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데스크
[시대데스크]가해자 아닌 피해자만 때리는 나라
영업정지 4.5개월에 과징금 50억원. 지난해 해킹을 당한 롯데카드에 대해 금융감독원이 사전 통지한 제재안이다. 지난 16일 제재심의위원회가 열렸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추가 논의로 넘어갔다. 결론이 미뤄진 이유는 하나다. 이번 사고가 내부 직원 소행이 아닌 외부 해킹이었다는 점, 즉 '롯데카드도 해킹의 피해자'라는 사실 때문이다.지난해 8월 롯데카드에서 서버의 구형 취약점을 악용한 해킹이 발생해 전체 회원의 30%에 해당하는 297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이미 롯데카드에 96억20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당국이야 각각의 법률에 정해진 대로 제재할 뿐이라고 하지만 해킹을 당한 기업의 입장에서는 이중제재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도둑 맞으라고 현관문을 활짝 열어두는 사람은 없다. 해킹은 작정하고 침입하는 외부 공격자의 엄연한 범죄행위다. 물론 롯데카드도 구형 취약점 패치를 방치한 관리 부실의 잘못이 있다. 그 책임을 전혀 묻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2025년은 대한민국 사이버 보안의 민낯이 드러난 해였다.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 등 통신사는 물론이고 예스24, 쿠팡 등에 이르기까지 업종을 불문하고 해킹사고가 터졌다. 해킹은 더 이상 특정 기업의 실수가 아닌 산업 전반의 일반화된 리스크가 된 것이다.이같은 상황에서 당국은 걸린 기업만 강하게 때리고 있다. 징벌적 과징금을 높이고, 영업정지 기간을 늘리면 기업들이 보안에 더 투자할 것이라는 논리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게 전부여서는 안 된다.이대로라면 역효과도 우려된다. 해킹 신고를 빨리 할수록, 사고 규모가 정확히 드러날수록 제재는 더 세진다. 기업들로서는 신고를 미루거나 축소하고 싶은 유인이 생긴다. KT는 해킹사고 처리 과정에서 서버를 폐기해 증거를 은닉했다는 의혹으로 압수수색을 받기도 했다. 해킹에 대한 제재 구조가 기업의 자발적 신고를 막을 수 있다는 우려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해외는 다르게 접근한다. 영국 정보보호위원회(ICO)는 해킹에 의한 정보 유출이 발생했던 영국항공(British Airways)와 메리어트(Marriott) 사건에서 애초 수천억 원대 과징금을 예고했지만 적극적인 조사 협력, 즉각 신고, 신속한 사후 대처 등을 감경 사유로 인정해 최종 과징금을 대폭 낮췄다. 미국 사이버보안·인프라보안국(CISA)은 기업들이 공격 수법과 침해지표를 제출하면 법적 보호를 제공하는 정보공유 체계를 운영한다. 기업이 해킹 정보를 숨기지 않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제출하게 만드는 구조다.보안 업계에서는 '사고를 막는 보안'에서 '사고를 견디는 보안'으로 중심축을 옮겨야 할 때라는 얘기가 나온다. 아무리 보안에 투자해도 국가 배후 해킹 조직이나 고도화된 공격자를 100% 막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뜻이다.당국이 해야 할 일은 사고 이후의 투명한 신고와 정보공유를 장려하고, 해커를 추적하는 데 더 많은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다. 롯데카드 제재심이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건, 금융당국 내에서도 지금의 법리가 맞는지 고민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번 결정이 우리카드, 신한카드 등 후속 제재의 기준선이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그 기준선이 처벌의 수위가 아니라 협력과 재발방지의 실효성을 중심으로 설계되기를 바란다.해킹한 놈을 잡는 나라가 돼야지, 털린 기업만 때리는 나라여서는 안된다.
[시대데스크]"트럼프에 군대를 맡기는 건 어린이에 총을 주는 꼴"
#1. 영국의 전설적 록 밴드 '퀸'의 천재 보컬 프레디 머큐리는 평생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다. 머큐리의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 그는 탄자니아 잔지바르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은 인도 서부에서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페르시아(현 이란)인 공동체 출신이다. 짜라투스트라가 창시한 조로아스터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일신 종교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도 영향을 줬다. 불을 신성시해 '배화교'로도 알려진 조로아스터교는 선한 빛의 신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한다. 세상을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마 '앙그라 마이뉴'의 끝없는 대립으로 본다. 퀸이 남긴 불멸의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엔 '비스밀라'(Bismillah)와 '벨제붑'(Beelzebub)이란 표현이 나온다. 비스밀라는 이슬람교 경전 코란의 각 장을 시작할 때마다 나오는 구절로, '신의 이름으로'란 뜻이다. 벨제붑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악마로, 신약성경엔 '바알세불'로 등장한다. 조로아스터교 세계관의 선악 대립이 노래에 표현된 셈이다. 머큐리의 생애를 그린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년)에서 극중 머큐리의 부친은 그에게 '선한 생각, 선한 말, 선한 행동'을 강조한다. 선한 신을 모시는 조로아스터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1991년 머큐리의 장례식은 전통적인 조로아스터교 방식으로 치러졌다. 런던에서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 고대 이란 언어인 아베스타어로 기도를 올리며 머큐리를 떠나보냈다. #2.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휴전 기간을 연장했다. 당초 기한은 한국 시간으로 23일 오전, 미국 동부시간 기준으로 22일 저녁이었다. 양국의 담판 결과에 따라 호르무즈 해협이 다시 열릴지, 봉쇄가 길어질지 결정된다. 전 세계 해상 원유 수송량의 20~30%가 지나가는 호르무즈 해협 개방 여부에 한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의 운명이 달렸다. 폐쇄가 장기화될 경우 1970년대 오일쇼크 때와 같은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물가상승)이 재현될지 모른다.인류를 도탄으로 몰고가는 호르무즈의 어원이 조로아스터교의 선신(善神) 아후라 마즈다란 사실은 아이러니다. 아후라 마즈다는 중세 페르시아어(팔라비어)에서 '오르마즈드'로 변했고, 아랍어를 거치며 오늘날 호르무즈가 됐다. 조로아스터교의 세례를 받아 유대교 신앙을 완성한 이스라엘이 전쟁을 일으킨 탓에 호르무즈 해협이 막혔다는 사실도 묘하다.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을 바빌론에서 해방시켜준 게 페르시아 제국인데, 그 후예인 이스라엘과 이란이 오늘날 앙숙이 돼 전쟁이 벌이는 현실도 얄궂긴 마찬가지다.#3. "트럼프에게 군 통수권을 맡기는 건 어린아이에게 장전된 총을 쥐어주는 것과 같다." 2016년 미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 캠프에서 쓰던 캐치프레이즈다. 약 10년이 지난 현재, 우려는 현실이 됐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섣부른 결단 탓에 후르무즈 해협이 막혔고, 피해는 전 세계가 짊어졌다. 전쟁으로 이란에서만 2만명 넘게 죽거나 다쳤다. 미국 입장에서도 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약 40조원 어치의 무기가 소모됐다. 미국 대통령은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멋대로 지속할 순 없다. 적어도 법적으론 그렇다. 미국 전쟁권한법에 따르면 의회의 승인이 없을 경우 '교전'은 90일 내 끝내야 한다. 원칙적으로 60일이고, 철수를 위해 30일 연장할 수 있다. 이란 전쟁이 2월28일 시작됐으니 단순 계산하면 5월말까지, 휴전기간을 제외해도 6월까지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 법을 순순히 따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자위권 발동은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며 전쟁권한법을 위헌으로 몰아왔다. 또 '제한적 자위권 행사'는 전쟁권한법이 규정한 '교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과거 오바마 행정부도 2011년 리비아 공습 당시 의회 승인 없이 90일을 넘기며 이 논리를 폈다. 대통령 중심제의 단점 가운데 하나가 과도한 권력 집중이다. 성급한 대통령 1인이 국가에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는지 우리 역시 1년여 전 경험했다. 우원식 국회의장과 범여권이 개헌을 추진하는 배경 가운데 하나다. 개헌안은 대통령의 계엄 관련 권한을 대폭 줄였다. 계엄령을 선포할 경우 반드시 48시간 내 국회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승인받지 못한 계엄은 무효가 된다. 한 개인의 폭주로 인한 위험은 대통령제를 선택한 대가다. 그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권한 분산이다. 비록 이번 기회에 못하더라도 개헌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시대데스크]약자만을 향하는 '공사비 리스크'
최근 만난 대형 시공사의 임원들은 한목소리로 글로벌 인플레이션 사태를 우려했다. 전쟁 국가의 국민들이 치러야 하는 고통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국제사회를 공급망으로 연결한 21세기의 군사 분쟁은 자본주의 국가들에 '복합 위기'로 다가왔다.위기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고리는 경제 약자일 수밖에 없다. 정부기관보다 기업, 기업보다 개인 투자자가 리스크 관리에 취약하다.최근 정비사업(재개발·재건축) 분쟁과 신축 아파트 하자 사태의 배경에는 자재 대란으로 인한 공사비 리스크가 있다. 글로벌 물류망의 이상으로 돈이 있어도 물건을 못 구하는 수급 불균형, 물건을 구해도 운송비가 공사비를 갉아먹는 상황은 기업만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 1990년대 자재 파동의 악몽을 상기시킨다.정부에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더 큰 문제는 민간 공사현장에서 벌어진다. 대형 발주사가 시공사에 공사 적자를 전가하면 시공사는 더 힘이 약한 하도급업체와 정비사업 조합, 중소 시행사로 그리고 다시 분양계약자 등으로 떠밀리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최근 수도권 광역급행철도(GTX)-C 사업의 공사비 인상 결정에서 보듯 공공공사는 물가 변동에 따른 계약금액 조정(에스컬레이션)이 인정된다. 반면 대기업 발주사가 시공사와 체결한 '물가변동 배제특약'의 소송 사태는 계약 불확실성과 계약자간 불신을 키운 단적인 사례다. 이는 국가적인 손실이다.시공사는 계약 상대에 따라 협상의 우위를 갖기도 하고 반대인 경우도 있다. 향후 후속 수주를 고려하면 발주사를 상대로 공사비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관계 절교' 선언과도 다름없기 때문이다.정부는 표준계약서 활용을 권고해 중재에 나섰지만 기업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법적 강제성이 없는 권고는 거대 발주사의 독소 조항 앞에 무력하다는 게 건설업계 주장이다. 이에 민간 계약의 불공정 특약을 조정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협상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경제 고성장기에 한국 산업의 뿌리 역할을 한 K건설은 전환점에 섰다. 국내 주택사업을 기반으로 매출을 키워온 대형 시공사들이 원전과 인프라, 플랜트 수출로서 주택건설 사업자들과 다른 노선의 경쟁을 꾀하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국내 건설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면 해외 기업들을 상대로 실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다. 국내 플레이어들이 글로벌 현장으로 나아가고 외교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으려면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다.지난해 해외건설 수주의 25%를 차지한 중동 시장은 기회의 땅이 아닌 화약고가 됐다. 사우디아라비아 50억달러 아미랄(Amiral) 석유화학 프로젝트, 카타르 37억달러 담수복합발전 플랜트 건설 등 수조원대 사업을 수행 중인 국내 기업들은 공정 지연과 인력 철수를 결단해야 하는 사태에 이르렀다.대한건설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유가가 20% 오를 때 건설 원가는 7% 이상 상승한다. 석유화학 계열 페인트, 단열재, 방수재 가격은 한 달 만에 20% 이상 폭등했다. 2022년 러시아 전쟁으로 발생한 원자재 가격 폭등 사태가 채 안정되기 전에 다시 '원가율 100%'의 절벽 앞에 섰다.원·달러 환율과 국제유가 변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경제활동 주체는 없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파고 속에 상생 없는 독자 생존만을 강요하는 것이 시스템의 부재는 아닐지 생각해봐야 한다.
