무원이나 경찰을 폭행하기, 버스 기사에 흉기 휘두르기, 아파트 경비원 괴롭히기, 응급실 간호사에 폭언하기.' 이제는 낯선 뉴스가 아니다. 모두 타인의 권리와 권한을 우습게 여기고 짓밟는 행위다. 이것이 살인이나 흉악 범죄로 이어질 때도 많다. 최근 대통령까지 공개 질타한 '광주 소방서 사건'도 마찬가지다. 술자리를 강요하는 갑질로 여성 소방공무원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고 간 상사와 조직은 드라마 참교육의 빌런과 다를 바 없다. 애들은 어른들을 따라 하고 배운다. 교권이 해체되는 현실도 이런 사회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교육학 개념을 빌리자면 '비(非)인지 능력'의 결핍 때문은 아닐까 질문을 던져본다. 인지 능력은 외우고, 공부하는 힘이다. 반면 비인지 능력은 '공감, 자기조절, 소통'을 말한다. 그래서 '마음의 힘'이라고도 한다.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는 이걸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학교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일터도 그렇다. 빈곤한 시절을 산업화로 극복하는 동안 '경쟁 중심, 개인 중심, 성과 중심'의 생존 방식이 굳어졌기 때문이다.마음의 힘을 스스로 깨치면 좋지만 그게 어렵다. 인간의 뇌에 아직도 수렵 시절의 폭력성과 자기중심적 유전자가 남아 있어 '빌런 본능'을 자극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지레 체념할 필요는 없다. 독일 사회학자 노버트 엘리아스의 '문명화 과정' 성찰은 솔깃한 시사점을 던진다. 예컨대 중세 기사들은 명예∙헌신보다 약탈∙살인을 일삼는 무뢰한이었다. 하지만 근대 궁정사회에 예법과 공동체 규율이 도입되면서 기사들까지 확산했고, 이들은 스스로 절제하고 공존하는 방법을 익혔다. 폭력적 본능을 누르는 것은 외부의 강제가 아니라 '내면 통제'의 결과물이라는 취지다. 진화심리학계 거장인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교수도 이에 동조하면서 '타인에 대한 감정 이입과 자기 통제가 폭력성과 가학성을 낮춘다'고 했다.굳이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집단 괴롭힘 같은 문제가 심각했던 일본의 교육 현장도 최근 '비인지 능력'에 더욱 주목하고 있다. 일본정부관광국 웹사이트에는 흥미로운 인터뷰가 올라와 있다. 자국 교육을 홍보하는데 주제가 특이하게도 '교실 청소'다. 인터뷰에서 아베 교코 테이쿄대학 교육학부 교수는 "단순히 청소를 잘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다. 일의 의미를 가르치고, 사회 구성원으로 역할을 다하는 의미를 깨닫게 해준다"고 했다. 청소로 공존의식을 심어준다는 얘기다. 일본을 방문한 이집트 대통령이 청소 교육법을 수입해갔다고도 한다.누군가는 이런 처방이 개인주의와 다양성을 억압하는 '또 다른 폭력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이에 재반론을 하자면 '자유와 무질서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교실에서, 그것도 어릴 때부터 공존감과 자기 통제법을 더 가르치고 익히게 하자. 이것이 사회로 확산할 때 비로소 교실 안 빌런도, 교실 밖 빌런도 자취를 감춘다.
[시대광장/이상언]대리투표가 합법인 나라를 아십니까?
