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③ 성적표가 없어서 불안해요
한 대학생이 말했다. 뭔가 해야 할 과제가 없어서 불안한 느낌이 든다고. 예전에는 시험 점수가 잘 나오면, 본인이 잘하고 있다고 안도하고, 점수가 부족하면 빈 부분을 채우려 애쓰면 되니까 편했다고. 성적표가 안 나오니 오히려 불안하다고. 얼마 전 시청한 KBS 다큐멘터리 <다큐3일>의 한 장면이다. 참으로 밝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의 대학생인데, 인터뷰 말미에 시험과 성적표를 그리워하는 얘기를 남겼다.당신은 고등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매달 시험 보고, 등수가 적힌 성적표를 다시 받아보고 싶은가? 그때가 뭐가 좋아서 다시 돌아가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으나, 나는 영상 속 학생의 마음이 이해된다. 참으로 아프게 이해된다.예전, 그리 멀지 않은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는 선명한 목표가 있었다. 대학에서 A라는 학과를 졸업하면, 대부분이 B라는 진로로 흘러갔다. 기업에서 한 직무를 맡으면, 최소한 몇 년, 운이 좋으면 수십 년을 그 일만 하면 됐다. 우리 삶의 흐름은 크게 세 단계였다. 인생의 첫 1/3은 공부하며 준비하고, 다음 1/3은 두어 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보내고, 마지막 1/3은 은퇴하며 여생을 보내는 식이었다. 인생 삼분론이 비교적 명확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삼분론은 통하지 않는다. 내 수업에는 60대 나이의 석사과정 학생이 보이고, 70세가 넘으신 선배들도 직업 전선에서 물러날 기미가 없다.요컨대, 내가 젊었던 시절만 봐도, 우리 사회에서 각자의 삶에는 선배들이 걸어간 경로가 내비게이션 안내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각자의 취향, 꿈을 조금만 누른다면, 그 경로대로 안전하게 걸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 내비게이션이 꺼졌다. 아니다. 먼저 경로를 보여주며 길을 갔던 선배가 말한다. 자신이 걸어온 길대로 따라오면 안 된다고. 그 길은 이미 끊어졌다고 말이다.모든 게 흔들리고 있다. 사회의 목표, 조직의 목표, 그에 따라 개인의 목표까지 동시에 흔들린다. 젊은 세대는 윗세대에게 묻고, 서로에게 답을 찾아보지만, 그 누구도 명확하게 답을 얘기하지 못한다. 보이스피싱처럼 보이는 강의, 300만 원 내고 자신의 강의만 수강하면 답이 보인다고 현혹하는 저질 온라인 콘텐츠만 범람하고 있다."교수님이 제 롤모델입니다." 가끔 이런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 말이 참으로 부담되고, 틀렸다고 본다. 이 시대에는 롤모델이 없다. 많은 이들이 한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뛰어야 했던 고속 성장형 산업화 시대에는 롤모델이 명확했다.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제일 잘 뛰는 사람이 롤모델이었다.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좋게 말하면 무한한 자유와 꿈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두어 명을 롤모델로 삼아 쫓아가는 경로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한다. 한정된 자원으로 산업을 키우던 시대를 넘어서, AI라는 두 번째 지능을 새로운 레버리지로 삼아서 한없는 꿈을 꾸는 시대를 말이다. 여기서 '무한한 자유와 꿈'이란 표현이 불편한 가시처럼 느껴질 수 있다. 미세 먼지 가득한 듯 숨 막히는 현실인데, 무슨 자유와 꿈을 얘기하냐고 말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AI라는 거대한 전환이 우리에게 미세 먼지보다 더 큰 압박과 답답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이 먼지 뒤편에는 그간 우리가 잊고 지냈던 자유와 꿈을 향한 여정이 펼쳐질 수 있다고 말이다.그때까지 선배가 후배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그리고 때로는 후배가 선배에게, 아이가 어른에게, 이렇게 얘기해주면 좋겠다. 나도 방향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발을 내딛다 보면, 좋은 방향이 보일 것 같다고, 네가 사랑하고 빠져들 길을 멋지게 찾을 것이라고, 그때까지 내가 곁에서 친구가 되어줄 테니,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지내자고 말이다.<다큐3일>속 대학생은 젖은 머리로 수건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수면 바지 차림, 집 앞에 분리수거할 때 신을만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런데 표정은 참 밝았다. 그 학생에게 꼭 얘기해 주고 싶다. 성적표는 없지만, 당신이 오늘 스스로 내린 결정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말이다. 미세 먼지를 통과해서 당신이 걸어갈 꿈의 여정을 응원한다고.
[임희윤의 시대&뮤직]한반도를 거대한 '문화의 자기장'으로 만들자
그들을 '오게' 하는 건 음악과 드라마이지만 그들을 '오래' 머물게 하는 건 그 너머에 있다. 지난 28일 에어비앤비가 서울 성동구에서 연 미디어 간담회 현장에 찾았다. 토론 사회자로 참가했다 여러 통찰을 얻어 왔다. 이날 에어비앤비는 한국을 방문한 해외 여행객 4500명을 대상으로 최근 진행한 'K-컬처와 한국 여행' 설문 조사 결과를 밝혔다. 이에 따르면, 'K-컬처가 한국 여행에 대한 관심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 응답자는 무려 94%다. 한국의 음악, 영화, 드라마가 실제로 대다수 여행객이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러나 단순히 뮤직비디오에 나온 건물, 드라마에 나온 계단에 가서 인증샷만 찰칵 찍고 떠나는 걸 원하는 건 아니었다. 전체의 91%는 '진정한 현지 문화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92%는 K-팝을 넘어 음식, 역사, 자연 등 폭넓은 한국 문화를 경험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일까. 74%는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한 서울 외 지역을 방문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현실은 많이 달랐다. 3분의 2에 달하는 66%가 서울에서 대부분의 일정을 소화했다고 했다. '동백꽃 필 무렵' '갯마을 차차차'를 보고 'Pohang'(경남 포항)을 검색해 보고, '도깨비' '폭싹 속았수다'를 통해 'Gochang'(전북 고창)을 찾아본 이라도 연계해서 즐길 다른 문화나 좋은 숙박 시설이 없다면 간다 해도 당일치기 인증샷 여행에 그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스스로를 돌아봐도 그렇다. 해외 여행을 갈 때 공항에 면한 대도시를 거점으로 삼되, TV나 유튜브에서 본 근사한 풍광을 떠올리며 타 지역을 가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가끔은 복잡한 교통편이나 다른 볼거리의 부재 때문에 기약 없는 '다음에…'만 뇌까린 게 부지기수다. 그 '다음'은 10년째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큰맘 먹고 나선 지역 여행이 반짝반짝한 수도의 야경보다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경우도 많다. 취재차 노르웨이를 방문했을 때 수도 오슬로보다 더 좋았던 건 멀리 서안에 자리한 고도(古都) 베르겐이었다. 옛 바이킹의 수도로서 알록달록한 브뤼겐의 구시가도 아름다웠고, 무엇보다 베르겐 고성(古城)에서 고색창연한 성벽과 노을을 배경으로 관람한 바이킹 포크 밴드 '바르드루나'와 팝가수 오로라의 합동 콘서트는 잊을 수 없다. 다음엔 특별한 공연이 있는 기간에 여러 날 숙소를 잡아 베르겐에 머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돌아온 뒤, '노르웨이 다녀왔어? 오슬로는 어때?'라 묻는 지인들에게 베르겐행을 추천한 게 십수 년간 헤아릴 수 없다. 한국은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해외 여행객들의 지역 관광 비율이 낮은 편이다. 가까운 일본만 봐도 다르다. 일본 소도시 여행이 한국인들에게도 중요한 화두일 정도다. 인프라와 홍보가 두텁다. 그럼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문화 콘텐츠를 통해 찾는 이가 절대다수인 나라인 만큼, 한반도를 거대한 '문화의 자기장'처럼 만드는 건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도 언젠가부터 지역 축제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하지만 차별화된 축제는 드물다. TV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비슷비슷한 가수들을 섭외해 대동소이한 잔칫상을 차려낸다. 자국민들조차 시큰둥하다. 하지만 한국 문화를 조화롭게 차려낸 음악 축제도 이미 꽤 있다. 전북의 전주세계소리축제, 광주광역시의 ACC 엑스뮤직페스티벌은 우리 전통음악을 기반에 두되 해외의 첨단 음악, 실험 음악과 충돌하는 특별한 난장을 만든다. 며칠씩 이어지는 이런 축제를 지역 관광과 연계해 해외 관광객까지 끌어들인다면 어떨까. 숙박, 관광과 문화 체험 프로그램까지 연계해 'K-지역 관광/문화 체험'의 시험지로 써볼 만하다. 에어비앤비 토론 때 프랑스 출신 방송인 파비앙 씨의 이야기가 귓가에 생생하다. 최근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는 그는 "외국 친구들은 이제 한국인처럼 살아보기, 한국 문화 더 깊게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편의점에 들러도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컵라면에 치즈 소시지를 직접 넣어 녹여 먹고 싶어 한다"면서 "원주 한지테마파크에 가서 만들기 체험을 하고 더 나아가 한지에 기록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까지 알려주면 한국 문화와 역사를 자연스레 배우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인의 입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음되는 게 무척 신기했다. 그렇다. 케이팝을 듣고 멀리 한국까지 날아온 이들을 더 오래 머물고, 더 깊게 느끼게 하는 힘. 5박이 10박이 되고, 5년이고 10년이고 한국 문화를 '파게' 만드는 그 무언가는 이제 우리가 설계하기 나름이다. 관광객 숫자가 는다고 당장의 그래프에만 집착하다 대충 흘려보내기엔 지금의 이 흐름이 너무 소중하다. 100년 뒤에도 한국 팬이 넘쳐나는 지구별을 그려본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AI 열풍, 닷컴 버블의 재현인가
최근 2~3년간 글로벌 주식시장을 지배한 핵심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이다. 엔비디아 주가는 2022년 말 약 14달러에서 2026년 4월 약 200달러로 3년 만에 14배 이상 상승하며 시가총액 4조 9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오픈AI는 2026년 초 기업가치 8400억 달러에 대규모 투자를 유치했고, 앤트로픽 역시 수천억 달러 수준의 평가를 받으며 시장 기대를 끌어올리고 있다.그러나 이 같은 급격한 성장 이면에서는 경고 신호도 뚜렷하다. 2025년 한 해 AI 분야에 2000억 달러 이상의 자금이 투입됐지만, 수익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오픈AI는 약 120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지만, 막대한 연산 비용과 인건비로 약 90억 달러의 현금을 소진하며 대규모 적자 구조를 지속하고 있다. 매출이 증가해도 비용이 더 빠르게 늘어나는 구조가 이어지면서, 시장에서는 닷컴 버블을 떠올리는 시각이 확산되고 있다.이 같은 우려는 과거와의 유사성에서 비롯된다. 시장을 움직이는 힘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대다. 인터넷이 산업 전반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이 2000년대 초 나스닥 버블을 형성했듯, 현재도 AI가 인간의 지능을 대체하고 생산성을 혁신할 것이라는 기대가 기업가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투자 기준 역시 수익성보다 미래 가능성에 기울어 있다. 과거에는 클릭 수와 방문자 수가, 지금은 모델 규모와 컴퓨팅 파워가 기업 가치를 설명하는 지표로 활용되며 적자 구조를 정당화하고 있다.반면 현재 상황은 닷컴 버블과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반론도 설득력을 갖는다. 가장 큰 차이는 주도 세력이다. 당시에는 수익 기반이 취약한 벤처기업들이 시장을 이끌었지만, 지금은 마이크로소프트·구글·아마존과 같은 빅테크가 AI 투자를 주도하고 있다. 이들은 연간 수천억 달러의 현금 흐름을 바탕으로 대규모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재무적 체력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는 오픈AI에 130억 달러를 투자했고, 아마존과 구글도 앤트로픽에 각각 수십억 달러를 투입했다. 과거처럼 자금 경색으로 시장이 급격히 붕괴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다.기술 환경 또한 다르다. 인터넷 시대에는 인프라 구축에 시간이 필요했지만, AI는 이미 구축된 클라우드 기반 위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특히 기업용 영역에서는 업무 효율을 개선하는 성과가 나타나며, 점진적인 수익화 가능성도 확인되고 있다.결국 AI 열풍의 향방은 하나로 수렴된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돈이다. 기술의 가능성은 이미 입증됐지만, 이를 지속 가능한 수익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기업 고객이 실제 비용을 지불할 만큼의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확산되고, 동시에 막대한 컴퓨팅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연간 수억 달러에 달하는 GPU 운영 비용을 효율적 알고리즘과 자체 칩으로 낮추지 못한다면 현재의 성장도 지속되기 어렵다. 한마디로 AI 향방은 얼마나 빠르게 '돈이 되는 산업'으로 전환되느냐가 그 운명을 결정할 거란 생각이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 ⑪]뒤늦게 용감해진 당신에게 묻다
