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솔로 유니콘 시대의 개막
글로벌 창업 생태계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수백 명의 엘리트가 밤새워 만들어냈던 유니콘(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비상장사)을 이젠 극소수(10인 이하)의 창업자와 직원들만으로 달성하고 있다. 바야흐로 '솔로 유니콘(Solo Unicorn) 시대'의 개막이다. 실리콘밸리 데이터에 따르면 2021년 단 2개에 불과했던 솔로 유니콘이 2025년엔 52개로 연평균 126%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이러한 변화의 핵심 동력은 '에이전트 AI' 기반의 생산성 혁명이다. 과거 수천 명이 감당하던 코딩, 마케팅, 고객 응대를 AI 시스템으로 대체하면서 1인당 생산성이 50~100배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제 기업 가치는 인력 규모가 아니라 보유한 AI 에이전트의 지능과 실행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시장의 지배적 의견이다.어떤 분야가 활발한가. 고부가가치 지식서비스, 미디어, 이커머스, 바이오테크의 순으로 활발하다. 고부가가치 지식서비스에선 특히 법무, 회계, 세무 분야가 대표적이다. 예컨대 이전엔 하나의 소송을 위해 수주간 변호사 50명이 수만 장의 증거 자료를 분석했다면, 지금은 한 명의 창업자가 운영하는 에이전트 AI 하나로 초당 10만 장 문서를 분석하고, 승소확률 계산 및 계약서 독소 조항 적발 정확도도 90% 이상이라고 한다. 인건비·운영비를 70~80% 줄인 만큼, '솔로 유니콘 등극'이 가능해졌단 얘기다. 대표 기업으론 하비(Harvey)와 아이언클래드(Ironclad)를 꼽는다.미디어 산업에선 피카(Pika) Labs나 헤이젠(HeyGen) 같이 소수 정예로 시작해 영상 제작의 문법을 바꾼 기업들이 선두 주자다. 이들은 기획부터 촬영, 다국어 더빙과 실시간 로컬라이징까지 에이전트 AI를 활용해서, 맞춤형 콘텐츠를 전 세계에 송출하는 '1인 글로벌 스튜디오' 모델을 정착시켰다.이커머스와 바이오테크 분야도 빼놓을 수 없다. 미드저니(Midjourney)는 AI로 디자인과 마케팅을 최적화시켜, 40여 명의 직원으로 기업 가치를 13조 원으로 끌어올렸다. 인실리코 메디슨(Insilico Medicine)도 단백질 구조와 신약물질 분석과정을 AI로 자동화, 5~6년 걸리던 제약사의 임상 전 단계를 18개월 만에 돌파, 유니콘 지위(4~5조 원)를 확보했다.이들의 공통적인 성공 요인은 뭔가. 한마디로 초저비용, 빠른 의사결정, 틈새시장 확보라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클라우드와 AI 구독 서비스로 인프라를 구축해서 고정비를 최소화했고, 창업자 중심의 의사결정 체계로 시장 변화에 대한 실시간 대응, AI활용으로 대기업 침투가 어려운 니치 마켓 장악 등이 그것이다.어떤 효과가 있을까. 솔로 유니콘의 증가는 고용 지표엔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창업 생태계의 선순환 측면에선 대단히 긍정적이다. 막대한 투자자금이 필요 없는 만큼, 벤처캐피털들이 더 많은 벤처 기업에 분산 투자할 수 있고, 이는 연쇄 창업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솔로 유니콘의 고부가가치 서비스는 전통 제조업·서비스업의 운영 비용을 절감시켜,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대폭 끌어올릴 수 있는 강력한 동인이 될 수 있다.우리나라는 고령화·저성장 위험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벤처 창업과 신산업 육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런 국면에서 솔로 유니콘 육성은 경제·산업 활성화는 물론 AI 산업과의 시너지효과도 확실히 낼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단 생각이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⑩] 침묵할 때와 나서야 할 때-'광장'의 쇼랑과 '자기만의 방'의 파스칼
봄은 나서는 자들의 계절이었다. 광장에, 거리에 목소리가 모였다. 그런데 요즘의 봄은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같은 장면이 동시에 '화면'에서도 펼쳐진다. 겨우내 안으로 파고들었던 확신은 알고리즘 위로 떠오르고, 소수가 공유하던 독설은 네트워크를 통해 증폭된다. 빠르게 복제되고, 오래 노출된다.다만 침묵은 검색되지 않는다.새로운 무대가 열리면 어김없이 웅변이 그 자리를 채운다. 확신에 찬 목소리, 상대를 베어 넘기는 날 선 문장들. 사람들은 화려한 말의 잔치에 환호한다. 그러나 조명이 꺼지고 난 뒤, 남는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 말이 거칠고 화려할수록 우리는 종종 그 안의 빈자리를 늦게 알아차린다. 소란스러운 언어는 때로 자신의 불안을 덮기 위한 소음처럼 들리기도 한다.무대 아래에는 시선을 낮추고 말을 아끼는 이들이 있다. 세상은 그들을 내성적이거나 소극적이라 부르지만, 어쩌면 말의 무게를 더 오래 견디는 쪽은 그들일지도 모른다.■ 웅변가의 독설, 그 가벼운 유혹살면서 마주한 웅변가들은 대개 매혹적이었다. 명쾌했고 뜨거웠다. 그러나 무대가 끝나고 조명이 꺼진 뒤, 그들과 마주 앉아 보면 묘한 공허가 느껴지곤 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구원할 듯 외치던 문장들은 사라지고, 타인의 인정에 목마른 초조함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독설은 때로 가장 쉬운 방식의 배설이 된다. 상대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가장 손쉬운 방식의 권력 행사다.에밀 쇼랑(Emil Cioran)은 '태어났다는 불행'에서 확신과 웅변의 허위를 여러 차례 지적한다. 그는 인간이 확신에 매달릴수록 스스로를 더 깊이 속이게 된다고 말한다.웅변은 진리를 드러내기보다, 때로 자기기만을 세련되게 포장하는 기술에 가깝다. 나서는 자들의 언어는 타인을 향한 칼날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자기 안의 불안을 향해 휘두르는 비명일지도 모른다.미디어는 질문보다 확신을 좋아한다. 망설임은 편집되고, 단정은 제목이 된다. 그 구조 속에서 웅변은 더욱 힘을 얻는다.■ 수줍은 외면, 그 깊은 응시소란 속에서 고개를 숙인 이들이 있다. 그들은 말할 줄 몰라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복잡함을 알기에 신중할 뿐이다.그들의 수줍음은 나약함이라기보다, 상황의 무게를 감각하는 예민함에 가깝다.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팡세'에 이렇게 적었다."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사실, 즉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나서는 자들이 소음으로 자신을 채울 때, 침묵하는 자들은 고독 속에서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들의 외면은 비겁함이 아니라, 거짓된 무대에 쉽게 동조하지 않겠다는 거리두기일 수도 있다.물론 침묵이 언제나 고결한 것은 아니다. 침묵 역시 계산이 되는 순간 다른 얼굴을 갖는다. 말하지 않음이 신중함이 아니라 편의가 될 때도 있고, 책임을 미루는 방식이 될 때도 있다.■ 말의 배반과 침묵의 복권우리는 오랫동안 웅변을 지성으로, 침묵을 무지로 오해해왔다. 그러나 인문학은 종종 그 반대를 말한다.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를 불편한 질문을 제거하고 세계를 단순한 감동과 확신으로 포장해 버리는 태도라 정의한다.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대답의 세계. 그곳에서 확신은 미덕이 되고, 망설임은 나약함이 된다. 웅변이 지배하는 곳에서 진실은 종종 소음 뒤로 물러난다. 매끈하게 가공된 문장만이 떠다닌다.독설이 현란한 이유는 알맹이가 비어 있어서다. 반대로 침묵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안에 너무 많은 생각이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요한 응시에서 찾은 힘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계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수줍음이 아니라 말의 과잉이다. 웅변하는 혀는 쉽게 단정하지만, 망설이는 눈동자는 쉽게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지금 우리는 어떤 말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가. 큰 목소리인가, 아니면 조용히 생각하는 사람의 눈빛인가.우리가 오늘 내뱉은 확신 속에 정말 생각이 충분히 머물러 있었는지 묻게 된다.어쩌면 곁에서 조용히 시선을 피하던 누군가는 더 오래 고민하고 있었을 거다.큰 목소리는 늘 먼저 도착한다. 그러나 오래 남는 것은 대개 늦게 도착한 생각이었다.그래서 책을 읽는다.이미 오래전 침묵 속에서 사유를 다듬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소음이 아니라 생각을 따라가기 위해.만사유책(萬事有冊).읽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① 대단한 지능을 만났는데, 왜 우리는 더 고단한가?
HFK, 트레바리, 최인아책방, 리댁션. 최근 내가 방문한 모임들이다. 누군가에게는 낯설겠지만, 배움에 목마른 직장인들이 모여드는 뜨거운 현장이다. 대학 강단보다 더 역동적인 에너지를 기대하며 그들과 AI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 현장에서 비명에 가까운 질문을 받았다. "AI로 성과는 나는데 왜 허탈할까요?", "일은 빨라졌는데 숨 돌릴 틈 없이 다음 작업이 밀려와요.", "결국 내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새로운 기회에 관한 기대보다 거대한 변화의 파도에 휩쓸려 자신이 마모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우울이 짙게 배어 있었다.기업의 AI 교육 현장으로 가면 이 간극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경영진은 이런 요구를 던진다. "비전공자가 AI로 대박 성과를 낸 사례로 직원들에게 충격을 주세요.", "혼자서 팀 단위 성과를 낸 사례를 소개해 압박감을 주십시오." 이런 요구의 이면에는 직원들이 절박함이 없어 안 움직인다는 불신이 깔려 있다.반면, 강의장에 앉은 직원들의 눈동자는 흔들린다. 그들은 이미 AI라는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나침반이 없다. 자신의 전문성이 지워지고 있다는 상실감, 조직의 성과가 개인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소외감, 그리고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홀로 생존을 감당해야 한다는 막막함에 짓눌린 모습이다. 사측은 몰아붙이고, 직원은 표류하는 형국이다.대단한 지능이 등장했는데, 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가? 우리가 여전히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사측은 AI 전환을 외치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갈지에 대한 비전은 모호하다. 리더들은 자본과 노동력을 대량으로 투입해 성과를 뽑아내던 자본 레버리지 시대의 종말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이제는 AI라는 두 번째 지능이 개인과 산업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대다. 리더가 먼저 이 본질을 이해하고 비전을 재설계하지 않는 한, AI 도입은 조직의 피로도만 높이는 재앙이 될 뿐이다.직원들 역시 직시해야 할 사실이 있다. 이런 혼란의 원인은 리더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가 통제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회사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AI가 못하는 일을 찾으며 조직 내에서 도망 다니는 회피자, 지시를 기다리는 이행자의 정체성으로는 이 파도를 넘을 수 없다.해결책은 공존에 있다. 노사가 대립해 한쪽을 굴복시켜서 풀리는 사안이 아니다. 조직은 산업화 시대의 사고에서 벗어나 구성원과 고통을 분담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개인은 이제껏 학교와 직장에서 배운 친숙한, 그러나 이미 낡아버린 인지 시스템을 과감히 재구성해야 한다. AI라는 두 번째 지능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기 업의 역할과 책임, 흔히 기업에서 R&R이라고 부르는 것을 근본부터 재정의해야 한다.올해 초 출간한 저서에서 나는 이렇게 강조했다.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인간의 판단을 보조하고 확장하는 새로운 인지 능력이라고. 우리가 이 대단한 지능을 곁에 두고도 힘든 이유는, 두 번째 지능의 본질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화려한 기술과 눈앞의 프롬프트에만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도구에만 매몰될 때, 우리의 타고난 뇌인 첫 번째 지능은 오히려 퇴화하고 만다.두 번째 지능을 키우는 법은 단순히 코딩을 배우거나 생성형 AI 사용법을 익히는 데 있지 않다. AI를 외부에 존재하는 도구가 아니라 확장된 메타인지 시스템으로 수용해야 한다. AI가 내놓는 결과물에 감탄하거나 압도당하기보다, 그것을 내 생각의 재료로 삼아 더 높은 차원의 판단을 내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가끔 돌아보기 바란다. 두 번째 지능을 받아들인 후, 당신이 더 깊게 성찰하고 있는지, 당신의 인간적 사고가 더 날카롭게 벼려졌는지, 우리 조직의 사고가 더 촘촘하게 연결되고 확장되고 있는지를 말이다.그리고 실험자의 길을 가기 바란다. 정해진 절차를 효율적으로 따르는 모범생이 산업화 시대의 인재상이었다면, 두 번째 지능 시대는 자신의 가설을 세우고 AI와 협업하여 끊임없이 시도하는 실험가를 원한다. 완벽한 결과물을 기다리지 말고, 부족한 결과물을 AI와 함께 다듬어가는 과정 자체가 곧 지능을 키우는 과정이다.나는 우리가 고단함을 넘어서, 큰 도약을 하리라 믿는다. 이제 그 길의 초입에 들어섰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와 함께 그 여정을 시작해 보자.