2012년 봄 런던 세인트판크라스 기차역에서 대학 선배와 조우했다. 나는 파리행 유로스타를 타려고 갔고, 프랑스에서 유학하다 정착해 사업가가 된 그는 일 때문에 영국에 왔다고 했다. 다음 날 치러질 프랑스 대통령 선거 취재 출장 길에 오른 나는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사회당 열성 지지자가 투표 안 하면 어떡해요?" 그러자 그는 "투표는 동네 친구한테 부탁했어"라고 답했다. 내 표정에서 '이해 안 됨'을 알아차린 그가 "대리투표 제도라는 게 있어. 가족이나 이웃에게 위임장만 써 주면 돼"라고 설명했다.'내 표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게 민주사회에서 가능한 일인가? 서구 민주주의의 한 축인 프랑스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이 솟구쳤다. 나는 "부탁 받은 친구가 올랑드(사회당 대선 후보) 말고 다른 데 찍을 수도 있잖아요?"라고 물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그러니까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지. 배신해도 알 수는 없지만"이라고 대답했다.작은 충격이었다. 유럽 특파원으로 프랑스에서도 2년 동안 산 적이 있는데 대리투표(위임투표) 제도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한국에서 자라면서 선거의 4대 원칙(보통·평등·직접·비밀)을 외우고 또 외웠다. 대리투표는 언감생심, 해서도 안 되고 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런데 멀쩡한 나라에서 버젓이 시행되고 있었다. 다음 날 프랑스 투표소 앞에서 달랑 종이 한 장짜리 투표 위임장을 들고 온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출장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와 알아보니 영국에서도 프랑스와 비슷한 대리투표제가 운영되고 있었다. 유럽에선 특이한 것도 아니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에도 있었다.프랑스 대리투표제는 약 100년의 역사를 지녔다. 출장·여행·입원 등으로 투표 날에 동네 투표소에 갈 수 없는 유권자를 위한 것이다. 과거에는 한 사람이 두 명까지 대리할 수 있었으나 2022년부터 한 사람(해외 체류자 대리 경우는 두 명까지)으로 제한됐다. 투표구가 다른 인척이나 친구에게도 위임할 수 있는데, 투표는 대리를 맡긴 사람의 지역으로 가서 해야 한다.대리투표제 도입을 주장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투표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에 지금의 한국인들이 동의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당장 매수 위험, 권력 관계에 따른 부정 가능성이 제기될 수 있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에서 요양원 거주자 집단 위임, 가족 간 억지 위탁 등의 문제가 있었다. 처벌 강화 등의 대응책이 나왔지만 일탈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리투표제를 소개하는 이유는 선거일에 투표하기 어려운 유권자를 위한 제도가 오로지 사전투표만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다.6·3 지방선거 진상규명위원장(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임명)을 맡았던 조현욱 변호사에게 21일 연락했다. 그는 앞서 19일 열린 진상조사 결과 발표 회견에서 사전투표 제도 유지 여부를 판단할 "공론화"를 언급했다. 그는 통화에서 "국민의 불신이 너무 커서 토론의 장을 열어 결정하는 게 필요하다는 취지였다"고 설명했다. 조 변호사는 "사전투표 투표지 보관과 이송 등의 과정은 엄정히 잘 이뤄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부정선거 의혹이 쌓여가고 그 중심에 사전투표가 있어 존치 여부를 숙고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조 변호사는 몹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사전투표 신뢰 회복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내친김에 고위 법관 출신의 현직 중앙선관위원에게도 사전투표 존속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솔직히 말해 사전투표 관리에 선관위의 힘이 부치는 것은 사실이다. 과부담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불신 때문에 사전투표에 더욱 신경을 쓰다보니 본투표에서도 실수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익명을 부탁했다.한국은 2012년에 사전투표제를 도입했다. 지금의 여권인 민주통합당에서 주도했다. 한국의 뛰어난 행정(전산) 능력 덕에 통합선거인명부가 만들어졌다. 그 결과로 직장이나 학교 근처에서 투표할 수 있게 됐다. 투표율이 올랐다. 그러나 5일 동안의 투표함 관리, 우편 발송, 별도 개표 등의 복잡한 과정이 수반됐다. 실수, 의혹, 음모론이 꼬리를 물고 재생산됐다. 사전투표와 본투표 사이의 후보자 사퇴로 '사표'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특별한 사정이 없는데도 투표를 미리 하고 선거일은 보통 휴일처럼 보내는 문화가 퍼졌다.사전투표제 안착의 핵심 조건은 사회 신뢰 자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공동체의 국가 시스템에 대한 믿음은 높지 않다. 한국 국가데이터처가 지난해 말 발표한 사회조사 결과에서 "우리 사회를 신뢰한다"고 대답한 비율은 54.6%에 그쳤다. 반면 한국인의 정치적 민감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런 현실을 바탕에 깔고 사전투표의 효용성과 역효과를 진지하게 따져 보자. 우편투표(독일에서 활성화), 투표 시간 연장 등의 대안도 있다. 최근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52.7%의 응답자가 사전투표 폐지에 찬성(44.2% 반대)했다. 언제나 옳은 제도는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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