예전에 몸담았던 조직이 비난의 대상이 될 때, 기분이 묘해진다.먼저 드는 생각은 떠나서 다행이었다는 것이다. 세상만사(世上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했으니, 험한 꼴을 비켜간 셈이다.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다른 생각이 따라온다. 조금 더 오래 있었더라면, 지금의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근거는 없지만.어느 쪽이든 과거가 부정되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지 않다. 사람들이 어떤 집단을 비난하는 방식이, 그 안에 있었던 나의 시간을 함께 욕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라도 목소리를 내기란 만만하지 않고, 침묵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장면이 떠오른다. 그때는 쓰지 못했던 문장들이 이제는 쉽게 다가온다.■ 장면 1방 안은 조용했다."왜 그렇게 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가, 분위기가 한 번 꺾인 뒤부터였다.몇몇은 시선을 내렸고, 몇몇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노트북을 두드렸다.누군가는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영리한 사람들은 처음부터 침묵했다. 입을 다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의견이라는 듯이.(좋은 기자의 태도는 자리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질문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고 배웠다. 이미 기자가 아니었지만, 그 습관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장면 2회사는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다.더 빠르게, 더 크게, 더 멀리.나는 그때, 커질수록 옆을 보고, 때로는 뒤를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돌아온 것은 질책이었다. 아직 그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라는 말.문을 나서며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누군가의 얼굴보다, 나 자신의 불안이 더 또렷했기 때문이다.타이밍도 좋지 않았다.조직 생활을 하고 있다면, 꽤나 익숙한 장면일 것이다. 평가, 보상, 다음 기회. (더 이상) 말하지 않는 데에는 언제나 그럴듯한 이유가 있고, 그것을 '현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그렇게 겪고도 또다시 문제를 제기하는 나의 감각이 때로는 성가시다. 하지만 그것을 애써 고칠 생각은 없다. 불편함이 사라지는 순간, 아마도 내가 나를 배신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겠다.조직이 성장할수록 침묵은 빠르게 퍼진다.상처받은 사람도, 이상한 결정도, 대부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그 침묵이 각자의 안전이 된다.그러다 그 힘이 흔들리면, 풍경은 바뀐다.사람들이 모여들고, 말들이 쏟아진다.조금 전까지 조용하던 곳이 갑자기 정의의 광장이 된다.쓰러진 대상은 그냥 두어지지 않는다. 탈탈 털리고, 자근자근 밟힌다. 넘어졌기 때문이다.프랑스의 사상가 미셀 드 몽테뉴는 『에세』에 이렇게 썼다."인간은 자신이 비겁했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이 문장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때의 조용한 방을 떠올린다.사람들은 과거의 침묵을 견디는 대신, 현재의 분노로 자신을 씻어낸다. 쓰러진 대상을 더 세게 밟을수록, 그에게 고개를 숙였던 시간이 더 빨리 지워지는 것처럼 느끼는 것일까.분노는 종종 정의보다 먼저 온다.정말로 옳아서가 아니라, 예전에 옳지 못했다는 기억이 너무 아프기 때문일 거다.개인도, 군중도 대개 뒤늦게 용감해진다. 상대가 강할 때는 말하지 않고, 약해졌을 때에야 외친다.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이렇게 적었다."악은 사악해서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그때 우리는 생각하지 않았다.옳고 그름을 따진 것이 아니라, 안전과 불안을 계산했을 뿐이다.손익이 맞는 쪽으로, 아주 조용하게.몰락한 힘 앞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언제나 비슷하다.강할 때는 침묵. 약해지면 정의.그저 유리한 쪽에 먼저 섰을 뿐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았고, 어쩌면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뒤늦은 정의는 정의라기보다 계산에 가깝다.그리고 침묵이든 웅변이든,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것들이 오랜 시간에도 살아남을 진실인지는 아직 알기 어렵다.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들은 대부분 이미 오래전에 쓰였다.니체는 도덕으로 포장된 복수를 말했다.토크빌은 다수의 폭정을 경고했다.그러나 이 글이 묻고 싶은 것은, 아마도 이 질문일 것이다.그들이 강했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는가.그리고 그들이 악이었을 때, 당신은 정말 선이었는가.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②노조는 AI와 싸워야 하나?
최근 내게 걸려 오는 전화의 발신지가 바뀌고 있다. 과거엔 기업의 전략기획 부서나 IT 팀이 주를 이뤘다면, 요즘은 노사협의체나 노동조합 측의 연락이 부쩍 늘었다. 질문은 단 하나로 수렴된다. "AI 도입을 앞두고 있는데, 도대체 우리 노동자들은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이 질문을 마주할 때 내 마음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우선 반갑다. 막연한 공포에 질려 눈을 감는 대신, 변화의 실체를 파악하고 대응하려는 의지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려가 엄습한다. 대화를 나눠보면 AI 도입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막상 "무엇을 논의할 것인가?"라는 각론으로 들어가면 테이블 위에 올릴 어젠다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협의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협의를 시작하려는 형국이다.이런 상황은 올 초 현대차 노조에서도 그대로 펼쳐졌다. CES 2026에서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가 공개되자 노조는 노사 합의 없이는 단 한 대도 들어올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노조 스스로도 덧붙였다. 도입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반대가 아니라 논의 요청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논의해야 하는가? 바로 거기서 말문이 막힌다.지금 우리에겐 기술보다 질문의 설계가 시급하다. 우리는 오랫동안 "AI가 내 일자리를 뺏을 것인가?"라는 빈약한 질문에 갇혀 있었다. 이제 질문의 틀을 바꿔야 한다. X축을 현재와 미래로, Y축을 AI가 대체할 수 있는 것과 대체하면 안 되는 것으로 나누어 보자. 대체할 수 있는 것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 영역이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될 것이다. 이는 시간과 순서의 문제일 뿐, 거스를 수 없는 파도다. 진짜 핵심은 대체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는 기술 수준과 무관하게 인간이 끝까지 붙들어야 할 존엄과 가치의 영역이다. 어떤 업무를 효율화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가치를 인간의 손에 남겨둘 것인가를 논의하는 조직은 거의 없다.우리가 겪는 혼란의 본질은 속도에 있다. 경제학자 카를로타 페레즈는 기술 혁명이 두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기술이 폭발하며 기존 질서를 붕괴시키는 설치 국면과 새로운 법과 제도가 정착되며 번영을 이루는 전개 국면이다. 과거 산업혁명기에 이 과정은 수십 년이 걸렸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이 과정을 압축하며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국가와 산업, 기업마다 서 있는 단계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어떤 곳은 여전히 디지털전환, DX의 연장선에서 프롬프팅 기법에 매몰되어 있고, 어떤 곳은 이미 AI 에이전트가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는 2단계로 진입했다.이 전환이 조직 내부에도 그대로 관통한다. AI가 실행의 상당 부분을 맡게 되면서, 인간에게 요구되는 지능의 종류 자체가 바뀌고 있다. AI는 지금 KPI, 정량, 효율 중심의 산업화 지능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동시에 구성원들을 "나는 왜 일하는가, 어디로 가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 앞으로 내몰고 있다. 일은 빨라지고 많아졌는데 공허하다는 감각. 이것이 지금 수많은 조직 구성원들이 느끼는 본질적 혼란이다. AI가 이미 점유한 영역에서 인간이 계속 다투려 한다면, 개인도 조직도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조직 구조도 함께 변하고 있다. 소수가 비전을 제시하고 다수가 실행하던 리더, 팔로워의 이분법은 끝났다. 이제 모든 구성원은 직급과 무관하게 리더처럼 사고해야 한다. 정답을 빠르게 수행하는 능력보다, 정답이 없는 안개 속에서 방향을 설정하는 능력이 중요해졌다.현장에서 솔직히 말하면 안타까운 장면도 자주 목격한다. 기업은 새로운 역할을 요구하는데 구성원은 변화를 외면한 채 고용 보장만 요구하는 경우. 반대로 회사는 효율화에만 급급해 구성원이 새 역할을 배울 시간과 기회를 주지 않는 경우. 둘 다 지는 게임이다.노사가 마주 앉기 전, 스스로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 조직은 AI를 통해 사업을 확장할 것인가, 효율화할 것인가? 그 방향에 따라 구성원의 역할은 어떻게 달라지는가? 그 역할에 맞는 역량을 노사가 어떻게 함께 키울 것인가? 이 세 질문이 정리되지 않으면 협의 테이블에 앉아도 서로 할 말이 없다. AI 기술의 동향이나 프롬프트 작성법보다, AI와 인간의 유사성과 차이를 이해하고 변화하는 구성원의 역할과 책임을 직시하는 일이 먼저다. 테이블에 앉기 전, 우리는 먼저 이 거대한 질문들과 독대해야 한다.