[임희윤의 시대&뮤직]① BTS 컴백과 한류, 이젠 그 너머를 볼 때다
이달 21일 서울에서 열릴 방탄소년단의 컴백 쇼가 벌써부터 화제다. 특설무대가 설치되는 광화문 일대에 약 26만 명이 몰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 시간짜리 공연의 연출자는 영국인 해미시 해밀턴 감독. 매년 지상 최대의 쇼로 꼽히는 미국 '슈퍼볼 하프타임 쇼'를 지휘한 인물이다. 이 메가톤급 컴백 쇼는 넷플릭스를 통해 190개국에 생중계된다고 한다. 한국을 방문한 해외 관광객들 중 상당수는 경복궁, 덕수궁, 숭례문이 현대적 빌딩과 어우러진 이율배반적 스카이라인에 매혹된다고 한다. 심장을 울리는 방탄소년단의 비트, 랩, 노래…. 이것이 강렬한 퍼포먼스와 무대 연출을 만나며, 더욱이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서울의 랜드마크에서 펼쳐지리라는 데서 이번 쇼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서울 관광에 대한 잠재적 홍보 효과가 막대하리라는 예측도 나온다. 안전이나 시민 불편 문제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공연은 한 시간짜리이지만 종일 교통 통제가 불가피해 보인다. 통제가 촉발할 토요일 저녁 서울 한복판의 혼잡, 안전관리에 투입될 사회적·경제적 비용은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일 수 있다. 공연 시작 전후 흥분한 인파가 한번에 쏠릴 때의 위험성도 제기된다. 만에 하나 현장 관리에 실패한다면 이런 의문도 나올 수 있다. 방탄소년단이 국위선양의 아이콘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사기업이 진행하는 앨범 발매 기념 행사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리스크를 '우리 모두'가 떠안는 게 맞냐는 이야기다. 이는 사회적 비용을 감당할 만큼 이 행사가 충분한 '공공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시청권 이야기도 불거질 수 있다. 방탄소년단 컴백 쇼는 넷플릭스가 독점으로 중계하는 행사다. 넷플릭스와 하이브는, 190개국 3억 명이 가입된 네트워크에 뿌려지므로 서울 홍보 효과가 충분하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넷플릭스 가입자 중 절대다수가 이 콘텐츠를 선택해 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도심 혼잡과 안전 리스크는 대한민국이 오롯이 지불할 사회적 비용이지만 정작 그 주체인 국민 중 다수는 이 국가적 쇼를 지켜볼 수 없다. 넷플릭스 가입자만 즐길 수 있다. 넷플릭스의 국내 월간 이용자 수가 1000만 명을 상회한다는 통계도 있지만 우리 인구의 약 20% 수준이다. 최근 막 내린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의 경우, 독점 중계를 한 JTBC가 95%의 가시청 가구를 확보함에도 '보편적 시청권' 논란이 인 바 있다. 올림픽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진정한 스포츠 강국은 메달의 색이나 수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소수 엘리트의 성과보다 전 국민이 일상에서 향유하는 건강한 '생활 스포츠'의 수준이 높아야 진짜 체육 강국이다. '태릉 스포츠'가 일각에서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받는 건 그 때문이다. 문화도 비슷하다. 문화의 요체는 이기는 것, 셈 세는 것, 버는 것 따위에 있지 않다. 문화의 본질은 꽃피우는 것, 편안한 것, 다양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더불어 함께 즐기는 것에 있다. 한 나라의 문화는 우상향 그래프로 '그려지는' 게 아니다. 다채로운 색으로 '칠해가는' 것이다. 어쩌면 '대한민국->BTS->국위선양->BTS->세계인의 관심과 막대한 홍보 효과'라는 흐름도는 자칫 '도식화된 환상'에 머물 수도 있다. 설사 '국가 홍보를 위한 모든 일=절대 선(善)'이란 명제가 참이라 가정한다 해도 할 일은 남는다. 차제에 이런 행사를 둘러싼 여러 요소에 대한 치밀한 과학적 접근과 논리적 연구가 수반됐으면 한다. '190개국의 3억 명이 시청할 수 있었다'든지 'BTS 앨범이 몇백만 장 팔려 또 자랑스러운 빌보드 정상에 올랐다' 등의 숫자와 보도자료 이면에 있는 것. 그 인과와 득실 관계를 여러 관점에서 한 번쯤 따져봐야 한다. '세계적'이란 수식어, '세계인 열광…'의 정신 승리만으로 배부르던 '문화적 곤궁기'는 진작에 지나왔다. 진정한 문화 강국, 사회 강국으로 가려면 이제 그 너머를 봐야 한다. 부디 이번 'BTS 2026 컴백쇼 서울'이 안전사고 하나 없이 시민 불편이 최소화된 상태로 성황리에 잘 마무리되길 기원한다. 한국의 성숙한 시민 의식, 뛰어난 인파 관리 능력이 쇼의 화려함 못잖게 세계인의 주목을 받길 바란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⑨]달팽이의 보폭으로 2월을 복구하다-고바야시 잇사의 달팽이와 니체의 망치
새해의 결심이 유효기간을 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한 달이다. 2월의 찬 공기 속에는 1월의 호기로움이 남긴 미세한 민망함들이 떠다닌다. 헬스장 바닥에 떨어진 땀방울보다, 책상 머리맡에 적어둔 계획표의 여백이 더 무겁다.사람들은 이 시기를 '실패'라고 명명하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2월은 실패의 달이 아니라, 비로소 내 몸에 맞는 보폭을 찾아가는 '교정'의 시간이다. 1월의 계획이 남의 눈을 의식한 전시용이었다면, 2월의 재구성은 내 영혼의 안녕을 묻는 실존적 복구이어야 한다.■ 숫자가 지배하던 2월의 회의실임원 혹은 CEO 시절의 2월은 늘 서늘했다. 입춘이 지나도 봄은 오지 않았다.초라한 1월의 성적표를 들고, 연간 계획을 '현실화'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숫자를 만졌다. 그곳에서 계획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달성해야 할 고지였고, 수정은 곧 무능의 자백이었다. "올해 목표를 재구성해라"는 지시는 "더 쥐어짜라"는 말의 우아한 통역어였다. 우리는 그럴듯한 그래프를 그려내야 했다. 하지만 그 계획 안에 정작 '나'라는 인간의 리듬이 들어설 자리가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숫자가 커질수록 개인의 호흡은 가빠졌고, 조직의 효율이 높아질수록 개인의 감수성은 말라갔다. 그때 우리가 세운 것은 계획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가둘 창살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이쿠가 건네는 서두르지 않는 위로조직을 떠나 내 책상 위에 느슨한 계획표를 펼쳤을 때, 에도 시대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하이쿠가 떠올랐다."달팽이여천천히 올라가거라후지산을."이 짧은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우리는 왜 스스로를 달팽이가 아니라 경주마로 착각하며 살았을까.1월의 계획이 우리를 다그친 이유는 우리가 오르는 산이 높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허락하는 속도를 잊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혹은 우리가 우리의 '점액'으로 땅을 딛는 법을 잊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달팽이에게 중요한 것은 산의 높이가 아니라 자기 몸의 리듬이다. 천천히 간다는 것은 멈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정해준 시계가 아니라, 내 근육과 신경이 허락하는 속도로 세상을 감각하며 나아가는 일이다.2월은, 바로 그 보폭을 다시 찾는 시간이다.■ 헤세의 나무와 니체의 망치우리는 계획이 무너졌을 때 왜 이토록 괴로워하는가.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철학자는 '망치로 우상을 두드려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망치는 파괴의 도구라기보다, 속이 빈 우상을 가려내기 위한 청진기 같은 진단의 도구였다.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가 1월에 세운 계획은 과거의 나를 벌주기 위해 만들어낸 도덕적 우상에 다름 없다.지금의 나를 부정하기 위해 세운 계획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헤르만 헤세는 '나무들'에서 나무를 이렇게 묘사한다.나무는 겨울 동안 바깥으로 자라지 않는다.대신 안으로 침잠하며 중심을 단단히 하고, 다가올 계절을 준비한다.2월의 시간도 그렇다. 계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해서 삶이 멈춘 것은 아니다. 겨울의 침잠은 정지가 아니라 준비다. 계획의 재구성은 포기가 아니라, 내 삶의 뿌리를 어디로 뻗어야 할지 다시 가늠하는 도약을 위한 내면의 침잠이다. ■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감수성이다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시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에서 이렇게 썼다."자신의 감수성 정도는스스로 지켜라이 바보 같은 놈아."2월의 계획표에 우리가 써넣어야 할 첫 문장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낄 것인가'이다. 2월의 끝자락, 나는 당신의 계획표가 다시 한 번 더럽혀지기를 바란다.빽빽한 할 일 목록 대신, 당신을 설레게 하는 문장 한 줄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란다.당신이 1월에 세웠던 계획 중에서 정말로 당신의 가슴을 뛰게 했던 것이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혹시 그 계획들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몸이 거부한 남의 옷은 아니었는가.서두르지 마라.후지산은 도망가지 않는다.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반짝이는 흔적처럼, 당신의 2월 또한 결과가 아닌 과정의 빛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⑧]취향은 배신하지 않는다 - 프루스트의 감각과 무너지지 않는 나만의 루틴
1월은 '의지의 과부하'가 걸리는 달이다. 세상은 온통 "결심하라"는 명령어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쓰듯 비장한 각오를 쥐어짜 낸다. 하지만 단언컨대, 머리로 세운 결심은 몸의 관성을 이기지 못한다. 결심이 무너지는 것은 당신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결심 자체가 원래 그렇게 설계된 연약한 유구(遺構)이기 때문이다.우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비장한 각오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취향이다. 습관이라고 해도 좋다. 1월에 우리가 세워야 할 것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나를 나답게 유지해 주는 사소하지만 단단한 '감각의 의식(Ritual)'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의지보다 강한 감각의 기억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주인공을 거대한 과거의 기억으로 데려간 것은 "과거를 기억해 내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연히 입안에 들어온 차 한 모금과 마들렌 한 조각의 촉각이었다.파스칼 메르시에(Pascal Mercier)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역시 비슷한 진실을 말한다. 평생을 고전문헌학자로 살던 그레고리우스가 안락한 삶을 버리고 리스본으로 떠난 것은 위대한 결단 때문이 아니었다. 비에 젖은 포르투갈 여인의 매혹적인 음성, 그리고 우연히 손에 든 낡은 책 한 권의 촉감. 그런 것들이 그의 일상을 뒤흔들었을 뿐이다.소설은 묻는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한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우리의 실제 생활도 마찬가지일거다. 작은 것이 감각을 만든다. 