[시대데스크]유통가의 AI 파도, 바람을 읽고 있는가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만 본 격이지, 바람을 보아야 하는데…. 파도를 만드는 것은 바람인데 말이요."영화 <관상>에 나오는 이 대사는 현상에만 시선을 고정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을 잘 보여준다. 눈앞의 움직임을 좇느라 그 배경을 이루는 구조를 보지 못하는 순간, 판단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최근 유통업계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 대사가 절로 떠오른다.요즘 유통업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인공지능(AI)이다. IT와 전자 산업을 넘어 AI는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유통업계도 이런 흐름에서 비켜나 있지 않다. 글로벌 빅테크와의 협업, 생성형 모델 도입, 데이터 인프라 고도화 같은 움직임이 이어진다. 기술을 둘러싼 메시지는 빠르고 분주하다.유통 대기업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AI 전략을 내놓고 있다. 신세계그룹은 오픈AI 코리아와 협력에 나서는 한편 지난 3월에는 미국 기업이 자국의 AI 기술과 인프라를 해외에 적용한 첫 수출 사례로 평가되는 국내 데이터센터 구축 협약을 체결했다. 서비스 차원을 넘어 데이터 처리의 물리적 기반까지 손에 쥐겠다는 선택이다. 롯데그룹은 구글의 AI 서비스 '제미나이'를 앞세워 유통 현장 전반에 AI 활용을 확산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카카오와 손잡고 AI 추천 기반 이커머스 실험에 나섰다.AI는 유통업계의 새로운 성장 동력처럼 언급된다. 이 지점에서 한 번쯤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정말 새로운 바람을 읽고 있는가 아니면 또 하나의 파도에 올라타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이 질문은 유통 산업이 처한 현실을 떠올리면 더 무게를 갖는다. 유통업계는 1분기 실적 발표를 앞두고 있다. 대형마트를 중심으로 소비 회복은 더디고 인건비와 물류비 부담은 여전히 크다. 실적에 대한 기대보다 방어적인 전망이 앞서는 이유다.온라인 유통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몇 차례 경쟁을 거치며 시장의 중심은 이미 단단해졌다. 단기간의 기술 도입이나 서비스 변화만으로 판이 흔들릴 만큼 유통 시장은 단순하지 않다. 속도보다 체력, 확장보다 구조가 중요한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이런 환경에서 AI는 설명하기 좋은 언어가 된다. 효율과 미래를 말할 수 있고 당장의 숫자보다 다음 단계를 이야기하기에 적절하다. 하지만 기술은 방향을 보여주는 도구일 뿐 방향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AI는 분명 운영 효율을 높이고 시스템을 정교하게 만든다. 재고 관리와 발주, 고객 응대, 추천과 분석의 품질도 개선된다. 다만 이런 변화가 소비자의 선택 이유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않는다. 왜 이 채널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기술의 효과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AI는 정리되지 않은 구조를 대신 정돈해 주는 장치가 아니다. 데이터가 자연스럽게 쌓이고 물류와 매장, 고객 경험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구조가 흩어져 있다면 AI는 기능 개선의 수준에 머문다.지금 많은 유통 기업들은 그 중간 지점에 서 있다. 기존 구조를 쉽게 부정하기에도, 전혀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에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래서 AI라는 언어가 현재와 미래를 잇는 완충재 역할을 하고 있다.분명한 사실은 시간이 지나 살아남은 기업들은 늘 비슷한 선택을 해왔다는 점이다. 기술에 앞서 소비자의 마음을 읽었고 파도를 쫓기보다 바람의 방향을 먼저 읽었다. AI를 붙인다고 미래가 오는 것은 아니다. 미래는 구조를 다시 설계하는 과정에서 시작된다. 유통 역시 예외는 아니다.
[시대데스크]삼천당제약은 왜 내가 사면 떨어지고, 팔면 오를까
"시장은 당신을 능멸하고 싶어하며 배우자 앞에서 망신시키려 합니다." '역발상 투자의 대가' 켄 피셔가 지난해 말 공식채널에 올린 인터뷰 영상에서 한 말이다.그는 주식시장에 대해 능멸의 대가(The Great Humiliator)라는 평소 소신을 밝히며 "영적인 존재와 같다"고 했다. 경고도 잊지 않았다. "당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할수록 시장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정교하게 짜여집니다"자산 변동성은 필연적이지만 극복하기 말처럼 쉽지 않다. 최근 기자가 만난 주식투자자들은 미국과 이란의 확전 등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로 시장이 요동치자 "마침 어제 샀는데 급락하고 팔았는데 오른다"고 불만을 쏟아낸다. 약속이나 한 듯 불확실성의 시대 "우리를 조롱한다"는 한탄이다. 시가총액 상위권을 휩쓰는 제약·바이오 업종은 그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다. 코스닥 시총 30위권 내에 절반 이상이 포진한 주도주들의 급박한 등락과 함께 시총 순위가 뒤바뀌는 대혼란을 겪고 있다. 올해 시총 1위 알테오젠에 이어 삼천당제약이 그 바통을 이어받는 듯하다.지난달 3개월여 만에 5배 가까이 급등했던 환희도 잠시, 이후 수조원의 시총이 증발하며 장부상 수익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불안감이 확산하자 지난 6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진화에 나섰지만 시장은 여전히 냉담하다. 미래가치의 핵심인 파이프라인(신약 후보물질)과 마일스톤(단계별 기술료) 등에 대한 기대감이 가격에 과도하게 선반영된 탓이다. 여기서 초보 투자자들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한다. 주가는 호재나 악재 그 자체보다 그 재료가 가격에 얼마나 녹아 있느냐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이다. 아무리 눈부신 호재라도 이미 충분히 반영됐다면 발표와 동시에 투자심리는 얼어붙고 변동성만 키울 수 있다.능멸의 대가는 무지한 자보다 자신의 지능을 과신하는 투자자를 먼저 사냥한다. 투자는 인내의 영역에서 승패를 가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군중심리를 거스르는 역발상 투자를 주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중동 사태 우려가 선반영돼 업종이나 종목별 차별화 흐름이 심화되고 특정 제약·바이오주가 요동칠 때 시장이 나를 유혹하는 건 아닌지 차갑게 의심해야 한다"고 했다. 투자자에게 달콤한 수익을 맛보게 해 깊숙이 유인한 뒤 결정적인 순간에 그 수익을 처참히 앗아가는 시장의 특성을 역이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살아 움직이는 시장에 농락당하지 않으려면 깊이 있는 분석과 공부가 선행돼야 한다. 제약·바이오주에 밸류에이션(기업가치 대비 가격수준)이나 수익성, 건전성 심지어 R&D(연구·개발) 현황, 주요 경제지표 등을 전혀 모른 채 돈을 묻는 것은 전쟁터에 무기 없이 나가는 것과 다름없다. 확신을 얻었다면 그다음은 시간의 힘을 빌려보자. 시장은 투자자를 조롱하지만 저PBR(주가순자산비율), 고ROE(자기자본이익률), 낮은 부채비율을 갖춘 바이오주라면 일시적 풍파를 견뎌낼 수도 있다. 신약 등 기술개발에 통상 10년의 긴 시간이 소요되는 것을 감안하면 중장기 관점의 투자전략도 필요하다. 워런 버핏이 부의 비결로 꼽은 복리효과도 기대된다. 원금과 수익에 배당금까지 다시 투자해 투자금을 불리는 소위 복리의마법은 장기투자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쌈짓돈을 날릴 판인데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격언은 한가하게 들릴 수 있다. 그래도 돈을 잃지 않으려면 시장을 이긴 대가들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철저한 분석을 통해 씨앗을 심었다면 그 성장을 믿고 묻어둔 채 잠자리에 드는 배짱이 필요하다. 시장의 능멸을 이기는 유일한 무기는 차가운 분석과 뜨거운 인내다.