[임희윤의 시대&뮤직]'K헤리티지'와 노리개 문화
'습관성 K 접두어 추가 현상' 최근 우리 언론과 언중에 떠도는 이 기현상을 아예 어문 규정에 추가해 줄 것을 국립국어원에 제안한다. '반농담'이다. 이런저런 말에 하도 'K'가 붙다 보니 살짝 어지러워서 그런다. 요즘은 또 'K헤리티지'란 말이 추가됐다. 케이팝 그룹이 개량된 한복이나 노리개를 착용하고 화보나 영상을 찍는 유행, 국립중앙박물관의 재치 있는 기념품에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트렌드에 착안한 말로 보인다. 'heritage'가 '유산'이니 'K헤리티지'는 한국 문화유산이라 해도 충분하다. 'K 접두어 현상'은 'K방산'이나 'K뷰티'처럼 그 분야에서 해외가 한국을 주목하거나, 수출이 잘 되든가, 아니면 젊은 층이 뜻밖의 한국적인 뭔가에 열광할 때 주로 발생한다. 이젠 국가유산청과 국가유산진흥원까지 이 말을 갖다 쓴다. 두 기관은 지난달 30일 'K헤리티지 스테이지' 공모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K헤리티지'건 '국가 문화유산'이건 우리 전통문화가 조명받는 현상은 어쨌든 반갑다. 스마트폰과 숏폼 게시물을 통해 도파민 분비를 자극하는 영상에만 빠지기 쉬운 시대다. 세월의 나이테가 쌓여 그윽한 우리의 오랜 고전을 돌아보는 물결은 그래서 더 의미 있다. 최근엔 케이팝 최대 그룹인 방탄소년단이 'ARIRANG' 앨범을 내서 미국과 영국 차트 1위에 올렸다. 세계 가수 최초로 유튜브 공식 채널 구독자 수 1억 명을 돌파한 그룹 블랙핑크는 새 앨범 'DEADLINE'을 내면서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했다. 멤버들이 전시 해설을 맡거나 박물관 공간 일부를 블랙핑크의 상징색으로 꾸미고 신곡이 흘러나오게 했다. 하지만 'K헤리티지'가 때론 제품과 양념으로만 소비되는 듯해 아쉬울 때도 있다. 또, '한국적'이란 수식어로 상찬받는 콘텐츠 속에서 실상은 한중일 문화가 정체불명으로 뒤섞인 서양 관점의 오리엔털리즘 범벅을 마주하게 되는 때도 왕왕 있다. 해외 팬들의 이국 취향을 자극하는 소품이나 장치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국가 홍보, 방문객과 매출 증대, 유튜브 조회수와 구독자 수 증가 등을 내세우면서 국가 기관이 이런 흐름에 동참하기도 한다. 지난해 국가유산청이 공식 유튜브 채널에 공개한 '탈, 춤으로 잇다' 영상은 33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올해 초 열린 문화유산 이수자 간담회에서는 전통무용인들의 성토도 나왔다. 한 참가자는 "유명 댄서를 내세우고 탈이 등장했다 뿐이지, 봉산탈춤 특유의 춤 선은 어찌 된 일인지 영상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면서 "'봉.산.탈.춤' 네 글자를 알렸다고는 할 수 있어도 독특하고 아름다운 우리 춤의 매력을 알리는 데는 실패한 콘텐츠"라고 말했다. 우리 전통 유산이 어떤 식으로든 호명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그 미학이 거세된 채 명칭과 인상만 알려지는 것은 공허하다. 요즘처럼 'K컬처'가 주목받는 시대엔 그 공허가 더 안타깝다. 세계인은 물론이고 전통에 호기심을 갖게 된 한국인에게도 그 맥락과 매력을 알릴 절호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국악인의 억울한 사연을 들었다. 이름만 대면 알 케이팝 녹음에 연주자 겸 작곡자로 참여했다가 저작권 배분을 받지 못했다는 것. 새로 창작된 국악 선율이 절묘하게 주효한 글로벌 히트곡이었음에도 말이다. 힙합, 전자음악 편곡을 맡은 프로듀서진이 참여 국악인 모두를 작곡가 크레딧에서 빼버렸다고 한다. 엄연한 창작을 '어차피 국악이 비슷비슷하게 들리는데, 이게 연주이지 작곡이냐'고 치부했기 때문이다. 애당초 진지한 공동 작업의 대상이 아니라 독특한 장치나 이국적 양념쯤으로 생각했다는 얘기다. 전통문화를 구성하는 유형 문화, 무형 문화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개량한복, 뮷즈 같은 제품형 전통문화, 해외 쇼핑몰에서도 쉽게 복제해 팔 수 있는 물품은 각광받는 가운데 복제가 힘든 고유의 문화는 적당히 넘어가는 건 아닌지…. 전통문화가 'K컬처'란 산업적 강령의 작은 노리개 정도에 그치는 곳은 없는지 돌아볼 때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솔로 유니콘 시대의 개막
글로벌 창업 생태계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수백 명의 엘리트가 밤새워 만들어냈던 유니콘(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의 비상장사)을 이젠 극소수(10인 이하)의 창업자와 직원들만으로 달성하고 있다. 바야흐로 '솔로 유니콘(Solo Unicorn) 시대'의 개막이다. 실리콘밸리 데이터에 따르면 2021년 단 2개에 불과했던 솔로 유니콘이 2025년엔 52개로 연평균 126%의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이러한 변화의 핵심 동력은 '에이전트 AI' 기반의 생산성 혁명이다. 과거 수천 명이 감당하던 코딩, 마케팅, 고객 응대를 AI 시스템으로 대체하면서 1인당 생산성이 50~100배까지 치솟았기 때문이다. 이제 기업 가치는 인력 규모가 아니라 보유한 AI 에이전트의 지능과 실행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시장의 지배적 의견이다.어떤 분야가 활발한가. 고부가가치 지식서비스, 미디어, 이커머스, 바이오테크의 순으로 활발하다. 고부가가치 지식서비스에선 특히 법무, 회계, 세무 분야가 대표적이다. 예컨대 이전엔 하나의 소송을 위해 수주간 변호사 50명이 수만 장의 증거 자료를 분석했다면, 지금은 한 명의 창업자가 운영하는 에이전트 AI 하나로 초당 10만 장 문서를 분석하고, 승소확률 계산 및 계약서 독소 조항 적발 정확도도 90% 이상이라고 한다. 인건비·운영비를 70~80% 줄인 만큼, '솔로 유니콘 등극'이 가능해졌단 얘기다. 대표 기업으론 하비(Harvey)와 아이언클래드(Ironclad)를 꼽는다.미디어 산업에선 피카(Pika) Labs나 헤이젠(HeyGen) 같이 소수 정예로 시작해 영상 제작의 문법을 바꾼 기업들이 선두 주자다. 이들은 기획부터 촬영, 다국어 더빙과 실시간 로컬라이징까지 에이전트 AI를 활용해서, 맞춤형 콘텐츠를 전 세계에 송출하는 '1인 글로벌 스튜디오' 모델을 정착시켰다.이커머스와 바이오테크 분야도 빼놓을 수 없다. 미드저니(Midjourney)는 AI로 디자인과 마케팅을 최적화시켜, 40여 명의 직원으로 기업 가치를 13조 원으로 끌어올렸다. 인실리코 메디슨(Insilico Medicine)도 단백질 구조와 신약물질 분석과정을 AI로 자동화, 5~6년 걸리던 제약사의 임상 전 단계를 18개월 만에 돌파, 유니콘 지위(4~5조 원)를 확보했다.이들의 공통적인 성공 요인은 뭔가. 한마디로 초저비용, 빠른 의사결정, 틈새시장 확보라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클라우드와 AI 구독 서비스로 인프라를 구축해서 고정비를 최소화했고, 창업자 중심의 의사결정 체계로 시장 변화에 대한 실시간 대응, AI활용으로 대기업 침투가 어려운 니치 마켓 장악 등이 그것이다.어떤 효과가 있을까. 솔로 유니콘의 증가는 고용 지표엔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창업 생태계의 선순환 측면에선 대단히 긍정적이다. 막대한 투자자금이 필요 없는 만큼, 벤처캐피털들이 더 많은 벤처 기업에 분산 투자할 수 있고, 이는 연쇄 창업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솔로 유니콘의 고부가가치 서비스는 전통 제조업·서비스업의 운영 비용을 절감시켜, 산업 전반의 생산성을 대폭 끌어올릴 수 있는 강력한 동인이 될 수 있다.우리나라는 고령화·저성장 위험에 직면해 있다. 따라서 벤처 창업과 신산업 육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런 국면에서 솔로 유니콘 육성은 경제·산업 활성화는 물론 AI 산업과의 시너지효과도 확실히 낼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단 생각이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⑩] 침묵할 때와 나서야 할 때-'광장'의 쇼랑과 '자기만의 방'의 파스칼
봄은 나서는 자들의 계절이었다. 광장에, 거리에 목소리가 모였다. 그런데 요즘의 봄은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같은 장면이 동시에 '화면'에서도 펼쳐진다. 겨우내 안으로 파고들었던 확신은 알고리즘 위로 떠오르고, 소수가 공유하던 독설은 네트워크를 통해 증폭된다. 빠르게 복제되고, 오래 노출된다.다만 침묵은 검색되지 않는다.새로운 무대가 열리면 어김없이 웅변이 그 자리를 채운다. 확신에 찬 목소리, 상대를 베어 넘기는 날 선 문장들. 사람들은 화려한 말의 잔치에 환호한다. 그러나 조명이 꺼지고 난 뒤, 남는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 말이 거칠고 화려할수록 우리는 종종 그 안의 빈자리를 늦게 알아차린다. 소란스러운 언어는 때로 자신의 불안을 덮기 위한 소음처럼 들리기도 한다.무대 아래에는 시선을 낮추고 말을 아끼는 이들이 있다. 세상은 그들을 내성적이거나 소극적이라 부르지만, 어쩌면 말의 무게를 더 오래 견디는 쪽은 그들일지도 모른다.■ 웅변가의 독설, 그 가벼운 유혹살면서 마주한 웅변가들은 대개 매혹적이었다. 명쾌했고 뜨거웠다. 그러나 무대가 끝나고 조명이 꺼진 뒤, 그들과 마주 앉아 보면 묘한 공허가 느껴지곤 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구원할 듯 외치던 문장들은 사라지고, 타인의 인정에 목마른 초조함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독설은 때로 가장 쉬운 방식의 배설이 된다. 상대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가장 손쉬운 방식의 권력 행사다.에밀 쇼랑(Emil Cioran)은 '태어났다는 불행'에서 확신과 웅변의 허위를 여러 차례 지적한다. 그는 인간이 확신에 매달릴수록 스스로를 더 깊이 속이게 된다고 말한다.웅변은 진리를 드러내기보다, 때로 자기기만을 세련되게 포장하는 기술에 가깝다. 나서는 자들의 언어는 타인을 향한 칼날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자기 안의 불안을 향해 휘두르는 비명일지도 모른다.미디어는 질문보다 확신을 좋아한다. 망설임은 편집되고, 단정은 제목이 된다. 그 구조 속에서 웅변은 더욱 힘을 얻는다.■ 수줍은 외면, 그 깊은 응시소란 속에서 고개를 숙인 이들이 있다. 그들은 말할 줄 몰라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복잡함을 알기에 신중할 뿐이다.그들의 수줍음은 나약함이라기보다, 상황의 무게를 감각하는 예민함에 가깝다.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팡세'에 이렇게 적었다."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사실, 즉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나서는 자들이 소음으로 자신을 채울 때, 침묵하는 자들은 고독 속에서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들의 외면은 비겁함이 아니라, 거짓된 무대에 쉽게 동조하지 않겠다는 거리두기일 수도 있다.물론 침묵이 언제나 고결한 것은 아니다. 침묵 역시 계산이 되는 순간 다른 얼굴을 갖는다. 말하지 않음이 신중함이 아니라 편의가 될 때도 있고, 책임을 미루는 방식이 될 때도 있다.■ 말의 배반과 침묵의 복권우리는 오랫동안 웅변을 지성으로, 침묵을 무지로 오해해왔다. 그러나 인문학은 종종 그 반대를 말한다.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를 불편한 질문을 제거하고 세계를 단순한 감동과 확신으로 포장해 버리는 태도라 정의한다.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대답의 세계. 그곳에서 확신은 미덕이 되고, 망설임은 나약함이 된다. 웅변이 지배하는 곳에서 진실은 종종 소음 뒤로 물러난다. 매끈하게 가공된 문장만이 떠다닌다.독설이 현란한 이유는 알맹이가 비어 있어서다. 반대로 침묵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안에 너무 많은 생각이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요한 응시에서 찾은 힘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계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수줍음이 아니라 말의 과잉이다. 웅변하는 혀는 쉽게 단정하지만, 망설이는 눈동자는 쉽게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지금 우리는 어떤 말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가. 큰 목소리인가, 아니면 조용히 생각하는 사람의 눈빛인가.우리가 오늘 내뱉은 확신 속에 정말 생각이 충분히 머물러 있었는지 묻게 된다.어쩌면 곁에서 조용히 시선을 피하던 누군가는 더 오래 고민하고 있었을 거다.큰 목소리는 늘 먼저 도착한다. 그러나 오래 남는 것은 대개 늦게 도착한 생각이었다.그래서 책을 읽는다.이미 오래전 침묵 속에서 사유를 다듬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소음이 아니라 생각을 따라가기 위해.만사유책(萬事有冊).읽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① 대단한 지능을 만났는데, 왜 우리는 더 고단한가?