감각이 전체가 된다. "올해는 매일 운동하겠다"는 결심보다, 운동화를 신을 때 발끝에 닿는 단단한 감촉이나 새벽 공기의 서늘한 감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훨씬 강력한 힘이 된다. 의지는 배반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즐거움은 배반하지 않는다. 우리의 1월이 억지로 자신을 개조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어떤 감각에 반응할 때 가장 평온하고 단단해지는지 관찰하는 시간이어야 하는 이유다.■ '의식'을 설계하기어느 작가는 매일 아침 책상을 닦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거창한 집필 계획을 세우는 대신, 물걸레가 책상 위를 지나가는 그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쓰는 몸'을 깨우는 것이다. 결심이 아니라 의식(Ritual)이다. 의식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몸이 먼저 반응하게 만든다.1월의 다이어리에 적어야 할 것은 성취해야 할 숫자가 아니라, 내가 반복할 '동사'들이라면 좋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 한 잔을 마시는 감각", "잠들기 전 시집 한 권을 무작위로 펼치는 손맛". 이런 사소한 취향의 조각들이 모여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티게 하는 성벽이 된다. 목표라는 이름의 깃발은 바람에 쉽게 꺾이지만, 취향이라는 이름의 뿌리는 태풍 속에서도 흔들릴지언정 뽑히지 않는다.■ 취향이 곧 존재다취향은 사치스러운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유일한 영토다. 1월에 남들이 선망하는 목표를 내 계획표에 옮겨 적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영토를 침범 당한다.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진정한 시작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존재하던 선한 취향들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월의 '보폭'을 고민하기 전, 그리고 3월의 '침묵'으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1월의 한복판에서 나만의 '감각적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무너지지 않는 루틴은 의지가 아니라 당신의 취향에서 나오므로.■ 다시 당신의 1월에게 묻는다지금 당신의 계획표에 적힌 것들 중, 당신의 '몸'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혹시 '해야 한다'는 당위의 감옥에 갇혀, 당신만의 고유한 감각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결심이 무너졌다고 자책하기 전에,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나만의 사소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1월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달이 아니라, 자신을 가장 잘 대접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거창한 성공의 서사보다, 오늘 당신의 손끝에 닿는 책장의 감촉이나 커피 잔의 온기에 더 집중해 보자. 그 사소한 감각들이 모여 비로소 당신의 일 년이 완성될테니까.내게도 똑같은 주문을 건다. 세상이 강요하는 '성공의 문장'이 아니라, 내 영혼의 결에 맞는 '취향의 문장'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 문장들이 무너지지 않는 나의 새해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디지털 자산산업, 핀테크에 이어 제2의 금융 벤처로 급성장
최근 핀테크에 이어 금융 벤처의 하나로 급부상하고 있는 산업이 있다. 디지털 자산산업이 바로 그것. 우선 금융 벤처여서 그런지 성장 속도가 빠르다. 2021년 초 7800억달러였던 시장 규모(시가총액, 글로벌 기준)가 올해 초 3조3500억달러로 5년 만에 거의 5배다. 연간 성장률로는 33.8%, 특히 지난 3년간(2023~2025년)은 더 빨라서 연 59.1%의 급성장세다. 기업 수도 2021년 초 약 1만2000개에서 현재는 1만9000개에 육박한다. 특히 3~4년 전만 해도 금융·비금융의 중간 지대(Grey Zone)였지만, 유럽의 미카(MiCA, 2023년 6월) 법과 미국의 지니어스(GENIUS, 2025년 7월) 법이 제정되면서 금융 주변에서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단 의견이다. 왜 이렇게 급부상하게 됐나. 무엇보다 법·제도화 영향이다. 특히 자본시장의 대표상품인 ETF와 융합한 디지털 자산 현물 ETF(예 : 비트코인, 이더리움 현물 ETF)가 승인·발행되면서, 글로벌 기관투자가 포트폴리오(약 6경원)의 편입 대상이 됐다는 점이 큰 힘이 됐다. 2024년 1월 비트코인 현물 ETF로 시작한 디지털 자산 현물 ETF(순유입 기준)는 2026년 초 2년 만에 708억달러(100조원)로 증가했다. 특히 ETF는 기관 자금이어서 금융 신산업 성장의 안전판인 '기관화'에 한몫했단 평가다. 또 하나는 미국의 지니어스 법 등에 의한 스테이블코인 파급효과다. 스테이블코인이 코인 거래뿐만 아니라 결제·송금, 무역대금 지급 등 사실상 디지털 통화로 규정되면서, 디지털 자산의 기반인 블록체인이 금융의 새로운 인프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현재 3100억 달러(457조원), 지난 3년간 성장률 무려 연 51.3%의 급성장세. 특히 스테이블코인의 담보자산인 국채의 토큰화(약 90억달러)에 이어 주식, 채권, 실물자산(RWA) 등도 토큰화되면서, 제도권과 디지털 자산의 융합이 더욱 빨라질 거란 전망이다. 어떤 분야가 활발한가. 거래·중개, 스테이블코인 등 결제·송금, 블록체인 기술, 탈중앙 금융(DeFi) 서비스의 순으로 활발하다. 첫째로 이들 중 성장세가 가장 빠른 분야는 코인 거래·중개다. 거래· 상장 수수료, 기관 중개, 파생상품 수수료 등을 통해 실질적이면서 확실한 현금흐름을 창출하는 분야다. 디지털 자산산업 총매출의 60% 이상이라고 한다. 상장사인 코인베이스(2위)를 제외하고 비상장사인 1위 바이낸스, 3위 OKX, 4위 Bybit, 5위 업비트 모두 기업가치가 100억달러(14조원) 이상인 데카콘이다. 둘째,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결제·송금이다. 이 분야도 결제와 금융 중개 기능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한다. 대표기업은 테더와 써클. 테더는 USDT, 서클은 USDC 발행으로 확보한 담보 국채이자 및 결제 API 연계를 이용한 수익모델이다. 스테이블코인 결제·송금이 늘수록 매출이 확대되는 구조다. 현재 테더와 써클이 독점적이고, 테더는 기업가치 1000억 달러 이상인 헥타콘, 써클은 데카콘이다. 다음은 블록체인 기술이다. 과거엔 초당 7~10건 처리했지만, 지금은 초당 약 5000건 처리로 속도가 500~700배나 빨라졌다. 수수료도 건당 수 달러에서 0.01달러로 크게 하락했다. 따라서 블록체인의 위변조 방지 기능에다, 가성비까지 대폭 개선됐기 때문에 기존 금융 인프라를 상당 부분 대체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솔라나와 폴리곤이 대표적이다. 이외에 유니스왑, 아베가 대표하는 탈중앙 금융 서비스도 있다. 블록체인상에서 대출, 예치, 스왑 기반 이자 수익과 프로토콜 수수료가 수익모델이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거래·중개는 글로벌 톱 수준일 정도로 활발하지만, 다른 분야는 법·제도화 지연 등으로 활성화되지 못한 상태다. 최근 토큰 증권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만큼, 디지털 자산 기본법 및 스테이블코인 입법화도 글로벌 추세에 맞게 빠르게 진행되길 기대해 본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⑦]'천재와 거장'과 '블랙 스완' 그리고 리더십이 필요한 순간
또 한 해를 보낸다. 칼날 위를 걸었다. 그 위태로운 날들을 버티고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특하다는 생각이다. 반성은 하겠지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한다.개인은 그렇다 치자. 조직은 어떨까.연말은 늘 변화를 강요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든, 더 멀리 가기 위해서든 "뭔가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계절이다. 많은 조직이 선택하는 가장 빠른 길은 새 리더를 들이는 일이다.하지만 그 길은, 대부분 기대를 비켜간다. 이번만은 다를까.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조직의 구원자 찾기위기 앞에서 조직은 영웅을 찾는다. 혁신을 외치며, 변화의 깃발을 흔들어줄 단 한 사람. 기업이든 협회든 정당이든, 사람만 모이면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2017년 겨울, 20여 년 동안 가을 야구조차 멀었던 LG 트윈스도 그랬다. 팬들은 '거물 루키', '(유)명감독'을 외쳤지만, 구단은 의외의 선택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밀려난, 타율 2할3푼1리를 찍었던 김현수에게 4년 115억원을 안긴 것이다.김현수는 매일 같은 루틴으로 타석에 섰다. 지고 돌아오는 날에도 후배에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 이기면 되지."그리고 먼저, 묵묵히 연습했다. 밤 연습장의 불빛 아래, 배트 끝에서 울리던 규칙적인 타격음. 땀에 흠뻑 젖은 장갑이 흙 냄새와 섞이며 만들어내던 리듬. 그 소리가 팀을 조금씩 바꿨다. 모래알 같던 분위기가 벽돌이 되어 이어 붙기 시작했다. 오지환은 말했다. "김현수 앞에서 연습 많이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고.그 선택은 2023년 29년 만의 통합 우승으로 돌아왔다. 2024년 잠시 흔들린 팀은 올해 다시 정상에 올랐다. 무적엘지, 챔피언. 서른일곱의 김현수는 코리안시리즈 MVP였다. (2026년 시즌을 앞두고 그는 KT로 옮겼다. 또 어떤 변화를 만들지 궁금해진다.)■ '천재와 거장' 그리고 탈레브의 질문데이비드 갤런슨은 '천재와 거장-위대한 창의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에서 예술가를 두 부류로 나눴다.-천재(Genius): 젊은 나이에 번뜩이는 영감으로 혁신을 낚아채는 사람, 피카소 같은 이들.-거장(Master): 오랜 시행착오 끝에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하는 사람, 세잔 같은 이들.피카소는 말했다. "나는 탐구하지 않는다. 발견한다."세잔은 말했다. "나는 그림을 통해 탐구한다."발견자와 구도자. 빠르게 불타오르는 불꽃과, 오래 버티는 등불로 비유할 수 있겠다.이 구분은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예측 불가능한 충격 앞에서 리더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천재형은 직관으로 파고들고, 거장형은 준비로 파괴력을 줄인다. 결국 리더십은 불확실성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된다. 충격을 견디는 힘을 넘어, 그 충격을 기회로 바꾸는 체질과 태도 말이다.■ 두 리더십의 얼굴― 천재형: 나폴레옹1805년 아우스터리츠. 나폴레옹은 말을 멈추고 외쳤다."저기 적을 보라. 승리가 저기 있다."군대는 불길처럼 움직였다. 그의 직관은 불꽃이었다. 유럽은 그 불꽃에 휩싸였다.그러나 불꽃은 오래 타지 못한다. 러시아의 겨울이 그 증거다.― 거장형: 이순신이순신은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난중일기'에는 바람의 세기부터 병력 관리까지 빼놓지 않고 적혀 있다.열두 척의 기적은 한 번의 영감이 아니라 수천 번의 점검이 만든 결과였다.거장의 리더십은 화려하지 않지만, 폭풍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다.― 현대 기업의 두 얼굴일론 머스크는 천재형이다. 하나의 큰 생각으로 산업을 흔든다. 하지만 한 줄의 트윗으로도 흔들린다.제이미 다이먼은 거장형이다. 수십 번의 스트레스 테스트와 리스크 점검. 위기 때 오히려 존재감을 키운 이유다.■ 문제는 리더가 아니라 리더십이다조직이 새 리더를 들이며 혁신을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을 쉽게 놓친다. 그 리더가 펼칠 리더십은 지금 조직의 현실에 맞는가.밤과 낮, 회의실과 현장에서 스스로 물어보라.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숨결 같은 거장인가, 불꽃 같은 천재인가. 혹은 그 둘을 오갈 수 있는 힘인가.대답은 상황마다 달라질 것이다.*추신: 한 가지만 분명하다. 천재와 거장은 무 자르듯 나누기 어렵다. 모든 영감은 결국 반복 위에서 완성되고, 모든 반복에는 작은 발화점이 필요하다. 백조의 우아한 유영도 물속의 쉼 없는 발짓 덕분이다. 절반은 실패지만, 남은 절반이 세상을 조금씩 앞으로 민다. 내 경험도 그 사실을 증명한다. 어쨌거나 미리, 해피 뉴 이어.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⑥]흡연자를 위한 변명: 양지(陽地)로 나온 뒷담화 - '침묵의 나선'과 '어셔가의 몰락'