[시대데스크] 주식투자와 골프의 공식
골프와 주식투자는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손실 관리가 성과를 좌우하는 만큼 '뺄셈의 게임'이라는 점이 묘하게 닮았다. 큰 수익을 올리는 것이 투자 성과의 목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얼마나 큰 손실을 피했느냐가 핵심이다.투자자들은 종종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종목을 찾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정작 시장에서 살아남은 투자 고수들은 대박 종목을 많이 가진 게 아니라 치명적인 손실을 피하는 능력이 뛰어난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투자금이 50% 줄었을 때 이를 원래 수준으로 되돌리기 위해선 100%의 수익이 필요하다.모든 종목에서 높은 수익을 올릴 수는 없다. 시장은 언제나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고 어떤 투자도 완벽하게 성공할 수는 없다. 중요한 건 손실 관리가 전제된 상태에서 수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무리한 레버리지 투자나 단기 급등 종목을 쫓는 매매가 위험한 이유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전체 투자 성과를 크게 흔들 수 있다.이런 원리는 골프에서도 적용된다. 골프를 배우기 전에는 '버디'를 많이 잡으면 좋은 스코어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게임을 하다 보니 '더블보기'와 '트리플보기'를 만들지 않아야 좋은 성적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됐다. 한 번의 화려한 샷이 주는 짜릿함에 골프 매력이 더해질 수 있지만 최종 스코어를 좌우하는 건 결국 실수를 줄이는 것이었다.골프 고수들은 비슷한 전략을 언급한다. 버디는 기회가 왔을 때 잡는 것이지 매번 노리는 목표가 아니라는 것. 버디를 노리기 위해 무리한 샷을 하기보다 홀별 규정 타수인 '파'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이보다 하나 덜 치는 버디가 스코어를 줄여주지만 두 타를 더 친 더블보기 하나는 단일 버디로는 만회하기 어려운 손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정확성'도 골프와 투자의 공통점이다. 골프 초보자들은 단지 '멀리 치는 것'에 집착하기 쉽다. 그러나 경험이 쌓일수록 '방향'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멀리 날아간 공이라도 숲이나 러프에 떨어지면 다음 샷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페어웨이에 공이 있다면 여유롭게 다음 기회를 만들 수 있다.이와 마찬가지로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올리는 투자보다 중요한 것은 안정적으로 수익을 쌓아가는 투자다. 시장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성장주에 투자, 높은 수익을 올린 화려한 성공 사례가 자주 언급되지만 장기적으로 성과를 내는 투자자들은 대체로 꾸준한 수익을 쌓아 온 사람들이다.결국 장기전이라는 점에서도 골프와 투자는 닮았다. 골프는 18홀을 거치는 경기다. 한 홀에서 실수를 하더라도 다음 홀에서 만회할 기회가 있는 만큼 흐름을 유지해야 한다. 실수에 연연하면 또다시 미스샷을 낼 가능성이 높지만 차분하게 다음 샷에 집중하면 흐름을 되찾을 수 있다.주식투자도 긴 시간에 걸친 게임이다. 상승장과 하락장이 반복되고 투자자는 그 속에서 수많은 선택을 하게 된다. 결국 투자 성과를 결정하는 것은 장기간에 걸친 선택들의 누적이다.골프장에서 스코어가 좋은 사람을 보면 무리한 샷을 하지 않고,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한다는 점이다. 주식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기회를 포착하는 공격 또한 투자에서 배제할 수 없는 요소지만 오래 살아남는 투자자들은 언제 공격해야 하는지보다 언제 물러나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골프 스코어와 주식 수익률의 공식은 결국 같은 곳을 가리킨다. 투자란 결국 버디를 쫓는 게임이 아니라 보기를 줄여가는 과정에 가깝다.
[시대데스크]'강요된 희생'과 '성공 담보금'
정부의 '2차 공공기관 지방 이전'이 본격화하고 있다. '5극 3특'(5개 광역메가시티+3개 특별자치도) 전략을 통해 수도권 일극 체제를 다극 체제로 전환해 국가 경쟁력을 회복하고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책이다. 하지만 이전 대상이 되는 기관들의 구성원에게 대의를 위한 희생만 강요하는 것으로 비쳐서는 곤란하다. 이 정책이 성공하려면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는 이들과 그들이 정착할 지역 주민들 간의 동의와 화합이 필수다. 2차 이전 대상 규모는 노무현 정부 시절 추진된 1차(153곳) 때보다 훨씬 많은 최대 500여 곳, 대상 직원 수는 1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경기도 과천시 전체 인구보다도 많다.일각에서는 '철밥통'이라 불리는 공공기관 종사자로서 당연히 감수해야 할 의무라고 말하며 이들의 저항을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세운다.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바꿔야 하는 당사자들은 이 같은 주장에 답답하다. 단순히 근무지만 옮기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자녀의 교육 환경, 배우자의 경력 단절, 생활 인프라의 차이, 극심한 자산 격차를 온전히 떠안아야 하는 '강요된 희생'이다. 이들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정부와 기관의 방침에 순응하거나 정든 조직을 떠나는 것뿐이다.과거 1차 지방 이전 정책은 기대 이하의 성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 가족 동반 이주율이 50%를 밑도는 지역들은 주말이면 유령도시로 변하는 부작용을 겪고 있다. 기관 이전 후 5년 내 핵심 인력의 자발적 퇴사율은 이전보다 최대 2배 넘게 증가했었고 일부 기술 전문 기관 신입 사원의 30% 이상이 1년 안에 사표를 던졌다고 한다. 인재가 떠난 자리는 업무 공백과 공공 서비스의 질적 저하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사람이 살지 않는 도시는 경제 활성화는커녕 불필요한 관리비만 축내는 애물단지가 될 뿐이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국가 정책에 따라 희생한 이들에게 미미한 이사비 정도와 한시적인 세금감면 혜택만 준 것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금전적인 보상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본인과 가족의 희생을 통해 국가 균형 발전에 동참하는 이들에게 '정주(定住) 수당'을 지급하는 방안을 고민해 보면 어떨까.정주 수당은 공공기관 종사자를 위한 특혜가 아니라 지방 소멸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방화벽'이 될 수 있다. 누군가는 '혈세 낭비'라고 비난할 수 있으나 이는 지방 이전이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를 계산하지 못한 단견이다. 수만 명의 우수한 인력이 지역에 안착하지 못하고 수도권을 그리워하며 떠돌 때 발생하는 국력 낭비를 직시해야 한다.정주 수당은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는 국책 사업이 '건물만 남고 인재는 떠나는' 참사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유지비이자 사업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지역 경제의 '활성화 펀드' 역할도 겸할 수 있다. 이주 직원들에게 지급된 수당이 지역 내 소비로 이어지면 지역민들이 '사람이 오니 돈이 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될 것이다. 영국, 프랑스, 일본, 독일 등에서도 강제로 근무지를 옮기는 공공기관 종사자들에게 금전적으로 지원했지만 효과는 크지 않았다. '1차 공공기관 이전' 당시 처럼 희생에 못 미치는 소액 지원에 그쳤기 때문이다. 2만 개 이상의 공직 일자리를 런던 밖으로 옮기고 있는 영국 정부는 공무원 배우자의 재취업까지 직접 알선하고 있다. 맞벌이 부부를 보편적인 가구 형태로 보고 필요한 것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공공기관 지방 이전은 대한민국을 재설계하는 거대한 구조 개혁이다. 해당 기관 종사자들에게 주어지는 정착 비용은 미래를 위한 '사회적 투자'라고 할 수 있다. '5극 3특' 체제가 헛돌지 않게 하려면 정부의 세밀한 정착 지원안 마련이 필요하다. 이번 공공기관 이전이 진정한 국가 균형 발전을 여는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시대데스크]'월급 150만원 김병장'의 도박·빚투, 해법은 교실에 있다
얼마 전 금융감독원 관계자를 만난 자리에서 군대와 관련한 씁쓸한 소식을 들었다. 올해 기준 이병 월급은 75만원, 병장 월급은 150만원. 매월 수십만원에서 100만원이 넘는 돈을 쥔 젊은 사병들이 불법 도박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자금을 대주는 대부업체 금융상품까지 등장했다고 한다.사회 경험이 있거나 대학을 다니다 입대한 사병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문제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입대한 청년들이다. 생애 처음 매달 수십만원의 고정 수입을 손에 쥐게 됐지만 저축하고 굴리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 도박이나 과소비 유혹에 쉽게 휩쓸린다. 뭉칫돈 씀씀이를 몰라 보이스피싱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이들이 금융의 기초를 미리 배웠다면 그 돈은 제대 후 사회 진출을 위한 종잣돈으로 쓰였을 것이다.일각에선 이 같은 일탈의 원인으로 '스마트폰 보급'을 지목한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다. 스마트폰 앱 하나로 비대면 대출과 투자가 가능한 고도의 디지털 금융 환경이 열렸다. 금융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은 획기적으로 높아졌지만 이를 다룰 금융 지식은 그에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변동장세 국면에서 반복되는 '빚투'(빚내서 투자) 열풍도 그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기업의 펀더멘털이나 산업 성장성을 분석하기보다 소셜미디어(SNS)에 떠도는 소문에 휩쓸려 투자를 감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상자산이나 특정 테마주가 급등한다는 소식에 무리하게 레버리지를 일으키기도 한다. 시장의 변동성을 간과하고 당장의 수익률에 눈이 멀어 감당하기 힘든 빚을 낸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닥뜨린 자본시장은 냉혹하다. 투자 실패로 인한 손실과 막대한 빚은 오롯이 투자자 본인의 몫이다.금융상품을 선택하고 투자 결정을 내리는 마지막 결정권자는 소비자 자신이다. 스스로 재무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투자 실패에 따른 손실은 국가도 금융사도 대신 메워주지 않는다. 수익을 좇는 만큼 위험을 안아야 한다. 본인의 판단과 책임 아래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는 '자기 책임 원칙'은 현대 사회의 필수 생존 지식이다. 성인이 돼서 갑자기 큰돈을 만지거나 대출을 받게 됐을 때 비로소 이 원칙을 깨닫는다면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치러야 할 기회비용이 크다.지난해 고등학교 교과 과정에 '금융과 경제생활' 과목이 신설된 것은 반가운 변화다. 은행 예·적금의 복리 효과, 보험의 필요성, 주식 및 채권 투자의 실제 등 당장 현실에서 부딪히는 실용적인 지식으로 채워졌다고 한다. 비록 수학능력시험 출제 과목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수능을 치른 뒤 남는 시간에 배우거나 2학년이 교양으로 이수하며 재무적 의사결정 능력을 키우고 있다. 과거 주요 과목에 밀려 금융을 터부시하고 학생의 돈 이야기를 부적절하게 여겼던 때를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다.자기 책임 원칙과 합리성은 하루아침에 길러지지 않는다. 10대 시절부터 체계적인 교육으로 금융 체력을 다져야 한다. 소비와 저축의 균형을 맞추고 투자의 원칙과 위험성을 이해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시작된 변화가 청년들의 무모한 빚투 비극을 끊어내고 건강한 경제 주체로 성장하는 마중물이 돼야 한다. 스스로 책임질 줄 아는 똑똑한 소비자가 많아질수록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기반도 한층 탄탄해질 수 있다.