HFK, 트레바리, 최인아책방, 리댁션. 최근 내가 방문한 모임들이다. 누군가에게는 낯설겠지만, 배움에 목마른 직장인들이 모여드는 뜨거운 현장이다. 대학 강단보다 더 역동적인 에너지를 기대하며 그들과 AI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나는 그 현장에서 비명에 가까운 질문을 받았다. "AI로 성과는 나는데 왜 허탈할까요?", "일은 빨라졌는데 숨 돌릴 틈 없이 다음 작업이 밀려와요.", "결국 내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 아닌가요?" 새로운 기회에 관한 기대보다 거대한 변화의 파도에 휩쓸려 자신이 마모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우울이 짙게 배어 있었다.기업의 AI 교육 현장으로 가면 이 간극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경영진은 이런 요구를 던진다. "비전공자가 AI로 대박 성과를 낸 사례로 직원들에게 충격을 주세요.", "혼자서 팀 단위 성과를 낸 사례를 소개해 압박감을 주십시오." 이런 요구의 이면에는 직원들이 절박함이 없어 안 움직인다는 불신이 깔려 있다.반면, 강의장에 앉은 직원들의 눈동자는 흔들린다. 그들은 이미 AI라는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나침반이 없다. 자신의 전문성이 지워지고 있다는 상실감, 조직의 성과가 개인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소외감, 그리고 혁신이라는 이름 아래 홀로 생존을 감당해야 한다는 막막함에 짓눌린 모습이다. 사측은 몰아붙이고, 직원은 표류하는 형국이다.대단한 지능이 등장했는데, 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가? 우리가 여전히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사측은 AI 전환을 외치지만, 정작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갈지에 대한 비전은 모호하다. 리더들은 자본과 노동력을 대량으로 투입해 성과를 뽑아내던 자본 레버리지 시대의 종말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이제는 AI라는 두 번째 지능이 개인과 산업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시대다. 리더가 먼저 이 본질을 이해하고 비전을 재설계하지 않는 한, AI 도입은 조직의 피로도만 높이는 재앙이 될 뿐이다.직원들 역시 직시해야 할 사실이 있다. 이런 혼란의 원인은 리더가 무능해서가 아니라, 변화의 속도가 통제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회사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기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AI가 못하는 일을 찾으며 조직 내에서 도망 다니는 회피자, 지시를 기다리는 이행자의 정체성으로는 이 파도를 넘을 수 없다.해결책은 공존에 있다. 노사가 대립해 한쪽을 굴복시켜서 풀리는 사안이 아니다. 조직은 산업화 시대의 사고에서 벗어나 구성원과 고통을 분담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개인은 이제껏 학교와 직장에서 배운 친숙한, 그러나 이미 낡아버린 인지 시스템을 과감히 재구성해야 한다. AI라는 두 번째 지능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기 업의 역할과 책임, 흔히 기업에서 R&R이라고 부르는 것을 근본부터 재정의해야 한다.올해 초 출간한 저서에서 나는 이렇게 강조했다. AI는 인간을 대체하는 경쟁자가 아니라, 인간의 판단을 보조하고 확장하는 새로운 인지 능력이라고. 우리가 이 대단한 지능을 곁에 두고도 힘든 이유는, 두 번째 지능의 본질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채 화려한 기술과 눈앞의 프롬프트에만 현혹되었기 때문이다. 도구에만 매몰될 때, 우리의 타고난 뇌인 첫 번째 지능은 오히려 퇴화하고 만다.두 번째 지능을 키우는 법은 단순히 코딩을 배우거나 생성형 AI 사용법을 익히는 데 있지 않다. AI를 외부에 존재하는 도구가 아니라 확장된 메타인지 시스템으로 수용해야 한다. AI가 내놓는 결과물에 감탄하거나 압도당하기보다, 그것을 내 생각의 재료로 삼아 더 높은 차원의 판단을 내리는 훈련이 필요하다. 가끔 돌아보기 바란다. 두 번째 지능을 받아들인 후, 당신이 더 깊게 성찰하고 있는지, 당신의 인간적 사고가 더 날카롭게 벼려졌는지, 우리 조직의 사고가 더 촘촘하게 연결되고 확장되고 있는지를 말이다.그리고 실험자의 길을 가기 바란다. 정해진 절차를 효율적으로 따르는 모범생이 산업화 시대의 인재상이었다면, 두 번째 지능 시대는 자신의 가설을 세우고 AI와 협업하여 끊임없이 시도하는 실험가를 원한다. 완벽한 결과물을 기다리지 말고, 부족한 결과물을 AI와 함께 다듬어가는 과정 자체가 곧 지능을 키우는 과정이다.나는 우리가 고단함을 넘어서, 큰 도약을 하리라 믿는다. 이제 그 길의 초입에 들어섰다. <김상균의 두 번째 지능 시대>와 함께 그 여정을 시작해 보자.
[임희윤의 시대&뮤직]① BTS 컴백과 한류, 이젠 그 너머를 볼 때다
이달 21일 서울에서 열릴 방탄소년단의 컴백 쇼가 벌써부터 화제다. 특설무대가 설치되는 광화문 일대에 약 26만 명이 몰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한 시간짜리 공연의 연출자는 영국인 해미시 해밀턴 감독. 매년 지상 최대의 쇼로 꼽히는 미국 '슈퍼볼 하프타임 쇼'를 지휘한 인물이다. 이 메가톤급 컴백 쇼는 넷플릭스를 통해 190개국에 생중계된다고 한다. 한국을 방문한 해외 관광객들 중 상당수는 경복궁, 덕수궁, 숭례문이 현대적 빌딩과 어우러진 이율배반적 스카이라인에 매혹된다고 한다. 심장을 울리는 방탄소년단의 비트, 랩, 노래…. 이것이 강렬한 퍼포먼스와 무대 연출을 만나며, 더욱이 전통과 현대가 교차하는 서울의 랜드마크에서 펼쳐지리라는 데서 이번 쇼에 대한 기대가 남다르다. 서울 관광에 대한 잠재적 홍보 효과가 막대하리라는 예측도 나온다. 안전이나 시민 불편 문제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존재한다. 공연은 한 시간짜리이지만 종일 교통 통제가 불가피해 보인다. 통제가 촉발할 토요일 저녁 서울 한복판의 혼잡, 안전관리에 투입될 사회적·경제적 비용은 예상을 뛰어넘는 규모일 수 있다. 공연 시작 전후 흥분한 인파가 한번에 쏠릴 때의 위험성도 제기된다. 만에 하나 현장 관리에 실패한다면 이런 의문도 나올 수 있다. 방탄소년단이 국위선양의 아이콘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사기업이 진행하는 앨범 발매 기념 행사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리스크를 '우리 모두'가 떠안는 게 맞냐는 이야기다. 이는 사회적 비용을 감당할 만큼 이 행사가 충분한 '공공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시청권 이야기도 불거질 수 있다. 방탄소년단 컴백 쇼는 넷플릭스가 독점으로 중계하는 행사다. 넷플릭스와 하이브는, 190개국 3억 명이 가입된 네트워크에 뿌려지므로 서울 홍보 효과가 충분하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넷플릭스 가입자 중 절대다수가 이 콘텐츠를 선택해 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도심 혼잡과 안전 리스크는 대한민국이 오롯이 지불할 사회적 비용이지만 정작 그 주체인 국민 중 다수는 이 국가적 쇼를 지켜볼 수 없다. 넷플릭스 가입자만 즐길 수 있다. 넷플릭스의 국내 월간 이용자 수가 1000만 명을 상회한다는 통계도 있지만 우리 인구의 약 20% 수준이다. 최근 막 내린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의 경우, 독점 중계를 한 JTBC가 95%의 가시청 가구를 확보함에도 '보편적 시청권' 논란이 인 바 있다. 올림픽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진정한 스포츠 강국은 메달의 색이나 수로 정해지는 게 아니다. 소수 엘리트의 성과보다 전 국민이 일상에서 향유하는 건강한 '생활 스포츠'의 수준이 높아야 진짜 체육 강국이다. '태릉 스포츠'가 일각에서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받는 건 그 때문이다. 문화도 비슷하다. 문화의 요체는 이기는 것, 셈 세는 것, 버는 것 따위에 있지 않다. 문화의 본질은 꽃피우는 것, 편안한 것, 다양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더불어 함께 즐기는 것에 있다. 한 나라의 문화는 우상향 그래프로 '그려지는' 게 아니다. 다채로운 색으로 '칠해가는' 것이다. 어쩌면 '대한민국->BTS->국위선양->BTS->세계인의 관심과 막대한 홍보 효과'라는 흐름도는 자칫 '도식화된 환상'에 머물 수도 있다. 설사 '국가 홍보를 위한 모든 일=절대 선(善)'이란 명제가 참이라 가정한다 해도 할 일은 남는다. 차제에 이런 행사를 둘러싼 여러 요소에 대한 치밀한 과학적 접근과 논리적 연구가 수반됐으면 한다. '190개국의 3억 명이 시청할 수 있었다'든지 'BTS 앨범이 몇백만 장 팔려 또 자랑스러운 빌보드 정상에 올랐다' 등의 숫자와 보도자료 이면에 있는 것. 그 인과와 득실 관계를 여러 관점에서 한 번쯤 따져봐야 한다. '세계적'이란 수식어, '세계인 열광…'의 정신 승리만으로 배부르던 '문화적 곤궁기'는 진작에 지나왔다. 진정한 문화 강국, 사회 강국으로 가려면 이제 그 너머를 봐야 한다. 부디 이번 'BTS 2026 컴백쇼 서울'이 안전사고 하나 없이 시민 불편이 최소화된 상태로 성황리에 잘 마무리되길 기원한다. 한국의 성숙한 시민 의식, 뛰어난 인파 관리 능력이 쇼의 화려함 못잖게 세계인의 주목을 받길 바란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⑨]달팽이의 보폭으로 2월을 복구하다-고바야시 잇사의 달팽이와 니체의 망치
새해의 결심이 유효기간을 다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한 달이다. 2월의 찬 공기 속에는 1월의 호기로움이 남긴 미세한 민망함들이 떠다닌다. 헬스장 바닥에 떨어진 땀방울보다, 책상 머리맡에 적어둔 계획표의 여백이 더 무겁다.사람들은 이 시기를 '실패'라고 명명하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2월은 실패의 달이 아니라, 비로소 내 몸에 맞는 보폭을 찾아가는 '교정'의 시간이다. 1월의 계획이 남의 눈을 의식한 전시용이었다면, 2월의 재구성은 내 영혼의 안녕을 묻는 실존적 복구이어야 한다.■ 숫자가 지배하던 2월의 회의실임원 혹은 CEO 시절의 2월은 늘 서늘했다. 입춘이 지나도 봄은 오지 않았다.초라한 1월의 성적표를 들고, 연간 계획을 '현실화'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숫자를 만졌다. 그곳에서 계획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달성해야 할 고지였고, 수정은 곧 무능의 자백이었다. "올해 목표를 재구성해라"는 지시는 "더 쥐어짜라"는 말의 우아한 통역어였다. 우리는 그럴듯한 그래프를 그려내야 했다. 하지만 그 계획 안에 정작 '나'라는 인간의 리듬이 들어설 자리가 있는지는 묻지 않았다.숫자가 커질수록 개인의 호흡은 가빠졌고, 조직의 효율이 높아질수록 개인의 감수성은 말라갔다. 그때 우리가 세운 것은 계획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가둘 창살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이쿠가 건네는 서두르지 않는 위로조직을 떠나 내 책상 위에 느슨한 계획표를 펼쳤을 때, 에도 시대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하이쿠가 떠올랐다."달팽이여천천히 올라가거라후지산을."이 짧은 문장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다.우리는 왜 스스로를 달팽이가 아니라 경주마로 착각하며 살았을까.1월의 계획이 우리를 다그친 이유는 우리가 오르는 산이 높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허락하는 속도를 잊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혹은 우리가 우리의 '점액'으로 땅을 딛는 법을 잊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달팽이에게 중요한 것은 산의 높이가 아니라 자기 몸의 리듬이다. 천천히 간다는 것은 멈춘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정해준 시계가 아니라, 내 근육과 신경이 허락하는 속도로 세상을 감각하며 나아가는 일이다.2월은, 바로 그 보폭을 다시 찾는 시간이다.■ 헤세의 나무와 니체의 망치우리는 계획이 무너졌을 때 왜 이토록 괴로워하는가.