담배를 피운 지 꽤 오래됐다. 끊은 적도 무지 많았다. 몇 달, 몇 년 동안 안 피운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피우게 된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답하곤 했다. 직장을 옮겼기 때문이라고. 의지박약자의 변명으로 들릴 줄 안다. 하지만 사실은 그랬다.직장을 옮기면 직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잠시나마 왕따가 되기 쉽다. 그런데 직급이나 신참에 대한 벽이 그나마 약해지는 곳이 있다. 흡연구역이 그렇다.흡연자 수가 줄어든 요즘, 사무실과 최대한 거리를 둔 흡연구역은 소수의 흡연인들이 더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공간이다.흡연구역은 담배만 피우는 곳이 아니다. 뒷담화를 하는 곳이다. 뒷담화를 듣는 곳이기도 하다.■ 조직의 숨은 풍향계, 뒷담화의 두 얼굴조직에서 가장 큰 문제는 흔히 생각하는 매출 부진, 프로젝트 지연, 인력 부족 같은 표면적 이슈들이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대부분 그 아래 깔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관계의 진정한 모습은 정식 회의록이나 공식 보고서에 담기지 않는다. 가장 솔직하고 날것의 신호는 바로 뒷담화라는 형태로 존재한다.회의가 끝나고 복도 구석에서 들리는 작은 속삭임. 점심시간 식당에서 오가는 낮은 목소리. 화장실, 그리고 흡연구역의 소소한 소리들이다."저 사람, 진짜 일 안 해.""이번 결정, 좀 이상하지 않아?"사소해 보이는 몇 마디가 팀 분위기를 흔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의 풍향계를 가늠하게도 한다. 단순한 수다 같지만, 그 속에는 팀원 간 긴장과 불만, 신뢰의 정도, 심지어 다음 전략에 대한 암묵적 평가까지 담겨 있다.■'침묵의 나선'과 대나무숲이 현상은 엘리자베스 노엘레-노이만의 '침묵의 나선' 이론으로 설명된다. 핵심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 다수와 다르다고 느낄 때, 고립될 것을 두려워해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뒷담화는 바로 이 침묵의 나선이 작동하는 방식과 직접 연결된다. 조직의 공식 소통 창구가 막히거나, 솔직한 의견이 불이익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은 불만을 드러낼 채널을 잃는다. 팀은 표면적으로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불만은 더 깊숙이 숨어 들어가고 결국 곪는다.사장 시절, 집무실 한쪽 벽에 커다란 그림을 걸어뒀다. '대나무 숲' 그림이었다. 뒷담화를 '앞담화'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 서랍 속에, 익명 속에 감춰진 불만을 책상 위로, 이름을 걸고 제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과는? 잘 안됐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못 들었고, 듣기 싫은 이야기만 잔뜩 들었다.)■ 보이지 않는 소리와 '어셔가의 몰락'에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은 '보이지 않는 소리'가 한 개인과 가문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극적으로 보여준다.주인공 로더릭 어셔는 극도로 예민하고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 곧 몰락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고, 주변의 기이한 소리와 흔들리는 집이라는 풍문을 통해 불안이 증폭된다. 그의 내면적 불안은 현실과 분리되어 망상으로 커지고, 결국 스스로의 망상에 의해 가문 전체를 파멸시킨다.뒷담화는 어셔 가를 덮친 망상처럼 조직을 망치기도 한다. 불안과 불신을 증폭시키고, 조직의 정상적인 혈액순환을 방해한다. 심해지면, 결국 혈관이 터진다.■ 양지에 나온 뒷담화그러나 뒷담화는 동시에 조직의 생존에 필요한 소중한 경고를 담고 있다. 고혈압은 심근경색의 주요 위험인자지만, 미리 알고 관리하면 심장마비를 피할 수 있다. 뒷담화를 단순한 험담으로 치부하고 억누르면 독이 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듣고 이해하면 최악을 피하는 약이 될 수 있다.요즘의 뒷담화는 오프라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블라인드 앱 같은 것들이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는 이유가 있다. 공식 채널에서 말할 수 없는 진실, 직장 내 불만, 임금 문제, 불합리한 의사결정에 대한 솔직한 목소리를 익명이라는 안전장치 속에서 터뜨리는 것이다.게다가 뒷담화 속에는 조직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한 단서가 담겨 있다. 공식 채널로는 말하기 어려운 진짜 속마음을 드러내고, 보이지 않는 정보를 교환하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집단지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진짜 '대나무숲' 역할을 하기도 한다.뒷담화는 두 얼굴을 가진 언어다. 오늘날에는 절반쯤 양지(陽地)에 나와 있다.단순한 잡음으로 흘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귀 기울여 조직의 숨겨진 지도를 완성할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조직이 '어셔가의 몰락'처럼 스스로의 망상에 갇혀 몰락할지, 아니면 양지에서 소통하며 단단히 성장할지 결정하게 한다.**당부 말씀: 이런저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좋은 뒷담화의 단서를 못 찾았다면, 다시 담배라도 피워보시길. 건강은 책임 못 진다. 이 글을 읽고 다시 피우게 됐다는 변명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각오는 하셔야겠다, 행운을 빈다.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베이징·상하이·선전·항저우, 중국 벤처 혁신을 움직이는 4각형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중국 벤처는 베이징과 선전(深圳)이 주도했다. 하지만, 2020년대 중반 들어선 베이징·상하이·선전·항저우 등 4대 도시가 각자 모델로 발전하고 있고, 광저우·난징·청두가 그 뒤를 잇고 있다. 특히 베이징·상하이·선전·항저우는 서로 다른 DNA의 벤처 생태계로 '벤처 혁신의 사각형'을 형성하고 있다. 어떤 특징을 갖고 있나.소위 시장 중심의 혁신 도시라는 선전부터 살펴보자. 선전은 '아이디어가 바로 제품'이 되는 세계 유일의 제조 생태계로 유명하다. 화웨이·DJI·텐센트 같은 초거대 기업이 대표적이며, 이들로부터 분화된 수많은 벤처기업이 다시 새로운 생태계를 형성한다. 예컨대 DJI에서 나온 인재들이 창업한 에코플로우(EcoFlow)와 밤부랩(Bambu Lab)은 선전의 '모든 부품이 한곳에 모인 하드웨어 공급망'을 십분 활용, 경쟁력 있는 시제품을 하루 만에 만들어 성공한 대표 사례다. 부품 경쟁이 가격을 낮추고, 낮은 원가에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창업을 촉발하는 선순환이 선전 혁신의 본질이다.상하이는 글로벌 자본과 기술이 교차하는 글로벌 혁신 도시다. 다국적 기업의 중국 본부가 몰려 있고, 항공·물류·인재의 국제 접근성이 가장 높다. 장쑤·저장과 연결된 장강 삼각주 경제권의 허브로, 연구개발은 상하이에 두고 생산은 인근 도시로 분산하는 효율적 생태계가 특징적이다. 이 때문에 문화와 테크의 융합이 활발해서 미호요(miHoYo), 리리스(Lilith Games), 빌리빌리(Bilibili) 같은 게임·콘텐츠 기업들이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있다. 3사 모두 상하이를 게임과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의 허브로 만든 주역들이다. 상하이는 중국식 실리콘밸리라기보다 글로벌 자본과 디지털 문화가 결합한 '중국판 뉴욕'에 가깝다는 의견이다.항저우는 알리바바의 도시이자 중국형 디지털 창업의 실험실이다. 알리바바와 앤트그룹을 중심으로 핀테크·전자상거래·스마트시티의 다양한 벤처 생태계가 긴밀히 연결돼 있다. 하지만 최근 항저우는 '포스트 알리바바시대', 소위 AI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게 전문가 평가다. AI 게임체인저인 딥시크(DeepSeek), 게임사 게임사이언스(Game Science), 로봇기업인 유니트리(Unitree)는 모두 대기업이 아닌 대학·연구소와 함께 기술을 축적·성장한 유니콘들이다. 자본보다 인재, 화려함보다 연구개발을 중시하는 기풍이 항저우의 경쟁력이다. 창업비용이 낮고 연구 환경이 탄탄해서 젊은 개발자들의 실험실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선전·상하이·항저우와 달리 베이징은 중국 정부와 함께 하는 혁신의 중심이다. 칭화대, 베이징대, 중국과학원 등 최고의 대학과 연구기관이 몰려 있고, 정부의 정책 지원과 국가 R&D 자금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중관촌(中关村)과 시얼치(西二旗)에는 바이두, 레노버, 바이트댄스, 샤오미 등 굵직굵직한 기업이 자리잡고 있고,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보다, AI 알고리즘·데이터 솔루션·플랫폼 기술 등 '보이지 않는 두뇌'가 벤처기업들의 강점이다.이상 네 도시는 각기 다른 벤처의 특징과 생태계를 갖고 있다. 베이징이 전략기술을 설계하고, 상하이가 자본·인재를 연결하며, 선전이 제조·속도를 담당하고, 항저우가 소비·서비스를 확장하는 구조를 완성했다. 그 결과 중국은 '세계의 공장'을 넘어 독자적 기술 자립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앞으로 시너지를 극대화하려면 '속도의 선전'과 '품질의 항저우', '글로벌의 상하이'와 '정책의 베이징'을 어떻게 조화·협력하도록 하느냐가 관전 포인트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⑤]권력과 위대함의 딜레마: '울프 홀'과 '굿 투 그레이트'