[시대데스크]6·3 지방선거에서 절대 찍으면 안 되는 후보
#1. 황야에 두 남자가 마주 섰다. 한 남자의 등 뒤엔 무너진 성벽이, 다른 남자의 뒤엔 거대한 군대가 서있다. 성벽 앞에는 수많은 시체가 쌓여있다. 대군 속에선 무수한 깃발이 바람에 나부낀다. 성을 넘겨주면 모두 살려주겠다는 승자의 제안에 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2005년)의 결말부 장면이다. 1187년 십자군과 이슬람 연합군이 실제로 벌인 '예루살렘 공방전'이 배경이다. 여기서 승자는 쿠르드족 출신의 이슬람 영웅 살라딘(살라흐 앗 딘), 패자는 프랑스 대장장이 출신의 발리앙이었다.영화에서 발리앙은 협상을 끝내고 돌아서는 살라딘에게 묻는다. "예루살렘에 무슨 가치가 있나?(What is Jerusalem worth?)" 살라딘은 처음에 "없다(Nothing)"고 시큰둥하게 답한다. 하지만 이내 다시 돌아서 두 주먹을 들어보이며 덧붙인다. "모든 것(Everything)"만감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8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부터 현대 중동전쟁까지. 역사 속 수많은 비극들이 예루살렘이란 한 도시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종교와 신념, 지도자의 욕망과 정치적 성취가 이런 희생을 정당화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일까. #2. 이란의 1000리알 지폐 뒷면에는 2020년까지 예루살렘 '바위의 돔'(황금 돔)이 그려져 있었다. '예루살렘 수복'이라는 이란 신정체제의 목표를 상징한다. 바위의 돔은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승천했다고 알려진 바위를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다. 이슬람에서 메카, 메디나에 이어 세 번째 성지로 꼽히는 '알 아크사 모스크'(은색 돔)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예루살렘 바위의 돔을 지폐에 그린 나라는 비단 이란 뿐이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요르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스라엘 절멸을 국가의 최우선 목표로 내세우는 곳은 이란 뿐이다. '사탄'인 이스라엘이 이슬람 성지인 '알 쿠드스'(예루살렘)을 점유하고 있는 건 이슬람에 대한 모독이라는 게 이란 신정 지도부의 인식이다. 레바논 헤즈볼라, 가자지구 하마스, 예멘 후티반군 등을 통해 이스라엘을 괴롭혀온 이유다. 자국을 겨냥해 핵무기까지 개발 중인 이란을 이스라엘이 적대시하는 건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가 개인적 욕망을 위한 도구로 전쟁을 선택하는 건 다른 얘기다. #3.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친형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의 손에 잃었다. 1976년 '엔테베 사건' 당시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유일한 사망자가 요나단 네타냐후 중령이었다. 당시 승객 248명을 태운 에어프랑스 여객기를 납치해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강제 착륙시킨 테러리스트들은 이스라엘에 수감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새벽을 틈 타 공항을 습격, 납치범 전원을 사살하고 인질 102명을 구출했다. 그러나 현장 지휘관이었던 요나단은 공항 관제탑에서 쏜 총알을 피하지 못했다.이 사건은 네타냐후라는 강경파 우익 정치인이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네타냐후 총리는 이란에 대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이 시작된 2월28일 TV 연설에서 "40년 꿈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불구대천 원수인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의 뒷배인 이란 신정체제를 미국과 손잡고 붕괴시키는 게 그의 숙원이었다. 네타냐후가 전쟁으로 얻은 건 이뿐만이 아니다. 뇌물 수수 및 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네타냐후는 전쟁 전까지 '사법부 무력화' 입법 시도로 인해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대 시위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공습 직후 지지율은 급등했고, 연정 붕괴 위험은 사라졌다. 10월27일 총선을 앞두고 네타냐후가 최악의 정치적 위기에 빠진 시점에 공습이 시작된 게 과연 우연일까.전쟁 개시 이후 어린이를 포함해 6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국제유가는 폭등했다. 네타냐후가 설계하고 주도한 이 전쟁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 내릴 것이다.이번 지방선거에서 우린 또 한 번 시장과 도지사, 구청장 등을 뽑는다. 누굴 뽑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어떤 사람을 뽑지 말아야 할지는 분명하다. 재선 등 자신의 욕망을 위해 공동체를 희생할 가능성이 높은 후보다. 그게 누군지 모르겠다면 '자기애'(나르시시즘)가 가장 강한 사람을 찾으면 된다. 키스 캠벨 조지아대 심리학 교수는 저서 '나르시시즘의 역습'(The Narcissism Epidemic)에서 "나르시시스트들은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으로 공공 자원을 남용해 결국 공동체 전체를 파괴한다"고 했다. 6월3일 나의 한 표에 공동체의 운명이 달렸다.
[시대데스크] 용산기지 담장 허물어라
아무리 추워도 겨울은 가고 봄은 온다. 2025년 12월 시민에게 조건 없는 개방을 결정한 미군 용산기지 내 용산어린이정원에는 요즘 주말이면 피크닉을 즐기는 가족들로 북적인다.서울 도심에 30만㎡ 크기의 공원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놀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 용산기지 면적(203만㎡)은 정원의 6.8배다. 2022년 정부가 공개한 용산기지 반환 면적은 76만4000㎡로 전체의 38%에 해당한다.얼마 전 만난 복수의 지방정부 고위공무원들은 "용산기지 부지 사용이 외교 협상에 의해 지연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감안해도 담장(외벽)만은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놨다.2003년 한·미 당국이 용산기지 이전에 합의한 후 수십년간 반복돼온 반환 논쟁과 보안 해제, 오염 정화 등 여러 난제에서 '담장 철거'라는 아이디어는 신선하게 다가왔다.알고 보면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도는 아니다. 2020년 5월 용산기지의 일부 땅인 미군장교숙소는 개방보다 앞서 담장 15m를 철거했다. 공사 차량의 출입 목적도 있지만 시민들이 기지 반환을 체감할 수 있도록 한다는 이유였다.2022년 8월 국토교통부가 '용산공원 정비구역 종합기본계획'을 변경·고시한지 4년째를 맞는다. 올해 1월 '용산공원 조성 특별법'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지만, 공원 조성의 방향을 제시했을 뿐 담장 철거 계획은 명시하지 않았다. 과거 논의에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도심 한가운데 이태원과 해방촌, 용산역과 남영동을 가로지른 수킬로미터의 벽돌·철조망은 1904년 이후 122년 동안 시민의 발길만이 아니라 눈길마저 거부해온 금단의 땅이다. 군사시설 보호구역을 알리는 영문 경고문은 도시 지형과 녹지의 단절을 넘어 일제강점기, 그리고 전쟁 역사의 아픔으로 인식된다.용산기지 밖에서 보면 담장 너머 광활한 땅은 면적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용산기지 부지는 여의도 면적(290만㎡)보다 약간 작은 규모다.그리고 우리가 마주한 또 다른 현실은 물리적인 담장보다 견고한 '정보의 장벽'이다. 국가 주권의 회복을 상징하는 공간에서 정보 독점은 '심리적 점유'와 다름없다.용산어린이정원은 예약과 신원 검사 없이 자유롭게 갈 수 있게 됐고 용산가족공원과 산책로도 시민 이용 공간이 된지 긴 시간이 흘렀지만 체감하는 이들은 여전히 적다. 반환이 완료된 후에도 방치된 부지는 정부 통계와의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토양과 지하수 오염 수치, 정화비용 등 정보 공개에 대해 정부는 지극히 폐쇄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이벤트성 체험행사 등 보여주기 위한 전시행정보다 정보 공개가 더 시급하다.글로벌 도시 서울의 발전에도 용산기지 사업 지연은 방해가 된다. 정부가 약속한 2027년 용산공원 조성계획은 이행이 쉽지 않고 한국 정부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도 수용해야 하지만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기약 없이 미뤄지는 용산기지 반환보다 담장을 먼저 허무는 것은 '연결'의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용산의 주인인 시민사회가 지혜를 모아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