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철학자는 '망치로 우상을 두드려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망치는 파괴의 도구라기보다, 속이 빈 우상을 가려내기 위한 청진기 같은 진단의 도구였다.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우리가 1월에 세운 계획은 과거의 나를 벌주기 위해 만들어낸 도덕적 우상에 다름 없다.지금의 나를 부정하기 위해 세운 계획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헤르만 헤세는 '나무들'에서 나무를 이렇게 묘사한다.나무는 겨울 동안 바깥으로 자라지 않는다.대신 안으로 침잠하며 중심을 단단히 하고, 다가올 계절을 준비한다.2월의 시간도 그렇다. 계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해서 삶이 멈춘 것은 아니다. 겨울의 침잠은 정지가 아니라 준비다. 계획의 재구성은 포기가 아니라, 내 삶의 뿌리를 어디로 뻗어야 할지 다시 가늠하는 도약을 위한 내면의 침잠이다. ■ 계획보다 중요한 것은 감수성이다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시 '자신의 감수성 정도는'에서 이렇게 썼다."자신의 감수성 정도는스스로 지켜라이 바보 같은 놈아."2월의 계획표에 우리가 써넣어야 할 첫 문장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느낄 것인가'이다. 2월의 끝자락, 나는 당신의 계획표가 다시 한 번 더럽혀지기를 바란다.빽빽한 할 일 목록 대신, 당신을 설레게 하는 문장 한 줄이 그 자리를 차지하기를 바란다.당신이 1월에 세웠던 계획 중에서 정말로 당신의 가슴을 뛰게 했던 것이 단 하나라도 있었는가.혹시 그 계획들은 무너진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몸이 거부한 남의 옷은 아니었는가.서두르지 마라.후지산은 도망가지 않는다.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남는 반짝이는 흔적처럼, 당신의 2월 또한 결과가 아닌 과정의 빛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⑧]취향은 배신하지 않는다 - 프루스트의 감각과 무너지지 않는 나만의 루틴
1월은 '의지의 과부하'가 걸리는 달이다. 세상은 온통 "결심하라"는 명령어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쓰듯 비장한 각오를 쥐어짜 낸다. 하지만 단언컨대, 머리로 세운 결심은 몸의 관성을 이기지 못한다. 결심이 무너지는 것은 당신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결심 자체가 원래 그렇게 설계된 연약한 유구(遺構)이기 때문이다.우리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비장한 각오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 취향이다. 습관이라고 해도 좋다. 1월에 우리가 세워야 할 것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나를 나답게 유지해 주는 사소하지만 단단한 '감각의 의식(Ritual)'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의지보다 강한 감각의 기억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진짜 동력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주인공을 거대한 과거의 기억으로 데려간 것은 "과거를 기억해 내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연히 입안에 들어온 차 한 모금과 마들렌 한 조각의 촉각이었다.파스칼 메르시에(Pascal Mercier)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 역시 비슷한 진실을 말한다. 평생을 고전문헌학자로 살던 그레고리우스가 안락한 삶을 버리고 리스본으로 떠난 것은 위대한 결단 때문이 아니었다. 비에 젖은 포르투갈 여인의 매혹적인 음성, 그리고 우연히 손에 든 낡은 책 한 권의 촉감. 그런 것들이 그의 일상을 뒤흔들었을 뿐이다.소설은 묻는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한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우리의 실제 생활도 마찬가지일거다. 작은 것이 감각을 만든다. 감각이 전체가 된다. "올해는 매일 운동하겠다"는 결심보다, 운동화를 신을 때 발끝에 닿는 단단한 감촉이나 새벽 공기의 서늘한 감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훨씬 강력한 힘이 된다. 의지는 배반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즐거움은 배반하지 않는다. 우리의 1월이 억지로 자신을 개조하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어떤 감각에 반응할 때 가장 평온하고 단단해지는지 관찰하는 시간이어야 하는 이유다.■ '의식'을 설계하기어느 작가는 매일 아침 책상을 닦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거창한 집필 계획을 세우는 대신, 물걸레가 책상 위를 지나가는 그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쓰는 몸'을 깨우는 것이다. 결심이 아니라 의식(Ritual)이다. 의식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몸이 먼저 반응하게 만든다.1월의 다이어리에 적어야 할 것은 성취해야 할 숫자가 아니라, 내가 반복할 '동사'들이라면 좋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물 한 잔을 마시는 감각", "잠들기 전 시집 한 권을 무작위로 펼치는 손맛". 이런 사소한 취향의 조각들이 모여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을 버티게 하는 성벽이 된다. 목표라는 이름의 깃발은 바람에 쉽게 꺾이지만, 취향이라는 이름의 뿌리는 태풍 속에서도 흔들릴지언정 뽑히지 않는다.■ 취향이 곧 존재다취향은 사치스러운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나를 지켜내는 유일한 영토다. 1월에 남들이 선망하는 목표를 내 계획표에 옮겨 적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영토를 침범 당한다.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반응하는가'에 달려 있다.진정한 시작은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존재하던 선한 취향들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2월의 '보폭'을 고민하기 전, 그리고 3월의 '침묵'으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1월의 한복판에서 나만의 '감각적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무너지지 않는 루틴은 의지가 아니라 당신의 취향에서 나오므로.■ 다시 당신의 1월에게 묻는다지금 당신의 계획표에 적힌 것들 중, 당신의 '몸'이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혹시 '해야 한다'는 당위의 감옥에 갇혀, 당신만의 고유한 감각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결심이 무너졌다고 자책하기 전에,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나만의 사소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1월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달이 아니라, 자신을 가장 잘 대접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거창한 성공의 서사보다, 오늘 당신의 손끝에 닿는 책장의 감촉이나 커피 잔의 온기에 더 집중해 보자. 그 사소한 감각들이 모여 비로소 당신의 일 년이 완성될테니까.내게도 똑같은 주문을 건다. 세상이 강요하는 '성공의 문장'이 아니라, 내 영혼의 결에 맞는 '취향의 문장'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 문장들이 무너지지 않는 나의 새해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디지털 자산산업, 핀테크에 이어 제2의 금융 벤처로 급성장
최근 핀테크에 이어 금융 벤처의 하나로 급부상하고 있는 산업이 있다. 디지털 자산산업이 바로 그것. 우선 금융 벤처여서 그런지 성장 속도가 빠르다. 2021년 초 7800억달러였던 시장 규모(시가총액, 글로벌 기준)가 올해 초 3조3500억달러로 5년 만에 거의 5배다. 연간 성장률로는 33.8%, 특히 지난 3년간(2023~2025년)은 더 빨라서 연 59.1%의 급성장세다. 기업 수도 2021년 초 약 1만2000개에서 현재는 1만9000개에 육박한다. 특히 3~4년 전만 해도 금융·비금융의 중간 지대(Grey Zone)였지만, 유럽의 미카(MiCA, 2023년 6월) 법과 미국의 지니어스(GENIUS, 2025년 7월) 법이 제정되면서 금융 주변에서 중심부로 이동하고 있단 의견이다. 왜 이렇게 급부상하게 됐나. 무엇보다 법·제도화 영향이다. 특히 자본시장의 대표상품인 ETF와 융합한 디지털 자산 현물 ETF(예 : 비트코인, 이더리움 현물 ETF)가 승인·발행되면서, 글로벌 기관투자가 포트폴리오(약 6경원)의 편입 대상이 됐다는 점이 큰 힘이 됐다. 2024년 1월 비트코인 현물 ETF로 시작한 디지털 자산 현물 ETF(순유입 기준)는 2026년 초 2년 만에 708억달러(100조원)로 증가했다. 특히 ETF는 기관 자금이어서 금융 신산업 성장의 안전판인 '기관화'에 한몫했단 평가다. 또 하나는 미국의 지니어스 법 등에 의한 스테이블코인 파급효과다. 스테이블코인이 코인 거래뿐만 아니라 결제·송금, 무역대금 지급 등 사실상 디지털 통화로 규정되면서, 디지털 자산의 기반인 블록체인이 금융의 새로운 인프라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 시가총액은 현재 3100억 달러(457조원), 지난 3년간 성장률 무려 연 51.3%의 급성장세. 특히 스테이블코인의 담보자산인 국채의 토큰화(약 90억달러)에 이어 주식, 채권, 실물자산(RWA) 등도 토큰화되면서, 제도권과 디지털 자산의 융합이 더욱 빨라질 거란 전망이다. 어떤 분야가 활발한가. 거래·중개, 스테이블코인 등 결제·송금, 블록체인 기술, 탈중앙 금융(DeFi) 서비스의 순으로 활발하다. 첫째로 이들 중 성장세가 가장 빠른 분야는 코인 거래·중개다. 거래· 상장 수수료, 기관 중개, 파생상품 수수료 등을 통해 실질적이면서 확실한 현금흐름을 창출하는 분야다. 디지털 자산산업 총매출의 60% 이상이라고 한다. 상장사인 코인베이스(2위)를 제외하고 비상장사인 1위 바이낸스, 3위 OKX, 4위 Bybit, 5위 업비트 모두 기업가치가 100억달러(14조원) 이상인 데카콘이다. 둘째,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결제·송금이다. 이 분야도 결제와 금융 중개 기능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한다. 대표기업은 테더와 써클. 테더는 USDT, 서클은 USDC 발행으로 확보한 담보 국채이자 및 결제 API 연계를 이용한 수익모델이다. 스테이블코인 결제·송금이 늘수록 매출이 확대되는 구조다. 현재 테더와 써클이 독점적이고, 테더는 기업가치 1000억 달러 이상인 헥타콘, 써클은 데카콘이다. 다음은 블록체인 기술이다. 과거엔 초당 7~10건 처리했지만, 지금은 초당 약 5000건 처리로 속도가 500~700배나 빨라졌다. 수수료도 건당 수 달러에서 0.01달러로 크게 하락했다. 따라서 블록체인의 위변조 방지 기능에다, 가성비까지 대폭 개선됐기 때문에 기존 금융 인프라를 상당 부분 대체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온다. 솔라나와 폴리곤이 대표적이다. 이외에 유니스왑, 아베가 대표하는 탈중앙 금융 서비스도 있다. 블록체인상에서 대출, 예치, 스왑 기반 이자 수익과 프로토콜 수수료가 수익모델이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떤가. 거래·중개는 글로벌 톱 수준일 정도로 활발하지만, 다른 분야는 법·제도화 지연 등으로 활성화되지 못한 상태다. 최근 토큰 증권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만큼, 디지털 자산 기본법 및 스테이블코인 입법화도 글로벌 추세에 맞게 빠르게 진행되길 기대해 본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⑦]'천재와 거장'과 '블랙 스완' 그리고 리더십이 필요한 순간