조직 안에서 권력의 움직임을 가까이 보는 일은 하루하루 전쟁터를 살피는 것과 같았다. 회의실 한쪽에서는 다음 인사의 향방을 놓고 눈빛이 교차하고, 복도에서는 승진 소식에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시선이 오갔다.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가고, 누군가는 물러났다. 한 사람만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 곁에 있던 무리들이 함께 오르고, 같이 밀렸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에 따라 움직이고, 사소한 귓속말 하나가 운명을 바꾸기도 했다. 나는 그 때 그 회의실과 복도에서, 권력의 냄새가 얼마나 빠르게 방향을 바뀌는지 목격했다.권력의 이동은 단순한 직급 변화가 아니라, 사람과 시스템, 눈에 보이지 않는 신호가 얽힌 복합적 과정이었다.기업과 공공의 세계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었다. 권력의 균형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뒤엉킨, 마치 얼음과 물이 맞닿은 경계처럼 미묘했다.■ 권력의 현실과 상시적 균열힐러리 맨틀의 소설 '울프 홀(Wolf Hall)'은 권력의 이동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16세기 헨리 8세 궁정, 그 안에서 사람들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이 계산하고, 더 깊이 숨죽이며 움직인다. 맨틀은 이 책으로 두 번의 맨부커상을 받았고, 세기의 소설이라는 찬사를 얻었다.토머스 크롬웰이 주인공이다. 청교도 혁명의 올리버 크롬웰과 혼동하기 쉬운데, 다른 인물이다.토머스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잔혹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고, 상인 수습, 변호사, 외교관을 거쳐 헨리 8세의 곁에 섰다.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려는 왕의 정치적 싸움 속, 그는 브레인으로 움직였다.맨틀은 크롬웰을 이렇게 묘사한다."신과 대화할 수는 있지만, 응답을 기대하지는 않는 사람."권력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갖기 위해, 현실을 우선하는 사람.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생존과 선택의 철학이었다. 그는 상황을 읽고, 사람을 관찰하며, 움직임 하나하나에 계산을 숨겼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작은 손짓 하나에도 권력의 균형이 흔들렸다.크롬웰은 궁정에서의 미묘한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왕이 어느 날 갑자기 내리는 결정, 신하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 심지어 귀족들이 서로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속삭임까지. 그 모든 것이 권력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변수였다. 오늘의 동맹이 내일의 적이 될 수 있고, 한 순간의 침묵이 치명적인 오해를 만들 수도 있었다.■ 위대한 조직의 위대한 리더경영학 거장 짐 콜린스는 'Good to Great'에서 위대한 조직을 만드는 핵심으로 '레벨 5 리더십'을 꼽는다. 겸손하지만 결단력 있는 리더, 야망과 겸손의 모순적 조합이 조직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리더십의 계단은 이렇다.▴레벨1: 유능한 개인▴레벨2: 헌신하는 팀멤버▴레벨3: 유능한 관리자▴레벨4: 효과적인 리더▴레벨5: 겸손하고 결단력 있는 리더레벨 5는, 겸손이 결단력의 또 다른 이름임을 보여준다. 크롬웰 또한 이 정의에 가깝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연설하지 않으며, 전장에서 깃발을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추진력은 숨겨진 폭발력을 가진다. 겸손을 가장한 무서운 의지와 실행력이다.하지만 묘하게도 뒷맛이 씁쓸하다. 박수를 치기 쉽지 않다. 가려져 있다는 느낌, 어둡다는 생각이 따라온다. 그림자 같다. 성공 뒤에 숨어 있는 위험, 힘의 크기에 따라 늘어나는 그림자 말이다. 권력의 높이가 올라갈수록,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먼저 '사람'을, 그 후에 '무엇'을콜린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먼저 사람을, 그리고 난 후에 무엇을(First who, then what)."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가 먼저라고 한다. 잘못된 사람을 조직의 버스에 태우면, 아무리 훌륭한 전략도 실패한다. 인재 버스 문제는 현실에서 훨씬 복잡하다. 누구를 얼마나 빨리 내려보낼 것인가, 그 한 가지가 승패를 가르기도 한다.크롬웰도 원칙에 맞게 움직였다. 왕의 의중을 읽고, 알맞은 사람을 제자리에 앉혔다. 앤 불린 지지파를 배치하고, 반대파를 제거하며 권력의 균형을 설계했다.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사람을 모았으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남았다. 권력자의 변덕으로 앤 불린은 몰락했고, 크롬웰도 함께 무너졌다.■ 오너의 3심, 그리고 현대의 리더십현대 조직에서도 권력자의 변덕은 존재한다. 오너의 욕심(慾心), 의심(疑心), 변심(變心)—'3心'에 따라 조직이 흔들리고, 뛰어난 경영진을 배치했어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정치도 다르지 않다. 권력을 잡지 못하면, 변화와 혁신의 기회를 잃는다.현대 기업에서는 회장 한 사람의 결정이 수천 명의 운명을 흔들기도 한다. 회장의 아바타 CEO가 바뀌면서 전략 방향이 바뀌고, 중간 관리자들이 갈팡질팡하는 상황도 흔하다.그러나 동시에 현대 조직은 분산된 권력 구조, 주주, 이사회, 시장 평가라는 필터를 통해 리더십을 시험받는다. 한 사람의 변덕만으로 모든 것이 좌우되지는 않는다.크롬웰은 묻는다."권력을 잡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콜린스가 질문한다."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그리고 그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두 질문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겹치고, 이어지며, 결국 하나가 된다. 그렇게 해야만 시행착오와 실패, 파국을 피할 최소한의 기회를 얻는다. 권력은 단순히 잡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올바른 사람과,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일을 해야만 의미가 생긴다.권력과 위대함의 교차로에서 우리는 배운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고, 선택과 책임이 늘 함께 서 있다는 것을. 권력은 흔들릴 수 있지만, 흔들릴수록 방향을 잡는 힘이 생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단순한 승패가 아니라, 인간과 시스템, 그리고 역사와 미래가 얽힌 복합적 균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우리는 결국 어떤 길을 택할지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는 것을.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④]모닝 커피가 당신을 배신할 때 - 카너먼의 '노이즈'와 카뮈의 '전락'
문제는 모닝커피다가끔 과거의 결정을 곱씹는다. 뒤집기도 한다."이건 좀 아닌 것 같네"라며 반려했던 제안서나, "이 사람은 우리 회사와 안 맞는 것 같은데"라고 밀어뒀던 이력서 같은 것들. 며칠 뒤 다시 마주하면 "내가 왜 이 걸 못 봤지?" 하며 머리를 긁적일 때가 있다.그 사이 문서가 달라진 것도, 내가 철학자가 된 것도 아니다. 바뀐 건 그날의 기분, 수면의 질, 아침에 마신 커피 한두 잔, 그것도 아니면 공복혈당 수치일 거다. (의학계는 혈당과 판단의 상관관계를 충분히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이런저런 일들에도 우리는 자신을 합리적이고 일관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지 않다고.오류에도 계급이 있다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은 '노이즈(Noise)'에서 그 믿음을 깬다. 심지어 오류에도 계급이 있음을 보여준다.총오류는 편향(Bias)과 소음(Noise)으로 구성된다. 편향은 과녁 한쪽에 몰려 박히는 총알처럼 예측 가능한 오류다. 반면 소음 혹은 잡음은 총알이 이리저리 흩어져버리는 무작위적 변동성이다. 편향은 적어도 패턴이 있다. 소음에는 없다. 그래서 더 치명적이다.같은 문서를 두고도 어제의 나는 반대, 오늘의 나는 찬성을 외친다. 어제의 판사는 아침을 건너뛴 엄벌주의자, 오늘의 판사는 점심 배불리 먹고 난 뒤라 온정주의자가 된다. (범죄자에게는 판사의 식사 시간이 최대 변수라는 연구도 있다. 세상은 생각보다 밥심으로 굴러가는 것인가.)알베르 카뮈의 '전락(La Chute)'은 이 문제를 도덕적 차원으로 풀어낸다.주인공 클라망스는 정의로운 변호사로 칭송받았다. 그는 스스로의 판단이 공정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강에 몸을 던지는 여성을 목격하고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 작은 침묵이 그의 세계를 뒤흔든다. 그는 결국 자신이 위선자였음을 고백한다. 끝내 무너진다.사실 우리도 매일 비슷한 침묵을 반복한다. 다만 기록되지 않을 뿐이다.클라망스의 추락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편향의 드라마 같다. 자신이 '옳다'는 착각, 그 무지가 만든 오만이 버무려진, 막장 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비록 그가 고백했다고는 하나, 그 판단조차도 여전히 날씨와 기분에 흔들렸을 것이다. 게다가 고백으로 드러났을지언정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음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테이블 배치가 달라지면다른 이야기를 보태볼까 한다. 상대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기는, 협상에 대한 것이다.협상학의 대가 하워드 라이파와 로저 피셔는 환경을 어떻게 세팅하느냐가 결과를 바꾼다고 설명한다. 협상은 일견 논리와 의지의 힘겨루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테이블을 어떻게 차리느냐의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거다.와인잔이 올라간 자리에서 오가는 말과, 종이컵 커피가 놓인 자리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다를 수 있다. 같은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두고도, 어제는 평행선, 오늘은 극적인 타결일 수도 있다.그런데 그 차이는 대개 협상 테이블, 협상장소의 분위기가 만든다. (은행원 시절,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굳이 고객을 찾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배웠다. 영업은 날씨가 전부라고 했던 것도 기억에 있다.)이 대목이 카너먼의 소음 개념과 기묘하게 포개진다.협상도 결국 소음의 바다 위에서 출렁인다. 판사가 점심 메뉴에 흔들리듯, 협상가는 조명, 의자 배치, 심지어 첫 발언자의 목소리 톤에 흔들린다. 그러니 협상이란 이성의 게임이 아니라, 소음을 줄이고 환경을 조율하는 무대 연출에 가깝다고 할 수밖에.더 나은 판단은 겸손에서 나온다현대인의 전락은 한 번의 위선적 침묵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의 무수한 소음이 쌓여 이루어진다.채용 면접, 인사 평가, 신제품 출시, 법정 판결까지. 우리는 모두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직전의 커피 한 잔, 회의실 온도, 심지어 전날 야구 경기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키를 잡는 항해다.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다음 질문으로 수렴한다."우리는 왜 늘 우리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는가?"그리고 그 답-완벽한 판단은 없다는 것-은 나와 있다. 이미 알고 있다.소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조금 더 겸손해진다. 그 겸손이야말로 더 나은 판단의 출발점일 것이다.사정이 그러하니, 결론에 앞서 다시 묻기를.그때 내린 당신의 결정은 정말로 옳았는가.아니면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인가. 그 판단은 편향이었나, 소음이었나. 애초에 테이블이 잘못 차려진 건 아니었나.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그 자리에 앉을 필요조차 없었던 건 아닌가.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③]미꾸라지가 공룡을 이기는 방법 – '규칙 없음'과 '덕시티'