[발행인노트]공론의 장을 여는 '숙의 미디어'가 되겠습니다
기자 생활 40년차에 발행인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영광입니다만, 언론의 현주소를 돌아보자면 참회록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기자가 된 1987년 무렵이 한국 언론의 최전성기라고 생각합니다. 현장 체감으로 보자면 그 무렵 언론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가장 높았습니다. 민주화 과정에서 공헌한 점을 독자들로부터 인정받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이후 40년, 언론에 대한 신뢰는 하향곡선을 그렸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저항불가능한 변화, IT기술의 발전입니다. 대략 10년 주기로 쓰나미가 몰려왔습니다. 첫번째 쓰나미는 1990년대 후반 인터넷의 등장이었습니다. 인터넷 언론이 앞다투어 생겨나면서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선정적 보도 경쟁 속에 신뢰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두번째 쓰나미는 2000년대말 등장한 스마트폰입니다.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했습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언론이 되었기에 기존 미디어들은 생존경쟁에 직면했습니다. 언론사들은 공공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세번째 쓰나미는 AI입니다. 구글이 검색창에 Gemini를 포진한 이후를 '제로 클릭(Zero Click)' 시대라 부릅니다. 기존의 뉴스사이트를 아무도 클릭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미디어 생태계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언론의 추락은 언론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입니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한 결과 여론의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갈등과 대립이 첨예해지고 있습니다. 건강한 공동체가 되려면 구성원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화합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정확한 정보를 공유해야 하고, 서로 대화하고 타협해야 합니다.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대화의 통로 역할을 맡는 것이 언론입니다. 기술 발전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기술의 도전에 언론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언론들이 생존이란 핑계 아래 신뢰를 상실해왔습니다. 짠 맛을 잃은 소금처럼 온갖 집단으로부터 무시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세계적 현상입니다만 특히 우리나라가 심각합니다. <동행미디어 시대>는 '언론의 공공성 회복' 프로젝트입니다.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건전한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정확한 정보제공은 양극화된 집단들이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생각의 기반을 넓혀줄 것입니다. 그같은 공감대 위에서 갈등을 풀어갈 수 있는 공론장을 마련하겠습니다. 저는 이같은 <시대>의 소명에 공감해 지난해 11월 '머니S 고문'이란 타이틀로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머니S'는 지난 2월 1일 <시대>로 제호를 변경했습니다. 지난 몇달간 사내외로 많은 사람을 만나 <시대>의 철학과 소명을 설명하고 자문을 얻었습니다. '머니S' 편집국 기자들이 <시대>로의 변신에 대한 기대와 의욕을 보여주었기에 용기백배할 수 있었습니다.외부에서 동지들이 합류했습니다. 정용관 전 동아일보 논설실장이 주필이 되어 논설위원실을 만들었습니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가 논설위원으로, 이상복 전 Jtbc 보도국장이 논설위원 겸 미디어랩 소장으로 영입됐습니다. 미디어랩은 동영상 콘텐츠를 만들게 됩니다. 소수지만 정예인 논설위원들이 매일 사설을 출고하고 있습니다. 각계 전문가를 칼럼니스트로 초빙해 오피니언면이 풍성한 공론장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제도의 개선 방안을 모색할 제도혁신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이상언 전 SPC 부사장이 제도혁신연구소장, 이무영 전 트러스톤자산운용 헤지펀드본부장이 부소장을 맡았습니다. 연구소는 편집국과 협업하면서 시대의 아젠다를 발굴하고, 이를 공론에 부치는 포럼 등 행사를 주관합니다. 쓰나미는 끝 없이 밀려올 것입니다. <시대>는 '존중 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이란 모토를 지향점 삼아 흔들림 없이 나아가겠습니다. 민주주의 공동체를 지탱할 '숙의 미디어' 역할을 자임합니다. 발행인으로서 그 무게를 기꺼이 견뎌내고자 하는 다짐으로 이 글을 씁니다.
[시대데스크] 대형마트는 왜 식료품에 올인할 수밖에 없나
대형마트 매장 지도를 펼치면 남은 것보다 사라진 것이 먼저 보인다. 의류는 가장자리로 밀려났고 가전과 생활용품은 온라인으로 이동했다. 한때 '다 파는 곳'이었던 마트에서 끝까지 버틴 영역은 식료품이다. 겉으로 보면 후퇴다. 하지만 실상은 선택이다. 생존을 위한 대형마트의 재설계다.온라인은 가격, 선택, 배송에서 이미 승부를 냈다. 비식료품은 빠르게 흡수됐다. 대형마트가 이 경쟁을 이기지 못한 이유는 의지 부족이 아니다. 구조의 문제다. 회전율은 떨어졌고 재고 부담은 커졌다. 2025년 업태 결산에서도 대형마트는 연간 역성장을 기록했다. 비식료품 부진이 실적을 끌어내렸다. 경기 탓으로 돌리기엔 설명이 부족하다. 판이 바뀌었다는 신호다.그 판에서 식료품은 다르다. 오늘 먹을 것을 오늘 사는 즉시성. 눈으로 확인해야 안심하는 신선도. 매장에서 조리되는 델리의 체험성. 이 세 가지는 아직 화면 너머로 완전히 이전되지 않았다.냉장·냉동 인프라도 마찬가지다. 물류 난도가 가장 높은 그로서리(식료품)에서만큼은 대형마트가 여전히 '현장성'이라는 무기를 쥐고 있다. 그래서 식료품은 대형마트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방어선이 됐다.올해 초 유통 체감지표(RBSI)에서도 대형마트 전망은 가장 낮았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식료품 특화와 점포 리뉴얼로 방어선을 다시 긋고 있다. 경쟁의 기준도 바뀌고 있다. '누가 더 싸게 파느냐'에서 '누가 더 신선하고 믿을 만하냐'로 이동 중이다.다만 시간은 마트 편이 아니다. 온라인 그로서리는 새벽배송과 퀵커머스로 근거리 즉시성을 잠식하고 있다. 플랫폼은 데이터와 멤버십으로 고객을 묶는다. 2025년 주요 유통사 통계에서도 온라인은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갔다.식료품이 방어선인 것은 맞다. 하지만 안전지대는 아니다. 대형마트의 '식료품 올인'이 막다른 골목이 되지 않으려면 조건이 있다. 먼저 식료품 운영의 산업화다. 매장별 감각에 맡기던 신선·델리를 네트워크 단위로 표준화해야 한다. 폐기율과 회전율은 AI(인공지능) 수요예측과 연동돼야 한다. '잘 파는 식료품'이 아니라 '예측 가능한 식료품'의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점포의 물류화와 콘텐츠도 중요하다. 점포는 더 이상 진열 공간에 머물 수 없다. 피킹 동선을 전제로 설계하고 마감 시간을 다층화해야 한다. 예약 픽업과 단시간 배송은 기본값이 돼야 한다. 매장은 팔기만 하는 곳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물류 거점이어야 한다. 가격과 물량만으로는 오래 버티기 어렵다. 건강·친환경 기준의 결합이나 조리와 레시피, 영양 정보가 연결된 식문화 경험 등 '이 마트에서 사야 할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체류 시간을 만들고 신뢰를 쌓는다.소비가 양극화될수록 '합리적 프리미엄'과 '생활형 초저가' 두 레일이 함께 달린다. 정부 통계가 보여주는 큰 흐름은 온라인 고성장, 오프라인 정체다. 그 안에서도 식료품은 여전히 고객 발길을 끌어당기는 자성을 갖는다.유통에서도 보약은 밥이 아니라 트래픽이다. 대형마트는 물건을 파는 공간에서 생활을 지탱하는 인프라로 변신 중이다. 식료품 올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먹는 것을 장악하는 자가 결국 일상을 거머쥔다. 그 일상은 더 신선하고, 더 투명하며, 더 똑똑한 운영을 요구한다. 남은 질문은 하나다. 누가 식료품을 가장 데이터 친화적으로 운영해 신뢰를 증명하느냐다. 그 답을 먼저 내놓는 곳이 다음 유통의 주인이 될 것이다.