또 한 해를 보낸다. 칼날 위를 걸었다. 그 위태로운 날들을 버티고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특하다는 생각이다. 반성은 하겠지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한다.개인은 그렇다 치자. 조직은 어떨까.연말은 늘 변화를 강요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든, 더 멀리 가기 위해서든 "뭔가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계절이다. 많은 조직이 선택하는 가장 빠른 길은 새 리더를 들이는 일이다.하지만 그 길은, 대부분 기대를 비켜간다. 이번만은 다를까. 정말, 달라질 수 있을까.■ 조직의 구원자 찾기위기 앞에서 조직은 영웅을 찾는다. 혁신을 외치며, 변화의 깃발을 흔들어줄 단 한 사람. 기업이든 협회든 정당이든, 사람만 모이면 같은 패턴을 반복한다.2017년 겨울, 20여 년 동안 가을 야구조차 멀었던 LG 트윈스도 그랬다. 팬들은 '거물 루키', '(유)명감독'을 외쳤지만, 구단은 의외의 선택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밀려난, 타율 2할3푼1리를 찍었던 김현수에게 4년 115억원을 안긴 것이다.김현수는 매일 같은 루틴으로 타석에 섰다. 지고 돌아오는 날에도 후배에게 웃으며 말했다. "내일 이기면 되지."그리고 먼저, 묵묵히 연습했다. 밤 연습장의 불빛 아래, 배트 끝에서 울리던 규칙적인 타격음. 땀에 흠뻑 젖은 장갑이 흙 냄새와 섞이며 만들어내던 리듬. 그 소리가 팀을 조금씩 바꿨다. 모래알 같던 분위기가 벽돌이 되어 이어 붙기 시작했다. 오지환은 말했다. "김현수 앞에서 연습 많이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고.그 선택은 2023년 29년 만의 통합 우승으로 돌아왔다. 2024년 잠시 흔들린 팀은 올해 다시 정상에 올랐다. 무적엘지, 챔피언. 서른일곱의 김현수는 코리안시리즈 MVP였다. (2026년 시즌을 앞두고 그는 KT로 옮겼다. 또 어떤 변화를 만들지 궁금해진다.)■ '천재와 거장' 그리고 탈레브의 질문데이비드 갤런슨은 '천재와 거장-위대한 창의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에서 예술가를 두 부류로 나눴다.-천재(Genius): 젊은 나이에 번뜩이는 영감으로 혁신을 낚아채는 사람, 피카소 같은 이들.-거장(Master): 오랜 시행착오 끝에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하는 사람, 세잔 같은 이들.피카소는 말했다. "나는 탐구하지 않는다. 발견한다."세잔은 말했다. "나는 그림을 통해 탐구한다."발견자와 구도자. 빠르게 불타오르는 불꽃과, 오래 버티는 등불로 비유할 수 있겠다.이 구분은 '블랙 스완'의 저자 나심 탈레브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예측 불가능한 충격 앞에서 리더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천재형은 직관으로 파고들고, 거장형은 준비로 파괴력을 줄인다. 결국 리더십은 불확실성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된다. 충격을 견디는 힘을 넘어, 그 충격을 기회로 바꾸는 체질과 태도 말이다.■ 두 리더십의 얼굴― 천재형: 나폴레옹1805년 아우스터리츠. 나폴레옹은 말을 멈추고 외쳤다."저기 적을 보라. 승리가 저기 있다."군대는 불길처럼 움직였다. 그의 직관은 불꽃이었다. 유럽은 그 불꽃에 휩싸였다.그러나 불꽃은 오래 타지 못한다. 러시아의 겨울이 그 증거다.― 거장형: 이순신이순신은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난중일기'에는 바람의 세기부터 병력 관리까지 빼놓지 않고 적혀 있다.열두 척의 기적은 한 번의 영감이 아니라 수천 번의 점검이 만든 결과였다.거장의 리더십은 화려하지 않지만, 폭풍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다.― 현대 기업의 두 얼굴일론 머스크는 천재형이다. 하나의 큰 생각으로 산업을 흔든다. 하지만 한 줄의 트윗으로도 흔들린다.제이미 다이먼은 거장형이다. 수십 번의 스트레스 테스트와 리스크 점검. 위기 때 오히려 존재감을 키운 이유다.■ 문제는 리더가 아니라 리더십이다조직이 새 리더를 들이며 혁신을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을 쉽게 놓친다. 그 리더가 펼칠 리더십은 지금 조직의 현실에 맞는가.밤과 낮, 회의실과 현장에서 스스로 물어보라.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숨결 같은 거장인가, 불꽃 같은 천재인가. 혹은 그 둘을 오갈 수 있는 힘인가.대답은 상황마다 달라질 것이다.*추신: 한 가지만 분명하다. 천재와 거장은 무 자르듯 나누기 어렵다. 모든 영감은 결국 반복 위에서 완성되고, 모든 반복에는 작은 발화점이 필요하다. 백조의 우아한 유영도 물속의 쉼 없는 발짓 덕분이다. 절반은 실패지만, 남은 절반이 세상을 조금씩 앞으로 민다. 내 경험도 그 사실을 증명한다. 어쨌거나 미리, 해피 뉴 이어.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⑥]흡연자를 위한 변명: 양지(陽地)로 나온 뒷담화 - '침묵의 나선'과 '어셔가의 몰락'
담배를 피운 지 꽤 오래됐다. 끊은 적도 무지 많았다. 몇 달, 몇 년 동안 안 피운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피우게 된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답하곤 했다. 직장을 옮겼기 때문이라고. 의지박약자의 변명으로 들릴 줄 안다. 하지만 사실은 그랬다.직장을 옮기면 직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잠시나마 왕따가 되기 쉽다. 그런데 직급이나 신참에 대한 벽이 그나마 약해지는 곳이 있다. 흡연구역이 그렇다.흡연자 수가 줄어든 요즘, 사무실과 최대한 거리를 둔 흡연구역은 소수의 흡연인들이 더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공간이다.흡연구역은 담배만 피우는 곳이 아니다. 뒷담화를 하는 곳이다. 뒷담화를 듣는 곳이기도 하다.■ 조직의 숨은 풍향계, 뒷담화의 두 얼굴조직에서 가장 큰 문제는 흔히 생각하는 매출 부진, 프로젝트 지연, 인력 부족 같은 표면적 이슈들이 아니다. 이런 문제들은 대부분 그 아래 깔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관계의 진정한 모습은 정식 회의록이나 공식 보고서에 담기지 않는다. 가장 솔직하고 날것의 신호는 바로 뒷담화라는 형태로 존재한다.회의가 끝나고 복도 구석에서 들리는 작은 속삭임. 점심시간 식당에서 오가는 낮은 목소리. 화장실, 그리고 흡연구역의 소소한 소리들이다."저 사람, 진짜 일 안 해.""이번 결정, 좀 이상하지 않아?"사소해 보이는 몇 마디가 팀 분위기를 흔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직의 풍향계를 가늠하게도 한다. 단순한 수다 같지만, 그 속에는 팀원 간 긴장과 불만, 신뢰의 정도, 심지어 다음 전략에 대한 암묵적 평가까지 담겨 있다.■'침묵의 나선'과 대나무숲이 현상은 엘리자베스 노엘레-노이만의 '침묵의 나선' 이론으로 설명된다. 핵심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 다수와 다르다고 느낄 때, 고립될 것을 두려워해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뒷담화는 바로 이 침묵의 나선이 작동하는 방식과 직접 연결된다. 조직의 공식 소통 창구가 막히거나, 솔직한 의견이 불이익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은 불만을 드러낼 채널을 잃는다. 팀은 표면적으로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불만은 더 깊숙이 숨어 들어가고 결국 곪는다.사장 시절, 집무실 한쪽 벽에 커다란 그림을 걸어뒀다. '대나무 숲' 그림이었다. 뒷담화를 '앞담화'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 서랍 속에, 익명 속에 감춰진 불만을 책상 위로, 이름을 걸고 제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과는? 잘 안됐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못 들었고, 듣기 싫은 이야기만 잔뜩 들었다.)■ 보이지 않는 소리와 '어셔가의 몰락'에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은 '보이지 않는 소리'가 한 개인과 가문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극적으로 보여준다.주인공 로더릭 어셔는 극도로 예민하고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그는 자신의 가문이 곧 몰락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고, 주변의 기이한 소리와 흔들리는 집이라는 풍문을 통해 불안이 증폭된다. 그의 내면적 불안은 현실과 분리되어 망상으로 커지고, 결국 스스로의 망상에 의해 가문 전체를 파멸시킨다.뒷담화는 어셔 가를 덮친 망상처럼 조직을 망치기도 한다. 불안과 불신을 증폭시키고, 조직의 정상적인 혈액순환을 방해한다. 심해지면, 결국 혈관이 터진다.■ 양지에 나온 뒷담화그러나 뒷담화는 동시에 조직의 생존에 필요한 소중한 경고를 담고 있다. 고혈압은 심근경색의 주요 위험인자지만, 미리 알고 관리하면 심장마비를 피할 수 있다. 뒷담화를 단순한 험담으로 치부하고 억누르면 독이 된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듣고 이해하면 최악을 피하는 약이 될 수 있다.요즘의 뒷담화는 오프라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블라인드 앱 같은 것들이 지속적으로 인기를 얻는 이유가 있다. 공식 채널에서 말할 수 없는 진실, 직장 내 불만, 임금 문제, 불합리한 의사결정에 대한 솔직한 목소리를 익명이라는 안전장치 속에서 터뜨리는 것이다.게다가 뒷담화 속에는 조직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한 단서가 담겨 있다. 공식 채널로는 말하기 어려운 진짜 속마음을 드러내고, 보이지 않는 정보를 교환하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집단지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진짜 '대나무숲' 역할을 하기도 한다.뒷담화는 두 얼굴을 가진 언어다. 오늘날에는 절반쯤 양지(陽地)에 나와 있다.단순한 잡음으로 흘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귀 기울여 조직의 숨겨진 지도를 완성할 것인가. 선택은 당신의 조직이 '어셔가의 몰락'처럼 스스로의 망상에 갇혀 몰락할지, 아니면 양지에서 소통하며 단단히 성장할지 결정하게 한다.**당부 말씀: 이런저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좋은 뒷담화의 단서를 못 찾았다면, 다시 담배라도 피워보시길. 건강은 책임 못 진다. 이 글을 읽고 다시 피우게 됐다는 변명은 어디서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각오는 하셔야겠다, 행운을 빈다.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베이징·상하이·선전·항저우, 중국 벤처 혁신을 움직이는 4각형