"우리 회사의 업(業)은 뭘까." 사장 시절 종종 던졌던 질문이다. 그러면 회의실은 숨죽인 듯 고요해진다. 사장의 특권은 마음껏 질문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언젠가는 스스로 답을 내야 한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이런저런 토론 끝에 의견이 모였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모든 여정에서 고객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회사, 모빌리티 서비스 기업.이어지는 질문은 자연스럽다. "그럼 경쟁사는?" 포지셔닝은 터를 잘 잡는 일이다. 상대를 정해야 우리의 위치도 선명해진다. 여러 후보가 나왔고, 넷플릭스로 정리됐다. 이동의 경험을 단순한 효율이 아닌 즐거움으로 바꾸자는 목표였기에, 엔터테인먼트의 혁신자 넷플릭스가 제격이었다.넷플릭스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있다. '규칙 없음 (No Rules Rules)'이다. 넷플릭스 공동설립자 리드 헤이스팅스와 인시아드 교수 에린 마이어가 함께 쓴 책이다. 서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넷플릭스는 다르다. 우리의 문화는, 규칙이 없는 것이 규칙이다."당시 블록버스터 같은 공룡 기업에는 없었지만, 미꾸라지였던 넷플릭스에는 다른 게 있었다. 문화였다. 자율이었고, 신뢰였다. 복장 규정, 휴가 규정, 출장비 지침 모두 딱 한 문장으로 정리됐다. "회사를 위해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중요한 건 규칙을 없앤 것이 아니다. 넷플릭스는 '좋은 사람'을 뽑고, 그 사람을 믿었다. 성과와 문제를 둘러싼 피드백을 거리낌 없이 주고받으며, 자기 통제가 가능한 조직을 지향했다. 능률보다 혁신, 절차보다 사람. 이들에게 자율은, 스스로 자신을 단련할 줄 아는 사람에게 보내는 신뢰였다. 이 모든 것이 기업문화로 자리잡았다. (넷플릭스가 창업 초기의 기업문화를 지금까지 유지, 발전시키고 있는가에 대한 것은 다른 문제다. 창업(創業)보다 수성(守城)이 더 어렵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것이다.)회사도 낯선 시도에 나섰다. 연결과 확장을 전략으로 고객가치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아 실행했다. 과하다 싶은 목표를 설정하게 하고-매출 목표는 사장실에 붓글씨로 적혔다. 작심의 의례처럼-, 안 해본 방법을 찾게 했다. 복장 규정을 없앴고, 성과관리, 과정관리 기법을 도입했다.이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회사들과 손을 잡았다. 모빌리티 시스템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와 시큐리티 서비스 기업과 업무협약을 했다. 철도여행용 도시락을 만드는 회사,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기업, 심지어 프로야구 구단과도 함께 하면서 고객경험을 끌어올리기 위한 실험을 했다.모든 시도 중에서 몇몇은 실패했고, 몇몇은 유야무야 끝났다. 그러나 분위기는 분명 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이와 대조되는 세계를 다룬 소설이 있다. 스웨덴 작가 레나 안데르손이 2006년 발표한 소설 '덕 시티(Duck City)'다.덕시티는 겉으로는 풍요롭지만, 안으로는 숨막히는 도시다. 패스트푸드와 다이어트를 동시에 강제하며, 뚱뚱한 사람들을 단속하는 곳.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비정상을 규제하는 도시. 그런데, 정상은 대체 뭔가? 누가, 왜 정하는가.덕시티에는 규칙이 넘쳐난다. 어기면 문제고, 잘 지켜도 문제다. 규칙을 잘 지키면 또 다른 규칙이 생기고, 그 규칙을 관리하는 새로운 부서가 생긴다. 도시는 점점 복잡해지고, 천천히 조용히 멈춰간다. 사람들은 규칙을 두려워했고, 아무도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됐다.규칙은 처음에는 선의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사람 위에 올라탔다.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치가, 끝내 아무도 돌보지 않게 된 것이다.어디서 많이 본 풍경 아닌가. 대마불사(大馬不死) 공룡기업들이 몰락하는 방식과 닮았다. 더 잘하려 만든 규칙이 새로움을 가로막는 익숙한 명분이 되는. 규칙은 지켰을지 몰라도 성과는 사라지는 모습 말이다. 넷플릭스와는 반대편에 있다.중요한 건, 무엇을 지키느냐가 아니라 왜 지키는가다."나는 왜 이 규칙을 지키는가. 언제까지 이 룰을 따를 것인가."이 질문이 조직을 움직이게 한다.무언가를 시도하려 할 때, 누구는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고, 또 누구는 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 내 결론은 이렇다."하지 말아야 할 고만고만한 열 가지 이유와 해야 할 단 하나의 똘똘한 이유가 있다면, 하라."열 가지 이유는 대개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고, 단 하나의 이유는 낯설지만 본질에 닿아 있다.기왕이면, 낯선 쪽이 낫다. 특히 공룡과 싸워야 하는 미꾸라지라면. 미꾸라지는 작고 유연하지만, 감각은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다. 감각이 문화가 되는 순간, 그 기업은 더 이상 미꾸라지가 아니다. 중심을 흔들며 비상한다.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벤처기업 주도형으로 성공하고 있는 중국 AI 산업정책
작년 말 딥시크(DeepSeek)의 돌풍 이후 중국 AI의 생태계 변화가 뚜렷하다. 2~3년 전만 해도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등 빅테크가 AI를 주도했지만, 딥시크가 고성능·저비용의 LLM(초대형 언어모델)을 발표한 후로는 혁신 벤처기업들이 중국 AI산업의 스타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대표급 주자는 소위 'AI 타이거'. 딥시크에다 초장문(超長文) 처리가 특기인 문샷 AI, 영상·음성 변환이 전문인 즈푸 AI, 멀티모달(multimodal :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를 처리) 모델인 미니맥스와 오픈 소스를 제공하는 01.AI를 합친 5개 벤처기업이 그들이다. 다섯 개 업체 모두 유니콘 기업(비상장기업으로 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이며, 최근 들어선 대용량의 문서나 법률·학술 등 전문 자료에 장점이 있는 문샷 AI, 홍콩 상장을 앞두고 있는 미니맥스가 특히 관심 대상이다. 시장에선 중국의 AI 산업 생태계가 이전의 '빅테크 주도형'에서 이젠 빅테크는 인프라 및 플랫폼 역할로 뒷받침하고 혁신 벤처기업이 AI 기술·서비스 개발에 앞장서는 '벤처기업 주도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의견이다.중국 AI 산업이 왜 벤처 주도로 됐나. 전문가들은 중국 정부의 강력한 AI 벤처 육성책을 첫 번째로 꼽는다. 이에는 AI 핵심 전략인 민관학(民官學) 모델의 성공을 위해선 빅테크보다 벤처기업 주도가 유리하다는 인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벤처기업은 의사결정이 빠르고 신기술·서비스 개발의 '실험-실패-개선' 주기가 짧아 정책 및 연구 지원만 잘 이뤄지면 기술 혁신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반면, 빅테크나 대기업은 인력·기술 등 자원은 풍부하지만, 민관학 프로젝트 수행 시, 기술 개발이 기존 수익모델에 걸림돌이 된다든지, 시장의 독과점 이슈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AI 등 벤처기업 투자에 1조 위안(190조 원) 상당의 기금, AI 벤처 사업화를 위해 특허 절차 간소화, 벤처기업이 정부·대학과 실증사업을 빠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규제 특례 등을 마련하고 있다. 또 하나는 벤처기업의 오픈소스 문화다. 벤처기업은 대규모 독자 모델을 처음부터 끝까지 폐쇄적으로 개발하는 빅테크·대기업과 달리, 이미 오픈된 모델과 데이터를 활용해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또 이들을 개방, 다른 벤처기업 및 연구자들과 공유한다. 현재 중국 AI 산업은 모델과 데이터의 공유·융합을 통해 급속한 혁신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성과를 개방·공유하는 벤처기업들이 그만큼 중국 AI의 주역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어떤 효과가 나타나고 있나. 우선 딥시크, 문샷 AI 등에서 보듯이 해외 의존도가 높던 AI 모델의 중국 내 자급률을 높이는 효과다. UBS는 중국의 AI 연산 자급률은 2024년 33%에서 2029년엔 90%, 모건스탠리는 중국의 AI GPU 자급률이 2024년 34%에서 2027년엔 82%까지 상승할 거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산 AI 칩을 생산하는 화웨이, Ascend 등에도 도움이 되는 건 물론이다. 둘째, 빅테크는 리스크관리, 기존 사업 이해관계, 내부 승인 절차 등 때문에 산업별·고객별 대응이 느린 반면, 벤처기업은 의사결정 구조가 단순해 신속하게 솔루션을 마련할 수 있다. 또한 수익성이 낮아 빅테크·대기업이 외면하는 소규모 틈새시장(Niche market)도 적극 공략할 수 있어서, 그만큼 다양한 산업 및 수익모델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아무튼 이러한 중국의 '벤처 주도의 AI 생태계 변화'는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AI 100조 원 펀드' 정책 관점에서도 곱씹어볼 만한 시사점이 있다는 생각이다. 한·중 여건은 다르지만, AI의 발 빠른 기술 혁신과 다양한 산업으로의 빠른 확산을 위해선 소수의 대기업·빅테크 주도가 아닌 기민한 벤처기업들의 개방형 참여와 주도가 필수적이지 않을까.
[김영태의 읽는 인간②]정석과 곡선 사이: 아마존과 카프카, 그리고 설득의 기술
회의는 지루했다. 예전의 한국 축구 같았다. 빌드업만 이어졌고, 유효슛은 없었다. 중원에서 공을 돌리다 이렇다 할 순간 없이 연장으로 가는, 선수보다 해설자가 더 바쁜 그런 경기 말이다. 설명은 설명을 불렀고, 알 듯하면 잊혔다. 회의의 목적조차 흐려져 갔다. 한 시간이 지나면 습득한 정보의 거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을 실증하는 자리 같았다.우리는 수많은 회의에 둘러싸여 산다. 회의가 곧 일이다. 회의를 많이 하면 회의적(懷疑的)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회의의 대부분은 설명하는 자리다. 설명으로는 실행은커녕 공감조차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우리는 설명을 요구받아 왔다. 질문엔 정답이 있다는 전제, 논리에는 정석이 있다는 믿음에 길들여졌다. '수학의 정석'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 그러나 정석은 정답을 설명하는 책이다. 남이 짠 공식을 따르는 기술이지, 나만의 길을 찾는 방법이 아니다. 남의 문을 여는 열쇠일 수는 있어도, 나의 문을 여는 지도는 되지 못한다.설명과 설득은 다르다. 설명은 원인과 결과를 직선으로 잇는다. 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오래 남지 않는, 선생의 방식이다. 설득은 곡선이다. 내러티브를 던지고, 청자가 따라오게 만든다. 효과적이다. 처음엔 느려도 한 번 마음을 얻으면 오래 가는, 동료의 방식이다.설명은 잘해야 본전이지만 설득은 잘하면 대박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강한 기업은 설명하지 않는다. 고객을, 그리고 스스로를 설득해 간다. 아마존이 그렇다. 이 회사는 이름 자체가 신조어가 된 보기 드문 기업이다. 소비자의 습관만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를 통째로 바꿔놓았다. 물론 기업에 좋은 일이 세상 모두에게 좋은 일은 아닐 수 있다.아마존 관련 책도 많다. 내 서가에 꽂힌 것만 해도 열 권 가까이 된다. 공룡, 초토화 같은 자극적 표현이 표지에, 띠지를 덮는다. 승자독식의 어두운 그림자를 고발하는 '기업판 아마존의 눈물' 다큐멘터리 같다. 하지만 드물게, 이 거대한 조직의 '일하는 방식'에 집중한 책도 있다. '순서파괴(Working Backwards)'가 그렇다. 창업자 제프 베조스와 함께했던 콜린 브라이어와 빌 카가, 제목 그대로 '거꾸로 일하는 방식'을 소개한다. 나는 그 방식에서 아마존의 지속성장을 이끈 에너지, 설득의 힘이 만들어진다고 본다.아마존은 파워포인트(PPT)를 금지한다. 대신 여섯 페이지짜리 보도자료 형식의 내러티브 문서를 쓴다. 회의는 발표자가 설명하는 대신, 모두가 이 문서를 조용히 읽으며 시작된다. 그리고 질문이 오간다. 발표 → 질문 → 결론이 아니라, 결론 ⤳ 이야기 ⤻ 질문의 순서다. 설명의 직선이 아니라, 설득의 곡선을 따른다.말은 흐르지만, 글은 남는다. 말보다 글을 쓸 때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믿는지, 어디서 어긋났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 내러티브가 만들어진다. 나는 투자유치(IR)나 프로젝트 계획을 만들 땐 숫자나 그림을 찾기에 훨씬 앞서 스토리를 쓴다. 이 스토리가 그럴듯하면 근거를 붙이고, 아니라면 버린다.설득의 곡선은 거대한 조직에서도, 개인의 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프란츠 카프카의「법 앞에서」라는 짧은 소설이 있다. 소설에서 법은 하나의 건축물로 그려지는데, 종교적으로는 구원과 영생을, 사회적으로는 자유와 해방 등을 상징한다.한 시골 사람이 법을 찾아 먼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안 된다"며 문을 막는다. 그는 묻지 않고 기다린다, 평생을. 죽음이 다가오자, 그는 문지기에게 묻는다. "모두가 법에 들어가려 하는데, 왜 아무도 오지 않았죠?" 문지기는 말한다. "이 문은 자네만을 위한 문이었지." 그 문은 결국 열리지 않는다.설명에 길들여진 사람은 자신을 설득하지 못한다. 정답을 좇는 정석이 아니라,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문을 열고(문이 열리고),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나는 문제에 부딪히면 거꾸로 읽는다. 결과에서 시작해 원인과 행위 사이에 어떤 이야기의 곡선이 필요한지를 상상하며 써내려 간다. 그렇게 하면 나부터 설득할 수 있다. 나를 설득하지 못하면, 남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①]이디스 워튼과 댄 히스의 선택 : 염색은 업스트림이다