[시대데스크] 혁신의 발목 잡는 경영권 분쟁
"혁신기업은 기술로 경쟁하지 경영권으로 싸우지 않습니다."최근 만난 한 신생 바이오업체 대표의 말이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을 떠올리면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구글과 엔비디아, 애플, 메타(페이스북) 같은 기업들은 창업자와 경영진이 경영권 다툼이 아니라 기술 혁신과 시장 확장에 집중하며 성장해 왔다. 경쟁력이 지배권 방어가 아니라 기술과 시장에서 나온다.실리콘밸리에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도전할 수 있는 벤처캐피털(VC)과 인큐베이터(창업지원기관), 기술 네트워크가 촘촘하게 형성돼 있다. 기업이 성장한 뒤에도 핵심 경쟁력은 경영권 방어가 아니라 혁신이다. 장기적인 기술 개발과 시장 확대 전략이 기업가치의 중심축을 이룬다. 창업자와 투자자가 기술과 시장 가능성을 중심으로 협력하는 생태계가 혁신을 이끄는 힘이다.하지만 국내 혁신기업의 현실은 다르다. 제약·바이오 기업이 대표적이다. 창업자 간 갈등이나 경영 승계 과정의 가족 분쟁, 대주주 간 이해 충돌, 소액주주와 경영진 사이의 대립 등 다양한 형태의 경영권 분쟁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구조적 이유도 있다. 대기업은 계열사 지분이나 순환출자 등을 통해 오너 일가가 비교적 안정적인 지배력을 유지한다. 반면 중견·중소 혁신기업은 창업자 개인 지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경영권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기업 성장 과정에서 외부 투자를 반복적으로 유치해야 하는 구조 역시 지배력 약화를 부르는 요인으로 작용한다.제약·바이오 산업은 더 취약하다. 신약 개발에는 통상 10년 이상이 걸리고 막대한 R&D(연구개발) 자금이 투입된다. 임상과 기술개발을 이어가기 위해 여러차례 외부 자금을 수혈 받아 창업자 지분이 희석되는 경우가 많다. 최대주주 지분율이 10~30% 수준에 머무는 기업도 적지 않다. 지배력이 약해질수록 경영권 분쟁 위험은 커질 수밖에 없다.이달 주주총회를 앞두고 대표 등 사내이사 선임이나 정관 변경 등을 둘러싼 의견 충돌이 잦아지는 것도 같은 이유다. 특히 중견·중소기업은 자금력이 취약한 데다 최대주주의 상속세·증여세 부담으로 지분 매각이 이어지면서 지배구조가 더 약해지는 경우도 많다.이런 경영권 분쟁은 단순한 지분 다툼에 그치지 않는다. 갈길 바쁜 혁신의 속도를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제약·바이오기업 한 임원은 "잦은 경영권 불안에 창업주나 전문경영인이 제때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업 이미지 하락까지 겹쳐 주가 변동성을 키우는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기업 이미지가 흔들리면 투자자 신뢰가 약해지면서 대규모 자금 조달에도 부담이 된다. 사람이 기술로 불리는 업계 특성상 인재 이탈로 이어져 경쟁력 약화로 직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그래서 혁신기업만큼은 최소한의 경영권 안정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23년 도입된 비상장 벤처기업 복수의결권 제도도 이런 취지에서 출발했지만 현실에서는 활용이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많다.다만 제도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경영권 안정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방패일 뿐이다. 기업 스스로 시장의 신뢰를 쌓는 노력도 필요하다.이사회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화해 경영진을 견제하거나 소액주주와 설명회 정례화, 전담창구 마련 등 소통 방안이 거론된다. 혁신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데서 시작된다. 누구든 피땀 흘려 만든 기업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그 험난한 창업에 나설수 있을까.AI(인공지능) 패권 경쟁 시대다. 이재명 정부가 'AI 3대 강국 도약'과 '창업중심 사회'를 국정과제로 내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적어도 법과 원칙을 지키는 혁신기업은 기술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 그것이 혁신을 키우는 가장 현실적인 출발점이다.
[시대데스크] 반도체 슈퍼사이클 덮친 삼성전자 파업 리스크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글로벌 공급망을 흔들고 AI 반도체 패권을 둘러싼 기업들의 각축전이 치열하다. 대내외적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삼성전자마저 내부 암초에 부딪혔다. 조합원 약 8만 9000명을 거느린 삼성전자 노동조합이 쟁의 행위 투표를 거쳐 오는 5월 21일 총파업을 예고하고 나섰다. 조합원 상당수가 반도체 생산 핵심 인력으로 알려져 국가 경제에 미칠 파장이 우려된다.대한민국 경제를 견인하는 삼성전자의 경영 환경은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밖으로는 중동 전쟁 장기화 조짐으로 경제 불확실성이 커졌고 안으로는 상법 개정과 노란봉투법(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시행 등 경영 활동을 위축시킬 변수가 산적해 있다.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 역시 하루가 다르게 치열해지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생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복합 위기 속에서 1인당 평균 연봉이 1억 5000만 원을 넘는 삼성전자 노조의 파업 예고는 씁쓸함과 우려를 동시에 안겨준다.노조는 '성과급 상한 폐지'를 내걸며 파업에 불참하는 동료는 향후 구조조정 시 우선 해고나 강제 전보 대상이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노동자의 권익 보호라는 본질을 벗어나 동료를 볼모로 삼는 부당행위를 서슴지 않은 것이다. 사상 최악의 적자를 기록했던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은 AI 및 데이터센터 투자 급증으로 다시 호황기를 맞았다. 내년까지도 반도체 수요가 공급을 앞설 것으로 전망되며 회사 실적과 전망도 한층 밝아졌다. 경쟁사의 파격적인 성과급 지급에 노조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겠지만 동료를 방패 삼아 투쟁에 나서는 방식은 누구도 납득하기 어렵다.삼성전자 노조의 출범은 한국 노동사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020년 이재용 회장이 수십 년간 고수해 온 '무노조 경영' 원칙을 폐기하면서 여러 노조가 출범했다. 회사의 일방적인 의사결정을 견제하고 근로 환경을 개선하는 소통 창구가 마련됐고 수평적 기업 문화를 조성하는 긍정적인 변화도 끌어냈다. 최근 노조의 행보는 과거의 이 같은 모습을 무색하게 만든다. 미래를 준비해야 할 상황과 글로벌 경쟁을 도외시한 채 눈앞의 이익과 무리한 보상만 요구하는 것은 위화감을 조성한다. 노동자의 연대를 외치면서 다른 의견을 묵살하는 태도는 참담함마저 느끼게 한다. 성과급은 회사가 이익을 창출했을 때 주어지는 보상이다. 현재의 성과급이 적다고 주장할 수는 있으나 글로벌 한파 속에서 생존을 다투는 시점에 동료를 위협하며 상한 폐지를 외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과거 국내 조선업계도 모처럼 수주 호황기인 '슈퍼 사이클'에 진입했으나 노조의 연쇄 파업으로 공정이 지연되고 막대한 지체보상금 우려와 신뢰도 하락이라는 뼈아픈 타격을 입은 바 있다. 삼성전자 노조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사측과 '상생'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무리한 투쟁과 이기주의를 고집한다면 결국 조합원 개개인의 불이익으로 돌아올 것이다. 파업으로 제품 납기가 지연되고 신뢰를 잃으면 기업 경쟁력은 추락한다. 어렵게 찾아온 반도체 슈퍼사이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 기업의 존립 없이 노조도 존재할 수 없다.
[시대데스크]칼, 글, 그리고 규제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 편에는 소를 잡는 전설적인 백정인 포정(庖丁)의 얘기가 나온다. 포정의 칼놀림은 신기에 가까웠다. 뼈와 살이 맞닿는 미세한 틈새와 고기의 결을 정확히 파악하고 무리한 힘을 들이지 않고도 깔끔하게 뼈와 살을 분리해 냈다. 반면 어설픈 백정은 결을 무시한 채 억지로 뼈를 내리친다. 사방에 피와 살점이 튀는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칼날은 금세 무뎌진다.기자들이 매일 업으로 삼는 글도 그렇다. 정교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글은 때로 날선 칼보다 더 깊고 쓰라린 상처를 남긴다.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제도의 맹점을 찌르는 글을 쓸 때 철저히 팩트를 체크하고 펜 끝을 조심하고 또 벼려야 한다. 칼놀림만큼이나 글도 깔끔해야 한다.하물며 '규제'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법령에 들어가는 단어 하나, 조사 하나에 많은 기업의 성쇠가 갈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밥줄이 좌우된다.최근 금융당국이 쥐고 있는 규제의 칼날은 '생산적 금융'을 향해 있다. 부동산 등 자산의 가치가 무한대로 자가 증식하며 거품을 만드는 기형적인 구조를 바꾸겠다는 취지다. 그 막대한 자금줄의 방향을 실질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혁신 기업과 생산적인 곳으로 돌리겠다는 큰 방향성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수십 년간 고착화된 낡은 자금 흐름을 바꾸는 것은 우리 경제가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문제는 그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는 과정과 디테일이다. 지금 시장이 느끼는 당국의 규제는 뼈와 살의 결을 살피는 포정의 예리한 칼이 아니라, 굵은 뼈를 뭉툭하게 내려치는 날이 무딘 도끼에 가깝다는 아우성이 시장 안팎에서 터져나온다.가계부채 억제와 건전성 관리라는 큰 뼈를 자르는 데 집중하느라, 그 안을 촘촘히 흐르는 핏줄이나 살이 잘리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시장은 이미 출렁이고 있다. 1금융권의 대출 문턱을 단숨에 높이자, 당장 자금이 마른 사람들은 2금융권으로 내몰렸다는 통계가 있다. 투기적 임대사업자나 다주택자를 옥죄고자 한 규제가 1주택자나 무주택자에게까지 타격을 입힐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포정처럼 피를 튀기지 않고 완벽한 실력을 발휘하려면, 칼을 쥔 당국이 지금보다 훨씬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나쁜 금융 관행을 혁파하고 거대한 물줄기를 바꾸는 대업은 흔들림 없이 계속돼야 한다. 그러나 그 거친 물살에 쓸려나가는 이들의 희생은 최소화해야 한다.지금 정부는 이제 출범한지 1년이 채 안 됐다. 65%에 이르는, 취임 후 최고치 지지율이라는 든든한 동력도 있다. 쫓기듯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뭉툭한 도끼를 성급하게 휘두를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낡고 나쁜 금융을 오래 존치시키자는 얘기가 아니다. 규제라는 메스를 들이댈 때,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보다 정교하게 정책을 설계하자는 것이다. 시장의 연착륙은 당국의 엄포가 아니라 시장 참여자들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는 디테일에서 완성된다.심지어 그 고수인 포정마저도 칼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다. 장자 양생주 편 포정 대목의 마지막에 나온 포정의 얘기다."매번 근육과 뼈가 뒤엉켜 있는 곳에 이르면 저는 그 어려움을 알고 바짝 긴장해서 시선은 고정되고 행동은 느려지며 칼의 움직임은 매우 미세해집니다. 소 잡는 일이 끝나면 저는 만족해하며 칼을 닦아 보관합니다."