2010년대 초반만 해도 중국 벤처는 베이징과 선전(深圳)이 주도했다. 하지만, 2020년대 중반 들어선 베이징·상하이·선전·항저우 등 4대 도시가 각자 모델로 발전하고 있고, 광저우·난징·청두가 그 뒤를 잇고 있다. 특히 베이징·상하이·선전·항저우는 서로 다른 DNA의 벤처 생태계로 '벤처 혁신의 사각형'을 형성하고 있다. 어떤 특징을 갖고 있나.소위 시장 중심의 혁신 도시라는 선전부터 살펴보자. 선전은 '아이디어가 바로 제품'이 되는 세계 유일의 제조 생태계로 유명하다. 화웨이·DJI·텐센트 같은 초거대 기업이 대표적이며, 이들로부터 분화된 수많은 벤처기업이 다시 새로운 생태계를 형성한다. 예컨대 DJI에서 나온 인재들이 창업한 에코플로우(EcoFlow)와 밤부랩(Bambu Lab)은 선전의 '모든 부품이 한곳에 모인 하드웨어 공급망'을 십분 활용, 경쟁력 있는 시제품을 하루 만에 만들어 성공한 대표 사례다. 부품 경쟁이 가격을 낮추고, 낮은 원가에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창업을 촉발하는 선순환이 선전 혁신의 본질이다.상하이는 글로벌 자본과 기술이 교차하는 글로벌 혁신 도시다. 다국적 기업의 중국 본부가 몰려 있고, 항공·물류·인재의 국제 접근성이 가장 높다. 장쑤·저장과 연결된 장강 삼각주 경제권의 허브로, 연구개발은 상하이에 두고 생산은 인근 도시로 분산하는 효율적 생태계가 특징적이다. 이 때문에 문화와 테크의 융합이 활발해서 미호요(miHoYo), 리리스(Lilith Games), 빌리빌리(Bilibili) 같은 게임·콘텐츠 기업들이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있다. 3사 모두 상하이를 게임과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의 허브로 만든 주역들이다. 상하이는 중국식 실리콘밸리라기보다 글로벌 자본과 디지털 문화가 결합한 '중국판 뉴욕'에 가깝다는 의견이다.항저우는 알리바바의 도시이자 중국형 디지털 창업의 실험실이다. 알리바바와 앤트그룹을 중심으로 핀테크·전자상거래·스마트시티의 다양한 벤처 생태계가 긴밀히 연결돼 있다. 하지만 최근 항저우는 '포스트 알리바바시대', 소위 AI시대로 넘어가고 있다는 게 전문가 평가다. AI 게임체인저인 딥시크(DeepSeek), 게임사 게임사이언스(Game Science), 로봇기업인 유니트리(Unitree)는 모두 대기업이 아닌 대학·연구소와 함께 기술을 축적·성장한 유니콘들이다. 자본보다 인재, 화려함보다 연구개발을 중시하는 기풍이 항저우의 경쟁력이다. 창업비용이 낮고 연구 환경이 탄탄해서 젊은 개발자들의 실험실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선전·상하이·항저우와 달리 베이징은 중국 정부와 함께 하는 혁신의 중심이다. 칭화대, 베이징대, 중국과학원 등 최고의 대학과 연구기관이 몰려 있고, 정부의 정책 지원과 국가 R&D 자금이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중관촌(中关村)과 시얼치(西二旗)에는 바이두, 레노버, 바이트댄스, 샤오미 등 굵직굵직한 기업이 자리잡고 있고,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보다, AI 알고리즘·데이터 솔루션·플랫폼 기술 등 '보이지 않는 두뇌'가 벤처기업들의 강점이다.이상 네 도시는 각기 다른 벤처의 특징과 생태계를 갖고 있다. 베이징이 전략기술을 설계하고, 상하이가 자본·인재를 연결하며, 선전이 제조·속도를 담당하고, 항저우가 소비·서비스를 확장하는 구조를 완성했다. 그 결과 중국은 '세계의 공장'을 넘어 독자적 기술 자립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앞으로 시너지를 극대화하려면 '속도의 선전'과 '품질의 항저우', '글로벌의 상하이'와 '정책의 베이징'을 어떻게 조화·협력하도록 하느냐가 관전 포인트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⑤]권력과 위대함의 딜레마: '울프 홀'과 '굿 투 그레이트'
조직 안에서 권력의 움직임을 가까이 보는 일은 하루하루 전쟁터를 살피는 것과 같았다. 회의실 한쪽에서는 다음 인사의 향방을 놓고 눈빛이 교차하고, 복도에서는 승진 소식에 긴장과 기대가 뒤섞인 시선이 오갔다. 누군가는 앞으로 나아가고, 누군가는 물러났다. 한 사람만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 곁에 있던 무리들이 함께 오르고, 같이 밀렸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에 따라 움직이고, 사소한 귓속말 하나가 운명을 바꾸기도 했다. 나는 그 때 그 회의실과 복도에서, 권력의 냄새가 얼마나 빠르게 방향을 바뀌는지 목격했다.권력의 이동은 단순한 직급 변화가 아니라, 사람과 시스템, 눈에 보이지 않는 신호가 얽힌 복합적 과정이었다.기업과 공공의 세계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었다. 권력의 균형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뒤엉킨, 마치 얼음과 물이 맞닿은 경계처럼 미묘했다.■ 권력의 현실과 상시적 균열힐러리 맨틀의 소설 '울프 홀(Wolf Hall)'은 권력의 이동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16세기 헨리 8세 궁정, 그 안에서 사람들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이 계산하고, 더 깊이 숨죽이며 움직인다. 맨틀은 이 책으로 두 번의 맨부커상을 받았고, 세기의 소설이라는 찬사를 얻었다.토머스 크롬웰이 주인공이다. 청교도 혁명의 올리버 크롬웰과 혼동하기 쉬운데, 다른 인물이다.토머스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잔혹한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고, 상인 수습, 변호사, 외교관을 거쳐 헨리 8세의 곁에 섰다.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앤 불린과 결혼하려는 왕의 정치적 싸움 속, 그는 브레인으로 움직였다.맨틀은 크롬웰을 이렇게 묘사한다."신과 대화할 수는 있지만, 응답을 기대하지는 않는 사람."권력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권력을 갖기 위해, 현실을 우선하는 사람.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생존과 선택의 철학이었다. 그는 상황을 읽고, 사람을 관찰하며, 움직임 하나하나에 계산을 숨겼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작은 손짓 하나에도 권력의 균형이 흔들렸다.크롬웰은 궁정에서의 미묘한 신호를 놓치지 않았다. 왕이 어느 날 갑자기 내리는 결정, 신하들의 미묘한 표정 변화, 심지어 귀족들이 서로 주고받는 비밀스러운 속삭임까지. 그 모든 것이 권력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변수였다. 오늘의 동맹이 내일의 적이 될 수 있고, 한 순간의 침묵이 치명적인 오해를 만들 수도 있었다.■ 위대한 조직의 위대한 리더경영학 거장 짐 콜린스는 'Good to Great'에서 위대한 조직을 만드는 핵심으로 '레벨 5 리더십'을 꼽는다. 겸손하지만 결단력 있는 리더, 야망과 겸손의 모순적 조합이 조직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리더십의 계단은 이렇다.▴레벨1: 유능한 개인▴레벨2: 헌신하는 팀멤버▴레벨3: 유능한 관리자▴레벨4: 효과적인 리더▴레벨5: 겸손하고 결단력 있는 리더레벨 5는, 겸손이 결단력의 또 다른 이름임을 보여준다. 크롬웰 또한 이 정의에 가깝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연설하지 않으며, 전장에서 깃발을 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추진력은 숨겨진 폭발력을 가진다. 겸손을 가장한 무서운 의지와 실행력이다.하지만 묘하게도 뒷맛이 씁쓸하다. 박수를 치기 쉽지 않다. 가려져 있다는 느낌, 어둡다는 생각이 따라온다. 그림자 같다. 성공 뒤에 숨어 있는 위험, 힘의 크기에 따라 늘어나는 그림자 말이다. 권력의 높이가 올라갈수록,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먼저 '사람'을, 그 후에 '무엇'을콜린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먼저 사람을, 그리고 난 후에 무엇을(First who, then what)."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가 먼저라고 한다. 잘못된 사람을 조직의 버스에 태우면, 아무리 훌륭한 전략도 실패한다. 인재 버스 문제는 현실에서 훨씬 복잡하다. 누구를 얼마나 빨리 내려보낼 것인가, 그 한 가지가 승패를 가르기도 한다.크롬웰도 원칙에 맞게 움직였다. 왕의 의중을 읽고, 알맞은 사람을 제자리에 앉혔다. 앤 불린 지지파를 배치하고, 반대파를 제거하며 권력의 균형을 설계했다.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사람을 모았으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남았다. 권력자의 변덕으로 앤 불린은 몰락했고, 크롬웰도 함께 무너졌다.■ 오너의 3심, 그리고 현대의 리더십현대 조직에서도 권력자의 변덕은 존재한다. 오너의 욕심(慾心), 의심(疑心), 변심(變心)—'3心'에 따라 조직이 흔들리고, 뛰어난 경영진을 배치했어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정치도 다르지 않다. 권력을 잡지 못하면, 변화와 혁신의 기회를 잃는다.현대 기업에서는 회장 한 사람의 결정이 수천 명의 운명을 흔들기도 한다. 회장의 아바타 CEO가 바뀌면서 전략 방향이 바뀌고, 중간 관리자들이 갈팡질팡하는 상황도 흔하다.그러나 동시에 현대 조직은 분산된 권력 구조, 주주, 이사회, 시장 평가라는 필터를 통해 리더십을 시험받는다. 한 사람의 변덕만으로 모든 것이 좌우되지는 않는다.크롬웰은 묻는다."권력을 잡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콜린스가 질문한다."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그리고 그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두 질문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겹치고, 이어지며, 결국 하나가 된다. 그렇게 해야만 시행착오와 실패, 파국을 피할 최소한의 기회를 얻는다. 권력은 단순히 잡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올바른 사람과, 올바른 시간에, 올바른 일을 해야만 의미가 생긴다.권력과 위대함의 교차로에서 우리는 배운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고, 선택과 책임이 늘 함께 서 있다는 것을. 권력은 흔들릴 수 있지만, 흔들릴수록 방향을 잡는 힘이 생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단순한 승패가 아니라, 인간과 시스템, 그리고 역사와 미래가 얽힌 복합적 균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우리는 결국 어떤 길을 택할지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는 것을.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④]모닝 커피가 당신을 배신할 때 - 카너먼의 '노이즈'와 카뮈의 '전락'
문제는 모닝커피다가끔 과거의 결정을 곱씹는다. 뒤집기도 한다."이건 좀 아닌 것 같네"라며 반려했던 제안서나, "이 사람은 우리 회사와 안 맞는 것 같은데"라고 밀어뒀던 이력서 같은 것들. 며칠 뒤 다시 마주하면 "내가 왜 이 걸 못 봤지?" 하며 머리를 긁적일 때가 있다.그 사이 문서가 달라진 것도, 내가 철학자가 된 것도 아니다. 바뀐 건 그날의 기분, 수면의 질, 아침에 마신 커피 한두 잔, 그것도 아니면 공복혈당 수치일 거다. (의학계는 혈당과 판단의 상관관계를 충분히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이런저런 일들에도 우리는 자신을 합리적이고 일관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지 않다고.오류에도 계급이 있다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은 '노이즈(Noise)'에서 그 믿음을 깬다. 심지어 오류에도 계급이 있음을 보여준다.총오류는 편향(Bias)과 소음(Noise)으로 구성된다. 편향은 과녁 한쪽에 몰려 박히는 총알처럼 예측 가능한 오류다. 반면 소음 혹은 잡음은 총알이 이리저리 흩어져버리는 무작위적 변동성이다. 편향은 적어도 패턴이 있다. 소음에는 없다. 그래서 더 치명적이다.같은 문서를 두고도 어제의 나는 반대, 오늘의 나는 찬성을 외친다. 어제의 판사는 아침을 건너뛴 엄벌주의자, 오늘의 판사는 점심 배불리 먹고 난 뒤라 온정주의자가 된다. (범죄자에게는 판사의 식사 시간이 최대 변수라는 연구도 있다. 세상은 생각보다 밥심으로 굴러가는 것인가.)알베르 카뮈의 '전락(La Chute)'은 이 문제를 도덕적 차원으로 풀어낸다.주인공 클라망스는 정의로운 변호사로 칭송받았다. 그는 스스로의 판단이 공정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강에 몸을 던지는 여성을 목격하고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 작은 침묵이 그의 세계를 뒤흔든다. 그는 결국 자신이 위선자였음을 고백한다. 끝내 무너진다.사실 우리도 매일 비슷한 침묵을 반복한다. 다만 기록되지 않을 뿐이다.클라망스의 추락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편향의 드라마 같다. 자신이 '옳다'는 착각, 그 무지가 만든 오만이 버무려진, 막장 드라마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비록 그가 고백했다고는 하나, 그 판단조차도 여전히 날씨와 기분에 흔들렸을 것이다. 게다가 고백으로 드러났을지언정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음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테이블 배치가 달라지면다른 이야기를 보태볼까 한다. 상대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밀고 당기는, 협상에 대한 것이다.협상학의 대가 하워드 라이파와 로저 피셔는 환경을 어떻게 세팅하느냐가 결과를 바꾼다고 설명한다. 