일년에 서너번쯤 머리카락을 염색한다. 새치가 절반쯤 올라오면서부터다. 미용실에 가 검은색과 흰색을 섞은 회색, 애쉬그레이를 고른다. 이 색깔이 나오려면 머리카락에서 색소를 제거하는 탈색 과정을 두차례 거쳐야 한다. 각각의 과정은 숙성의 시간을 포함하고 있어 서너시간은 족히 걸린다. 공을 들여 염색을 해도 오래 가지 않는데, 열흘쯤 지나면 애쉬그레이에서 카키그레이로 변한다. 그 뒤 또 열흘 후엔 옐로우그레이로 변하는데, 늦가을 이른 저녁 시간의 들판 같은 색깔이다. 머리를 자주 감으면 이 과정이 빨리 지나가고, 덜 감으면 천천히 간다.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출연한 영화 중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라는 작품이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독이었고, 루이스와 미셸 파이퍼, 위노나 라이더 등이 출연했다. 1993년작. 원전은 미국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여성작가 이디스 워튼의 동명의 장편소설이다.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분했던 아처 뉴랜드의 삶은 계산된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사회적 지위, 가문, 심지어 도덕성까지도. 하지만 그의 속마음-사랑이라는 이름의-은 충분히 계산되지도, 선택되지도 못했다. (영화의 마지막은 쉰 일곱이 된 아처가 젊은 날 선택하지 않았던 사랑을 찾아가지만 또다시 선택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장면이다. 그의 백발이 모자 아래에서 빛난다.)아처는 그래왔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은 내려놓았고, '지금은 최선인 선택'을 붙잡았다. 그는 모범 시민이 되었고, 가문의 명예를 지켰다. 성공적인 삶이라는 평판을 보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함께 하지 못한 세월에 대한, 깊은 후회를 남겼다. (돌아섬 또한 사랑의 표현일지도 모를 일이다만.)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보는 방법도 있다. 경영전문가 댄 히스의 '업스트림'(Upstream)도 그중 하나겠다.우리는 흔히 문제가 발생한 뒤에야 그것을 해결한다. 아이가 물에 빠지면 구한다. 두 번째 아이도, 세 번째 아이도. 그런데 누군가는 물가를 거슬러 달려가기 시작한다."어디 가?" "상류에 가서 도대체 누가 아이들을 물에 빠뜨리는지 보러."문제가 발생한 뒤에 대응하는 것, 다운스트림만으론 부족하다. 눈앞의 문제만 처리하다 보면, 구명조끼는 될 수 있지만, 구조선은 되지 못한다. 원인을 찾아 없애야 한다. 이게 업스트림이다. 댄 히스는 책에서 업스트림에 성공한 다양한 사례를 소개한다. 어렵지만 해보라는, 보상이 꽤 크다는 주장과 함께.업스트림 접근법은 품이 많이 든다. 알아주지 않을 때도 많다. 홍보(PR)와 대관(GR) 업무 총괄 시절, 조직과 예산을 유지(확대)하기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빈 카운터(Bean Counter) 재무책임자(CFO)를 만나면 얼마나 좀스럽게 논쟁해야 했는지. 평화의 시기는, 아무 일도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 일이 없게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말이다.아처가 업스트림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그의 계산 속에 원인을 포함시켜 놓고, 그 원인이 시간에 따라 어떤 작은 변화들을 만들고,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를 미리 생각해봤다면 어땠을까. 예컨대 당장의 결혼으로 얻을 수 있는 지위 가문 도덕성 같은 것들도, 추후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임을 사전에 알았다면 어땠을까. 달라졌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아처의 선택이 실패한 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후회는 줄어들지 않았을까.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계산된 선택이나 계획이 아니라, 넓게 오래 볼 수 있는, 기다림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시야(視野)가 아닐까 싶다. 눈앞의 현상이 아니라 그 원인을 찾으려는 행동, 이미 지나간 결정이 남긴 무늬까지 되짚으려는 겸손, 애초에 누가, 언제, 무엇을 놓쳤는지를 기꺼이 질문하는 자세 같은 것들 말이다. 다만 그런 삶은 느리고, 비효율적이라서 종종 앞서가는 이들에게 조롱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믿는다, 시야의 힘을.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이고 태도라는 것을.염색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할까 한다. 다시 말하지만, 애쉬그레이로 염색하려면 탈색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머리카락에 뿌리 깊게 박힌 색소를 다스리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염색의 업스트림이다.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딥테크, 보다 적극적인 민관학 협력과 투자 기대
최근 글로벌 벤처시장에선 딥테크(Deep Tech)가 화두 중 하나다. 딥테크란 첨단 과학을 바탕으로 한 AI, 바이오테크, 양자컴퓨팅, 로보틱스, 우주기술 등 기존 기술보다 훨씬 혁신적이고 복잡한 기술이다. 따라서 장기간의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며, 기대 투자수익이 크지만, 위험도 크다는 게 시장 평가다. 그만큼 시장 실패 가능성도 꽤 있어서, 민간 외에 공공 자금이 투입되는 경우도 많다.시장현황은 어떤가. 2025년 초 기준 글로벌 딥테크시장의 시장 규모는 7527억달러(1069조원), 연평균 성장률(2020~2024년)은 25~30%의 빠른 성장세다. 특히 2024년 이후로는 AI 외에 다른 분야의 투자도 빠르게 늘어나 관심 대상이다. 2024년 기준 바이오헬스케어 투자는 딥테크 총투자액의 33%로 26.7%인 AI를 앞질렀고, 양자컴퓨팅과 우주기술의 투자 증가율은 각기 125%와 95%로 AI의 46.2%를 훨씬 웃돌았다.왜 이렇게 딥테크 투자가 빠르게 늘고 있나. 전문가들은 첫째, 딥테크가 미래 성장 동력이어서, 국가 간의 기술 패권 경쟁이 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국가 정책 우선순위가 그만큼 높단 얘기다. 미국의 경우 2022년 8월 제정된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중국은 딥테크에 대한 인재, 기술, 재정 지원을 삼각축으로 하는 삼중나선계획(三螺旋计划, Triple Helix Plan), 영국의 딥테크 지원기관인 Advanced Research and Invention Agency (ARIA) 등이 대표적이다.둘째, 딥테크는 기존 기술의 한계를 뛰어넘는 근본적 혁신으로 산업 전반에 대한 시너지효과가 크다. 따라서 성공적으로 사업화되면 독보적인 시장 선도와 여타 산업과의 다양한 수익모델 창출로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맥킨지 보고서(2024년)는 지난 18년간 미국 및 유럽 딥테크펀드의 투자수익률이 연 17%로 전통적 테크펀드보다 7~8%포인트 높다고 발표한 바 있다. 셋째, 기술혁신 인프라의 확충도 빼놓을 수 없다. 클라우드, 오픈소스, 빅데이터 구축 등으로 이전엔 상상도 할 수 없던 딥테크 개발·혁신이 가능하다고 한다. 예컨대 빅데이터 분석으로 순식간에 다양한 시나리오 시뮬레이션을 처리하는 구글의 'Big Query'라든지 나사(NASA)의 '클라우드 + 빅데이터 + 딥러닝 융합 플랫폼' 등이 있다. 국가적으론 글로벌 자금과 인재 유치에 유리한 미국이 단연 1위다. 지난 5년간(2020~2024년) 글로벌 딥테크 투자의 60%를 차지했다. 벤처투자액 중 딥테크 투자 비중(2024년)도 2014년의 10%에서 20%로 두 배로 껑충 뛰었다. 2위는 중국으로 12%. AI, 반도체 등에서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투자 금액은 아직 미국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영국, 프랑스, 독일이 3~5위로 뒤를 잇고 있다.어떤 기업들이 대표적인가. 우선 AI에선 미국의 오픈 AI와 중국의 딥시크를 꼽는다. 오픈 AI와 딥시크의 누적 투자액은 각기 500억달러(70조원)와 25억달러(3조4000억원, 추정), 기업가치는 오픈 AI가 3000억달러(426조원), 딥시크는 1500억달러(213조원)로 평가된다. 우주기술의 대표 기업은 미국의 스페이스X다. 민간 우주발사체를 상용화하고 재사용 로켓기술을 혁신해서 저비용 고성능 우주선 개발에 성공했단 평가다. 기업가치는 3500억달러(501조원)이다. 이외에 미국 바이오헬스케어 기업인 모더나, 영국의 AI기업인 옥스퍼드 나노포르 테크놀로지, 프랑스의 로보틱스기업인 이그조텍 등이 시장의 주목을 받고 있는 딥테크기업이다. 또한 현재 딥테크기업 중 유니콘은 약 142개로 총 유니콘의 12%, 딥테크 데카콘(기업가치 100억달러 이상)은 16개로 총 데카콘의 33%다. 이는 딥테크일수록 기업가치의 상승가능성이 훨씬 큼을 시사한다. 우리나라도 최근 딥테크 투자가 늘곤 있지만, 딥테크 유니콘은 AI 스타트업 리벨리온 정도다. 보다 적극적인 민관학(民官學) 협력과 투자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변화하고 있는 '유니콘'의 글로벌 트렌드