[시대데스크] "AI 로봇 덕분에 연봉 오른다, OO년 뒤에"
#1. 정우성과 이정재, 브래드 피트와 조지 클루니, 맷 데이먼과 벤 애플렉, 워런 버핏과 찰스 멍거, 괴테와 실러, 가우디와 구엘…남성 간의 깊은 우정, 브로맨스를 대표하는 커플들이다. 그러나 세계 역사를 바꾼 브로맨스를 딱 하나 꼽으라고 할 때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능가할 조합이 과연 있을까.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 가운데 하나다. 1917년 10월 이 사상에 뿌리를 둔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세계사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소련 등 공산국가의 출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냉전을 거쳐 우크라이나 전쟁과 북중러 연대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우린 엥겔스의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2. 엥겔스는 독일의 부유한 면직 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른바 '금수저'였지만 영국 맨체스터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한 뒤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된다. 요즘 한국으로 치면 '강남 좌파'쯤 되겠다.'소울메이트'인 마르크스를 만난 뒤인 1845년 엥겔스는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라는 책을 펴낸다. 산업혁명에 따른 기술 발전과 생산력 향상으로 영국 자본가들이 엄청난 부를 쌓고 있는 동안 노동자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는 '불균형' 현상을 날카롭게 기록한 저서다. 훗날 경제사학자인 로버트 알렌 뉴욕대 교수는 엥겔스가 기록한 1790~1840년 영국 산업계의 상황을 실제 데이터로 검증했다. 그 결과, 엥겔스의 주장대로 당시 영국에선 생산성의 비약적인 성장에도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제자리에 머물렀음이 확인됐다. 알렌 교수는 생산성 향상과 실질임금 상승 사이엔 약 50년의 시차가 있다며 이를 '엥겔스의 휴지기'라고 이름 붙였다. 기술 혁신이 결국은 인류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긴 하지만,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진 '죽음의 계곡'을 지나야 한다는 얘기다. 앞으로 AI(인공지능)와 로봇으로 인해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높아질 때 일반 근로자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시사점을 던져주는 대목이다. #3. "변화는 두 가지 방식으로 오지.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Gradually, then suddenly)." (어니스트 헤밍웨이,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대개 변화는 생각보다 늦게 시작되지만, 일단 시작되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된다. 빌 게이츠는 "우리는 보통 앞으로 2년 뒤에 일어날 변화는 과대평가하고, 10년 뒤에 일어날 변화는 과소평가한다"고 했다. AI는 이미 빠른 속도로 세상을 바꾸고 있다. 다음은 로봇 차례다. 일론 머스크는 AI와 로봇이 몰고올 변화를 '초음속 쓰나미'(Supersonic Tsunami)라고 표현했다.IMF(국제통화기금)는 선진국 일자리의 약 60%가 AI의 영향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 가운데 절반은 생산성 향상의 혜택을 보는 반면 나머지 절반은 AI로 대체돼 임금 감소나 해고를 겪을 것이란 분석이다. 제조업 비중이 높고 고학력 사무직이 많은 한국은 특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4. 낙관론도 있다. 생산성 혁명으로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길 것이란 기대다. 19세기 영국에선 방직 기계에 일자리를 뺏길 것이란 공포에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지만 결과적으로 일자리는 오히려 늘어났다. 기계 덕분에 옷감이 싸지면서 의류 수요가 폭발한 때문이다. 그러나 기술 혁신이 일자리 증가를 거쳐 실질임금 상승으로 이어지기까진 시간이 걸린다. 19세기 영국 노동자들은 50년 간의 엄혹한 '엥겔스의 휴지기'를 견뎌내야 했다. AI 로봇의 쓰나미 앞에 선 21세기 인류는 과연 다를까.영국에서 '엥겔스의 휴지기'는 저절로 끝난 게 아니었다. 19세기 중반 노동법이 제정되고 노동조합 활동이 본격화된 결과였다. 인류 스스로 정치적 토론과 투쟁을 통해 해법을 찾아낸 셈이다.일자리가 사라지고 비자발적으로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가 된 인류는 무슨 돈으로 먹고 살아야 할까. '보편적 기본소득'(UBI)을 준다면 어떻게 재원을 마련해야 할까. 로봇세를 신설하거나 AI가 활용하는 우리의 데이터에 대해 사용료를 받아야 할까.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사회적 숙의를 시작할 때다. 헤밍웨이가 말했듯 변화는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찾아온다.
[데스크칼럼] 국산 우유 위기, 자조금이 바뀌어야 한다
수입 유제품이 무관세를 앞세워 국내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이에 대응해야 할 우유자조금관리위원회(우유자조금)는 여전히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변화한 시장의 속도를 따라잡기는커녕 낙농가의 불안만 더 키우는 형국이다.FTA(자유무역협정) 일정에 따라 미국산 유제품은 올해 1월1일부터, EU산은 7월1일부터 관세가 0%가 된다. 국내 멸균우유 수입의 90%를 차지하는 폴란드 등 EU산 제품은 가격 경쟁력이 더 높아질 것이 명확하다. 시장 충격은 불가피하다.국산 우유는 비싸다는 인식이 고착돼 있다. 우유는 빵·커피·가공식품 등 식생활 전반의 원가에 영향을 미치는 기초 재료다. 먹거리 인플레이션 때마다 가격 인상 주범으로 지목받는 이유다. 부정적 인식이 쌓인 상태에서 소비 변화까지 더해졌지만 우유자조금의 홍보 전략은 여전히 백색 시유(흰 우유) 중심에 머무르고 있다.최근 3년 동안 우유자조금 지출의 약 35~36%를 차지한 소비홍보 예산은 대부분 흰 우유의 신선함과 효능을 알리는 데 쓰였다. 실적 역시 국산 우유의 우수성 주입에 초점이 맞춰졌다. 국민은 우유를 흰 우유만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가공유·치즈·버터·크림·분유 등 다양한 유제품이 식탁의 중심이 됐다. 외식·카페·디저트 산업은 사실상 유제품 기반으로 돌아간다. 원료 홍보만 반복해서는 국산 원유의 경쟁력을 높이기 어렵다.국내 유가공업체들도 원가 부담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국산 원유 기반의 프리미엄 제품군을 키우고 그 가치를 소비자가 체감하도록 만드는 전략이 필요하다. 무관세가 적용된 수입 유제품이 대거 들어오는 상황에서 백색 시유 홍보에 머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해외수출 전략은 답보 상태다. 우유자조금 운영 예산에는 정부 보조금이 포함되는데 이 중 20억원이 수출 지원 명목이다. 매년 40억원 수준의 예산이 해외수출에 쓰이지만 내용은 박람회 참가·마케팅 지원 등 형식적 사업에 머문다. 전시행정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해외 방문객에게 익숙한 '빙그레 바나나맛우유'가 정작 현지 시장에서는 존재감을 보이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냉장유통 한계를 넘어설 실온유통 기술 확보가 관건인데 이 부분에서 자조금의 R&D(연구개발)·기술지원 기능은 사실상 비어 있다. 만약 자조금이 기술 투자까지 뒷받침했다면 K밀크의 글로벌 확장은 지금보다 훨씬 빨랐을 것이다.소비촉진 대상도 재검토가 필요하다. 초고령사회에 진입했지만 우유 소비 확대 정책의 중심은 여전히 어린이다. 우유자조금의 2025년 '찾아가는 우유교실'에는 어린이집 121곳, 1만5093명이 참여한 반면 노인복지관 프로그램은 14곳, 1492명에 그쳤다. 단백질·칼슘이 절실한 고령층에 대한 전략은 여전히 빈약하다.머지않아 우유도 콩처럼 국산과 수입의 가격 격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우유 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농가 생존과 국민 식품안보가 걸린 문제다.우유자조금 전략이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거버넌스가 10년 가까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업은 급변하는데 의사결정을 책임지는 사람은 그대로이니 전략도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이 나온다.무관세 시대의 국산 우유 경쟁력은 백색 시유 홍보에서 나오지 않는다. 제품 중심의 고부가 전략, 실효성 있는 수출 전략, R&D 기반 경쟁력, 그리고 고령사회에 맞춘 소비 활성화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시장이 아니라 자조금의 방식이다.