협상은 일견 논리와 의지의 힘겨루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테이블을 어떻게 차리느냐의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거다.와인잔이 올라간 자리에서 오가는 말과, 종이컵 커피가 놓인 자리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다를 수 있다. 같은 사람들이 같은 문제를 두고도, 어제는 평행선, 오늘은 극적인 타결일 수도 있다.그런데 그 차이는 대개 협상 테이블, 협상장소의 분위기가 만든다. (은행원 시절,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도 굳이 고객을 찾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배웠다. 영업은 날씨가 전부라고 했던 것도 기억에 있다.)이 대목이 카너먼의 소음 개념과 기묘하게 포개진다.협상도 결국 소음의 바다 위에서 출렁인다. 판사가 점심 메뉴에 흔들리듯, 협상가는 조명, 의자 배치, 심지어 첫 발언자의 목소리 톤에 흔들린다. 그러니 협상이란 이성의 게임이 아니라, 소음을 줄이고 환경을 조율하는 무대 연출에 가깝다고 할 수밖에.더 나은 판단은 겸손에서 나온다현대인의 전락은 한 번의 위선적 침묵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의 무수한 소음이 쌓여 이루어진다.채용 면접, 인사 평가, 신제품 출시, 법정 판결까지. 우리는 모두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직전의 커피 한 잔, 회의실 온도, 심지어 전날 야구 경기 결과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키를 잡는 항해다.이 모든 이야기는 결국 다음 질문으로 수렴한다."우리는 왜 늘 우리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는가?"그리고 그 답-완벽한 판단은 없다는 것-은 나와 있다. 이미 알고 있다.소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조금 더 겸손해진다. 그 겸손이야말로 더 나은 판단의 출발점일 것이다.사정이 그러하니, 결론에 앞서 다시 묻기를.그때 내린 당신의 결정은 정말로 옳았는가.아니면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인가. 그 판단은 편향이었나, 소음이었나. 애초에 테이블이 잘못 차려진 건 아니었나.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그 자리에 앉을 필요조차 없었던 건 아닌가.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김영태의 읽는 인간③]미꾸라지가 공룡을 이기는 방법 – '규칙 없음'과 '덕시티'
"우리 회사의 업(業)은 뭘까." 사장 시절 종종 던졌던 질문이다. 그러면 회의실은 숨죽인 듯 고요해진다. 사장의 특권은 마음껏 질문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언젠가는 스스로 답을 내야 한다는 게 진짜 문제였다.이런저런 토론 끝에 의견이 모였다. 공간과 공간을 잇는 모든 여정에서 고객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회사, 모빌리티 서비스 기업.이어지는 질문은 자연스럽다. "그럼 경쟁사는?" 포지셔닝은 터를 잘 잡는 일이다. 상대를 정해야 우리의 위치도 선명해진다. 여러 후보가 나왔고, 넷플릭스로 정리됐다. 이동의 경험을 단순한 효율이 아닌 즐거움으로 바꾸자는 목표였기에, 엔터테인먼트의 혁신자 넷플릭스가 제격이었다.넷플릭스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이 있다. '규칙 없음 (No Rules Rules)'이다. 넷플릭스 공동설립자 리드 헤이스팅스와 인시아드 교수 에린 마이어가 함께 쓴 책이다. 서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넷플릭스는 다르다. 우리의 문화는, 규칙이 없는 것이 규칙이다."당시 블록버스터 같은 공룡 기업에는 없었지만, 미꾸라지였던 넷플릭스에는 다른 게 있었다. 문화였다. 자율이었고, 신뢰였다. 복장 규정, 휴가 규정, 출장비 지침 모두 딱 한 문장으로 정리됐다. "회사를 위해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중요한 건 규칙을 없앤 것이 아니다. 넷플릭스는 '좋은 사람'을 뽑고, 그 사람을 믿었다. 성과와 문제를 둘러싼 피드백을 거리낌 없이 주고받으며, 자기 통제가 가능한 조직을 지향했다. 능률보다 혁신, 절차보다 사람. 이들에게 자율은, 스스로 자신을 단련할 줄 아는 사람에게 보내는 신뢰였다. 이 모든 것이 기업문화로 자리잡았다. (넷플릭스가 창업 초기의 기업문화를 지금까지 유지, 발전시키고 있는가에 대한 것은 다른 문제다. 창업(創業)보다 수성(守城)이 더 어렵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닐 것이다.)회사도 낯선 시도에 나섰다. 연결과 확장을 전략으로 고객가치를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찾아 실행했다. 과하다 싶은 목표를 설정하게 하고-매출 목표는 사장실에 붓글씨로 적혔다. 작심의 의례처럼-, 안 해본 방법을 찾게 했다. 복장 규정을 없앴고, 성과관리, 과정관리 기법을 도입했다.이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회사들과 손을 잡았다. 모빌리티 시스템을 만들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와 시큐리티 서비스 기업과 업무협약을 했다. 철도여행용 도시락을 만드는 회사, 캐릭터와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기업, 심지어 프로야구 구단과도 함께 하면서 고객경험을 끌어올리기 위한 실험을 했다.모든 시도 중에서 몇몇은 실패했고, 몇몇은 유야무야 끝났다. 그러나 분위기는 분명 달라졌다. 그것만으로도, 사상 최대 매출을 기록했다.이와 대조되는 세계를 다룬 소설이 있다. 스웨덴 작가 레나 안데르손이 2006년 발표한 소설 '덕 시티(Duck City)'다.덕시티는 겉으로는 풍요롭지만, 안으로는 숨막히는 도시다. 패스트푸드와 다이어트를 동시에 강제하며, 뚱뚱한 사람들을 단속하는 곳.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비정상을 규제하는 도시. 그런데, 정상은 대체 뭔가? 누가, 왜 정하는가.덕시티에는 규칙이 넘쳐난다. 어기면 문제고, 잘 지켜도 문제다. 규칙을 잘 지키면 또 다른 규칙이 생기고, 그 규칙을 관리하는 새로운 부서가 생긴다. 도시는 점점 복잡해지고, 천천히 조용히 멈춰간다. 사람들은 규칙을 두려워했고, 아무도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됐다.규칙은 처음에는 선의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사람 위에 올라탔다.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장치가, 끝내 아무도 돌보지 않게 된 것이다.어디서 많이 본 풍경 아닌가. 대마불사(大馬不死) 공룡기업들이 몰락하는 방식과 닮았다. 더 잘하려 만든 규칙이 새로움을 가로막는 익숙한 명분이 되는. 규칙은 지켰을지 몰라도 성과는 사라지는 모습 말이다. 넷플릭스와는 반대편에 있다.중요한 건, 무엇을 지키느냐가 아니라 왜 지키는가다."나는 왜 이 규칙을 지키는가. 언제까지 이 룰을 따를 것인가."이 질문이 조직을 움직이게 한다.무언가를 시도하려 할 때, 누구는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고, 또 누구는 해야 할 이유를 찾는다. 내 결론은 이렇다."하지 말아야 할 고만고만한 열 가지 이유와 해야 할 단 하나의 똘똘한 이유가 있다면, 하라."열 가지 이유는 대개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고, 단 하나의 이유는 낯설지만 본질에 닿아 있다.기왕이면, 낯선 쪽이 낫다. 특히 공룡과 싸워야 하는 미꾸라지라면. 미꾸라지는 작고 유연하지만, 감각은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무기다. 감각이 문화가 되는 순간, 그 기업은 더 이상 미꾸라지가 아니다. 중심을 흔들며 비상한다. ━김영태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
[정유신의 스타트업스토리] 벤처기업 주도형으로 성공하고 있는 중국 AI 산업정책
작년 말 딥시크(DeepSeek)의 돌풍 이후 중국 AI의 생태계 변화가 뚜렷하다. 2~3년 전만 해도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등 빅테크가 AI를 주도했지만, 딥시크가 고성능·저비용의 LLM(초대형 언어모델)을 발표한 후로는 혁신 벤처기업들이 중국 AI산업의 스타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대표급 주자는 소위 'AI 타이거'. 딥시크에다 초장문(超長文) 처리가 특기인 문샷 AI, 영상·음성 변환이 전문인 즈푸 AI, 멀티모달(multimodal :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를 처리) 모델인 미니맥스와 오픈 소스를 제공하는 01.AI를 합친 5개 벤처기업이 그들이다. 다섯 개 업체 모두 유니콘 기업(비상장기업으로 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이며, 최근 들어선 대용량의 문서나 법률·학술 등 전문 자료에 장점이 있는 문샷 AI, 홍콩 상장을 앞두고 있는 미니맥스가 특히 관심 대상이다. 시장에선 중국의 AI 산업 생태계가 이전의 '빅테크 주도형'에서 이젠 빅테크는 인프라 및 플랫폼 역할로 뒷받침하고 혁신 벤처기업이 AI 기술·서비스 개발에 앞장서는 '벤처기업 주도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의견이다.중국 AI 산업이 왜 벤처 주도로 됐나. 전문가들은 중국 정부의 강력한 AI 벤처 육성책을 첫 번째로 꼽는다. 이에는 AI 핵심 전략인 민관학(民官學) 모델의 성공을 위해선 빅테크보다 벤처기업 주도가 유리하다는 인식이 바닥에 깔려 있다. 벤처기업은 의사결정이 빠르고 신기술·서비스 개발의 '실험-실패-개선' 주기가 짧아 정책 및 연구 지원만 잘 이뤄지면 기술 혁신의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반면, 빅테크나 대기업은 인력·기술 등 자원은 풍부하지만, 민관학 프로젝트 수행 시, 기술 개발이 기존 수익모델에 걸림돌이 된다든지, 시장의 독과점 이슈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AI 등 벤처기업 투자에 1조 위안(190조 원) 상당의 기금, AI 벤처 사업화를 위해 특허 절차 간소화, 벤처기업이 정부·대학과 실증사업을 빠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규제 특례 등을 마련하고 있다. 또 하나는 벤처기업의 오픈소스 문화다. 벤처기업은 대규모 독자 모델을 처음부터 끝까지 폐쇄적으로 개발하는 빅테크·대기업과 달리, 이미 오픈된 모델과 데이터를 활용해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또 이들을 개방, 다른 벤처기업 및 연구자들과 공유한다. 현재 중국 AI 산업은 모델과 데이터의 공유·융합을 통해 급속한 혁신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성과를 개방·공유하는 벤처기업들이 그만큼 중국 AI의 주역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어떤 효과가 나타나고 있나. 우선 딥시크, 문샷 AI 등에서 보듯이 해외 의존도가 높던 AI 모델의 중국 내 자급률을 높이는 효과다. UBS는 중국의 AI 연산 자급률은 2024년 33%에서 2029년엔 90%, 모건스탠리는 중국의 AI GPU 자급률이 2024년 34%에서 2027년엔 82%까지 상승할 거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산 AI 칩을 생산하는 화웨이, Ascend 등에도 도움이 되는 건 물론이다. 둘째, 빅테크는 리스크관리, 기존 사업 이해관계, 내부 승인 절차 등 때문에 산업별·고객별 대응이 느린 반면, 벤처기업은 의사결정 구조가 단순해 신속하게 솔루션을 마련할 수 있다. 또한 수익성이 낮아 빅테크·대기업이 외면하는 소규모 틈새시장(Niche market)도 적극 공략할 수 있어서, 그만큼 다양한 산업 및 수익모델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아무튼 이러한 중국의 '벤처 주도의 AI 생태계 변화'는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AI 100조 원 펀드' 정책 관점에서도 곱씹어볼 만한 시사점이 있다는 생각이다. 한·중 여건은 다르지만, AI의 발 빠른 기술 혁신과 다양한 산업으로의 빠른 확산을 위해선 소수의 대기업·빅테크 주도가 아닌 기민한 벤처기업들의 개방형 참여와 주도가 필수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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