'유니콘'은 비상장기업인데도 기업 가치가 10억 달러(1조 4000억원)를 웃도니, 벤처창업자에겐 당연히 꿈의 대상이다. 그뿐 아니라 첨단 기술의 상징으로 미래 성장동력의 핵심인 데다, 단기간에 급성장하기 때문에 부가가치와 고용 창출 효과도 커서, 그만큼 국가적으로도 중요하다.따라서 벤처기업과 벤처캐피탈은 물론, 국가 간의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최근 글로벌시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유니콘의 특징적 트렌드를 간단히 살펴보자.첫째, 지난 3년간의 금리상승으로 벤처기업의 자금압박은 컸지만, 그럼에도 불구 유니콘은 매년 빠르게 늘고 있다. 유니콘이 처음 시작된 2013년의 유니콘 수는 43개에 불과했다. 그랬던 것이 2020년엔 586개, 2022년 963개, 2024년 말에는 무려 1,565개로 연간 38.7%의 급증세, 기업 가치로는 2013년 782억 달러(860조원)에서 2024년엔 3.8조 달러(5487조원)로 연간 12.5%의 증가세다. 둘째, 미국의 일방적 주도에서 점차 국가적으로 다양화되는 추세도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예컨대 2013~2014년만 해도 유니콘의 80% 이상이 미국일 정도로 미국 주도였다. 하지만, 2020년엔 미국 48.0%, 중국 24.3%로 중국이 양강으로 뛰어 올랐고, 2024년엔 미국 48.3%, 중국 21.3% 외에 인도가 6.9%, 이스라엘도 5.2%로 유니콘 강국에 합류하고 있다. 또한 비중이 한 자릿 수이긴 하지만, 유럽도 영국(3.0%), 독일(2.0%), 프랑스(1.8%) 등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셋째, 유니콘의 글로벌화도 눈에 띄는 추세다. 왜냐면 기업 가치를 10억 달러 이상으로 높이려면, 무엇보다 시장의 확대 특히 해외 시장 확대가 중요하며, 이를 위해 해외 시장과 연결된 글로벌 투자자의 자금 유치가 핵심 요소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인도와 같은 내수시장이 크지 않은 국가들의 경우 벤처가 유니콘이 되기 위해선 글로벌화가 필수적이라는 게 전문가들 의견이다. 실례를 봐도 중국과 인도의 경우는 내수와 자체 투자만으로 유니콘이 되는 경우도 30~40%나 되지만, 그 외 유니콘 수 '톱 10'에 이름을 올린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글로벌 시장진출과 글로벌 자금 유치로 유니콘을 탄생시키고 있다. 예컨대 프랑스(28개), 캐나다(21개), 싱가포르(15개)의 모든 유니콘들이 이에 해당한다. 아울러 유니콘 글로벌화의 영향으로 기업 가치 100억 달러 이상인 데카콘과 1,000억 달러 이상인 헥토콘도 출현하고 있다. 데카콘은 2024년 기준 50개로 총 유니콘의 3.2%, 미국의 Stripe, 데이터브릭스 등이 대표적이며, 헥토콘은 2개로 중국의 ByteDance와 미국의 SpaceX를 꼽는다.넷째, 유니콘의 중점 섹터도 최근 2~3년 사이에 두드러진 변화를 보이고 있다. 유니콘이 나타나기 시작한 2013년부터 유니콘 중 가장 많은 분야는 플랫폼 기업들이었다. 2024년 기준 유니콘 중 플랫폼 기업의 비중은 약 40%로 추정된다. 그중 기업 가치가 무려 2,250억 달러에 달하는 중국의 ByteDance(틱톡), 미국의 온라인 결제 플랫폼인 Stripe(650억 달러), 미국의 온라인 협업 화이트보드 플랫폼인 Miro(175억 달러)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2020년을 전후로 코로나19가 터지고, 금리가 상승한 이후로는 딥테크(Deep Tech) 비중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예컨대 2020년만 해도 14% 내외였던 딥테크 비중이 2024년에는 25%로 11%포인트나 증가했다. 특히 인공지능의 유니콘 증가가 빨라서 2020년엔 유니콘 기업이 63개(10.7%)였으나, 2024년엔 214개(17%)까지 상승했다. 특히 2024년엔 새로 탄생한 유니콘의 45%가 인공지능 유니콘일 정도였다. 대표 기업으로는 기업가치가 1570억 달러와 600억 달러에 달하는 오픈AI와 앤트로픽이 있다. 딥테크 중 2위는 환경테크(80개)로 총 유니콘의 5.1%, 3위는 바이오테크(65개)로 4.2%다. 2020년 14개(2.8%)였다가, 2024년 14개(0.9%)로 비중이 하락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정책당국과 벤처업계의 상호협력과 분발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라 하겠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퇴직연금의 벤처투자, 적극 검토할 필요 있어
최근 대표적 연기금의 하나인 퇴직연금의 벤처투자 허용 여부가 연기금과 벤처 업계의 화두다. 지난 10월 정부가 관계 장관 회의에서 '선진 벤처투자 시장도약방안'에서 신규 벤처투자 주체의 확대, 특히 퇴직연금의 벤처투자 허용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겠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물론 벤처 업계의 '환영'과는 달리, 연기금 업계에선 '노후 자산을 벤처에 투자하면 위험하지 않나' 하는 분들도 여전히 많은 듯하다. 하지만, 퇴직연금을 너무 보수적으로 운용해서 그런지 수익률이 낮아, 실질 가치를 보존하지 못한다는 소리도 커지고 있다. 예컨대 물가상승률을 뺀 현재 1000만원은 20년 후에 반토막, 만약 부동산가격 상승까지 고려하면 10년 후에 이미 반토막으로 된다는 의견이다. 퇴직연금 현황부터 살펴보자. 2023년 기준 규모는 382조4000억원으로 세계 3대 연기금인 국민연금(1147조원)의 3분의 1이다. 1%만 해도 4조원 가까운 엄청난 규모다. 지난 5년간 성장률은 연평균 15%, 향후 10년간도 연 9.4%의 고성장이 예상된다고 한다. 하지만, 수익률은 높지 않다. 2023년은 5.26%로 다소 호전됐지만, 지난 5년과 10년간 연 환산 수익률은 각각 2.35%, 2.07%로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2017~2021년의 5년간 수익률을 국민연금과 비교한 분석을 보면 국민연금은 연평균 7.63%, 퇴직연금은 그의 4분의 1에 불과한 1.94%였다.그럼 벤처투자의 성과는 어떤가. 벤처펀드 기준 우리나라 벤처투자의 성과는 고위험 투자라는 인식과 달리, 벤처투자조합을 제도화한 1987년부터 2024년 상반기까지 무려 연평균 8.7%였다. 이는 그동안 청산된 1107개 펀드를 전수 분석한 결과로, 특히 전체 펀드의 3분의 2가 연평균 15.7%의 수익률을 올렸다는 점에서 적절한 펀드 선택에 따라선 위험도 상당히 줄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공공성이 높은 분야(창업 초기 등)에 투자하는 한국벤처투자(주)의 모태펀드도 청산 펀드 277개를 기준시, 원금의 1.5배를 회수하고 연평균 9.0%의 수익을 실현했다. 이는 동기간 국고채금리의 약 2배에 해당할 정도로 높은 수익률이다.퇴직연금에 앞서 벤처에 투자한 연기금의 성과는 어떤가. 연기금 벤처투자가 시작된 2014년부터 2023년까지의 연평균 수익률은 국민연금 13.9%, 사학연금 10.1%, 공무원 연금 9.2%이었고, 과학기술공제회는 11.9%, 고용보험 기금은 무려 17.2%의 수익률을 실현했다고 한다. 이들 연기금의 벤처투자수익률이 벤처투자 전반의 평균 수익률보다 훨씬 높은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 분석이 있지만, 자금력과 신용도가 좋아서 그만큼 경쟁력 있는 벤처기업과 벤처캐피탈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수 의견이다.해외로 눈을 돌려보자. 퇴직연금의 벤처투자는 미국, 캐나다 등 북미지역이 주도하는 모습이다. 2008년 리만 위기와 그 후 저금리 상황에서 수익률을 높이려고 부동산, 사모펀드, 벤처투자 등 대체투자를 확대한 것이 계기가 됐다.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의 공무원 퇴직연금(CalPERS)이다. 규모는 2024년 6월 5029억달러(699조원)로 우리나라 퇴직연금의 1.8배. 벤처투자 규모는 2020~2023년 연평균 18억3000달러, 연금 총규모의 약 3%를 벤처투자에 할당했다. 2677억달러(372조원) 규모의 뉴욕주 공동 퇴직기금도 2023년 기준 11억달러(2.9%)를 투자하고 있다. 벤처투자가 활발하지 않았던 유럽도 최근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독일이 2023년 10억유로(약 1조4000억원)의 독일 성장 펀드를 조성했고, 프랑스의 연금준비기금(327억유로)은 2022년까지 벤처 후기단계 및 성장펀드 등에 5억유로(약 7000억원, 총기금의 1.5%)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영국은 더 적극적이어서, 지난 7월 2030년까지 벤처투자를 포함한 비상장 주식을 500억파운드(퇴직연금의 2~2.5% 수준)까지 늘리고,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 기본펀드의 5%를 비상장 주식에 투자하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있다.이처럼 해외 퇴직연금들도 미국을 중심으로 벤처투자에 대해 적극적인 정책으로 바뀌고 있는 모양새다. 우리나라도 퇴직자 노후 자산의 보다 높은 수익률을 위해서도, 또 미래 성장동력인 벤처 산업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퇴직연금의 벤처투자'를 보다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실리콘밸리, 어떻게 50년 이상 신성장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벤처 신산업 하면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빼놓을 수 없다. 1970년대 이후 반도체, 인터넷, 빅테크, 유니콘과 같은 신산업과 신분야를 탄생, 성장시켰고, 최근엔 생성형 AI 급성장의 산실이 되고 있다. 물론 최근 와선 중국, 인도 등의 벤처산업 비중도 높아지곤 있지만, '벤처의 메카' 하면, 역시 실리콘밸리다. 어떻게 해서 50년 이상 신성장동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전문가들은 실리콘밸리 생태계의 특징으로 다음 네 가지를 꼽는다.첫째, 뭐니 뭐니해도 스타트업과 같은 고위험·고수익 벤처에 적극 투자해주는 벤처캐피털 자금줄이 풍부하다는 것. 2023년 기준 미국 전체 벤처캐피털 투자액은 856억 달러(약 119조원)인데, 그중 거의 85.7%인 749억 달러(약 104조 원)가 실리콘밸리 지역에 투자됐다. 이는 전 세계 벤처캐피털 투자액의 무려 53.3%고, 미국 내에서 벤처투자 기준 2, 3위를 달리고 있는 뉴욕과 보스턴 대비로는 각각 5, 9배, 중국 전체 대비로도 약 3배일 정도로 엄청난 규모다.둘째, GAFA(구글·아마존·페이스북·애플), 인텔과 같은 대형 글로벌기업의 스타트업 인수·합병(M&A) 매수가 많다는 점이다. 투자 회수(EXIT) 수단으로서의 M&A는 상장(IPO)까지의 장시간을 요하지 않는 이점이 있는 데다, GAFA와 같은 세계적 기업에 의한 M&A나 투자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스타트업 창업자에게 대단한 매력이다. 실제 미국 스타트업들의 투자 회수는 IPO에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90%가 M&A다. 또한 대기업뿐 아니라 유니콘으로 덩치를 키운 비상장기업들이 M&A 주체가 되는 사례도 종종 나오고 있다. 예컨대 2024년 기준 기업 가치 약 1,200억 달러의 에어비엔비(Airbnb)는 지금까지 20개 이상의 기업을 인수했다고 한다. 셋째, 특히 실리콘밸리의 장점으로 꼽히는 액셀러레이터(Accelerator)의 존재다. 액셀러레이터는 창업자가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를 받을 때까지 일종의 가교역할을 하며,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자문, 멘토링, 초기투자 등을 담당한다. Crunchbase에 의하면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실리콘밸리 지역에는 VC의 직접 투자를 받은 초기단계 이상 스타트업 수가 2만 여개나 된다. 최근 중국 등 전 세계에서 액셀러레이터들이 늘고 있지만, 실리콘밸리와 같은 '빅샷' 성공 사례는 흔치 않다. 시장에서 손꼽는 대표선수는 Y콤비네이터, 500스타트업, 플러그앤플레이, 테크스타. 그중에서도 Y콤비네이터는 미국 액셀러레이터 평가 1위로, 에어비엔비, 도어대시, 드롭박스, 코인베이스, 레딧 등을 키워냈고, 이 5개사의 기업가치는 합계 2,354억 달러(353조원, 2023년 말 기준)이다.마지막으로 또 하나 꼽는다면, 전 세계에서 몰려들고 있는 젊은이들의 창업정신과 이를 뒷받침하는 실리콘밸리의 창업문화다. 우선 실리콘밸리 벤처기업의 약 40%가 외국인 창업자이고, 대부분 스탠퍼드, 버클리대학 등의 유학 경험이 있다. 그만큼 국내외로 열린 창업문화란 얘기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창업자와 투자자 간의 프레젠테이션과 토론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공식·비공식 만남을 통한 상호 신뢰 구축,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 등이 실리콘밸리를 특징짓는 단면이라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출생률 저하와 고령화 등으로 잠재성장률이 1%대까지 하락한 상태다. 보다 적극적인 개방으로 풍부한 해외 자금줄을 확보하고, 산학과 투자자의 열린 창업문화 등으로 제대로 된 '한국판 실리콘밸리 생태계'를 구축해보자. '창업 국가 코리아'를 맘껏 구가해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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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언팩] 수도권 23만 가구 공급/부동산세제개편안/오세훈vs박원순 책임공방](https://i.ytimg.com/vi/9SG7xLYbfJs/hqdefault.jpg?width=1920&quality=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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