[데스크 칼럼] 똑똑한 소액주주의 시대
투자와 투기의 차이는 무엇일까. 워런 버핏의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이 쓴 현명한 투자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투자는 철저한 분석을 통해 원금의 안전과 충분한 수익을 약속받는 행위다. 이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투기다"자본시장 종주국 미국과 달리 한국에선 투자와 투기의 경계가 여전히 모호하다. 특히 최근 확산하는 행동주의 투자 역시 그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내달 주주총회 시즌을 앞두고 이사 자격 제한, 보수 삭감, 감사위원 분리선출 등 다양한 주주제안이 쏟아진다. 기업의 '주치의'를 자처하는 소액주주 활동이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상법 개정으로 주주권이 강화되면서 이런 흐름에 더욱 힘이 실렸다.기업들도 선제 대응에 나섰다. 이사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는 등 개정 상법 내용을 정관에 반영하려는 움직임이 잇따른다. 행동주의의 경영 개입을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경영 투명성을 높여 공격 빌미를 차단하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 모두 전운이 감돈다.문제는 행동주의 이슈가 곧바로 단기 주가 재료로 소비된다는 점이다. 타깃이 된 상장사는 관련 소식만으로 급등락을 반복하며 변동성이 확대된다. 표대결에서 주주제안이 통과되거나 무산돼 불확실성이 해소되면 주가는 다시 급락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이쯤 되면 투자보다 테마주 장세에 가깝다. "행동주의가 찍으면 주가가 움직인다"는 말까지 나온다. 장기 성장성보다 단기 재료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장 구조가 고착화되는 셈이다. 단기 이익에 급급한 특정 세력이 주주권을 명분으로 변동성을 키운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전문가들은 소액주주 이해관계가 항상 전체 주주의 이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단기 차익만 쫓는 경영 개입은 핵심 인력 이탈과 전략 혼선으로 이어져 오히려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배척할 수는 없다. 기업에 방만 경영을 견제하고 제한된 자본(돈)의 운용 효율성을 높이는 행동주의 순기능도 분명하다.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중요한 것은 투기와 구분하는 기준이다.결국 투자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전문가들은 단기 매매를 경계하고 기업 본질가치에 근거한 장기투자 전략을 강조한다. 태생적 변동성은 장기 보유를 통해 어느 정도 흡수할 수 있다는 논리다.가치투자의 창시자인 그레이엄은 "주식은 내가 왜 이 가격에 사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투자는 근거가 있어 버틸 수 있지만 투기는 기대감에 편승해 단기 수익에 의존한다. 더욱 흥미로운 건 그레이엄 역시 적극적인 주주 활동가였다는 점이다.그는 경영진이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필요한 곳에 돈을 쓰지 말고 재투자, 자사주 매입, 배당 등을 통해 주주가치를 실현하라는 주문이었다. 단기 차익이 아니라 장기 가치에 초점을 맞춘 책임 있는 행동주의다.주식은 자본주의의 꽃이다. 주주환원과 주주권 행사는 당연한 권리다. 그러나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세계 최대 자본시장인 미국도 100년이 넘는 시행착오 끝에 지금의 제도를 만들었다. 행동주의 시대에 필요한 건 합리적 의결권과 분별 있는 투자다. 묻지마 투자나 군중 심리에 휩쓸린 표대결이 아니라 기업의 장기 경쟁력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투자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진짜 똑똑한 소액주주의 시대가 열린다.
[데스크 칼럼] '눈길' 막으려다 '숨길' 막는다
'염화칼슘'은 수분과 만나 열을 내고 물의 어는점을 낮춰 눈을 녹이는 '제설제'다. 발열 작용을 통해 결빙된 표면을 풀어주게 되고, 이 과정에서 생긴 염수는 다시 얼어붙는 것을 방지한다. 하얀 알갱이를 도로에 뿌리는 것만으로도 빠르고 강력한 효과를 볼 수 있어서 겨울철 필수품처럼 여겨진다.하지만 그 효과만큼 부작용도 크다. 겨울철 '안전'이라는 측면에서 염화칼슘은 분명 유용한 수단이지만 사용이 과도해질수록 해마다 반복되는 도로의 포트홀과 균열을 피할 수 없다. 눈이 다 녹은 뒤엔 오히려 미끄러짐을 키우는 요인이 되고 남은 가루는 공기 중에 떠다니며 사람들의 호흡기 안전을 위협한다. 당장의 눈길 사고를 막기 위해 뿌린 염화칼슘이 장기적으로 더 큰 유지·보수 비용으로 되돌아오는 셈이다.최근 가상자산을 둘러싼 규제 논의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고 있다. 관련업계에서 사고와 피해가 발생할 때마다 '핀셋 규제'라는 모호한 대책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특정 부분에 집중하며 문제 재발을 막자는 취지지만 실제 현장에서 느끼는 온도차는 생각보다 크다.가상자산거래소(ATS)의 대주주 지분 제한이 대표적이다. 거래소가 공공 성격을 지닌 만큼 대주주 영향력이 시세 조종이나 투자자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는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그 규제 방식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지분을 많이 보유한 것 자체가 아니라 그 지분을 이용해 어떤 행위를 했느냐 핵심이다. 그런데도 규제는 행위보다 소유 구조를 먼저 제한한다.최근 발생한 빗썸의 이른바 '유령코인' 사태로 불리는 비트코인 오지급 사고는 이런 논쟁에 불을 지폈다. 해당 사고 자체는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중대한 문제다. 다만 이 사건은 '규제를 얼마나 더 강화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현재의 규제가 사고 원인을 정확히 겨냥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을 남긴 점이 중요하다.가상자산 업계는 대주주 지분 제한을 두고 위헌을 주장한다. 기업인들은 높은 실패 확률을 감수하고 자본과 시간을 투입해 회사를 키우며 기업 가치와 지분 가치로 돌아온 보상을 받는다. 정책이 성장의 상한선을 정해버리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줄어든다. 혁신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보상 구조'가 흔들리면 그 기반을 굳이 국내에 둘 이유가 없어진다. 게다가 형평성 문제도 거론된다. 은행, 증권, 보험 등 전통 금융산업에서도 대주주 영향력은 결코 적지 않은 데다 플랫폼, 바이오, 게임 등의 업권도 초기 성장 과정에서 창업자 지분 집중은 흔한 일이었다.최근 가상자산업계를 향한 규제는 단기적으로는 안도감을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산업 기반을 약화하고 시장을 더 관리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밀어낼 가능성도 존재한다. 염화칼슘이 도로를 망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미세한 가루가 되어 사람들의 호흡기까지 위협하듯 과도한 규제는 산업의 표면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생태계까지 손상시킬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규제는 그 강도보다 설계 구조가 중요한 만큼 행위 규제를 명확히 하고 사후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시장 성숙도와 기업 규모에 따라 단계적으로 의무를 부과하고 규제가 실제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점검하는 사후 평가 시스템도 필요하다. 염화칼슘 사용량을 관리하고 대체 수단을 고민하듯 규제 역시 기술적으로 다뤄져야 한다.신산업은 낮은 위험성보다 예측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 눈 예보에 무턱대고 염화칼슘을 뿌려댈 게 아니라 어디에, 언제, 왜 뿌릴 것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처럼 가상자산 규제도 같은 고민에서 출발해야 할 때다. 규제는 미끄럼으로 인한 사고를 막기 위한 장치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도입하는 규제가 기업 혁신의 숨통까지 조여버리는 역설이 발생해선 안 된다.
[데스크 칼럼] 10조 상조시장, 성장에 걸맞는 소비자보호가 필요하다
"상조 소비자들을 제대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할부거래에 관한 법률(할부거래법)' 개정안이 하루빨리 국회를 통과해야 합니다." 최근 기자와 만난 상조업계 고위 관계자는 "한국 상조업계가 이제 소비자에게도 신뢰받는 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완성도 높은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며 개정안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996년 대형 상조업체에 입사한 이후 30년 동안 영업·장례사업·경영기획 등을 두루 거쳤다는 그는 "상조업 선진국으로 불리는 일본 상조업체 임원들이나 한국 정부 관계자들을 요즘 만나면 한국 상조 시장 규모나 서비스 경쟁력은 다 인정하는 분위기"라며 "이제는 소비자 보호에 좀 더 공들여야 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2015년 3조5200억원이었던 상조 선수금은 2022년 7조4761억원으로 2.1배 증가한 데 이어 2025년엔 10조1878억원으로 3배 가까이 커졌다. 업계에선 현 추세대로 갈 경우 올해 상조시장은 11조원 규모까지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선수금은 소비자가 장례·웨딩 등 미래 서비스를 위해 미리 납입 하는 돈이다. 통상 선수금은 상조업체의 점유율과 성장성·재무건전성을 가늠하는 지표로 활용한다. 일반적으로 선수금은 최소 10년(120회)에 걸쳐 장기간 나눠서 낸다. 이 때문에 상조업계에서 선수금 관리는 소비자 신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소비자는 상조업체를 믿고 돈을 맡기는데 선수금 관리가 제대로 안된다면 상조업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게 된다"라며 "상조시장이 커지면서 선수금을 지킬수 있는 더 확실한 법적 안전장치가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상조업체는 '할부거래에 관한 법률'에 따라 '선불식 할부거래업자'로 분류된다. 선불식 할부거래업체는 소비자에게 재화나 용역을 제공하기 전 그 대금을 일정 기간 나눠서 받는 업체를 의미한다. 문제는 상조업체가 관리하는 선수금에 대한 법적 안전장치가 약하다는 점이다. 현행 할부거래법에 따라 상조업체들은 소비자로부터 받은 선수금의 50%를 은행이나 공제조합 등에 예치하는 것 외에 자금 운용과 관련한 별다른 규제를 받지 않고 있다. 상조업체가 부도나거나 폐업하면 소비자들이 낸 선수금 중 50%가 사라질 수 있다. 이에 정부기관 한 관계자는 "현행 법만으로는 소비자 피해를 막는데 한계가 있다"고 전했다. 정치권의 소비자보호 법안 마련도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할부거래법 개정안은 지난해 10월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김포시을)이 대표 발의 한지 4개월이 지났지만 처리법안 우선순위에서 계속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이번 개정안은 상조 소비자 보호를 위한 상조업체 선수금 관리를 강화하는 게 핵심이다. 오너 등 지배주주가 선수금에 대해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없게 대여 한도를 자본금의 50%로 제한하고 업체 임원이 소비자 손해에 연대 책임을 갖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일각에선 개정안이 규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반발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업계 관계자는 "당근을 같이 주는 게 아닌 채찍만 있어 상조업체들 입장에서는 사업을 펼치기 쉽지 않은 상황이 펼쳐질까 우려된다"고 했다. 물론 선수금 10조원 시대에 진입하며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려는 상조업체들. 이들이 개정안에 대해 부담을 갖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소비자 신뢰를 잃은 상조는 '모래 위의 성'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아야 한다. 2015년부터 10년 동안 단 한해도 꺾이지 않고 성장해온 상조시장이 한 순간에 무너지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이젠 정부와 국회, 상조업계가 힘을 모아 외형 성장보다는 소비자보호를 위한 내실 성장을 위해 좀 더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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